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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일제히 ‘독립 만세’라고 외쳤습니다. … 여학생 유관순도 … 고향 마을에서 부모님과 함께 집회에 참가했습니다. 일본 헌병대가 모인 사람들을 향해 발포하여 부모님은 살해당했습니다. 유관순도 체포되어 재판에 부쳐져 이듬해 10월 감옥에 갇힌 채 사망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조선 독립의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본 마나비샤(学び舎) 출판사가 만든 중학 역사 교과서에서 3·1운동에 대한 서술 가운데 유관순 열사(1902∼1920)를 다룬 대목이다. 이 교과서는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 있는 유관순 열사의 부조와 수형기록표 사진, 3·1독립선언서 요약본 등을 시각 자료로 싣는 등 3·1운동이 충실하게 서술돼 있다. 서술 분량은 2개 면에 걸쳐 있어 일본에서 사용되는 중학 교과서 중 최대다. 다른 중학 역사 교과서 7종은 분량이 보통 해당 교과서의 절반 이하이고, 두어 문장으로 끝낸 책도 있다.이 일본 역사 교과서는 시민단체 ‘아이와 배우는 역사 교과서 모임’(배우는 모임)이 설립한 마나비샤 출판사가 출간했다. 106주년 3·1절을 앞두고 동아일보와 e메일로 인터뷰한 야마다 레이코(山田麗子) 배우는 모임 부대표(71)는 “마나비샤 교과서는 민중과 여성,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사람들이 눈앞의 역사적 사건을 마주하고 다양한 형태로 임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야마다 부대표는 출판사 편집제작부 소속으로 교과서 제작에 참여했다. 야마다 부대표는 교과서의 3·1운동 서술에 대해 “유관순을 등신대(等身大) 소녀로 그려 부모와 그녀의 죽음에서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는 물음이 학생으로부터 터져 나오도록 기술했다”고 강조했다. 유관순 열사 역시 평범한 소녀였음을 드러내 학생들이 근본 원인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했다는 취지로 풀이된다.교사와 시민, 학부모 등 회원이 600여 명인 ‘배우는 모임’은 “아이가 계속 읽고 싶어지는 매력적인 교과서를 만들고 싶은 전현직 교사들이 2010년 만든 모임”이다. 2013년 설립한 마나비샤가 만든 중학 역사 교과서는 2015년을 시작으로 지난해 세 번째로 검정을 통과했다. 현장 경험이 풍부한 교사가 쓰고 역사 연구자가 감수한 것이 특징. 3·1운동 부분은 한국 교사들과 수업 교류를 해 온 미쓰하시 히로오(三橋廣夫) 씨가 집필했다고 한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일본 교과서는 주로 3·1운동을 1차대전의 종전과 민족자결주의 확산의 영향이라는 외부적 요인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마나비샤 교과서는 동양척식회사의 토지 침탈, 일본식 교육 실시 등 식민 통치의 문제점도 자세하게 다룬다. 야마다 부대표는 “근대 일본과 조선의 관계사도 동학농민군의 주장과 싸움, 동양척식회사의 토지 몰수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생각도 기술했다”며 “그런 큰 흐름 속에서 3·1독립운동도 쓰고 있다”고 했다. 교과서에 한반도에서 3·1운동 발생 장소를 지도로 표현한 그래픽과 함께 “3·1운동에는 약 110만 명이 참가했고, 4월 말까지 1200회 이상의 데모가 행해졌다”고 서술한 것도 같은 취지다. 야마다 부대표는 “이 운동이 생활에 뿌리내린 지역의 요구에 근거하고 있던 것을 기술했다”며 “당시 조선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학생들이 더 조사할 것을 기대하며 편집했다”고 했다. 해당 교과서는 일본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서술한 중학 역사 교과서 2개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91년 한국의 김학순의 증언을 계기로 하여, 일본 정부는 전시하의 여성에 대한 폭력과 인권침해에 대하여 조사를 했다. 그리고 1993년에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하는 정부 견해를 발표했다”고 ‘고노 담화문’ 요지와 함께 서술하고 있다. 다만 2021년 일본 각의 결정에 따라 “강제 연행을 직접 보여주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일본 정부 입장도 함께 기술했다. 현재 일본에서 마나비샤 중학 역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는 30여 곳으로 매년 약 4500명의 중학생이 쓰고 있다. 채택률은 약 0.5%지만, 일부 명문중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과 한국의 시민과 청년들 사이에는 문화를 통한 교류가 심화하고 있지만 역사 학습의 깊이는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돼 왔습니다. 한일의 친선과 우호를 위해서, 앞으로도 아이들이 넓은 시야로 배움을 깊게 할 수 있는 교과서 만들기에 노력하겠습니다.”(야마다 부대표)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어 버리는 것처럼 북핵 이슈를 한 번에 풀어보겠다.” 신문 등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문장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이 도대체 뭐기에 복잡한 문제를 대담한 행동으로 단번에 해결한다는 뜻으로 쓰일까.고대 프리지아는 내란이 거듭돼 혼란을 겪었는데, ‘이륜마차를 타고 오는 첫 번째 사람이 나라를 구하고 왕이 된다’는 신탁에 따라 고르디우스라는 농부가 왕으로 추대됐다. 고르디우스는 신전에 자신이 타고 온 마차를 기념으로 묶어 뒀다. 아무도 훔쳐 가지 못하도록 매듭을 아주 복잡하게 꼬아 묶었다. 이후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은 아시아를 지배하는 왕이 될 것”이라는 신탁이 나오자, 풀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러다 마침내 원정에 나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렸다는 얘기다.서강대 명예교수인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 등 서구 문학이론을 소개했고, ‘노인과 바다’ 등 명작을 다수 번역한 영문학자다. 그가 서양 고전에 뿌리를 둔 관용어나 고사성어 59개를 추려 유래를 설명했다.‘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는 동명 할리우드 영화(1939년)로 유명해진 말이다. 동명의 원작 소설(1936년)은 제목을 19세기 영국 시인 어니스트 다우슨의 다음과 같은 시구에서 따 왔다. “시나라(Cynarae)여, 나는 많은 것을 잊었노라, 바람과 함께 사라졌노라”. 흥미로운 얘기들에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동북아역사재단은 조선이 울릉도와 독도를 영토로 관리했음을 뒷받침하는 자료 ‘항길고택일기’(사진)를 동북아역사넷 독도아카이브에 19일 공개했다. 재단에 따르면 조선은 17세기 말부터 울릉도에 전임 도장(島長)을 둔 1895년까지 약 200년간 수토(搜討)제를 운영했다. 수토관들은 3년마다 울릉도 등을 방문해 실태를 조사한 뒤 중앙정부에 보고했다. 18∼19세기엔 빈도가 늘어 2년마다 수토가 시행됐으며, 수토제는 1900년 울릉군(鬱陵郡)의 설치로 이어졌다. ‘항길고택일기’는 수토에 쓸 재원과 선박, 삼척 영장(營將)의 부임 등 생생한 수토 현장의 기록을 담고 있다. 재단 측은 “일기를 통해 수토선의 출발지가 삼척 평해 울진 등으로 다양했다는 점, 정기 수토 외에 불시 점검 성격의 수토도 시행됐다는 점 등 다양한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기는 책력(달력)의 여백에 해당 일자에 벌어진 일들을 적은 메모 형태다. 18세기 중반부터 120여 년간 삼척부 용정리(현 강원 동해시)에 있던 항길택(恒吉宅)에서 작성한 12책이다. 2018년 강릉 김씨 감찰공파로부터 기증받은 고서 483책과 고문서 1070여 점 가운데 일부다.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이 자료가 독도 영유권 연구에 적극 활용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이 독도를 영토로 편입했다고 억지 주장하는 ‘시마네현(島根縣) 고시’ 120년을 맞아 이를 비판하는 관련 학술대회가 잇따라 열린다. 일본은 1905년 2월 22일 “다케시마(竹島)는 주인이 없는 무주지”라며 독도를 시마네현의 오키도사(隱岐島司) 소관으로 불법 편입했다. 시마네현은 2005년 이날을 ‘다케시마의 날’로 지정했다. 영남대 독도연구소와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해양법·정책연구소는 26일 경북 경산시 영남대 법학전문도서관에서 ‘1905년 독도 편입의 불법성에 관한 학제간 연구’ 학술대회를 연다. 박지영 독도연구소 연구교수는 ‘일본의 독도 편입 과정에 관한 역사적 고찰’을 발표하고 독도 어업을 독점하기 위해 설립된 죽도어렵합자회사가 일본 국내법도 어겼음을 지적한다. 오시진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부교수는 ‘식민주의와 선점 권원의 국제법 법리 검토’에서 일본이 1905년 당시 주장한 ‘무주지 선점 법리’ 자체의 허점을 밝힌다. 이 밖에 ‘1905년 시마네현 고시에 관한 비판론 재검토’(최지현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일본의 독도 영토편입 조치의 법적 성격에 대한 고찰’(홍성근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 등도 발표될 예정이다.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는 25일 서울 서대문구 재단 대회의실에서 독도 침탈의 배경이 된 러일전쟁과 관련해 ‘러일전쟁과 영토의 지정학적 조명’을 주제로 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머핸(A T Mahan)이 바라본 러일전쟁과 러일해전’을 주제로 러일전쟁을 지정학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요르그 도스탈 서울대 교수는 ‘냉전 전후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개념과 독일-러시아 관계’를 통해 냉전 이후 전략이 고전적 지정학 사상에 따라 결정됐다고 지적한다. ‘러일전쟁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러일관계’(이나바 지하루 일본 메이조대 교수), ‘20세기 초 유럽에서의 러시아 문제와 고전 지정학의 형성’(이진일 성균관대 교수) 등도 발표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시 한 구절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2020년 10월부터 동아일보에 2주마다 게재한 칼럼 ‘한시를 영화로 읊다’가 20일 연재 100회를 맞았다. 6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 만난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는 “햇수로 연재 6년째를 맞았다”며 “매회 칼럼을 온라인에 갈무리하는 독자도 생겼고, 감상문을 보내오는 분들도 있다”며 웃었다. 임 교수의 칼럼은 한문을 낯설어하는 세대가 늘어나는 오늘날에 누구에게나 익숙한 현대 매체인 영화를 매개로 한시를 쉽게 소개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 임 교수는 앞서 대학에서 비슷한 교양강의를 했는데 ‘한시는 어렵고 케케묵은 것이라는 편견을 깼다’ 등 호평을 받았던 게 칼럼의 계기가 됐다고 한다. 임 교수는 “젊은 세대는 꽤 어려운 영화도 곧잘 감상하는데, 한시는 영화보다 감상이 훨씬 쉽다”며 “영화의 감성을 끌어오면 더 쉬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대학생 시절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등 원래 영화를 좋아했다고 한다. 영화라는 장르는 시작부터 한시와 친연성이 있다고 했다. “소련 영화감독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이 몽타주 이론을 가다듬을 때 한시에서 기원한 일본 하이카이(俳諧)의 영향도 받았거든요.” 임 교수가 연재한 칼럼에선 거장의 만남이 빈번했다. 5회에선 중국의 시성(詩聖) 두보와 현대의 자장커(賈樟柯) 감독이 함께 고단한 삶에 관한 ‘산수화’를 그렸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와 영국의 린지 앤더슨 감독이 나란히 노년의 삶에서 보물을 건져 올리는 43회도 화제를 모았다. 카메라 워킹과 시인의 시선이 글을 통해 겹쳐지는가 하면, 동양의 미학적 이미지와 서양의 역사적 트라우마가 교차했다. 임 교수는 한시 의상(意象·이미지) 연구가 전공으로 ‘조선중기 한시 의상 연구’ ‘전형과 변주’ ‘나의 장례식’ 등의 저서를 냈다. 그는 “한국의 한시는 중국 시의 영향이 압도적이지만, 변화를 거치며 중국과는 다른 시가 쓰였다”며 “방대한 한국 한시를 인공지능(AI)을 활용해 통시적으로 연구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했다. 임 교수의 칼럼들은 한시와 영화를 넘나들며 ‘구체적 인간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짙었다. “과거에 실패한 양반이 남긴 한시는 ‘패배자의 노래’죠. 저는 그런 작품들이 더 와닿습니다. 한시를 통해 지난날에도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고, 그에 대한 답을 어떤 식으로 찾았거나, 또는 답 찾기에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삶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동아일보와 고려대, 중앙중고교를 세우고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의 70주기 추모식이 18일 오전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 고인의 유택 앞에서 거행됐다. 추모식에는 김재호 동아일보·채널A 회장 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을 비롯한 유족과 이진강 인촌기념회 이사장, 김동원 고려대 총장 등 각계 인사 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는 추모 묵념에 이어 고인 약력 보고, 추모사, 고인의 육성 듣기, 분향 및 헌화의 순서로 치러졌다. 최맹호 동우회장은 약력 보고에서 “인촌 선생은 독립을 위해 민족교육, 민족산업, 민족언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민의에 바탕을 둔 자유민주제도의 확립을 평생의 과업으로 추진했다”고 했다. 이진강 이사장은 추모사에서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그리고 6·25전쟁 시기에 인촌 선생은 소명 의식을 발휘해 아무도 걷지 않았던 길을 제시하고 스스로 개척했다”며 “손해가 나도 바른길이면 꿋꿋하게 걸어간 선생의 공은 그대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평생 한국 언론사를 연구해 온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추모사에서 “인촌 선생은 민족운동의 구심점이었고 현대사에 발자취를 남긴 애국의 거목으로, 언론과 교육기관을 동시에 운영한 유일한 지도자”라며 “공선사후(公先私後)의 정신으로 대한민국의 기초를 다지는 역할을 수행한 선생의 애국애족이 더욱 그리워진다”고 추모했다.인촌을 ‘인생의 스승’으로 모셔 온 105세의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이날 영하의 날씨에도 추모식에 참석해 분향한 뒤 “병중이신 선생께 세배하러 갔을 때 ‘김 선생, 오셨구려’ 하고 맞아주시더니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위해 여러 번 기도하셨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나이가 들고 보니 나라를 걱정하는 선생의 마음을 젊은 후배 세대들이 잘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며 “가르침을 주신 선생께 꼭 인사하러 오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연극배우 최초로 인촌상을 받은 박정자 배우는 “선생은 나라의 기틀을 잡으신 분”이라고 했고, 2022년 수상자인 김인환 고려대 명예교수는 “젊을 때부터 여러 은사님들로부터 인촌 선생의 큰 뜻과 포용력에 대해 들어 항상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왔다”고 했다. 2023년 인촌상을 수상한 김종규 전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은 “국내에서 일제의 핍박을 견디는 것이 얼마나 힘드셨겠는가”라며 “그런 가운데서도 교육과 언론, 민족문화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신 선생의 헌신을 높이 기리고 싶다”고 말했다.“민주주의 기틀 다져 대한민국 건국 앞장서”인촌 선생 70주기 추모사민족과 나라를 위한 인촌 선생의 생각과 실천은 헌신적이고 크고 숭고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6·25전쟁 때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는지 지금 우리는 감히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역사에서 민족의 존망이 걸린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선생께선 교육으로 나라의 기초를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중앙학교와 고려대를 세우고, 경성방직을 창업해 산업으로 나라에 보답하셨습니다.동아일보를 창간함으로써 나라의 힘을 키워나갈 동력을 굳건히 하셨고, 민주주의 기틀을 다져서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데 앞장서셨습니다. 선생께서는 아무도 걷지 않았던 길을 제시하고 스스로 개척하셨습니다. 이는 선생의 소명 의식이 빛을 발휘한 덕분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선생의 젊은 시절 행적을 좇아가면서 다시 깨닫게 된 선생의 용기와 혜안에서 저희의 왜소함을 느꼈습니다. 중앙학교, 보성전문을 인수하고 동아일보를 창간하시며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이를 지켜내신 인내와 뚝심 앞에서는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고 존경의 마음이 가득 찼습니다.인촌 선생에 대해 배우는 과정에서 알게 된 제일 큰 선생의 덕목은 아래와 같다고 감히 말씀 올립니다.“선생께서는 설령 이익이 보여도 그게 바른길이 아니면 가지 않으시고, 손해가 나도 그게 바른길이면 그래도 꿋꿋하게 걸어가셨습니다. 또 선생께서는 큰 공적을 이루고도 이를 내세우거나 거기에 기대지 않으셨습니다. 그 공은 어디로 가지 않고 그대로 지금까지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강조하고 실천하려고 하셨던 건 ‘통합의 리더십’입니다. 민족의 스승이셨고, 국가의 큰어른이셨던 선생의 명복을 빌며 삼가 추모의 글을 올립니다.“독립 위해 민족의 역량 강조했던 선각자”인촌 선생 70주기 추모사인촌 김성수 선생은 언론인, 교육자, 정치인, 사업가로서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되신 분이며, 한국 현대사에 폭넓은 발자취를 남기신 애국의 거목이십니다. 국내에서 일제의 압제를 몸소 겪으며 광복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선생은 한민족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언론과 교육을 통해 민족의 자주적 역량을 배양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한다는 사상을 실천했던 선각자였습니다. 일제 패망 이후 좌우익이 대립하던 혼돈의 시기에는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해 독재에 반대하는 세력을 결집해 대한민국의 기초를 다지는 역할을 수행하셨습니다.선생의 70주기를 맞아 불멸의 업적과 공선사후 정신을 돌이켜 보면서 선생의 업적과 애국애족 정신이 더욱 그리워짐을 느낍니다. 선생은 국내에서 문화적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주역이셨습니다.동아일보와 보성전문, 중앙중학은 민족 진영 인사들의 활동 무대이자 은신처였습니다. 민족 사학의 기틀을 다지고 오늘날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고려대라는 학문의 전당을 육성하였습니다. 1920년 창간한 동아일보는 총독부의 탄압을 견디면서 삭제, 압수, 정간, 언론인의 투옥 등 사법 처분의 가시밭길을 헤쳐 왔습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던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지운 사건은 언론의 가장 상징적인 항일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기업가로도 큰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1917년 경성직유주식회사를 인수해 2년 뒤 경성방직주식회사로 명칭을 바꾸면서 민족기업 육성에 기여하셨습니다. 1923년 물산장려운동도 선생의 참여로 추진되었던 캠페인이었습니다.선생은 교육과 문화운동이라는 장기적인 사업을 추진하여 독립을 쟁취하고 독립 이후의 국가 건설에 대비하겠다는 현실적인 방안을 택했습니다. 민족 정신을 함양하고 실력을 기르는 일은 민족의 먼 장래를 기약하는 실질적 방책이었습니다.남양주=김기윤 기자 pep@donga.com남양주=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우리 근대의 뿌리는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일부 유학자의 사상이 아니라 주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한 이들로부터 찾아야 합니다. 조선 후기 낙동강 유역에서 수해와 싸우고 기업적 경영을 했던 ‘혁신 유림(儒林)’이 바로 그들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 장서각 고문서연구실장을 지냈던 고문서 전문가 안승준 박사(65)는 10일 경기 수원의 연구실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과거 낙동강과 지류인 남강 등은 홍수로 자주 범람했고, 방대한 땅은 옥토가 되기도 황무지가 되기도 했다. 이때 주민들이 ‘물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협력하고 갈등하는 과정에서 우리 근대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실학(實學)이나 전통적 공업의 발전 등에서 근대적 발전의 싹을 찾으려 했던 기존 연구와는 출발부터 다른 주장이다. 1996년부터 한중연에서 일하며 전국 고문서 43만여 점을 조사 및 수집, 정리, 간행한 안 박사는 “혁신 유림 집안에서 경제활동과 관련된 대규모 고문서가 만들어진 것 자체가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특히 그가 근래 입수해 주목한 것은 17∼19세기 경남 의령군 부림면 신반(新反)의 보림리(寶林里) 주민들이 남긴 고문서다. 보림리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수해를 막기 위해 낙동강 지천인 신반·유곡천 유역에 버드나무 숲을 조성하고 계(契)를 통해 보존해 왔다. 1696년부터 100년 넘게 10여 리에 걸친 이 수림 지역을 전답으로 개발할 것인가, 아니면 숲으로 그대로 유지해 수익을 학교 재원으로 전환할 것인가를 두고 소송을 벌였다. 안 박사는 “혁신 유림을 중심으로 주민들은 치열한 논쟁과 법정 공방 끝에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안을 도출했다”며 “우리 근대는 소송과 함께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안 박사는 최근 경상국립대 경남문화연구원 진주학연구센터가 주최한 컬로퀴엄에서 이 같은 연구를 발표했다. 안 박사에 따르면 진주 남강 하류의 마진(麻津)마을 재령 이씨 집안도 선비이면서 영농에 힘쓴 유농(儒農)이자 혁신 유림이다. 이 집안은 4만 그루에 이르는 임업과 대규모의 목축업을 경영했지만 정부가 수탈하려 하자 이에 맞서 소송전을 벌였다. 안 박사는 “재산 현황 등을 잘 아는 노비들로 소송에 대응하는 전문 팀을 꾸릴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이 지역의 이러한 풍토는 훗날 관(官)의 착취에 저항해 일어난 진주 민란으로도 이어진다. 마진마을은 삼성과 LG, GS, 효성 등 기업의 창업주들이 태어나 자라면서 교류한 경남 진주 승산마을과 5km 거리다. 안 박사는 “혁신 유림의 정신이 오늘날 글로벌 기업이 태어나는 바탕이 됐다고 본다”며 “조선 후기부터 오늘날까지의 발전을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내용은 고문서를 읽어야 비로소 알 수 있고, 조선왕조실록엔 안 나옵니다. 고문서의 조사, 정리, 해제, 탈초(脫草·초서 등을 읽기 쉬운 필체로 바꿈)가 역사학의 기초입니다. 이런 업무를 연구 업적으로 제대로 인정해 줘야 우리 역사학과 인문학의 기초가 탄탄해질 겁니다.”수원=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웨딩드레스가 오늘날과 같은 스타일로 정착한 데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이 한몫했다. 전통대로라면 여왕은 결혼식에서 군주의 위엄을 상징하는 호화로운 붉은 벨벳 가운을 입어야 했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당시 영국 상류층의 세련된 신부들이 채택하던 ‘공주 드레스’ 스타일로, 흰색 새틴(광택이 있고 매끄러운 직물) 위로 레이스를 장식한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자신이 손수 디자인한 것이었다. 여왕은 또 참석자들의 관심이 자신에게 집중되도록 “식장에 아무도 흰색 드레스를 입고 오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민폐 하객룩 금지’의 원조인 셈이다. 이탈리아 볼로냐대에서 패션을 공부한 저자가 르네상스 이후부터 19세기까지의 초상화를 매개로 서양의 패션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1783년 그려진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의 초상화는 시골 소녀 스타일로 보인다.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평안하고 목가적인 느낌을 준다. 하지만 당대 프랑스인은 격렬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마치 ‘속옷(슈미즈)만 입은 채 정신도 집에 두고 나온 듯한 여인의 모습’으로 느꼈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은 ‘오스트리아 여자’ 앙투아네트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고, 중상모략도 난무했다. 소란은 ‘격식을 갖춘’ 새 초상화가 공개되자 진정되긴 했지만 기존 초상화가 왕비를 단두대로 이끄는 계기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흥미로운 역사와 함께 당대의 패션 리더들이 그려진 여러 초상화 도판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지난해 외국 용어를 우리말로 ‘다듬은 말’ 가운데 “혈당 스파이크”를 바꾼 “혈당 급상승”이 국민이 생각하는 가장 잘 다듬은 말로 꼽혔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은 “국민 수용도 조사 결과, ‘혈당 급상승’과 함께 ‘금리 대폭 인하’(빅 컷) ‘역량 강화’(업스킬링) ‘금리 소폭 인하’(스몰 컷) ‘가치 향상’(밸류업) 등이 잘 다듬은 말로 꼽혔다”고 10일 밝혔다. 반려동물 돌보미(펫 시터)와 책 소개 영상(북 트레일러), 교차 검증(크로스 체크)도 순위에 올랐다. ‘다듬은 말’은 지난해 3∼12월 전문가 논의와 국민 2500명 대상 수용도 조사를 거쳐 국어심의회 국어순화분과위원회가 최종 결정했다. 쉬운 우리말로 바꿔야 한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던 용어는 ‘옴부즈퍼슨’이 꼽혔다. 이 말은 어린이의 권리가 침해당했을 때 보호하고 구제하는 역할을 하는 대리인을 뜻하는데, ‘아동 권리 대변인’으로 다듬어졌다. 오프 리시는 목줄 미착용, 리스킬링은 직무 전환 교육, 풀필먼트는 물류 종합 대행으로 쓰길 권장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국립중앙박물관이 조선 회화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강세황(1713∼1791)의 ‘자화상’(보물·사진)을 비롯해 회화 26건을 새로 선보인다. 박물관은 상설전시관 서화실 전시 작품을 교체하고, 지난해 구입한 ‘자화상’과 국외박물관 한국실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보존처리를 마친 19세기 ‘호렵도(胡獵圖)’ 등을 공개한다고 최근 밝혔다. 강세황이 70세에 그린 이 자화상은 관복을 입을 때 쓰는 오사모(烏紗帽)를 쓴 채 옷은 평상복을 입은 것이 특징이다. 박물관은 “‘마음은 산림에 있으나 몸은 조정에 있다’는 그림 속 글귀와 연결되는 것으로, 현실과 이상의 모순을 형상화했다”고 설명했다. 호렵도는 미국 클리블랜드박물관 소장 작품으로 금니(金泥·아교에 개어 만든 금박 가루)를 사용해 장식성을 높였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 매 그림의 독창성이 드러난 정홍(1720∼?)의 ‘해돋이 앞의 매’ 등 세화(歲畫·새해를 축하하는 그림), 겨울 풍경과 사냥 장면 그림 등이 전시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08년 어느 날 전북 군산. 일본 유학을 준비하던 17세 남성이 상투를 잘랐다.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항증(渡航證)을 막 얻은 참이었다. 아버지를 비롯해 부안군 줄포에 있는 집안 어른들은 장손인 그의 유학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일본행 배를 타기 이틀 전, ‘모친 급환’이란 편지와 함께 줄포에서 머슴이 그를 데리러 왔다. 급히 본가로 가던 남성은 편지가 자신의 일본행을 만류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채고 다시 군산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부모에게 용서를 비는 편지를 쓰고 상투 자른 사진을 찍어 보낸 뒤, 친구와 함께 시모노세키행 배에 오른다. 그는 훗날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경성방직과 고려대를 설립한 인촌 김성수 선생(1891∼1955)이다. 함께 유학한 친구는 그의 평생 동지로 동아일보사 사장과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 고하 송진우 선생(1890∼1945)이다. 만약 두 사람이 당시 유학을 가지 않고 발길을 되돌렸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인촌탐사’는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지낸 이진강 인촌기념회 이사장과 황호택 전 동아일보 논설주간이 인촌 선생의 발자취를 탐사한 책이다. 책 표지에 실린 문구 ‘밝은 길을 찾아가다’는 인촌의 발자취를 되짚어가는 저자들의 취재 과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6년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인촌은 자신의 꿈이던 교육 사업에 뛰어들었다. 백두산에서 이름을 따온 ‘백산학교’ 설립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는 불허했다. 하지만 인촌은 부친을 설득해 얻어낸 자금으로 1915년 경영난에 빠진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처음엔 이마저 허가하지 않던 총독부의 세키야 학무국장을 설득할 당시 대화가 전해진다. “청년을 교육해서 무얼 하려는가.”(세키야) “우리 민족도 남과 같이 잘 살게 하고 싶소.”(인촌) “바보 같은 소리! 조선인의 교육은 조선총독부가 잘하고 있다.”(세키야) 하지만 인촌은 대학 인맥까지 동원해 결국 허가를 얻었고, 중앙학교는 3·1운동의 책원지(策源地)이자 민족교육의 터전이 됐다. 인촌은 첫 부인 고광석 여사를 여읜 뒤, 정신여학교 학생으로 3·1 만세 시위에 가담했다가 일경으로부터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른 이아주 여사(1899∼1968)와 재혼했다. 이 여사의 애국정신에 감복했기 때문이었다. 전언에 따르면 이 여사에겐 일본 순사에게 채찍으로 맞아 난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인촌의 넷째 아들 김상흠(1919∼1991)은 1939년 항일결사 단체인 조선학생동지회를 결성했다가 일제에 적발돼 1년 넘게 복역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당시 사건으로 연락책이던 며느리 고완남(1920∼1991)도 체포돼 고문을 당하고 혹한의 함흥형무소에서 아이를 유산했다. 저자들은 “인촌은 첩첩산중에 밤길을 가는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여러 관련 장소를 직접 다니며 ‘발로 쓴’ 책이어서 현장의 분위기가 살아있다. 이 이사장은 “인촌이야말로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와 격랑의 해방공간을 살면서 민족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나라의 독립,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온 힘을 쏟은 민족교육의 선각자요, 문화민족주의자이자 인간자본의 표상임을 깨닫게 됐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해방 뒤 중간파 세력은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닙니다. 일제강점기 사회민주주의자들이라는 역사적 연원이 있어요.” 최근 연구서 ‘또 다른 사회주의―한국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역사비평사)을 펴낸 윤덕영 연세대 국학연구원 전임연구원(63)은 지난달 23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이 책은 한국 사회민주주의의 기원을 처음으로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은 연구의 결과물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30년을 근무한 윤 연구원은 2022년 퇴직 이후에도 일제강점기와 해방 뒤 좌우파 민족운동의 연속성을 규명하는 데 매진해 왔다.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운동이라고 하면 대개 박헌영(1900∼1955)이나 조선공산당 등 공산주의운동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윤 연구원에 따르면 1920년대 중후반부터 소련 및 코민테른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이가 적지 않게 생겨났다. 상당수는 사회주의뿐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사회민주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됐다고 한다. 윤 연구원은 “일제강점기엔 사회민주주의운동이 없었다는 게 기존 학계의 시각이었다”며 “정치적 자유가 억압된 식민지라 의회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우파그룹은 없었지만 ‘좌익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1920년대 초에 시작된 물산장려운동 역시 민족주의 운동이란 통념과 달리 운동 초기엔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운동의 성격이 더 컸다고 한다. 윤 연구원은 “물산장려운동의 전국화를 주도한 건 조선청년회연합회와 배후의 상해파 고려공산당 국내부(국내 상해파)였는데, 주도 인물인 장덕수(1894∼1947)와 나경석(1890∼1959) 등이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낙후한 사회경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자본가와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인식했으며, 합법 투쟁도 중시했다. 윤 연구원은 “그들은 민주주의적 권리와 자유, 경제적 제반 권리를 위한 투쟁, 민족 차별 철폐 등 민주주의 민족운동을 중시했다”며 “민족혁명이 이런 민주주의적 과제를 이뤄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은 해방 이후로도 이어졌다. 중국에서 민족유일당운동에 앞장섰던 원세훈(1887∼1959), 북풍파 사회주의그룹의 지도자인 김약수(1890∼1964), 사회주의 이론가로 유명했던 유진희(1893∼1949) 등이 사회민주주의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한국민주당에 참여해 한민당이 진보적 사회경제 정책을 천명하는 데 일조했다. 앞서 윤 연구원은 초기 한민당이 보수적 지향에서 우파 사회주의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연합 정당이었으며, 결성 당시 한민당과 자매단체인 국민대회준비회의 부장급 이상 간부 36명 중 90% 이상이 민족운동 관련자라는 걸 실증한 바 있다. 윤 연구원은 “1946년 좌우합작운동을 계기로 한민당에서 탈당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민중동맹’ 등 해방 정국의 중간파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윤 연구원은 2023년 발간한 연구서 ‘세계와 식민지 조선의 민족운동’(혜안)에서는 민족운동을 ‘타협’과 ‘비타협’ 구도로 설명하는 기존 연구의 한계를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이런 구분은 실증적으로도 맞지 않고, 민족운동에 대한 이해를 협소한 틀에 가둔다”며 “당대 세계의 사상사적 흐름 속에서 일본과 서구의 정치사상 및 운동의 전개를 동시적으로 비교 분석해야 비로소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해 식민지 조선에서 벌어진 민족운동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요즘은 설이 아니어도 한복 맵시를 뽐내며 고궁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한복의 우아함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특히 많은 이들이 아름답다고 손꼽는 게 치마의 풍성함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최근 발간한 ‘한국 복식 문화사’에 실린 글 ‘조선 후기 여성 패션과 아름다움’(이민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전통한국연구소 연구원)을 통해 우리가 아는 한복 치마와 저고리가 어떻게 등장했는지 들여다봤다.한복 치마를 살피려면 먼저 그와 짝을 이루는 저고리의 변화를 들여다봐야 한다. 이민주 연구원에 따르면 조선 후기로 가면서 여성의 저고리는 길이가 극도로 짧아졌고, 소매통은 좁아져 팔뚝의 선을 드러냈다. 이런 저고리는 유학자의 눈엔 ‘요망스러운 옷’으로 보였다. 이덕무(1741∼1793)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이렇게 썼다. “소매에 팔을 꿰기가 몹시 어려웠고, 한 번 팔을 구부리면 솔기가 터졌으며, 심한 경우에는 팔에 혈기가 통하지 않아 살이 부풀어 벗기 어려웠다. 그래서 소매를 째고 벗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요망스러운 옷일까.” 그러나 이 연구원은 “이런 옷이 노소와 신분을 따지지 않고 확산했던 건 누구나 인정하는 아름다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봤다.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면서 치마는 자연스레 가슴 위로 올려 입게 됐다. 그 속으로 껴입은 속옷은 치마를 부풀리는 효과가 있었다. 여성성을 강조한 ‘하후상박(下厚上薄)’형의 새로운 치마저고리 스타일이 탄생한 것이다. 이런 스타일은 이전까지 한국인이 착용했던 치마저고리와는 전혀 달랐다. 고구려 이후 조선 초까지도 저고리 길이는 엉덩이까지 내려왔고, 치마는 허리에 둘러 입었다. 이 연구원은 “17∼18세기 서양에서 여성성을 강조한 스타일이 유행한 것과 비슷한 흐름 속에서, 한복 치마 역시 착장법(着裝法)이 창의적으로 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슴 위로 올라와 흘러내리는 치마 끝을 누르느라 팔이 불편해지자 이를 보완하기 위해 허리띠를 사용했다. 치마의 색은 대체로 푸른색이었는데, 저고리 아래로 치마 색과 대비되는 흰색의 말기를 넓게 대 허리를 강조하기도 했다. 오늘날로 치면 ‘하이웨이스트’ 스타일로 다리가 길어 보이는 효과를 낸 셈이다. 몇 년 전부터 일부 중국인은 한복을 ‘한푸(漢服)’라고 부르며 치마저고리마저 중국 명나라의 옷이라고 억지 주장하고 있다. 이에 관해 이 연구원은 “중국은 심의(深衣·춘추전국시대 등장한 상하의가 하나로 이어진 옷)의 원피스형과 유군(상의에 유·襦, 하의에 군·裙을 입는 방식)의 투피스형이 공존하다가 청나라 때 치파오를 입으며 다시 원피스형으로 발전했다”며 “반면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후 줄곧 투피스형의 치마저고리를 착용했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원은 이어 “복식은 늘 살아 숨쉬는 문화적 산물”이라며 “오랜 세월 한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과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직물을 바탕으로 당시 사람들의 미의식을 반영해 형성된 복식이야말로 진정한 ‘전통’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이 약탈해 간 불상이 다시 돌아오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불상의 가치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한일 양국의 교류 전시회 등을 고민 중입니다.”충남 서산 부석사 주지 원우 스님은 24일 고려 시대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절에 돌아온 것을 알리는 고불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14세기 제작돼 일본으로 건너간 이 불상은 2012년 10월 한국인 도둑들이 일본 쓰시마섬 간논지(觀音寺)에서 훔쳐 왔다. 법적 다툼 끝에 일본에 돌려주기로 결정됐으나 반환에 앞서 부석사 측이 “불상을 모시고 법회를 열게 해 달라”고 간논지에 요청했고, 간논지가 이를 받아들여 잠시 부석사로 옮겨지게 됐다. 불상은 25일부터 5월 5일 부처님오신날까지 100일 동안 대중에게 공개된다. 불상이 부석사에 돌아온 건 연구자들이 왜구가 약탈한 것으로 추정하는 1378년을 기준으로 647년 만이다.이날 부석사 입구에는 ‘불상의 귀향’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걸렸고, 도착 전부터 불상을 보려는 신도들이 몰렸다. 신도 김부용 씨(74)는 “우리 불상이 다시 일본으로 가는 게 안타깝다”라며 “반드시 우리 품으로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며 합장을 했다. 이날 오전 무진동 차량에 실려 대전 유성구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을 출발한 불상은 오후 부석사에 도착해 설법전으로 옮겨졌다.이 불상은 높이 50.5cm, 무게 38.6kg으로 1973년 일본에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한국 밀반입이 적발되자 간논지는 “도난품인 만큼 돌려 달라”고 요구했지만 부석사는 “원래 우리 불상으로, 왜구에 약탈당한 문화재”라며 법원에 소유권 소송을 제기했다. 불상 안에선 1330년 서주(서산의 고려시대 명칭) 부석사에 봉안하려고 제작했다는 내용의 발원문이 발견됐다. 하지만 2023년 10월 대법원은 ‘취득 시효가 완성됐다’며 불상을 일본에 돌려주라고 최종 판결했다.이번 공개 행사가 끝나면 불상은 5월 11일 전에 국립문화유산연구원으로 반환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이날 고불식과 이운식에 참석한 다나카 셋코 전 간논지 주지는 “불상의 (일본) 인도를 위해 힘써 주신 한일 양국 정부와 의회, 대한불교조계종 등 많은 관계자께 거듭 감사드린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서산=김태영 기자 live@donga.com}

“여자가 먼저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이어서 곧 남자가 그렇게 한다”로 소설은 시작된다.남자, 쇼팽을 ‘엄숙하게’ 연주하는 70세의 폴란드인 피아니스트 비톨트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연주회를 마치자 여자, 주최 측 임원인 베아트리스가 다소 공격적으로 묻는다. “가장 중요한 감정은 무엇인가요? 행복이 중요하지 않다면 무엇이 중요하죠?” 사실 그녀는 말하고 싶었다. “당신의 예술을 변명해 보시라고요!”이번엔 남자가 곤란하게 할 차례다. 몇 달 뒤 여자에게 남자의 이메일이 날아온다. ‘바르셀로나 근처 도시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열고 있으니 방문해달라’는 것. “나(비톨트)는 당신 때문에(for you) 여기에 있습니다.” 남자는 고백한다. “디어 레이디(Dear Lady)… 당신은 내게 평화를 줘요.”1943년 전쟁 중 폴란드에서 태어나 굶주렸을 남자와 배고픔을 모르고 자란 1967년생 여자 사이는 나이 차만큼이나 거리가 있다. 인사할 때 볼에 닿던 남자의 입술은 여자에게 ‘마른 뼈’ 같다. 여자는 말한다. “당신은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세계에 속하고, 나는 내가 일상적으로 진짜 세계라고 부르는 다른 세계에 속해요.” 그리고 말하고 싶다. “가엾은 바보 같으니라고! 당신은 너무 늦게 왔어. 잔치는 끝났어.”2003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저자의 작품 중 드문 연애 소설이다. 폴란드 작곡가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과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상드(1804∼1876)의 사랑 이야기가 바탕에 깔려 있다. 문장이 건조한 것 같은데 위트가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인 도둑들이 2012년 10월 일본 쓰시마섬 간논지(觀音寺)에서 훔쳐 온 고려시대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일본 반환을 앞두고 100일 동안 공개된다.24일 이 불상을 넘겨받은 충남 서산 부석사는 불상이 돌아온 사실을 부처님께 고하는 고불식을 열고, 이튿날인 25일부터 올해 부처님오신날인 5월 5일까지 불상을 공개한다고 밝혔다. 이후 불상은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이 불상은 높이 50.5㎝, 무게 38.6㎏으로 1973년 일본에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한국인 절도범 4명이 훔쳐 부산항으로 밀반입해 처분하려다 경찰에 적발되자 간논지와 일본 정부는 “도난품인 만큼 일본에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2016년 부석사는 “원래 우리 불상으로, 왜구에 약탈당한 문화재”라며 법원에 소유권 소송을 제기했다. 불상 내부에서 발견된 발원문을 통해 1330년 서주(서산의 고려시대 명칭) 부석사에 봉안하려고 제작한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3년 10월 대법원은 ‘취득시효가 완성됐다’며 불상을 일본에 돌려주라고 최종 판결했다.불상은 그동안 대전 유성구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 보관돼왔다. 24일 국가유산청은 간논지의 다나카 세스료 주지, 나가사키현청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계 서약서를 체결하고 불상을 일본 측에 인도했다. 이에 앞서 부석사 측이 “불상을 모시고 100일간 법회를 열게 해 달라”고 간논지에 요청했고, 이를 간논지가 받아들이며 불상은 잠시 부석사로 옮겨지게 됐다. 왜구에 약탈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14세기를 기준으로 하면 600여 년 만에 부석사에 돌아온 셈이 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서울이 내다보이는 야경은 아름답지만, 화장실은 얼어붙을 듯 춥고 집 주변에선 하수구 냄새가 진동했다.” 최근 서울 용산구의 한 옥탑방에 묵었던 외국인 관광객이 남긴 에어비앤비 후기다. 또 다른 후기에선 “경사가 짐을 끌고 오르기 힘들 정도다. 맞은편 집에서 당신이 보일지도 모른다”며 당혹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K드라마 주인공이 낭만적인 삶을 살던’ 옥탑방을 기대했거나 화려한 ‘루프톱 하우스’를 예상했다가 낭패를 본 기색이 역력하다. 한류 붐을 타고 한국 문화가 세계에 확산되면서 낳은 독특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최근 ‘한류문화사전’(이하 사전)을 발간한 이유 중엔 이런 오해를 막자는 의도도 담겼다. 표제어 443개를 선정했는데 한국 문화에 관심 깊은 외국인들이 다수 참여했다. 한국인인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지만, 타인의 시선에선 흥미로운 문화는 뭐가 있을까. 사전에서 옥탑방은 ‘날씨에 민감하고 범죄 예방과 화재에 취약한 구조임에도 도시 속 낭만을 누리는 주거지로 묘사된다’고 설명했다. 집필자로 참여한 정헌목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류학전공 교수는 “드라마 등 콘텐츠에 등장하는 옥탑방은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서울의 야경을 누리는 듯한 ‘기분’을 제공하지만, 실은 열악한 주거 환경이란 사실을 은폐한다”고 했다. 블랙핑크 로제와 팝스타 브루노 마스가 부른 노래 ‘아파트(apt.)’로 관심을 모은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사전은 ‘한국의 근대화가 낳은 독특한 산물로서 한국인의 욕망이 투영된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편찬 자문에 참여한 네덜란드 유튜버 바르트 판 헤뉘흐턴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어 떠나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배타적인 공간”이라고 평했다.‘온수 매트’도 표제어로 등장했다. 외국에선 ‘드라마에서 배우가 바닥에 깔고 눕는데, 굉장히 아늑해 보인다’며 궁금해하기 때문이다. 표제어 선정에 참여한 한 외국인은 “한국 여행을 와서 온수 매트를 켜고 누웠을 때 온몸이 따듯해지는 느낌이 좋았다”며 “아마존에서 팔면 사고 싶다”고 했다. 사전은 ‘역사적으로 온수 매트는 한국의 온돌 난방에서 이동형으로 발전되어 개발된 취침용 매트로, 사실상 이동형 온돌’이라고 부연했다. 사전에 다수 등재된, 한국어에서 특히 발달한 맛에 관한 표현도 외국인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담백하다’는 개운하고 산뜻한 맛을 나타내는 형용사지만, 한국인은 매운탕이나 설렁탕도 지나치게 짜거나 기름지지 않으면 담백하다고 한다. 맛 표현이 사람에 대한 표현으로 확장하면 해석의 난도는 더 올라간다. 표제어 선정에 참여한 40대 외국인은 “싱거운 사람이란 대사가 드라마에 나오는데, 사람이 어떻게 싱거울 수 있냐”며 “한국어는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을 묘사하는 표현이 다양한데, 특히 성격을 음식처럼 말하는 게 특이하다”고 했다. ‘시원하다’ ‘말아먹다’ 역시 마찬가지다. ‘밥 한번 먹자’가 “가까운 관계임을 표현하는 형식적인 인사”란 점도 독특하다.‘식당 앞치마’도 외국인에겐 굉장히 낯설다. K드라마를 보며 밥 먹을 때 왜 앞치마를 하는지 궁금해한다고 한다. 식당 앞치마는 고기를 굽거나 국물을 끓이기에 음식이 옷에 튈 염려가 많은 한국만의 문화다. 사전은 “한국의 독특한 외식 문화를 볼 수 있는 일면”이라고 했다. 이번 사전은 한국민속대백과 편찬 2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특별판이다. 원고지 4600여 장 분량, 사진도 800장에 이른다. 민속학, 사회학 등 분야별 전문가 129명이 참여했다. 영어판 발간 등도 준비되고 있다. 장상훈 국립민속박물관장은 “사전이 ‘한국 문화 바로 알기’의 길잡이로 국내외에서 널리 활용되길 기대한다”고 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찰방(察訪·역참 담당 관리)은 사람을 불러다 꿩을 잡게 했다. 마침 산 중턱에 큰 노루가 풀 속에 자고 있었는데, 활 한 방으로 가슴을 뚫어 쓰러뜨렸다. 바로 잡아서 간은 날로 먹고 고기는 구워 두고 점심으로 먹었다.” 조선 중기 오희문(1539∼1613)의 일기 ‘쇄미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팔자 좋은 양반이 사냥 나들이라도 나선 것 같지만, 이 글이 쓰인 때는 임진왜란이 이어지던 1593년 4월로 오희문은 피란 중이었다. 그는 일기에 “굶주림이 점점 심해져 백성이 날마다 굶어 죽는다”며 “나도 머지않아 구렁을 메우겠지”라고 쓰기도 했다. 오희문 일가는 살아남기 위해 틈만 나면 물고기를 잡고, 꿩을 사냥하고, 나물을 뜯었다. 전란으로 농토에서 유리된 이들에게 누구의 소유도 아닌 산과 개천이 생존의 토대가 됐던 것이다. 오항녕 전주대 대학원 사학과 교수는 17일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가 주최한 학술대회 발표문 ‘일상과 피난, 그리고 공유지’에서 조선의 공유지인 산과 숲, 개천, 연못 등 이른바 ‘산림천택(山林川澤)’의 가치를 쇄미록을 통해 들여다봤다. 오 교수는 동아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특히 전쟁이 발발한 1592년에 기아가 심각했는데, 산림천택에 기대 목숨을 부지한 이들이 이듬해 농사를 짓고 의병에도 참여하면서 왜군에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오 교수가 쇄미록에 주목한 건 들판에서 소에게 풀을 뜯기거나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등 공유지에서 이뤄진 경제 활동이 통상의 사료엔 거의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전세(田稅)와 공물을 전세화한 대동세(大同稅)의 비율이 1 대 3인 것으로 미뤄 국가의 입장에서 공유지인 산림천택과 텃밭이 백성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전답의 3배에 이른다고 봤다. 오 교수는 “전란이 아닌 평시에도 공유지는 조선 사람들의 일상을 유지하는 바탕이 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왕조시대엔 모든 땅이 왕토(王土)라는 관념이 있었지만, 산림천택은 왕도 사사로이 가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관리에게 나눠줄 토지가 부족해지면 개간을 전제로 공유지를 떼어주기도 했다. 광해군 대에 들어서는 내수사(內需司·왕실 재산 관리 관청) 등의 공유지 침탈이 잦았다. 오 교수는 “조선은 인조 이후 침탈을 제어하고 숙종 때는 제한하는 등 공유지를 보호했다”며 “귀족과 국왕이 공유지를 차지한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존 조선의 경제 활동 연구는 사적 소유의 발달에 초점을 두고 이뤄졌기에 ‘유교 국가의 사회 안전망’이었던 공유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산림천택 같은 사회 안전망은 오늘날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찰방(察訪)은 사람을 불러다 꿩을 잡게 했다. 마침 산 중턱에 큰 노루가 풀 속에 자고 있었는데, 활 한 방으로 가슴을 뚫어 쓰러뜨렸다. 바로 잡아서 간은 날로 먹고 고기는 구워 두고 점심으로 먹었다.”조선 중기 양반 오희문(1539~1613)의 일기 ‘쇄미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팔자 좋은 양반이 사냥 나들이라도 나선 것 같지만 이 글이 쓰인 때는 임진왜란 중인 1593년 4월로 오희문은 피란 중이었다. 그는 일기에 “굶주림이 점점 심해져 백성이 날마다 굶어 죽는다. 나도 머지않아 구렁을 메우겠지”라고 쓰기도 했다. 오희문 일가는 살아남기 위해 틈만 나면 물고기를 잡고, 꿩을 사냥하고, 나물을 뜯었다. 전란으로 농토에서 유리된 이들에게 누구의 소유도 아닌 산과 개천이 생존의 토대가 됐던 것이다.오항녕 전주대 대학원 사학과 교수는 17일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주최 학술대회 발표문 ‘일상과 피난, 그리고 공유지’에서 조선의 공유지였던 산과 숲, 개천, 연못 등 이른바 ‘산림천택(山林川澤)’의 가치를 쇄미록을 통해 들여다봤다. 오 교수는 전화 통화에서 “특히 전쟁이 발발한 1592년의 기아가 심각했는데, 산림천택에 기대 목숨을 부지한 이들이 이듬해 농사를 짓고 의병도 참여하면서 왜군에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오 교수가 쇄미록에 주목한 건 들판에서 소에게 풀을 뜯기거나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등 공유지에서 이뤄진 경제 활동이 통상의 사료엔 거의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전세(田稅)와 공물을 전세화한 대동세(大同稅)의 비율이 1대 3인 것으로 미뤄 국가의 입장에서 공유지인 산림천택과 텃밭이 백성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전답의 3배에 이른다고 봤다. 오 교수는 “전란이 아닌 평시에도 공유지는 조선 사람들의 일상의 삶을 유지하는 기반이 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왕조시대엔 모든 곳이 왕토(王土)라는 관념이 있었지만 산림천택은 왕도 사사로이 가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관리에게 나눠줄 토지가 부족해지면 개간을 전제로 공유지를 떼어주기도 했다. 광해군 대에 들어서는 내수사(內需司·왕실 재산 관리 관청) 등의 공유지 침탈이 잦았다. 오 교수는 “조선은 인조 이후 침탈을 제어하고 숙종 때는 제한하는 등 공유지를 보호했다”며 “귀족과 국왕이 공유지를 차지한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존 조선의 경제 활동 연구는 사적 소유의 발달에 초점을 두고 이뤄졌기에 ‘유교 사회의 사회 안전망’이었던 공유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오늘날에도 산림천택 같은 안전망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서양의 해부학이 중국에 소개됐을 때, 무엇보다 ‘뇌가 인간의 지각과 사고를 담당한다’는 생각이 주목받았다고 한다. 기존 중국적 관념에선 사유 기관으로서의 ‘심(心)’과 생명의 중심으로서의 ‘심장’을 하나로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장 따로, 마음 따로’라면 인간은 육체와 정신으로 영역이 나뉘게 된다. 이는 한의학의 토대는 물론, ‘심’을 인간 본성의 근원으로 여기는 성리학 전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서양 과학의 도입부터 최근까지의 중국의 ‘과학’에 관해 다각적으로 조명한 책이다. 과학 도입 초기 중국에서 ‘사이언스(science)’는 ‘새인사(賽因斯)’로 음역됐다. ‘새(賽)선생’은 ‘덕(德)선생’(democracy)과 함께 ‘민주’와 ‘과학’을 추구한 1919년 중국 5·4운동의 주요 구호가 됐다. 과학이 ‘공(孔) 선생’(공자)의 지위를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오늘날 중국의 과학굴기도 다룬다. 2015년 중국의 투유유 교수가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한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중국 본토 과학자가 순수하게 중국 내에서 연구한 업적으로 노벨 과학상을 수상한 건 처음이었다. 문제는 그의 연구가 절정에 달했던 때가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70년대였다는 점. 그는 국가 지원이나 연구 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 개인의 의지와 역량만으로 뛰어난 결과를 냈다. 과학 연구에서 제도와 체제를 중시하며 집단 연구를 장려하던 중국 정부로선 그의 수상을 마냥 반길 수만은 없었다고 한다. 풍부한 도판이 이해를 돕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