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주

이형주 기자

동아일보 광주호남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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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형주 기자입니다.

peneye09@donga.com

취재분야

2026-03-02~2026-04-01
지방뉴스72%
인사일반5%
사회일반5%
검찰-법원판결5%
미담5%
사고5%
사건·범죄3%
  • “한국 넘어 아시아 문화사랑방으로 거듭”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아시아 문화 플랫폼 역할을 하기 위해 재시동을 걸었다. 16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 따르면 2015년 9월 개관 이후 올 3월까지 8년 동안 총 방문객은 1158만 명이다. 개관 첫해 4개월 동안 87만 명이 찾았고 이후 2016년 208만 명, 2017년 181만 명, 2018년 249만 명, 2019년 289만 명 등으로 방문객이 부쩍 늘었다. 방문객 증가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한국을 넘어 ‘아시아 문화 창작소’로 나아가는 데 가속도가 붙였다. 하지만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사실상 공연, 전시가 중단됐다. 문화전당은 5·18민주화운동 최후 항쟁지인 옛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조성된 도심공원 아래쪽에 있다. 옛 전남도청 주변을 파 땅속에 건물을 짓고 건물 옥상에 흙을 덮어 공원을 만들었다. 건물 98%가량이 최고 25m 지하에 조성돼 있다. 도심공원에 있는 70여 개 사각형 유리창인 채광창은 낮에는 햇살을 비추고, 밤에는 실내조명을 밝혀줘 문화전당을 빛의 숲으로 부른다. 문화전당은 부지 13만4815m², 건물 면적 16만1237m²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예술의전당을 압도한다. 문화창조원, 예술극장, 어린이문화원, 문화정보원과 옛 전남도청 건물을 중심으로 조성된 민주평화교류원 등 5개 원(院)이 있다. 5·18민주화운동 사적지인 옛 전남도청 본관과 별관 등 5개 건물이 포함돼 있어 역사성도 갖추고 있다. 문화창조원은 각종 전시공연 등을 아우르는 창작소 역할을 한다. 문화정보원은 아시아 문화자원을 수집해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연구한다. 어린이문화원은 어린이, 부모, 교사 등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문화전당 방문객 39%가 어린이문화원을 찾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문화전당은 8년 동안 공연, 전시, 교육, 축제, 행사 등 각종 프로그램 1136건을 운영하며 아시아문화 허브로 도약했다. 이강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장은 “아시아 문화예술 가치를 창출하면서 문화사랑방 같은 친근한 전당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2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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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TS제이홉-수지가 거닐던 그 길, 나도 가볼까

    광주는 예부터 ‘예향(藝鄕)’으로 불렸다. 맛과 멋, 흥이 넘치고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향의 전통을 이어받은 광주 출신 스타들이 케이팝(K-POP)에 많이 진출했다. 광주가 고향이거나 부모 고향이 광주인 K-POP 스타들이다. 광주시는 2018년부터 내년까지 광주 동구 충장로 옛 학생회관 뒷골목, 금남로 4가역과 주변에 K-POP 스타 거리를 조성한다. 전국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K-POP 스타 거리를 꾸미는 곳은 광주가 유일하다. K-POP 스타 거리는 인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마실길 한바퀴 프로그램과 연계해서 추진한다. 현재 K-POP 스타 거리에는 광주 출신인 BTS 제이홉, 수지, 유빈, 혜린, 에이티즈 윤호, 선미 등 50명의 스타 핸드 프린팅과 스타 애장품이 전시된 팬존 3곳이 있다. 스타들이 그려진 벽화 등 볼거리도 많다. 올해는 광주시 청소년삶디자인센터(옛 학생회관) 건물 7층 외벽에 대형 미디어파사드를 만든다. 바닥을 화려한 빛으로 수놓는 도보 길과 함께 야외 상설무대도 만들어져 광주만의 K-POP 문화가 생겨날 것으로 기대된다. K-POP 스타 5명의 핸드 프린팅을 추가하고 스타들이 출연하는 홍보영상도 제작할 방침이다. 김성배 광주시 관광진흥과장은 “K-POP 스타 거리가 특색 있는 문화관광상품으로 자리 잡으면서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찾고 있다”고 말했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2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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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전 광주 근대화의 현장… 선교사-독립운동가 가옥이 그대로

    광주 남구 양림동은 광주의 근대 역사 현장이다. 20세기 초 대한제국기에 광주로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이 양림동에 교회와 병원을 세워 ‘광주의 예루살렘’, ‘서양촌’이란 별명을 얻었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건물과 유적들이 남아 광주의 근대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10일 광주 남구 양림동 기독교병원 뒤쪽 골목길을 따라 200m 정도를 올라가자 호랑가시나무 언덕이 나왔다. 언덕에는 게스트하우스, 창작소, 미술전시관인 아트플리곤 등 벽돌 건물 3채가 아름드리나무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트플라곤 앞에는 광주시 기념물 17호인 호랑가시나무 한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아트플라곤 등 건물 뒤쪽에는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주택인 우일선 선교사(1880∼1963) 사택이 있다. 우일선 선교사는 광주기독병원(옛 제중원) 2대 원장을 역임했다.미국인 선교사 오웬이 정착해 교회와 학교를 세운 이후 선교사들이 의료와 교육 활동에 매진했다. 근대화 유적이 많고 기독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양림동이 ‘광주의 몽마르트르 언덕’, ‘선교마을’로 불리는 이유다.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한 배유지 선교사(1868∼1925)를 추모하기 위해 1921년 건립된 배유지기념예배당(국가등록문화재 제159호)과 피터슨 선교사, 허철선 선교사 사택도 자리하고 있다. 양림마을 가운데 기독간호대 옆에는 선교사 오웬, 어비슨 기념관과 ‘광주의 어머니’로 불리는 조아라 여사(1912∼2003) 기념관이 있다. 기독간호대학 주변에는 예쁜 카페, 식당이 즐비하다. 평일이지만 양림마을을 찾는 젊은 관광객들이 많았다. 전북 김제에서 온 김은지 씨(25·여)는 “골목길이 오밀조밀하고 예뻐 양림마을을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양림산 옆 사직공원 자락에 자리한 최승효(옛 최상현) 가옥과 이장우(옛 정병호) 가옥은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집이다. 최승효 가옥은 독립운동가인 최상현 선생이 1920년 지은 것으로, 조선후기 전통가옥이 개화기 한옥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최승효 가옥 지붕 밑 다락은 독립운동가들의 피신 장소였다. 1965년 광주MBC 사장인 최승효가 사들었고 현재 광주시 민족문화재 2호로 지정돼 있다. 광주시 민속문화재 제1호인 이장우 가옥은 1899년 정병호가 건축하고 전남 나주 동신대 설립자인 이장우가 사들인 조선말기 상류층 가옥이다. 이장우 가옥은 대문간, 곳간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배치돼 있다. 두 전통가옥 주변에 양림미술관과 화가 한희원 미술관, 정자인 양파정, 고광표 가옥도 구경할 만 하다. 이곳에는 광주 정공엄지려와 충견상 조각상이 관심을 끈다. 이 조각은 조선시대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낸 정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정려(旌閭)다. 벽화와 정크아트 작품(폐기물로 만든 작품)들이 전시된 펭귄마을도 관광지로 인기다. 양림동 한 주민이 2013년 각종 쓰레기를 모아 전시한 것이 시초다. 중장년층이 어릴 때 쓰던 풍금이나 고무신, 작동을 멈춘 태엽시계 등이 예술작품으로 변신했다. 마을 이름을 펭귄이라고 붙인 데는 유쾌한 이유가 있다. 뒤뚱뒤뚱 걷는 어르신들이 많아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2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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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은 활기 가득… ‘동리단길’ 어디까지 와봤니?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도로 건너편은 ‘광주의 동리단길’로 불리는 동구 동명동이다. 동리단길은 동구와 서울 경리단길의 합성어다. 동명동은 일제강점기 철거된 광주읍성의 동문 밖 동계천 주변에 형성된 주거지역이었다. 한때 역사, 교통, 교육, 행정의 중심으로 역할을 했다. 1990년대까지 해도 고급주택과 한옥이 많아 부촌(富村)으로 불렸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자리에 있던 전남도청이 2005년 전남 무안군으로 이전하면서 동명동도 활력을 잃었다. 동명동은 2000년대부터 학원가를 형성했고 주부들이 자녀가 학원 공부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던 장소인 카페가 번성했다. 2015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개관하면서 카페는 물론 음식점, 주점이 잇따라 들어서며 활력을 되찾았다. 옛 정취가 묻어나는 동명동 골목길은 개성이 넘치는 음식점(92곳)과 커피숍(67곳)이 많아 일명 카페거리가 형성됐다. 낮에는 한적한 주택가처럼 조용하지만 밤이 되면 청년들로 북적인다. 동명동 프렌치 레스토랑 ‘알랭’은 프렌치 코스 요리로 유명한 맛집이다. 2013년 이곳에 식당을 낸 공다현 셰프는 담양 우성목장의 칡소 등 지역의 식자재를 사용해 프랑스 요리를 만드는데, 수도권 못지않은 양식이라는 평가를 얻는다. 주한 프랑스 대사관이 선정한 한국의 프렌치 레스토랑 20곳 중 하나로도 선정됐다. 광주 유일의 수제맥주 양주장인 ‘무등산 브루어리’도 동명동에서 탄생했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윤현석 컬처네트워크 대표가 광주 지역의 밀로 맥주를 만든다. 5·18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담아 지은 ‘평화 페일에일’, 무등산 수박으로 만든 ‘워메 IPA’ 등 지역 특성을 담은 명칭이 눈길을 끈다. 동명동의 터줏대감으로 불리는 카페 ‘플로리다’는 카페 컵홀더에 전라도 말을 새긴다. 50년 넘는 한옥을 개조해 지역 예술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예술공간의 집’, 와인과 식료품 등을 파는 편집숍 ‘퍼블릭 마켓’도 동명동을 대표하는 명소로 꼽힌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2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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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범도 장군의 후예가 모여사는 고려인 마을

    광주 광산구 월곡동에는 고려인마을이 있다. 일제강점기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며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홍범도 장군(1868∼1943) 역시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에 정착한 고려인이다. 광주고려인마을은 2000년대 초반 고려인 몇 명이 인근 하남산업단지나 평동산업단지에서 일하다 정착하면서 형성됐다. 현재는 고려인 7000여 명이 모여 사는 마을로 발전했다. 최근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전쟁의 화마를 피해 탈출한 고려인들이 잇따라 정착하고 있다. 고려인들이 광주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이 컸다. 고려인종합지원센터를 중심으로 어린이집, 지역아동센터, 청소년문화센터, 진료소, 노인복지센터 등 각종 지원시설도 힘을 보탰다. 중도 입국 자녀들을 위한 다문화 대안학교인 새날학교가 도우미 역할을 하고 협동조합과 고려방송도 활성화돼 정착을 도왔다. 최근 광주고려인마을이 입소문 등으로 알려지면서 관광객이 늘고 있다. 고려인마을에서 조성한 고려인역사유물전시관(월곡고려인문화관)은 강제이주의 아픔을 지닌 고려인의 삶과 역사, 문화를 한자리에서 배울 수 있는 국내 최초 고려인 역사 문화 전시·기록관이다. 다모아 어린이공원 옆 도로 월곡2동 골목길은 세계음식문화거리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터키 등 중앙아시아 음식점이 많다. 중앙아시아 분위기를 내는 카페와 식료품점, 여행사, 미용실도 있다.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는 “세계음식문화거리 일부 식당은 한국식으로 음식을 조리해 시민들이 자주 찾는다”며 “고려인마을을 방문하면 역사도 배우고 이국적 정취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2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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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곳곳에 자리한 예술 공간… 시민이 사랑하는 명소가 됐다

    16일 오후 8시 광주 동구 서석동 광주영상복합문화관 8층 옥상에서 내려다본 야경(夜景)은 매혹적이었다. 아시아문화의 허브 역할을 하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채광창 76개가 등(燈)처럼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채광창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느티나무, 잔디밭 사이로 설치된 가로 3m, 세로 2m 크기의 사각형 유리창이다. 채광창은 낮에는 도심공원 밑에 있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 햇빛을 받아 어둠을 밝히고, 밤에는 반대로 내부 불빛을 외부에 전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최고 25m 깊이에 자리해 있지만 채광창이라는 빛의 통로 덕분에 지상에 있는 건물처럼 느껴진다. 광주영상복합문화관 8층은 광주폴리 31개 가운데 하나인 ‘뷰(VIEW) 폴리’다. 뷰 폴리는 독일 미디어아트그룹인 리얼리티즈 유나이티드의 팀 에들러, 얀 에들러와 한국의 건축가 문훈이 참여해 만들었다. 뷰 폴리는 철제구조물인 트리비전 33개가 설치돼 있는데 삼각기둥을 돌리면 표면의 색깔과 디자인은 변하지만 ‘CHANGE’라는 글자는 유지되도록 고안됐다. 김경희 광주폴리운영센터 직원은 “뷰 폴리의 경우 아름다운 야경과 무등산을 한눈에 볼 수 있어 각종 축제가 열리는 기간에 하루 200∼300명이 방문한다”고 말했다. 폴리(POLLY)는 처음 건축에서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지는 고가 구조물에 대한 대중적 이름으로 시작됐다고 한다. 프랑스어 단어 ‘folie’와 의미가 일치하는데 기쁨, 즐겨찾기라는 뜻을 담고 있다. 17∼19세기 프랑스에서 폴리는 전망이 좋은 위치에 세운 엉뚱하고 기발한 작은 건축물을 지칭했다. 류재한 전남대 불어불문과 교수는 “소형 건축물인 광주폴리의 건축학적 의미가 프랑스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폴리는 미디어아트 창의도시와 민주·인권도시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도시재생의 건축·예술 프로젝트다. 광주 옛 도심 공동화에 따른 활성화 방안으로 광주만의 독특한 문화·관광브랜드 육성을 위해 마련됐다. 2010년부터 조성된 광주폴리는 국제적 유명 건축가, 예술인, 시민들이 함께 참여해 도시 브랜드를 개발하고 공공예술디자인의 옷을 입으면서 문화도시 품격을 높였다. 즐거움을 주는 폴리는 광주 동구 산수동 옛 주택가에 자리한 ‘쿡(COOK) 폴리’다. 쿡 폴리는 한옥을 리모델링한 청미장과 유리온실 풍광의 콩집으로 이뤄져 있다. 청미장과 콩집에서는 최근까지 매주 금요일에 음식과 조리법, 인문적 담론 등을 강의하는 9개 강좌가 열렸다. (재)광주비엔날레와 광주시가 청미장과 콩집에서 진행한 강좌 제목은 ‘광주폴리×로컬식경’이었다. 강좌에는 한국 커피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모모스커피의 부산 커피개발 전략, 조선명란 복원을 통해 명란이 한국 고유 음식문화라는 것을 알린 덕화푸드의 러시아∼북한∼일본을 잇는 명란로드가 소개됐다. 식재료인 콩과 들깨를 중심으로 미향 전라도 음식문화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박양우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는 “광주폴리×로컬식경 강좌는 작품의 단순한 물리적 재생을 넘어 미향의 도시인 광주의 음식문화사. 인문학, 창업, 마케팅 등을 살펴보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청미장과 콩집은 공모를 통해 20, 30대 청년들이 운영했다. 콩집은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에이드 등을 파는 카페 형태의 스탠드바다. 청미장은 1970년에 지어진 한옥 식당을 리모델링한 곳이다. 전재원 광주비엔날레 광주폴리부 선임은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나 후속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폴리는 기능성, 실용성이 더해지면서 시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광주 동구 장동사거리 후안 헤레로스의 소통의 오두막, 구 시청 사거리 도미니크 페로의 열린 공간 등은 시민들의 약속 장소이자, 길거리 공연무대로 활용되고 있다. 서석초등학교 앞에 세워진 ‘아이러브 스트리트’는 셀카와 단체사진을 찍는 장소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광주비엔날레와 광주시는 내년까지 폴리 2, 3개를 추가로 설치하고 폴리를 연결하는 둘레길을 조성하는 ‘광주폴리 5(V)차 사업’을 진행한다. 광주비엔날레는 제5차 광주폴리를 이끌어갈 총감독에 배형민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를 선임했다. 김준영 광주시 문화관광체육실장은 “광주폴리는 도시경관과 재생에 독자적 브랜드를 구축해 다른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2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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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고흥군 녹동항에 청정 위판장 건립

    전남 고흥군은 도양읍 녹동항에 고흥군수협 청정 위판장을 준공했다고 22일 밝혔다. 총 사업비 67억 원이 투입돼 연면적 2929m², 지상 3층 규모로 지어진 녹동항 청정 위판장은 고흥에서 잡히는 활선어, 낙지, 문어의 80% 이상을 위탁받아 판매한다. 특히 수산물 운반차량 출입과 상하차가 편리하고, 수산물을 저온으로 운반하면서 신선도를 유지해 위생이 보증된 수산물을 유통하게 된다. 고흥군수협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도 지난해 위판액(1558억 원)이 전국 8위를 기록하는 등 지역 수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흥군은 새로 준공한 위판장이 청정해역 어민 소득 증대 등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문금주 전남도 행정부지사는 19일 준공식에 참석해 “전남지역 수산물 위판장 시설이 노후화돼 유통에 애로가 큰 만큼 노후 위판장을 모두 현대화 시설로 바꾸겠다”고 말했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2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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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 순직 경찰 유족-가해자, 42년만의 화해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위 진압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경찰 유가족과 가해자가 42년 만에 만났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9일 국립서울현충원 경찰충혼탑에서 5·18 당시 사망한 경찰관 4명의 유가족 9명과 가해 당사자 배모 씨(76)가 ‘사과와 용서, 화해와 통합’이라는 슬로건 아래 만나는 행사를 열었다. 조사위에 따르면 1980년 5월 20일 오후 9시경 고속버스 기사였던 배 씨는 전남도청 옆 광주노동청 앞 경찰 저지선에 버스를 몰고 돌진해 정충길 경사(당시 39세) 등 전남 함평경찰서 소속 경찰관 4명을 숨지게 하고 7명을 다치게 했다. 배 씨는 재판에서 “밤이었고 최루가스가 버스 안으로 들어와 눈을 뜰 수 없어 사고가 일어났다”고 진술했다. 그는 사형이 확정됐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2년가량 복역하고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이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정 경사 등은 사망 직후 장례를 치르지 못했고 1980년 5월 말에야 겨우 화장을 할 수 있었다. 경찰관 3명의 자녀는 당시 함평초교 6학년 동창이었다. 유족 대표 정원영 씨(53)는 “학교에 갔는데 친구들이 아버지 사망 소식을 알고 위로해줘 책상에 고개를 묻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유족들은 5·18 이후 수년 동안 연금을 전혀 받지 못하는 등 유공자로서 제대로 된 예우도 못 받았다고 했다. 일부 유족들은 2017년경부터 배 씨를 만나 사과를 받고 한(恨)을 풀려 했지만 잘 진행되지 않았다. 조사위가 5월 초 배 씨와 화해 자리를 제안했지만 이번에는 일부 유가족들이 망설였다. 양측의 어려운 결심으로 이날 화해의 자리가 마련됐다. 배 씨는 이날 오전 충혼탑에 분향·헌화하고 근처에 있는 희생자 묘비에서 묵념하는 내내 굳은 표정을 지었다. 몸도 조금씩 떨었다. 배 씨는 유족들에게 “뭐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다. 죄송하다. 막막하고 얼굴을 들 수가 없다”며 고개를 떨궜다. 유족대표 정 씨는 “5·18과 관련해 진짜 사과해야 할 사람들은 신군부 인사들”이라며 “배 씨가 숨진 경찰관 4명이 명예를 회복하는 것에 가교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22-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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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中企 온라인 기획전’ 연말까지 운영

    광주시가 지역 중소기업의 온라인몰 입점을 지원하는 광주 중소기업 온라인 기획전을 연말까지 운영한다. 기획전은 온라인 유통시장이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지역 중소기업 판로 확대 등을 위해 마련됐다. 기획전에는 65개 지역 중소기업이 참여해 옥션, 지마켓, 위메프, 쿠팡, 우체국쇼핑 등 5개 온라인몰에서 다양한 상품을 판매한다. 기획전에서는 김치, 한우, 김부각 등 식품을 비롯해 공기청정기, 화장품, 마스크 등 다양한 생활제품을 판매한다. 예산 소진 시까지 10% 쿠폰 발행 등 할인 이벤트도 진행해 저렴한 가격에 좋은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중소기업 온라인 기획전은 광주시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2020년부터 시작했다. 지역 중소기업 제품을 홍보해 인지도를 높이고 매출을 올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손항환 광주시 기업육성과장은 “기획전이 판로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 중소기업의 유통망을 개척하고 좋은 중기 제품을 소비자가 만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22-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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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곳곳 추모행사… 코로나로 주춤했던 가족단위 참배객 줄이어

    5·18민주화운동 제42주년인 18일 광주 도심에서는 그날의 숭고한 가치를 계승하는 행사가 펼쳐졌다. 기념식이 열린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국립5·18민주묘지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올 1월부터 이달 17일까지 참배객은 11만3916명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행되던 2020년 같은 기간 동안 참배객 7만571명, 2021년 4만4083명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코로나19 발생 이전인 2019년 같은 기간 동안 참배객 14만1658명, 2018년 13만7650명보다는 적었다.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5월 들어 가족 단위의 참배객이 늘었다”며 “코로나19 감염 확산으로 2년간 주춤했던 참배객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추모 열기가 뜨겁다”고 말했다. ○…경북 경주시 위덕대 학생들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했다. 학생들은 지난해 5·18민주화운동을 폄훼한 교수의 발언을 사과하기 위해 5·18민주묘지를 찾았다. 위덕대의 한 학생은 “5·18을 폄훼한 교수는 지난해 해임 처분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5·18 제대로 알기 행사 등을 통해 역사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광주시는 이날 동구 금남로 민주의 종각에서 ‘민주의 종’ 타종식을 열었다. 이용섭 광주시장, 권영진 대구시장, 양향자 의원, 김용집 광주시의회 의장, 장상수 대구시의회 의장, 황일봉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장 등 18명이 참여해 33회 타종했다. 참석자들은 5월 민중항쟁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민주·인권·평화의 광주 정신 확산, 영호남 화합, 국민 대통합을 염원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중단됐던 타종식을 2년여 만에 재개하면서 일상 복귀와 함께 새 시대가 열리기를 기원했다. 민주의 종은 높이 4.2m, 무게 30.5t으로, 8·15와 5·18을 기리는 의미를 담아 2005년 제작됐다. 5·18 기념일, 광복절, 제야 행사 등에 타종된다. ○…윤상원기념사업회와 광주 광산구는 6월 3일까지 전남여고 내 전시관 ‘예담1929’에서 ‘수묵으로 그린 임을 위한 행진곡 윤상원’ 전시회를 연다. 전시회에는 한국화가 하성흡이 윤상원의 생애를 수묵화로 그린 12점이 전시된다. 전남여고는 1980년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전남도청에서 산화한 윤상원 열사와 영혼결혼식을 올린 박기순 열사의 모교다. 들불야학 설립을 주도했던 박 열사는 1979년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 열사와 윤 열사는 1982년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들의 영혼결혼식에 헌정하기 위해 만들어져 지금까지 한국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대표 노래로 불리고 있다. ○…인문연구원 동고송과 광주시의사협회는 20일 5·18기록관에서 5·18 의료인 활동 구술증언 집담회를 개최한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때 부상당한 시민 등을 헌신적으로 돌본 의료인들의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공유하는 자리다. 집담회에는 당시 김성봉 광주기독병원 응급실장, 문형배 전남대 의대 교수, 김영진 전 전남대병원장, 손민자 전남대병원 간호감독, 안성례 광주기독병원 간호감독, 오경자 조선대 간호부장 등이 발제자로 참여한다. ○…광주기독병원은 17일 5·18민주화운동 42주년을 맞아 ‘사랑의 생명나눔 헌혈 캠페인’을 열었다. 광주기독병원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수많은 부상자를 살리기 위해 줄을 서 헌혈했던 박금희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광주시민들의 생명 나눔 정신을 알리고 계승하기 위해 매년 5·18기념주간에 헌혈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1980년 5·18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박 열사는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 헌혈을 호소하는 가두방송을 듣고 광주기독병원을 찾아 헌혈한 후 귀가하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 상태로 광주기독병원에 이송됐다. ○…광주독립영화관은 19일까지 ‘5·18민중항쟁 42주년 특별전’을 연다. 이번 기획전은 영화로 5·18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자는 취지로, 11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19일 1980년 광주와 닮은 아픈 역사를 지닌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다룬 임흥순 감독의 ‘좋은 빛, 좋은 공기’, 미디어 아티스트 장민승 감독과 정재일 음악감독의 시청각 프로젝트 ‘둥글고 둥글게’가 상영된다. 신은정 감독의 ‘광주항쟁의 유산’, 구담 감독의 ‘오월의 만다라’, 신혜빈 박화연 감독의 ‘석류꽃 필 때쯤’, 박종익 감독의 ‘그날, 고등학생의 증언’, 박정운 감독의 ‘오발탄’은 각기 다른 모습의 5·18을 영상으로 담아내고 있다. 전편 무료로 상영되며 현장에서 발권 후 관람할 수 있다. ○…광주민족미술인협회는 29일까지 광주 남구 양림미술관에서 ‘안녕하세요 80학번 000입니다’ 청년특별전을 연다. 9명의 작가가 설치 회화, 조각, 인터랙티브 미디어 작품 등 14점을 전시한다. 작품들은 작가마다 특색 있는 작업 방식을 통해 5·18에 대한 시선을 담아냈다. 참여 작가는 김유나, 김은경, 나지수, 노여운, 백지유&안다민, 윤연우, 이뿌리, 하승완 등이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22-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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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월단체 “尹 기념식 매년 참석 약속 환영”… “5·18정신 헌법 수록 언급없어” 아쉬움도

    윤석열 대통령이 18일 제42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보수 정부 대통령 중 처음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기념사를 통해 오월 정신을 확고히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에 대해 관련 단체들은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특히 윤 대통령이 기념식 직전 5·18 관련 단체들과 만나 “임기 동안 5·18기념식에 매년 참석하겠다”고 밝힌 것에 긍정적 평가가 이어졌다. 기념식 내내 윤 대통령 옆에 자리했던 황일봉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회장은 “장차관을 비롯해 여당 국회의원을 모두 데리고 오고, 임기 내내 5·18기념식에 참석하겠다고 밝힌 대통령은 역대 정부에서 없었다”면서 “윤 대통령의 말과 행동에 진심이 느껴졌다”고 전했다. 윤 대통령은 기념식 시작 직전인 이날 오전 9시 50분경 국립5·18민주묘지 추모관 내 대기실에서 황 회장과 임종수 5·18공로자회 회장, 박해숙 민주유공자 유족회장 등 관계자 15명을 만나 약 10분 동안 대화했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오늘은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광주시민”이라며 “5·18 관련 현안을 해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임 회장도 “대통령이 임기 내내 기념식에 참석하겠다고 한 말은 상당히 긍정적”이라며 “윤 대통령이 5·18 현안을 보수 진영에서 풀어가려 한다는 점을 높게 평가한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기념식이 끝나고 차량에 탑승하기 직전 관계자들에게 “오월 정신을 잘 받들겠다”고 재차 다짐했다고 한다. 다만 기념사에서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하겠다는 직접적 언급이 없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윤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오월 정신은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 그 자체”라고만 했다.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윤 대통령이 ‘5·18 정신은 국민 통합의 주춧돌’이라고 강조하고 ‘국민 모두가 광주시민’이라고 언급한 것은 긍정적”이라면서도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점은 아쉽다”고 말했다. 전날 전야제 등을 진행한 5·18 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도 “헌법 전문 수록에 대한 의지를 밝히지 않았고 완전한 진상 규명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매우 유감스럽다”고 했다. 윤 대통령의 행보를 더 지켜보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박해숙 유족회장은 “윤 대통령이 해마다 기념식에 참석하겠다고 한 만큼 앞으로 지켜보겠다”고 했다. 이날 윤 대통령이 기념사를 읽는 동안 참석자 사이에선 6차례 박수가 나왔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70대 여성은 기념식이 끝난 후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대통령이면 당연히 5·18기념식에 참석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만 밝혔다.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22-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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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월 단체 “尹, 말·행동에 진심 느껴져…매년 참석 지켜볼 것”

    윤석열 대통령이 18일 제42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보수 정부 대통령 중 처음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기념사를 통해 5월 정신을 확고히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에 대해 관련 단체들은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특히 윤 대통령이 기념식 직전 5·18 관련 단체들과 만나 “임기 동안 5·18 기념식에 매년 참석하겠다”고 밝힌 것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이어졌다. 기념식 내내 윤 대통령 옆에 자리했던 황일봉 5·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 회장은 “장차관을 비롯해 여당 국회의원을 모두 데리고 오고, 임기 내내 5·18기념식에 참석하겠다고 밝힌 대통령은 역대 어느 정부에서도 없었다”면서 “윤 대통령의 말과 행동에 진심이 느껴졌다”고 전했다. 윤 대통령은 기념식 시작 직전인 이날 오전 9시 50분경 국립 5·18민주묘지 추모관 내 대기실에서 황 회장과 임종수 5·18공로자회 회장, 박해숙 민주유공자 유족회장 등 관계자 15명을 만나 약 10분 동안 대화했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오늘은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광주 시민”이라며 “5·18 관련 현안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임 회장도 “대통령이 임기 내내 기념식에 참석하겠는 말은 상당히 긍정적”이라며 “윤 대통령이 5·18 현안을 보수 진영에서 풀어가려 한다는 점을 높게 평가한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기념식이 끝나고 차량에 탑승하기 직전 관계자들에게 “5월 정신을 잘 받들겠다”고 재차 다짐했다고 한다. 다만 기념사에서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수록하겠다는 직접적 언급이 없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윤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5월 정신은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 그 자체”라고만 했다.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윤 대통령이 ‘5·18정신은 국민 통합의 주춧돌’이라고 강조하고 ‘국민 모두가 광주시민‘이라고 언급한 것은 긍정적”이라면서도 “5·18정신의 헌법전문 수록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점은 아쉽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임 회장은 여당이 헌법전문 수록 찬성 입장을 밝히는 만큼 올 7월 국회에서 관련 간담회를 열 계획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의 행보를 더 지켜보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박해숙 유족회장은 “윤 대통령이 해마다 기념식에 참석하겠다고 한 만큼 앞으로 지켜보겠다”고 했다. 이날 윤 대통령이 기념사를 읽는 동안 참석자 사이에선 5차례 박수가 나왔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70대 여성은 기념식이 끝난 후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대통령이면 당연히 5‧18기념식에 참석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만 밝혔다. 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22-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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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잊혀선 안돼”… 3년만에 완전한 5·18 전야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오후 7시 반 광주 동구 금남로에서 열린 42주년 전야제 행사에선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시민들은 마스크를 쓴 채 박수를 치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5·18 민중항쟁 기념행사위원회는 이날 ‘오월, 진실의 힘으로! 시대의 빛으로!’라는 테마로 시민 약 5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2시간 동안 전야제를 열었다.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축소됐던 행사들이 2019년 이후 3년 만에 모두 부활했다. 전야제 시작 직전 위원회 측은 “3년 만에 다시 봤다. 시민들끼리 서로 인사 한번 하자”고 했다. 전야제 1부는 ‘다시, 오월’을 주제로 1980년 5월 시민궐기대회 등을 재현하는 노래, 영상, 씻김굿 등이 진행됐다. 2부에선 5·18 당시 가족을 잃은 어머니 15명이 민주화운동을 노래로 표현했고, 3부에선 광주 극락초교 어린이합창단이 노래 ‘평화가 무엇이냐’를 부르는 등 공연이 이어졌다. 전야제에 참석한 시민들은 헌법전문에 5·18정신을 수록하고 발포명령자, 행방불명자에 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5·18 당시 미국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참상을 목격한 데이비드 돌린저 씨(66)는 전야제 현장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광주는 절대 잊혀선 안 되는 한국 민주주의 토대”라며 “5·18 정신이 헌법전문에 당연히 포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돌린저 씨는 20년 동안 해마다 광주를 찾아 5·18을 추모해왔다.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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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힘든 삶에도… 정의를 위해 목숨 바쳐 시대의 어둠 밝힌 ‘들불 열사’

    천애(天涯)의 고아였지만 학구열이 남달랐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최후 진압에 맞서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다 산화했다. 그의 뜻을 이어가는 장학회가 생기고 글씨체도 만들어졌다. 힘든 삶에도 정의를 위해 시대의 어둠을 밝힌 그는 이제 의인(義人)이 됐다. ‘들불 7열사’ 가운데 한 명인 박용준 열사(1980년 작고) 이야기다. 그는 1956년 7월 태어나자마자 광주 동구 학동에 자리한 영신영아원에 맡겨졌다. 여덟 살이던 초등학교 1학년 때 영신영아원에서 무등보육원으로 옮겨졌다. 호적에는 고아원인 무등보육원이 본적으로 등록됐다. 무등보육원에서 생활하면서 광주 서석초교와 숭일중을 졸업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조선대에서 구두닦이를 하고 동네에서 신문을 배달했다. 배움에 목말랐던 그는 열여섯 살 때 그동안 모은 돈으로 숭의실업고 야간부에 입학했다. 그와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서한성 씨(66)와 셋방 생활을 하며 주경야독했다. 서 씨는 “용준이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누구보다도 컸고 항상 올곧은 친구였다”라고 회고했다. 야간학교에 다니던 그에게 서경자 영신영아원 원장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광주YWCA신협에서 근무하도록 해준 것이다. 서 원장은 당시 광주YWCA신협 이사장을 맡고 있었다. 광주YWCA신협에 다니면서 안정을 찾은 그는 고교 과정을 마친 뒤 방송통신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오갈 곳이 없었던 그는 광주YWCA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스무 살 때 신협 지도자 강습회에서 광주 서구 광천동에서 마을운동을 하던 김영철 열사(1998년 작고)를 만났다. 두 사람은 광주YWCA에서 함께 근무하며 형제 같은 정을 느꼈다. 박 열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영신영아원에서 김 열사의 어머니가 간호사로 근무했던 인연 때문이었다. 1978년 광천동에 들불야학이 설립되자 박 열사와 김 열사는 들불야학에 합류해 강학(교사)으로 활동했다. 박용안 씨(62·한국해양수산개발원 명예연구위원)는 “박 열사는 글씨체가 뛰어나 들불야학 교재를 직접 썼다”고 말했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확대하며 전국의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체포한 다음 날인 5월 18일 7공수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를 점령했다. 계엄군이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면서 5·18이 시작됐다. 계엄군이 광주 동구 금남로에서 시민 학생들을 폭행한 19일 박 열사는 광주 동구 대의동 광주YWCA 1층에 있었다. 계엄군이 2층 양서협동조합 사무실로 들어와 직원들을 폭행하는 모습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했다. 박 열사는 시민과 함께 계엄군에 맞서 싸우기로 했다. 계엄군이 물러난 다음 날인 5월 22일부터 혼자서 5월 진실을 알리는 ‘투사회보’를 만들었다. 글씨체가 좋았던 그는 투사회보 10호까지 들불야학 교실과 광주YWCA에서 제작했다.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을 사수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광주YWCA 건물을 지키다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박 열사의 5월 정신은 다양한 사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광주YWCA는 26일 어려운 형편에 있는 대학생 5명에게 박용준 장학금을 수여한다. 광주YWCA는 박 열사에게 지급된 보상금으로 장학재단을 만들어 2000년부터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그동안 95명이 박용준 장학금을 받았다. 박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제작된 박용준 투사회보체 글꼴 사용도 늘고 있다. (사)지역공공정책플랫폼 광주로, 5·18기념재단, 광주YWCA, (사)들불열사기념사업회, 광주 동구청 홈페이지 등 5곳에서 투사회보체를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다. 광주 서구는 청사 회의실을 ‘들불홀’로 이름을 바꾸고 출입구 벽면 조형물 글꼴도 투사회보체로 변경했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 등은 일선 학교에서 투사회보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백희정 지역공공정책플랫폼 광주로 상임이사는 “투사회보체 글꼴로 응모하는 글짓기 공모전을 여는 등 박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는 다양한 추모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22-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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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대 한국 학생운동사에 큰 영향을 끼친 ‘광주의 아들’

    1978년 12월 21일 목요일 밤. 광주 서구 광천동 시민아파트 주변 광천삼화신협의 안쪽 방으로 대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박관현 열사(전 전남대 총학생회장·1982년 작고)와 신영일 열사(1988년 작고)를 비롯해 박용안, 장석웅, 이세천, 박병섭, 안진, 김정희, 최금표, 위승량 씨 등이었다. 이들은 당시 광천동에 있던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를 위한 예비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대학생은 아니었지만 윤상원(1980년 작고), 김영철 열사(1998년 작고)도 참석했다. 윤 열사는 당시 “김영철 씨는 시민아파트 A동 반장이자 마을 지도자입니다. 광천삼화신협 실무를 맡고 있고 광주YWCA 신협에도 근무하고 있는 팔방미인”이라고 소개했다. 박 열사는 들불야학 식구들을 이렇게 처음 만나 학생운동에 첫발을 내디뎠다. 들불야학은 1978년 7월 결성돼 노동자와 학생들을 가르쳤다. 들불야학의 ‘민주·희생·인권’의 정신은 5·18민주화운동에 이어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이끌며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됐다. 박 열사는 예비 모임 한 달 뒤 시국 상황, 노동자 처우 등과 관련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지는 통일 예상 시기, 노동자 생활환경 등 39개 질문으로 채워졌다. 박 열사와 박용안 씨(60·한국해양수산개발원 명예연구위원)가 한 팀이 돼 광주공단 공장들을 돌아다녔다. 1978년 전남대 법대 행정학과 입학 동기인 두 사람은 광주공단 노동자들의 실태를 조사하는 한편 전남대 사회조사연구회에 참여하고 들불야학에서 강학하는 등 2년 동안 동고동락했다. 박 씨가 회고하는 박 열사는 키 167cm, 몸무게 70kg 정도의 다부진 체격이었다. 소탈하지만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고 한다. 광주 동구 계림동에서 자취를 하면서 들불야학이 있던 광천동 시민아파트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박 열사는 전남대 법대에 들어가기 위해 3수를 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입학한 터라 같은 학번 신입생보다 나이가 많았다. 박 씨는 “박 열사가 사법시험을 준비해야 하는지, 시민운동에 참여해야 하는지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실태조사는 239만 m² 터에 자리 잡은 63개 업체를 돌아다니며 이뤄졌다. 박 열사는 처음 보는 업체 사장이나 간부는 물론 노동자에게 살갑게 다가가 구수하게 말을 걸었다. 박 열사의 친근한 모습에 대부분 마음을 열었다고 한다. 노동자 299명의 설문을 토대로 보고서가 완성됐고, 1979년 5월 ‘전대신문’에 ‘광주공단 전체 노동자 50% 이상이 최저임금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22%가 주 60시간 이상 노동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박 열사는 노동자 실태조사를 계기로 공부보다는 현실 참여를 택했다. 1979년 3월 전남대 사회조사연구회 창립을 주도했고 한 달 뒤에는 윤상원 열사의 권유로 들불야학에서 영어, 수학을 가르쳤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들불야학 식구들의 격려 등에 힘입어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당선했다. 5월 14일부터 사흘 동안 전남도청 앞 등에서 5·18의 씨앗이 된 ‘민족민주화 대성회’를 이끌었다. 신군부가 5월 17일 비상계엄을 확대하며 정치인, 재야인사, 학생 등 2699명을 체포하자 박 열사는 전남 여수로 피신했다가 서울 남동생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친척집에서 1년간 은신하며 소금과 모기장을 팔았다. 서울의 한 철물공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5·18 당시 들불야학 식구들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부채의식에 시달렸다. 1982년 4월 공장에서 경찰에 붙잡혀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임낙평 (사)들불열사기념사업회 이사장(64)은 “박 열사의 도피 루트를 따라가 본 적이 있었는데, 가는 곳마다 먼저 숨진 들불열사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음 아파했던 흔적을 더듬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박 열사는 5·18 진상 규명을 위해 40여 일 동안 단식을 하다가 1982년 10월 29세의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 박 열사의 신념은 1980년대 한국 학생 운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광주의 아들’ 박 열사의 뜻을 계승하기 위한 추모 사업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법적 명예 회복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박 열사는 숨진 지 40년이 흘렀지만 유죄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다. 유족은 고인의 명예 회복을 위해 재심을 청구했으나 법원은 2013년 “박 열사가 항소 도중 숨져 현행법상 재심 청구 대상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박 열사의 셋째 누나 박행순 씨(73)는 “올해부터 영광군에서 생가를 보전하는 사업에 착수한다”며 “동생의 법적 명예 회복을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22-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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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5·18 당시 계엄군에 찔렸다 빼앗은 대검 42년만에 공개

    1980년 5월 23일 강대현 씨(61)는 전남 영암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광주로 올라왔다. “시민들이 계엄군에 희생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힘을 보태고 싶었다. 해질 무렵 그는 계엄군을 피해 광주 남구 송암동 철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광주대 인근에 도착했을 때 뭔가에 등이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피를 흘리며 넘어졌는데 계엄군 1명이 다가와 소총에 장착한 대검으로 다시 찌르려 했다. 살기 위해 철길에 있던 자갈로 계엄군을 때리자 ‘아이고’ 하며 쓰러졌다. 강 씨는 총을 빼앗았지만 차마 계엄군을 찌르진 못했다. 개머리판으로 옆구리를 1차례 때린 후 발로 2∼3차례 걷어찼다. 20∼30m 떨어져 있던 다른 계엄군들이 다가오자 총은 멀리 던지고 대검만 챙겨 달아났다. 다행히 대검에 빗맞아 경상에 그쳤다. 강 씨는 인근 마을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자 영암 집으로 돌아왔다. 5·18기념재단은 강 씨가 보관해오던 이 대검을 최근 기증했다고 15일 밝혔다. 행방불명을 제외한 5·18 사망자 166명 가운데 최소 11명이 대검 자상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시민을 찌른 계엄군의 대검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강 씨는 학생들이 1980년 5월 21일 버스를 타고 내려와 “광주 사람들 다 죽어 가는데 영암 사람들은 보고만 있냐”고 호소하자 합류했다고 했다. 강 씨를 비롯한 청년들은 인근 해남군 계곡면 파출소 무기고에서 소총을 챙겼다. 5월 22일 “시민들을 구하겠다”며 광주로 올라왔지만 시내에 진입하지 못했다. 계엄군은 당시 광주 외곽 봉쇄작전을 벌여 송암동을 비롯해 동구 주남마을, 광주교도소 도로에서 통행 차량에 무차별 사격을 하고 있었다. 청년들은 광주 진입이 실패하자 포기하고 해산했고 소총도 반환했다. 강 씨는 해산 다음 날인 23일 혼자 다시 광주로 진입하려다 대검에 찔렸다. 강 씨는 광주에서 돌아온 직후 영암파출소에 끌려갔다. 경찰관들이 “데모에 참여한 걸 자백하라”며 강 씨를 폭행했지만 이웃에 살던 경찰관이 말려 준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대검은 신문지에 싸서 장롱 위에 숨겨놨다. 강 씨는 “괜히 꺼냈다가 곤욕을 치를 것 같아 겁이 났다”고 했다. 강 씨는 이후 육군 병장으로 군 복무를 마친 뒤 병원 직원, 개인택시 운전사 등으로 일했다. 현재는 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강 씨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계엄군을 때렸지만 항상 미안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서 “다시는 5·18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영암=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22-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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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어붙은 땅도 봄은 못 막는다” 보도통제 뚫고 민주화 희망을 전하다

    광주 5·18민주화운동 당시 ‘들불야학’ 사람들은 ‘5월의 진실’을 전한 소식지 ‘투사회보’를 제작하는 한편 시민군 지도부 구성과 최후 항쟁을 주도했다. 5·18 이후에도 빈민, 학생, 청년, 문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들불야학 활동가 가운데 1978∼1998년 박기순(여·1958∼1978), 윤상원(1950∼1980), 박용준(1956∼1980), 박관현(1953∼1982), 신영일(1958∼1988), 김영철(1948∼1998), 박효선(1954∼1998) 등 7명이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7인의 들불열사’로 불리며 꺼지지 않는 ‘역사의 들불’로 승화했다. 동아일보는 5·18민주화운동 42주년을 맞아 들불열사들이 간직했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치열했던 삶의 흔적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꽁꽁 얼어붙었던 땅들도 오는 봄을 막지 못하고…”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이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윤상원 열사가 들불야학 제4회 체육대회(1980년 5월 4일)를 맞아 자필로 작성한 메모의 일부분이다. 윤 열사는 이 메모에서 “험악했던 세상사도 정의 앞에서 무릎을 꿇어가는 요즈음에 구체적인 투쟁의 장을 찾아 헤매는 졸업 강학 및 졸업생 여러분 몸성히 잘 있는지요?”라며 1980년에 찾아온 ‘서울의 봄’, 이른바 민주화에 대한 희망을 적었다. 이어 윤 열사는 “들불 선배님들 및 음으로 양으로 저희 들불을 지켜봐주신 외부 인사들 덕분에 저희 야학은 아무 일 없이 잘되어 가고 있답니다”라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들불열사들의 희생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설립된 사단법인 들불열사기념사업회는 15년 동안 열사들의 메모, 사진, 일기 등 660여 점을 수집했다. 윤 열사의 메모는 그의 유품 27개 중 1개인 노트에 적혀 있었다. 최근 처음으로 공개된 이 메모는 1980년 4월 준비하던 체육대회를 들불야학 식구들에게 알리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상호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80년 5월 초 광주 서구 광천동에 사는 청년들과 들불야학 식구들이 체육대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며 “5·18 기간 동안에 윤상원 열사의 자필 메모가 없는 것을 감안하면 5·18과 가장 가까운 시기에 작성된 친필 메모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면(현재 광주 광산구 임곡동) 천동마을에서 태어난 윤 열사는 광주 살레시오고를 졸업하고 3수 끝에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외무고시를 준비하며 평범한 대학 생활을 하던 그는 학교 선배 김상윤 씨의 권유로 역사 공부를 시작했고, 경제 발전 이면에서 신음하던 노동자의 삶을 접하며 변화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혔다. 1978년 2월 주택은행 서울 봉천동지점에 취업했지만, 윤 열사의 동생 태원 씨(62)는 “형님은 주택은행에 취업할 때부터 1년 뒤 사회운동에 헌신하겠다는 신념이 확고했다”고 회고했다. 윤 열사는 1978년 9월 자신의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와 들불야학 강학(교사)들을 만났다. 당시 들불야학 교실은 광천동 성당과 광천시민아파트 C동 3층 등 두 곳에 있었고, 학강(학생) 20∼30명이 2개 반에서 하루에 2시간씩 공부했다. 윤 열사는 이듬해 1월부터 광천동 공장과 양동 신협에서 일하며 강학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윤 열사는 당시 광천시민아파트 B동 1층에 자취를 했다. 33m² 넓이의 방에 나무합판을 세워 절반으로 쪼갠 방이었다. 통금이 있던 때라 강학들과 학생들은 늦은 시간이 되면 윤 열사의 방에서 잠을 잤다. 윤 열사의 방은 들불야학 식구들의 사랑방이자 학습 공간이었다.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조치를 전국으로 확대하며 학생, 정치인, 재야 인사 등 2699명을 체포했다. 다음 날 광주에서 계엄군이 잔혹한 진압에 나섰지만, 저항할 지도 세력이 사실상 전무한 상태였다. 이때 윤 열사 등 들불야학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 5·18을 이끌었다. 5월 25일 학생수습위원회에서 새로 편성된 항쟁지도부(민주투쟁위원회)의 대변인을 맡은 윤 열사는 1980년 5월 26일 기자회견을 열고 외신기자들에게 계엄군의 학살 사실을 알렸다. 이어 5월 27일 최후의 순간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이 쏜 총에 눈을 감았다. 전용호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자문위원은 “윤 열사는 5·18 당시 광주를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신념을 지키고 실천한 시민운동가”라고 말했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22-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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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웃는 얼굴’ 中현대미술 거장 유에민쥔 개인전

    ‘웃는 얼굴’을 그리는 작가로 유명한 중국 현대미술의 거장 유에민쥔(웨민쥔·岳敏君)의 개인전이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은 13일부터 8월 28일까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창조원 복합1관에서 ‘유에민쥔: 한 시대를 웃다! in 광주 전시’를 개최한다.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으로 마련된 이번 전시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광주시가 후원한다. 이번 전시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 설립 후 처음 마련한 세계적 거장 초청전시로 유에민쥔 개인전 중에서는 최대 규모로 진행된다. 이에 따라 전시에서는 유에민쥔의 대표작인 웃음 회화작품을 비롯해 차이나아방가르드의 진수를 보여주는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또 신작 시리즈와 함께 회화와 조각을 포함한 대표작부터 국내에서는 공개되지 않은 초대형 청동작품이 실내 공간에 설치될 예정이다. 다양한 스페셜 존도 마련돼 관람객은 풍성한 경험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최지만 숙명여대 도예과 교수의 백자 작품 등도 전시된다. 김선옥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 사장은 “유에민쥔의 작품은 화려한 색감과 희망적인 메시지, 재미있는 이미지로 어른은 물론 아이들까지 즐길 수 있다”며 “가정의 달을 맞아 온 가족이 함께 관람하기 좋은 전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22-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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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 당시 첫 집단발포, 현장 지휘로 시작”

    광주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역에서 이뤄진 계엄군의 첫 집단발포가 우발적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3공수여단장의 현장 지휘 및 발포에 따라 시작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일부 인사가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이라고 지목한 이른바 ‘김 군’의 정체도 확인됐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2일 서울 중구 서울사무소에서 대국민 보고회를 열고 계엄군의 첫 집단발포가 이뤄졌던 광주역 상황 조사 결과 등을 발표했다. 조사위에 따르면 1980년 5월 20일 오후 11시경 광주역 인근에 주둔하던 계엄군 3공수부대 최세창 여단장이 상부와 무선통신을 주고받은 뒤 권총을 꺼내 허공에 3발을 발사한 사실이 당시 3공수부대원들의 증언에 의해 확인됐다. 발사 직후 부대원들은 시민들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시작해 시민 4명이 숨지고 16명이 부상을 입었다. 허연식 진상조사위 조사2과장은 “지휘관의 권총 발포 이후 집단발포가 이뤄진 것은 신군부의 자위권 발동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최세창 당시 여단장은 조사 결과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사위는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 금남로 발포가 △11공수부대 일제사격 △7·11공수부대 저격수 사격 △퇴각을 위한 조준사격 등 3차례에 걸쳐 이뤄진 점도 확인했다. 조사위는 보수논객 지만원 씨 등이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이라고 지목한 이른바 ‘김 군’은 수도권에서 자영업을 하는 차복환 씨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차 씨는 이날 보고회에 직접 참석해 “지 씨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을 경우 법적 대응을 할 것”이라고 했다.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22-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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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자 곁이 내가 있을 곳… 번듯한 직장 대신 들불야학 택한 윤상원 열사[5·18 이끈 들불열사]

    광주 5·18민주화운동 당시 ‘들불야학’ 사람들은 ‘5월의 진실’을 전한 소식지 ‘투사회보’를 제작하는 한편 시민군 지도부 구성과 최후 항쟁을 주도했다. 5·18 이후에도 빈민, 학생, 청년, 문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들불야학 활동가 가운데 1978~1998년 박기순(여·1958~1978), 윤상원(1950~1980), 박용준(1956~1980), 박관현(1953~1982), 신영일(1958~1988), 김영철(1948~1998), 박효선 씨(1954~1998) 등 7명이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7인의 들불열사’로 불리며 영원히 꺼지지 않는 ‘역사의 들불’로 승화했다. 동아일보는 5·18민주화운동 42주년을 맞아 들불열사들이 간직했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치열했던 삶의 흔적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꽁꽁 얼어붙었던 땅들도 오는 봄을 막지 못하고….”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이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윤상원 열사가 들불야학 제4회 체육대회(1980년 5월 4일)를 맞아 자필로 작성한 메모의 일부분이다. 윤 열사는 이 메모에서 “험악했던 세상사도 정의 앞에서 무릎을 끓여가는 요즈음에 구체적인 투쟁의 장을 찾아 헤매는 졸업 강학 및 졸업생 여러분 몸성히 잘 있는지요?”라며 1980년에 찾아온 ‘서울의 봄’, 이른바 민주화에 대한 희망을 적었다. 이어 윤 열사는 “들불 선배님들 및 음으로 양으로 저희 들불을 지켜봐주신 외부 인사들 덕분에 저희 야학은 아무 일없이 잘되어 가고 있답니다”라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들불열사들의 희생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설립된 사단법인 들불열사기념사업회는 15년 동안 열사들의 메모, 사진, 일기 등 660여 점을 수집했다. 윤 열사의 메모는 그의 유품 27개 중 1개인 노트에 적혀있었다. 최근 처음으로 공개된 이 메모는 1980년 4월 준비하던 체육대회를 들불야학 식구들에게 알리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상호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80년 5월 초 광주 서구 광천동에 사는 청년들과 들불야학 식구들이 체육대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며 “5·18 기간 동안에 윤상원 열사의 자필 메모가 없는 것을 감안하면 5·18과 가장 가까운 시기에 작성된 친필메모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면(현재 광주 광산구 임곡동) 천동마을에서 태어난 윤 열사는 광주 살레시오고를 졸업하고 삼수 끝에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외무고시를 준비하며 평범한 대학 생활을 하던 그는 학교 선배 김상윤 씨의 권유로 역사공부를 시작했고, 경제발전 이면에 신음하던 노동자의 삶을 접하며 변화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혔다. 1978년 2월 주택은행 서울 봉천동지점에 취업했지만, 윤 열사의 동생 태원 씨(62)는 “형님은 주택은행에 취업할 때부터 1년 뒤 사회운동에 헌신하겠다는 신념이 확고했다”고 회고했다. 윤 열사는 1978년 9월 자신의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와 들불야학 강학(교사)들을 만났다. 당시 들불야학 교실은 광천동 성당과 광천시민아파트 C동 3층 등 두 곳에 있었고, 학강(학생) 20~30명이 2개 반에서 하루에 2시간씩 공부했다. 윤 열사는 이듬해 1월부터 광천동 공장과 양동 신협에서 일하며 강학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윤 열사는 당시 광천시민아파트 B동 1층에 자취를 했다. 33㎡ 넓이의 방에 나무합판을 세워 절반으로 쪼갠 방이었다. 통금이 있던 때라 강학들과 학생들은 늦은 시간이 되면 윤 열사의 방에서 잠을 잤다. 윤 열사의 방은 들불야학 식구들의 사랑방이자 학습 공간이었다.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조치를 전국으로 확대하며 학생, 정치인, 재야인사 등 2699명을 체포했다. 다음날 광주에서 계엄군이 잔혹한 진압에 나섰지만, 저항할 지도 세력이 사실상 전무한 상태였다. 이때 윤 열사 등 들불야학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 5·18을 이끌었다. 5월 25일 학생수습위원회에서 새로 편성된 항쟁지도부(민주투쟁위원회)의 대변인을 맡은 윤 열사는 1980년 5월 26일 기자회견을 열고 외신기자들에게 계엄군의 학살 사실을 알렸다. 이어 5월 27일 최후의 순간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이 쏜 총에 눈을 감았다. 전용호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자문위원은 “윤 열사는 5·18 당시 광주를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신념을 지키고 실천한 시민운동가”이라고 말했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22-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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