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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이었다. 경기 과천시의 한 대형 음식점에서 기획재정부 고위 공무원들과 출입기자들이 송년회를 열었다. 윤증현 당시 장관이 단상에 섰다. 양복 윗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인사말 자료를 꺼내다가 “아이고 마, 오늘은 그냥 생으로 할란다”라고 말하며 마이크를 잡았다. “출입기자 여러분, 지난 1년간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한국 경제가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빠르게 회복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애정 어린 관심과 조언 덕분입니다. 진심입니다.” 정면 스크린에는 신문기사의 제목들이 나열돼 있었다. 2009년에는 ‘위기’ ‘사상 최악’ ‘도산’ 등 단어들로 도배됐지만 2010년엔 ‘회복’ ‘성장’ ‘도약’이란 단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실제 2010년 한국 경제성장률은 6.5%를 기록하며 세계가 깜짝 놀랐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는 ‘교과서에 나올 법한 회복(Textbook recovery)’이라고 평가했다. 송년회 이후 정확히 5년이 흐른 지난해 말, 서울 여의도 윤경제연구소에서 윤 전 장관을 다시 만났다. 조선, 해운, 철강, 건설 등 한국 성장을 이끈 주력업종들이 추락하고 있을 때였다. 기자는 “금융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제대로 하지 않아 일부 업종이 또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는 평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윤 전 장관은 “일리가 있다. 내가 기재부 장관 할 때 경기 회복을 우선하느라 구조조정을 소홀히 했던 점 인정한다. 당시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없었다. 내가 퇴임한 이후에라도 정부가 강력하게 구조조정을 했어야 했는데….” 윤 전 장관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한국 경제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던 2009년 2월에 기재부 장관으로 취임한 뒤 2011년 6월에 떠났다.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미뤄뒀던 산업 구조조정이 최근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유일호 기재부 장관은 기존 공공 노동 금융 교육 등 4대 개혁에 산업개혁을 더한 ‘4+1개혁안’을 밝혔다. 지금까지 구조조정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해 온 야권에서도 ‘적극적 구조조정’을 외치고 있다. 현재 위기는 1997년 외환위기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외환위기 때 대기업은 무한정 은행 빚을 내며 차입경영을 펼쳤다. 부채에 의한 과잉설비가 결국 위기를 촉발시켰다. 지금도 조선 해운 철강 석유화학 등 일부 업종에서 공급과잉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위기의 범위가 한국만이 아니라는 점도 공통적이다. 다만 외환위기 때 한보그룹을 시작으로 기업들이 ‘줄 도산’을 맞았고 이 기업들에 돈을 빌려줬던 은행들도 위기에 내몰렸지만, 현재 그 수준은 아니다. 구조조정을 통해 최악의 상황을 막을 기회가 아직 있는 셈이다. 문제는 구조조정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이다. 기자는 특히 두 가지 요건이 성공적 구조조정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본다. 첫째, 고통 감내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다. 구조조정은 많은 이해관계자에게 고통을 준다. 상당수 국민이 피와 땀을 흘려야 한다. 그렇기에 지도자는 장밋빛 전망을 이야기할 게 아니라 곧 뒤따를 고통을 솔직하게 밝히고 공감대를 이끌어내야 한다. 1940년 5월 13일 영국 보수당 의원 윈스턴 처칠은 의회 연설에 나섰다. 당시 히틀러의 나치 독일군이 파죽지세로 프랑스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고, 다음 타깃은 영국이 분명했다. “저는 국민들에게 해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국민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피와 땀과 그리고 눈물입니다.” 지금 한국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도 그런 솔직함이다. 둘째, 국회의 협력이다. 기업이 자율로 구조조정을 하든,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든 국회가 발목을 잡으면 구조조정은 진행될 수 없다. 윤 전 장관은 “한국경제가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조속히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국회 덕이 매우 컸다. 경기 활성화 대책들에 대해 국회가 초당적으로 협력을 해 줬다. 지금도 협조해 준 국회의원들에게 감사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정부와 정치권이 외치고 있는 구조조정이 일회성으로 끝날지, 아니면 한국경제의 체질을 바꿀지 조만간 판가름 날 것이다. 이번에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다음 정권으로 짐이 넘어가고, 국민이 가장 큰 피해를 본다.박형준 산업부 차장 lovesong@donga.com}

정보기술(IT) 세계적 기업인 트위터의 미국 본사에서 근무하는 김창옥 씨(31), 샌프란시스코에서 세무 전문가로 활약 중인 이종덕 씨(37), 실리콘밸리에 인접한 대표 관광지 ‘하프문베이’에 위치한 리츠칼턴 호텔에서 인턴을 하는 양아론 씨(26). 동아일보가 지난달 말에 만난 이 3명은 공통점이 있다. 스펙이 화려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영어마저 지독히 못했지만 미국 실리콘밸리의 유명한 기업에 취업하거나 인턴이 됐다. 부산 동아대를 졸업한 김 씨가 해외 유학을 준비했을 때 토익 점수는 990점 만점에 315점에 불과했다. 경주대 외식조리학과를 다니는 양 씨는 구체적인 토익 점수를 밝히지 않았지만 “첫 성적이 내 신발 사이즈와 똑같았다”고 했다. 1998년 한국체대 체육학과에 입학했다가 1년 만에 그만두고 미국으로 건너간 이 씨는 당시 영어를 거의 못해 ‘과묵한 청년’으로 불렸다. 평범해 보이는 그들이 어떻게 미국 명문대 출신이 즐비한 실리콘밸리 입성에 성공했을까. 출신 대학이나 스펙을 따지기보다 개인의 능력과 의지를 샅샅이 살피는 것이 실리콘밸리의 채용 방식이다. 필답고사에만 능숙한 우등생보다 오히려 학교 성적은 좀 떨어져도 끼와 열정을 가진 학생이 종종 실리콘밸리에서 취업에 성공하는 이유다. 그래서 오늘도 세계 젊은이들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실리콘밸리행 비행기를 탄다. “한국에선 엔지니어가 취업하기 위해 기를 씁니다. 하지만 미국 실리콘밸리에선 회사가 엔지니어를 찾으려고 기를 씁니다.” 지난달 2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마켓가(街)에 있는 세계적 정보기술(IT) 기업인 트위터 본사. 반팔과 반바지 차림에 노트북PC를 든 김창옥 씨(31)는 최근 실리콘밸리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2012년 트위터에 엔지니어로 입사한 후 지금까지 헤드헌터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이메일을 받았다. 그들은 ‘언제 퇴사할 것인가’ 물으며 더 좋은 기업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실제 트위터를 떠나는 동료도 많다. 남은 이들은 박수 치며 진심으로 축하해 준단다. 세계적인 불황이 이어지고 있지만 미국 실리콘밸리는 구인난이다. 혁신 기업이 지속적으로 탄생하고 투자금이 몰리면서 실리콘밸리에는 사람을 구하려는 기업들의 수요가 끊이질 않는다. 이 지역의 실업률은 4% 내외로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다. 특히 스템(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전공자들은 시장에 나오자마자 높은 몸값에 스카우트된다. 최근 IT 전공자는 물론이고 금융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인재가 각광받으면서 한국 청년들의 도전도 활발해지고 있다. 미국을 앞마당으로 여기는 겁 없는 젊은이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주의 관광 명소인 ‘하프문베이’. 태평양과 접한 절벽 바로 옆에 리츠칼턴 호텔이 들어서 있다. 누구든 한눈에 ‘최고급 호텔’임을 알 수 있다. 지난달 25일 그 호텔에서 동양인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기자와 인터뷰를 하러 나온 양아론 씨(26)였다. 주위엔 온통 백인들뿐이어서 양 씨는 쉽게 눈에 띄었다. 그는 지난해 7월부터 1년 동안 이 호텔 주방에서 인턴을 하고 있다. “고교 때 양식과 일식 조리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대학도 외식조리학과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양식을 만들면서 서양에 한 번도 안 가봐도 되나 하는 생각요.”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양 씨는 ‘서양을 경험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첫 토익 점수는 200점대(만점 990점). 주위 친구들은 “헛고생 하지 말라”고 말렸다. 하지만 목표가 뚜렷하니 영어 성적이 꾸준히 올랐다. 지난해 리츠칼턴의 셰프가 인턴을 구하러 한국에 왔을 때 양 씨는 기회를 거머쥘 수 있었다. 권보경 씨(24·여)도 실리콘밸리 내 중심 도시인 새너제이에 있는 시스코시스템스에서 지난해 7월부터 인턴을 하고 있다. 8개월에 걸쳐 서류 제출과 두 차례 전화 인터뷰를 거쳐 인턴 기회를 잡았다. 회사는 비자 발급, 항공권 및 숙소 제공까지 해줬다. 권 씨는 “실리콘밸리의 IT 기업에서 인턴을 하는 기회를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도전정신’인 것 같다”며 “높은 자질을 갖추고도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거나 너무 겸손하면 기회를 잡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인턴을 마치면 시스코시스템스에 정직원으로 지원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언어연수와 여행을 위해 해외를 자주 오가는 요즘 청년들은 기성세대와 달리 해외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도 적극적이다. 이 같은 ‘용감성’ 유전자(DNA)가 한국 청년들의 해외 진출을 활성화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인턴’ 경험이 취업의 핵심 무기 트위터에 입사한 지 약 3년 반이 지난 김창옥 씨는 최근 사원을 뽑기 위해 수차례 면접을 봤다. 그는 “한국인 지원자들은 이력서 가장 위에 출신 대학부터 적는다. 하지만 미국 기업은 지원자가 어떤 대학을 졸업했는지보다 필요한 업무능력을 얼마만큼 갖췄는지를 훨씬 중요하게 본다. 그 때문에 미국 지원자들은 출신 대학을 이력서 가장 아래에 적거나 아예 안 적는다”고 말했다. ‘출신 대학이 그 사람의 업무능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 씨는 “토론 면접으로 업무능력을 파악할 수 있다”고 답했다. 예를 들면 ‘동굴에 고드름이 맺혔는데 그 고드름을 모두 다 감쌀 수 있도록 상자를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소프트웨어를 짤지 설명해보라’는 문제를 낸다. 지원자가 그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보면 내공이 드러난단다. 객관식 시험에 익숙한 한국인 지원자는 토론 때 만족스러운 해답을 제시하기가 힘들다. 김 씨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트위터에 입사하는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 유학을 하지 않았던 벨라루스와 슬로베니아 출신은 곧바로 채용된 경우가 있다”며 “다른 나라와 달리 유독 한국인만 미국 유학을 한 인재들이 미국 기업에 취업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실무 경험 부족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벨라루스 출신은 대학을 다니며 원격으로 트위터에서 인턴을 했다. 슬로베니아 출신은 대학 시절 트위터가 필요로 하는 기술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수십 차례나 했다. 김 씨는 “트위터가 천재를 뽑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동료를 뽑는다. 인턴 경험이 있으면 훨씬 유리하다”고 말했다. 미국 금융회사인 캐피털원에서 산업디자이너로 근무하는 김영교 씨(28)는 인턴 경험을 자신의 무기로 만든 좋은 사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아카데미 오브 아트 유니버시티’를 다니며 그는 실리콘밸리에 있는 미국 부동산 정보 회사 질로, 삼성, 캐피털원 등 3곳에서 2년 동안 인턴을 했다. 오른쪽 팔에 실리콘밸리 지도를 그려 넣고 자신이 인턴한 곳에 ‘X’ 표시를 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 결과 올해 대학 졸업과 동시에 캐피털원에 사용자경험(UX) 디자이너로 채용됐다. 김 씨는 “한국인 유학생이 미국 현지 학생보다 앞설 수 있는 것은 인턴 등의 현장 경험뿐”이라며 “실리콘밸리 기업에 취업하길 원하는 한국 청년들에게 더 많은 인턴 경험을 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 “한국 취업준비생들은 어느 정도 준비되기 전까지 인턴 지원을 안 하는 것 같다”며 “준비가 다 됐을 때는 그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배우면서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나가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미국에서도 통하는 ‘한국 스타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세무 전문가로 일하고 있는 이종덕 씨(37). 그는 캘리포니아대 중 하나인 UC데이비스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뒤 샌프란시스코의 세무법인인 로보텀에 취업했다. 하지만 2008년 미국 전문취업비자(H-1B)를 발급받지 못하면서 그는 퇴사해야만 했다. 미국 체류를 연장하기 위해 골든게이트대에서 회계학 석사 과정을 밟았고 미국 공인회계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그는 2010년 로보텀에 다시 지원했다. 회사는 기꺼이 그를 받아줬고 H-1B 비자도 받으면서 미국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 씨는 로보텀에 재취업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뜻밖에도 ‘한국적인 근무 태도’를 꼽았다. 그는 “입사 초기 밤새 근무하기도 했다. 그저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한 것인데 성실하다는 인상을 주면서 비자 문제가 있었던 나를 회사가 2년 동안이나 기다려줬다”고 말했다. 프랑스 명품 루이뷔통 모에에네시(LVMH) 그룹 계열 중에 베네핏 코스메틱스라는 화장품 기업이 있다. 본사가 위치한 곳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난달 28일 베네핏 본사에서 만난 이솔 씨(32·여)는 2011년 베네핏 한국 지사 홍보담당으로 입사했다가 지난해 8월 본사 홍보담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샌프란시스코 본사에 온 후 이 씨는 한국인의 경쟁력에 대해 새삼 놀랐다. “대형 이벤트의 경우 한국 미국 프랑스 등 여러 국가에서 동시에 행사를 합니다. 한국 지사는 행사가 끝나면 항상 보고서를 본사에 보냈어요. 그런데 제가 여기서 근무하면서 살펴보니 한국처럼 보고서를 보내는 지사가 하나도 없었어요.” 이 같은 모습을 경험한 베네핏 본사 임직원들은 한국 지사와 이 씨에 대해 ‘성실하다’ ‘꼼꼼하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한국인이라는 사실 자체도 이 씨에게 힘이 됐다. 최근 LVMH의 뷰티 담당 임원이 미국에 와 ‘올해 주목해야 할 글로벌 뷰티 동향’을 발표했는데 그가 1위로 꼽은 것이 ‘K뷰티를 주목하라’는 것이었다. 이 씨는 “그때 일제히 나를 쳐다보던 직원들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의 경쟁력이 이 씨가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만족도 높은 실리콘밸리 기업 분위기 실리콘밸리 취업자들은 전반적으로 이곳의 기업문화에 만족도가 높은 편이었다. 자유로운 창업 분위기가 기업으로까지 퍼지면서 근무 환경이 유연하다는 점을 특히 높이 평가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하는 김준식 씨(31)는 “이곳이 첫 직장이지만 정말 만족하고 있다. 특히 나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김 씨는 “5월에 새너제이에서 디자인 대회가 4일 동안 열리는데 회사가 참가비 1200달러(약 137만 원)를 대 주고 다녀오도록 했다”며 “업무와 관련된 자기 계발이 필요하다고 하면 거의 허용해 주는 편”이라고 말했다. 김영교 씨는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미국 기업의 장점으로 손꼽았다. 캐피털원은 지난해까지 5년 연속 미국 포천지가 선정하는 ‘일하기 좋은 기업 100’에 이름을 올렸다. 김 씨는 “나 같은 신입 직원도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상사에게 이야기할 수 있고 직원들이 내놓은 아이디어는 대부분 경영에 반영된다”며 “상향식 의견 수렴이 한국의 조직보다 미국이 더 잘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 회사에만 있는 특수한 제도도 있다. 자신이 아는 인재를 회사에 추천하는 ‘리퍼(refer)’ 제도다. 김 씨는 “임원급이 아니라 말단 직원들도 인재 추천을 할 수 있다”며 “회사 입장에서는 인재를 찾아내는 데 드는 시간을 줄이고 추천된 사람 역시 면접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제도”라고 설명했다. 실제 추천받은 지원자가 입사하면 회사는 추천한 직원에게 격려금을 지급하기도 한다. 베네핏의 한국 지사와 미국 본사를 모두 경험한 이솔 씨는 양측 근무환경의 뚜렷한 차이를 느꼈다. 그는 “미국 본사에선 주어진 일을 잘 해내는 게 평가 기준이어서 얼마나 오래 근무했는지를 따지지 않아 좋다”고 하면서도 “개인적인 문화가 강해 팀원이 다함께 공동 목표를 향해 가는 느낌이 별로 없다. 때로는 외롭기도 하다”고 말했다. 바뀌는 취업 트렌드 미국 실리콘밸리 지역의 취업 트렌드는 계속 바뀌어 왔다. 1939년 컴퓨터 제조업체인 HP가 이 지역에서 창업한 이래 반도체 회사 인텔(1968년), 컴퓨터 회사 애플(1976년) 등 실리콘밸리의 주력은 IT 제조업체였다. 이에 따라 한국인 취업자 역시 하드웨어 엔지니어 위주로 실리콘밸리에 진출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인터넷 붐이 일어난 이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수요가 크게 늘었다. 애플과 같은 제조업체가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방향을 튼 것도 영향을 미쳤다. 2000년부터 실리콘밸리 지역에서 근무한 강준 마그나칩 반도체 마케팅매니저는 “2000년대 초반 소위 ‘닷컴 버블’이 붕괴된 이후 오히려 소프트웨어 인력 수요가 더 늘었다”며 “관련 분야를 전공한 한국인 석사 박사라면 미국 기업에서 무조건 채용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한국인 디자인 전공자의 실리콘밸리 진출이 늘고 있다. 아이폰 등 IT 기기가 UX를 중시하면서 디자인을 사업 성패의 주요 요인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IT 기업들도 능력 있는 디자이너 채용에 사활을 걸고 있다. 실리콘밸리 디자이너들 사이에선 “스티브 잡스가 디자이너 연봉을 끌어올렸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이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지역 디자인스쿨에 유학 오는 한국인 학생도 늘어나는 추세다.새너제이·샌프란시스코=박형준 lovesong@donga.com/에머리빌=박재명 기자}

지난달 25일 오후 7시.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중심부의 개인 간 거래(P2P) 대출기업 ‘렌딩클럽’ 본사 건물로 20, 30대 한국인 청년 50여 명이 모였다. 미리 준비한 피자로 저녁을 때운 젊은이들 중 6명이 곧바로 발표에 나섰다. 주제는 대부분 미국 정보기술(IT) 기업의 사용자경험(UX) 디자인을 공유하는 내용이었다. “애플리케이션(앱)을 개발할 때 애니메이션 용량을 어떻게 줄일까요” 등 실무적인 질의가 이어진 모임의 참석자는 대부분 실리콘밸리 기업에서 근무하거나 창업에 나선 IT 디자이너들이다. 금요일 저녁 시간까지 써 가며 실리콘밸리의 한국인 디자이너들이 한데 모인 이유가 뭘까. 모임을 주최한 렌딩클럽 직원 노영숙 씨(39·여)는 “실리콘밸리의 한국인 네트워크는 인도나 중국계에 비해 턱없이 약하다”며 “조금이라도 인적 네트워크를 쌓기 위해 6개월에 한 번 모임을 연다”고 말했다.실리콘밸리에선 사람이 가장 큰 자산 미국에서 창업하거나 취업한 한국인들은 하나같이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네트워크’를 꼽았다. 한국어로는 ‘인맥’으로 해석되지만 뉘앙스는 많이 다르다. “사람을 많이 아는 게 실리콘밸리에선 강점이에요. 모두가 비슷한(IT) 직종에 종사하다 보니 전에 함께 일하던 동료, 학창시절 친구가 나중에 어떤 도움을 줄지 몰라요. 자신이 아는 걸 알려 주는 게 실리콘밸리의 문화라 사람이 가장 큰 자산이에요.” 샌프란시스코에서 인사관리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에치’ 창업자 문아련 씨(32·여)의 설명이다. 한국식 인맥인 ‘빽’이 아니라 창업에 실질적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바로 실리콘밸리의 네트워크다. 이날 렌딩클럽 모임에는 IT 디자인과 상관없는 직장인 익명 게시판 앱인 ‘블라인드’ 관계자들도 참여했다. 이 회사 미국 지사장인 앨릭스 신 씨(29)는 “유능한 한국인 디자이너를 채용하기 위해 모임에 처음 참여했다”고 말했다. 네트워크의 확장이 곧 사업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한국인의 실리콘밸리 진출 역사가 30년을 맞았지만 한국계 내부의 네트워크 확대는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유대인과 인도인, 중국인 등이 각자 내부의 끈끈한 네트워크로 실리콘밸리의 ‘주류(主流)’로 떠오른 것과는 대조되는 현상이다. 도메인 등록업체인 고대디(godaddy)에 근무하는 하대웅 씨는 “재미 한인 1세대는 한국 출신이라 한국 문화에서 부정적 인상을 풍기는 인맥 쌓기를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 같은 성향 때문에 내부적으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인도나 중국인에 비해 창업기업 수도 적다”고 분석했다. 한국인들은 실리콘밸리 곳곳에서 매일 밤 열리는 네트워크 모임인 ‘미트업(meet up)’ 참석에도 소극적인 편이다. 한 실리콘밸리 창업자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도 실리콘밸리 네트워크를 형성하지 못해 결국 사업을 접고 한국으로 철수하는 스타트업도 많다”고 전했다. 네트워크 강화에 나서는 실리콘밸리 한국인 이 같은 상황이 문제라는 인식이 퍼지며 최근에는 한국계 네트워크 모임도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실리콘밸리 내 한국인 전문가 모임인 ‘베이 에어리어 K그룹’(이하 K그룹)이다. 이곳은 2007년 초기 멤버 20명으로 시작했다. 실리콘밸리 지역의 과학, 공학 분야 종사자들이 인도계와 중국계 못지않은 네트워크 구축을 목표로 만들었다. 모임의 취지에 공감하는 한국인이 늘면서 지금은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공학자는 물론이고 경영학 관련자, IT 디자이너 등의 소그룹이 여럿이다. 회원도 3700명으로 늘어났다. 강준 K그룹 회장은 “실리콘밸리 자체가 자신이 가진 네트워크를 핵심 자산으로 삼아 작동하는 곳”이라며 “모임 참석자끼리 교류를 통해 하고 있는 일에 영감을 받거나 공동 창업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곳을 매개로 만들어진 한국계 실리콘밸리 창업 기업은 20여 곳에 이른다. 한국인들이 좀처럼 진출하지 못했던 창업자를 위한 벤처캐피털(VC) 분야에도 속속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빅베이슨캐피탈’ 창업자 윤필구 대표(42)다. 그는 미국 대형 VC에서 근무하다 2013년 직접 VC를 차렸다. 윤 대표는 지난달 25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호 펀드로 150억 원을 모았는데 한국 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계획이다. 회사 경영이념에도 ‘한국 기업 중심으로 투자한다’고 못 박았다”고 말했다. 그가 투자하는 13개 기업 중 한국 회사가 8곳이다. 실리콘밸리에서 VC가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수십 년 됐지만 한국계 VC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 알토스벤처스, 트랜스링크캐피털, KTB벤처스, 스톰벤처스, 매버릭캐피털 등이 한국인이 이끄는 실리콘밸리 VC다. 일부 한국계 VC는 한국 법인을 운영하기도 한다. 한국 현지에서 유망한 기업을 직접 발굴하겠다는 의미다. 윤 대표는 “내가 1차로 한국 회사에 투자한 뒤 그 회사의 주주 구성, 회사 시스템 등을 선진적으로 바꾸는 것이 목표”라며 “이를 통해 다른 실리콘밸리 VC로부터 후속 투자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새너제이=박재명 jmpark@donga.com·박형준 기자}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 입사를 목표로 삼는 취업준비생들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고민거리를 갖고 있다. ‘비자’와 천정부지로 뛰는 ‘집값’이다. 2014년부터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근무하는 김준식 씨(31)는 한국인의 미국 기업 취업에서 가장 어려운 점으로 비자 문제를 꼽았다. 김 씨는 “미국 기업 입장에서 한국인을 뽑으면 비자 지원을 해줘야 하기 때문에 미국인보다 법무비용 등이 더 든다”며 “같은 실력이면 미국인을 뽑는다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 기업 입사자들이 대부분 미국 대학 졸업생인 것도 비자 때문이다. 김 씨는 “미국 학교를 다니면 졸업 이후에도 구직활동을 할 수 있는 OPT(Optional Practical Training·유학생이 졸업 후 1년간 미국 체류를 허락하는 제도)가 발급된다”며 “미국 대학을 다니지 않으면 구직 단계부터 미국 체류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취업을 해도 비자 문제는 여전히 한국인을 따라다닌다. 미국 취업자는 3년 체류가 가능한 전문취업비자(H-1B)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통상 8만5000여 명을 선발하는 이 비자 쿼터에 전 세계에서 미국 기업에 취업한 15만 명 이상이 지원한다. 2 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하는데 무작위 추첨으로 운명이 결정된다. 인도 출신이 전체 H-1B 비자 중에서 70% 정도를 획득한다. 한국은 전체 중 약 3% 수준인 2500개 내외를 가져간다. 2010년 이후 한국이 획득하는 H-1B 비자 건수는 오히려 감소 추세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필성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은 “구글, 애플 등 대기업은 자사에 필요한 인재라고 판단하면 적극적으로 H-1B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준다”며 “심지어 비자 획득이 편한 해외 지사로 발령을 냈다가 다시 미국 본사로 불러들이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결국 얼마나 미국 기업에 필요한 인재냐에 따라 비자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높은 물가, 그중에서도 매년 뛰는 집값 문제다. 미국 최대 부동산 회사인 ‘인테로’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내 집값은 2010년 이후 거의 매년 10%씩 뛰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방 하나짜리 아파트를 빌리려면 매달 2500∼3000달러(약 292만∼351만 원)를 내야 한다. 취업준비생이 실리콘밸리 현지에서 일정 기간 구직활동을 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트위터에서 일하는 김창옥 씨(31)는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매년 연봉을 올려주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뛰는 집값을 감안한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한국 젊은이들의 실리콘밸리 진출을 늘리려면 한국인에 대한 비자 쿼터를 늘리기 위한 정부 차원의 외교와 주거비 지원 등 종합적인 지원 대책이 필요하다.샌프란시스코·새너제이=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세계 정보기술(IT)의 메카’ 미국 실리콘밸리에 동아일보 청년드림캠프가 문을 열었다. 일본 도쿄(東京), 중국 베이징(北京), 미국 뉴욕에 이은 해외 4번째 캠프로 실리콘밸리 내 한국 청년들의 창업과 취업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지난달 29일 미 캘리포니아 주 새너제이의 KOTRA 실리콘밸리 무역관에서 나창엽 관장, 이헌수 글로벌혁신센터(KIC) 실리콘밸리센터장, 신연수 동아일보 청년드림센터장은 ‘청년드림 실리콘밸리캠프’ 개설 및 운영을 위한 협약을 맺고 캠프 개소식을 가졌다. 실리콘밸리캠프는 우선 한국 청년들의 실리콘밸리 취업을 지원한다. 이를 위해 KOTRA는 4월부터 신규 취업자를 위한 ‘K-Move 정착지원 센터’를 실리콘밸리 무역관 내에 설치해 연고 없이 현지 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젊은이들의 초기 정착을 돕는다. 실리콘밸리 내 IT 분야 스타트업 기업들에 한국 우수 인력을 일대일로 연결해주고, 산업디자인 호텔서비스 등 한국 청년에 대한 수요가 있는 분야에 맞춰 인턴 프로그램도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향후 캠프는 실리콘밸리 진출에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인 주거 문제에 대한 조언 등을 포함해 순조로운 현지 정착을 위한 지원방안을 찾아나갈 예정이다. 나 관장은 “최근 취업 포털의 조사에서 한국 취업준비생 87%가 해외에서 취업하고 싶다고 하고 그중 미국이 26.7%로 1위를 차지했다”며 “청년드림 실리콘밸리 캠프가 한국 청년들에게 미국 취업 기회를 제공하는 허브(hub) 역할을 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캠프는 또 실리콘밸리 창업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한다. 이와 관련해 KIC는 올해 8∼11월 20∼30명의 국내 창업가를 선발해 실리콘밸리 창업을 지원하는 ‘KIC Express’ 사업을 벌인다. 선발된 창업가들은 KIC 실리콘밸리 캠퍼스에서 자신의 사업모델을 구체화하는 교육을 받는다. 현지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기업을 설명하고 현지 기업인들과 네트워킹 하는 기회도 갖게 된다. 이르면 5월에 선발 공고를 낸다. 이 센터장은 “창업자를 모아놓고 1회성 교육을 하는 형식적인 사업은 하지 않겠다”며 “창업자가 자신의 사업 모델을 구체화해 투자를 받고 실리콘밸리에서 실제 창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새너제이=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400점 만점에 155점을 받은, 한국의 ‘문제아’였던 저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기회를 잡았습니다.”(이종덕 씨·회계사·37) 많은 청년들에게 한국은 답답한 나라다. 대입 시험 한 번에 인생이 결정되고, 실패한 이의 ‘패자부활전’이 쉽지 않다. 10여 년 전 한국에서 좌절하고 “영어를 못합니다(I can‘t speak English)”라는 문장만 외워 미국 땅에 온 이 씨는 여기서 벤처 기업가 등을 돕는 회계사의 꿈을 이뤘다. 울산의 대학생 최윤석 씨(25)는 올해 2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아이디어 하나만 갖고 실리콘밸리에 왔다. 벤처기업 ‘메탈헤드’를 창업한 그는 “한국에서는 투자자나 다른 개발자와 아이디어를 토론할 기회가 없었는데 여기서는 업계 고수도 만나자고 하면 선뜻 만나준다”며 기뻐했다. ‘한국은 비좁다’며 과감하게 세계무대로 진출하는 청년이 늘고 있다. 그중에서도 세계 스타트업의 메카인 미국 실리콘밸리는 풍부한 자본과 일자리로 청년들을 끌어들인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남단에서 새너제이까지, 제주도 2배 넓이인 실리콘밸리(3884km²)의 벤처기업들에 투자된 금액만 지난해 273억 달러(약 32조 원). 정보기술(IT) 인재는 늘 부족하고 실업률은 4.3%로 완전고용에 가깝다. 괴짜들을 내치기보다 환영하는 이곳에선 방금 창업한 스타트업도 언젠가 ‘스타 기업’이 되리라는 꿈을 꾼다. 실제로 멀리는 인텔, 야후, 애플부터 최근엔 구글, 페이스북까지 이곳에서 창업해 세계 IT 시장을 지배하는 거대 기업으로 자랐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본령’인 스타트업 창업이나 IT 취업 분야에서 한국의 비중은 여전히 작다. 현재 실리콘밸리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스타트업은 60여 곳으로, 전체 2만3000곳의 0.3%에 불과하다. 실리콘밸리가 한국 청년들의 더 많은 도전을 기다리는 이유다. 동아일보 청년드림센터는 지난달 29일 실리콘밸리에 청년드림캠프를 개설해 KOTRA 및 글로벌혁신센터(KIC)와 함께 한국 청년들의 실리콘밸리 도전을 지원한다. 미국 뉴욕, 중국 베이징, 일본 도쿄 캠프를 중심으로 해외 각지에서 젊은이들의 취업과 창업을 지원하는 사업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계속한다. 4·13총선을 앞두고 선거운동이 본격화됐지만 한국 경제는 우울하기만 하다. 성장률이 떨어지고 청년실업률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동아일보는 청년들과 함께 새로운 희망을 찾아가는 대장정을 시작한다. 국내외에서 청년들이 일자리를 잡을 기회를 늘리고, 숨은 강소기업들과 청년들을 이어주며, 일자리 창출을 가로막는 나쁜 규제와 관행들을 고치는 데 앞장설 것이다.새너제이=박형준 lovesong@donga.com /샌프란시스코=박재명 기자}

《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젊은 창업자들은 매일 ‘피칭(pitching)’한다. 야구에서 투수가 공을 던지는 행위를 뜻하는 피칭이 이곳에선 창업자가 투자자를 만나 아이디어를 설명한다는 용어로 더 많이 쓰인다. 투수의 피칭은 게임 종료와 함께 끝나지만 스타트업 창업자의 피칭은 24시간 계속된다. 아이디어에 자금을 대줄 만한 투자자를 만나거나 업계의 ‘고수’를 만났을 때, 심지어 친구와 술잔을 기울일 때조차 피칭에 나선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근무하는 김준식 씨(31)는 “실리콘밸리는 창업에 미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말했다. 한국 청년들도 이곳에서 ‘제2의 구글’을 꿈꾸며 창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미국인들에 비해 서툰 영어도, 빈약한 주머니 사정도 청년들의 아이디어와 열정을 가로막진 못한다. 》 ○ 애송이 창업가도 꿈을 실현하는 곳 “솔직히 이건 마음에 듭니다. 한번 사 보고 싶은데요.” 지난달 24일 오후 9시.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새너제이의 KOTRA 실리콘밸리 무역관에서 한일 양국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기업을 대상으로 열린 ‘피칭 대회’에서 일본 측 심사관이 한 말이다. “학생 수준의 아이디어”라거나 “혁신이 없다”는 식의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는 피칭 대회에서 보기 드문 호평이다. 발표 제품은 한국 스타트업 리플버즈의 ‘귀로 말하는 이어폰’. 통화용 마이크를 선으로 연결해야 하는 기존 이어폰과 달리 양쪽 귀에 작은 이어폰만 꽂으면 자유롭게 듣고 말할 수 있다. 제품을 내놓은 김승현 씨(39)는 “사람이 말할 때 귀에서 나오는 작은 소리를 이용해 만든 제품”이라며 “이어폰 안에 스피커와 마이크를 동시에 넣어 5개국 특허도 받았다”고 설명했다. 2012년 설립된 리플버즈는 지난해 5월 미국 법인을 세웠다. 기업의 설명 자료엔 미국 샌프란시스코가 본사, 한국이 연구개발(R&D) 센터다. 김 씨는 “처음부터 글로벌 진출을 염두에 두고 1년 전 실리콘밸리에 법인을 만들어 미국에서부터 제품을 출시했다”고 말했다. 리플버즈는 이어폰 제품을 미국의 정보기술(IT)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인 ‘킥스타터’에 선보여 전체 2위를 차지하며 총 30만 달러(약 3억5100만 원) 이상을 모금했다. 모든 한국 기업이 리플버즈처럼 당장 출시할 수 있는 제품을 들고나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아이디어만 갖고 미국 땅을 밟는 경우가 더 많다. 아쿠엘을 창업한 남윤혜 씨(24·여)는 실리콘으로 만든 방수 밴드를 내놨다. 통상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는 방수 밴드와는 달리 여러 차례 씻어도 접착력이 떨어지지 않는 제품이다. 식품영양학과 출신의 남 씨는 방수 밴드 아이디어로 대학생 창업경진대회에서 우승한 후 실리콘밸리의 창업 문을 두드리고 있다. 남 씨는 “실리콘밸리는 창업과 관련된 모든 투자와 노하우가 모인 곳”이라며 “아이디어의 기술적 문제나 사업성을 매일 보완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지의 스타트업 보육 액셀러레이터와 인큐베이터 기관만 200곳 이상에 이른다. 대표적인 액셀러레이터인 ‘500스타트업’은 한국의 스타트업을 선별해 투자하기도 한다. 아무리 설익은 아이디어라도 가능성만 있다면 보완해서 키울 수 있는 곳이 바로 실리콘밸리다.○ 실패에 관대한 문화 한국 젊은이들이 머나먼 미국 땅 실리콘밸리에서 창업에 도전하는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이유는 실리콘밸리가 50년 전부터 세계 IT 업계의 ‘수도(首都)’이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회계 전문가는 “여기선 10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을 수십 개 스타트업에 쪼개 투자하는 개인 투자자가 적지 않다”며 “그중 하나만 제2의 우버로 성장해도 수백 배의 수익을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무명 스타트업 창업자라도 벤처캐피털(VC)에 이메일을 보내면 쉽게 만날 수 있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스타트업 수만 2만3000여 개에 이르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샌프란시스코에서 채용 관련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에치’의 창업자 재스퍼 손 씨(36)는 “워낙 벤처기업이 많으니 투자자 입장에서도 자신이 투자를 거절한 기업에서 ‘대박’이 터지는 경우가 있다”며 “어떤 원석이 숨어 있을지 모르니 일단 만나 보는 것이 이곳의 문화”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29일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만난 한국계 캐나다인 제시카 고 씨(34·여)는 2014년 글로벌 기업 구글을 그만두고 부동산 중개 스타트업인 ‘오픈도어’의 디자인 총괄 자리를 수락했다. 고 씨는 “구글은 정말 좋은 직장이었지만 나이를 먹으면 스타트업을 시도할 수 없을 것 같아 사직했다”며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과감히 그만둘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IT 기업 직원이 창업가로 변신하며 스타트업 도전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지역 창업 열기를 지피는 원동력이 된다. 고 씨는 “이미 검증된 직원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싫어하는 실리콘밸리 기업은 없다”며 “한국에서는 그런 행동을 ‘배신’으로 간주한다는데 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라고 말했다. 실패에 관대한 분위기도 창업 활성화에 중요한 요소다. 이곳에선 오히려 실패한 경험이 있는 사람을 더 신뢰한다. 속칭 ‘FF펀드’(Family-Friend 펀드·가족 및 친구의 지원금)까지 끌어모아 “이번에 안 되면 죽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하는 한국식 창업과는 거리가 있다. 에치의 공동 창업자인 이정규 씨(26)는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공대를 졸업하고 바로 스타트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실패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간단한 답을 내놨다. “다시 창업하면 되죠.” 실리콘밸리에서는 10번 이상 창업에 나서는 사람이 흔하다. 3000달러(약 351만 원) 정도면 법인 설립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 에치 창업자 중 한 명인 문아련 씨(32·여)는 “샌프란시스코 시내 커피숍에서 일하는 스타트업 창업자가 적지 않다”며 “주로 IT 관련이니만큼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어디든 근무처가 된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은 실패 경험이 없는 ‘초짜’ 창업자를 오히려 싫어한다. 우버, 에어비앤비 등 최근의 ‘스타 기업’들은 모두 수많은 실패를 양분 삼아 자랐다.○ 갈 길 먼 한국 스타트업 실리콘밸리에서 한국인은 아직 주류(主流)로 자리 잡지 못했다. 미국인 못지않게 많은 스타트업 기업을 만든 인도계, 중국계와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미국 코프먼 재단이 2006∼2012년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한 외국 이민자 수를 조사한 결과 인도인이 전체의 32.0%에 달했다. 2위권인 중국인과 영국인은 5% 안팎이었다. 한국인은 러시아 등에 뒤처진 8위에 그쳤다. 지난해 실리콘밸리에 도전장을 낸 리플버즈의 김승현 씨는 “아직 한국인은 실리콘밸리의 비주류”라며 “결국 성패는 실리콘밸리 주류와의 네트워킹에서 판가름 나는 만큼 한국인과 어울리기보다 미국인 인도인 등을 만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샌프란시스코 새너제이=박재명 jmpark@donga.com·박형준 기자}

지난해 10월 미국 실리콘밸리를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 ‘기업가정신’을 취재하기 위해 실리콘밸리에서 스타트업 기업을 운영하는 10명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과거 경험에 비춰 볼 때 10명에게 요청하면 두세 명을 실제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웬걸, 10명 모두 취재에 응했다. 현지에 머문 닷새 동안 오전 오후로 나눠, 심지어 저녁 시간까지 할애해 가며 기업인들을 만났다. 이집트 출생 헤이텀 엘파딜 씨는 2013년에 단신으로 실리콘밸리로 넘어왔다. 그는 인공지능(AI)을 갖춘 검색 엔진을 만드는 중이다. 월 300만 원 내외의 집세를 아끼려 친구 집에 얹혀살고 있다. 한국계 애어리 유 씨(여)는 미국 시애틀에서 산다. 그는 여러 사람의 기부를 모아 값비싼 물건을 사서 선물할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했다. 스타트업 기업을 육성시켜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려고 석 달 동안 샌프란시스코에서 거주했다. 그는 남편을 시애틀에 둔 채 남성 동료 4명과 함께 육성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당시 방 1칸에서 다 함께 잠을 잤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한 기업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A 씨(여)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을 끝냈다. 하버드대에서 만난 재미교포와 결혼도 했다. 둘 모두 졸업 후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안락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자신의 출신 대학인 스탠퍼드대(실리콘밸리 내 위치)에서 경영학 박사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A 씨는 변호사를 접고 실리콘밸리로 와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그들 모두 적당히 편히 살 수 있었지만 고집스레 고생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모두가 ‘웃고’ 있었다. ‘비록 돈은 없지만 나만의 비즈니스를 한다는 게 너무나 자랑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지난해 하반기(7∼12월) 기자는 삼성 SK LG 등 대기업을 출입처로 둔 재계팀에 속해 있었다. 당시 한국 대기업들은 예외 없이 ‘죽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중국의 성장이 둔화되고 전 세계가 저성장으로 접어들고 있을 때였다. 광복 이후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철강, 기계, 조선 등 중후장대 산업의 경우 성장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산업절벽’이란 말도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졸면 죽는다’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강연(2015년 11월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최고경영자 조찬 간담회)이 꼭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가난한 기업인들의 미소가 신기할 정도였다. 올해 1월부터 기자는 정보기술(IT)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두 달 남짓 여러 ‘IT맨’들을 만났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실리콘밸리의 추억이 떠올랐다. 게임기업들은 아직 매출 1조 원을 달성하지 못한 곳이 대부분이지만 지난해 잇달아 매출 신기록을 달성하며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매출액 상위 게임기업들은 ‘해외 공략’ 포부를 밝혔다. 카카오와 SK텔레콤은 대규모 인수합병(M&A)을 발표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었다. 대기업의 IT 계열사들도 주력 계열사보다 매출 규모는 떨어졌지만 “포화된 국내 시장에서 벗어나 해외에서 승부수를 던지겠다”며 열의에 차 있었다. 이들 기업이 밀집해 있는 경기 성남시 판교에서는 여의도나 광화문에서 느끼지 못하는 활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분명 미국 실리콘밸리와 한국 판교는 닮았다. 하지만 ‘똑같다’고 하기엔 뭔가 부족했다. 무엇보다 판교엔 구글, 애플과 같은 초대형 IT 기업이 없다. 네이버와 카카오가 크게 성장했지만 아직 삼성전자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판교 기업인들은 사기를 꺾는 암적 존재로 ‘규제’를 가장 많이 언급했다. 어떤 비즈니스가 돈이 될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무슨 규제가 있는지부터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기업 활동과 관련해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최고’라고 여기는 것 같다”는 윤치형 대표(샌프란시스코에서 마켓플레이스 ‘비렉트’를 운영)의 평범한 말이 한국 기업 환경에선 평범하지 않은 말이 돼 있는 게 안타깝다.박형준 산업부 차장 lovesong@donga.com}

“이웃사랑에 국경이 있나요?”한국 아이돌그룹 아이콘(iKON)의 공연을 보기 위해 중국에서 온 팬들이 공연 관람 뒤 사회복지시설에서 무료 봉사활동을 펼쳐 화제다.베이징(北京)의 순야팅(孫雅婷·20·여) 씨 등 중국 각지에서 온 여성 7명은 1일 오후 경기도 양평군의 사회복지시설 신망원에서 봉사활동을 가졌다. 이들은 설거지, 청소 등을 하면서 한국의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순 씨 등은 모두 아이콘 중국 팬클럽 회원들로 지난 주말 아이콘 공연을 보기위해 한국에 도착했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아이콘의 팬으로서 한국에서 봉사활동을 펼치고 싶었다”며 “이번을 시작으로 중국과 한국에서 공익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참가하겠다”고 다짐했다.이번 이들의 봉사활동을 계획한 중국의 대표적 문화기업 춘추융러(春秋永樂)한국지사 장즈칭(蔣子擎) 대표는 “이들은 한국에 공연을 보러 오는 길에 뜻 깊은 일을 하고 싶다고 먼저 제의했다”며 “한류 팬들의 새로운 모습을 한국에 소개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일본 도쿄(東京) 특파원으로 지내던 2013년 1월경이었다. 일본의 마을 재생 사업을 취재하기 위해 대표적인 현장을 물색하던 도중 이시카와(石川) 현 노토(能登) 정이 눈에 들어왔다. 노토 정은 동해와 맞닿아 있는 ‘깡촌 중의 깡촌’이었다. 2011년 세계농업유산에 등록됐다.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37%. 유엔이 정한 초(超)고령사회 기준(65세 이상 비율이 20% 이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런데 이곳이 농가민박을 시작하면서 일본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관광객이 몰린다고 했다. ‘정말일까?’ 당장 도쿄에서 비행기를 타고 현장으로 날아갔다. 노토 공항에 도착했더니 예약했던 민박집에서 마중을 나왔다. 버스가 없어 반드시 누군가 데리러 나온다고 했다. 약 20분을 달려 다다 기이치로(多田喜一郞) 씨가 운영하는 민박집에 도착했다. 다다 씨는 대뜸 기자에게 바닥이 펑퍼짐한 짚신을 주며 “눈 구경하러 가자”고 말했다. 당시 논밭에는 30cm 정도 두께의 눈이 쌓였다. 그런데 짚신을 신었더니 눈 속으로 발이 빠지지 않았다. 그는 “겨울에 민박하러 온 가족들은 이 짚신을 신고 논밭에서 눈싸움하는 것을 가장 즐긴다”고 말했다. 민박집 돌담 옆으로 눈이 2m 이상 쌓여 있었다. 다다 씨는 포클레인으로 입구를 만들고 삽으로 눈 속을 파 이글루를 세웠다. 이글루 한쪽 구석에는 초를 켜 놨다. “밤에 구운 떡을 이글루에서 먹으면 맛이 끝내준다”고 했다. 다다 씨는 저녁 식사도 함께했다. 여행객들에게 현지인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 가급적 함께 식사를 한다고 했다. 거실 가운데 바닥을 파서 불을 피울 수 있는 이로리(위爐裏)를 보니 일본 느낌이 물씬 났다. 특파원 생활 3년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이로리였다. 노토 정에서 나는 나물과 해산물을 중심으로 푸짐한 저녁이 나왔다. 다다 씨는 기자에게 맥주를 건네더니 마을의 변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논밭 밖에 없는 시골이다 보니 인구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2002년 마을 초입에 있던 미야치(宮地)초교까지 폐교하자 젊은 부부도 함께 사라졌다고 했다. 위기감이 마을 전체를 덮었다. 다다 씨는 6명의 마을 유지와 함께 마을을 살리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었다. 토론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자’는 것. 도쿄나 오사카(大阪) 등 도시 주민들에게 이글루 체험, 모심기, 벼 베기, 과일 수확 등 깡촌 경험을 하게끔 해주는 농가민박을 하자고 뜻을 모았다. 다다 씨는 “화장실과 욕실이 불편하면 안 되기 때문에 수리를 많이 했다. 나머지는 농촌 체험을 시켜준다는 의미에서 별로 손을 대지 않고 깨끗하게 청소만 했다. 그 대신 농가민박 주인들에게 ‘친절’을 수차례 강조했다”고 말했다. 1박 3식에 한 명당 1만2000엔(약 11만7000원)을 받았다. 인터넷에 농가민박을 알리자 하나둘 예약이 들어왔다. 그들은 농가민박을 한 후 입소문을 냈다. 약 10년이 지나면서 이제 중국, 대만 등지에서도 일주일씩 와서 민박을 하고 돌아갈 정도로 유명해졌다. 마을 전체로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체제도 갖췄다. 지난해 7월 특파원을 마치고 귀임했다. 취재와 여행으로 일본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노토 정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올 한 해 한국 산업계의 전망은 우울하다. 동아일보가 지난해 말 10대 그룹에 2016년 경영계획을 설문한 결과 ‘2015년보다 더 공격적으로 짜고 있다’고 응답한 그룹은 1곳도 없었다. 4개 그룹은 ‘2015년보다 더 보수적으로 짜고 있다”고 답했고, 나머지 6개 그룹은 ’2015년과 비슷하다‘고 했다. 방어경영에 나서는 것이다. 경제 전문가들도 세계적 저성장, 중국의 추격, 미국의 금리 인상 등 여러 불확실성을 거론하며 힘든 한 해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기자는 힘든 때일수록 노토 정처럼 역발상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자사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면밀히 분석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내야 할 때다. 2% 개선은 웬만큼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 지금은 역발상을 통한 혁신으로 20% 점프를 이뤄내야 할 시점이다. 노토 정처럼.박형준 산업부 차장 lovesong@donga.com}

일본 경제는 1960년대 10% 내외 고도 성장을 하다 1970년대 5%대, 1980년대 4%대로 떨어졌다.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메이드 인 저팬’ 제품은 엔화 약세의 도움을 얻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일본은 넘치는 달러로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뉴욕의 랜드마크인 록펠러센터 등 부동산을 대거 사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을 기점으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지면서 성장률이 1%대로 추락한 것. 2000년대 들어선 아예 0%대 혹은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 한국에 20년 이상 앞서 저성장 늪에 빠져 있는 일본. 그로 인해 일본인들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 사라진 “2차 한잔 더” 지난해 12월 22일 오후 10시 도쿄(東京) 메구로(目黑) 구 지하철 메구로 역 앞에 있는 한 일본식 주점. 레스토랑 사장, 주점 경영자, 중소기업 사장 등 40여 명이 모여 송년 파티를 하고 있었다. 모임을 주최한 이는 창업 컨설팅 회사를 경영하는 기무라 다카하시(木村高橋·58) 회장. 컨설팅 고객들과의 모임을 끝내며 기무라 사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회비는 1만 엔(약 9만7000원)입니다. 옛날 잘나갈 때는 고객 여러분을 무료로 모셨는데 워낙 장기간 경기가 안 좋다 보니….” 일본의 저성장은 최우선적으로 근로자의 월급봉투와 자영업자의 수입에 직격탄을 날렸다. 기무라 회장도 1990년대 후반까지 자비로 송년 파티를 주최했지만 2000년대 들어선 회비를 걷어야만 했다. 일본 국세청에 따르면 민간 기업 근로자의 연평균 급여는 1997년 467만3000엔(약 4500만 원)으로 정점을 찍었고 그 후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2014년에는 415만 엔(약 4000만 원)이었다. 월급봉투가 줄어드니 샐러리맨들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일본에선 1차 회식 후 “2차 한잔 더”를 외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기무라 회장의 송년 파티 역시 오후 10시에 끝났고 참석자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지난달 23일 오전 1시 도쿄 도심인 미나토(港) 구 신바시(新橋) 역 인근 맥도널드 매장. 1층과 2층을 합해 모두 8명의 손님이 있었다.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도 3명이나 보였다. 이들은 예외 없이 200엔(약 1900원)짜리 햄버거 하나를 주문한 채 엎드려 자고 있었다. 심야에 택시를 타고 30분만 달려도 택시비가 10만 원을 훌쩍 넘어가기 때문에 맥도널드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이다. 맥도널드 종업원은 “오전 2시면 청소를 하기 위해 잠자는 손님들을 모두 바깥으로 내보낸다. 그럼 다들 신바시 역으로 가서 새우잠을 잔다. 오전 5시쯤 지하철이 다니기 시작하면 다들 사라진다”고 말했다. ○ “결혼 포기했어요” 나카다이라 히로코(中平弘子·가명·42·여) 씨는 파견 사원이다. 도쿄 신주쿠(新宿)에 있는 출판 회사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자료 정리 업무를 한다. 한 달에 받는 월급은 14만 엔(약 136만 원). 매달 1만 엔씩 모아 1년에 한 번은 명품을 산다. 틈틈이 부모님께 용돈도 받는다.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한 적이 거의 없었지만 ‘결혼’은 예외였다. 나카다이라 씨는 22일 기자와 만나 “주위 지인들이 예외 없이 비정규직이다. 정규직은 정규직끼리, 비정규직은 비정규직끼리 서로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정규직끼리 결혼해 어떻게 가정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2014년 기준 일본의 정규직 연평균 급여는 477만7000엔(약 4600만 원)이지만 비정규직은 169만7000엔(약 1650만 원)에 불과했다. 임원을 제외한 전체 노동자 중 비정규직 비율은 37.4%다. 일본은 1970년대 인구 1억 명을 돌파했고 국민소득도 가파르게 늘어나 ‘1억 총중류(總中流·일본 전 국민이 중산층에 해당한다는 의미)사회’라는 말이 생겼다. 당시 ‘사회주의 국가는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했다. 일본인 대부분이 잘산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25년간의 저성장으로 인해 일본 중산층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일본 사회에서 통상 연소득 300만 엔(약 2910만 원) 이하면 중류가 아닌 하류(下流)로 분류된다. 일본 국세청 민간급여통계에 따르면 2002년 34.9%이던 하류 계층은 2014년 40.9%로 늘었다. ○ 수명 100세의 공포 12월 22일 오후 도쿄 미타(三田) 역 인근에 있는 미타도서관. 70여 명의 이용자 대부분은 60세 이상으로 보였다. 도서관을 떠나는 한 70대 노인에게 ‘자주 오느냐’고 물으니 “돈 안 들이고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거의 매일 온다”는 답이 돌아왔다. 도서관에서 도보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미타스포츠센터. 3층으로 올라가니 흥겨운 음악에 맞춰 40여 명이 에어로빅을 하고 있었다. 어림잡아 절반 정도는 60세 이상이었다. 스포츠센터 직원은 “오전에는 거의 대부분 노인들이 이용한다”고 말했다. 65세 이상의 미나토 구 주민이면 무료로 스포츠센터를 이용할 수 있고, 65세 미만은 500엔(약 4900원)만 내면 된다. ‘저축 왕국’ 일본이기에 노인들이 현금 많기로 유명하지만, 요즘 노인들은 공짜 시설을 찾으며 씀씀이를 줄이고 있다. 정년퇴직 후 받는 연금 수령액은 1개월에 19만 엔(약 184만 원) 정도에 불과해 부부가 생활하기에 턱없이 부족한데 100세까지 살지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에 미리 소비를 줄이는 것이다. 복지비 지출을 깎는 일본 정부도 노인들이 지갑을 닫게끔 만들고 있다. 노인들까지 소비를 줄이면서 저성장이 더욱 고착되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도쿄=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한국이 일본처럼 저성장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경제성장의 밑바탕이 되는 노동자 수를 지속적으로 늘려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후카오 교지(深尾京司) 히토쓰바시(一橋)대 경제연구소장은 지난해 12월 21일 일본 도쿄(東京) 시내 한 카페에서 본보 기자와 만나 “저성장과 관련해 일본은 한국의 선배이자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국가”라며 이처럼 말했다. 그는 국제경제 및 거시경제를 전공했고, 1990년 이후 일본의 저성장 원인에 대해 연구해 왔다. 후카오 소장은 “일본이 저성장에 빠지게 된 핵심 요인 중 하나는 저출산으로 인해 노동 투입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라며 “한국은 남북통일을 이루거나 중국 조선족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생산가능 인구를 늘려야 성장률 하락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의 생산성을 올리는 것도 성장에 중요한 요소”라며 “한국도 일본처럼 해고가 쉽지 않아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저성과자를 좀 더 쉽게 해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내는) 좀비 기업들은 생산성 저하를 일으키는 주범이기 때문에 빠르게 솎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후카오 소장은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일본 정부는 1990년대 초반 거품 경제 폭발 이후 대규모로 지출을 늘리는 정책을 펼쳤지만 국가 부채만 늘어났을 뿐 경제는 살아나지 않았다”며 “한국 정부는 장기적인 ‘그랜드 플랜’을 짜 기업들에 신뢰를 줘 기업이 스스로 성장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경제 정책에 대해선 “‘엔화 약세’라는 분명한 신호를 주고 있다. 이를 통해 일본 기업들은 수출 중심으로 내년도 경영 계획을 짜고 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 정책은 어떤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후카오 소장은 “한국 기업들에 뚜렷한 방향성을 제시하는지 의문”이라고 답했다.도쿄=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걸을 때 몸의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지체장애(4급)를 갖고 있는 이영자 씨(48). 그는 2007년 엘리베이터 부품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주위 지인들은 펄쩍 뛰었다. “여성인 데다 장애까지 있는데 무슨 창업이냐”며 말렸다. 하지만 이 씨는 함께 일하던 동료 3명과 함께 퇴사한 직후 엘리베이터 부품 및 완제품을 만드는 기업 ‘스타리프트’를 설립했다. 8년이 지난 현재, 스타리프트는 직원 50여 명에 연매출 100억 원을 올리는 탄탄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대표는 2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물론 불안했다. 하지만 욕심 부리지 않으면 승산이 있다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창업 당시 이 대표가 손에 쥐고 시작한 자본금은 약 3000만 원. 지인으로부터 경기 김포에 230m²(약 70평) 규모의 공장을 빌려 엘리베이터 개폐 장치 하나만 전문적으로 만들었다. 함께 회사를 나온 동료 3명은 각각 설계, 영업, 생산을 맡았다. 자신은 총괄 겸 사장을 맡았다. 창업 첫 달부터 30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빠듯하게 공장을 돌릴 만했다. 각종 비용을 줄였지만 연구개발(R&D) 투자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아예 회사를 세울 때부터 매출액의 1%를 R&D에 투자하기로 못 박았다. 대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엘리베이터 관련 사업에서 중소기업으로 살아남으려면 기술 개발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 덕분에 문 폭이 600∼6000mm인 다양한 크기의 엘리베이터를 만들 수 있었고, 지하철 역내 장애인용 경사형 리프트를 자체적으로 만들 정도로 기술 수준이 올라갔다. “첫 3, 4년은 생존이 목표여서 매출액이 거의 늘지 않았어요. 하지만 2013년 경남 거창군에 조성된 승강기산업밸리로 본사를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어요.” 이 대표는 승강기산업밸리에 새로 자리를 잡으면서 15명이던 직원을 35명으로 늘렸다. 공장은 최대한 자동화했다. 엘리베이터 전문 업체인 만큼 2층짜리 건물에도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엘리베이터 옆에 센서를 부착해 지게차가 오면 자동으로 문이 열리게끔 만들었다. 엘리베이터를 만드는 철판은 보통 무게가 40∼50kg으로 무거워 두 사람이 들어야 했다. 이 대표는 모든 생산 공정에 자동화된 리프트를 설치해 직원들이 혼자서도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공장을 바꾸니 생산성이 크게 뛰었고, 매출액도 50% 이상씩 늘기 시작했다. 스타리프트는 지난달 한국산업기술시험원(KTL)이 선정한 ‘케이스타(K-STAR)’ 10개 기업에 엘리베이터 업체 중에선 유일하게 포함됐다. KTL은 우수 중소기업을 케이스타 기업으로 선정해 글로벌 중견 수출기업으로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경남지방중소기업청으로부터 ‘취업하고 싶은 경남 우수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대표는 “9년째 사업을 운영하며 한 번도 장애가 걸림돌이 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각종 공공입찰에서 ‘여성기업’ 혹은 ‘장애인기업’으로 가산점을 받았다”며 “내년에는 더욱 수출에 주력해 회사 규모를 키워 고용에도 더 나서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스타리프트는 몽골과 태국, 방글라데시 등 동남아와 중동 지역 10여 개국에 엘리베이터를 수출하고 있다.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최태원 SK그룹 회장(55)이 부인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54)과 이혼하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혼외자가 있다는 사실도 고백해 파장이 일고 있다. 하지만 노 관장은 “이혼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최 회장이 ‘광복절 특사’로 풀려나 경영에 복귀하면서 활력을 되찾아가던 SK그룹으로서는 4개월 만에 또다시 대형 ‘오너 리스크’에 직면하게 됐다.○ 갑작스러운 심경 고백 최 회장 부부는 미국 시카고대 유학 시절에 만나 노 관장의 아버지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집권한 1988년 결혼식을 올렸다. 최 회장 부부는 2000년대 중반부터 사이가 멀어져 2009년 말 별거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최 회장은 한 신문사에 보낸 편지에서 “결혼 생활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점에 서로 공감하고 이혼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이어가던 중 우연히 마음의 위로가 되는 한 사람을 만났다”며 “수년 전 여름에 저와 그분과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고 고백했다. 2000년대 중후반 최 회장을 처음 알게 된 김모 씨(40)는 2010년 최 회장의 딸을 낳았다. 이혼녀인 김 씨는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10대 중반의 아들을 둔 것으로 전해졌다. 김 씨가 SK그룹으로부터 수억 원을 편법 증여받았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김 씨는 2008년 1월 서울 서초구 반포동 반포2차 아펠바움 244m2(약 74평) 아파트(2층)를 SK건설로부터 15억5000만 원에 산 뒤 2010년 4월에 SK그룹 계열사인 싱가포르 버가야인터내셔널에 24억 원에 팔았다. 이 아파트 시세는 입주 후 현재까지 20억 원 안팎으로 변동이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SK 계열사가 김 씨에게 싸게 팔고, 비싸게 되사 8억5000만 원의 차익을 안긴 것이 된다. SK그룹 측은 “김 씨가 미분양 물량을 사서 시세차익을 본 것은 맞지만 편법 증여는 절대 아니다”라며 “이미 2011년 검찰 조사에서 문제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해명했다. 김 씨가 딸을 출산한 이듬해인 2011년 최 회장은 가족에게 노 관장과 이혼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말에는 이혼소송 대리인을 지정하고 소장까지 작성했다. 하지만 500억 원대 투자금 횡령 혐의로 법정 구속되면서 법원에 접수시키지는 않았다.○ 오너 리스크가 또 SK 발목 잡나 SK그룹은 갑작스럽게 불거진 초대형 악재에 노심초사하고 있다. 최 회장은 2003년 2월과 2013년 1월 구속돼 각각 7개월, 2년 7개월 수감 생활을 했다. 수장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SK그룹은 사업 확장에 큰 어려움을 겪어왔다. 기업 경영과 관련한 문제로 법적 처벌을 받은 과거와 달리 이번 사안은 윤리적 문제와 결부돼 파급력이 더 크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 회장의 결단을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여론의 반응은 다소 차가운 편이다. 최 회장도 이를 예상한 듯 “제 불찰이 세상에 알려질까 노심초사하던 마음들을 빨리 정리하고 모든 에너지를 고객, 직원, 주주, 협력업체들과 한국 경제를 위해 온전히 쓰고자 한다”며 “제 가정 일 때문에 수많은 행복한 가정이 모인 회사에 폐를 끼치지 않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인사가 그룹 경영에 걸림돌이 돼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 치부를 스스로 공개해 논란의 싹을 자르겠다는 결단을 내린 셈이다. 하지만 경제 전문가들은 SK그룹이 큰 리스크를 짊어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한국은 기업 지배구조상 오너가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며 “아무리 개인사적 문제라 할지라도 오너의 결함은 외부 투자 유치나 향후 경영계획 수립 등 기업 경영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법원, 혼인파탄 책임물어 이혼청구 기각 가능성 ▼崔회장 측 협의이혼 시도할 듯4兆 주식 보유… 위자료 규모 관심‘고백’뒤 SKT 주가 6.52% 급락 이혼을 원하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달리 부인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가정을 지키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지면서 실제 이혼으로 이어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법무법인 지우 소속 이현곤 변호사는 “최 회장이 혼외자를 낳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며 “최 회장이 이혼 소송을 내더라도 이혼에 이르게 된 책임이 최 회장에게 있다고 보고 법원이 이혼 청구를 기각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재계에서는 최 회장이 소송을 하지 않고 합의를 통해 협의이혼을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만약 노 관장이 협의이혼에 동의한다면 최 회장이 위자료를 얼마나 내놓을지가 새로운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감독원 등에 따르면 최 회장은 SK㈜ 지분 23.4%, SK케미칼 지분 0.05% 등 총 4조1942억 원어치(29일 종가 기준)의 주식을 갖고 있다. 40억 원대 자택을 빼고는 부동산은 거의 없다. 노 관장은 SK㈜ 지분 0.01%와 SK이노베이션 지분 0.01% 등 32억 원 상당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지주회사인 SK㈜를 통해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는 최 회장으로서는 그 주식을 팔아 위자료를 지급한다면 그룹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될 수 있다. 이런 우려 때문인지 29일 국내 증시에서 SK그룹 주식들은 동반 약세를 보였다. SK텔레콤은 전날보다 6.52% 급락한 21만5000원에 거래를 마쳤다. SK㈜도 1.57% 하락했다. 김창덕 drake007@donga.com·박훈상·손택균 기자 박형준 lovesong@donga.com·정임수 기자}

《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그룹이 9월에 통합 삼성물산을 출범시키면서 일부 계열사 간 순환출자 지분이 늘어났다며 내년 3월 1일까지 관련 지분을 처분해야 한다고 27일 발표했다. 이는 2014년 공정거래법에 신규 순환출자 금지가 명문화된 이후 적용되는 첫 사례다. 삼성은 공정위의 결정을 수용하겠다고 밝혔지만 재계에서는 “저성장의 파고를 넘기 위해 기업들이 사업 재편을 해야 하는 마당에 너무 엄격한 법 집행”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사업 재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순환출자가 발생할 경우 처분 유예 기간을 현행 6개월에서 1년으로 연장하는 ‘원샷법’의 국회 통과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삼성그룹이 제일모직과 옛 삼성물산을 합병하는 과정에서 일부 계열사 간 순환출자된 지분이 합병 전보다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삼성은 늘어난 지분을 해소하기 위해 내년 3월 초까지 삼성SDI가 보유한 통합 삼성물산 주식 500만 주(약 7300억 원어치)를 처분해야 한다고 공정거래위원회는 27일 밝혔다. 재계는 지나치게 엄격한 법 해석 때문에 기업들의 사업 재편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며 지분 해소 유예기간을 6개월에서 1년으로 연장하는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원샷법)이 하루빨리 국회를 통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정위 “기존 순환출자 고리 강화” 공정위는 통합 삼성물산의 합병 과정에서 전체 순환출자 고리가 총 10개에서 7개로 줄었다고 판단했다. 다만 이 중 3개의 순환출자 고리는 합병 전보다 강화됐다고 봤다. 순환출자란 대기업집단(그룹) 내 계열사 A가 B로, B는 C로, C는 다시 A로 자본금을 출자해 계열사 간 지분 관계가 ‘고리’ 모양으로 얽히는 것을 말한다. 공정위는 공정거래법을 개정해 지난해 7월부터 대기업이 새로 순환출자 고리를 만들거나 기존 순환출자 고리를 강화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사업재편 과정 합병, 순환출자 제재 논란 ▼삼성SDI는 당초 옛 삼성물산 지분 7.2%와 제일모직 주식 3.7%를 갖고 있었다. 9월 초 옛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하면서 삼성SDI가 보유한 통합 삼성물산 지분이 합병 전보다 500만 주(통합 삼성물산 주식의 2.6%) 늘어났고, 이에 따라 일부 계열사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됐다는 게 공정위의 판단이다. 대표적으로 ‘옛 삼성물산→삼성전자→삼성SDI→옛 삼성물산’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에서 삼성SDI와 삼성물산 사이의 연결 고리가 굵어졌다는 것이다. 현행법상 기업 간 합병 과정에서 신규로 순환출자가 생기면 6개월 이내에 해당 지분을 처분하게 돼 있다. 삼성SDI가 6개월 시한인 내년 3월 1일까지 해당 주식을 처분하지 않으면 공정위는 주식 처분 명령과 함께 주식 취득액의 10% 이내에서 과징금을 부과하도록 돼 있다. 또 해당 회사 대표를 검찰에 고발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억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 삼성 “처분 기간 연장해 달라” 삼성 측은 공정위의 결정에 대해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3월 1일까지는 2개월여밖에 남지 않은 만큼 주식 처분 유예기간을 연장해 줄 것을 공정위에 요청할 방침이다. 문제가 된 주식을 매각해도 삼성의 승계 및 지배구조에 큰 영향은 없을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하지만 단기간에 통합 삼성물산 주식 500만 주를 시장에 내놓으면 주가가 폭락할 수 있기 때문에 삼성은 시장 충격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SDI가 시간 외 주식대량매매(블록딜) 방식으로 이 물량을 처리할 것으로 보고 있다”며 “다만 7300억 원이나 되는 대형 거래이다 보니 상대방을 찾고 매각 주간사회사를 선정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전했다. 삼성은 삼성전자 등 계열사가 자금을 대거나 통합 삼성물산 대주주인 이재용 부회장이 사재를 동원할 가능성은 검토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부회장은 이미 삼성엔지니어링 유상증자에 3000억 원 한도로 참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재계는 대기업의 사업 재편 과정에서 일어난 계열사 간 지분 증가를 순환출자 강화로 보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반응이다. 또 지분 해소 유예기간인 6개월이 너무 촉박해 자칫 헐값으로 계열사 지분을 매각하거나 사업 재편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본다. 송원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은 “합병 등 사업 재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발생한 계열사 간 출자 지분 증가에 대해서는 유예기간을 더 늘려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국회에 계류 중인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에 사업 재편 과정의 부득이한 지분 증가를 해소하는 유예기간을 6개월에서 1년으로 연장해 주는 내용이 담겨 있지만 야당의 반대로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태다.세종=김철중 tnf@donga.com / 김지현·박형준 기자}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한국이 참여하지 않으면 TPP 발효 후 10년간 수출손실액이 132억6000만 달러(약 15조5000억 원)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민간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은 24일 ‘TPP 체결에 따른 한국 부품소재산업의 무역효과 분석’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관세 완전 철폐 시 TPP 발효 후 10년간 글로벌 공급망 의존도가 높은 한국 부품소재산업의 대미(對美) 수출액이 113억 달러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대일(對日) 수출액도 19억6000만 달러 감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과 일본이 TPP 체결국 내에서 부품소재 수입을 늘리다 보니 한국의 수출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출손실액 규모는 부품소재산업 TPP 역내 수출액 중 17.9%에 해당한다. 대미 수출손실액을 산업별로 보면 수송기계 43억7000만 달러, 철강 19억1000만 달러, 전자 14억5000만 달러, 화학 17억1000만 달러 등이다. 대일 수출손실액은 화학 11억5000만 달러, 섬유 4억2000만 달러, 철강 3억9000만 달러 등이다. 최남석 전북대 무역학과 교수는 “2008년 이후 섬유, 화학, 기계, 전기, 전자, 자동차부품 수출의 글로벌 가치사슬 의존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TPP 체결로 만들어지는 아시아태평양지역 글로벌 공급망에서 한국 기업이 배제되면 부품소재산업의 직간접 수출에 타격이 예상된다”라고 지적했다. 또 “한국은 일본과 멕시코를 제외한 10개국과 이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지만 한국 기업이 수출하려면 복잡한 원산지 규정을 적용받아야 한다”며 “TPP는 하나의 원산지 규정을 공통으로 적용하기 때문에 TPP 체결국 기업이 더 높은 가격 경쟁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한국이 국제 신용평가사인 무디스로부터 사상 최고의 신용등급을 받았다. 미국 금리 인상의 높은 파고를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이날 LG경제연구원이 내년 한국의 성장률을 2.5%로 전망하고, 기업들은 수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등 체감 경기는 여전히 싸늘해 경각심을 늦춰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획재정부는 20일 “무디스가 18일(현지 시간) 한국의 신용등급을 Aa3(긍정적)에서 Aa2(안정적)로 한 계단 상향 조정했다”고 밝혔다. Aa2 등급은 전체 21개 신용등급 중 위에서 세 번째로 한국보다 높은 나라는 미국 독일 홍콩 등 7개국뿐이며 중국과 일본은 한국보다 각각 1, 2계단 낮다. 무디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피치 등 3대 국제신용평가사에서 한국이 상위 세 번째 등급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무디스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올린 이유로 선진국보다 높은 성장세, 재정건전성, 구조개혁 능력 등을 꼽았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이날 “이번 신용등급 상향 조정은 박근혜 정부 3년간의 경제 성과에 대한 무디스의 총체적 평가”라며 “미국 금리 인상으로 인한 외국인 투자자금 유출, 금융시장 변동성 확대, 실물경제 둔화 같은 우려로부터 한국 경제를 확실하게 차단하는 방어막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긍정적 평가와 달리 LG경제연구원은 이날 내놓은 ‘2016년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내년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전망치를 2.5%로 수정해 발표했다. ▼ 무디스, 실물경제보다 외채 갚을 능력만 평가 ▼9월에 발표한 2.7%보다 낮아진 것으로 정부 전망치인 3.1%는 물론이고 한국은행(3.2%), 현대경제연구원(2.8%) 등 주요 기관이 발표한 수치 중 가장 낮다. 수출 둔화가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데다 최근의 소비회복 효과도 내년에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LG경제연구원의 설명이다.전문가들은 무디스의 신용등급 평가가 주로 외환보유액 같은 채무상환 능력과 재정상황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경제상황을 총체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설명한다. 10대 그룹의 한 임원은 “재계엔 외환위기 때와 같은 위기감이 퍼져 있는데 국가 신용등급이 올라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이 때문에 무디스가 지적한 ‘향후 등급하향 요인’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무디스는 “현재 한국 정부가 추진 중인 구조개혁이 후퇴하고 공기업을 포함한 정부 재정이 악화되면 신용등급이 내려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양대 노총에 속하지 않은 93%의 근로자를 위해서라도 노동개혁을 해야 하며 규제로 묶여 있는 서비스업을 육성해 신성장동력을 발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세종=손영일 scud2007@donga.com·박형준·황태호 기자}
정부가 경제자유구역 등 전국에 무분별하게 난립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온 경제특구에 대해 대대적인 손질에 나선다. 20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기재부, 산업통상자원부, 미래창조과학부 등의 정부 부처들이 7월에 공동으로 경제특구의 현황과 문제점 등에 대한 연구 용역을 발주했고, 그 결과를 담은 보고서를 내년 1월에 받을 예정이다. 정부는 이를 토대로 경제특구에 대한 구조조정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동안 경제특구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지역별 나눠 먹기 식으로 지정돼 애물단지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에 대해 기재부 관계자는 “경제특구가 지역별 특색이 없는 데다 대규모 개발로 조성되다 보니 조성 기간이 오래 걸렸다”면서 “내년도 경제정책방향에 포함된 ‘규제 프리존’과의 연관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특구를 해제하거나 통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한국경제연구원은 국내의 경제특구에 입주한 외국인투자기업과 개발사업시행자 128개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한국 경제특구의 기업환경 수준은 싱가포르, 중국 상하이 등 9개 아시아 주요 경제특구 중 6위”라고 밝혔다. 특히 한국은 정부 규제, 행정 서비스, 고용조건 및 노사관계, 조세 인센티브 부분에서 최하위를 차지했다.세종=김철중 tnf@donga.com / 박형준 기자}

종합 안심솔루션 기업 에스원이 내년 사업계획을 짜는 경영전략대회에서 투병 동료를 돕기 위한 바자 행사를 열었다. 에스원은 18일 충남 천안에 있는 인재개발원에서 경영전략대회를 여는 도중 암, 희귀병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직장 동료를 돕는 ‘사랑 나눔 바자회’를 열었다고 20일 밝혔다. 경영전략대회에는 각 사업부의 부서장과 임원, 협력사 직원 등 400여 명이 참석했다. 경영전략대회 참석자들은 사업부별로 올해 성과와 내년도 경영계획을 발표했다. 발표 시간 동안 회사 측은 운동화, 옷 등을 진열한 판매대를 마련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육현표 사장을 포함해 참석자 대부분은 동료를 돕는다는 취지에 공감해 바자 물건들을 구매했다. 회사 측은 한 달 전부터 6200여 명의 에스원 임직원으로부터 의류와 생활용품을 기증받았다. 특히 경영진은 손목시계, 지갑, 미술품, 외식상품권 등 상품성 높은 물품들을 기증했다. 회사는 상태가 깨끗한 물품들을 엄선해 18일 경영전략대회장에 선보였다. 이날 바자회 현장에서 팔고 남은 물품은 에스원의 사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두잉두잉’을 통해 온라인 경매로 판매될 예정이다. 바자회에 앞서 에스원 여사우회가 9일과 10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주최한 ‘쎄시봉 일일호프’ 행사도 열렸다. 이틀간 열린 일일호프에는 1000여 명의 에스원 임직원이 다녀가 아픈 동료를 돕기 위해 힘을 모았다. 임석우 에스원 부사장은 “한 해 계획을 세우는 시점에서 주변 동료를 돌아보고 돕기 위해 이번 사랑 나눔 바자회와 일일호프 행사를 기획했다”며 “두 행사를 통해 모은 수익금 1억 원은 투병 중인 에스원의 임직원 및 가족들에게 전달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증권업계에 따르면 에스원은 올해 1조8508억 원의 매출액과 1927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사상 최대 매출액과 영업이익이다. 경영전략대회 참석자들은 올해의 좋은 실적을 바탕으로 내년에도 더 나은 성과를 거두자고 다짐했다.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동생처럼, 아들처럼 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28세 박민형(가명) 씨가 퇴직 인사를 하며 사무실을 한 바퀴 돌았다. 박 씨의 눈을 애써 외면하던 여사원 한 명이 울기 시작했다. 울음은 전염병처럼 번지더니 50대 남성 부장도 눈물을 흘렸다. 부장은 연신 “미안하다”고 말했다. 박 씨는 2012년 말 인천에 있는 한 대기업에 연구직으로 입사했다. 입사 후 인천에서 집을 구해 새로운 고향으로 삼았다. 그런데 지난달 갑자기 회사 인사팀이 경남 창원의 다른 계열사로 전직하도록 권고했다. “싫다”고 버텼더니 한 임원(상무급)이 자신의 방으로 오라고 했다. “회사 경영 상황이 무척 어렵다. 네가 안 나가면 너의 상사 중에 누가 나가야 한다. 너는 아직 20대고 가족이 없으니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 잘 한번 생각해 보라.” 박 씨는 결국 이달 8일 퇴직원을 제출했다. 인력 구조조정이 최근 재계의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다. 분위기는 마치 1997년 외환위기 직후와 비슷하다. 당시는 주로 인건비 부담이 큰 부장급 이상이 희망퇴직을 당했지만 지금은 신입사원과 대리까지로 연령대가 떨어졌다. 3분기(7∼9월) 기준 실업급여 신청자 중 20대와 30대가 41%를 차지했다. 사상 초유의 ‘2030 명퇴’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30대 그룹의 한 부사장은 “더 이상 자를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내년 정년 연장 시행을 앞두고 올해 재계 인사팀은 50대 간부 직원들을 최대한 솎아 냈다. 간부급 중에선 더 자를 사람이 없다 보니 구조조정의 화살이 점차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4대 그룹의 전무급 간부는 “내년뿐 아니라 후년 경기 전망도 어둡다. 외환위기보다 더 큰 충격이 올 수도 있어 전방위로 비용을 줄이고 있다. 상시적으로 희망퇴직을 받고 있고, 대상은 신입사원을 포함한 전 직원”이라고 말했다. 유난히 바람이 매서웠던 16일, 서울 강남구의 한 고깃집에서 대기업 마케팅팀 소속 직원 10여 명이 모여 송년회를 했다. 돌아가며 재치 있는 건배사를 외치며 호기롭게 폭탄주를 들이켰다. 그중 한 명이 “상무 2년 차에 잘린 그 선배 뭐하지”라고 한마디 내뱉자 갑자기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이 자리에서는 “착한 사람일수록 더 빨리 잘린다”는 푸념까지 나왔다. 을씨년스러운 2015년이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다.▼ “너희 회사는 괜찮니?” 부모님 전화에 말도 못하고… ▼20대 후반인 A 씨는 2013년 12월 두산인프라코어에 입사했다. 이달 초 회사는 전 사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공고를 냈다. 하지만 A 씨는 버텼다. 입사한 지 겨우 2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퇴직을 한단 말인가. 이 와중에 희망적인 뉴스를 신문에서 봤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신입사원에 대한 보호조치를 언급한 것이다. 자신도 살아남는 줄 알았다. 하지만 회사는 신입사원의 범주를 2014년 1월 이후 입사한 이들로 한정했다. 한 달 차로 자신은 구제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결국 A 씨는 최근 퇴직원을 제출했다. A 씨의 회사 동기 11명 중 9명이 희망퇴직했다. 동기 중 1명은 “못 나간다”고 버틴 끝에 같은 팀 과장급이 희망퇴직하면서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며칠 전 동기들끼리 술자리를 가졌다.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눈물이 쏟아졌다. 퇴직한 동기들은 대체로 공기업 입사나 7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했다. A 씨는 대학원을 알아봤다. 요즘 희망퇴직 후 공부하겠다고 나선 20, 30대 젊은이가 넘치면서 대학원 경쟁률이 치솟고 있었다. 지도교수를 만났더니 “대학원생 2명 뽑으려 하는 데 벌써 60명이 문의했다”고 말했다. ‘더 공부해 경쟁력을 높여도 국내에 갈 기업이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대학원을 졸업할 때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퇴직한 2030들이 대거 인력시장으로 몰려나오면 일자리 구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A 씨는 “아예 이민을 갈까 생각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A 씨는 부모님에게 퇴직 사실을 밝혔다. 하지만 동기 한 명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고 한다. 그 동기는 매일 PC방으로 출근한다. 부모님이 “너희 회사가 감원을 한다고 언론에 나오던데 너는 괜찮으냐”고 수시로 묻는다. 그때마다 그는 “별일 없다”고 둘러댔다. A 씨는 “2년 지난 직원을 내보낼 거라면 도대체 신입사원을 왜 뽑는지 모르겠다. 뭔가 한국 고용시장이 구조적으로 잘못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소리 소문 없이 진행되는 구조조정 한 전자 대기업은 7월 일부 사업을 분사했다. 인사팀은 “분사 사업부에 일하던 직원들은 모두 분사된 회사로 적을 옮기든지 희망퇴직을 하라”고 권고했다. 입사 5년 차인 B 씨(29)는 이적 거부 의사를 밝혔다. 회사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아는 일류 대기업에 입사했지 중소기업에 일하러 온 게 아니라는 것이 B 씨의 거부 이유다. 그랬더니 인사팀은 “일단 분사된 회사에 파견을 가 1년 반 동안만 ‘지원업무’를 하라”고 권유했다. 월급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새로운 상사, 동료와 일해야 한다. 1년 반 후에 제대로 본사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돌아왔을 때 희망 부서로 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일 못해 파견 나갔던 사람’이란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 결국 B 씨는 희망퇴직을 선택했다. 회사와 협의해 연봉의 2.5배를 위로금으로 받았다. 회사는 ‘잡음을 내지 말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B 씨는 “내 또래 퇴직자들을 보니 ‘결혼’이 중요한 변수인 것 같다. 결혼을 한 사람은 어떻게든 회사에 붙어 있으려고 했고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회사의 희망퇴직 요구에 비교적 쉽게 응했다”고 말했다. B 씨와 같은 그룹의 계열사에서 일하는 한 임원은 “지금 재계가 가장 몰두하는 게 ‘조용한’ 인력 구조조정이다. 인사팀은 ‘한번 고민해 보라’며 권유형으로 퇴직을 말한다. 그러고는 ‘퇴직금 플러스알파’를 제시한다. 회사 이미지를 고려해 잡음이 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싫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 2011년 중견 건설사에 입사한 C 대리(33)는 이달 초 인사 담당자로부터 희망퇴직 제안을 받았다. 인사 담당자는 “해외사업 상황이 안 좋아 50명 정도를 감원할 예정”이라며 “이달 안에 퇴직 의사를 밝히면 2년 치 연봉을 퇴직금으로 주겠다”고 말했다. 이 회사의 직원은 700명 정도다. 이 중 희망퇴직으로 7% 정도를 감원하겠다는 것이다. C 대리는 “사측이 희망퇴직을 강요하는 것은 불법”이라며 반발했지만 인사 담당자는 “내년에 퇴직하면 퇴직금이 깎일 수 있다”며 오히려 C 대리를 압박했다. 만약 C 대리가 끝까지 퇴직을 거부하면 인사팀은 최하 고과를 줄 것이 분명하다. 그럴 경우 연봉이 깎일 뿐 아니라 퇴직금도 대폭 줄어든다. 회사의 희망퇴직 권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외 수주 시장과 국내 주택 경기가 동시에 둔화되면서 건설업계도 구조조정의 된서리를 맞고 있다. 저유가 등으로 해외사업 여건이 악화되면서 매출 중 해외 부문 비중이 높은 회사들이 감원에 들어갔다. 삼성물산의 건설 부문은 지난해 9월 말부터 지금까지 임직원을 480명 이상 줄였다. 올해부터는 회사가 ‘상시적 인력구조 개선’에 나섰다. 희망퇴직 권고 대상자에는 사원급도 포함돼 있다. 위로금은 연봉의 2배 수준이다. 이에 앞서 3분기(7∼9월) 1조5000억 원 이상의 적자를 낸 삼성엔지니어링은 이달 초부터 전 직원이 돌아가면서 한 달씩 무급휴가를 내는 ‘무급순환휴직’을 시작했다. 삼성엔지니어링의 한 직원은 “감원을 막기 위해 사우회 측이 제안한 고육지책이었다”고 설명했다. 한화건설도 9월 부장급 이상 임직원을 대상으로 명예퇴직 신청을 받았다.금융권에도 칼바람 불어 저금리와 저성장으로 장기 침체에 빠진 금융권도 최근 대규모 인력 감축이라는 홍역을 앓고 있다. 인터넷 금융 이용자가 늘어 창구 업무가 축소되면서 금융권의 구조조정은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은 15일 전체 임직원의 18%인 961명을 내보냈다. SC은행은 2018년까지 직원 1만5000명을 감축하기로 한 SC그룹의 글로벌 구조조정 계획에 따라 지난달 만 40세 이상, 10년 이상 근속한 직원을 대상으로 특별퇴직 신청을 받았다. SC은행은 최근 대졸 공채 신입행원 50명 전원을 연봉제로 채용하는 등 성과주의를 확대하고 있다. 앞서 KB국민은행도 5월 대규모 희망퇴직을 실시해 1122명을 내보냈으며 희망퇴직을 매년 정례적으로 실시하기로 노조와 합의했다. 국민은행은 이르면 올해 안에 임금피크제 적용 대상자를 상대로 희망퇴직을 추가로 시행할 예정이다. 희망퇴직 대상자는 기존 임금피크제 대상 500여 명과 내년 임금피크제 대상자인 200여 명을 합한 700여 명이다. 우리은행도 임금피크제 대상자의 퇴직을 지원하는 ‘전직지원제도’를 통해 올해 상반기(1∼6월)와 10월 각각 192명, 13명을 감축했다. 내년에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NH농협은행도 대규모 희망퇴직을 계획하고 있다. 농협은행은 내년 임금피크제가 적용되는 만 56세 직원을 대상으로 4일부터 8일까지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는데 대상자 249명이 모두 희망퇴직을 선택했다. 매년 초 희망퇴직을 받는 신한은행의 경우 올해 초에 지난해의 2배가 넘는 311명이 퇴직했다. 신한은행도 내년에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예정이어서 내년 초 희망퇴직자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보험·카드업계에도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고 있다. 메리츠화재가 3월 희망퇴직으로 400여 명을 내보냈고 현대라이프생명도 7월 5년 차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신청받아 45명을 감축했다. 삼성생명은 10월 전직 지원 등을 통해 50명의 간부급 직원을 내보냈고 삼성카드도 같은 형태로 100명을 사실상 감원했다. 한 보험사에서 근무하는 D 씨(31)는 “요즘에는 제때 승진하지 못하면 40대 중반만 돼도 회사의 눈치를 보다 희망퇴직을 하거나 계약직으로 전환하는 선배가 많아졌다”며 “정년은 늘어나는데 희망퇴직 연령은 오히려 낮아지고 있어 긴장이 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붐비는 실업급여 창구 17일 오후 3시경 서울 중구 삼일대로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서울고용센터 1층 실업급여과. 40, 50대 장년층 20여 명이 실업급여 상담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실업급여라는 큰 글씨가 적힌 창구에서는 상담사들이 수급 자격을 설명하느라 분주했다. 그때 한 20대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와 준비해온 서류 뭉치를 꺼냈다. 얼마 전 결혼을 한 후 직장을 그만뒀다는 이 여성은 상담사에게 자신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 고용센터에서 약 1시간 동안 머무는 가운데 20, 30대 젊은 청년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직원 E 씨는 “고용센터가 위치한 곳이 서울 중구여서 대기업 동향을 피부로 접하게 된다”며 “올해 들어 대기업 퇴직자가 부쩍 늘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엔 적어도 20년 이상 근속한 분들이 퇴직 대상이었는데 요즘에는 단기 근속자도 많이 온다”라고 말했다. E 씨는 “실업급여를 받지 못한 한 30대 여성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 여성은 육아휴직 중에 회사로부터 ‘희망퇴직 프로그램’을 안내 받았다. 두 차례 임원 면담으로 희망퇴직을 권유받은 그 여성은 더 일하고 싶었지만 퇴직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성은 “휴직 중인 나에게까지 희망퇴직을 안내한 건 사실상 회사가 내보낸 거 아니냐”라며 실업급여를 신청했다. 하지만 ‘자발적 퇴직자’로 분류돼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었다. 퇴직하지 않을 시 인사상 불이익이 있었다는 것이 입증돼야 권고사직으로 보고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E 씨는 “그 여성이 일터로 복귀할 의사가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억울한 심정도 이해된다”고 말했다. 요즘은 정보기술(IT) 업종에서 30대 퇴직자가 많다. E 씨는 “경쟁이 치열하고 기업의 체질개선이 빠르게 이뤄지다 보니 전보다 희망퇴직의 연령대가 낮아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한국 기업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곽도영 now@donga.com·천호성·박민우 기자박형준 lovesong@donga.com·박은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