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인

황규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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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4~2026-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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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터 비키니] ‘4강 신화’ 정현이 테니스 잘하는 이유? 키 크니까!

    진짜냐고요? 네. 정현(22·한국체대)이 테니스를 잘 하는 이유는 키(188㎝)가 커서입니다. 정말이예요.선수들의 키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농구나 배구도 아닌데 테니스에서 키가 무슨 상관이냐고요? 아닙니다. 테니스 역시 키가 중요합니다. 일단 세계랭킹별 키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랭킹이 높은 선수일수록 키도 큽니다. 이건 키가 클수록 많이 이겼다는 뜻이겠죠? 이 역시 그렇습니다. 이를 알아보려고 남자프로테니스(ATP) 웹사이트에서 1998년부터 지난해까지 20년 동안 4대 메이저 대회(호주오픈, 프랑스오픈, 윔블던, US오픈) 남자 단식 경기 결과를 모두 조사했습니다. 이 중 선수 키를 확인할 수 있는 경기는 총 1만 1경기. 이 중 58.1%(5806경기)에서 키카 큰 선수가 이겼습니다.테니스 선수들 키도 갈수록 커지는 추세입니다. 1998년 4대 메이저 대회에 참가한 남자 선수의 키는 평균 184.9㎝였습니다. 지난해에는 187.2㎝로 2.3㎝ 늘었습니다. ATP 프로필에 자기 키를 188㎝라고 밝힌 정현은 평균보다 큽니다. 또 지난해 4대 메이저 단식에 참가한 선수 키 분포를 보여주는 히스토그램을 보면 정현이 속한 185~190㎝ 구간에 가장 많은 선수가 속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정현 전에 한국 테니스를 대표했던 이형택(42)은 어떨까요? 이형택은 180㎝. 그가 한국 최고 랭킹(세계 36위)을 세웠던 2007년 메이저 남자 단식 참가 선수 평균 185㎝보다 5㎝가 작았습니다. 키 큰 선수가 테니스를 할 때 유리한 건 서브 때문입니다. 키가 크면 보통 팔도 더 길기에 서브를 더 높은 위치에서 내리 꽂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네트에 걸릴 확률도 줄어 첫 번째(퍼스트) 서브에서 강점을 지닐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날아온 공은 바닥에 튄 다음에도 더 높게 치솟습니다. 그래서 상대 선수는 리턴 위치를 잡을 때 애를 먹습니다.26일 호주오픈 4강에서 정현과 맞대결을 벌일 로저 페더러(37·스위스·랭킹 2위). 정현이 같이 경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할 수 있는 ‘테니스 레전드’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또 압니까. 적어도 키는 정현이 페더러(185㎝)보다 3㎝ 더 큽니다. 키가 크면 테니스를 더 잘한다는 이 분석 결과가 이번 경기에는 딱 맞아떨어지기를 꿈꿉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8-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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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터 비키니]‘4강 신화’ 정현, 세계랭킹 29위↑…역대 韓 선수들과 비교해보니

    ‘한국 테니스 간판’ 정현(22·한국체대·세계랭킹 58위)이 한국 테니스 역사상 세계랭킹이 가장 높은 선수가 됐습니다. 정현은 24일 호주 멜버른 로드레이버 아레나에서 열린 호주오픈 남자 단식 8강전에서 테니스 샌드그런(27·미국·97위)을 3-0(6-7, 7-6, 6-3)으로 완파하고 대회 4강에 진출했습니다. 현재 랭킹 포인트 857점인 정현은 이번 승리로 랭킹 포인트 615점을 추가로 확보했습니다. 합계 1472점. 정현은 다음 주 남자프로테니스(ATP)에서 세계랭킹을 발표할 때 1472점으로 세계 29위에 오릅니다. 이는 이형택(42)이 2007년 8월 6일 기록한 36위를 뛰어 넘는 한국 선수 최고 기록입니다. 한국 남자 테니스 선수 중 최초로 세계랭킹 300위 안에 이름을 올린 선수는 김봉수(58)입니다. 그는 1988년 1월 4일 300위를 기록했고, 1998년 12월 11일 129위까지 랭킹을 끌어올렸습니다. 김봉수는 총 189주 동안 한국 선수 최고 랭킹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는 이형택(631주)에 이어 한국 선수 가운데 두 번째로 긴 기간입니다.세 번째로 길게 한국 선수 최고 랭킹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선수가 바로 정현입니다. 더욱 고무적인 사실은 정현이 아직 22세라는 점입니다. 이형택이 22세이던 1998년 1월 그의 세계 랭킹은 362위에 그쳤습니다.정현은 과연 세계랭킹을 어디까지 끌어올릴까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8-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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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월 17일]‘이 아비는 아무 할 말이 없다이’…잊을 수 없는 1987년의 기억

    16일 600만 관중을 돌파한 영화 ‘1987’에는 물 고문을 받다 숨진 고(故) 박종철 열사의 유해를 아버지와 형이 강물 위에 뿌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를 본 전국의 많은 아버지들이 “이 장면에서 가장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1987년 오늘(1월 17일)자 동아일보 창(窓) ‘이 아비는 아무 할 말이 없다이’는 실제 이날 현장을 독자에게 소개했다. 당시 이 기사를 쓴 황열헌 기자는 현재 정세균 국회의장 비서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아래는 당시 기사 원문.《15일 오후 6시경 서울 중구 황학동 경찰병원 영안실. 치안본부 대공수사2단에서 교내 시위 혐의 등으로 조사를 받다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 군(21·언어학과 3년)의 분향실이 마련된 이곳의 경비는 삼엄하기 짝이 없었다.기자들이 도착, 분향실로 들어가려 하자 건장한 체구의 경찰관들이 몸으로 막고 나섰다. 기자들이 분향실 안을 향해 “유가족 누구 없습니까”라고 소리치자 건장한 사내들 뒤편에 웅크리고 앉아 흐느끼고 있던 박 군의 누나 은숙 양(24)이 나섰다.“13일 밤 철이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하숙비를 좀 보내달라고…. 그런데 집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거든요…” 박 양은 목이 메어 잠시 말을 끊었다.“그런데… 14일 저녁 낯선 남자가 찾아와 아부지를 데리고 상경한 뒤 오늘 아침 아부지한테서 염불 책과 철이 사진을 가져오라는 전화가 왔잖아요.” 박 군의 누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이때 아버지 박정기 씨(57)가 실성한 모습으로 분향실 안으로 들어왔다.“뭐요. 뭘 알고 싶소. 우리 자식이 못 돼서 죽었소.” 박 씨는 내뱉듯 외쳤다.기자가 “아드님을 왜 못 됐다고 하십니까”고 묻자 박 씨는 “이놈의 세상은 똑똑하면 못 된 거지요”라고 고함지르듯 말하고 고개를 떨군 뒤 박 양을 데리고 나갔다.16일 오전 8시 25분 박 군의 사체는 영안실을 떠나 벽제화장장으로 옮겨져 오전 9시 10분 화장됐다.두 시간여 화장이 계속되는 동안 아버지 박 씨는 박 군의 영정 앞에서 정신 나간 듯 혼잣말을 계속했고 어머니 정차순 씨(54)는 실신, 병원으로 옮겨졌다.화장이 끝난 박 군의 유골은 분골실로 옮겨졌고 잠시 뒤 하얀 잿가루로 변해 박 군의 형 종부 씨(29)의 가슴에 안겨졌다.종부 씨는 아무 말 없이 박 군의 유해를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경찰이 마련한 검은색 승용차에 올랐다. 잠시 후 일행은 화장장 근처의 임진강 지류에 도착했다.아버지 박 씨는 아들의 유골 가루를 싼 흰 종이를 풀고 잿빛 가루를 한줌 한줌 쥐어 하염없이 샛강 위로 뿌렸다.“철아, 잘 가그래이…” 아버지 박 씨는 가슴 속에서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박 씨는 끝으로 흰 종이를 강물 위에 띄우며 “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다이”라고 통곡을 삼키며 허공을 향해 외쳤다. 이를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은 흐느끼거나 눈시울을 붉혔다.박 군의 유골 가루를 뿌린 후 박 군의 아버지를 태운 승용차는 경찰병원에 들러 박 군의 부검을 지켜본 삼촌 월길 씨를 태우고 시내를 한동안 헤맨 뒤 치안본부 대공분실 마당 안으로 사라졌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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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터 비키니]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서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제일 강조한 건 역시 ‘국민’이었습니다.문 대통령이 1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앞서 1723개 낱말로 된 신년사를 발표했습니다. 이 가운데 ‘국민(국민들)’이 64번으로 가장 많이 등장했습니다. 다음으로 많이 사용한 정부(각각 27번)의 두 배가 넘습니다. 세 번째는 25번 등장한 ‘우리’였습니다.한 낱말이 어떤 낱말과 함께 자주 등장했는지 살펴보는 ‘의미망 분석’ 결과를 통해서도 문 대통령이 국민을 강조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 대통령이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국가에 내어준 덕에 촛불(혁명)을 이뤄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대한민국을 안전한 국가로 만들겠다’는 대 국민에게 약속도 도드라집니다. 같은 방식으로 ‘북한 핵 문제는 대화로 풀어 한반도 평화를 이끌어 내겠다’고 강조한 대목도 드러납니다. ‘경제’에서 제일 강조한 건 역시 ‘일자리’였습니다.문 대통령은 삶(21번), 일상(10번), 가족(3번), 생활(2번)처럼 많은 이들이 좀 더 가까이 두고 싶은 낱말을 총 38번 사용했습니다. 문 대통령 신년사처럼 2018년에는 온 국민이 삶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8-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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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터 비키니]상대 블로킹에 가장 많이 ‘찍힌’ 선수는?

    현재 프로배구 블로킹 1위는 세트당 0.92개를 기록 중인 현대캐피탈 신영석(32·사진)입니다. 여기서 블로킹 1위는 상대 공격을 가장 많이 가로막았다는 뜻. 그러면 거꾸로 블로킹에 가장 많이 가로막힌 선수는 누구일까요?한국배구연맹(KOVO)에 따르면 8일 현재 2017~2018 도드람 V리그 남자부 경기에서 가장 블로킹을 많이 당한 선수는 우리카드 파다르(22·헝가리)입니다. 파다르는 총 87세트를 뛰면서 94번 상대 블로킹에 당했습니다. 블로킹에 가로막힌 누적 횟수도 1위고, 세트당 숫자(1.08개)도 1위입니다. 위에 있는 표에서 외국인 선수가 1~5위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건 공격 시도 자체가 많았기 때문. 그래서 상대 블로킹에 당할 일도 많았던 겁니다. 그러면 전체 공격 시도 중에서 블로킹에 당한 비율을 따져 보면 누가 가장 많이 당했을까요?네, 사진으로 확인하신 것처럼 삼성화재 박철우(32)가 1위입니다. 박철우는 현재까지 공격을 총 561번 시도했는데 그 중 13.4%에 해당하는 75번이 상대 블로킹에 가로막혀 삼성화재 코트에 떨어졌습니다. 참고로 현재까지 남자부 전체 공격 시도(1만4999번) 중 9.1%(1369번)가 상대 블로킹으로 끝이 났습니다. 박철우는 리그 평균보다 47.3% 더 자주 블로킹에 당했던 겁니다.박철우는 데뷔 이후 현재까지 총 796번 상대 블로킹에 당했습니다. 앞으로 상대 블로커가 박철우의 공격 시도를 4번만 더 가로막으면 박철우는 OK저축은행 김요한(33)에 이어 프로배구 역사상 두 번째로 상대 블로킹에 800번 이상 당한 ‘토종’ 선수가 됩니다. 김요한은 현재까지 총 855번 상대 블로킹에 당했습니다. 외국인 선수 중에서는 V리그에서 네 시즌 동안 활약한 안젤코(35·크로아티아)가 804번으로 상대 블로킹에 가장 많이 찍힌 선수입니다.이렇게 상대 블로킹에 당한 걸 보면 OK저축은행 김세진 감독이 외국인 선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외국인 선수 모두 상대 블로킹 앞에서 기를 펴지 못했기 때문. 올 시즌 첫 번째 외국인 선수였던 브람(29·벨기에)은 현재까지도 외국인 선수 가운데 가장 많이 블로킹에 걸린 선수로 이름을 남기고 있습니다. 새로 온 마르코(31·포르투갈)는 현재 공격 점유율(10.1%)이 기준 이하라 표에서 이름이 빠졌지만 비율 자체는 16%로 국적을 떠나 1위입니다.한편 여자부에서는 KGC인삼공사 알레나(28·미국)가 누적 횟수 76번, 세트당 1.21개, 공격 시도 대비 비율 7.1%로 모두 상대 블로킹에 가장 많이 당했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8-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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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터 비키니]경상도 남성은 왜 표준어를 ‘거부’할까

    “부산에 오니까 참 기분이 윽수로 좋습니더.”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이던 지난해 4월 22일 고향 부산을 찾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산에서만 고향이라 이렇게 사투리(방언)를 쓴 게 아닙니다. “싸우지 않는 정치”를 하겠다는 발언이 경상 방언 때문에 [사우지 않는 정치]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문 대통령만 그런 게 아닙니다. 영남 출신 정치인들은 사투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필요에 따라 능숙하게 표준어를 쓰는 호남 출신 정치인과 대비되는 대목입니다. MBC에서 정치 다큐멘터리 드라마 ‘격동 50년’을 연출한 오성수 PD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정치인들이 하는 말을 녹음해 잘 들어보면 영남 쪽 의원들은 의원총회 등 내부 회의부터 국회 상임위까지 대부분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만, 호남 쪽 의원들은 사투리를 잘 쓰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방언을 쓰는 게 절대 잘못은 아닙니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내는 ‘국민의 언어 의식 조사 보고서’ 가장 최신(2015년) 버전에 따르면 ‘평소에 사용하는 말’로 표준어를 꼽은 건 54.5%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45.5%는 평소에 그 지역 방언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겁니다. 경상도 사람들도 자녀는 표준어를 사용하길 원합니다. 같은 조사 참여자에게 ‘자녀가 지역 방언과 표준어를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일 경우 어느 것을 사용하길 바라십니까’라고 묻자 경상권에서도 ‘표준어만 사용하기를 바란다’(20.9%)는 응답이 ‘지역 방언만 사용하기를 바란다’(1.8%)는 대답을 압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경상도 부모들 스스로는 표준어 사용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가 뭘까요? 정답은 표준어를 사용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라고요? 사회언어학적으로는 확실히 그렇습니다.● 어쨌든 내 고향은 부산 정치인 출신 지역을 영·호남으로 나누면 김태정 전 법무부 장관은 재미있는 케이스입니다. 법조인 신상 정보를 모은 ‘한국법조인대관’을 보면 1997년 이전판에는 김 전 장관의 고향이 ‘부산’이라고 돼 있었습니다. 그가 ‘부산 사투리’를 썼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그런데 1998년 김대중(호남) 정권이 들어서자 고향이 전남 장흥군으로 바뀝니다. 김 전 장관이 거짓말을 한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김 전 정관은 검찰총장 시절이던 1997년 8월 18일에 나온 동아일보 인터뷰 기사에서 출신 지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아버님은 전남 장흥군 부산면 출신입니다. 우연히 부산(釜山)과 한자만 다르지(장흥군 부산면은 夫山) 한글은 같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가난 때문에 젊은 시절 부산으로 이사, 사업을 시작했고, 나는 부산 영도구에서 태어났습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고 할 때도 부산(釜山)이 맞았고, ‘아버지 고향이 진짜 고향’이라고 표현할 때도 부산(夫山)이 맞았던 겁니다.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분명 그렇지만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지 않나요? ● 언어는 권력이다 김 전 장관의 고향 문제를 이해하려면 사회언어학에서 쓰는 ‘위세(prestige)’라는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윌리엄 라보프(사진)라는 언어학자가 고안한 이 개념은 의미 그대로 어떤 언어 형태와 다른 형태 사이에 존재하는 지위와 권세 차이를 나타냅니다. 방언을 예로 들자면 사실상 표준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사투리’가 다른 지역 방언보다 위세를 떨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위세형’ 언어를 선호합니다. 그러니 ‘나는 사투리를 계속 쓰더라도 자식아 너는 표준어를 쓰거라’하는 조사 결과가 나타나는 겁니다. 따라서 만약 표준어보다 더 위세 있는 언어 형태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 쪽을 선호하게 될 겁니다. 네, 그게 바로 경상 방언입니다. 이번에는 이유가 간단합니다. 경상 방언이 ‘권력의 표준어’니까요. 역대 한국 대통령 12명 가운데 7명(58.3%)이 바로 영남 출신.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지만 경북 포항시에서 자란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포함하면 전체 대통령 중 3분의 2가 경상 방언 구사자입니다. 그렇다 보니 경상 방언 구사자는 사투리를 ‘포기’해야 할 이유를 잘 느끼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반면 정치적으로 소외받은 호남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고향 말씨를 숨겨야 했습니다. 그렇게 전국 곳곳에서 경상 방언은 넘쳤지만, 전라 방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라 방언이 복권(復權)된 현재는 어떨까요? 언어 의식 조사에 따르면 전라권 거주자는 같은 방언을 쓰는 사람과 대화할 때 ‘매우 편하고 친근하다’(48.7%)고 느끼는 이들이 제일 많았지만, 경상권에서는 ‘별 느낌이 없다’(51.9%)는 답변이 1위였습니다. 소외 받은 이들은 서로를 보듬지만 권력을 쥐고 사람에게는 권력이 당연해 보이기 때문일까요?● 그 남학생은 왜? 사실 정치인만 그런 게 아닙니다. 새 학기가 되면 분명 서울로 진학한 대학 신입생 가운데 발표 시간에 방언 때문에 얼굴을 붉히는 ‘경상도 출신’ 남학생이 나올 겁니다. 네, 남학생이라고 썼습니다. 분명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사투리가 더 심합니다. 심지어 여학생 중에는 먼저 고향을 묻지 않으면 영남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기 힘든 경우도 많지만, 남학생은 주변에 경상 방언을 전파하는 사례도 많습니다. 실제 연구 결과를 봐도 경상 지역 여성이 남성보다 표준어에 더 가까운 발음을 구사합니다. 경상 방언 특징 가운데 하나는 홀소리(모음) ‘ㅓ’와 ‘ㅡ’ 사이 구분이 약하다는 것. 경상 방언 구사자를 흉내 낼 때 ‘음악’을 [어막]처럼 소리 내는 것 알고 계시죠? 고려대 연구진은 이런 차이를 알아보려고 서울과 대구에 거주하는 20대 남녀에게 ‘어린’, ‘언약’, ‘얼음’, ‘은행’, ‘은혜’, ‘을일(乙日)’ 같은 낱말을 발음하도록 한 뒤 지역에 따라 ㅓ와 ㅡ가 어떤 주파수로 나타나는지 분석했습니다. 그러니까 ㅓ와 ㅡ 사이 주파수 차이가 크면 클수록 두 소리를 잘 구분해 발음하는 겁니다. 그 결과 대구에 사는 20대 남성은 이 차이가 234.6로 여성(580.2)의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이 소리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겁니다. 서울 지역하고 비교하면 남성 쪽은 서울과 대구 차이가 2.33배로 여성(1.21배)보다 컸습니다. 대구 지역 여성이 남성보다 서울 지역 발음과 더 비슷한 소리를 냈다는 뜻입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논문 ‘대구 방언 20대 화자의 단모음 실현 양상에 나타난 표준어 지향성의 성별적 차이’를 참고하시면 됩니다.)대구만 그런 건 아니고 경상 방언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물론 한국어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사회언어학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표준어에 더 가까운 언어 형태를 쓰는 건 아주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표준어뿐 아니라 모든 ‘표준형’에 있어 그렇습니다. 월트 울프람이라는 사회언어학자는 1969년 미국 디트로이트에 사는 흑인을 대상으로 홀소리 뒤에 [r]를 얼마나 발음하는지 계층과 성별에 따라 조사했습니다. 이 때는 홀소리 뒤에 [r]를 발음하는 게 표준형입니다. 조사 결과 모든 계층에 걸쳐 여성이 남성보다 [r]를 생략하는 비율이 낮았습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여성이 모든 계층에 걸쳐서 표준형을 사용하는 비율이 더 높았던 겁니다. (위 표에서 중산층은 ‘Middle Class’, 노동계층은 ‘Working Class’를 번역한 표현입니다.) 왜 이렇게 남성은 비표준형을 선호할까요? 영국 언어학자 피터 트루질(사진)은 “비표준형은 ‘남성성’ 같은 특정 집단의 가치를 부각시켜 유대감을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풀이했습니다. 말이 어렵죠? 좀 더 풀이해 설명하면 비표준형은 ‘거친’ 느낌을 풍기고 이 때문에 남성 화자에게 좀더 매력적으로 비친다는 뜻입니다. 이 때문에 남성은 표준어 사용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여성은 이런 이미지를 피하려 하기 때문에 표준형을 선호합니다.● 사투리 고쳐야 하나? 그렇게 영남 출신 남성이 ‘학실히’ 가장 표준어와 거리가 먼 사람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역 방언을 쓰는 게 절대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고쳐야 할 건 사투리가 아니라 ‘사투리는 수준이 낮은 언어’라는 인식입니다. 그래도 언어 의식 조사에 따르면 ‘표준어든 지역 방언이든 어느 것을 사용해도 무방하다’(31.4%)는 의견보다 ‘때와 장소에 따라 표준어와 지역 방언을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39.0%)는 답변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니 지역 방언이 ‘틀린 언어’는 아니라고 해도 ‘다른 언어’로서 표준어를 배울 필요 정도는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냥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말입니다. 말이라는 건 자기 생각이나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고 쓰는 거고, 지역 방언보다 표준어를 쓸 때 그 말을 오해 없이 이해하는 사람이 더 많을 테니까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8-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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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터 비키니]한국인이 해외여행 세계 1위? 실제로 찾아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습니다. 지난 주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한국인이 해외여행을 가장 많이 간다는 내용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국은 올해 연인원을 기준으로 총인구 대비 출국률 50%를 넘어설 전망인데 이 비율이 지난해까지 40%대로 1위였던 대만을 제쳤을 것이라는 얘기였습니다.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한국 사람이 해외로 나가려면 배나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 섬나라 대만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자동차만 타면 아니 걸어서도 국경을 넘을 수 있는 나라도 적지 않습니다. 육지로 된 국경을 건너면서 기념 촬영을 하는 건 한국과 (역시 섬나라인) 일본 사람밖에 없다는 우스개를 들었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그래서 세계은행에서 세계 여행(International Tourism) 출국자 숫자(Number of Departures)를 찾아봤습니다. 그 결과….한국인이 세계에서 해외여행을 제일 많이 한다는 건 역시 ‘새빨간 거짓말’에 가까웠습니다.세계은행에서 출국자 숫자를 보유하고 있는 건 총 105개국. 지난해(2016년) 기준으로 한국에서 출발한 해외여행은 총 2238만3000명으로 전체 인구(5124만5707명)의 43.6% 수준이었습니다. 이 비율은 105개국 중 46에 해당합니다. 평균 이상인 건 맞지만 세계 최고는 물론 그 근처에 있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이 46.6%니까 한국은 OECD 평균보다도 해외여행을 적게 했습니다.그럼, 사람들이 한국하고 열심히 열심히 비교한 대만은 어떨까요? 세계은행은 유엔 산하 기구이고 대만은 1971년 이후 유엔 회원국이 아니기 때문에 세계은행에서는 대만 자료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만 교통부 관광국 홈페이지에서 확인해 보니 지난해 대만을 떠난 출국자는 총 1458만8923명이었습니다. 지난해 대만 인구가 2355만6706명이었으니까 61.9%가 대만을 벗어난 셈입니다. 한국이 대만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습니다.게다가 대만이 세계 1위인 것도 아닙니다. 인구 대비 출국률이 가장 높은 곳은 홍콩입니다. 2016년 홍콩 인구는 734만6700명. 홍콩에서 해외로 나간 사람은 9175만8000명이었습니다. 인구와 비교하면 12.5배가 해외로 떠난 셈. 이건 세계은행이 홍콩에서 중국 본토나 마카오를 오가는 사람도 출국자로 집계했기 때문입니다.독립국 가운데서는 룩셈부르크가 298.8%로 1위입니다. 유럽은 나라와 나라가 서로 맞붙어 있는 일이 많기 때문에 당연히 나라 사이를 오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유럽연합(EU) 회원국은 평균적으로 전체 인구 대비 81.8%가 해외로 떠난 적이 있습니다. 출국자 절대 숫자로 따졌을 때는 물론 중국에서 1억1687만 명이 출국해 1위였습니다. 한국에서 출국한 사람 숫자를 같은 방식으로 따지면 13위가 됩니다. 단, 중국은 인구가 워낙 많기 때문에 인구 대비 비율로 따졌을 때는 8.5%(80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일본도 12.8%(72위)로 전 세계 평균(18.5%·2015년 기준)보다도 해외여행을 떠나지 않는 나라였습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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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2월 26일]‘백지 광고 사태’ 때 격려 광고 1호는 누구?

    ‘백지(白紙).’ 1920년 4월 1일 이후 2017년 12월 26일자까지 2만9973번 세상에 나온 동아일보를 두 글자로 줄이면 이렇게 쓸 수 있다.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생(1912~2002)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사건으로 유명한 그해 8월 25일자 동아일보 석간 2면도 오른쪽은 텅 비었다. 기사 삭제를 감수하면서 조선총독부 검열에 맞선 결과다.‘독자(讀者).’97년 동아일보 역사를 다른 두 글자로 줄이면 이렇게 쓸 수 있다. 독자라는 든든한 ‘빽’이 있었기에 동아일보는 ‘불편부당(不偏不黨)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제작정신을 지켜올 수 있었다.그래서 백지와 독자가 만난 ‘백지 광고 사태’야 말로 동아일보가 걸어온 길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자유언론 실천결의문일간지의 가장 중요한 임무를 꼽으라면 역시 매일 엄선한 뉴스를 독자 여러분께 전달하는 것. 하지만 1974년 10월 24일자 신문은 그날 세상에 나가지 못했다. 대신 다음날 전날 신문을 배달하게 돼 사과드린다는 사고(社告)를 1면에 내보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당시 박정희 정권은 소휘 ‘유신헌법’을 앞세워 언론 길들이기에 나섰다. 정부에 비판적인 보도를 못하도록 아예 기관원이 언론사에 출입하며 기사에 쓴 낱말 하나하나를 모두 검열한 것. 이에 동아일보 기자들은 이날 ‘자유언론수호대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했다.“(전략)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사회 존립의 기본요건인 자유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1. 신문, 방송, 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1.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1. 언론인의 불법연행을 일절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 연행이 자행되는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이 결의문 지면 게재 여부를 두고 찬반이 맞서 당일이 아니라 이튿날 신문을 배달했던 것이다. 결의문 채택 이후 동아일보는 군사정권 아래 탄압받고 있던 인권운동가나 야당 인사 등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이에 분노한 박정희 정권은 각 기업체를 호출해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지 말라고 요구했다. 결국 그해 12월 16일경부터 광고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회사가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당시 야당 신민당에서 12월 26일 긴급당직자 회의를 열고 ‘광고 탄압은 새로운 수법의 언론 탄압’이라고 규정했지만 줄어드는 광고 물량까지 채울 수는 없었다.결국 그날(1974년 12월 26일)자 동아일보 4, 5면 하단에 광고를 내보내겠다는 회사를 찾지 못해 결국 백지 상태로 세상에 나갔다. 자매지 ‘신동아’, ‘여성동아’ 구독 광고가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전까지 동아일보는 최소 일주일 정도 광고 예약이 밀려 있던 상황이었다. ●광고국장 명의로 내보낸 광고언론사 역시 ‘회사’이기 때문에 언론사 구성원들 역시 이슬만 먹고 살 수는 없다. 언론사에 있어 광고는 곧 ‘생명줄’이다. 유신정권이 광고주를 압박한 것 역시 동아일보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는 의도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버티려면 동아일보가 기댈 곳은 독자밖에 없었다. 동아일보는 그해 12월 30일 김인호 당시 광고국장(1923~2016) 명의로 ‘광고 모집 광고’를 내보냈다. 이 광고에 등장하는 ‘아래와 같은 (광고)’는 이날 1면 하단에 나간 ‘언론자유와 기업의 자유’를 가리킨다. 이 글을 쓴 홍종인 선생(1903~98)은 조선일보 편집국장, 주필, 부사장, 회장 등을 지낸 원로 언론인이었다.그렇다면 홍 선생이 쓴 이 글이 동아일보 독자가 보낸 첫 번째 ‘격려광고’일까. 이에 대해 김 국장은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그 글은 원래 편집국으로 들어온 칼럼이었는데 1면 하단 자리에 실은 것”이라며 “격려광고라면 광고국에 광고를 의뢰하고 광고료도 내야 하는데 그 글을 그렇지 않았다”고 설명했다.이어 “그날 처음으로 격려광고를 모집한다고 공지를 냈는데 어떻게 동시에 격려광고가 실릴 수 있었겠느냐”며 “(광고 문구에 등장하는) ‘아래와 같은’도 그 문안의 그 다음 구절을 가리켰을 뿐”이라고 덧붙였다.●격려광고 1호는 DJ김 국장은 계속해 “신년호에 전면광고를 내기로 했던 회사(GM코리아)가 광고를 돌연 취소해 격려광고를 싣기로 했던 것”이라며 “모집광고가 난 것을 보고 격려광고를 의뢰한 사람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1호”라고 말했다.당시 가택연금 상태였던 김 전 대통령은 총무비서였던 김옥두 전 의원(79)을 통해 격려광고를 전달했다. 단, 당시 정치상황을 고려해 이 광고를 김 전 대통령 실명이 아니라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나갔다.이후 그해 7월 16일자부터 다시 광고를 정상적으로 내보낼 때까지 동아일보에 들어온 격려광고는 총 1만351건에 달했다. 금액으로는 5억6755만 원. 한국은행에 따르면 이는 지난해 11월 기준으로 약 57억3850만 원에 해당하는 돈이다.역시 그랬다. 백지를 채워 기사를 완성하는 건 언론사지만 그 기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건 바로 독자 여러분이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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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2월 23일자]‘TK’라는 낱말 만든 사람은?

    이제 ‘TK’라는 표현을 들으면 자동으로 ‘대구경북’을 떠올리는 분들이 대부분일 거다. PK 역시 축구 페널티킥을 가리키는 약자보다는 부산(울산)경남을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리라고 짐작한다. 이 표현을 처음 쓰기 시작한 건 언제일까?동아일보에 처음 TK가 등장한 건 30년 전 오늘(1987년 12월 23일)자였다. 이날은 현행 헌법으로 치른 첫 번째 대통령 선거(1987년 12월 16일)가 끝나고 일주일째 되는 날. 김진현 당시 동아일보 논설위원실장은 당시 당선인 신분이던 노대우 전 대통령을 향해 ‘노태우 선생에게’라는 편지 형식 칼럼을 썼다. 이 칼럼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둘째는 외로운 대통령이 돼달라는 것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대구 경상북도(앞으로 TK라 부르겠습니다) 인맥과 손을 끊어달라는 것입니다.”한국언론진흥재단 기사통합검색(KINDS) 서비스에서 찾아보면 다른 신문에 이 표현이 처음 등장한 건 모두 1988년 이후다. KINDS에 기사를 제공하지 않는 조선·중앙일보 역시 각사 홈페이지 검색 결과 동아일보보다 늦게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김 실장이 1990년 과학기술처 장관이 됐을 때 “‘TK’ 신조어 만든 논객”이라고 그를 소개한 동아일보 기사가 신빙성이 높은 이유다. PK는 물론 TK를 준용해 만든 표현이다.현재 세계평화포럼 이사장인 김 실장은 객원논설위원으로 동아일보에 ‘동아광장’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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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터 비키니]걱정 많은 사람이 머리가 좋다? 진실은…

    혹시 걱정이 너무 많아 걱정이십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걱정이 너무 많아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이 너무 많다는 건 ‘머리가 좋다’는 뜻일지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걱정도 팔자’일 뿐 아니라 ‘걱정도 지능’이기도 한 겁니다. 정말입니다. 미국 뉴욕주립대 다운스테이트 메디컬센터 제레미 코플란 교수 연구진은 범불안장애(GAD·Generalized Anxiety Disorder)를 앓고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지능지수(IQ) 검사와 걱정지수(?) 검사를 실시했는데요. 걱정지수는 미국 펜실베니아 대 걱정 설문(PSWQ·the Penn State Worry Questionnaire) 조사를 통해 측정했습니다. 그 결과 99% 신뢰 수준에서 IQ와 PSWQ 사이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쉽게 말하면 걱정이 많을수록 IQ가 높은 경향이 있었다는 뜻이고, 뒤집어 말하면 IQ 높을수록 걱정이 많은 경향이 있었다는 뜻입니다.이건 왜일까요? 코플란 교수는 “사람들은 흔히 걱정이 너무 많은 건 부정적으로 보고 지능이 높은 건 긍정적으로 보지만 걱정이 사실 우리를 위험한 상황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며 “걱정이 많은 사람은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덕에 생존률이 높다. 걱정이 많은 게 생존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걱정이 지능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똑똑이’ 가운데 돈 버는 데는 영 재주가 없는 이들이 많은 이유도 여기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큰 돈을 만지려면 위험 부담을 이겨내야 하는데 똑똑한 사람은 이런 위험을 피하려 할 테니까요. 실제로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제이 자고르스키 박사가 베이비붐 세대(1946~64년 출생) 740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IQ와 가처분소득 사이에서 뚜렷한 상관관계를 찾지 못했습니다. 자고르스키 박사는 “한마디로 똑똑한 것과 부자가 되는 것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봐도 좋다. 교수 중에는 아주 똑똑한 사람이 많다. 하지만 전 세계를 막론하고 대학교 교직원 주차장에 (최고급 차량인) 롤스로이스나 포르쉐가 즐비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며 “적어도 돈에 관해서는 지능이 낮다고 핸디캡을 안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똑똑하다고 어드밴티지를 보유한 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주의하셔야 할 건 이번에는 IQ와 수입 사이에 상관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똑똑해서 돈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돈이 없는 이유를 ‘내가 똑똑해서…’라고 생각하시면 똑똑한 게 아닙니다. 걱정 가운데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많을 수 있지만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사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데 내 돈이 부족할 뿐’이라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걱정이 행복을 여러분 곁에서 한 걸음 더 내쫓을 테니까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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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규인의 잡학사전]겨울만 되면 담배 냄새 유독 심한 까닭은?

    “겨울만 되면 담배 냄새가 유독 심하게 납니다. 특히 손에 담배 냄새가 심하게 배어서 문제입니다. 이번 겨울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냄새를 덜 풍기려고 아예 담배를 이렇게 피우고 있습니다(아래 사진 참조). 겨울에 담배 냄새가 심한 이유가 따로 있나요?” ─ 서울 보라매 공원에 서식 중인 야구 소년 P네, 이상합니다. 악취는 보통 여름에 그러니까 기온이 높을수록 더 심하게 마련입니다. 쓰레기 냄새도 그렇고 땀 냄새나 발 냄새도 그렇습니다.이건 기본적으로 냄새가 ‘확산(擴散)’이라는 분자 운동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확산은 기체 분자가 다른 기체나 액체 속으로 스스로 퍼져나가는 현상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학창시절 과학 시간에 배운 것처럼 온도가 높을수록 확산 속도도 빠릅니다. 그래서 얼핏 생각하면 기온이 낮은 겨울에는 냄새가 적게 퍼져야 하고 자연스레 담배 냄새도 덜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실제로 그렇습니다. 바깥에서는 겨울에 담배 냄새가 적게 납니다. 문제는 담배 냄새가 몸에서 나는 냄새라는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 몸은 피부를 통해 바깥으로 열에너지를 방출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열을 적게 내보냅니다. 그래야 바깥 기온이 낮아도 체온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냄새를 품고 있는 분자도 멀리 퍼지지 못한 채 피부 그리고 피부와 맞닿은 옷 속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다 따뜻한 실내로 들어오면 그제야 우리 몸이 열에너지를 내뿜고 냄새 분자도 확산을 시작합니다. 바깥에서 냄새를 품은 채 실내로 들어오는 셈입니다.게다가 겨울옷은 대부분 섬유 사이에 공기층을 만들어 보온 효과를 내는 방식입니다. 이 공기층 안에 우리 몸이 만들어낸 열은 물론 땀(습기)도 갇힙니다. 습기는 담배 냄새를 아주 잘 흡수합니다. (그래서 옷에서 밴 담배 냄새를 없애고 싶을 때는 습기가 많은 곳에 걸어두면 도움이 됩니다.) 이번에도 실내로 돌아오면 담배 냄새 분자가 퍼지게 됩니다. 담배를 쥐었던 손에도 온기와 습기가 있을 테니까 담배 냄새가 남는 원리가 이해가 가시죠? 담배 연기가 직접 들어가는 입안 역시 온기와 습기를 모두 품은 곳이니 더 설명하지 않아도 이유를 아시리라 짐작합니다.그래서 기본적으로 겨울철에 몸에 담배 냄새가 배는 걸 줄이시려면 바람이 많이 부는 곳에서 피우시는 게 좋습니다. 양치 또는 가글링도 담배를 피우고 나서 바로 하시는 편이 좋고요. 물론 아예 담배를 끊으시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던가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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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2월 19일자]결혼하려고 조선인이라고 속이던 일본 남성들

    전쟁통에도 아이는 태어난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청춘남녀가 만나면 사랑의 불꽃이 일게 마련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일제강점기 조선인과 일본인 청춘 남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서울의 일본인 사회가 커지면서 조선에서 일본인 남성과 조선인 여성이 만나는 경우도 늘어갔다. 그리고 그때도 지금처럼 모든 부부가 화목한 건 아니었다. 1924년 오늘(12월 19일)자 동아일보는 서울 용산경찰서에 도움을 청한 ‘꽃 같은 젊은 조선 여자’ 김매향 씨 사연을 다뤘다.당시 19세였던 그는 모토마치(元町·현 원효로)에서 일본인 남편 시마노 겐지(下野元治·31) 씨와 함께 살았다. 문제는 시마노 씨가 조선 사람이라고 속이고 결혼을 했다는 것. 게다가 가정폭력까지 저질렀다. 당시 동아일보는 “(남편이) 금수(禽獸) 같은 성욕을 마음대로 채우지 못하는 때는 무시로 구타하는 등 참기 어려운 고통은 날이 지날수록 커져 매향 씨가 여러 차례 집에서 도망쳤지만 그때마다 남편이 찾아 와 ‘같이 살지 않으면 너 죽고 나도 죽겠다’고 협박하기 때문에 용산서에 보호를 요청하려고 찾아왔다”고 전했다.이번에도 남편은 경찰서 안에까지 찾아와 매향 씨를 때렸다. 결국 경찰은 남편을 경찰서에 가두는 검속(檢束) 처분을 내리고 매향 씨는 돌려보냈다.이렇게 남편이 조선인이라고 속아 넘어간 건 매향 씨뿐만이 아니었다. 이로부터 보름 전(1924년 12월 4일자) 동아일보는 역시 19세였던 김도용 씨의 억울함을 전하고 있다.지금 서울 중구 오장동 인근인 하쓰네 초(初音町)에 살던 도용 씨는 경기 양주군 진접 면에 살던 야마자키 테츠조(山崎哲藏)라는 일본 사람과 결혼했다. 이번에도 중매쟁이는 결혼 전 야마자키 씨가 조선 사람이라고 속였다.문제는 이 중매쟁이가 사기 혐의로 경찰에 덜미가 잡히면서 발생했다. 두 사람 결혼 생활이 파탄을 맞자 야마자키 씨가 ‘결혼 비용 20원을 돌려 달라’며 도용 씨를 상대로 경성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것. 당시 동아일보는 “정조는 유린하도 혼수비를 청구(했다)”며 야마자키 씨를 비판했다.그렇다고 모든 조선인-일본인 부부가 이렇게 우여곡절을 경험한 건 아니다. 단, 이렇게 결혼한 부부는 남편이 조선인일 때도 자녀는 ‘일본인 같이 자라도록’ 일본 이름을 붙이는 등 일본식으로 키우는 게 일반적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문화사’)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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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터 비키니]신치용의 ‘몰방 배구’ 얼마나 위대했나

    한국 배구 역사상 어떤 인물이 가장 사랑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배구 팬마다 생각이 다를 터. 하지만 ‘애증(愛憎)’을 합쳐 따지면 신치용 프로배구 남자부 삼성화재 단장(62·사진)이 1위라는 데 별 이견이 없을 겁니다. 삼성화재 관계자는 18일 “신 단장이 모기업 정기 인사에 따라 단장 자리를 내놓고 상임고문으로 발령받았다”고 전했습니다.지난주 사석에서 신 단장과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이번 인사를 예견한 듯 “52년 만에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보통 회사원 정년을 감안하면 운 좋게 회사 생활을 오래했다. 일단은 배구 인생을 정리하고 싶다. 내가 배구 인생을 정리한다면 긴장하는 사람 많을 것”이라며 웃었습니다.마찬가지로 어떤 배구 스타일을 가장 좋아하는지도 배구 팬마다 의견이 다를 터. 하지만 ‘애증’을 합치면 ‘몰방(沒放)배구’가 1위라는 데 별 이견이 없을 겁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몰방을 ‘총포나 기타 폭발물 따위를 한곳을 향하여 한꺼번에 쏘거나 터뜨림’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여러분은 몰방 배구를 좋아하시나요? 삼성화재를 응원하시는 분들도 이 질문에 ‘네, 그렇습니다’하고 답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삼성화재 관계자도 저 표현을 썩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사석에서 만난 한 삼성화재 관계자는 “쇼핑몰에 갔더니 행사 이름이 ‘몰빵데이’더라. 그 업체하고 MOU(양해각서)를 체결해야 하나 고민했다”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죠. 몰방 배구에 찬성하든 안하든 ‘신치용 식 몰방 배구’가 참 대단한 스타일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거든요. 남자 배구 경기에서 한 선수가 올린 점수 상위 톱10을 뽑아보면 59점부터 49점까지 나옵니다. 한 선수가 한 경기에서 49점 이상을 기록한 건 총 33번. 이 중 20번(60.6%)을 삼성화재 선수가 해냈습니다. 몰방 배구에 비판적인 이들은 그냥 한 선수에게만 공을 띄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폄하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숙적’ 현대캐피탈을 비롯해 사실상 한국 프로배구 팀 모두가 이 스타일을 따라했지만 2014~2015 시즌 OK저축은행 이전까지는 그 어떤 팀도 삼성화재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몰방 배구는 한국 배구가 꼭 넘어야 할 숙제 같은 존재였지만 그 누구도 쉽게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7시즌 연속 우승 가도를 달리던 삼성화재를 꺾은 OK저축은행 역시 외국인 선수 시몬(30·센터)을 중심으로 몰방 배구를 변형한 게 사실입니다. (전술적으로 조금 깊이 들어가면 OK저축은행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썼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몰방 배구가 아닌 스타일로 프로배구 V리그 챔피언에 오른 건 지난 시즌 현대캐피탈이 처음이었습니다. 현대캐피탈도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몰방 배구를 했다고 생각하는 팬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올해 챔프전에서 현대캐피탈 ‘에이스’ 문성민(31)은 공격 점유율 39.4%에 그쳤습니다. 그 전까지 12시즌 동안 챔프전 우승팀 에이스가 기록한 공격 점유율은 평균 49.5%였습니다.재미있는 건 10년 만에 현대캐피탈에 우승을 안긴 최태웅 감독(41)이 좋든 싫든 현역 시절 삼성화재 주전 세터로 몰방 배구를 집대성한 주인공이었다는 것. 현대캐피탈이 몰방 배구와 정반대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스피드 배구’를 지향한 걸 조금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프리드리히 헤겔이 주장한 ‘정반합’의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구시대적인 몰방 배구가 배구 인기를 깎아 먹지 않았냐고요? ‘하드코어’ 배구 팬이라면 그렇게 느끼셔도 무리가 아닙니다. 다만 캐주얼 팬 인기 척도라고 할 수 있는 TV 시청률을 보면 사실과 조금 다릅니다. 특히 신 단장이 감독이던 시절에는 외국인 선수 공격 점유율이 올라갈수록, 그러니까 몰방 배구가 성행하면 성행할수록 TV 시청률 오르고 반대면 반대였습니다. 한국 배구가 몰방 배구로 치우쳤던 게 바람직했는지 물으신다면 ‘아니오’라고 답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몰방 배구가 아니라 그 스타일을 무너뜨리지 못한 다른 팀이 문제였습니다. 많은 배구 지도자가 몰방 배구를 무너뜨릴 해법을 찾기보다 그 스타일을 따라잡으려 애썼습니다. 그저 더 비싸고, 더 몰방에 적합한 선수만 데려오려고 했지 다른 해법을 찾으려 하지 않았죠. 그리스 신화에서 오이디푸스가 자기가 어머니와 동침하고 아버지를 죽였다는 걸 부인하면 할수록 정말 그랬다는 증거만 나오는 것처럼 한국 배구 역시 몰방 배구라는 비극에 빠졌던 겁니다.그럴수록 ‘신치용 신화’는 더욱 굳건하게 한국 배구에 자리매김했습니다. 물론 신 단장 역시 자기 자리를 잃지 않으려 애쓰고 또 애썼습니다. 때로는 ‘독재’라는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자기부터 절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를 ‘습관’이라는 낱말로 표현했습니다. 신 단장은 “어려운 과정을 이겨내고 우승해 본 선수들은 아니다. 그게 얼마나 짜릿한 경험인지를. 부임 초부터 힘든 훈련이 몸에 배게 했다. 지금은 선수들이 알아서 한다. 습관의 힘이 그렇게 무섭다”고 말했죠. 그래서 삼성화재에서 자기 팀 배구 스타일을 몰방 배구가 아니라 ‘시스템 배구’라고 불러달라는 건 무리한 요구가 아닐지 모릅니다. 외국인 공격수를 뒷받침하는 다른 선수들이 눈에 띄지 않아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절대 ‘삼성화재 왕조’를 만들지 못했으니까요. 이제는 삼성화재 코치가 된 고희진(37)은 현역 시절 “뭉쳐라, 팀워크는 모두를 춤추게 만든다. 버텨라, 기회는 오고 상대는 무너진다”라는 글을 자기 소셜네트워크(SNS) 자기소개로 쓰기도 했습니다. 프로배구에서 가장 사랑받는 팀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배구 팬마다 생각이 다를 터. 하지만 애증을 합치면 삼성화재가 1위라는 데는 별 이견이 없을 겁니다. 삼성화재에서 몰방 배구를 완성한, 아니 그 자신이 곧 몰방 배구와 동의어였던 신 단장의 ‘위대한 시절’이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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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2월 18일]동아일보가 춘향전에 천착했던 이유는

    “저는 소설이 아니라 개룡남(개천에서 용이 된 남자)의 자기계발서로 바꾸고 싶어요. 갈수록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고 말이 많잖아요? 이몽룡은 딱 개천에서 용이 된 남자죠. 지금은 소설보다 자기계발서가 훨씬 더 잘 팔리는 시대니까 소설보다 자기계발서가 나을 것 같아요.” “저는 춘향이가 이몽룡을 기다린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장원급제를 지금으로 따지면 행정고시 수석 합격 아닌가요? 이미 행정고시 합격한 변 사또가 내가 좋다는데 몇 년씩 연락이 오지 않는 구 남친(옛날 남자친구)을 기다리는 건 지금 시대하고 맞지 않아요. 이몽룡이 춘향이를 정말 사랑한다면 변 사또에게 갔다가 돌아가도 받아주지 않을까요?”2011년 11월 동아일보 공채 시험을 치른 수험생들이 ‘문제해결능력시험’에 써낸 답변을 추린 것이다. 이 시험에는 총 다섯 문제가 나갔는데 그 중 하나가 “춘향전에서 바꾸고 싶은 장면이 있다면 어떤 장면이고 어떻게 바꾸겠는가?”였다. 논리력, 상상력, 추리력 등을 알아보려는 문제인 만큼 정답은 없다. 여러분이라면 춘향전에서 어떤 걸 어떻게 바꾸고 싶으신가.당시 출제 과정에서 많고 많은 소설 작품 중 하필 ‘춘향전’을 고른 건 이 작품이 동아일보와 인연이 깊었기 때문. 동아일보는 1924년 오늘(12월 18일)자에 ‘춘향전 개작(改作)’ 현상공모 사고(社告)를 내보냈다. 응모 조건은 “시대, 인물 등을 일절 수의(隨意)로 개작하되 재래 춘향전의 경위를 손상치 말 것.”당시 1등 상금은 500원. 현재 돈으로 약 325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2등에는 200원, 3등(3명)에는 100원 등 총 1000원이 각각 상금으로 걸려 있었다. 당시 신문사 주최 공모전 상금은 보통 몇 십 원이 기본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물론 많지 못한 현상(상금)이지만 이만한 것도 조선 신문계에서는 처음이라 자랑이 아닌 것도 아니외다”라고 썼다. 동아일보에서 신춘문예를 사고를 처음 내보낸 게 이듬해(1925년) 1월 2일자였으니까 신춘문예보다 춘향전 개작 공모가 빨랐다. 신춘문예 소설 1등 상금도 50원으로 춘향전 개작 공모보다 적었다. (참고로 2018년 신춘문예 중편소설 상금은 3000만 원이다.) 동아일보가 이렇게 춘향전에 천착했던 이유는 뭘까.40년 넘게 춘향전을 연구한 설성경 연세대 명예교수는 2007년 펴낸 논문 ‘춘향전과 항일민족운동’에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이 춘향을 소재로 한 예술작품 발간, 춘향 사당 건립, 언론 보도 등을 통해 항일민족정신을 고취했음이 확인됐다”고 썼다. 당시 지식인들이 춘향의 절개를 민족의식과 연관시키는 작업을 활발히 진행했다는 것. 설 교수에 따르면 1912년부터 1935년까지 나온 춘향전은 총 27가지 버전에 이른다.그러면 동아일보에서 공모한 춘향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정답은 없다. 당선작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1925년 9월 24일 사고에서 “본사에서는 1000원의 상금(그리 많은 것은 아니나)을 걸고 춘향전의 개작을 모집하였더니 수십 편이나 되는 힘들인 원고를 얻었으나 불행히 국민 문학으로 추천할 만한 것이 없음으로 응모하신 여러분께는 심히 미안한 일이나 춘원 이광수 씨에게 청하여 춘향전을 쓰기로 하였다”고 발표했다. 이후 동아일보는 ‘일설(一說)춘향전’을 그해 9월 30일부터 1926년 1월 3일까지 총 96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 작품에 대해 최주한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춘향전에서 능동적이고 저항적인 공동체적 유대의 전통을 재발견하고 이를 문학적으로 정전화하는 데 성공을 거둔 일설춘향전은 1920년대 제국의 민족지 구축 작업에 맞선 조선 국민문학의 실천으로서 당대의 문학사적 소임을 다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동아일보는 이와 함께 국문학자 김태준 선생(1905~49)의 ‘춘향전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논문을 1935년 1월 신년호부터 8일까지 연재하기도 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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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2월 14일]한국 역사상 첫번째 보험사기 사건…피의자는 무죄?

    1923년 11월 8일, 지금의 서울 충무로 지역인 경성부 혼마치(本町)와 메이지초(明町·명동) 사이에 큰불이 났다. 2시간 넘게 불길이 번지면서 일본식 가옥 24채가 전소했고 다섯 채에도 불이 붙었다. 이튿날(1923년 11월 9일) 동아일보는 “(화재) 원인에 대해선 아직 충분한 조사가 없으나 그곳 2번지 지물상(指物商·널빤지로 만든 가구를 파는 가게 또는 그 주인) 다나카 마츠시(高田松藏) 씨 집 2층 난로에서 실화(失火·실수로 불을 냄) 된 것인 듯하다 하며 손해액도 아직은 알 수 없으나 최소 50만 원은 될 것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당시 50만 원을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약 33억 원 정도 된다.그 이유가 밝혀진 건 그해 오늘(12월 14일)이었다. 이날 동아일보는 ‘혼마치 대화(大火)의 방화범’이라는 기사에서 “피고는 지금으로부터 8년 전 이 주소에 집 한 채를 얻어 ‘소목장이(나무로 가구나 문방구 따위를 짜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를 하던 바 요사이 금융의 공황으로 수백 원의 빚을 지고 매우 고생하는 통에 설상의 가상으로 지난달 7일 오후 11시경에는 직공으로 있는 이봉수 외 1명에게 품값을 내라는 독촉을 받고 더욱 마음이 상해 자기 친구 시라요시 시라토시(白水庄吉)와 함께 부근 일락정(一樂亭)에서 술을 먹고 다음 날(8일) 새벽 2시에 두 사람이 자기 집으로 돌아와 사정 이야기를 하다 친구가 돌아간 후 그는 자기 집에 불을 놓아 닛폰(日本)화재보험회사 상품 보험금 2000원과 가구 보험금 100원을 찾아 자기의 곤궁을 펴보려는 작정으로 자기 집에 불을 놓아 전소시키고 다시 그 불이 연소되어 그 부근에 있던 쇼타 오바타(小畑辰太郞) 씨 집 외 23집을 전소시키고 야마모토 구주루(山本九藏) 씨 집 외 4집을 반소(半燒)시켜 65만2000여 원을 손해를 낸 사실이더라”고 전했다.결국 다나카 씨는 3000원(현재 약 2000만 원) 정도 ‘보험사기’를 치려다 200배가 넘는 65만2000원(현재 약 42억 원)짜리 사고를 치고 만 것. 손해보험협회 등은 이 사건을 한국 역사상 첫 번째 보험사기 사건으로 보고 있다.재미있는 건 방화범으로 몰렸던 다나카 씨가 결국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점. 이듬해 3월 3일과 10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당시 검사는 49세였던 다카나 씨에게 징역 15년을 구형했지만, 판사는 결국 무죄를 선고했다. 그 정확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당시 동아일보 보도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자세한 사정을 아시는 분은 e메일(kini@donga.com) 등으로 제보 부탁드린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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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규인의 잡학사전]기차와 지하철은 통행방향이 왜 반대일까?

    예, 정말입니다. ‘기차는 좌측통행, 지하철은 우측통행’이 기본입니다. 국유철도운전규칙 제32조에는 ‘한 쌍의 선로에 있어서 열차의 진로는 좌측으로 하여야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반면 도시철도건설규칙 제5조는 ‘열차의 운전 진로는 오른쪽으로 한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지하철은 물론 자동차도 모두 오른쪽으로 다니는데 기차만 왼쪽으로 다니는 건 일제강점기 때 철도 노선을 짓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선 차량이 왼쪽 차선으로 다니는 거 알고 계시죠?맞습니다. 지하철 중에서 서울지하철 1호선은 예외입니다. 1호선은 왼쪽으로 다닙니다. 제일 먼저 지은 지하철 노선이 이 규칙을 어긴 건 경인·경부선과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국철’이라고 부르던 그 노선입니다. 같은 철로를 이용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 그런데 1호선과 2호선 성수지선이 만나는 지점에 신설동역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성수지선은 1호선 운행을 마친 열차가 정비를 받으러 향하는 군자차량사업소와 연결돼 있습니다. 1호선은 왼쪽으로 달리고 2호선은 오른쪽으로 달리니까 중간에 철로를 바꿔줘야 합니다. 신설동역에 지하 3층에 ‘유령역’이 있는 이유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서울지하철 4호선에도 국철 구간이 있었습니다. 현재 남태령~오이도 역 구간. 이 중 금정 역 아래 노선(안산선)은 처음 만든 1988년부터 1994년까지는 1호선 구간이었습니다. 그러다 남태령~금정 역을 잇는 과천선을 만들면서 4호선과 연결하게 됐습니다. 4호선과 과천·안산선 사이에 통행 방향 문제가 생긴 게 당연한 일. 게다가 4호선은 직류로 전동차를 움직인 반면 국철 쪽은 교류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태령~선바위역 사이에 흔히 ‘꽈배기굴’이라고 부르는 입체 교차로를 만들었습니다. 서울하고 경기도 구간을 나눈 것. 4호선을 타고 있는데 남태령 역과 선바위 역 사이에서 “잠시 후 전력 공급 방식 변경으로 객실 안 일부 전등이 소등되며 냉·난방 장치가 잠시 정지되오니…”하고 안내 방송이 나오면 바로 그 구간을 지나고 계신 겁니다. 이 그림은 여러분 이해를 도우려고 과장되게 그린 겁니다. 실제로는 아래 그림 정도는 아니어도 부드럽게 움직입니다. 이 그림은 신설역을 출발한 우이신설선 열차가 선로 방향을 바꾸는 모습입니다. 우이신설선에서는 신설동역이 종점이라 양쪽 승강장에서 모두 열차를 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왼쪽 선로에서 출발한 열차고 있는데 이 열차는 다음 역인 보문역에 도착하기 전 이렇게 오른쪽으로 선로를 바꿉니다.지하철 진행 방향이 바뀌면 주로 열리는 문도 바뀝니다. 지하철역은 크게 철로가 가운데 있고 양 옆에 승강장이 있는 ‘상대식’과 철로가 양쪽에 있고 승장강이 가운데 있는 ‘섬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상대식은 열차가 달리는 방향 쪽 문이 열리고 섬식은 반대입니다. 상대식 승강장에서는 열차 진행 방향하고 같은 쪽 문이 열리고 상대식은 반대쪽 문이 열립니다.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서울교통공사에서 제공 받은 자료에 따르면 서울지하철 1~8호선 시내 구간에 있는 역 277곳 가운데 67.1%에 해당하는 186곳이 상대식입니다. 그러니까 1호선은 진행 방향 기준으로 왼쪽 문이 더 많이 열리고, 나머지 호선에서는 오른쪽 문이 더 많이 열립니다.수도권 지하철 전체 승강장 정보를 알아보려 서울시외 구간 역 관리를 담당하는 한국철도시설공단에도 정보공개를 청구했습니다. 하지만 ‘노선이 너무 많아 자료 수집이 어렵다’는 이유로 정보 공개를 꺼려 전체 결과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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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2월 12일]“살아 있다면 대통령감”…조영래 변호사, 너무 빨리 세상 떠나다

    2013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는 그를 ‘민주화 운동사의 거룩한 영웅’이라고 불렀다. 이튿날에는 나중에 국가정보원장이 되는 이종찬 전 의원 발언을 통해 ‘그가 살아 있다면 대통령감’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바로 조영래 변호사(1947~90)였다.동아일보 객원편집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조 변호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그가 세상을 떠난 1990년 오늘(12월 12일)자 동아일보 부고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다음은 당시 기사 인용 부분.“그가 맡은 사건 중 대표적인 것은 경기 부천경찰서 성(性) 고문 사건의 권인숙 양 변론과 서울 마포구 망원동 수재민 집단 소송이라고 할 수 있다.그는 성고문 사건이 터지자 부천경찰서와 인천 소년교도소를 수십 차례 오가며 경찰관이 22세의 여대생을 대상으로 자행한 추악한 성고문 범죄를 폭로하고 5공(제5 공화국)이 무너진 뒤 고문 경관 문귀동을 마침내 법정에 세워 법의 심판을 받도록 했다.그가 직접 쓴 장문의 권 양 사건 변론요지서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권 양의 용기를 찬양하고 경찰·검찰 그리고 공안당국 등 권력기관의 부도덕성을 질타한 대표적 노작으로 꼽혀진다. ‘권 양,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姓)만으로 알고 있는 유명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 목숨을 건 진실에의 열정 하나만으로 권 양은 끝내 이 불의한 세상의 온갖 권세를 이겨냈습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이 이처럼 여지없이 짓밟히는 사태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권 양이 그토록 밝히려고 노력했던 진실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19)84년 서울의 대홍수 때 망원동 유수지의 배수갑문이 무너져 한강 물이 역류하면서 일대 5000여 가구가 물에 잠겼다. 그는 국가를 상대로 한 2400여 가구 수재민들의 소송을 맡아 3년의 법정 투쟁 끝에 승소로 이끌었다.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초의 집단 소송이라고 할 수 있다.그는 헌법의 기본권과 관련된 사건은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직장에 다니는 미혼 여성 이경숙 씨가 교통사고로 다리를 심하게 다치자 1심 재판부는 스물다섯 (살)까지만 직장 봉급으로 손해배상액을 계산하고 나머지 쉰다섯 살까지는 일용잡금직노임으로 산정하는 판결을 내렸다.미혼 여성은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두는 관습에 따라 여성의 평균 혼인 연령인 스물다섯 살을 정년으로 본 판결이었다. 그는 이 씨를 설득해 2심 변론을 무료로 맡아 남녀불평등의 판례를 바꾸어 놓았다.”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 유명한 김지하의 ‘양심선언문’을 쓴 것도 사실 조 변호사였다. 서울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일하다 분신자살한 전태일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이름으로 만든 ‘전태일 평전’을 세상에 남긴 것 역시 그였다. 조 변호사가 없었다면 2017년 대한민국은 지금과 크게 다른 모습이었을지 모른다.조 변호사가 운명을 바꾼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조 변호사는 법무법인 ‘김앤장’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운동권 후배가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하고도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 임용에서 탈락하자 김앤장 입사를 권했다. 이 후배는 고액 연봉을 주겠다는 제안을 뿌리치고 부산으로 내려가 사법시험 동기가 소개한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를 차린다. 맞다, 이 후배는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다.조 변호사가 숨지고 이틀이 지난 그해 12월 14일 서울 YWCA 강당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1000여명이 참석했다. 계훈제 김근태 김문수 노무현 문익환 박원순 서경석 송건호 이소선 이재오 그리고 조갑제 등 당시 참석자 면면은 지금 봐도 화려하다. 조 선생은 추모사에서 “조변(辯·변호사)은 작은 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아는 이였다. 그는 연탄 공장의 진폐증 환자, 스물다섯에 정년퇴직해야 했던 여자, 분신자살한 젊은 노동자, 이런 작은 이들의 문제 속에서 이 역사와 우리 사회를 알리는 의미를 뽑아냈다”고 평가했다. 조 변호사는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 1990년 1월 컬럼비아대 초청을 받아 미국에 머물던 중 당시 열여섯 살이던 아들에게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사진으로 된 엽서를 띄우며 이렇게 썼다.“아빠가 어렸을 때는 이 건물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지만….”1990년 오늘 한국은 조영래를 잃었다.(김형만 ‘그들이 살았던 오늘’)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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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2월 9일]동아일보가 띄운 한민족 첫 비행기 날다!

    문제) 한국인 첫 번째 비행사는 누구일까?이 질문에 안창남 선생(사진)을 떠올리실 독자 분이 적지 않으실 터. 그 옛날 유행한 노랫말처럼 ‘하늘엔 안창남, 땅에는 엄복동’ 아닌가. (엄복동 선생은 당대를 대표하던 사이클 선수였다.)그런데 1992년 공군은 안 선생이 아니라 ‘오림하 이용근 이용선 이초 장병훈 한창호 등 6명이 우리나라 최초 비행사’라고 밝혔다. 이들은 임시정부 지원으로 1920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州)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졸업한 뒤, 같은 주에 있던 한인 전투비행사 양성 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했다.안 선생이 일본 고쿠리(小栗) 비행학교를 졸업한 건 그해 11월이었으니 안 선생이 이들보다 아홉 달 늦었던 셈.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안 선생을 한국 최초 비행사라고 알고 있는 이유는 뭘까. 1922년 5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정답이 있다.당시 동아일보는 안 선생이 고국 방문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면서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에서 비행기를 탐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니까 안 선생은 한반도를 비행한 첫 번째 한국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기사에 “그는 작년부터 모국 방문 비행을 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계획 중이더니 이번에 여러 가지 준비가 되고 비행기까지 준비되었음으로…”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나중에 ‘금강호(金剛號)’라 부르게 되는 이 비행기를 마련한 것 역시 동아일보였다. 동아일보는 안 선생이 일본에서 비행사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자 ‘안창남 군 고국방문 비행후원회’를 조직하고 비행기 구입 자금 모금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를 소개한 건 1921년 11월 27일자 ‘비행가를 위하여 2만 원’이라는 기사(아래 사진). 당시 2만 원은 금을 약 14.6㎏ 정도 살 수 있던 돈. 현재 금을 이만큼 사려면 약 6억4000만 원이 필요하다.실제로 안 선생이 경성(현 서울)에 도착한 건 그해 12월 5일이었고,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시범 비행을 선보인 건 닷새 뒤였다. 동아일보는 그해 오늘(12월 9일)자에 이튿날 열릴 비행을 앞두고 안내 기사를 내보냈다.이 기사는 “쾌활한 용사의 공중에 오르고 나리는 광경을 가까이 보는 이에게는 상당한 관람료를 받기로 당초에 후원회 위원회에서 결정했으나 본래 이번의 고국 방문 비행으로 말하면 민족적으로 응원하는 아래에 거행되는 것 일뿐 아니라 이번에 일반 과학에 관한 지식과 취미를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에게 보급케 하고저함이 그 본의임으로 다시 협의한 결과 당일 비행장에서 한 푼의 입장료를 받지 않고 일반에 널리 공개하기로 결정하였음으로 전차비나 기찻삯만 가지면 누구든지 마음대로 와서 구경하게 되었더라”고 전하고 있다.당시 경성 인구 30만 명 중 5만 명이 여의도로 몰릴 만큼 이 비행은 인기를 끌었다. 동아일보는 그달 11일자 기사를 통해 다시 행사 소식을 전했다. 국토교통부 항공로별 교통량 분석에 따르면 올해 3분기에 한국 공항에서 뜨고 내리거나 한국 공역을 지나간 비행기는 하루 평균 2083대에 달한다. 41초에 한 대씩 머리 위로 비행기가 날아가는 셈이다. 한국인 비행사 숫자도 이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지금 생각해 보면 비행사 한 명이, 비행기 한 대가 뭐 대단했을까 싶다. 하지만 당시 안 선생과 금강호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았다. 당시 동아일보는 비행기를 “20세기 과학문명의 자랑거리”로, 안 선생을 “귀신같은 재주를 가진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렇게 동아일보가 띄운 한국 첫 비행기는 민족적 자존심과 함께 하늘 높이 떠올랐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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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2월 8일] ‘이오성-맹용자 부부 후손 찾기’ 프로젝트

    ‘김민섭 찾기 프로젝트’는 결국 성공으로 막을 내렸다.이 프로젝트 주인공은 일본 후쿠오카(福岡)로 여행을 떠나기로 한 시간강사 김민섭 씨(사진 오른쪽). 갑작스레 사정이 생긴 그는 비행기 요금을 환불받으려 했지만 돌려받을 수 있는 금액이 2만 원 미만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에 이 항공사 환불 정책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여권에 쓴 이름이 ‘KIM MIN SEOP’으로 똑같은 사람을 찾아 자기 항공권을 주겠다고 나선 것.결국 사흘 뒤 조건이 맞는 대학 휴학생 김민섭 씨가 나타났고, 이 김민섭 씨에게 졸업 전시 자금과 후쿠오카 여행 경비를 마련해 주는 ‘김민섭 씨 후쿠오카 보내기’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기사를 참조하시면 된다.이 프로젝트 성공을 지켜보며 기자도 ‘사람 찾기 프로젝트’를 한 건 진행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미션은 이오성(李午性) 선생과 맹용자(孟蓉子) 여사와 관련된 분을 찾는 것. 자손이나 친척, 지인도 OK다. 혹시 본인이 살아 계시다면 더욱 좋다.본인 생존 여부를 의심한 건 이 두 분이 1925년 오늘(12월 8일)자 동아일보에 결혼 광고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광고에는 두 분 나이가 나와 있지 않지만 92년 전 결혼하셨으니 여전히 살아 계시기가 힘들었다고 판단한 것. (여전히 생존해 계시다면 기자의 무례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세요.) 이 광고에 따르면 이 선생은 원적(原籍)이 함남 북청군이며 일본 도쿄(東京)에 있는 도요(東洋)대를 졸업했다. 맹 여사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이 원적으로 도쿄여자기예(技藝)학교 졸업생이다. 이 둘은 1925년 12월 8일 서울 광희문 예배당에서 결혼을 올렸다. 당시 주례는 김진호 목사였다. 이 부부가 유별나게 특이했던 건 아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당시에는 이렇게 신문에 결혼광고를 내는 게 유행이었다. 그렇다면 이 유행을 만든 ‘트렌트 세터’는 누구였을까.동아일보 지면에 따지면 ‘조선 최초 페미니스트’라고 평가 받기도 하는 나혜석 화가(1896~1948)를 최초로 꼽을 수 있다. 나 화가는 동아일보 창간 후 열흘 째이던 1920년 4월 10일 동아일보에 김우영 변호사와 결혼한다는 광고(아래 사진)를 내보냈다.김 변호사나 나 화가를 아는 분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김진 전 서울대 교수(91)가 나 화가의 둘째 아들이고,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1929~2015)가 셋째 아들이어서다. 또 올해 ‘아이 캔 스피크’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차지한 배우 나문희 씨(76)가 바로 나 화가의 종손녀(從孫女)다. 그러니까 나 화가가 나 씨의 고모할머니다. 다시 한번 부탁 말씀을 올린다. 이오성 선생, 맹용자 여사 부부를 아시는 분은 꼭 연락 부탁드린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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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규인의 잡학사전]러시아는 평창 출전 No…러시아 선수는 Yes, 이유?

    얼핏 생각하면 좀 이상하기도 합니다. 올림픽에 그 나라는 출전을 금지하면서 그 나라 선수는 출전을 허용해도 괜찮다는 게 말이죠. 음주 운전은 금지했지만 술 마시고 운전하라는 뜻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조금만 따져 보면 그렇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6일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집행위원회에서 2018 평창 겨울 올림픽 참가 금지라는 징계를 내린 대상은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이지 러시아 선수단이 아닙니다. IOC에서 이날 발표한 보도자료(아래 사진)를 보시면 확실히 그렇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바로 그다음 줄이 러시아 선수 개개인은 (아래 제시할) 엄격한 조건 아래서 평창 올림픽에 초청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어서 이 선수들은 ‘러시아에서 온 올림픽 선수(OAR)’라고 부르게 된다는 문장이 등장합니다. 마지막은 러시아 대표팀 유니폼과 러시아 국기, 국가(國歌)를 쓸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대신 OAR라고 쓴 유니폼과 오륜기, 올림픽 찬가를 써야 합니다.이 보도자료 아래 나오는 ‘엄격한 조건’은 어떠한 이유로든 한 번이라도 도핑(약물을 써서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행위)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선수는 초청 대상에서 빼겠다는 게 뼈대입니다. IOC에서 ROC에 이런 징계를 내린 이유가 국가적으로 도핑을 저질렀기 때문이니 엄격하다기보다 당연한 조건입니다. 그러니까 도핑과 무관한 러시아 선수 또는 팀은 이번 올림픽에 참가하는 데 별 지장이 없습니다. 도핑 적발 경험이 없는 선수가 ‘나는 애국심 빼면 시체야. 우리나라(러시아)를 대표할 수 없는 상태로는 절대 올림픽에 나가지 않겠어’라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셈이니까요.● 원래부터 올림픽 참가 선수는 ‘국가대표’가 아니었다.그러면 IOC에서 이렇게 ROC와 러시아 선수 개개인을 구분한 이유는 뭘까요?많은 사람이 흔히 착각하는 것과 달리 올림픽 경기는 개인 또는 팀 간 경쟁이지 국가 간 경쟁이 아닙니다(The Olympic Games are competitions between athletes in individual or team events and not between countries). IOC 올림픽 헌장 6조 1항에 분명히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아래 사진 참조).네, 그런데 우리가 올림픽에 참가하는 개인 또는 팀을 흔히 ‘국가대표’라 부르는 건 이 조항에 나온 것처럼 각 국가 올림픽 위원회(NOC·National Olympic Committee)에 자국 국적 선수 가운데 올림픽에 누구를 내보낼지 선택할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한국올림픽위원회가 2009년 대한체육회와 완전히 통합해 현재 대한체육회가 NOC 기능을 맡고 있습니다.)러시아를 대표하는 NOC가 바로 당연히 ROC입니다. 그런데 IOC에서 ROC에 자격 정지 처분을 내렸으니 러시아 국적 선수 중에는 누가 평창 올림픽에 나가야 할지 결정할 수 있는 단체가 일시적으로 사라진 셈이 됩니다. 그래서 IOC에서 러시아 선수를 올림픽에 ‘초청’하는 형식을 취하겠다는 겁니다.이런 일이 처음도 아닙니다. IOC는 쿠웨이트 정부가 쿠웨이트 올림픽 위원회 선거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2015년 이 나라 올림픽 위원회에 자격 정지 처분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쿠웨이트 사격 대표 페하이드 알디하니(51·아래 사진)는 개인 선수 자격으로 지난해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해 남자 더블트랩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국가대표 시스템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이렇게 NOC에 참가 선수 선발 권한을 준 건 1908년 런던 올림픽 때부터였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제는 IOC에서 정식 대회로 인정하지 않는 1906년 중간 올림픽(Intercalated Games) 때부터 올림픽에 참가하려는 선수는 NOC를 통해 참가 자격을 얻어야 하는 방식이 됐습니다. 그 전까지는 올림픽 참가를 희망하는 선수 또는 팀이 직접 올림픽 개최국에 가서 신고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도 1896년 아테네(그리스), 1900년 파리(프랑스) 대회 때까지는 주로 유럽 선수가 참가하던 올림픽이 유럽 대륙 안에서 열리다 보니 참가자가 직접 개최국을 찾기가 그래도 상대적으로 수월했습니다. 문제는 1904년 대회가 대서양 건너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렸다는 것. 1900년 파리 대회 때 1224명이었던 올림픽 참가 선수가 1904년에는 650명으로 줄었습니다. 그러자 IOC는 올림픽 참가 선수 등록 방식을 바꿨고 1908년 런던 대회 때는 2024명으로 늘었습니다.이렇게 NOC를 거쳐야 하기 전에는 여러 나라 선수가 팀을 꾸려 올림픽에 출전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혼성국 팀은 3개 대회에서 금 8개, 은 5개, 동 4개 등 메달을 총 17개 따기도 했습니다. 올림픽 때는 ‘한국 = KOR’같은 IOC 국가 코드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 혼성국 코드는 ‘ZZX’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쓰지 않는 코드입니다.●마라톤은 왜 42.195㎞를 뛸까여기까지 꼼꼼하게 읽어주신 분이 계실지 모르니 1908년 런던 올림픽 관련 ‘잡학’도 몇 가지 소개하죠.이 대회 때부터 NOC를 통해 선수가 올림픽에 나가게 됐으니 무엇을 또 처음 하게 됐을까요? 네, 개회식 때 선수단이 국기를 들고 입장하는 것도 이 대회가 처음이었습니다. 문제는 당시 핀란드가 러시아 제국에 속해 있었다는 것. 핀란드 선수단은 국기 없이 입장했죠. 국가대표 유니폼이 등장한 것도 이때 처음.이 대회는 1908년 4월 27일부터 그해 10월 31일까지 187일(6개월 4일) 동안 열렸습니다. 근대 올림픽 역사상 가장 오래 열린 대회가 1908 런던 올림픽이죠. 이렇게 대회가 길었던 이유 중 하나는 피겨스케이팅 때문. 피겨스케이팅은 물론 겨울 종목 자체가 올림픽에 등장한 게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첫 번째 겨울 올림픽은 이로부터 16년이 지난 1924년 프랑스 샤모니에서 처음 열렸습니다.이 대회 때는 올림픽 마라톤 선수가 42.195㎞를 뛴 첫 번째 대회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거리가 42.195㎞라서 그렇게 뛴다고 알고 계시는 거 아니죠?) 당시 영국 왕가는 윈저성(영국 왕가 주말 별장)을 출발한 마라톤 선수가 주 경기장 안에 왕족이 앉아 있던 ‘귀빈석(Royal Box)’ 앞으로 골인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코스를 짜다 보니 딱 42㎞가 아니라 195m가 붙었습니다. 이후 1921년 국제육상경기연맹(IAF)에서 42.195㎞를 공식 거리로 확정했습니다.이 대회 마라톤 경기 때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표 찰스 헤퍼론(1878~1932)이 골인 지점까지 약 2.5㎞를 남겨뒀을 때까지 선두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관객이 샴페인병을 터뜨려 그에게 한잔 건넸고 이를 받아 마신 헤퍼론은 위경련을 일으켰습니다. 바닥에 한참을 나뒹굴고 나서야 다시 뛰기 시작한 페허론은 결국 3위로 골인했습니다. (나중에 선두가 실격당해 최종 은메달). 이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말이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렸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라나 뭐라나.거짓말이 하필 ‘새빨간’ 이유까지 말씀드리면 너무 긴 글이 되어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잡학사전’은 언제든 여러분 제보를 기다립니다. 궁금하기는 한데 직접 알아보기 귀찮다고 생각하시는 게 있으시면 언제든 kini@donga.com으로 e메일 보내주세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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