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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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취재분야

2026-03-05~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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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기 두고 화투 치던 공간이 책 읽는 공간으로 거듭나

    《시골 작은 집에 책 읽기를 좋아하는 할머니가 산다. 하지만 시골집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과일을 따고, 가축을 돌보고, 장마에 대비하고…. 손님도 찾아오기 때문에 겨울이 깊어서야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림책 ‘책 읽기 좋아하는 할머니’의 줄거리다.》  “옛날 우리 어린 시절처럼 닭도 나오고, 도마뱀도 나오고, 쥐도 나오고 그러네요. 책? 옛날에는 좋아했지요. 이제는 눈이 어두워서 잘 못 보는데 이거는 그래도 글자도 안 작고, 그림도 많네.” 전순득 씨(75)가 12일 강원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황둔송계경로당에서 ‘책 읽기 좋아하는 할머니’를 읽고 말했다. 치악산 자락의 황둔리는 찐빵이 유명하고 인근에 휴양림과 계곡이 있는 시골 마을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전 할머니는 책 속 할머니처럼 고추, 콩, 팥, 옥수수 농사를 짓느라 평생을 바쁘게 살았다. 요즘처럼 농사일이 좀 한가한 겨울철에 경로당에 오면 심심해서 ‘윷을 들었다 놨다’ 할 뿐이었다. 이날 경로당에는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이 기증한 책 200여 권과 책장이 새로 들어오며 ‘할매·할배 책 읽는 방’이 생겼다. 이 단체는 그동안 시골 학교에 마을 도서관을 꾸미는 등 전국에 작은 도서관 350여 곳을 만들었지만 경로당을 책 읽는 공간으로 바꾼 건 이번이 처음이다. “마을 어르신들이 경로당에 와서 화투나 술 말고 문화적으로 즐길 거리가 있었으면 해서 독서 공간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비용도 부담인 데다 서울 동대문에서 헌책을 사려고 했더니 어르신들이 좋아하실 만한 책을 고르기도 힘들고…. 그러다가 신문에서 ‘작은도서관…’ 기사를 보고 도움을 요청했는데 마음이 통했나 봐요.” 황둔1리 이장인 윤진철 씨(69)가 도서관을 개관하게 된 사연을 기쁘게 말했다. 다른 마을 어르신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작은도서관…’은 어르신들의 눈높이에 맞춰 큰 글자체로 출판된 한국문학전집, 그림책, 오디오 북, 건강 관련 책, 평범한 노인이 쓴 시집·수필집, 어르신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만화 등을 서가에 채웠다. “동화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를 읽었는데 옛날에 듣던 이야기하고 달라. 팥죽을 이고 가다가 어쨌다고 들었는데, 여기에는 밤도 나오고, 거북이도 나오고. 함께 사는 아홉 살, 열 살 손주들 읽어주면 좋겠네.”(김정순 씨·70) 주민 백낙진 씨(77)는 “젊은 시절엔 책을 많이 읽는 편이었는데, 요즘엔 집에 책이 별로 없어 잘 못 봤다”며 “경로당에서도 장기를 두거나 화투를 쳤는데 이제 책을 많이 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순자 씨(72)도 “소일거리가 없어 시간이 나면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했는데, 책이 있으면 책을 봐야지”라고 말했다. 이날 경로당에서 가까운 황둔1리 마을회 체험관에서는 마을 주민 6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가수 서수남 씨(73)가 공연을 했고, 노인을 소재로 동화를 쓰는 김인자 작가가 책을 읽어줬다. 김 작가는 요양병원 등에서 어르신들에게 책을 읽어드리는 일을 수십 년째 해오고 있다. 그는 “어르신들이 독서에 대한 욕구가 분명히 있지만 일상에서 책을 읽을 환경이 잘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며 “젊은이들이 떠나고 시골에 남은 노인들이 창조적이고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원주=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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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촛불, 종북 세력이 주도” 인터넷 떠도는 김지하-도올 가짜글 논란

    김지하 시인과 도올 김용옥이 썼다고 주장하는 가짜 글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김지하가 이렇게 말하면'으로 시작되는 글은 촛불집회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종북 세력이 주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촛불집회를 크게 보도하는 종합편성채널과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언론에 대해 "나라가 망하면 너희도 죽는다"며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김지하 시인의 부인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은 14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김지하 시인이 작성한 것이 아닌데 이름이 언급된 글이 돌고 있어 당혹스럽다"고 밝혔다. 김 이사장은 또 "김 시인이 최근 시국 상황에 대해 답답한 마음에도 말을 아끼고 있는 상황인데 이런 일이 생겨 속상하고 화가 난다"면서 "조만간 사이버수사대에 수사를 의뢰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SNS에서는 "대통령 하야 주장 세력에 선동당하지 말고,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를 지킵시다"라는 제목의 글이 '도올 김용옥이 쓴 글'이라며 확산되고 있다. 이 글은 "박 대통령이 뭘 잘못했어요? 독재를 했어요? 부정 축재라도 했소?"라며 박 대통령을 옹호하는 내용이다. 도올의 책을 펴내 온 통나무 출판사 측은 "도올 선생님이 광화문 촛불집회 연단에서 시국 비판 연설도 했는데 그런 글을 썼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분명한 사기인데 글이 조직적으로 유포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김지영기자 kimjy@donga.com조종엽기자 jjj@donga.com}

    • 201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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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전기, 천출 동생 노비로 부리는 ‘골육상잔’ 막았다

     양반이 자기 여종을 첩으로 삼아 자식이 태어나면 그 자식의 신분도 노비다. 주인은 그 아버지이고 나중에 형제 등이 다른 재산처럼 상속하게 된다. 이들은 배다른 형제의 종이 돼 부림을 받았을까? 박경 연세대 법학연구원 연구교수는 10일 한국고문서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조선 전기 자기비첩(自己婢妾) 소생 사환(使喚·노비로 부리는 일)에 대한 인식’에서 이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한 조선의 법과 운용에 관해 연구 내용을 밝혔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양반의 자기비첩 소생은 종량(從良·여종이 낳은 양인의 아이는 양인이 되도록 함)하도록 했다. 태종 때에는 할아버지의 비첩 소생, 즉 4촌까지는 종으로 부리지 못하게 했고, 다시 모든 양인 남성과 천민 여성 사이의 소생을 양인으로 삼도록 했다. 박 연구교수는 “같은 부계 핏줄로 동기(同氣)를 이어받은 골육(骨肉)을 차마 일반 노비와 같이 부릴 수 없다는 논리였다”며 “위정자들이 부계 중심적 가족질서를 지향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종 때는 법 적용 대상이 관원과 일부 양인들의 천처첩(賤妻妾) 자녀로 좁아지기도 했다. 이와 별개로 타인이 소유한 여종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소유주가 타인이어서 종량하려면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문제는 절차였다. 종량을 하려면 신고를 해야 했는데 그 권한이 아버지, 적모(嫡母·아버지의 정실부인), 적(嫡) 동생 등으로만 규정돼 이들이 신고하지 않으면 그 집안의 노비로 남아야 했다.  노비를 관장하던 장례원(掌隸院)은 성종 대에 들어 이런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절차를 개선하면서 부, 조부의 비첩 자녀를 부리는 일을 골육을 해치는 일, 즉 ‘잔상골육(殘傷骨肉)’이라고 표현했다. 박 연구교수에 따르면 이 표현은 이후 항간에서 ‘골육상잔(骨肉相殘)’으로 변하고, 4촌까지의 근친을 부리는 일을 제한한 법과 달리 5, 6촌을 부리는 일까지 금기시된다. 이에 따라 명종 시기에는 5, 6촌은 노비로 부릴 수 있게 한다는 수교가 반포되기도 했다.  박 연구교수는 “당시 소송 기록을 분석해 보면 부자나 형제 등 같은 혈족이 서로 싸운다는 ‘골육상잔’은 골육을 부리는 일을 금지하는 법을 상징하는 용어로 정착했다”며 “유교적 질서의 구축 과정에서 가족 간의 윤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 준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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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양 출토 와당에 中 연호… 낙랑의 평양 소재설 뒷받침”

     ‘역사를 수사한다.’ 재야와 강단, 주류와 비주류 사이에 이견이 끊이지 않는 고대사의 쟁점을 범죄를 수사하는 검사의 눈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검사로 일하면서 40년 가까이 와당을 수집해 ‘기와 검사’라는 별명이 붙은 유창종 유금와당박물관장(71·법무법인 세종 변호사·전 서울지검장). 그가 최근 ‘와당으로 본 한국 고대사의 쟁점들’(경인문화사)을 내고 9일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상고사 토론회에서 책의 주요 내용을 발표했다. “비주류 사학에서는 중국 요서 지역에 낙랑군이 설치돼 멸망 때까지 존속했다고 보지만 이는 평양에서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浪富貴)’ 등이라고 쓰인 와당이 출토된 것과 모순됩니다.” 유 관장은 평양 출토 와당을 분석해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비주류 학설을 비판했다. 평양에서 ‘대진원강(大晉元康)’이라고 쓰인 와당이 출토돼 서진의 혜제가 원강이라는 연호를 쓰던 기간(291∼299년)에도 평양에 중국 왕조의 관서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등 와당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음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와당은 왕권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건축물에만 사용됐고, 다른 유물과 달리 이곳저곳으로 옮겨지는 일이 거의 없다는 특징이 있다. 유 관장은 “와당은 발견된 장소에 국가의 관서나 그에 준하는 기관 등의 건축물이 존재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고 말했다. 유 관장은 유금와당박물관(서울 종로구 창의문로11가길)에 평양에서 나온 와당 33점을 소장하고 있다. 유 관장은 또 평양에서 출토된 낙랑 와당이 위조된 것이라는 비주류설도 논박했다. 낙랑예관 등의 와당은 절당법(와당과 수키와를 접합한 부위의 절반을 실이나 대나무 칼로 절단해 만드는 기법)으로 제작됐는데, 낙랑군이 있던 시대에 이 기법이 사용됐다는 사실은 20세기 말에야 드러났다는 것이다. 유 관장은 “만약 20세기 초 와당들이 위조됐다면 당시 지식수준으로 보아 절당법으로 와당을 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 관장은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封泥)가 요서에서 출토된 점 등을 고려하면 낙랑군은 요서나 요동에 있던 왕검성에 잠시 설치됐다가 나중에 마지막 왕검성(평양)으로 옮겨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그는 대동강 유역 고구려 와당이 장기간 변화 발전했고, 문양과 예술성 등이 중국 남북조 와당보다도 앞선 점으로 보아 평양을 고구려의 주된 수도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또 6세기 말∼7세기 초 일본 와당도 한국계 와당을 모방하는 수준이었음을 고려하면 임나일본부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말했다. 유 관장은 이날 토론회에서 동북아재단에 “고조선 연구소를 설립해 우리 민족과 역사 정체성의 핵심 과제인 고조선의 실체와 정통성 계승에 대해 적극적으로 연구해 달라”고 주문했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 201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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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新유목민’ 조선족, 그들이 사는 세상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가난과 일제를 피해, 얼마 안 되는 세간을 이고 지고 만주로 떠난 농민들이 있었다. 그들의 후손인 조선족은 한중 수교 이후 다시 황해를 건너 한국의 식당, 공사 현장, 공장의 노동자와 가정의 아이 돌보미로 한국 사회의 노동의 한 축을 맡아 왔다. 황해뿐일까. 책은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영국의 한인 식당에서 일하고 한국인의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는 조선족에 주목한다. 저자가 2010∼2014년에 걸쳐 영국, 중국 칭다오, 서울 구로동 등지에서 조선족을 인터뷰해 그린 ‘조선족 디아스포라(이산)’의 세밀화다. 2014년 기준 영국 런던 남서부의 뉴몰덴에는 한인들이 4000명 정도 사는데, 조선족도 그 정도 된다. 조선족이 없으면 뉴몰덴의 한인 식당들은 운영이 안 될 정도다. 브로커를 통해 비합법적으로 입국한 조선족이 상당수인데, 그 과정도 만만치 않다. 4개국 정도를 거치는 건 보통이고 20개국을 경유하는 이도 있다. 중간에 단속에 걸리는 통에 입국에 6개월∼1년 이상 걸리기도 한다. 조선족은 영국에 와서는 극도로 생활비를 아낀다. 2, 3년은 브로커에게 입국 비용으로 건넨 1만3000∼1만5000파운드(약 2000만 원 안팎)를 메워야 하고, 영국의 물가가 워낙 비싸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하루 식비 50펜스(약 730원)로 가장 싼 빵과 냉동 쇠고기 약간을 사 먹으며 지내기도 하고, 17명이 한집에 함께 살기도 한다. 영국의 조선족들은 한결같이 ‘성질 급하고 까다롭고 손이 빠른’ 한국인 고용주들에게 일을 배우며 힘들었던 경험을 털어놨다. 그래도 한국에서 일하는 것보다 나은 편이다. 영국의 한국인은 먼저 이주한 선배일 뿐 조선족과 마찬가지로 영국 사회의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조선족들은 어떨까. “우리는 중국 신분증에도 한글로 이름을 적는데 한국에서는 신분증에 영어로 쓰게 돼 있어요. 조선족은 ‘다문화’인가요, 한국 사람인가요?” 조선족은 중국에서도 받지 않던 차별을 같은 민족이 사는 한국에서 받는 설움을 토로했다. 중국 칭다오의 조선족은 사뭇 다르다. 조선족이 한국인보다 먼저 중국에 온 이민자이고, 중국 시민이기 때문이다. 한국인 고용주는 중간관리자로 일하는 조선족에게 많이 의지하게 된다. 칭다오의 한 조선족은 “한국인은 왜 내 나라인 중국에 와서도 조선족을 차별하려 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중국 경제의 급성장은 돈 벌러 해외에 나온 조선족에 문제를 야기했다. 영국의 한 조선족은 “15년 전 1파운드는 중국 돈으로 15위안이 넘었는데, 요즘은 10위안도 안 된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중국에서 집 한 채를 살 만한 돈을 모았지만 이제는 별로 큰 금액이 아니게 됐다. 귀국의 종착점이 멀어진 것이다. 현지에서 자란 자녀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제 딸들은 헷갈려 해요. 영국 사람은 분명히 아닌데, 중국 사람이라고 하려니까 중국말도 못 하고, 한국 사람이라고 하자니 한국에 가본 적도 없고. 저는 ‘엄마는 차이니스 코리안인데, 넌 브리티시 차이니스 코리안이야’라고 했다가, 더 크면 ‘넌 코리안 맞아. 증조할아버지 때 함경북도에서 중국에 왔다가 이렇게 됐어’라고 하지요.”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세계화로 지리적 뿌리내림이 흔들리면서 부유하는 개인은 공허함을 느낀다”며 “불안 속에서 더 나은 직장을 찾아 이동한다는 점에서는 우리 모두가 조선족”이라고 말했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 2016-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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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상익 “일제강점기 기업인 수당 김연수를 변호합니다”

    “일제강점기 지주 출신 부자들은 놀면서 부(富)를 탕진한 이들이 대부분이고, 일본 유학생들은 보통 고등문관 시험 치고 군수, 법관 되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수당 김연수(1896∼1979)는 근대적 경제관념을 가지고 민족 기업을 일으켜 일본 자본과 경쟁했습니다. 선구적 기업가인 거지요.” 삼양그룹 창업주 수당 김연수에 관한 책 ‘親日(친일) 마녀사냥’을 최근 낸 엄상익 변호사(62)를 6일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엄 변호사의 사무실 서가에는 일제강점기 관련 연구서와 논문 등이 가득했다. 엄 변호사는 청송교도소 내 의문사 사건을 ‘신동아’에 밝히면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첫 의문사 규명을 이끈 인물이다. 대도 조세형, 탈옥수 신창원처럼 누구나 꺼리는 인물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2009년 수당의 후손들이 냈던 친일반민족행위결정 취소 청구소송도 대리했다. 책은 엄 변호사가 변론하는 과정과 과거 김연수가 성장한 과정 및 기업가로서의 면모 등 일대기를 소설처럼 재구성해 교차시켰다. 수당이 인수한 경성방직은 조선인이 만든 조선인의 회사였다. 직원들은 조선인만 고용했고, 1923년에는 처음으로 우리 기술로 광목을 생산했다. 태극기를 변형한 모양의 태극성(太極星) 상표를 달기 위해 조선총독부보다 덜 민감한 일본 상공성에 상표등록을 하기도 했다. 수당이 상하이 임시정부 등에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는 증언도 있다. 수당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당대의 상황을 묘사한 내용도 책에 적지 않다. “변론을 준비하며 일제강점기를 공부할수록 여태까지 역사의 해석을 독과점한 이들의 특정 시각만 일방적으로 수신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당은 일제강점 말기 중추원 참의 등의 관직을 받는다. 이에 대해 엄 변호사는 “아예 ‘일본 사람이 되겠다’며 적극적으로 친일한 기업인이 분명히 있다”면서도 “수당은 일제가 주는 관직을 억지로 받았지만 기업을 운영하기 위한 것이었고,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경성방직이 조선총독부에 낸 국방헌금에 대해서는 “전시에 조선총독부가 헌금을 하라고 공개적으로 내용증명을 보내오는데 사업가로서 안 낼 수 있었겠나”라고 말했다. 엄 변호사는 사건을 수임한 2008년부터 자료 수집을 시작해 이 책을 쓰는 데 8년이 걸렸다. 이유는 뭘까. “자비 출판입니다. 팔릴 책도 아니고, 이 나이에 공명심도 아닙니다. 다만 세상을 보는 시각이 자유로웠으면 합니다. 변호사 일을 하다 보니 한 색깔만 통하는 사회, 외눈으로만 보라고 강요하는 사회가 싫었어요. 학문이나 법정이 객관적 진실을 밝히는 것 같지만 자칫하면 ‘진실의 무덤’이 될 수도 있지요.”조종엽기자 jjj@donga.com}

    • 2016-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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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아서 온 사할린, 배가 너무 고파… 절대 오지 마세요”

     “무엇보다도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사할린에 강제 동원됐던 조선인 노동자가 고향에 쓴 편지다. 허광무 ‘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3일 한일민족문제학회 학술대회의 ‘사할린 경찰기록과 일본지역 조선인 노무자’ 발표문에서 강제징용 피해자의 절절한 사연을 소개했다. 편지는 자신이 겪고 있는 참상을 전하려 했다. “노동자들이 공복을 견디지 못해 급기야 몸이 부어올라 힘도 쓰지 못하는 걸 보면 정말로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속아서 모집에 응한 것이 후회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모집에 응하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로 말려 주세요.” 일제는 조선총독부 책임 아래 지방관청이 경비를 관리하고 지역·마을별로 인원을 할당해 기업에 인도하는 ‘관 알선’ 방식 이전부터 형식적으로는 ‘모집’이지만 거짓 선전과 경찰, 면직원의 위압적 ‘권유’를 통해 사실상 강제로 조선인을 동원했다. 조선인 노무자는 일제 경찰의 요주의 관찰 대상이었다. 이 편지도 경남 함양경찰서 우편검열에서 발견돼 사할린 경찰에 통보됐다. 하지만 편지를 쓴 이는 도주에 성공했다. 일경 자료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어떤 영화보다도 극적이다. “늑골이 아프다 하여 숙소에서 쉬게 하였는데 본인이 진료를 희망해 대기하던 중 감시원의 눈을 피해 도주했다.” “도주자는 5, 6일 전부터 오른쪽 발바닥에 종기가 생겨 미하시 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던 중 4월 12일 오전 8시경 미하시 병원에서 화장실에 간다고 한 뒤 뒷문으로 도주했다.” “함바의 변소 창문을 뜯고 도주하여 즉시 4, 5명이 추적하였으나 함바 남쪽 수풀 속에서 종적을 감췄다.” 허 연구위원은 “일본 경찰의 입장에서 사할린은 ‘사상가’ ‘도주자’가 경찰의 눈을 피해 숨는 지역으로 경계의 대상이었다”며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 중 약 5분의 4가 아직 드러나지 않아 추가 조사가 절실하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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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때 조선인 키 3cm이상 줄어”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키가 점차 작아졌다는 연구가 나왔다. 조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3일 한일민족문제학회가 연 학술대회 ‘사할린 한인기록물을 통해 본 일제하 재외한인사회’에서 일제강점기 사할린에 강제 징용된 노동자를 포함해 20∼40세 조선인 남성 2100여 명의 키를 출생 연도별로 분석했다. 조 교수는 ‘사할린 화태청(樺太廳·1907∼1945년 남사할린을 관할한 일제의 관청) 소장 경찰 기록과 일제하 조선인 신장(身長) 추세’라는 제목의 발표문에서 1896∼1900년생 남성은 평균 키가 162.8cm였지만 1921∼1924년생은 평균 159.5cm로 3cm 이상 작아졌다고 밝혔다. 이 연구에 따르면 1900년대, 1910년대생도 각각 그 이전 출생자보다 키가 작아 신장이 계속 작아진 걸로 나타났다. 신장은 성장기의 영양 상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들이 청소년기인 1910, 1920년대 영양 상태가 각각 전보다 나빴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사할린 거주 조선인은 노무자로 끌려간 이가 대부분으로, 키가 조선에서 다 자라고 성인이 된 뒤 사할린으로 갔기 때문에 이들의 신장은 사할린이 아니라 조선에서의 영양 상태를 보여준다.  이번 연구에서 분석한 조선인은 노무자(632명), 갱내 탄광노동자(459명), 기능공(107명), 상인(49명), 농민(40명) 등으로 당시 조선인의 다수를 구성했을 하층민을 포함하고 있다. 조 교수는 이번 대회에서 사할린 거주 일본인 남성 270명을 분석한 결과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일본인은 △원래 신장이 조선인보다 작았고 △조선인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키가 작아졌지만 △작아지는 정도는 조선인보다 완만해 점차 키가 조선인과 비슷해졌다. 이번 연구는 최신 자료인 2014년 대일항쟁기위원회가 러시아 국립사할린주역사기록보존소에서 열람한 문서철과 2006년 발간된 ‘전전(戰前) 조선인 관계 경찰자료집―화태청 경찰부문서’ 자료를 종합해 분석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평균키를 볼 수 있는 당시 국내 자료는 매우 드물다. 국내 관보(官報)의 행려사망자 기록을 분석한 연구가 있지만 원자료가 눈대중으로 기록됐을 가능성이 높아 신뢰도에 한계가 있다. 서울 양정고보 학생들의 기록을 조사해 “같은 연령대에서 신장이 점점 커졌다”는 연구가 있지만, 이들은 청소년인데다 조선인 가운데 상류층에 속해 대표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연구는 ‘조선인 관계 서류철’ ‘행정수사 서류철’ ‘조선인 관계 소재불명 요시찰인 수배에 관한 서류철’ 등 수배, 감시 목적의 일경(日警) 자료를 분석해 신뢰도가 높다. 키를 척(尺) 촌(寸)뿐 아니라 푼(分)까지 기재한 문서도 다수고, 일부는 미터법으로 mm 단위까지 기재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했지만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생산이 증가해 1910∼1940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연평균 증가율이 2.3%가량에 달했다는 게 수량경제학의 연구 결과다. 그러나 성장의 과실이 조선인에게도 분배돼 생활수준이 향상됐는지에 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조 교수는 “이번 연구는 일제강점기 경제성장으로 조선인의 생활수준이 향상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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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日 야욕이 집어삼킨 독도의 주인 ‘강치’

     잘 아는 생명의 죽음이 괴롭다면 잘 모르는 생물 종의 소멸에 느껴야 할 감정은 응당 부끄러움일 게다.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여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이 벌여 섰으며… 또 바다의 섬 사이에는 인형 같은 것이 별도로 선 것이 30여 개나 되므로 의심이 나고 두려워서….”(성종실록) 1476년 영흥(永興) 사람인 김자주가 독도 부근까지 다녀온 뒤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여기서 ‘인형 같은 것’은 바로 독도 강치(학명 ‘일본 강치’)로 보인다. 1906년 독도를 방문한 일본인도 “항상 바위 위에서 숙면을 취한다.… 많을 때는 만 마리나 된다”는 강치 목격담을 남겼다. 수십만 년 이상 강치 떼는 독도를 빼곡히 채우고 평화롭게 잠을 자거나 새끼에게 젖을 줬을 것이다. 독도 강치는 19세기 중엽에 4만∼5만 마리, 1900년대 초반까지도 2만∼3만 마리는 있었다고 추정된다. 한때는 독도뿐 아니라 동해안 전체가 서식처였다. 옛날에 울릉도를 가지도(可支島)라고 부른 것도 강치의 옛 이름인 ‘가지어’ 혹은 ‘가제’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 어부들은 19세기 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강치 수만 마리를 잡아 씨를 말렸다. 일본의 어렵회사들은 1904∼1913년에만 강치 1만4000마리를 잡아 기름을 짜고 가죽을 벗겼다.  해양문명사학자인 저자(제주대 석좌교수)는 “대체로 한국 어민은 전통적으로 물개류나 바다사자 잡이를 하지 않았고 자연과 공생했다. 가죽을 팔기 위해 바다 포유류를 잡아 죽이는 일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 없었다”고 말한다. 독도 강치는 결국 광복 뒤에는 개체 번식이 불가능할 정도의 소수만 남았고, 1975년 두 마리가 목격된 게 마지막이다. “마지막 강치는 가재바위 위나 후미진 바위 그늘에서 끼륵거리며 최후를 맞이했을지 모른다.”고 저자는 상상한다. 일본인 어부들의 강치잡이는 일제의 독도 영토 ‘편입’을 촉발하기도 했다. 1904년 강치잡이꾼 나카이 요자부로가 독도의 강치잡이를 독점하려고 ‘독도 영토 편입 및 차용 청원’을 일본 내무성에 제출한다.  일본 정부는 이 청원서를 계기로 논의를 서둘러 한국 정부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1905년 2월 독도의 영토 편입을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환(環) 동해 곳곳을 찾아다닌 저자의 발품이 책에 담겼다. 저자는 독도 강치잡이의 본향인 오키 제도의 고카이 촌을 방문해 옛날 강치를 사냥했던 녹슨 총을 목격하기도 하고, 사료관에서 여전히 일본 정부가 이 마을 사람에게 독도 광물의 채굴권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도 알아낸다. 독도는 누구 땅일까? 생태적으로는 강치의 땅이었다. 저자는 “일본은 자신들의 강치잡이 역사를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증거라고 들이대지만 강치 학살은 반문명적 범죄 행위였다”며 “영유권 타령에만 머물지 말고 국민국가를 뛰어넘는 문명사적 차원에서 해양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익숙지 않은 일본의 옛 지명들이 책에 꽤 나오지만 흐름을 따라가는 데는 무리가 없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 2016-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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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녀들의 땀과 눈물 서린 ‘전복 공물’

     “가슴에 끈으로 짠 주머니(망사리)를 묶은 곽(태왁)을 안고, 손에는 쇠꼬챙이(비창)를 잡고, 이리저리 헤엄치다가 물속에 잠긴다. 물속에 들어가 돌에 붙어있는 전복을 확인하면, 빈껍데기를 뒤집어 놓아 위치를 알 수 있도록 하고 다시 물 위로 올라온다. 숨이 차서 소리를 내는데 ‘휘익’ 하는 소리(숨비소리)를 오래도록 낸다. 생기가 돌아오면 다시 물에 잠긴다. 먼저 표시해 두었던 곳에 가서 비창으로 따서 망사리에 넣고 돌아온다.” 조선 숙종 때 문인으로 1706∼1711년 제주도에 유배됐던 김춘택의 ‘잠녀설(潛女說)’ 중 일부다. 300년 전 잠녀(해녀)들의 작업 모습이 생생하다. 지난달 30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제주해녀문화’의 역사를 박찬식 제주발전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장의 도움을 받아 문헌 기록 속에서 찾아봤다. 제주의 전복과 관련된 최초의 문헌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왕 13년(503년) 시기로 거슬러간다. “가(珂·전복에서 나온 진주)는 섭라(涉羅·탐라국의 또 다른 이름)에서 생산된다”는 구절이다. 당시에도 해녀와 같은 이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해녀들은 오늘날에 비해 훨씬 위험한 상황을 겪었다. 김춘택이 만난 해녀는 말한다. “한 번 물에 잠겨 전복을 찾지 못하면 다시 물에 잠기곤 하는데 전복 하나를 따려다가 몇 번이나 죽을 뻔하곤 한다. 물밑의 돌은 모질고 날카롭기도 하여 부딪혀 죽기도 한다. 함께 작업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거나 얼어 죽는 것을 보기도 했다. 나는 요행히 살아났지만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 해녀들이 이처럼 위험을 무릅써야 했던 건 공물로 바칠 전복을 따야 했기 때문이다. 17세기 말 제주의 해녀는 약 1000명이었는데, 원래 이들은 대부분 전복이 아니라 미역을 땄다. 진상할 전복을 캐는 것은 주로 포작인(浦作人·제주 방언 ‘보재기’)으로 불리는 남자들의 일이었다. “포작하는 자들은 홀아비로 죽는 자가 많다…. 본주(本州)에 바쳐야 할 전복의 수가 극히 많고, 관리들이 공(公)을 빙자하여 사리를 도모하는 것이 또한 몇 배나 된다. 그 고역을 견디지 못하여 흩어져 떠돌다가….” 1601년 제주도에 어사로 파견됐던 김상헌(1570∼1652)의 남사록(南사錄)에 나오는 기록이다. 제주 목사(牧使)가 해적을 정탐한다는 구실로 포작인들을 남해안의 섬으로 데려간 뒤 전복을 따도록 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광해군일기 1608년 기사도 “전복을 잡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로, 종일토록 바닷속에 들어가도 겨우 한두 개를 건진다”고 나온다. 수많은 포작인들이 수탈과 고역을 피해 제주도에서 전라도, 경상도 해안으로 도망쳐 나갔고, 300여 명이던 포작인은 18세기 초 88명으로 줄어든다. ‘제주도에는 여자가 많다’는 말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1694년 제주에 부임한 목사 이익태는 전복을 딸 남자가 급감하자 미역을 따던 해녀들에게도 전복을 캐 바치도록 했다.  박찬식 센터장은 “이때부터 전복을 캐는 사람을 뜻하는 ‘비바리’가 해녀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며 “해녀의 역사는 제주 여성 수난의 역사”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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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7 집필’ 자기분과 외엔 누군지도 몰라

     “집필하려거든 학회장직을 그만두라.” 국정 교과서의 선사·고대사 부분을 집필한 최성락 목포대 교수는 지난해 11월 집필 참여소식이 알려지자 고고학회 회원들의 거센 항의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소장파 교수는 “국정 교과서 필자 프로필에 고고학회장 직책을 넣지 말라”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결국 최 교수는 학회장 임기를 마친 뒤 올 초부터 교과서 집필에 참여했다.  이처럼 국정 교과서 집필을 둘러싼 학계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정 교과서 집필은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됐다. 교육부나 국사편찬위원회(국편)에서 분야별 집필진 회의가 따로 열려 필자들도 전체 명단을 알지 못했다. 자신과 함께 일한 분과의 필진만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분과의 집필 초고는 국편에서만 열람이 가능했다. 교육부는 “공개 이후에도 언론과의 인터뷰를 자제하라”라는 지침을 필진에게 내린 것으로 확인됐다. 국정 역사교과서 집필진 중 한 명은 28일 현장 검토본 공개 직후 소감을 묻자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는 “참여자가 적어 형편없는 교과서가 쓰일까 봐 주변 만류를 무릅쓰고 용기를 냈다”라며 “하지만 요즘 같은 시국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부역자가 된 것 같아 참담하다”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김상운 sukim@donga.com·조종엽 기자}

    • 2016-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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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만-박정희 독재” 명시… 경제성장 정책 성과 서술 늘려

     “자라는 우리 후손에게 밝은 역사책을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국정 역사 교과서를 썼습니다. 나쁜 것만 쓰면 그게 어떻게 대한민국의 모습입니까.”(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 김 위원장은 2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들이 어떤 역사관을 갖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며 “조금도 부끄럼 없는 책”이라고 강조했다. ○ 대한민국 정통성에 자부심 느끼도록 교육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검정 교과서에서 적게 다룬 북한의 군사 도발과 인권 문제를 별도 소주제로 구성해 자세히 썼다고 설명했다. 특히 천안함 사건에 대해 고등학교 한국사 286쪽에는 “2010년 3월 26일에는 서해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한국 해군의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을 받아 40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되었다”며 북한의 책임을 명확히 했다. ‘북한의 도발로 침몰한 천안함 인양’ 사진도 실었다.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미래엔 교과서)처럼 검정 교과서가 도발 주체를 불분명하게 표기하거나 아예 천안함 피격 사건을 기술하지 않았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국정 교과서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세 차례 침범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등을 서술하며 “이러한 북한의 끊임없는 대남 도발은 남북 대화 추진 및 교류 협력을 증대하기 위한 노력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적었다.  북한의 주체사상이 김일성 독재 체제 구축에 활용된 사실도 서술했다. 한국사 284쪽에는 “북한은 이러한 분야별 자주 노선 주장들을 1960년대 후반부터 주체사상으로 집대성하면서 김일성 독재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는 소박스로 “단순한 지도자 개인의 권력 극대화를 넘어 김일성이 수령으로서 북한 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과 권위를 미쳤고, 북한 주민들의 자유를 억압해 왔다”고 썼다. 리베르스쿨 교과서가 주체사상을 비판 없이 용어 설명만 쓰고, 미래엔 교과서는 “거대한 동상과 기념비를 세우고 생가를 성역화하는 김일성 우상화 작업이 진행되었다”고 단순히 쓴 것과 다른 점이다.○ ‘독재’ ‘친일파’ 축소 논란 교육부는 “각 정권의 공과와 주요 역사 쟁점은 균형 있게 서술했다”고 밝혔다. ‘친일파’라는 표현은 한국사에서 8번,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6번 나온다. 친일 반민족 행위는 별도 소주제를 편성해 친일 부역자 명단과 함께 다뤘다. 이승만 정부에서 구성된 반민 특위의 한계도 별도 소주제(한국사 252쪽)에 썼다. 그러나 천재교육 교과서에서 “친일 잔재 청산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명확히 서술한 것에 비해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국정 교과서는 역대 정부의 독재를 분명히 서술했다. 한국사 257쪽 ‘반공 체제와 이승만의 장기 집권’ 파트에서 “이승만 정부의 독재로 인해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었다”, 265쪽에선 유신체제를 지적하며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한 독재 체제였다”고 적었다. 4·19 혁명, 5·16 군사정변, 6월 민주항쟁 등 기존 검정 교과서의 표현은 그대로 사용됐다. 하지만 홍석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5·16 군사정변 서술에 ‘헌정 질서를 중단시켰다’는 명시적 표현이 사라졌고 동백림 사건에서 수사 과정의 고문 등 독재정권의 인권 침해가 빠졌다”고 말했다. 국정 교과서는 ‘눈부신 경제 발전’을 충분히 서술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은 △수출 주도의 경제 개발 체제(264쪽) △중화학 공업의 육성(267쪽) △새마을운동의 전개, 석유 파동과 중동 진출(268쪽), 전두환 정부 때는 △경제 발전과 중산층의 확대(272쪽) 파트에서 경제 성장을 다뤘다. 검정 교과서가 박정희 정부의 기업 특혜 같은 경제성장의 문제점을 부각시킨 것과 달리 국정 교과서는 성과 위주로 서술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통령 중에선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3명의 사진만 실렸다. 한국사 278쪽 ‘민주주의의 성숙’ 파트에서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내용을 각각 12줄, 7줄, 7줄, 3줄씩 썼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사실과 “2013년 2월 ‘국민 행복, 희망의 새 시대’를 표방하며 국정을 시작하였다”는 내용이 전부다. 최예나 yena@donga.com·노지원·조종엽 기자}

    • 2016-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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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년 대한민국 수립”… 임시정부 계승-건국절 논란 불씨 여전

     28일 공개된 국정 고교 한국사 교과서와 중학교 역사교과서 현장 검토본을 본 역사학자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보수 성향 학자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살렸다”고 했지만 진보 성향 학자들은 “뉴라이트 교과서”라고 했다. 현대사의 주요 쟁점에 대한 학계 의견을 정리했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1948. 8. 15.).” 국정 교과서는 편찬 기준에 따라 기존 검정 교과서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서 ‘정부’를 뺀 채 이렇게 서술했다. 국정 교과서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밝혀 온 강규형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948년 ‘건국’이라고 표현하지 않아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미를 살렸다”며 “정부 수립으로 대한민국이 출범했다는 의미를 담아 중립적으로 서술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는 “헌법정신과 학계 통설은 1919년 대한민국이 수립됐다는 것”이라며 “국정 교과서의 이 같은 표현은 1948년 8월 15일 건국절 제정 추진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는 “2008년 뉴라이트 성향의 교과서 포럼이 내놓은 대안교과서와 내용이 유사하다”고 했다.○ 해방공간은? 분단 과정과 친일파 청산 등의 서술에 대한 평가도 나뉘었다. 강 교수는 “1946년 2월 이미 38선 이북에 북조선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단독 정부가 구성돼 있었다는 점을 잘 살렸다”며 “북한이 토지개혁에 성공했고, 한국은 실패했다는 식의 서술도 교정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정 교과서가 일부 검정 교과서에 실렸던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총선거 감시와 협의를 실시할 수 있었던 남한지역에서 … 합법정부가 수립됐다’는 1948년 유엔 결의안 내용을 삭제한 건 잘못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교육부는 “일부 검정 교과서의 잘못을 바로잡은 것”이라고 했지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향후 통일 국면에서 중요한 이슈가 될 수 있어 결의안 내용을 그대로 전달해야 했다”고 했다. 국정 교과서는 친일파 청산과 관련해 “반민특위가 구성됐지만 이승만 정부가 소극적이었고, 일부 친일 경력이 있는 경찰이 저항해 어려움을 겪다 해체됐다. 실형이 선고된 것은 10여 건에 그쳤다”고 썼다. 이전 검정 교과서에서는 “친일잔재 청산이 이뤄지지 못했다”는 서술과 함께 이승만 정부가 특위 활동을 주도한 국회의원들을 간첩 혐의로 구속했다는 점을 다루기도 했다. 홍석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국정 교과서는 친일파 청산이 안 됐다는 점과 이후 친일 경찰이 온존하면서 야기한 문제에 대한 서술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6·25전쟁 “인권 관점 부족” 국정 교과서는 “북한의 남침에는 소련과 중국이 깊게 관여하였다”는 서술과 함께 ‘소련 군사 고문관이 북한군에 넘겨준 선제 타격 계획’을 시각 자료로 넣었다. 이지수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전쟁 발발 원인을 객관적으로 기술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민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전쟁 중 발생한 민간인 학살을 찾아볼 수 없다는 비판도 나왔다. 김태우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는 “보도연맹 학살은 우파 성향의 예전 교학사판 한국사 교과서에도 등장했던 내용인데 이번에 빠진 건 놀라운 일”이라며 “독일이 홀로코스트를 역사 교육의 중심에 놓는 것처럼 후속 세대에 인권과 평화의 관점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관련 서술이 꼭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홍석률 교수는 국정 교과서 전반에 대해 “내용은 자유 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 형식이 단일한 역사의식을 강요하는 국정이라는 건 이율배반 아니냐”고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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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적십자회담 사진설명에 연도 틀려

     국정 역사 교과서 현장 검토본은 28일 공개되자마자 “오류가 있다”는 학자들의 지적이 이어졌다.  먼저 ‘중학 역사 교과서 2’ 154쪽에 나오는 ‘제2차 남북 적십자 회담’ 사진설명에 나오는 연도가 잘못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서울’이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걸린 이 사진의 설명에는 ‘1971년’이라고 쓰여 있다. 홍석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남북 적십자 회담 본회담은 7·4남북공동성명 뒤인 1972년 8, 9월에 서울과 평양에서 열렸다”며 “1971년에는 판문점에서 예비회담이 열렸다”고 말했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오류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251쪽에는 제헌 헌법을 설명하며 “국가 재산의 상당 부분이 일본의 귀속 재산이었던 상황에서 국유화를 내세운 헌법 조항을 두었다. 이 조항은 귀속 재산 처리가 종결된 후 삭제됐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해당 조항은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의미한 것이고, 귀속 재산과는 관련이 적다”며 “이 조항은 1954년 개헌으로 삭제됐고, 귀속 재산 처리는 1950년대 내내 지속됐으므로 삭제 시기에 대한 서술도 틀렸다”고 말했다. 또 고교 한국사 교과서 246쪽의 “소련군은 38선 이북에서 군정을 실시했다”고 서술한 부분도 도마에 올랐다. 검정 교과서 중에는 비슷하게 서술한 경우도 있지만 “소련은 인민위원회에 권한을 넘겨주고 배후에서 북한을 관리했다”고 쓴 교과서도 있다. 북한-소련 관계 전문가인 이재훈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박사는 “소련군은 군정을 실시한 게 아니라 ‘민정부’를 만들어 인민위원회 등을 조종했다”며 “국정 교과서의 해당 부분은 오류”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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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재·친일파 축소는 오해”…공개된 국정교과서, 내용 어떻게 달라졌나

    "자라는 우리 후손에게 밝은 역사책을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국정 역사교과서를 썼습니다. 나쁜 것만 쓰면 그게 어떻게 대한민국의 모습입니까."(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 김 위원장은 2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정 역사교과서 공개 기자회견에서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들이 어떤 역사관을 갖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며 "조금도 부끄럼 없는 책"이라고 강조했다. ● 대한민국 정통성에 자부심 느끼도록 교육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검정 교과서에서 적게 다룬 북한의 군사 도발과 인권 문제를 별도 소주제로 구성해 자세히 썼다고 설명했다. 특히 천안함 사건에 대해 고등학교 한국사 286쪽에는 "2010년 3월 26일에는 서해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한국 해군의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을 받아 40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되었다"며 북한의 책임을 명확히 했다. '북한의 도발로 침몰한 천안함 인양' 사진도 실었다.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미래엔 교과서)처럼 검정 교과서가 도발 주체를 불분명하게 표기하거나 아예 천안함 피격 사건을 기술하지 않았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국정 교과서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세 차례 침범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 △2011년 11월 연평도 포격 등을 서술하며 "이러한 북한의 끊임없는 대남 도발은 남북 대화 추진 및 교류 협력을 증대하기 위한 노력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적었다. 북한의 주체사상이 김일성 독재체제 구축에 활용된 사실도 서술했다. 한국사 284쪽에는 "북한은 이러한 분야별 자주 노선 주장들을 1960년대 후반부터 주체사상으로 집대성하면서 김일성 독재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는 소박스로 "단순한 지도자 개인의 권력 극대화를 넘어 김일성이 수령으로서 북한 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과 권위를 미쳤고, 북한 주민들의 자유를 억압해 왔다"고 썼다. 리베르스쿨 교과서가 주체사상을 비판 없이 용어 설명만 쓰고, 미래엔 교과서는 "거대한 동상과 기념비를 세우고 생가를 성역화하는 김일성 우상화 작업이 진행되었다"고 단순히 쓴 것과 다른 점이다.● '독재' '친일파' 축소는 오해 교육부는 "각 정권의 공과와 주요 역사 쟁점은 균형 있게 서술했다"고 밝혔다. '친일파'라는 표현은 한국사에서 8번,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6번 나온다. 친일 반민족 행위는 별도 소주제를 편성해 친일 부역자 명단과 함께 다뤘다. 이승만 정부에서 구성된 반민 특위의 한계도 별도 소주제(252쪽)에 썼다. 그러나 천재교육 교과서에서 "친일 잔재 청산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명확히 서술한 것에 비해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국정 교과서는 역대 정부의 독재를 분명히 서술했다. 257쪽 '반공 체제와 이승만의 장기 집권' 파트에서 "이승만 정부의 독재로 인해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었다", 265쪽에선 유신체제를 지적하며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한 독재 체제였다"고 적었다. 하지만 홍석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5·16군사정변 서술에 '헌정 질서를 중단시켰다'는 명시적 표현이 사라졌고 동백림 사건에서 수사 과정의 고문 등 독재정권의 인권 침해가 빠졌다"고 말했다. 국정 교과서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충분히 서술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은 △수출 주도의 경제 개발 체제(264쪽) △중화학 공업의 육성(267쪽) △새마을운동의 전개, 석유 파동과 중동 진출(268쪽), 전두환 정부 때는 △경제 발전과 중산층의 확대(272쪽) 파트에서 경제 성장을 다뤘다. 검정 교과서가 박정희 정부의 기업 특혜 같은 경제성장의 문제점을 부각시킨 것과 달리 국정 교과서는 성과 위주로 서술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통령 중에선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3명의 사진만 실렸다. 한국사 278쪽 '민주주의의 성숙' 파트에서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내용을 각각 12줄, 7줄, 7줄, 3줄씩 썼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사실과 "2013년 2월 '국민 행복, 희망의 새 시대'를 표방하며 국정을 시작하였다"는 내용이 전부다. 또 한국사 197쪽에 독도를 다룬 일본 측 자료를 제시해 일본 주장의 허구성을 반박했다. 동해 표기에 대한 역사적 연원과 동해 표기를 확산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도 제시됐다. 최예나 기자 yena@donga.com노지원 기자 zone@donga.com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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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관범 교수 “유교와 근대화는 대립개념 아니다” 조선 사상사의 재해석

     갓 쓴 선비가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외치자 양복 입은 지식인이 개화를 부르짖으며 논쟁을 벌인다. 20세기가 막 시작되던 전환기 한국의 지식인에 관한 이미지다. 이는 얼마나 사실일까. ‘유교 전통과 서양 근대성의 대립’은 서구적 근대주의가 만들어낸 편향된 서사에 불과하다며 조선 사상사에 새로운 해석을 주창한 연구가 나왔다.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 교수(45)는 조선 후기부터 광복 뒤까지 사상과 주요 개념의 역사를 추적한 책 ‘기억의 역전’(소명출판·사진)을 최근 출간했다. 유교 전통과 근대는 연속돼 있으며, 서구적 근대성뿐 아니라 전통과 연계된 복수의 근대성을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대한제국 이후 근대적 언론과 교육, 사회운동을 이끈 이들 중 상당수가 유학자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대한제국의 제도 개혁이 좌절되자 사회단체를 통해 자강(自强)을 모색한 장지연, 사회단체의 사상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며 신(新)도덕을 주장한 박은식, ‘아(我)’라는 새로운 주체를 모색한 신채호 등이 모두 유학적 전통에 선 근대적 지식인이다. 노 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들이 시대의 도덕을 새로 정립해 근대화의 주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 건 유교적 사유 방식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 ‘유교적 신지식인’의 활동은 일본 유학파가 귀국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1920년대 전까지 특히 활발했다. 노 교수는 책에서 개성에 특히 주목했다. 개성은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해 자본주의 맹아론의 모델로 조명돼 왔다. 실학을 근대적 사상의 맹아로 본다면 개성에서는 성리학적 전통과 대립하는 실학이 발흥했어야 하지만 실제는 달랐다. 노 교수는 “개성에서는 오히려 성리학이 중흥했다”며 “뒤늦게 도시에 형성된 유학 전통을 배경으로 문학과 재력을 겸비한 문인들이 1900년대 신교육 운동과 1910년대 한문학 운동을 이끌었다”고 했다. 단적으로 개성의 역사와 문화를 서적으로 편찬한 개성 명사 김택영(1850∼1927)과 그의 문화운동을 도운 임규영(1869∼1908), 손봉상(1861∼1936) 등이 그 예다. 손봉상은 개성 삼업(蔘業)조합의 조합장을 지낸 실업가이기도 했다. 어쨌든 현대에는 유교적 정체성이 단절된 게 아닐까. 이에 대해 노 교수는 “전통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과 달리 한국의 교수들이 전문적 지식의 영역을 넘어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고 현실 참여적인 것도 조선 사대부 정치 문화의 연장선에서 파악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책은 근대 전환기 한국의 지식인들이 미래를 근대 중국의 진로에 비춰 고민했다는 점에도 시선을 돌린다. 청나라 말기 근대화운동과 왕정의 붕괴는 동시대 한국 지식인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 중국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가 설파한 중국의 진로가 광복 뒤까지도 한반도에서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사상적 자원으로 활용됐다는 것이다. 노 교수는 “이런 사실이 잊혀지다시피 한 건 조선과 중국은 곧 전통, 일본과 미국은 곧 근대라고 바라보는 근대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결합 탓”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에 관해 그는 “조선의 붕당정치는 공통된 이념 기반의 정치를 실현하고 정치 참여자를 대폭 확장했다”며 “여전히 비선 실세가 권력자와의 사적 인간관계에 힘입어 정치를 사유화하는 작금의 정치가 배울 점도 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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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일본의 우경화, 아베만의 문제일까

     이 책은 일본 정치의 우경화가 언제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담은 통시적 해부도다. 지금의 일본 우파는 과거 우파와 다르다. 구(舊)우파는 미소 냉전 구도 속에서 1955년 보수 합동으로 자유민주당(자민당)이 만들어지며 형성됐다. 이른바 ‘55년 체제’다. 구우파 연합은 개발주의, 업계·이익단체의 조직적인 투표와 정치헌금을 바탕으로 계층적 사회를 온존시키면서 경제성장의 결실을 재분배한 정치적 후견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냉전 종식과 더불어 신우파가 등장했다. 전환을 이끈 인물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이다. 개인적으로 복고적 국가주의 지향을 갖고 있던 나카소네는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중국, 한국을 ‘배려’해야 한다는 국제협조주의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후 자유경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군사적인 면에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1993년 일본을 ‘보통 국가’로 바꾸겠다는 오자와 이치로의 ‘일본 개조 계획’이 그 결정판이다. 신우파는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개혁을 도입했다. 일본 조치대 국제교양학부 교수인 저자는 신우파의 양 날개를 이루는 신자유주의와 국가주의를 각각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반자유주의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유와 반자유의 공존은 글로벌 기업 엘리트와 보수 통치 엘리트의 이해가 일치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 강한 국가가 자유경제에 대한 사회의 저항을 억누를 수 있기 때문에 두 이념은 정치적으로 보완적이다. 책은 일본 정치가 좌우로 진동해온 듯하지만 좌표축 자체가 이미 30년 전부터 조금씩 오른쪽으로 옮겨온 탓에 아베 신조 정권이 물러나도 일본 정치의 우경화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 2016-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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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로 언론인들 취재기로 본 한국 현대사

     4·19혁명 한 달여가 지난 1960년 5월 29일 새벽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던 윤양중 전 동아방송 보도국장은 이승만 박사의 사저인 이화장으로 달려간다. 얼마 전 대통령 하야 성명을 발표한 이 박사의 망명설을 동아일보가 1면 톱으로 보도한 데다 전날 “이화장을 잘 지켜보면 기삿거리가 있을 것”이라는 제보 전화를 받은 것. 이화장 앞을 지키던 그의 앞에서 이 박사와 부인이 나타나 전용차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향한 뒤 비행기에 오른다. 이 박사의 마지막 말은 “다 이해해 주고 이대로 떠나게 해 줘.” 하와이로 망명하는 이 박사의 모습은 그렇게 역사의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 대한언론인회는 원로 언론인 33명이 현대사의 주요 현장을 취재한 뒷이야기를 묶은 ‘취재현장의 목격자들’(청미디어·사진)을 최근 발간했다. 김영택 전 동아일보 기자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주재 기자였다. 1980년 5월 18일 오후 4시 정각 공수부대원들에게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을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군인들은 소총에 착검한 채 시위 참여 여부를 가리지 않고 시민들을 공격했다. 김 기자는 이후 열흘 동안 계속된 학살의 현장을 건물이나 으슥한 골목에 숨어 꼼꼼히 수첩에 기록했고, 이는 신군부가 정권 장악을 위해 폭력 작전을 의도했다는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밝히는 근거가 됐다. 김 기자의 취재 수첩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다른 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물과 함께 등재됐다. 책에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정치 참여 비화(홍인근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1978년 대한항공 보잉707 여객기가 소련 무르만스크에 불시착한 사건 취재기(백환기 전 동아방송 기자),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 마지막으로 충남 당진 KBS 단파 방송 송신소를 방문한 일(최서영 전 경향신문 정치부장), 1967년 이수근 북한 노동신문 부사장의 탈출기(신경식 전 대한일보 정치부장) 등에 얽힌 사연이 실려 있다. 이병대 대한언론인회 회장은 발간사에서 “지면의 제약이나 시국 상황으로 보도되지 못했던 기사들과 이야기를 모은 역사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엮었다”며 “책이 바른 역사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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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인시, 최태민 묘지 불법 확인 “이전 - 원상복구 명령 내릴 것”

     경기 용인시 야산에 조성된 최태민 씨의 묘지가 불법 조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용인시는 23일 처인구 유방동에 있는 최 씨 일가의 묘지(약 720m²)가 장사(葬事) 등에 관한 법률(장사법)과 산지관리법을 위반했다고 밝혔다. 용인시에 따르면 가족묘지를 설치할 경우 장사법 14조에 따라 행정 관청에 반드시 신고해야 한다. 그러나 가족묘 2기(합장묘)로 이뤄진 최 씨 일가 묘지는 신고 없이 설치됐다. 신고 없이 조성된 묘지는 이전명령 대상이다. 또 장사법 시행령 15조의 가족묘 설치 기준도 위반했다. 가족묘지의 면적은 100m² 이하, 봉분의 높이는 지면으로부터 1m 이하여야 한다. 최 씨 가족묘는 면적과 봉분 높이 모두 기준을 초과했다. 또 산지관리법 14조에 따라 받아야 하는 산지전용허가도 받지 않았다. 장사법 위반은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 원 이하의 벌금, 산지관리법 위반은 3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용인시 관계자는 “불법이 확인된 만큼 이번 주 안에 최 씨 가족에게 이전 및 원상복구 명령을 내리기로 했다”며 “원상복구하지 않으면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말했다. 묘지가 불법으로 조성됐다는 소식을 접한 누리꾼들은 “죽어서도 불법이냐” “하는 일이 정상보단 편법” 등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묘지와 그 주변 임야 6500여 m²는 최순실 씨(60·구속 기소)가 15%, 최순영 씨(67·최순실 씨 맏언니)가 15%의 지분을 갖고 있다. 또 김찬경 전 미래저축은행 회장의 부인인 하모 씨(40%)와 동서 박모 씨(30%)도 공동 소유자로 올라 있다. 1990년 이 땅을 매입했던 원 소유주 김모 씨는 “김 전 회장이 조카인데 조카며느리인 하 씨가 내 명의를 빌려 산 것”이라며 “이후 하 씨 등이 명의를 바꿔 갔다”고 말했다. 최순실 씨 자매는 매매 예약만 해놓은 상태에서 원 소유주인 김 씨를 상대로 소유권 이전청구권 가등기 및 근저당을 설정했다. 하 씨 지분은 김 전 회장의 부도 후 세무서에서 압류한 상태다. 김 전 회장은 횡령 배임 등의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현재 수감 중이다.  또 묘비에는 최 씨의 본관이 수성 최씨라는 의미로 수성최공태민(隨城崔公太敏)으로 표기했지만 본관이 맞지 않는다는 의문도 제기됐다. 수성 최씨의 수 자는 묘지에 썼던 ‘따를 수(隨)’가 아니라 ‘수나라 수(隋)’라는 것. 묘에 적힌 ‘隨城’ 최씨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성 최씨 대종회 최귀용 부회장은 “2010년 편찬된 수성 최씨 족보에는 최태민이나 그 아버지인 최윤성 씨의 이름이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다. 용인=남경현 bibulus@donga.com·조종엽 기자}

    • 201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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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태민 묘지 2000m²… 대통령 묘역의 7.5배

     혹세무민한 자의 무덤은 양지바르고, 넓었으며, 석물이 화려했다. 국정 농단의 장본인 최순실 씨의 아버지인 최태민 씨의 묘가 경기 용인시 야산에 대규모로 조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채널A와 동아일보 취재 결과 최 씨의 묘는 약 2000m²(약 600평)의 규모로 다섯 번째 부인 임선이 씨와 합장된 것으로 드러났다. 최태민 씨의 묘 크기는 김영삼 대통령의 묘 264m²와 비교하면 7.5배에 달한다.  22일 찾은 최 씨의 묘는 전통 지리학에서 정맥(正脈)이 지나는 산줄기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소나무와 밤나무가 묘지를 병풍처럼 둘렀고, 남향이어서 햇볕이 잘 들었다. 높이 약 2m의 묘비에는 임 씨 소생의 네 딸인 순영 순득 순실 순천과 정윤회 등 사위, 그리고 손주 7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최순실 씨의 이복형제들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묘비에 적힌 최태민 씨의 생몰일은 1918년 음력 11월 5일과 1994년 양력 5월 1일이다. 생년은 1970년대 중앙정보부의 최태민 보고서가 밝힌 1912년보다 6년이나 늦다. 최태민 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보다 다섯 살 많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묘비 내용이 맞다면 한 살이 어린 셈이다.  최태민 묘의 봉분은 직경이 2m가 넘었고, 봉분에는 호석을 둘렀다. 무덤 주변 석물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묘처럼 갖춰져 있었다. 커다란 상석 앞에는 향로석이 있었고, 양쪽 망주석(望柱石) 기둥에 조각된 다람쥐 모양 세호(細虎·꼬리가 긴 동물)가 각각 아래위 방향으로 알밤을 쫓았다. 사각 장명등이 최 씨와 후손들의 발복(發福)을 기원했다. 최 씨 묘 위쪽에는 그의 부모가 합장된 무덤도 있었다.  묘지는 누군가 최근까지 꾸준히 관리한 듯 깔끔했다. 상석 위에는 거의 새것처럼 보이는 조화(造花)가 바구니에 담겨 있었고 상석 아래에는 생화(生花) 국화 화분이 놓여 있었다. 화분은 바람 때문인 듯 쓰러져 있었지만 노란빛이 선명해 가져다 놓은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였다. 최 씨의 한 측근은 “제사는 큰딸 순영 씨가 치렀고 최 씨 일가가 명절 때마다 이곳을 찾아 성묘했다”고 밝혔다. 최 씨의 묘가 있는 동네의 한 주민은 “이 동네에 있었던 절을 육영수 여사가 자주 찾았고, 그 아래 있던 수목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끔 와서 쉬고 갔다고 한다”고 전했다. 한편 용인시는 “신고되지 않은 묘”라며 23일 현장 조사를 통해 불법임이 확인되면 검찰 등에 고발 조치하겠다고 밝혔다.용인=조종엽 jjj@donga.com / 정지영 기자}

    • 2016-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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