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욱

변영욱 기자

동아일보 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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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변영욱 기자입니다.

cut@donga.com

취재분야

2025-11-05~2025-12-05
칼럼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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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크리스마스트리의 가시

    장미의 가시 같은 경고일까요?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 불을 밝힐 전선에 감전주의 안내판이 붙어 있네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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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왜가리 워킹

    여의도 한강 둔치에서 거닐고 있는 왜가리 한 마리. 카메라 세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 톱모델의 ‘포스’를 뿜어내네요. ―서울 여의도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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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나팔 속 입주

    날아다니던 씨앗이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하필 나팔 속, 너무 시끄럽진 않을까요. ―서울 홍익대 앞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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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전성 높인 화학제품 쓰세요”

    2일 서울 종로구 JW메리어트 동대문스퀘어 서울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녹색소비자연대전국협의회, 화학물질 저감 우수제품 발표’ 행사에서 모델들이 제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날 공개된 제품은 성분 공개와 원료 안전성 평가 등을 통해 안전성이 인정된 생활화학제품이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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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갑다 겨울아’… 겨울 시즌에 인파 몰린 스키장[청계천 옆 사진관]

    기습 한파와 함께 본격적인 겨울 추위가 시작되자 스키장이 하나둘씩 문을 열기 시작했다. 겨울 시즌 개장 첫 주말인 1일 강원 평창군 모나 용평 스키장은 이른 아침부터 스릴을 즐기기 위해 슬로프에 오르는 스키어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슬로프를 타고 올라간 스키어들이 본격적으로 코스를 타고 내려오기 시작하자 새하얗게 펼쳐진 스키장 코스는 금세 형형색색 스키복 색깔로 뒤덮였다.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추위와 스릴을 기다렸다는 듯이 스키장 곳곳에 스키어들의 환호성이 울려퍼지기도 했다.지난 29일 초·중급자용 핑크 슬로프를 개장한 모나 용평은 연말까지 모든 슬로프를 개장할 예정이다. 강원 도내 대부분 스키장은 오는 6일까지 문을 열고 본격적인 스키 시즌에 돌입한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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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차 충돌 사고 취재를 다녀온 사진기자는 어떤 후유증을 앓았을까 [청계천 옆 사진관]

    ● 대형 열차 충돌 사건 발생에 바빠진 신문사남쪽과 북쪽으로 각각 향하던 열차가 정면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었습니다. 신문사에서는 이 사건을 1924년 11월 28일자 조간 신문과 석간 신문을 통해 사고 내용을 우선 상세히 보도하는 한편 사진기자를 현장으로 급하게 파견합니다. 1924년 11월 29일자 동아일보 2면에는 사진 3장과 함께 출장을 간 사진기자의 취재 후일담에 실렸습니다. 기사 제목은 “본사 특파 사진반 고심 촬영 – 급행열차 정면 충돌 화보”입니다. ●사고 발생 경위 1924년 11월 27일 목요일 새벽, 중국 룡진강 철교 위에서 대형 열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날 새벽 1시경 남북으로 운행 중이던 두 열차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화물열차와 급행열차 모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고는 안동현(현 중국 단둥)을 출발한 제72호 화물열차가 신막역을 지나 한포역으로 진입하던 중 발생했습니다. 당시 부산을 떠나 봉천(현재 중국 선양)으로 향하던 제5호 급행열차와 룡진강 철교를 못 미쳐 정면으로 부딪힌 것입니다. 이 사고로 두 열차의 기관차는 물론 화물열차 전부 화차 두 량이 크게 파손되었고, 급행열차의 수하물차와 유리창이 부서지는 피해가 발생했습니다.당시 제72호 화물열차는 통상적으로 먼저 한포역에 도착해 급행열차를 기다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약 5~6분 늦게 도착해 급행열차와 거의 동시에 역에 도착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급행열차는 신호를 받지 못하고 룡진강 철교 위에서 대기 중이었습니다. 한편, 제72호 화물열차가 역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으나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전철기를 깨뜨리고 대기 중이던 급행열차와 정면 충돌하게 되었습니다.●사고 보도와 사진기자의 취재 과정당시 사진기자는 급하게 준비해서 현장을 찾아갑니다. 사고가 발생한 27일 오후, 편집자로부터 “내일 신문에 게재할 수 있도록 꼭 촬영하라”는 부탁을 받고 카메라를 들고 출발한 그는 오후 5시 5분 신막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하지만 기차는 예상보다 세 시간 늦은 밤 8시 50분에야 한포역에 도착했습니다.그는 밤중에 역장을 설득해 사고 현장으로 향했습니다. 심야에 비까지 내리는 악조건 속에서도 역에서 약 한 마장(약 4km) 떨어진 룡진강 철교까지 걸어가 사고 현장을 촬영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기관차를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으나 이미 파손된 기관차는 각각 평양과 용산으로 옮겨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급히 평양으로 이동해 기관차를 촬영하고 새벽 4시 반 개성역에서 사진을 확보한 뒤 아침 9시 40분 경성으로 돌아와 신문에 보도할 사진을 완성했습니다. 사고 발생 이틀 뒤인 11월 29일자 동아일보에는 사고 현장을 담은 사진과 사진기자의 취재기가 실렸습니다.●변화한 사진 보도 환경이 사건은 과거와 현재의 사진 보도 환경을 비교할 때 여러 변화를 시사합니다. 우선 전송 기술의 발전이 있습니다. 당시 촬영한 사진이 독자들에게 전달되기까지는 24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사진기자는 필름을 들고 서울 본사로 돌아와 현상과 인화 과정을 거친 후 신문 제작팀에 전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오늘날에는 무선 통신망을 통해 사진을 즉시 전송할 수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 SK텔레콤의 CDMA 기술이 도입된 이후, 신문사 사진기자들은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을 즉시 본사로 보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사진기자가 아닌 시민들이 열차에 타고 있었다면 휴대폰으로 촬영해 언론사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취재 환경도 과거와 현재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1924년 당시 사진기자는 역장을 설득해 현장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보안과 안전상의 이유로 기자들이 공식 요청을 해도 거절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특히 공무원들이 불리한 상황일 경우, 기자증의 권위로 취재 협조를 받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이는 2000년대 초반 이후 크게 달라진 모습으로, 이제는 기자가 스스로 방법을 찾아 현장에 접근해야 합니다. 공무원들은 오히려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에서만 언론을 활용하려는 태도를 보이곤 합니다.●후일담사진기자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사고 현장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의 고단함은 글에 고스란히 묻어났습니다. 당시 그는 취재를 마치고 “성공은 했으나 후유증이 남는다”고 말하며 글을 마치고 있습니다. 기사는 ‘후유’라고 마무리 되었지만 어떤 후유증이 있을까 100년 후의 사진기자인 제 경험에서 유추해 보았습니다. 필름으로 사진을 찍던 1997년 6월 중국 단둥역에 출장을 간 적이 있습니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대북 식량 지원이 시작되는 날이었는데 원래 출장 계획이 있던 선배가 중국 당국으로부터 비자 발급이 지연되면서 저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입사 7개월, 정식 기자가 된지 3개월 만에 해외 출장을 가는 파격이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되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전날 밤(그 시간 저는 집에 안 가고 회사 근처에서 선배들과 시끌벅적하게 저녁을 먹고 있었습니다)에 의사결정이 되어 제가 출장을 가게 되었고 비행기 티케팅은 회사 여행사와 항공사 홍보팀을 통해 ‘급행’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중국 선양 공항에 내려 택시를 4시간 동안 타고 단둥역에 도착하니 이미 밤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 새벽에 움직일 것으로 예상되는 북한행 열차 시간을 알아내기 위해 단둥역의 중국인 근무자들을 깨웠습니다. 다행히 압록강 철교를 지나 북한으로 들어가는 열차를 촬영할 수는 있었지만, 저를 비롯한 한국 기자들은 중국 공안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몰래 서울에 전송까지 마쳤지만 8시간 안에 단둥을 떠나라는 추방 조치를 받았습니다. 가는 데 12시간, 촬영 가능 시간과 촬영 포인트를 확인하느라 밤을 새고 공안의 조사 후 바로 추방되어 베이징으로 가는 열차를 타야 했습니다. 문제는 그 일정 동안 제 등과 어깨에는 총 5개의 가방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카메라 가방, 망원렌즈 가방, 노트북 가방, 스캐너 가방, 현상인화 키트 가방 등이었습니다. 출장에 필요한 옷가지와 세면도구들은 따로 가방으로 챙기지 않고 각각의 가방 여유 공간에 조금씩 나눠 넣었던 기억이 납니다. 방송 기자와 달리 신문사 사진기자들은 혼자서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보조도 없고 취재기자와 동행하는 경우보다 따로 움직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수면 시간과 끼니를 챙길 수 없는 조건도 있었네요. 물론 그 당시에는 그게 20대의 젊은 사진기자에게는 중요한 조건이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출장을 다녀오면 어깨와 등에 채찍을 맞은 듯한 흔적이 남았었습니다. 가방의 끈들이 몸을 짓누르기 때문에 피가 뭉쳤던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몸에 피로감이 남는 것만이 취재의 후유증은 아닙니다. 인간 관계에 대한 후회도 꽤 남습니다. 현장에 가기 위해 누군가를 윽박지르고 달래는 과정이, 취재가 끝나고 곱씹어 보면 무례하고 무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취재하는 저를 만나셨던 분들 중에 그런 기억이 있으시다면 이 글을 통해서나마 사과 드리고 용서를 구합니다. 100년 전 열차 사고 사진을 찍었던 사진기자가 말하는 ‘후유’라는 것도 그런 회한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무엇을 느끼셨나요? 오늘도 좋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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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년 경성역 열차 폭발 사건 - 휴가 가던 사냥꾼의 화약이 원인[청계천 옆 사진관]

    ● 깨진 유리창과 사냥용 엽총 사진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의 사연을 찾아가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이번 주에 고른 사진은 열차 폭발 사고 사진입니다. 유리창이 깨져 여기저기 파편이 흩어져 있는 혼란스런 모습입니다(왼쪽 사진). 커다란 총 옆에 보따리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오른쪽 사진). 1924년 11월 2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사람이 타고 다니는 열차 선반 위에 화약과 총을 싣고 다녔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놀랍습니다. 지금의 안전 의식이나 기준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기사 내용을 한번 보겠습니다. 아마 지금의 사진기자들이라면 와이드 렌즈를 사용해 사고의 원인인 엽총 화약과 사고의 결과인 깨진 유리창을 한 장의 사진으로 담아 보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열차 객실이라는 좁은 공간의 왼쪽과 오를쪽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렌즈가 없었기 때문에 두 장으로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객차 선반 위에 있던 화약이 폭발한 사고기사를 바탕으로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1924년 11월의 어느 쌀쌀한 아침, 서울역을 출발 약 1마일을 전진한 경부선 8호 급행열차에서 폭발음이 울려 퍼졌습니다. 시각은 오전 10시 5분. 열차가 용산역을 향해 달리던 그 순간, 맑은 하늘을 가르는 굉음과 함께 객실이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기관차에서 두 번째로 달린 삼등 객차에서 난 사고였습니다. “갑자기 굉장한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폭발했습니다. 기차는 비상 기적을 울리며 즉시 멈췄죠.”기자가 인터뷰를 했다면 당시 현장을 목격한 한 승객의 증언은 아마 이랬을겁니다. 혹시 폭탄이 터진 것인가 하고 의심했으나 사고의 원인은 의외의 곳에 있었습니다. 경기도 사회주사로 재직 중이던 조원환(33) 씨의 수하물이었습니다. 그는 휴가를 맞아 호남 지역으로 사냥을 떠나기 위해 화약 500 돈과 뇌관 1,000개를 구입했고, 이를 가방에 넣어 객실 선반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열차의 진동이 화약을 자극했고, 결국 폭발로 이어진 것입니다.폭발로 인해 객실의 유리창 세 개가 산산조각 났고, 조씨를 포함한 승객 7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가장 큰 부상을 입은 것은 송포(마쓰우라) 가족으로, 3주간의 치료가 필요할 정도였습니다.조씨는 인력거에 간신히 몸을 의지해 시내 자택으로 돌아갔습니다. “지독한 화약 냄새가 객실을 가득 메웠습니다. 승객들은 혼비백산하여 열차에서 뛰쳐나왔죠.”당시 동아일보는 현장의 혼란상을 이렇게 전했습니다.이 사건은 용산경찰서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경찰서장을 비롯한 20여 명의 경찰관들이 자동차와 도보로 현장에 긴급 출동했습니다. 당시는 각종 풍설이 돌던 시기라 경찰은 극도로 예민한 상태였다고 합니다.100년 전 이날의 사고는 다행히 인명 피해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일상적인 열차 운행이 순식간에 아찔한 재난 상황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 충격적인 사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안전해지는 교통수단1924년 열차 폭발 사건은 단순한 화약 사고였지만, 당시에는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건이 공론화되면서 열차 안전 관리가 강화되었을 것이고 대중의 불안은 점차 해소되었습니다. 한 시대를 뒤흔드는 사고도 결국에는 원인을 찾아 해결되고 사회는 점점 발전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요.요즘 전기자동차 배터리가 충전 도중 화재로 이어지는 사고들이 자주 보도되고 있습니다. 신기술에 대한 불안과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100년 전 열차 사고를 돌아보면, 새로운 기술이 도입될 때 겪는 시행착오와 그로 인한 사회적 충격은 피할 수 없는 과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화약을 객실에 들고 탔다는 것은 지금의 기준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만 당시에는 사고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위험성을 사회 전체가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언론이 보도하고 공론화시킴으로써 여론을 환기시키고 정책의 수립을 자극하게 되었습니다. 열차가 생각지도 못했던 사고를 계기로 더 안전한 교통수단으로 발전했듯, 오늘날 전기자동차 역시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며 더 안전하고 신뢰받는 기술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봅니다. 요즘 빈번하게 발생하는 전기자동차 배터리 사고가 100년 후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요? 오늘은 지금의 시각에서 볼 때 황당하다고 할, 열차내 화약 폭발 사건 현장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사진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셨나요?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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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승차‘감’

    감이 차를 탔네요. 홍시 익기 전에 잘못 먹으면 정말 떫은데, 저렇게 차 안에서 익히면 유혹에 빠질 일 없겠어요. ―서울 종로구 한 도로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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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뿌연 서울… 오늘 아침 쌀쌀

    21일 서울 종로구 일대가 안개와 미세먼지 탓에 뿌옇게 보인다. 환경부에 따르면 이날 수도권과 충청 경북 지역의 초미세먼지 농도가 ‘나쁨’ 수준이었다. 절기상 소설(小雪)인 22일에는 경기 및 강원 지역 내륙 산지를 중심으로 아침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지며 쌀쌀한 날씨를 보일 것으로 예보됐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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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외 식품 종합 전시회 ‘2024 코엑스 푸드위크’ 23일까지

    20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4 농식품부×코엑스 푸드위크(제19회 서울국제식품산업전)’에서 방송인 타일러 씨(오른쪽) 등 모델들이 다양한 비건푸드를 소개하고 있다. 국내외 프리미엄 식품과 대체식품을 선보이고 식품 산업의 미래를 조망하는 이번 전시회는 23일까지 이어진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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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리스마스 케이크 사세요”

    19일 서울 중구 뚜레쥬르 제일제당센터점에서 어린이 모델들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한정 판매하는 ‘2024 윈터 홀리데이 시즌 케이크’를 선보이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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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뚝 떨어진 기온, 오늘도 전국 아침 곳곳 영하권

    서울의 아침 최저기온이 올가을 들어 처음 영하권으로 떨어진 18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시민들이 두꺼운 옷을 입고 걸어가고 있다. 이날 서울의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0.7도를 기록하는 등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최저기온이 영하였다. 기상청은 “19일 서울의 아침 최저기온은 0도, 전국 아침 최저기온은 영하 4도에서 영상 7도 사이로 쌀쌀할 것”이라고 예보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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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종로 효제동 가정집에 모인 독립단원들[청계천 옆 사진관]

    ● 서울 효제동 13번지의 비밀 아지트에서 독립자금 모금과 암살 계획 세워동아일보 1924년 11월 13일자 3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평범해 보이는 가정집 사진이 신문에 실렸는데 설명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기사 제목은 ‘군자금, 암살, 파괴계획 – 경성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활동하던 중대사건 진상’ 입니다. 신문 지면 왼쪽은 찢어져 있어서 원문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기사가 장황하게 기술되어 있어 전체 맥락을 읽는 데는 큰 문제는 없습니다. 기사의 본문에서는 경성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서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경성이라는 표현이 항상 마음에 걸렸었는데 서울이라는 표현을 써도 당시 시민들 사이에서는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사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사건이 발생하기 전부터 일제는 해외 각지에서 활동하던 독립단이 국내로 잠입하여 음모를 계획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대한통의부 수령 김동삼이 서울을 비롯해 각도의 부자들에게 협박장을 보내는 등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있었는데 이들 독립단을 최근 검거하게 된 사건을 신문은 보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대한통의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1922년 8월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독립군 연합단체. 줄여서 통의부라고도 한다. 간도참변과 자유시 사건으로 독립군 세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투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결성된 무장 단체 중 하나. 만주 내 한인사회 통치행정과 무기 및 군자금 조달, 일제 밀정 응징, 일본 영사관과 경찰서 등 기관을 공격하는 무장활동. 광동학교 등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기관지 〈경종보〉와 〈대한통의부 공보〉를 발행해 교육 계몽활동도 하였다. 총장 김동삼, 부총장 채상덕, 비서과장 고할신, 민사부장 이웅해, 교섭부장 김승만, 군사부장 양규열, 법무부장 현정경, 재무부장 이병기, 학무부장 신언갑, 실업부장 변창근, 교통부장 오동진, 참모부장 이천민 등. 나중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로 들어갔다.● 사건 수령 홍경식은 홍참판의 아들사건의 주역인 홍경식(경성부 효제동 13, 36세)은 대한제국 시대 참판 홍승헌의 아들이었습니다. 일제의 한국 강점 이후 그의 가족은 만주 봉천성 환인현으로 이주했습니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난 해에 홍경식은 그곳의 광한단(光韓團이)라는 독립단체에 가입하게 됩니다. 1921년에는 이병욱(경성부 와룡동 106, 28세)과 함께 육혈포 15정과 폭탄을 휴대하고 국내 잠입을 시도하다 체포되어 신의주지청에서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1924년 가을, 중국의 동란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대한통의부는 새로운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수령 김동삼은 홍경식을 특파원으로 임명하고, 서울에 지부 설치를 지시했습니다. 홍경식은 이병욱, 유한기(충남 천안군 천안면 읍내리 174, 30세), 박정양(충남 아산군 배방면 장재리 89, 30세)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협박 전화 또는 직접 가서 모금이들의 활동 방식은 체계적이었으며 주로 귀족이나 부호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처음에는 신사적인 태도로 접근해 조국을 위한 자금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거절할 경우 육혈포로 위협하는 방식을 써서 백원이고 오백원이고 현금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불안을 느낀 부호들이 시골로 도망가거나 경찰을 증원하는 등 큰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한 집을 서너 차례 찾아가 여러 번 돈을 가져갔으며 때로는 전화로도 독촉했습니다. 확인된 사례만 보면, 효자동의 김교신 남작에게서 115원, 창성동 안도에게서 750여 원, 적선동 이경세에게서 300원, 청진동 민용호에게서 200원 등을 모금했습니다.모금된 자금은 본부로 보내져 무기 구입에 사용될 예정이었습니다. 이들의 계획은 단순한 군자금 모집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상당한 자금과 인원이 확보되면 조선 내 고위 관리와 귀족들을 암살하고, 총독부를 비롯한 주요 관공서를 파괴할 계획이었습니다.● 4명은 체포, 2명은 본부로 안전하게 돌아가경기도 경찰부는 김동삼의 밀사 침입 정보를 입수한 후, 각 지방 경찰과 연계하여 수사망을 좁혀갔습니다. 11월 11일 새벽, 효제동의 아지트를 포위한 고등형사들과 동대문서 경찰들은 홍경식(36), 이병욱(28), 유한기(30), 박정양(30) 등을 체포합니다. 현장에서 육혈포 1정, 탄환 30발, 통의부 지부장 도장, 불온문서 수십 매가 압수되었습니다.김장식과 현익철은 대구, 안동, 밀양 지방으로 군자금 모집을 떠났다가 체포를 면했는데이들은 상당한 금액을 모금해 본부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건 발생 며칠 후인 11월 17일, 동대문서는 또 다른 혐의자 2명을 체포했습니다. 경찰은 추가로 체포한 이들 두 명의 사건에 대해서는 극도로 비밀에 부침으로써 아직 진상은 알 수 없으나 어떤 방면으로 들은 바에 따르면, 이는 고양군 용강면 창천리의 이덕규 집에서 육혈포로 위협해 군자금 400원을 강탈한 사건과 연관된 것으로 보입니다. ● 독립운동의 양상을 알 수 있는 이야기 오늘은 1924년 일제강점기 서울 효제동에서 독립군들이 아지트로 활용한 가정집 사진을 통해 당시 독립운동의 한 단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만주에 근거지를 둔 대한통의부가 독립자금을 구하기 위해 국내 진출을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1920년대 중반,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국내 진출 시도와 그에 대한 일제의 탄압, 그리고 군자금 모집이라는 독립운동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가들이 부호층을 대상으로 한 군자금 모집 활동은, 당시 계층 간 갈등과 민족운동의 복잡한 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무엇을 느끼셨나요? 좋은 댓글 많이 남겨주세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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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나무와 전선의 ‘공생’

    전선이 지나가는 데 문제없을 뿐 아니라 이토록 완벽한 원형 조형미라니. 은행나무를 누가 다듬었는지 그는 달인이 분명합니다. ―경기 수원시 남수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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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메라의 비약적 진화: 100년 전 카메라와 현대의 고속 촬영 기술 비교[청계천 옆 사진관]

    머리에 흰 띠 등을 두른 4명의 학생들이 운동장 출발선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어딘가에서 단거리 육상 경기가 열린 모양입니다. 1924년 11월 9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설명을 보시겠습니다. 의기 충천의 용자각 학교 대표선수 일백이십명성황 중에 개막한 중등교 경기연희 전문학교 주최와 보사 후원의 제 2회 중등학교 육상경기 대회는 예정대로 작일 오전부터 그 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입동 추위를 하노라고 그 전날에 온 비로 말미암아 날은 좀 쌀쌀하였으나 피끓는 선수의 기세를 더욱 날카롭게 할 만 하였다. 은은한 송림이 우거진 사이에서 소슬한 송풍을 들으며 정각보다 약 한 시간이 늦어 아홉시 반부터 쇠같이 단련된 일백 이십여명이 유량한 경성악대의 주악에 보무 당당히 입장식을 거행한 후 즉시 회장 ‘백아덕’씨로부터 간단한 개회사가 있었다.● 1920년대 카메라 기술 100년 전만 해도 사진은 소수만이 다룰 수 있는 기술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아일보에서 사진찍는 사람들의 월급이 꽤 높았습니다. 1920년 창간 당시 월급 체계를 보면, 편집주간 120원, 국장 100원, 기자 80원~60원인데 사진반원은 100원으로 되어 있습니다.그리고 그들에게는 당시에 나온 카메라 중 가장 성능이 뛰어난 제품을 회사가 제공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당시 카메라는 요즘처럼 연속 촬영이 되지 않는 1초에 겨우겨우 1장 찍히는 카메라였습니다. 1920년대 동아일보 사진반원들의 취재 장비는 삼각대가 달린 영업용 암상 사진기 한 대와 ‘앙고’ 라고 불리던 휴대용 사진기 한 대였습니다. 필름이 보편화되기 이전 시대가 유리 원판을 사용했고 이 시기 사진기자들은 두루마기 속에 앙고 카메라를 숨긴 채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가며 사진을 찍었고 그러다 발각이 되면 촬영되지 않은 유리 원판을 촬영된 유리 원판과 바꿔치기해서 내주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동아일보 서영수 기자. 1958년생. 석사학위 논문 참고). 참고로 1920년대 동아일보 사진반원에는 경성일보 사진반 출신이었던 일본인 야마하나(1920년 입사), 역시 경성일보에서 스카우트된 사진제판기술자 한우식(1921년 입사), 그리고 당시 민간지를 두루 섭렵한 문치장(1923년 입사) 이렇게 3명이었습니다. 사진기자 이름이 신문에 제대로 표기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입니다. 그래서 저 사진이 정확히 누가 찍은 사진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 기술의 발전과 기자들의 기동성 향상세계사진사(까치 출판사, 2003년)의 기록에 따르면, “1923년에 베츨라 사에서 오스카 바르나크는 영화용 두루마리 필름을 적용시킨 사진기를 발명했습니다. 이것은 35밀리미터 폭의 필름 띠에 24X36밀리미터 크기의 이미지가 새겨지는 라이카 카메라입니다. 그것은 1924년부터 시판되기 시작하여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혁신적인 카메라가 당시 한반도까지는 보급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위에 소개드린 사진은 이 세 사람 중 한명이 ‘앙고’ 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했을 것입니다. 1923년에 독일 베츨라 사의 오스카 바르나크는 35mm 필름을 적용한 라이카 카메라를 개발했다. 이 카메라는 사진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나, 당시 한반도에 보급되지 못했고, 한국에서는 주로 앙고 카메라가 사용되었다. 앙고 카메라는 삼각대를 이용해야 했으며, 야간 촬영 시에는 마그네슘 분말을 터트려 촬영해야 했다.이후 1937년에는 섬광전구를 장착해 셔터와 동조되는 오토 프레스 카메라가 개발되면서, 사진기자들의 기동성은 점차 향상되었다. 굳이 카메라의 발전 순서를 도식화하면 앙고 카메라 → 스피드 그래픽 →35mm카메라→ DSLR → 미러리스 이렇게 되겠습니다. ● 현대의 고속 촬영 기술지금의 고속 촬영 기술은 어느 정도일까요? 1초에 1장을 찍을 수 있었던 100년 전에 비해 비약적인 발전을 했습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동안 트럼프 후보가 괴한의 총격을 받는 순간을 찍었던 AP 사진기자의 카메라 셔터 속도는 1/8000초였습니다. 1초를 8000개로 나눈 숫자입니다. 날아가는 총알도 그래서 사진으로 포착됩니다. 2024년 10월 현재 가장 빠르게 촬영할 수 있는 순간은 1/64000(현재 동아일보 사진기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캐논 R3 미러리스 카메라 기준)물론 그렇다고 1초에 8000장의 사진이 만들어 지지는 않습니다. 최대 1초 기준으로 30장의 사진이 찍힙니다. 그렇더라도 1초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진이 찍히는 것입니다. 100년 전, 카메라 한 대로 한 장의 스포츠 순간을 어렵게 어렵게 포착했던 사진기자들이 오늘날과 같은 기술의 발전을 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상상해 봅니다. 다음 주에 다른 사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멋진 가을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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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나팔 부는 노인

    피리 부는 사나이는 쥐를 끌고 왔지만, 어르신의 멋진 트럼펫 소리는 눈길을 끄네요. 그저 취미라기엔 멋진 솜씨입니다. ―서울 양천구 안양천 앞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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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내 안에 열쇠 있다

    자물쇠로 문을 잠그는 게 아니라 열쇠를 잠가놨네요. 비밀번호를 걸어둔 자물쇠 모양의 열쇠보관함이라고 합니다. 들고 들어가면 안 돼요∼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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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밥이 철학보다 중요한 현실”… 100년 전 대학생의 외침[청계천 옆 사진관]

    ● 청년들의 웅변대회가 처음 열리다1924년 가을, 조선의 하늘은 납빛으로 흐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당은 젊은 이들의 열기로 무거운 구름을 헤치고 있었습니다. 신문사가 주최한 제1회 전조선현상학생웅변대회, 그날의 청중이 만들어낸 열기는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모인 이들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조선의 내일을 고민하는 동지이자 희망의 불씨였습니다.저녁 일곱 시. 행사장에 들어오지 못한 시민들은 건물 밖 창문을 통해서라도 조선에서 처음 열리는 청년들의 웅변대회를 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천도교당에 들어 온 청중들은 강단을 꽉 둘러싸고 있었고 , 서로 어깨를 맞댄 채 시작을 기다리던 그들 앞에 첫 연사가 올랐습니다. 그 순간, 숨소리마저 멈춘 듯 고요가 감돌았습니다.“우리의 각오!” 세브란스 의학전문의 이영준이 단에 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강하게 전했습니다. 관중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가 내려오자 이어서 연희전문의 박희성이 “종교와 인류와의 관계”를 주제로 연설을 이어갔습니다. 연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시대를 고민하는 자들의 가슴을 울렸습니다.웅변이 이어지는 중간중간, 때로는 일본 경찰이 연설을 제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사회자는 간청했습니다. “동아일보를 사랑하거든 참아달라!” 그 말에 청중들은 흥분을 억누르며, 다시 한 번 강당 안은 진정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조선의 젊은 기개가 그렇게 하나로 모였습니다.이튿날, 중등학교 학생들의 웅변이 이어졌습니다. 배재학당의 장치모는 “사회교육화하라”는 연설로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교육을 노예화하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거침없었고, 청중들은 그의 외침에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밤늦도록 청중들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청운동 골목을 메웠습니다.● 철학보다 자연과학, 연애 소설보다 물리학 공부를 주장한 청년의 연설 원고1등을 한 평양숭실대학 이성락 군의 웅변 내용을 함께 들어보시죠. 이성락군은 1925년 3월 대학을 졸업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연설에 나섰을 때 나이는 23, 24살 쯤 되었을 것입니다.당시 신문사 기자들은, 관중들의 환호와 박수 그리고 연사의 말투 하나하나를 그대로 지면에 옮겨 놓았더군요.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의 절절한 연설이 10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조금 알기 쉽도록 띄워쓰기와 조사 등은 필자인 제가 손을 봤습니다. 라마(羅馬)는 로마의 음차 표현입니다. ◇평양 숭실대 이성락 등단 (박수)하취하사호(何取何捨乎)먼저 여러분에게 미안한 말씀을 드릴 것은, 제가 평양 사람이라 방언이 섞여 여러분에게 불편될 점이 있을 듯하니 양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그말은 그만 두라고 청중들이 본론을 제촉).자공이 공자께 정사를 물으니 공자는 “족식족병(足食足兵)”이라 안으로는 백성이 굶주림 없고 밖으로 외환이 없으면 나라에 근심이 없으리라고 가르쳤습니다. 자공도 현인이라 다시금 무엇을 제일 먼저 하릴까 하고 물었습니다. 공자같은 성인을 스승으로 모신 제자에 영광일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먼저 하겠습니까? 역사도 없고 윤리도 없고 도덕도 없고 상공업도 없고 농업도 없으며 산에 나무와 강에 물이 없고 만가지 시설이 하나도 없고 천가지 만가지 모두다 남에게 뒤떨어졌습니다(박수).그러니 우리는 이 여러 가지를 만들어 놓아야 되겠습니다만은 일시에 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라마(羅馬)의 문명은 이조일석(一朝一夕)에 이룬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우리에게 취할 바와 버릴 바가 있습니다(박수).우리에게 그 숭고한 문학과 철학과 예술을 매워 이상을 높이하는 것이 필요하나 식산(殖產)과 공예(工藝)에 비할 바가 아니니, 가령 굶주린 사람이 길에 누었다 하면 그에게 철학이나 문학 같은 것을 가르쳐주겠습니까? 밥을 먼저 주겠습니까? 또 돈은 한가지를 살 것 밖에 가지지 않은 사람이 담배를 사겠습니까, 밥을 사겠습니까? 모든 것이 밥을 먹은 후에 주머니가 튼튼하여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박수).증자(曾子)의 양지(養志)도 양구체(養口體)를 먼저 하여야 할 것이오, “윌손”이 부르짓는 정의 인도(正義人道)도 제 주머니가 차고 남은 후의 일입니다(박수. 청중 열광).지금 우리 조선이 어떻습니까? 조상이 피와 땀으로 남겨준 땅을 버리고 압록강이나 두만강에 뜨거운 피눈물을 뿌리며 만주와 시베리아에 유리표방(流離漂放)하는 동포가 무엇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그들에게 무엇을 먼저 주어야 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빵을 주고 옷을 입혀야 되지 않겠습니까?(박수. 청중 열열광)그 뿐입니까? 당장 기근으로 인하여 방금 나뭇잎과 풀잎을 먹다가 그도 못하여 목숨을 끊어버리지 않습니까?(박수).그들에게 철학을 주어야되겠습니까, 문학을 주어야되겠습니까? 무엇보다 빵을 주어라(박수).초유본말(初有本末)하고 사유시종(事有終始)이라고 대학에도 있는 말과 같이 모든 사물의 본말을 잘 알고 그리고 선무취사(先務取捨)를 잘 알 것 같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문학과 철학과 예술을 배워 정신의 위안을 얻고 농공상을 일으키어 물질의 위안을 얻고자 하나 사람이 있어야 하고 경제가 허락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1천만원이 없어서 민립대학 하나를 못 세우지 않습니까? 이것은 물론 자산가의 책임도 없지 않지만 우리가 돈이 없는 까닭입니다(박수).사람들은 말하기를 외국에 유학하는 사람이 많으니 차차 사람이 많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합니다마는 그들에게 돈이 없어서 밥 얻어먹기에 공부할 겨를이 없습니다. 학생보다 노동자라고 부르는게 적당할 줄 압니다(박수).경제계가 이래갖고야 될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정신과학인 철학문학보다 자연과학을 배워야 되겠습니다. 실제를 배우고 물질적 현상을 배워야되겠습니다. 연애에 실패하고 한강수 깊은 물에 어쩌고 어쩐다는 연애소설을 쓸 여유가 있거든 질소와 수소가 물이 되는 법을 알아야겠습니다(박수. 열열광).녹음이 우거진 밑에 서늘하게 누워서 우주의 현상을 생각하기보다 들과 산에 나가 동식물표본을 채집하여 배우는 공부에 열열열열심할 것입니다(만장 환희 박수 연발).우리의 처지가 이같으니 먼저 자연과학을 연구하여 두가지 다 완성되는 때에는 삼천리강산에 무궁화가 되고 이천만 민중이 그 밑에서 춤을 출 것입니다 (열열열열열광 박수)(9시38분).● 오늘은 격정적인 분위기 속에 치러졌던 우리나라 최초의 웅변대회 모습을 사진과 기사로 살펴보았습니다.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들의 울분과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이 전해오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느껴지셨나요? 좋은 댓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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