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호

정승호 기자

동아일보 광주호남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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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승호 기자입니다.

shjung@donga.com

취재분야

2026-03-01~2026-03-31
지방뉴스100%
  • 광주 롯데백화점 ‘농어가 살리기 특별전’

    롯데백화점 광주점이 지역 농수산물 소비 활성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롯데백화점 광주점은 올해 첫 번째 지역 상생협력사업의 하나로 전남 완도군과 완도 특산품 소비촉진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고 14일 밝혔다. 롯데백화점 광주점과 완도군은 그동안 다양한 상생협력사업을 벌여왔다. 광주점은 2007년 지역 유통업계 최초로 지하 1층 식품관에 완도 특산물 전용관을 운영하고 2014년부터 완도 국제해조류박람회를 후원해왔다. 2017년에는 완도를 비롯해 목포, 무안, 영광의 우수 수산물을 한데 모아 판매하는 ‘수산물박람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롯데백화점은 이번 협약을 계기로 21일까지 완도 우수 특산품 50여 종을 판매하는 ‘대한민국 청정바다 수도 완도 수산물 대전’을 연다. 전복, 광어 등 완도 대표 수산물과 다시마, 멸치 등 건어물, 방울토마토 등 농산물을 시중보다 최대 30% 저렴한 값에 판매한다. 농수산물의 맛과 품질을 알리기 위해 특별 시식관을 운영하고 구매 고객에게 사은품도 준다. 박상영 롯데백화점 광주점장은 “이번 행사가 완도 농어가의 판로 확보에 보탬이 됐으면 한다”며 “올해도 지역 농어가를 돕기 위해 다양한 특산물전을 개최하는 등 상생에 적극 나서겠다”고 말했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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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진군 ‘백운동 원림’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전남 강진군 성전면 백운동 원림(園林)은 완도군 보길도 부용동 정원, 담양군 남면 소쇄원과 함께 호남 3대 정원으로 꼽힌다. 조선 중기 처사 이담로(1627∼1701)는 월출산 옥판봉 남쪽 산자락에 대나무 동백 단풍나무가 우거진 자연 속에 약간의 인공적 조형을 더한 별서(別墅)정원을 조성했다. 세 칸 초가 사랑채를 짓고 주변 언덕에 100그루의 매화를 심었다. 계곡물을 안뜰로 끌어들여 아홉 굽이 물길과 작은 연못을 만들고 모란 국화 영산홍을 심은 꽃 계단을 조성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손자에게 “나무 한 그루와 돌 하나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훌륭한 자제가 아니다”며 이곳을 남에게 절대 팔지 말 것을 유언했다. 별장으로 사용하던 백운동 원림은 이후 증손자 이의권(1704∼1759)이 가족과 함께 살며 주거형 별서로 변모하였고 여러 후손들의 손을 거치며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됐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은거문화를 보여주는 백운동 원림이 최근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5호로 지정됐다. 이곳은 다산 정약용, 초의선사, 이시헌 등이 차를 만들고 전해주며 즐겨온 기록이 있는 등 우리나라 차 문화의 산실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승옥 강진군수는 “백운동 원림을 국가 명승으로 지정하기 위해 노력해온 결실을 이제야 보게 됐다”며 “강진군 관광의 보배인 백운동 원림을 많은 관광객이 감상하고 후손에게 물려 줄 수 있도록 보존하고 가꾸겠다”고 말했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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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월드고속훼리 ‘퀸메리호’ 취항 1주년 할인행사

    제주 기점 여객과 화물 수송 1위 선사인 씨월드고속훼리㈜(회장 이혁영)가 국내 최대 크루즈 카페리 ‘퀸메리호’ 취항 1주년을 기념해 특별 할인 프로모션을 진행한다. 지난해 3월 6일 목포∼제주 노선에 취항한 퀸메리호(3만343t)는 그동안 여객 33만 명, 차량 24만 대를 수송했다. 매일 목포에서 오전 9시에, 제주에서 오후 5시에 출발한다. 운항 시간은 3시간 50분. 씨월드고속훼리는 취항 1주년인 6일 모든 승선 고객에게 떡과 제주 해녀 캐릭터 상품을 제공한 데 이어 26일부터 4월 30일까지 다양한 이벤트를 마련한다. 퀸메리호 고급 객실은 최대 5만 원까지, 승용차를 싣고 왕복 이용하면 20%를 할인해준다. 사은품 교환권으로 JTO중문면세점에서 스포츠타월을 받을 수 있고 승용차 1대에 4명이 탑승하면 JTO중문면세점 상품권(2만 원)을 제공한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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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시인 영랑의 건국포장, 고향의 품으로

    3·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민족시인 영랑 김윤식 선생(1903∼1950)에게 추서된 건국포장이 선생의 고향인 전남 강진군의 품에 안겼다. 강진군은 영랑 선생의 막내딸 김애란 씨(75)와 손녀 혜경 씨(62·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장)가 지난해 항일독립유공자로 인정돼 받은 선생의 건국포장을 기증했다고 6일 밝혔다. 강진군은 기증받은 건국포장 증서와 훈장을 시문학파기념관에 전시하기로 했다. 1919년 서울 휘문의숙에 다니던 영랑은 3·1운동으로 학교가 휴학하자 독립선언서와 애국가 가사를 구두 안창에 숨겨서 고향으로 가져왔다. 강진의 청년 학생들과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3월 25일 장날을 기해 거사를 벌이기로 했으나 일경에게 발각돼 대구형무소에서 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영랑은 1930년대 정지용 박용철 등과 시문학파 동인으로 활동하며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생애 87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한국을 식민지화한 일본의 야욕이 정점을 달리던 1930년대 말 ‘독(毒)을 차고’라는 시를 통해 ‘이리’(일제)와 ‘승냥이’(친일파)가 판을 치는 짐승 같은 세상을 규탄하며 저항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대한독립촉성회에 참여하고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전력 때문에 경찰의 감시와 핍박을 받았다. 하지만 끝내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부친의 비석에 조선인이라는 글자, 상석에 태극 문양을 새기는 등 민족정신을 지켰다. 또 백범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 광복군에 군자금을 대는 등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한 공로로 사후 68년 만인 지난해 8월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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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업가치 보상을…” 지자체 ‘농민수당’ 도입 잇따라

    농업과 농촌의 공익적 가치를 인정하고 농가의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농민수당’을 도입하는 지방자치단체가 늘고 있다. 농촌경제 위축으로 어려움을 겪는 농민들의 삶을 개선할 대안으로 농민수당이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농민수당은 영농 규모나 수확량 등에 상관없이 소득보전 개념으로 농가에 일정액을 주는 제도다.○ 농업 가치 보상하는 농민수당 전남 함평군은 농업 보전과 농업인 소득 안정을 주요 내용으로 한 ‘농어가수당 지원 조례안’이 군의회에서 최종 의결됐다고 4일 밝혔다. 이에 따라 함평군은 8000여 농어가에 연 120만 원의 농어가 수당을 지급할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지급 대상은 함평군에 1년 이상 주소를 두고 실경작하는 농가와 가축을 기르는 축산인, 어업에 종사하는 어업인 등이다. 농어업 외 종합소득금액이 3700만 원 이상인 농가는 제외된다. 함평군은 지역 농어민에게 분기별로 30만 원씩 연간 120만 원을 지역화폐인 함평사랑상품권으로 지급한다. 이윤행 함평군수는 “군민의 70% 이상이 농어업에 종사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농어가 수당은 농업인의 소득 안정과 농업농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라며 “이르면 올 하반기부터 수당을 지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남도는 광역자치단체로는 처음으로 내년부터 농민수당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내년 1월 1일부터 농민수당을 지급하기 위해 대상과 금액을 산정하는 용역 발주와 주민 공청회 및 여론조사, 농민수당 지급 조례 제정 등을 준비 중이다. 금명간 용역 수행기관을 선정해 지급 대상과 수당액 등을 세부적으로 검토한 뒤 시군과 재원 분담안을 협의해 내년 예산안에 반영하기로 했다. 앞서 김영록 전남지사는 지난달 18일 순천에서 열린 민선 7기 첫 도민과의 대화에서 “농민 소득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내년부터 농민수당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전국 최초 농민수당 지급 전남 해남군이 올해부터 군 전체 농가 1만4579가구에 농민수당을 지급한다. ‘농민수당’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농가에 일정액을 지급하는 사례는 전국에서 처음이다. 군은 지역 농민들에게 연간 60만 원을 지역화폐인 해남사랑상품권으로 지급해 지역 상가 등에서 사용하게 함으로써 소상공인에게도 도움을 주도록 했다. 연간 예산은 90억 원이다. 이는 군 전체 예산(7800억 원)의 1%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지난해 의회 심의·의결을 통해 조례를 제정한 해남군은 지난달 세부지침을 마련하고 농민수당에 대한 읍면 홍보교육을 하고 있다. 해남군 산이면 지산마을에서 벼와 배추, 밀 등을 재배하고 있는 정거섭 씨(55)는 “농민수당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한 농가들에 희망을 심어주는 지원금이 될 것”이라며 반겼다. 지난해 강진군에서는 농민수당과 유사한 형태의 제도를 도입했다. 쌀 농가에만 지급했던 경영 안정자금을 전체 농가로 확대한 것이다. 지급액은 연간 70만 원이다. 35만 원은 현금으로, 나머지 35만 원은 지역화폐로 지급했다. 진도군은 농민수당의 원조 격인 ‘어르신 소농 직불금’을 3년째 지급해 호응을 얻고 있다. 1ha 이하 농경지를 경작하고 있는 65세 이상 농업인에게 최대 40만 원을 지원하고 있다. 전남에서는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순천시, 화순군, 담양군, 영광군, 장성군 등이 농민수당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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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인 발굴 ‘대동전통문화대상’ 제정

    남도 역사문화예술 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는 대동문화재단(대표 조상열)이 ‘대동전통문화대상’을 제정했다. 대동문화재단은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는 예술인과 장인을 발굴해 대동전통문화대상을 수여한다고 3일 밝혔다. 이 상은 1995년 창립 이래 역사와 문화유산, 전통문화 발전을 위해 노력해 온 대동문화재단이 문화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만들었다. 조상열 대표는 “전통문화가 명맥을 잇기 힘든 열악한 환경에서도 묵묵히 장인의 길을 걸으며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분들을 격려하고 그 가치를 널리 공유하기 위해 상을 제정했다”고 밝혔다. 대동전통문화대상은 문화유산(유·무형문화재, 학술), 미술(수묵화·서예·공예·건축·조각), 공연(국악·전통극), 특별상(한우물상), 미래인재상 등 5개 분야에 걸쳐 시상한다. 특별상은 전통적 가치를 구현하는 장인이나 전문가에게 주는 상이다. 각 분야 대상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함께 상금 500만 원이 수여된다. 신청은 단체의 추천을 받거나 개인이 직접 하면 된다. 단체 추천을 받으면 가산점이 주어진다. 접수기간은 이달 20일부터 4월 20일까지. 신청 서류는 대동문화재단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아 사용하면 된다. 대동문화재단은 남도의 역사 문화 발전을 위해 문화유산 답사와 광주 문화재 지킴이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인문학 강좌, 문화잡지 ‘대동문화’ 발간, 문화예술인 지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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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오 예배당 종소리 울리자… 태극기 내걸리고 장터 곳곳 만세소리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나는 毒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막음 날 내 외로운 魂 건지기 위하여’(김영랑의 시 ‘독을 차고’) ‘순수 서정시인’으로 알려진 영랑 김윤식(1903∼1950)이 1939년 11월 잡지 ‘文章’에 발표한 작품이다. 영랑이 주로 활동하던 1930∼1940년대는 한국을 식민지화한 일본의 야욕이 정점을 달리던 시기다. 영랑은 당시 상황을 ‘이리’(일제)와 ‘승냥이’(친일파)가 판을 치는 짐승 같은 세상이라고 보고, 독(毒)을 차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저항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의 저항정신은 시어에 머물지 않고 실천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김영랑은 고향인 전남 강진에서 3·1운동에 가담했다가 3개월간 옥고를 치렀을 정도다. 당시 강진은 영랑뿐만 아니라 26인의 의사(義士)들이 청년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펼친 항일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강진의 만세운동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1차는 안타깝게도 성사되지 못했지만 2차 시위는 치밀한 준비를 거쳐 ‘전남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기다 1919년 이전에도 강진에선 만세운동의 열기가 꿈틀대고 있었다. 향리(鄕吏)가의 자제들이 보통학교나 외지 유학을 통해 신지식에 일찌감치 눈을 뜬 데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활발해 독립운동의 뜻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불이 붙은 시점은 3월 20일 일본 메이지(明治)대 유학생이자 조선청년독립단의 핵심 멤버였던 김안식이 귀향하면서부터다. 김안식은 강진읍에 사는 김영수, 김학수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의하고, 뜻을 같이할 사람들을 규합하는 등 시위 준비에 나섰다. 이때 서울 휘문의숙에 다니던 김윤식과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양경천이 고향을 찾아 내려왔다. 김윤식은 3·1운동으로 학교가 휴학하자 독립선언서와 애국가 가사를 구두 안창에 숨겨서 가져왔다. 양경천은 내의의 섶을 따고 그 속에 독립신문을 넣어 왔다. 김안식과 김윤식은 8촌 형제였다. 이들은 비밀리에 몇 차례 모임을 갖고 거사 계획을 세웠다. 만세운동을 두 차례로 나눠 1차는 3월 하순, 2차는 4월 초순에 각각 진행하기로 했다. 시위를 주도할 1진은 김안식이, 뒤를 이을 2진은 평양신학교 졸업생 이기성이 각각 책임자가 됐다. 1진은 3월 25일 장날을 기해 거사를 벌이기로 했다. 날짜가 정해지고 태극기와 선언서를 만드는 작업은 서성리 김현균의 집 뒤 대밭 속 작은 초가에서 이뤄졌다. 보안을 위해 밤을 틈타 작업하고, 만든 태극기와 선언문을 대밭에 파묻는 등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작업이 계속되고 참여자가 늘어나자 거사 계획은 일본 경찰에 발각되고 만다. 3월 20일 주동자 12명이 체포되고 제작됐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모두 압수당하면서 1차 시위는 수포로 돌아갔다. 체포된 이들은 광주지법 장흥지청에서 1년에서 1년 2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졌지만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모두 풀려났다. 당시 검찰은 이에 반발해 상고했지만 고등법원도 기각 판결을 내려 무죄가 확정됐다. 당시 검찰은 이들에 대해 보안법 7조(정치에 관해 불온한 언론 동작 또는 타인을 선동 교사하여 치안을 방해한 자에 대해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를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대구복심법원과 고등법원은 이들이 미수에 그쳐 해당 법률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태극기 펄럭이자 천둥 치듯 울려 퍼진 만세 소리 1차 거사가 무산됐지만 만세운동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2차 시위 준비는 약속대로 이기성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구속돼 재판을 받은 이들이 2차 시위 계획을 철저히 함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기성은 3월 22일 같은 마을 청년인 김현봉 황호경과 모임을 갖고 1차 시위의 실패 원인을 분석한 뒤 새로운 작업 방침을 정했다. 우선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작업 장소를 여러 곳으로 분산했다. 각 작업장은 독립적으로 운영하되 상호 연락을 취하도록 했다. 여성들에게 외부의 경계와 일경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임무를 맡겼다. 또 교회 신도를 중심으로 시위 준비 동참자들을 모았다. 2차 거사일을 장날인 4월 4일로 정한 이들은 예배당의 정오(正午) 종소리가 울리고 군청 뒤 북산에 태극기가 내걸리면 일제히 만세를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북산에 태극기를 누가 게양하느냐가 문제였다. 이때 농사를 짓는 김후식(당시 24세)이 “내가 걸겠다”고 나섰다. 준비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강진보통학교 학생 가운데 나이가 많고 통솔력이 있는 이은표가 학생 동원을 담당하기로 했다. 김현봉 황호경 김후식 오승남 등은 밤을 새워가며 태극기 300여 장, 선언서 70여 통, 독립가 20여 통을 준비해 4월 3일 밤 이기성 집으로 운반했다. 거사일인 4월 4일 오전 이들은 이기성의 집에 모여 마지막 점검을 한 뒤 각자 만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독립가 등을 시장 상품이나 어물 상자에 넣어 강진읍 장터로 이동했다. 정오가 되자 만세 시위 시작을 알리는 예배당의 종소리가 울렸다. 이에 김후식은 집에서 준비한 태극기를 품에 안고 강진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북산에 올랐다. 그는 일명 ‘비둘기 바위’ 정상에 태극기가 걸린 장대를 소나무에 묶었다. 북산에 태극기가 펄럭이자 장터에는 천둥 치듯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진보통학교 학생들도 학교 밖으로 뛰쳐나와 남문거리에서 시위 군중과 합류했다. 군중들은 남문 앞 광장에 집결해 가두행진에 나섰다. 이기성 황경호 오승남 등이 선두에 나서자 1000여 명이 뒤를 따랐다. 시위 군중이 불어나자 강진경찰서는 해남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와 장흥에 있는 헌병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해가 저물 무렵 시위대가 경찰서로 진입하자 지원 나온 병력들이 강제 해산에 나섰다. 창검이 번득이고 총성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일제의 무력 진압으로 대열은 흩어졌고 주동자 22명이 경찰에 끌려갔다. 이들 가운데 8명은 풀려나고 14명이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태극기를 만들고 시위에 참여한 박영옥(당시 21세·여)은 재판정에서 심문하는 일본 검사에게 “부모 잃은 자식이 부모를 찾는 것이 당연하듯 조국을 잃은 내가 나라를 찾겠다는 것이 무슨 죄냐”며 따졌다. 2차 시위를 주도한 이기성 김현봉 황호경 오승남 등은 서울고등법원에까지 상고하며 독립운동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기각당하고 최고 2년형이 확정돼 옥살이를 했다.○ “강진 만세운동은 저항이자 축제였다” 강진 만세운동의 특징은 청년, 학생들이 시위를 1, 2차로 나누어 계획하는 치밀함을 보였다는 점이다. 1차 시위의 실패로 2차 시위 준비는 더욱 용의주도하게 진행됐다. 태극기와 선언서를 분담해 만들고, 작업 시 경계를 위해 감시자를 두는 등 철저한 조직 관리를 통해 거사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이기훈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강진의 만세 운동에 참여한 민중에게 시위는 저항인 동시에 축제였다”며 “이는 의병과 동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며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기원이 됐다”고 평가했다. 강진에는 3·1운동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두 곳에 있다. 하나는 1976년 강진읍 서성리에 건립된 3·1운동 기념비다. 동아일보와 강진 유지들로 구성된 건립위원회가 세운 기념비로 뒷면에 당시 독립만세를 외쳤던 2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강진읍 남포마을 입구의 기념비는 4·4만세 시위에 가담한 마을 출신 강주형 박학조 박영옥 차명진 정헌기를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세운 것이다. 황호용 강진군 문화원장(76)은 “오로지 태극기만을 손에 쥐고 항거한 강진의 만세운동은 인근 목포와 나주, 곡성 등지의 만세 시위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며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4일 만세 재현 행사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 ▼ 만세운동 계획 김안식, 이듬해 동아일보 강진분국장으로 ▼2차 시위 주도 김현봉은 분국 기자로1927년 강진지국 승격 뒤엔 日결합 지주 맞선 소작쟁의 집중 보도2011년 강진군이 펴낸 ‘강진군지’에 따르면 강진 만세운동의 1차 시위를 계획한 김안식과 2차 시위를 주도한 김현봉은 1920년 동아일보 강진분국장과 분국 기자였다. 김안식은 1919년 6월 무죄 판결을 받기 전까지 3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김현봉은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형을 살았다.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 당시 강진분국은 목포지국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당시 목포지국은 김현봉의 형이자 김안식과 함께 강진의 1차 시위를 준비했던 김현상이 운영하고 있었다. 김안식은 이런 인연으로 1921년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맡았다. 1933년 전남도평의원(지금의 도의원), 금릉중학교 2대 교장을 거쳐 1935년 강진지국 고문으로 위촉됐다. 김현봉은 1922년 동아일보 강진분국장으로 승진했다. 그해 3월 22일자 동아일보는 사고(社告)를 통해 김현봉을 분국장으로 임명했으며 분국을 서성리에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강진분국은 1927년 강진지국으로 승격되면서 2차 만세 시위에 참여한 차부진을 기자로 임명했다. 지국장을 포함해 기자를 4명으로 늘린 강진지국은 이후 청년회와 신간회 활동, 일제와 결합된 지주들의 부당한 소작료 횡포에 맞서는 소작쟁의운동 등을 집중 보도했다. 1931년 12월 1일자 동아일보에는 ‘강진군 군동면 소작쟁의단 200명이 출장소에서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다가 주임을 구타하자 경찰이 주모자 6명을 체포했다. 소작인들은 분노하여 약 500명이 경찰에 몰려가 검속자 석방을 요구하다가 다시 50, 60명이 검속되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1933년 9월 강진에서는 동아일보 병영지국장이 일제의 탄압에 맞서 경관주재소(일본 경찰의 말단 조직)에 불을 지른 사건이 발생했다. 병영지국장이던 방태섭은 병영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던 강진의 사회운동을 동아일보에 적극 보도하던 기자였다. 강진 향토사를 연구하는 윤순학 씨(62·전 강진군 기획홍보실장)는 “강진의 애국지사들 중에는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줄기차게 일제 침략에 저항하며 언론을 통한 민족자립자강운동에 나섰던 선각자가 적잖다”고 말했다.강진=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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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 지속사업으로 여성 독립유공자 재조명해야”

    1919년 광주 3·1만세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른 양태원 여사(1904∼?)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26일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양 여사는 경북 경주시 내남면 덕천리 출신이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광주교 아래 큰 장터에서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광주농업학교 학생과 교사, 주민 등 1000여 명이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103명이 구속돼 최대 징역 3년형을 받았다. 당시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다니던 양 여사도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돼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양 여사는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이 2009년 국가기록원에서 기록을 발굴해 100년 만에 서훈을 받게 됐다. 재야 사학자인 정 소장은 그동안 광주 3·1만세운동 관련자의 판결문과 수형 기록 등을 찾아내 올해까지 20명이 유공자로 인정받도록 도왔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항일운동사에서 빛을 보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광주전남지회는 26일 광주시의회에서 ‘광주전남 항일독립운동 속의 여성들’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경순 전남대 명예교수는 심포지엄에서 “국가 지속 사업으로 여성 독립유공자 발굴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지금까지 광주전남 여성 독립운동가의 실태 조사는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3·1만세운동과 11·3학생독립운동에 국한됐을 뿐 전체적으로 시도된 적이 없다”며 “남성 독립유공자 제적원부를 역추적해 여성 인명을 발굴하고 일제강점기 판결문, 범죄인 명부, 수형 기록 전수조사와 함께 구한말 여성 의병도 조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광주전남지회는 최근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상이 부각되고 있지만 독립유공자로 선정되는 비율은 크게 낮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전체 독립유공자 1만5180명 중 여성은 357명으로 2.4%에 불과하다. 광주전남 출신 독립유공자 1107명 가운데 여성은 41명(3.7%)으로 집계됐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유공자 선정 비율이 낮은 것은 자료 부족과 기준 미달, 행적 미상 등으로 다수가 선정 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특히 국가보훈처의 서훈 기준이 수형 3개월 이상이고 독립유공자 선정이 수형생활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점도 걸림돌로 지적됐다. 여성 독립운동가 대부분은 학생 신분으로 수형생활을 하지 않았거나 했더라도 3개월 미만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사 정리가 남성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여성 주체들이 잊히거나 배제된 것도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배경이다. 명진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광주전남지회장은 “투옥 기록이 남아 있어 서훈 대상이 되는 여학생뿐 아니라 민중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적극 발굴해야 한다”며 “개인의 삶에 연연하지 않고 헌신했던 무명의 지사들이 후대에 길이길이 드높여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수정 광주시의회 의원은 “3·1운동 관련 문화유산 발굴과 보존이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조례 제정과 예산 확보가 필요하다”며 “시의회에서 전담팀을 구성해 3·1운동 관련 연구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광주전남지회는 3월 5일까지 광주시청 1층 시민홀에서 여성 독립운동가 초상화 131점을 선보이는 ‘오늘 그들 여기에’전을 연다. 전시회에서는 광주전남 출신은 물론이고 영화 ‘암살’의 실제 주인공 남자현,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 등을 만날 수 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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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천시 삼산중학교 내년 3월 정상 개교

    전남 순천시 선월지구 하수처리장 연계 처리 문제로 착공이 미뤄졌던 삼산중학교가 내년 3월 정상 개교한다. 순천시는 최근 허석 시장이 삼산중 이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창선 중흥건설 회장과 만나 선월지구 하수처리 시설과 연계하지 않고 이달 중 학교 신축 공사에 들어가기로 합의했다고 25일 밝혔다. 내년 3월 삼산중이 개교하면 이설 지연에 따른 원거리 배정 등 학생 불편이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신대지구 개발시행사인 중흥건설은 2017년 전남도교육청, 광양만권경제자유구역청, 순천시와 원도심에 위치한 삼산중을 신도심지역인 신대지구로 이설하는 협약을 맺었다. 중흥건설은 140억 원을 들여 2만453m²에 28학급 규모의 건물을 지은 뒤 도교육청에 기부채납하고 도교육청은 기존 삼산중 부지를 중흥건설에 넘기기로 했다. 순천시 선월지구 사업시행자로 선정된 중흥건설은 순천시와의 구두약속 등을 제시하며 선월지구 하수종말처리장을 신설하지 않고 순천시 하수처리장과 연계해 사용할 것을 주장하면서 삼산중 건립이 지연됐다. 삼산중 개교가 불확실해지자 신대지구 학부모들은 최근 삼산중 착공을 촉구하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피켓 시위를 벌였다. 중흥건설 관계자는 “중학교 신축 공사에 1년이 걸리는 것을 감안할 때 이번 달에 착공하지 않으면 내년 3월 개교가 불가능한 상황이어서 조건 없이 공사에 들어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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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3·1운동 당시 최초 만세 시위지는 광주교 아래였다”

    1919년 광주 3·1운동 당시 최초 만세 시위지는 부동교 아래가 아니라 광주교 아래였으며 시위 및 행진 코스와 당시 발행된 ‘조선독립광주신문’의 제작 장소도 당초 알려진 것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노성태 광주 국제고 수석교사가 당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재판을 받은 103명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다. 노 교사는 20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열리는 ‘3·1혁명 100주년 학술세미나’에서 광주 3·10 만세운동 준비와 전개과정을 판결문을 통해 정리한 ‘광주 3·1운동의 재구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103명 판결문 분석해보니 노 교사는 논문에서 광주 3·1운동은 ‘숭일의 뿌리’(1988년), ‘광주시사’(1993년), ‘양림교회 90년사’(1994년), ‘수피아 100년사’(2008년),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 100년사’(2009년), ‘광주전남 독립운동사적지1’(2010년) 등 3·1 운동 관련 책자에 간략하게 언급돼 그 전모를 알기 어렵다고 밝혔다. 광주 3·1운동만을 다룬 논문도 없을뿐더러 이를 언급한 몇 편의 논문조차 모의 및 전개 과정, 체포된 인물들에 대한 연구는 찾아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노 교사는 판결문을 통해 1919년 3월 10일 처음으로 만세를 불렀던 곳이 구동 광주공원 앞 광주교 아래 모래사장(큰 장터)이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동안 광주 3·1운동을 다룬 책자는 최초 시위지를 불로동 부동교 아래 작은 장터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김복현 외 21인’에 대한 광주지법 판결문(1919년 6월 16일)을 보면 ‘내일(10일) 오후 3시 30분부터 광주 큰 장터에서 독립운동을 개시할 것이라는 내용을 알리고…’라고 쓰여 있고, ‘김복현 등 200여 명이 첫 만세를 불렀던 최초 시위지는 광주교 밑 모래사장이었다’고 기재돼 있다. 시위 군중이 행진하던 길도 당초 알려진 것과 차이가 있다. ‘광주시사’에는 작은 장터를 출발해 서문통(부동교에서 충장우체국 가는 길)에서 본정통(충장로)으로 좌회전한 뒤 충장로 파출소에서 우회전해 금남로를 지나 광주경찰서로 가는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판결문에는 서문통을 지나 본정통으로 향한 뒤 충장로4가에서 광주농교 학생 등 군중과 합세해 다시 충장로로 되돌아와 광주우편국(충장우체국)을 지나 광주경찰서까지 행진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군중이 금남로로 행진한 것이 아니라 충장로를 오가면서 시위를 벌였다는 것이다. 3·10 만세운동 당시에 발행됐던 ‘조선독립광주신문’의 제작 장소도 달랐다.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 회계직원인 황상호는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조선독립광주신문 1∼3호를 비밀리에 발간해 3월 11∼18일 배포했다. ‘광주전남 독립운동사적지1’에는 제중원 지하실에서 제작한 것으로 돼 있지만 ‘황상호 외 2인’의 판결문에는 황상호 자택으로 기록돼 있다. 재판을 받은 인물의 이름과 형량이 다른 사례도 확인됐다. ‘광주시사’에는 김철(김복현) 정광호 범윤두 김용규 한길상 최정두 박일구 김윤호 이창호 김태열 김범수 강석봉 최병준 김강 최한영 등 15명이 3년형을 받은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판결문에 따르면 김윤호는 이윤호의 오기(誤記)이며 형량도 4개월이다, 이창호는 6개월, 강석봉은 1년 6개월(1심)과 1년(2심)을 각각 선고받았다.○ 청년 학생이 중심된 만세운동 노 교사는 103명의 판결문을 분석해 형량과 직업, 주거지 등을 분류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4건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김복현 외 21인’은 광주 3·1운동을 모의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인쇄한 후 시위 군중을 주도했던 핵심인물들이었다. 이들에게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죄가 적용돼 3년에서 1년 6개월의 형이 선고됐다. ‘박애순 외 76인’은 독립선언서 등을 학생 및 시위 군중에게 배포하고 앞장서 독립만세를 외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개월에서 4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는데 다수가 숭일·수피아·농업학교 학생들이었다. ‘조선독립광주신문’ 1∼3호를 제작, 배포한 혐의(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로 재판을 받은 ‘황상호 외 2인’에게는 3년에서 2년 6개월이 선고됐고 4월 8일 자혜병원 앞 만세시위를 주도한 광주보통학교 4학년 최영섭은 1년형(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재판을 받은 103명 중 최연소자는 수피아여학교 학생 강화선(당시 16세)이었으며 최고령자는 두 아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한 광주군 본촌면 일곡리 출신 이주상(당시 52세)이었다. 10대와 20대가 89명으로 전체 86.4%를 차지해 광주 만세운동이 학생과 청년이 중심이 된 항일운동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생 53명 가운데 숭일학교가 24명으로 가장 많았고 수피아학교 20명, 농업학교 6명, 대학생 2명, 보통학교 1명 등이었다. 재판을 받은 이들의 직업도 다양하다. 농민, 교사, 학생, 병원 근무자뿐 아니라 석유장수, 안마사, 대장장이, 신발가게 운영, 이발사, 수공업 제품을 만드는 장인까지 각계각층이 참여했다. 거주지를 살펴보면 광주군 효천면과 광주면 출신이 84명으로, 81.6%를 차지한다. 이는 양림동과 광주읍성 및 광주천 주변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3명 중 60명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으며 43명은 직계 가족이 없거나 자료 미비, 사회주의 활동 등으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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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 판결문은 일제 만행 보여주는 증거물”

    “1919년 당시 판결문은 애국지사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이자 일제의 만행을 보여주는 증거물입니다.” 1919년 광주 3·1운동 당시 재판을 받은 103명의 판결문을 분석해 ‘광주 3·1운동의 재구성’이란 논문을 발표하는 노성태 광주 국제고 수석교사(60·사진)는 18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논문이 그동안의 오류를 바로잡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빛고을역사교사모임 회장을 지낸 노 교사는 ‘영산강 고대문화 마한-나주’ ‘다시, 독립의 기억을 걷다’ 등을 펴낸 향토사학자다. ―어떻게 판결문을 분석하게 됐나. “‘광주 3·1운동 100주년 준비모임’에 참여하면서 세미나 발표 책임을 맡았다. 그동안 사료를 찾아 보니 분량이 너무 적어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당시 재판을 받은 분들의 판결문을 살펴봤다. 판결문과 기존 사료들을 비교해 보니 이름이 틀리고 형량도 차이가 나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판결문과 기존 사료 내용이 다른 이유는…. “광주 3·1운동의 최초 사료는 1965년 ‘신동아’ 3월호에 실린 최한영 선생의 ‘비밀결사 신문잡지종람소’라는 4쪽짜리 회고담이다. 최 선생은 만세운동을 주도한 주역 중 한 분이다. 회고담이 기억에 의존해 쓰이다 보니 이름이나 날짜, 형량이 틀린 것 같다. 그런데 광주시사 등 사료가 선생의 회고담을 거의 그대로 베껴 쓰면서 오류가 생긴 것이다.” ―판결문이 왜 중요한가. “판결문은 당시 이름과 형량, 직업, 거주지 등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1차 사료다. 하지만 한계는 있다. 형량을 낮추기 위해서 혹은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 진술을 할 수 있다. 판결문에 ‘조선독립광주신문’ 제작지가 제중원이 아닌 황상호 자택으로 돼 있는 것이 그 예다. 황상호 등이 병원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자택이라고 했을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다른 분들은 거짓 진술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3·1운동 100주년의 의미와 과제는…. “100주년이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소명은 청산과 계승이다. 광주에서는 친일파가 작곡한 교가를 교체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일제 잔재 청산작업이 전국으로 확산됐으면 한다. 광주전남은 전국 최대의 항일독립운동지다. 이는 남도인의 자랑이자 정체성이다. 이를 계승 발전시키는 것은 지역민의 의무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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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31개 학교 올해 신입생 없어

    올해 전남에서 31개 학교(분교 포함)가 신입생을 받지 못하고 4개 분교는 문을 닫는다. 17일 전남도교육청에 따르면 초등학교 6곳과 분교 22곳, 중학교 2곳, 고등학교 1곳은 새 학기 입학생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 여수 10곳(분교 포함), 신안 5곳, 진도 3곳, 완도 2곳 등 섬 지역에서 신입생 기근 현상이 두드러졌다. 초등학교 4곳과 분교 10곳, 중학교 1곳과 분교 1곳 등 16곳은 신입생이 1명에 그쳐 농어촌 인구 감소의 단면을 여실히 드러냈다. 여수 거문초 덕촌·서도분교, 영광중앙초 월송분교, 완도 보길동초 예작분교 등 4곳은 올해 문을 닫는다. 전남 초중고교생은 2000년 34만1000여 명이었지만 올해 19만3000여 명으로 크게 줄었다. 유치원을 포함한 학생 수는 21만3942명으로 지난해(22만409명)보다 6467명이 감소했다. 학생 수가 줄면서 초중학교 2곳 중 1곳은 60명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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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주 동신대, 국가시험에서 두각 드러나

    전남 나주 동신대가 각종 국가시험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전국 평균을 크게 웃도는 합격률을 이어가며 ‘잘 가르치는 대학’의 명성을 다져가고 있다. 14일 동신대에 따르면 한의학과 졸업예정자 51명 전원이 2019년 제74회 한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해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100% 합격률을 기록했다. 이 대학 한의학과는 2011년부터 2016년까지 6년 연속 국가시험 100% 합격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보건계열 학과의 국가시험 합격률도 눈에 띈다. 방사선학과는 지난해 12월 치러진 제46회 방사선사 국가시험에 졸업생과 졸업예정자 30명이 응시해 100% 합격했다. 전국 평균 합격률은 79.7%였다. 제45회 방사선사 국가시험에서는 전국 수석 합격자를 배출했다. 물리치료학과는 제46회 물리치료사 국가시험 응시생 70명 중 68명(97.1%)이 합격해 전국 평균(89.4%)을 크게 웃돌았다. 2015년과 2017년에는 전국 수석 합격자를 배출하는 성과를 냈으며 2016년에는 100% 합격률을 기록했다. 언어치료학과는 지난해 12월 제7회 언어재활사 국가시험에서 응시생 35명 중 32명(91.4%), 작업치료학과는 제46회 작업치료사 국가시험에서 응시생 54명 중 52명(96.3%)이 합격했다. 두 학과는 각각 전국 평균 74.3%, 88.0%를 웃돌았다. 안경광학과의 경우 2018년 제31회 안경사 국가시험에서 전국 평균(76.8%)보다 높은 88.2%(17명 응시 15명 합격)의 합격률을 보였다. 동신대는 학생들이 국가시험을 체계적으로 준비할 수 있도록 방과 후 프로그램 ‘동신반딧불’, 전공 멘토-멘티제도, 스터디 지정 교수제, 그룹 스터디, 국가시험 전용 공부방 등을 지원하고 있다. 국가시험 과목별로 맞춤형 개인 특강을 진행하고 모의고사를 치른 뒤 분석 자료를 토대로 면담을 하는 등 학생 개인별 맞춤형 교육도 하고 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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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화순군 ‘동·서·남·북면’ 명칭 바꾼다

    전남 화순군이 동면·이서면·남면·북면 등 지역적 특성 없이 방위 구분으로 지어진 4개 면의 명칭을 변경하기로 했다. 12일 화순군에 따르면 동면·이서면·남면·북면의 명칭은 방위 구분에서 유래했다. 1759년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이서면·남면·북면이 당시 동복현을 기준으로 서·남·동쪽에 위치해 명칭이 붙었다. 동면은 당시 화순현을 기준으로 동면에 위치해 명칭이 지어졌다. 화순군은 획일적인 방위 구분 명칭 대신 지역의 고유한 특징을 반영해 그 가치와 역사성을 알리기 위해 면의 명칭을 바꾸기로 했다. 해당 4개 면은 이장단 회의 등을 거쳐 새 후보군을 선정한 뒤 28일까지 마을별로 사전 설문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전문가 의견을 수렴하고 지명위원회 심의, 주민투표 방식의 찬반 여론조사 등을 거쳐 명칭을 최종 결정할 계획이다. 새로운 명칭이 결정되면 관련 조례를 개정해 2020년 1월 1일부터 새 명칭을 사용한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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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도 年 1억 이상 부농 5000농가 넘어서

    전남에서 연간 1억 원 이상 소득을 올리는 부농(富農)이 5000농가를 넘어섰다. 10일 전남도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전남지역 농가와 법인을 대상으로 소득 통계조사를 한 결과 연소득 1억 원 이상 농업인은 5027농가로 집계됐다. 2017년과 비교해 465농가(10.2%)가 늘었다. 소득 규모별로는 1억 원 이상 2억 원 미만이 3908농가(77.7%)로 파악됐다. 2억 원 이상 5억 원 미만은 933농가(18.6%), 5억 원 이상도 186농가(3.7%)에 달했다. 농가소득 10억 원 이상도 42농가(0.8%)나 됐다. 품목별로는 식량작물이 1858농가(37%)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축산이 1790농가(35.6%), 채소 720농가(14.3%), 가공·유통 분야 330농가(6.6%), 과수·화훼 329농가(6.5%) 순이다. 연령대별로는 50대가 2086농가(41.5%)로 가장 많았으며 60대 이상이 1996농가(39.7%)로 뒤를 이었다. 40대 이하 청년농업인도 945농가(18.8%)나 됐으며 귀농인 고소득 농가도 282농가(5.6%)에 달했다. 지역별로는 고흥이 571농가로 가장 많았으며 강진 544농가, 해남 522농가, 영광 409농가, 보성 387농가, 나주 371농가 순이다. 영광의 경우 보리산업 활성화로 벼·보리 재배 농가와 축산농가 집중 육성 등으로 240농가가 고소득 농가로 이름을 올리면서 부농 수가 크게 늘었다. 전남도는 시설 현대화를 통한 경영비 절감, 고품질 농축산물 생산, 재배기법 차별화, 적극적 판로 개척을 통한 안정적 판로 확보 등으로 고소득 농업인이 늘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친환경 농산물 유통망 조직화와 다양화, 농촌 융·복합산업화 기반 확충, 친환경 축산 실천 등도 주요 이유로 꼽고 있다. 서은수 전남도 농축산식품국장은 “스마트팜 등 농축산업 혁신성장 모델 구축, 농촌 융·복합산업 인프라 구축 등을 통해 전남 농축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겠다”고 밝혔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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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 체험의 場’ 잡월드… 순천만에 들어선다

    청소년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직업 체험의 산실이 될 순천만 잡월드(조감도)가 3월 착공한다. 7일 순천시에 따르면 순천시 해룡면에 순천만 잡월드가 2020년 10월 개관을 목표로 건립 공사를 시작한다. 국비 240억 원, 지방비 245억 원 등 485억 원이 투입돼 연면적 8000m²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건립된다. 2016년 고용노동부 공모 사업에 선정돼 추진되는 순천만 잡월드는 경기 성남의 한국 잡월드에 이어 두 번째다. 순천만 잡월드는 효율적인 공간 사용을 위해 체험 콘텐츠를 먼저 결정한 뒤 건축공사를 진행하는 ‘선 콘텐츠 확정, 후 건축공사’ 방식을 도입했다. 지난 1년간 설계용역을 통해 기획한 순천만 잡월드의 디자인 철학은 모든 사람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에 기초하고 있다. 장애인을 위해 출입구 턱을 없애고 어린이, 임신부, 노약자 모두 이동에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사각지대가 없는 공간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 어린이 체험관은 흥미를 끌기 위해 놀이 위주의 콘텐츠로 구성했다. 놀이기구의 일종인 카트를 타고 직업 체험을 할 수 있고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드론을 직접 만들어 조종할 수 있다. 청소년체험관은 뉴미디어로 떠오른 유튜브 영상을 직접 기획하고 만들 수 있는 1인 미디어 콘텐츠 시설이 들어선다. 생태도시 순천을 느낄 수 있도록 가드닝숍(정원 가꾸기 숍)과 자연환경연구소, 야생동물구조센터로 구성된 에코캠프도 들어선다. 반려동물과 관련한 직업을 체험할 수 있는 반려동물센터와 헬스케어센터도 선보인다. 순천시는 인근에 있는 순천만국가정원과 연계해 수학여행 코스로 주목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순천시 관계자는 “잡월드가 문을 열면 광주전남은 물론이고 전북과 경남 지역에서 연간 30만 명 이상이 방문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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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양군 남면, 19일부터 ‘가사문학면’으로 명칭 변경

    전남 담양군 남면이 ‘가사문학면’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6일 담양군에 따르면 19일부터 ‘읍·면·리·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개정 조례안’이 시행됨에 따라 남면 명칭이 가사문학면으로 바뀐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방위에 기초해 사용됐던 남면 명칭은 시행 105년 만에 역사 속 기록으로 남게 됐다. 주민 의견조사를 통해 결정된 가사문학면 명칭은 고장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담고 있어 지방자치시대 지역 경쟁력 확보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담양군은 송순(1493∼1583) 정철(1536∼1593) 등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들이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 낸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산실이다. 18편의 담양 관련 가사문학을 비롯해 누각과 정자가 현재까지도 잘 보존돼 있다. 특히 남면 일대는 가사 관련 유산이 가장 많아 가사문화권으로 불리고 있다. 2000년 가사문학관이 문을 열어 가사문학을 체계적으로 전승, 보존하고 있다. 최형식 담양군수는 “가사문학면으로의 명칭 변경은 지역의 고유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가사문학면의 가치를 드높이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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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팔 잃은 윤형숙 열사, 취조하는 일경에 “나는 조선의 血女다”

    ‘광주에서 야소교(예수교)가 주동한 군중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 중 조선인 1명이 부상당하여 경찰이 해산시켰음.’ 1919년 3월 11일 조선 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본국에 ‘전라남도 방면의 정황’이란 제목의 급전(急電)을 보낸다. 하루 전 광주에서 일어난 3·10만세운동을 간략하게 정리해 육군성에 보고한 것이었다. 눈여겨볼 점은 광주의 만세운동을 군중 폭동으로 규정하고 무력으로 해산시키면서 이례적으로 부상자 1명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날의 시위가 한 명의 부상자로 인해 더욱 격화될 것을 우려한 일본 경찰이 서둘러 진압에 나섰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거명된 사람은 누구일까. 당시 여학생으로 시위대의 맨 앞줄에 서서 일본 경찰과 맞서다가 왼팔을 잃은 윤형숙 열사(1900∼1950)가 그 주인공이다. 최철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67)은 “육신의 일부가 절단돼 선혈이 쏟아지는 중에도 떨어진 태극기를 주워 들고 만세를 더 크게 외친 그를 남도에서는 ‘광주의 유관순’으로 부른다”고 말했다.○ 상복에 새긴 태극기 윤형숙은 1900년 9월 13일 전남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윤치운은 한학자였다. 윤형숙이 7세 되던 해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윤치운은 어린 딸을 전남 순천에 있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집에 맡겨 초등학교를 마치게 했다. 윤형숙은 순천 성서학원을 수료한 뒤 18세에 광주지역 최초 여성 중등교육기관인 수피아여학교(현 수피아여고)에 진학한다. 리더십이 뛰어났던 그는 반장을 도맡았고 ‘반일회(班日會)’라는 학교 행사에 적극 참여하고 연극을 무대에 올리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당시 수피아여학교에는 애국심이 강한 박애순 선생(1896∼1969·건국훈장 애족장)이 있었다. 박 선생은 당차면서도 과묵한 윤형숙을 각별히 아꼈다. 박 선생은 고종 황제의 승하 소식과 일제에 빼앗긴 나라 사정 등을 학생들에게 들려주며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광주만세운동은 3·1운동 전부터 움트고 있었다. 일본 도쿄 유학생 정광호가 귀국해 2·8독립선언을 청년들에게 알렸다. 2월 말 3·1운동 거사준비위원회의 특명을 받고 서울에서 내려온 김필수 목사가 최흥종과 김철(본명 김복현)을 만나 거사 계획을 논의한다. 이후 최흥종 김철 두 사람은 서울로 올라가 3·1운동 광주지역 총책임을 맡기로 한다. 하지만 최흥종이 인력거 안에서 만세를 부르다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자 김철은 홀로 3월 6일 광주로 내려온다. 1919년 작성된 광주지방법원(1심) 판결문에 따르면 김철은 최정두, 김강, 최병준, 송흥진, 최정두, 한길상, 김용규, 김태열, 강석봉, 손인식 등과 3월 6일 양림동 금동교회 남궁혁 장로 집에 모여 거사일을 3월 8일로 잡고 역할을 분담했다. 하지만 준비 시간 부족으로 거사일은 작은 장날인 3월 10일로 늦춰진다. 그사이에 학생들과 시민들의 참가 독려 작업이 진행됐다. 박애순 선생도 독립선언문 50여 통을 받고 학생들에게 취지를 설명했다. “당연히 참가해야 한다”고 뜻을 모은 학생들은 기숙사인 수피아홀 지하에서 밤새 고종 황제 장례식 날 입었던 치마를 뜯어 태극기를 만들었다.○ ‘나는 피를 흘리는 조선의 혈녀다’ 3월 10일 오후 3시경 거사 장소인 작은 장터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작은 장터는 지금의 부동교 밑에 펼쳐진 반달 모양의 백사장 하천변이다. 기독교인들과 수피아여학교 숭일학교 학생들은 광주천, 일반 시민은 서문통(지금의 광주우체국 앞에서 황금동으로 가는 길), 농업학교 학생과 군중은 북문통(지금의 충장로2가에서 충장파출소까지)을 거쳐 이곳으로 모였고, 그 인원은 1000여 명에 달했다. 누군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동시에 격문과 태극기가 머리 위로 뿌려졌다. 몇몇은 지팡이처럼 짚고 있던 막대기에 태극기를 매달고 휘저었다. 쌀장수는 됫박을 든 채 시위대에 따라붙었고, 걸인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장타령 대신 만세를 불렀다. 시위 행렬은 서문통을 지나 현 광주우체국 앞을 돌아 충장로로 내려가서 충장파출소 앞에서 금남로로 들어섰다. 댕기머리에 검정치마, 흰 저고리를 입은 윤형숙은 시위 행렬의 맨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 헌병과 경찰은 군중의 기세에 눌려 시위를 막지 않았다. 하지만 시위대가 옛 광주지방법원(지금의 동구 금남로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앞을 지나 광주경찰서 쪽으로 향하자 총검을 휘두르며 무자비한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 기마 헌병이 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던 윤형숙의 왼팔 상단부를 군도(軍刀)로 내리쳤다. 잘려 나간 팔은 붉은 피를 뿌리며 땅에 떨어졌다. 급격한 출혈로 윤형숙은 정신을 잠시 잃기도 했다. 하지만 떨어져 나간 손은 여전히 태극기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온몸이 핏물에 젖은 윤형숙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오른손으로 잘려 나간 왼팔이 움켜쥐고 있던 태극기를 뽑아든 뒤 더 큰 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군중은 더욱 격렬하게 항거에 나섰다. 군중이 광주경찰서로 몰려들자 일제는 무력 진압의 수위를 높였고, 경찰서 앞마당은 피로 물들었다. 이 과정에서 100여 명이 현장 구금되었다. 한쪽 팔을 잘리고도 만세를 외친 윤형숙의 행동에 일본 군경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가 육군성에 보낸 전보에서 부상자를 언급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응급치료를 받은 그는 일경의 취조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너를 조종한 배후는 누구냐?”며 압박하는 일경에 윤형숙은 “나는 보다시피 피를 흘리는 조선의 혈녀다”라며 꼿꼿하게 버텼다.○ 역사의 별이 되다 광주만세운동은 다음 날인 11일에도 계속됐다. 오후 5시 무렵 숭일학교 학생과 농업학교 학생 300여 명이 시위를 벌이다 23명이 구속됐다. 13일 큰 장날에는 장꾼들을 포함한 1000여 명이 목이 터져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20명이 체포됐다. 당시 광주의 인구가 1만여 명 수준임을 고려할 때 대단한 시위 규모가 아닐 수 없다. 연이은 시위로 시내 경비가 삼엄해졌다. 그러나 상인들은 철시(撤市)로 맞섰고, 비아, 하남, 임곡, 동곡, 평동, 삼도, 본량 등 각 면에서는 4월까지 산에 봉화가 오르는 것을 신호로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 윤형숙이 다녔던 수피아여학교는 1937년 신사 참배 거부로 강제 폐교되는 아픔을 겪었다. 현재 수피아여고 대강당 앞엔 광주 3·1만세운동 기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기념 동상 뒷면에는 당시 수피아여학교 교사와 학생들 중 일제에 의해 구속돼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른 23명의 이름이, 옆면엔 ‘역사의 별이 되어’라는 추모시가 새겨져 있다. 홍인화 수피아여고 역사연구소장(55)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선배들의 정신을 받들기 위해 매년 3·1만세운동 재연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쪽 팔을 잃은 윤형숙은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한 채 신문을 계속 당했다. 일경은 굽히지 않는 그를 가혹하게 고문해 오른쪽 눈까지 멀게 했다. 징역 4개월을 선고하고, 감옥에서 그가 나온 후에도 4년간 격리 수용하며 괴롭히기를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윤형숙은 이 같은 고통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왼팔은 조국을 위해 바쳤고 나머지 한 팔은 문맹자를 위해 바친다’는 신념으로 헌신적인 삶을 이어갔다. 함경남도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마친 뒤 전북 전주로 내려가 기독교학교와 전북 고창의 유치원 등지에서 어린이 교육에 힘썼다. 역사는 윤형숙 열사에게 가혹했다. ‘외팔이 선생’으로 불리며 아이들을 가르치던 그에게 더 큰 비극이 닥쳤다. 윤형숙은 평소 반공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1950년 6·25전쟁이 나고 북한군이 여수까지 점령했다. 지인의 집으로 피신해 있던 그를 체포한 북한군은 서울이 수복된 9월 28일 퇴각하기 전 여수 둔덕동 과수원에서 그를 총살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50이었다.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그의 숭고한 삶은 사후 54년이 지난 뒤에야 가치를 인정받았다. 정부는 2004년 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가 묻힌 고향마을 묘비석에는 이런 비문이 적혀 있다. “왜적에게 빼앗긴 나라 되찾기 위하여 왼팔과 오른쪽 눈도 잃었노라. 일본은 망하고 해방되었으나 남북·좌우익으로 갈려 인민군의 총에 간다마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첫 지역지 조선독립광주신문 ▼“조선독립 제창하니 바다가 끓고 산이 동했네”3·10만세운동 세간에 알린 광주의 ‘지하신문’ 제중병원 회계원 황상호가 제작… 시민 상대로 1호부터 3호까지 발행 ‘광주에 참빛이라. 광주라는 빛 광자가 이제야 참말 빛이 되었구나. 지나간 삼 월 십 일 오후 세시 반에 조선독립 단체 학생과 청년들이 … 십 년 동안 감초였던 태극기를 높이 들고 … 조선독립만세를 제창하니 바다가 끓고 산이 동했네.’ 1919년 광주 3·10만세운동을 다룬 ‘조선독립광주신문(朝鮮獨立光州新聞)’ 제1호 2면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이 신문은 광주에서 최초로 신문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인쇄물이다. 양림동에 있던 제중병원(현재 광주기독병원) 회계원인 황상호가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발행한 일종의 ‘지하신문’이다. 그는 ‘황송우(黃松友)’라는 가명으로 조선독립광주신문을 병원 등사판으로 밀어 비밀리에 살포했다. 당시 서울에서 윤익선의 명의로 발행되던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을 받아 보고 생각해 낸 것으로, 제중병원 약제사인 장호조와 간호인인 홍덕주의 협조를 얻어 3호까지 발행했다. 제1호는 1919년 3월 11일에 300부를 인쇄해 13일에 광주 큰 장터에서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크기는 9절지(시험지) 두 장에 한 면씩 등사한 것으로, 첫 면에는 서울에서 온 ‘조선독립신문’ 기사 내용을 간추려 쓰고 두 번째 면에는 10일 광주만세운동 상황을 자세히 기록했다. 신문 발행을 주도한 이들은 모두 일제에 체포돼 황상호는 3년, 홍덕주와 장호조는 각각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 신문의 원본은 1983년 전남 목포 정명여고 선교사 사택을 보수하던 중 천장에서 독립가, 3·1독립선언문, 2·8독립선언문, 격문 등과 함께 발견됐다. 광주 독립운동사를 연구해온 노성태 광주 국제고 수석교사(61)는 “이 신문은 1919년 4월 8일 목포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양동교회 교인들이 주축을 이룬 4·8독립만세운동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며 “일제의 폭압에 굴하지 않고 강건하게 일어난 광주의 정신을 보여준 귀중한 사료”라고 말했다. 이 신문의 원본은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고 사본은 광주기독병원 1층 역사·의학자료전시관에 전시돼 있다.광주=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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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내 고향에선]‘내륙의 바다’ 장성호에서 힐링과 추억을 담으세요

    30일 전남 장성군 장성호 수변공원은 겨울 호수 풍경을 즐기려는 탐방객으로 북적였다. 평일인데도 주차장에는 대형 관광버스가 늘어서 있었다. 호숫가 가파른 절벽을 따라 설치된 덱길을 걷는 탐방객들의 발걸음이 무척 가벼워 보였다. 덱길이 끝나면 쉼터가 나오고 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이어진다. 언덕을 넘으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156m 길이의 ‘옐로우 출렁다리’다. 주탑이 우뚝 선 현수교로 호수 한쪽을 가로지른다. ‘옐로우 시티’를 표방하는 장성군답게 온통 샛노란 색이다. 아름다운 장성호를 바라보며 출렁거리는 다리를 건너는 스릴까지 만끽할 수 있다. ‘내륙의 바다’로 불리는 장성호가 힐링과 추억을 선사하는 트레킹 코스로 인기다. 7.5km의 수변길이 조성되고 지난해 6월 옐로우 출렁다리가 놓이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장성호를 체류형 관광단지로 조성하려는 장성군의 꿈도 덩달아 무르익고 있다.○ 사계절 색다른 매력 장성호 수변길 장성호는 장성읍과 북이면, 북하면에 걸쳐 있는 인공호수다. 1976년 완공된 장성호는 최대 수면 면적이 68.9km², 총 저수용량이 8480만 t에 달할 정도로 넓다. 장성호 수변길은 장성호 제방과 북이면 수성리를 잇는 7.5km 길이의 트레킹 길이다. 장성군이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걷기 길을 만들기 위해 2016년부터 장성호 수변을 따라 조성했다. 장성호 수변길을 걸으면 숲과 호수의 정취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도 2시간 40분가량이면 모든 코스를 밟을 수 있을 정도로 험하지 않아 동호회원은 물론이고 가족이나 연인들이 많이 찾는다. 장성호 수변길의 백미는 호숫가를 따라 설치된 1.2km 길이의 덱길이다. 그 자체로 그림처럼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탁 트인 장성호의 수려한 경관이 한눈에 들어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수변길 시작점에서 1.2km 지점과 2.7km 지점을 연결한 출렁다리는 장성호 수변길의 또 다른 명물이다. 다리 양 끝에는 비상하는 황룡을 형상화한 21m 길이의 주탑이 우뚝 솟아 있다. 한 번에 1000여 명이 지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게 지어졌다. 장성호 수변길은 지난해 가을(9∼11월)에만 9만4000여 명이 다녀갔다. 겨울이 시작된 12월 이후에도 주말이면 주차장이 꽉 찰 정도로 붐비고 있다. 27일 산악회원들과 장성호 수변길을 찾은 박모 씨(60·서울 중구)는 “장성에 처음 와 봤는데 풍경이 너무 멋져서 걷는 재미가 두 배다”며 “설경도 멋질 것 같아 눈이 내릴 때 다시 한번 오고 싶다”고 말했다. ○ 체류형 휴양관광단지로 조성 이런 매력 덕분에 장성호 수변길은 지난해 2월 한국관광공사로부터 ‘대한민국 대표 걷기 길’로 선정되고 9월에는 전남도가 추천하는 대표 관광지에 이름을 올렸다. 현재 장성군은 장성호를 한 바퀴 도는 34km 길이의 ‘장성호 100리길’을 만들고 있다. 수성마을에서 조정경기장까지 900m와 장성호 오른쪽 제방에서 1.5km 지점까지 2.4km를 올 10월 개통할 예정이다. 나머지 24km는 사업비가 확보되는 대로 조성할 계획이다. 두 번째 출렁다리는 올 3월부터 공사에 들어가 2020년 개통한다. 장성읍 용곡리 협곡에 놓이는 이 다리는 길이와 폭, 주탑 높이가 첫 번째 출렁다리와 같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세 번째 출렁다리도 놓을 계획이다. 장성군은 장성호를 체류형 휴양관광단지로 개발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2020년까지 40억 원을 들여 장성호 바로 아래에 강수욕장과 카누 카약 계류장, 민물고기 생태학습장 등을 갖춘 수상 레포츠단지를 조성할 계획이다. 지난해 농림축산식품부가 공모한 ‘맑은 물 푸른 농촌 가꾸기 사업’에 응모해 국비 28억 원을 받았고 올해 10억 원을 투입한다. 정원식 장성군 생태하천계 주무관(47)은 “올가을에는 제방 오른쪽 수변길이 처음으로 열린다”며 “수변 100리길 조성 사업과 장성댐 하류 부지 개발 사업이 완료되면 걷고 보고 즐길 거리를 모두 갖춘 명품 관광단지가 탄생한다”고 말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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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치된 장성호를 국민 관광지로 만들겠다”

    “내륙에 사는 장성 사람들은 바다가 있는 지역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바다와 같은 흥취를 안기는 장성호가 있기 때문이죠.” 유두석 장성군수(69·사진)는 30일 “장성호 수변길은 숲길을 따라 걸으며 자연을 파노라마처럼 즐길 수 있는 전국에서 몇 안 되는 최고의 트레킹 코스”라며 “걷기를 즐기는 분들이 한 번쯤 와 볼 만한 명소”라고 소개했다. ―왜 장성호에 꽂혔나. “장성호는 1977년 아름다운 경관 덕분에 국가 지정 국민관광지가 됐다. 관광자원으로서 무궁한 가치를 갖고 있음에도 그동안 사실상 방치돼 왔다. 기껏해야 메기탕이나 먹으러 가는 곳으로 인식돼 왔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장성호에 생명을 불어넣어 국민관광지로서의 명성을 되찾아주고 싶었다.” ―어떻게 트레킹 코스를 개발할 생각을 했나. “현장에 답이 있었다. 수년 전 장성호를 찾았을 때 호수를 둘러싼 임도를 걷는 분들을 만났다. 그분들이 장성호의 매력을 알려줬다. ‘이거다!’ 싶어 무릎을 쳤다. 덱길과 출렁다리를 만들어 걷는 재미를 더하면 관광객들이 몰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수변길과 옐로우 출렁다리다.” ―‘장성호 프로젝트’ 구상은…. “농업용 저수지인 장성호를 체류형 관광단지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제주에서 마을을 지나는 길을 올레길이라 불렀는데 이런 숨은 가치를 재발견해 지금은 체류형 관광의 모범이 됐다. 현재 7.5km 길이의 수변길을 호수 주변 전체로 늘려 ‘장성호 100리길’로 이을 생각이다. 이를 위해 올해 2.4km 수변길을 추가로 개통하고 제2의 출렁다리 건설 공사에 들어간다. 하류에 강수욕장과 생태학습관을 짓는 사업도 올 9월 첫 삽을 뜬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9-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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