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욱

이기욱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구독 56

추천

박물관에 익숙해질 때쯤 다시 경찰서로 돌아왔습니다. 유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여러분의 이야기를 담겠습니다.

71wook@donga.com

취재분야

2025-11-18~2025-12-18
미국/북미30%
국제일반22%
국제정세15%
인사일반10%
유럽/EU7%
아시아5%
일본5%
국제정치2%
러시아2%
중국2%
  • [책의 향기]자기계발서가 시키는 대로 해봤더니

    베스트셀러 목록에 자기계발서가 꾸준히 오른다. 솔깃한 이야기들이 표지에 적혀 있다. 삶을 변화시켜 보기 위해 자기계발서 하나를 고른다. 하지만 책에 나온 조언이 내게 적합한지 쉽게 알 수 없다. 이 책은 대중문화 해설가 졸렌타 그린버그와 오디오 프로듀서이자 진행자인 크리스틴 마인저가 만나 50권의 자기계발서대로 살아본 이야기를 담았다. 자기계발서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봐 온 마인저와 자기계발서를 통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그린버그는 각종 조언들을 해볼 만한 것과 별로였던 것으로 나눠 소개한다. 이들은 ‘1년만 나를 사랑하기로 결심했다’(숀다 라임스)에 나온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라’는 제안을 따랐더니 괜찮았다고 말한다. 꺼리던 것들을 ‘좋다’고 여기면서 행동에 옮기는 시도가 용감한 선택이 되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알아가며 긍정적인 변화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속옷 차림으로 술을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것을 권하는 ‘팬츠 드렁크’(미스카 란타넨)의 조언도 해볼 만한 것으로 추천한다. 쉬는 날 계획 없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무의미해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스스로에게 꼭 필요한 재충전의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크릿’(론다 번)의 ‘생각대로 된다’는 법칙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은 흑인의 예를 들며 흑인이 차별받고 싶다고 생각을 해서 미국 사회에서 상처를 받아온 것이냐고 되묻는다. 이 법칙은 대물림되는 차별을 가리고, 잘못된 사회구조로 인해 어려움을 겪어도 단지 스스로를 위로하는 데 그치는 주문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한다. 저자들은 “여러분을 제일 잘 아는 전문가는 여러분 자신”이라며 자기계발서의 조언을 일단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시도해보라고 말한다. 해당 조언을 따르면서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스스로를 알아가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07-2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간송미술관 ‘훈민정음 NFT’ 판매 논란

    문화재계에서 무가지보(無價之寶·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로 통하는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의 디지털 콘텐츠 판매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한국의 얼’에 해당하는 상징성 큰 문화재를 상업화하는 게 바람직하냐는 것. 일각에선 문화재 대중화에 기여하고 우리 문화재를 세계에 알리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반응도 나온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은 22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100개 한정 NFT(Non-Fungible Token·대체 불가능한 토큰)로 발행하고자 한다”며 “디지털 자산으로 영구 보존하는 한편 미술관 운영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려는 취지”라고 밝혔다. 다음 달 중순에 발행 예정인 훈민정음 해례본 NFT의 개당 가격은 1억 원으로 총 100억 원 규모다. 간송미술관은 보물급의 통일신라시대 불상 2점을 지난해 미술품 경매시장에 내놓는 등 재정난을 겪고 있다. NFT는 이미지 등 디지털 파일에 블록체인 기술이 적용된 고유 값을 부여한 것이다. 진품 여부와 더불어 소유권을 보증할 수 있는 디지털 자산이다. 국보나 보물 같은 국가지정문화재를 NFT로 발행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대해 문화재계 일각에서는 문화재가 자칫 돈벌이 수단으로 인식될 가능성을 거론하며 우려하고 있다. 황선엽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문화재 소유자가 자신의 의지로 하는 일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면서도 “행적이 묘연한 상주본을 제외하고 사실상 유일한 훈민정음 인쇄본인 간송본이 이렇게 이용되는 건 국어 연구자로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긍정적 효과를 기대하는 반론도 있다. 문화재 원본의 가치를 독점하기보다 대중과 공유하는 차원에서 디지털 콘텐츠 판매가 필요하다는 것.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은 “디지털 기술 발달로 디지털화된 훈민정음 해례본이 오히려 실물에 가까운 느낌을 줄 수도 있다”며 “개인이 소장해 접근하기 어려운 문화재일수록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엄격한 문화재 관리 여건상 해외 반출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NFT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한 문화재계 인사는 “국내 문화재를 해외로 반출하는 데 제약이 많다 보니 국내의 우수한 문화재를 해외에 알리는 게 쉽지 않다”며 “NFT를 통해 문화재를 소개하면 국익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주무관청인 문화재청은 NFT 발행을 위한 디지털 촬영 과정에서 훼손 가능성이 있는지 등을 살펴볼 방침이다. 현행 문화재보호법은 국가지정문화재를 탁본, 영인하거나 문화재 보존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촬영을 할 때는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NFT 사진 촬영으로 문화재가 훼손될 가능성은 낮아 허가 대상이 아닐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결론을 내린 건 아니다. 관련 법률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서지학계 일각에서는 고서를 스캔하는 과정에서 해체가 불가피해 훼손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NFT(Non-Fungible Token·대체 불가능한 토큰)란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미술품이나 문화재의 원본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 자산이다. 고유한 값을 부여해 소유자와 생성일, 거래 내역, 불법 복제 여부를 파악할 수 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7-2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미술 교과서가 따로 없네” 겸재-김환기 작품에 절로 탄성

    국립중앙박물관, 유물 77점 전시인왕제색도-금동불 ‘일광삼존상’ 등국보-보물 선보여… 특별 영상도 제작 98인치 대형 모니터에 겸재(謙齋) 정선(1676∼1759)의 인왕제색도를 촬영한 영상이 흐르고, ‘인왕산을 거닐다’라는 문구가 천천히 뜬다. 치마바위 등 인왕산 곳곳을 찍은 영상 위로 인왕제색도에 담긴 치마바위가 겹친다. 약 270년 전 그림 속 인왕산과 2021년 현실 속 인왕산이 만나는 순간. 국립중앙박물관(국박)이 특별 제작해 서울 용산구 전시실에서 선보이는 5분 20초 분량의 영상이다. 21일 막을 여는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을 기획한 이수경 국박 학예연구관은 “명품에 대한 호기심이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전시를 준비했다”고 전했다. 전시실로 들어서면 높이가 8.8cm에 불과한 금동불 ‘일광삼존상’(국보 134호)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보살상 뒤 광배(光背·부처나 보살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것)에 그려진 연꽃무늬와 불꽃무늬는 성스럽고 고결한 느낌을 준다. 삼존불 중앙에 부처 대신 보살이 있는 형태는 당시 매우 독특한 형식이다.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는 “아름답고 섬세한 삼국시대의 미(美)를 잘 나타내는 불상”이라고 평가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고려시대 ‘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화엄경·국보 235호)이 있다. 검푸른 종이에 금가루로 불경을 옮겨 적었다. 섬세한 글자와 화려함이 고려시대 불교의 융성을 보여준다. 화엄경 맞은편에는 조선시대 서화 두 점이 나란히 전시돼 있다. 단원(檀園) 김홍도(1745∼?)의 ‘추성부도’(보물 1393호)와 인왕제색도(국보 216호)다. 먹을 듬뿍 묻혀 여름철 비가 갠 직후의 느낌을 살린 인왕제색도와 마른 먹을 이용해 가을의 메마른 느낌을 날카롭게 담아낸 추성부도는 한눈에도 확연히 대비된다. 넘쳐나는 그림 주문으로 자신감 넘쳤던 겸재의 노년과 건강 악화로 죽음과 마주했던 단원의 쓸쓸한 노년이 담겼다. 고려시대 불화 ‘천수관음보살도’(보물 2015호)도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1000개의 손과 눈을 가졌다고 해서 천수관음보살이지만, 전부 그릴 수 없어 11면의 얼굴과 44개의 손으로 표현했다.국립현대미술관, 근현대작 58점 전시 이중섭의 ‘황소’-‘흰소’ 나란히 걸려박수근-유영국-장욱진 등 대표작 포함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국현) 서울관에서 열리는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 포스터에 담긴 작품은 김환기(1913∼1974)의 ‘여인들과 항아리’(1950년대)다. 전체적으로 따뜻한 색상을 바탕으로 인물과 동물, 사물을 정면 혹은 측면으로 그려 고답미를 물씬 풍긴다. 1950년대 삼호그룹 정재호 회장이 주문 제작한 대작으로, 1960년대 말 미술시장에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김환기의 ‘산울림 19-II-73#307’(1973년)은 그가 1960년대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 후 완성 단계에 이른 점화 양식을 잘 보여준다. 흰 사각형 안 동심원들이 세 방향으로 퍼져 나가며 묘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그는 당시 점, 선, 면만으로 이뤄진 추상화 실험을 이어갔다. 김환기 작품의 대각선 방향 건너편으로 이중섭(1916∼1956)의 ‘황소’(1950년대)와 ‘흰 소’(1950년대)가 나란히 걸려 있다. 인내를 상징하는 소는 이중섭에게 한국의 상징이자 자화상이었다. 이 중 붉은 황소는 6·25전쟁이 끝난 직후 새로운 출발의 시점에 그려졌다. 붉은 황소를 그린 이중섭의 현존 작품 4점 중 하나다. ‘황소’가 소의 머리를 부각했다면 ‘흰 소’는 걷고 있는 소의 전신을 역동성 있게 묘사했다. 흰 소는 백의민족을 상징해 일제강점기 당시 작품 소재로 사용하는 게 금기시됐다. 박수근(1914∼1965)의 ‘절구질하는 여인’(1954년)은 화강암의 거친 질감이 소박한 정취를 자아낸다. 아이를 업은 채 절구질하는 여인의 고단한 모습을 포착했다. ‘서민 화가’로 불린 박수근은 농가의 일하는 여인들을 평생 그렸다. 유영국(1916∼2002)의 ‘작품’(1972년)은 산을 모티브로 했다. 그는 다양한 색채와 질감을 통해 산의 형태에 변주를 준 연작들을 남겼다. 1972년작은 차가운 색채를 썼지만 나란히 진열된 1974년작 ‘작품’은 따뜻한 주홍빛으로 그려 대비된다. 장욱진(1918∼1990)의 ‘나룻배’(1951년)는 6·25전쟁 기간에 그려진 것으로 어릴 적 고향에서 본 강나루의 풍경을 정감 있게 표현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1-07-2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박물관에서 멍 때리기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분청사기·백자실의 ‘사기장의 공방’. 창가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면 조선시대 사발 160여 점이 진열된 나무선반이 눈에 들어온다. 다양한 모양새의 투박한 사발에는 왠지 모를 편안함이 깃들어 있다. 오른쪽 벽 모니터에서는 사기장이 도자기를 만드는 영상이 흘러나온다. 흙 반죽 전 바가지에 물을 담아 뿌리는 소리와 가마 속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불타는 가마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눈의 초점이 풀린다. 요즘 유행하는 ‘불멍’이 따로 없다. 폭염을 피해 휴가를 떠나고 싶지만 팬데믹 탓에 불안하다. 박물관은 방역지침에 따라 회당 관람 인원이 제한돼 상대적으로 쾌적하고 안전한 휴식이 가능하다. 이른바 ‘혼박’(혼자 박물관 구경하기)을 만끽할 수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내 주요 공간을 알아봤다. 국립중앙박물관 3층 분청사기·백자실은 ‘달멍’(달을 보며 멍하니 있기) 명당으로 꼽힌다. ‘백자 달항아리’(보물 제1437호)가 있기 때문이다. 9.9m² 크기의 유리 진열장 한가운데 보름달 같은 달항아리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오래 들여다보면 곡선이 주는 안정감과 백색이 주는 순수함에 빨려든다. 달항아리 뒤로는 두 죽마고우가 항아리를 감상하는 전통 수묵화가 겹친다. 이제 잠시 멍해질 시간. 달이 항아리인지, 항아리가 달인지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중국실에서는 남송 화가 마원(馬遠)의 그림을 비롯해 명청대 산수화 6점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은 다른 전시공간과 구분돼 오롯이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다. 은은한 황색 조명과 나무 바닥, 녹색 벽이 어우러져 편안함을 선사한다. 바로 옆 일본실에는 일본 국보로 선정된 다실(茶室) 다이안(待庵)이 자갈정원과 함께 재현돼 있다. 다이안은 센노 리큐(千利休·1522∼1591)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7∼1598)를 위해 만든 다실로 솥과 다도용품 외에 어떠한 실내 장식도 없는 검박함을 보여준다. 정원 뒤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덴류지(天龍寺) 정원의 동영상이 재생된다. 다실 모형 앞에 앉아 일본 정원의 사계절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일본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불상들에 둘러싸여 묘한 신비로움도 경험할 수 있다. 불교조각실에 들어서면 ‘하남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332호)을 포함한 철불(鐵佛) 2점과 ‘감산사 미륵보살상’(국보 제81호) 등 석불(石佛) 4점이 소파 하나를 빙 두르고 있다. 관람객 이모 씨(30)는 “불자는 아니지만 사방에서 불상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세상과 분리돼 온갖 걱정이 사라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유물 감상 중간에 잠시 쉬어가고 싶다면 같은 층 이집트실의 창가 휴식공간을 이용해보자. 파란 하늘과 우거진 숲, 거울못 연못 등 박물관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안쪽 전시관에서는 기원전 7세기경 인물로 이 박물관에 소장된 유일한 사람 미라인 토티르데스 시신과 목관을 볼 수 있다. 박물관 야외공간도 힐링 포인트다. 박물관 경내 곳곳에 마련된 오솔길에서는 배롱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나무들의 숲 내음을 맡을 수 있다. 하늘이 어둑해진 후에는 박물관에서 용산가족공원으로 향하는 길을 통해 석조물정원을 들러보자. 어둠 속에서 야간조명을 받은 석탑들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07-2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괴테는 왜 슬픈 베르테르를 그렸나

    살면서 수없이 들어본 제목이지만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 책들이 있다. ‘고전’ 소설이다. 꼭 읽어야지 결심하고 책을 넘겨보지만 결말을 보기가 쉽지 않다. 앞쪽에 손때만 늘어간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조지 오웰(1903∼1950)의 ‘1984’ ‘동물농장’ 등을 번역한 저자는 고전을 알기 쉽게 소개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저자는 서구 문학 배경의 양대 산맥인 이성주의와 감성주의를 다루는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두 사상적 흐름은 화합과 대립을 반복하며 문학 발전을 이끌었다. 저자는 고전을 집필 당시 삶의 모습과 연관지어 설명한다. 토머스 모어(1478∼1535)의 ‘유토피아’를 다루기에 앞서 양모 가격 급등으로 인클로저 운동이 발생한 16세기 영국 상황을 보여주는 식이다. 유토피아는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팽배한 당시 사회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베르테르 효과를 낳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성과 합리성에 맞서 감정과 개성을 주창한 문학운동인 18세기 독일의 ‘질풍노도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이에 따라 주인공 베르테르는 감정과 욕망이 살아있는 캐릭터로 그려졌다. 지금까지 다섯 번 영화화된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1896∼1940)의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은 1920년대 미국의 재즈 시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억눌려 있던 대중의 욕망은 종전 후 재즈음악과 함께 폭발했다. 이 시기 미국의 키워드는 돈과 쾌락이었으며, 소비가 미덕이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주인공 개츠비가 여는 사치스러운 파티를 통해 이를 생생히 보여준다. 저자는 “대다수의 책이 단명하는 것과 달리 세월의 시련을 겪어 내며 당당히 서가에 꽂혀 있는 것 자체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강조한다. 고전을 읽고 싶었지만 그 무게에 눌려 쉽게 다가서지 못한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을 통해 다시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07-1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180cm 신라인’ … 경주서 삼국시대 최장신 유골 발견

    경북 경주시의 5, 6세기 신라시대 고분에서 키가 약 180cm에 이르는 장신 인골이 발견됐다. 현재까지 확인된 삼국시대 인골 중 가장 키가 크다. 1500여 년 만에 발견된 인골은 이례적으로 유실된 부분 없이 거의 온전한 상태로 출토됐다. 한국문화재재단은 15일 경주시 탑동 유적 내 2호 덧널무덤(목곽묘·木槨墓) 발굴 과정에서 신장 180cm의 남성 인골이 나왔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골반 뼈의 해부학적 구조가 남성의 것이라고 판정했다. 앞서 경주 월성에서 발견된 남성 인골의 키는 165∼167cm였다. 인골은 발견 당시 턱이 가슴 쪽으로 당겨져 있었고 쇄골은 V자 형태로 척추가 휘어져 있었다. 김헌석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은 “신라시대 매장 당시 평균 신장에 맞춰 제작된 관에 시신을 구부려 넣는 과정에서 쇄골, 척추 등에 변형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연구소는 척추 변형의 원인으로 노화나 직업 특성, 시신 보관 과정 등 여러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다. 인골은 낮은 지대의 습지에 묻혀 오랜 세월 보존될 수 있었다. 이런 지형은 물기를 머금은 진흙이 시신을 일시에 덮어 외부 공기를 차단한다. 발굴조사를 담당한 한국문화재재단의 우하영 부팀장은 “인골 발견 당시 주변 땅이 축축했다”고 설명했다. 발굴단은 인골 주변에 무기류나 값진 장식품이 매장돼 있지 않은 점으로 미뤄 장신 인골이 하위 계층의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07-1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교문 밖 넘어선 학폭, 집단주의 문화서 비롯… 부모 권위적 태도 벗어야”

    “왕따와 폭력이 교문 안에 국한된 문제라는 한국 사회 인식에 의문을 가졌다. 왕따는 한국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관찰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뉴질랜드 출신의 트렌트 백스 이화여대 사회학과 부교수는 9일 펴낸 ‘외국인 사회학자가 본 한국의 집단 따돌림: K폭력’(한울엠플러스)에서 학교폭력의 원인을 집단주의 문화에서 찾는다. 그는 2012년 한국에 온 뒤 ‘한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서로에게 그토록 잔인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하게 됐을까’라는 의문을 품게 됐다고 한다. 그가 한국에 오기 직전 해인 2011년부터 2013년까지 한국에서 학교폭력으로 인한 자살 등 심각한 사건이 여러 건 이어졌기 때문이다. 외국인 학자의 시각에서 한국의 학교폭력을 분석한 그를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그는 홍콩대에서 사회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중국 청소년들의 인터넷 중독 문제를 연구했다. 한국에 온 그는 학교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선 문제를 일으킨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2011∼2013년 서울소년원에 위탁된 학교폭력 가해 중고교생 20명을 분석해 이 중 16명이 폭력적인 가정환경에 노출된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이 부모의 폭력적인 훈육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가출뿐이었다. 그는 “부모의 학대 행위를 비난하기 전에 그 부모들도 상당수가 아동기에 학대당하고 방치된 경험이 있었다는 여러 연구 결과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신간에서 그는 한국의 따돌림 문화의 원인으로 군사정권 때 본격화된 집단주의 문화를 지목한다. 군사정권 시절 산업화 과정에서 개인은 위계적인 사회질서에 순응하며 이를 체화했다. 한국 사회의 수직적 집단주의 성향이 직장 선후배 관계나 부모와 자녀 관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 그런데 산업구조의 변화로 촉발된 개인주의가 기존의 집단주의 문화와 충돌하며 부작용을 가져왔다는 설명이다. 저자에 따르면 개인주의 사회의 특징은 소외다. 집단주의가 잔존한 한국 사회에서 개인들은 자신이 소외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따돌리려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예컨대 학교에서 일진이 약한 학생들을 이른바 ‘셔틀’로 만들어 지배력을 행사하는 식이다. 그는 “한국의 따돌림은 집단에 의한 사회적 배척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일대일 괴롭힘 위주의 서구 사회와 대조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학교에서의 따돌림 문화를 끊기 위해서는 가해 학생들에 대한 다른 차원의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학교폭력 가해자들이 다른 이들과 친화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이들의 부모가 권위주의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 그는 “가정에서 배운 게 학교와 직장에서 자녀의 행동을 형성한다”며 “비행 청소년에 대한 치료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올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부모에게 양육 기술을 교육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07-1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백제 토기 만지기… 석기 조각 붙이기… “체험형 전시 재미있네요”

    시각에 더해 촉각까지 가미된 박물관 체험형 전시가 늘고 있다. 레플리카(모조품)나 소수의 유물을 관람객이 직접 만지며 감상하는 방식이다. 전시 교육기업인 ‘만지는박물관’은 전국 학교 등을 찾아가 소장품을 선보이고 있다. 학생들이 기원후 5∼6세기 신라시대의 목긴토기항아리(장경호·長頸壺)나 조선시대 운현궁 백자, 한성백제시대 세발토기(삼족기·三足器) 등의 유물을 만져볼 수 있다. 이 밖에 청동기시대 한국형 동검과 최고(最古)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등의 레플리카도 있다. 만지는박물관은 100여 점의 유물 진품과 200여 점의 레플리카를 소장하고 있다. 황자정 만지는박물관 대표(53·여)는 “박물관을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는 시각장애인이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역사교육에서 소외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만지는 전시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기업은 문화재형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2019년 지정됐다. 국공립 박물관에서도 만질 수 있는 전시가 속속 열리고 있다. 거리 두기 4단계에 따른 관람 인원 제한과 소독제 비치 등 방역수칙 준수하에 열린다. 올 5월 개막한 국립중앙박물관의 ‘호모사피엔스 특별전’에서는 인류 진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1부의 한 코너를 고(古)인골 28종의 표본으로 채웠다. 관람객은 약 700만 년 전 인류 화석으로 추정되는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부터 현재의 호모속까지 다양한 고인골의 두개골 등을 만져볼 수 있다. 특히 표본들의 두개골 크기와 신장을 실제 추정치에 맞춰 제작해 신체 진화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호모사피엔스에 초점을 맞춘 2부에서는 선사시대 석기를 체험할 수 있다. 깨진 돌 조각들을 관람객들이 직접 맞춰보면서 뗀석기의 원리를 파악할 수 있게 했다. 김동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진화라는 주제를 친근하게 전달하고 관람객이 과거를 체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만져 볼 수 있는 전시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체코 인형극을 체험할 수 있는 전시도 최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렸다. 이 박물관의 ‘나무 인형의 비밀-체코 마리오네트’ 기획전에서는 관람객들이 인형극에 쓰이는 인형을 만져 보고, 소형 무대에서 인형극을 직접 해볼 수도 있다. 또 인형극에 쓰이는 음향 기구를 조작해 바람, 말발굽, 비, 천둥소리 등을 연출할 수 있다. 체코의 유랑 인형극단은 라디오나 TV가 없던 18세기 무렵부터 인형극을 통해 도시 곳곳에 다양한 소식을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체코의 전설이나 동화를 기반으로 한 인형극 공연은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07-1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채식은 옳고, 육식은 그르다?

    달궈진 불판 위에 마블링이 잘된 소고기 한 점을 올려놓는다. 고기가 익어가는 냄새는 코를 자극한다. 지글지글 소리는 덤이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하지만, 소고기가 식탁에 오르려면 소를 도축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소는 고통을 겪는다. 소가 내뿜는 메탄은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지목된다. 이를 알게 된 이들은 채식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실제 주변에서 채식만 하는 삶을 선택하거나 육식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마주할 수 있다. 제목인 ‘신성한 소’는 어떤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 생각, 관습, 제도를 말한다. 저자들은 고기가 건강과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고 육식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관습이라는 편견이 ‘신성한 소’라며 이에 대해 반박한다. 지속 가능한 식량 시스템을 위해 육식이 필요하다는 것. 영양사인 다이애나 로저스, 전직 생화학자인 롭 울프는 영양과 환경, 윤리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질 좋은 고기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한다. 우선 채식을 통해 필수 영양소를 섭취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동물성 식품은 사람에게 필요한 아미노산을 함유하고 있지만 식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필수 아미노산이 모두 들어 있는 콩은 소화 장애를 일으킬 수 있고, 날것으로 먹으면 문제가 생기거나 인지력 감퇴와 연관이 있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식물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항영양소가 인간이 영양소를 흡수하는 걸 방해하기 때문이다. 채식 식단을 제대로 설계할 수 없다면 동물성 식품을 함께 섭취하는 게 건강에 더 좋다고 주장한다. 소는 온실가스 배출의 주범으로 지목돼 왔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2006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가축이 내뿜는 가스가 총 온실가스 배출량의 18%를 차지하며, 이는 운송 부문을 넘어선 규모였다. 하지만 저자들은 해당 수치가 잘못됐고 연구진도 이를 인정했다고 밝힌다. 게다가 사육장에서 키우지 않고 목초지를 옮겨 다니며 소를 키워 토양이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경우 순 온실가스 배출량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소의 배설물이 토양의 수분 함량과 미생물의 다양성을 높이고, 그 결과 뿌리를 깊이 내린 식물이 더 많은 탄소를 땅 밑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풀을 먹은 소가 떠나면 풀이 다시 자라며 뿌리가 역시 깊어진다. 환경 문제를 유발하는 건 소 자체가 아니라 소를 관리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육식보다 채식이 더 친환경적이고 윤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작물을 기르기 위해 인위적으로 강물의 흐름을 바꾸는 건 물고기를 죽인다. 식물성 기름인 야자유가 인기를 얻자 야자유 생산을 위한 땅을 마련하느라 동물들의 보금자리가 위태로워졌다. 야자유 농장에서 일하는 아이들은 임금을 아주 적게 받거나 아예 못 받는다. 인간의 행동으로 생명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진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행동을 한다면 그건 죽음을 유발하는 것이라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저자들은 “인간과 지구의 건강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는 건 산업적으로 대량생산된 식품”이라고 말한다. 대규모 생산을 위해 농약을 사용해 자연의 순환을 해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채식주의에 반대하는 논리로 이용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들이 하려는 말은 육식과 채식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자연과 공존하는 식량 생산 체계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속 가능한 식량 생산 구조를 마련하려면 소가 필수적이다. 정확하게는 방목한 소다. 즉, 자연의 순환에 맞춘 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식습관이 동식물을 포함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민해본 이들이라면 빠져들 만한 책이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07-1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경복궁서 150년전 대형화장실 유적 첫 발굴

    조선시대 궁궐에서 사용되던 공중 화장실 유구(遺構·옛 건축물의 자취)가 처음 발견됐다. 15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이 화장실엔 현대식 개별 정화시설이 설치돼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2019년부터 경복궁 동궁(세자의 거처 및 직무공간, 각종 지원 시설이 있던 곳) 남쪽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근정전 동쪽 지역에서 화장실 하부 구조물을 발굴했다고 8일 밝혔다. 이 구조물은 길이 10.4m, 너비 1.4m, 깊이 1.8m의 좁고 긴 직사각형으로, 석조 구덩이 형태였다. 해당 지역에 있던 각종 전각의 도면을 기록한 경복궁배치도(1888∼1890년)와 북궐도형(北闕圖形·1907년) 등의 문헌을 토대로 분석한 결과 이 시설은 당시 궁녀와 하급관리, 군인들이 쓰던 공중 화장실이었다. 토양 분석에서 기생충 알 다량과 오이속, 들깨씨앗 등이 검출된 점도 화장실이었음을 뒷받침했다. 연구소 측은 “터에서 발견된 소뼈 등을 이용해 연대를 측정한 결과 화장실은 1868년 경복궁 중건 당시 만들어져서 20여 년 동안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문헌 기록과 전문가 분석을 종합하면 이 화장실은 총 4, 5칸으로 구성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화장실이 1칸에 2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됐던 점을 고려할 때 한 번에 최대 10명이 사용할 수 있었던 셈이다. 주목할 점은 화장실 하부 구조에 분변의 발효 및 침전 등을 위한 정화수를 유입하는 입수구와 오수를 배출하는 출수구가 있다는 것. 각각 높이를 달리해 설치된 입수구와 출수구 등은 개별 화장실마다 설치된 현대식 정화조 구조와 비슷하다. 바닥과 벽면을 돌로 만들고, 틈새는 진흙으로 메워 분뇨가 새거나 토양에 스며들지 않도록 한 것 역시 현대식 정화조와 비슷한 부분이다. 연구소 관계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현대식 정화조 시설 관련 기술을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유구 터의 토양 분석을 통해 당시 식생활을 분석하는 등 궁궐 사람들의 생활사를 복원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07-0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소정 변관식의 산수화, 진작과 위작 어떻게 가려낼까

    산수화 두 작품이 있다. 산을 그린 기법과 오른쪽에 강을 배치한 구도가 유사하다. 작품 상단에 글씨를 적고 화가의 호와 인장을 찍은 방식도 동일하다. 얼핏 보면 한 사람이 그린 작품 같다. 그러나 하나는 소정(小亭) 변관식(1899∼1976)의 산수화이고 다른 하나는 위작(僞作)이다. 이 사실을 알고 다시 봐도 어느 게 진작(眞作)인지 가려내기는 쉽지 않다. 두 그림을 하나하나 따져 보면 차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진작의 사람과 나무는 각각 다르게 표현돼 있는 반면 위작에서는 대부분 획일적이다. 작품 상단의 글씨 역시 위작에는 진작과 다르게 제작 장소와 시기가 쓰여 있지 않고 인장도 흐릿하다. ‘감식안―창조와 모방의 경계’ 기획전이 내년 3월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 서화와 도자의 진작과 위작 등 80여 점을 소개해 관람객이 직접 위작을 구별해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진위를 가리는 ‘감식안’을 기르는 데 한발 다가설 수 있다. 변관식의 산수화를 지나면 해공(海公) 신익희(1894∼1956)의 휘호 3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중에도 위작이 한 점 있다. 진작 2점과 비교해 보면 위작은 희(熙)자를 쓰는 방식이 다르고 글씨도 더 굵다. 진작을 따라하느라 붓에 힘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위를 구별할 때는 감정의 기준을 제시하는 진품인 ‘기준작’의 존재가 중요하다. 이번 기획전은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이 서화를 수집할 때 감정을 담당한 위창(葦滄) 오세창(1864∼1953)의 감식안에서 영감을 받아 출발했다. 위창의 서화 수집 및 정리 작업 자체가 감식의 기준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위창이 처음부터 뛰어난 감식안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조선과 중국의 서화 작품을 수집해온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다. 위창은 아버지가 수집한 작품들을 따라 쓰고(임서·臨書) 따라 그리며(임모·臨摹) 서화와 전각을 익혔다. 일본 망명 기간에는 일본 서화가들과 교류하며 견문을 넓혔다. 빼어난 작품에 대한 모방과 예술가와의 교류는 전각과 서예에 두루 높은 안목과 예술가로서 독창성을 지닌 위창만의 토대가 됐다. 귀국 이후에도 위창은 예술에 조예가 깊던 당대 문인이나 서화가와 교류하며 감식안을 길렀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 문인, 학자들의 인장을 모은 책 ‘근역인수(槿域印藪)’를 엮는다. 인장은 진품을 담보하는 표시로 여겨지는데, 근역인수는 인장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다. 또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근묵(槿墨)’은 고려 말부터 근대까지 600여 년 동안 유명 인물 1136명이 남긴 글씨를 위창이 모아 만든 서첩으로, 서화 진위 판별에 좋은 기준이 된다. 기획전에서는 고려 이후의 도자도 감상할 수 있다. 고려청자는 10세기 무렵 중국의 특산물이던 도자기를 모방하면서 시작돼 11세기 후반에는 중국의 것과 동등한 수준으로 제작하게 된다. 12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고려만의 비취빛 자기를 탄생시킨다. 관람객은 고려청자가 모방의 단계에서 창작물로 변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무료.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07-0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사고'는 은폐를 통해 '재앙'이 된다

    폭발로 지붕이 사라진 원자로는 연기를 내뿜고 그 주변을 방호복을 입은 경찰, 소방관, 군인들이 분주히 돌아다닌다. 누출된 방사능이 부유하는 도시엔 주말을 맞아 거리를 거닐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연인들과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이들이 있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 1986년 4월 26일, 불과 3.5km 떨어져 있는 두 곳의 모습이다. 이 사고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당시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 책은 체르노빌 사고 당시 폭발한 원자로에서 500km도 안 되는 곳에 거주하던 저자가 사고의 원인과 결과, 교훈을 다룬 역사서다. 역사학자로서 저자는 체르노빌 사고의 원인으로 원자로 설계 결함뿐만 아니라 경제 발전을 가속화하는 데에만 몰두했던 당시 소련 공산당의 기조를 꼬집는다. 사고의 생존자이자 증인인 저자는 소련 정부가 필사적으로 사고에 대한 정보를 숨기는 과정을 생생하게 풀어낸다. 소련 정부는 공황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주민 대피를 늦추고, 공산당의 통제력을 해외에 과시하기 위해 노동절 축하 퍼레이드를 강행했다.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원전 폭발 18일이 지나서야 공식적으로 사고 발생을 인정했다. 원자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소방관의 장례식이 비밀리에 진행되자 고인의 아내가 군인들에게 “왜 내 남편을 숨기는 거예요? 그 사람이 뭘 잘못했기에? 살인자인가요? 범죄자인가요?”라고 외치는 대목은 당시 소련 정부의 정보 통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저자는 체르노빌 사고가 정보를 숨겨온 소련의 정책에 대해 구성원들의 불만을 불러왔고, 이것이 소련의 붕괴에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우리가 이미 일어난 재앙에서 교훈을 얻지 않으면, 새로운 체르노빌식 재앙이 일어날 가능성이 더 크다는 데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재난의 종류는 다르지만 세계는 현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전례 없는 팬데믹을 겪고 있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 소련의 대처와 코로나19 발병 초기 감염병을 은폐하려 했던 중국의 조치가 겹쳐 보인다. 정보 은폐가 더 큰 재앙을 불러왔다는 저자의 주장은 현 시점에서도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07-0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좌우 나뉘어 서로 할퀸 상처는 국가가 저지른 죄… 사과받고 싶어”

    “어렸을 땐 아버지를 좌익으로 몰고 가 죽인 놈들에게 복수하는 꿈만 꿨어요. 이제는 그런 마음이 없어요. 좌든 우든 전쟁으로 부모 잃고 고아로 지내온 세월은 다 똑같더라고요.” 6·25전쟁 당시 충남 홍성에서 좌익으로 몰려 군경의 총에 아버지를 잃은 이종민 씨(73)에게 전쟁은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운 동네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주체하기 어려웠던 때도 있었다. 이제 노인이 된 이 씨는 “동네가 좌우로 쪼개져 화해할 겨를도 없이 세월이 흘러버렸다”며 “집집마다 아픈 사연을 끌어안고 살면서도 말 한마디 못 하고 산 세월이 70년”이라고 했다.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 1기가 출범했을 때 이 씨는 먼저 침묵을 깨고 피해 신고를 했다. “아버지 3형제가 한날한시에 죽임을 당했어요. 빨갱이 자식이란 멍에에 어디 가서 목소리 한번 못 내고 살던 세월을 이루 말할 수 없었죠. 피해를 인정받고 떳떳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이 씨는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명단에 아버지 이름을 올린 뒤에도 진실 규명을 멈추지 않았다. 같은 아픔을 가진 죽마고우 장광훈 씨(74)와 ‘민간인 희생자 홍성유족회’를 꾸렸다. 두 사람은 홍성군 곳곳을 누비며 유족들이 진실화해위 피해자 등록 등 국가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지난 16년간 찾아낸 희생자가 639명에 이른다.“좌우 나뉘어 서로 할퀸 상처는 국가가 저지른 죄… 사과받고 싶어”“유족들 먼저 용기를 내주시면 전국 어디든 찾아갈 준비 돼 있어” “6·25전쟁 때 이웃의 가족이 내 가족을 죽음으로 몰았을 수도 있는데 어느 누가 가족이 당했던 비극을 쉽게 입 밖에 꺼낼 수 있겠어요.” 16년째 충남 홍성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홍성유족회’ 활동을 해온 장광훈 씨(74)는 희생자 유족들을 찾아가 “가슴 깊이 눌러온 아픔을 꺼내놓자고 설득하지만 쉽지 않다”며 이렇게 말했다. 장 씨는 그런 유족들에게 꼭 전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좌우로 나뉘어 서로를 할퀸 상처 모두 국가가 국민에게 저지른 죄입니다. 국가로부터 사과를 받아내야 고인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어요.” 홍성에 살았던 지인섭 씨(73)는 올 1월 난생처음으로 6·25전쟁 당시 가족이 겪었던 참극을 입 밖으로 꺼냈다. 지 씨가 두 살이었던 그해 할아버지가 인민군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평생 가슴에 묻으려 했어요. 괜히 말 꺼냈다가 온 가족이 다 아플 것 같아서요. 하지만 유족회에 찾아가 지난 일을 털어놓고 나니 가슴속 응어리가 풀어졌습니다.” 지 씨가 이런 결심을 하기까지 장 씨의 설득이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장 씨는 지 씨에게 “저도 희생자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고인이 당했던 피해를 입증해 국가로부터 사죄를 받아내야 돌아가신 가족들에게 떳떳하지 않겠어요”라고 했다. 지 씨는 결국 유족회를 찾아와 피해 사실을 털어놨고 지난해 12월 진실화해위원회 2기가 출범하자 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했다. 장 씨와 함께 유족회를 이끌어온 이종민 씨(73)는 이런 사례를 자주 접했다고 한다. 첫 만남 땐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그로부터 몇 달 뒤 또는 몇 년 뒤에야 마음을 여는 경우가 많다. 유족회가 2005년 진실화해위 1기 출범 이후 16년간 찾아낸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가 639명. 올해에만 21명을 추가로 찾아냈다. 이렇게 찾아낸 희생자의 유족 가운데 지 씨처럼 직접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한 사례가 많지는 않다. 이 씨는 “이젠 희생자의 자녀들 나이도 70, 80대다. 노구를 이끌고 직접 서류를 제출하고 피해를 진술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장 씨와 이 씨는 “유족회가 직접 유족들을 찾아다니면서 진술도 받고 서류 접수도 돕고 있다. 유족들이 먼저 용기를 내주기만 하면 전국 어디든 찾아갈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충남 홍성군에서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로 현재까지 207명(13건)이 피해를 인정받았다. 출범 후 6개월이 된 진실화해위 2기에 접수된 진실규명 신청 건수는 현재 530건이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1-06-2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휴지통]퀵으로 마약 받으려던 20대 여성, 배달기사에 덜미

    한밤중에 퀵서비스로 마약을 받으려던 20대 여성이 배달기사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배달기사는 ‘하얀 가루’가 들어있는 걸 보고 경찰에 알렸다고 한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지난달 30일 0시 50분경 용산구 한남동에서 필로폰을 배달받으려던 A 씨를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고 20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배송기사 B 씨는 강남구 역삼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한남동 A 씨 자택으로 물건을 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런데 B 씨는 내용물이 가루인 걸 짐작한 뒤 봉투를 열어보고 투명한 비닐봉지에 하얀 가루가 든 걸 확인해 신고했다고 한다. 출동한 경찰은 잠복해 있다가 A 씨가 집 밖에 나왔을 때 붙잡아 경찰서로 임의 동행했다. A 씨는 30대 남성과 함께 있었으며, 마약에 취한 상태는 아니었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필로폰이 맞다’는 분석 결과를 받았다”며 “서너 명이 함께 투약할 수 있는 양으로 30대 남성도 수사 대상”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역삼동 오피스텔에 마약 판매책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행방을 추적하고 있다.이기욱 71wook@donga.com·이소연 기자}

    • 2021-06-2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맘 편히 가족모임” 환영… 직장회식 부활엔 “기대” “부담” 세대차이

    “원래 이번 달 ‘전역 10주년 모임’을 하려 했는데 열흘 정도 기다렸다가 다음 달 하기로 했어요. 안 그래도 입대 동기가 많아 ‘5인 이상 집합금지’에 걸려 고민이었거든요. 며칠만 참으면 맘 편하게 볼 수 있다니 다들 신났습니다.” 2011년 6월 장교로 전역한 A 씨(37)는 20일 일요일인데도 카톡이 난리가 났다고 한다. 2008년 함께 입대했던 동기 7명의 단체 대화방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가 바뀌었대” “미뤘던 모임을 7월에 하자” 등 속속 글이 올라왔다. 차일피일 미뤘던 모임이었는데 부랴부랴 참석 가능 인원을 확인하느라 오후 내내 부산했다. A 씨는 “몇몇은 백신을 맞아서 가족이 함께 모여 1박 2일 여행을 가도 되겠다는 얘기까지 나왔다”며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여파로 모임다운 모임을 해본 적이 없다 보니 다들 흥분해 있다”며 웃었다.○ “일상 회복 기대” vs “방역 구멍 우려”정부가 20일 다음 달부터 적용하는 새로운 사회적 거리 두기 안을 발표하자 시민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단계적으로 5인 이상 모임이 가능해지고, 음식점이나 헬스클럽 등 다중이용시설 이용 시간도 늘어나 반가워하는 반응이 상당수였다. 하지만 이제야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 코로나19가 느슨해지는 방역 탓에 다시 악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코로나19로 1년 이상 힘겨운 시간을 겪은 터라 정부 발표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민들이 확실히 많았다. 대학원생 김찬교 씨(24)는 “평소 연구실에서 나와 집에 가면 오후 9시가 넘는다. 10시면 문을 닫는 헬스클럽에 가기가 힘들었다. 이젠 24시간 운영한다니 맘 편하게 갈 수 있다”며 기뻐했다. 스포츠 경기장 입장 인원이 대폭 늘어나 ‘직관’에 목말랐던 팬들도 신났다. 프로축구 전북 팬인 정모 씨(23)는 “코로나19로 입장 인원이 제한돼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며 “비수도권은 실외 좌석의 70%까지 가능해진다고 들었다. 친구나 가족과 단체 관람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벌써부터 들뜨는 기분”이라고 전했다. 일부 시민은 방역수칙이 완화되면 다시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어날까 봐 우려했다. 경기 수원시에 사는 주부 B 씨(46)는 “거리 두기 단계가 낮춰지면 사람들이 외부 활동을 더 많이 할 텐데 방역에 구멍이 생길 수도 있어 걱정”이라며 “고교 2학년인 딸을 포함해 아직 가족 중에 아무도 백신을 맞지 못해 더 심란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직장인 회식 문화 살아날까정부 안이 발표되자 직장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회식’에 쏠렸다. 온라인과 소셜미디어 등에서는 회식에 대한 기대와 부담이 팽팽하게 맞섰다. 수도권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한모 과장(40)은 다음 달부터 팀원 6명이 다 함께 모일 수 있어 조만간 회식을 잡을 계획이다. 한 과장은 “그간 팀원 상담 등 한두 명씩 모임을 갖다 보니 주머니 사정엔 오히려 더 부담이 됐다”며 “차라리 한 방에 해결하는 게 편하다”고 전했다. 반면 대기업 사원 C 씨(28)는 “젊은 세대는 상사들과의 술자리를 부담스러워하는 ‘회식 알레르기’가 있다. 코로나19가 끝나도 회식 없이 자기계발에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은 아무래도 방역수칙 완화에 반색하는 입장이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서 음식점을 하는 공해영 씨(44)는 “막상 제한이 풀린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다. 어쨌든 지금보다야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며 “직장인 회식이 늘어나야 매출도 조금은 회복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정부 안이 기대 이하라는 반응도 있었다. 서울 종로구에서 호프집을 운영하는 안모 씨(62)는 “술집은 아무래도 식사를 마친 뒤에 오는 고객들이 많은데, 영업시간이 밤 12시까지면 좀 애매하다”며 “최소 오전 1시까지는 풀어줘야 자영업자들도 숨통이 트일 것”이라며 아쉬워했다.이윤태 oldsport@donga.com·이기욱·오승준 기자}

    • 2021-06-2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봉투 속에 ‘하얀 가루’가… 20대 마약사범 잡은 퀵서비스 기사

    한밤중에 퀵서비스로 마약을 받으려던 20대 여성이 배달기사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배달기사는 배달 물건 안에 ‘하얀 가루’가 들어있는 걸 보고 곧장 경찰에 알렸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지난달 30일 오전 12시 50분경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퀵서비스로 필로폰을 받으려던 20대 여성 A 씨를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고 20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당일 심야 배송을 담당했던 기사 B 씨는 “종이봉투 안에 마약으로 의심되는 하얀 가루가 들어 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B 씨는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한 오피스텔에서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A 씨 자택으로 이 봉투를 전달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봉투를 받아든 B씨는 내용물이 가루라는 걸 직감한 뒤 혹시 마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봉투를 열어보니 투명한 비닐봉지에 하얀 가루가 들어있다는 걸 확인했다고 한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B 씨가 알려준 A 씨 자택 앞에 잠복해 있다가 A 씨가 배달 물건을 받으러 현관 밖으로 나왔을 때 붙잡아 경찰서로 임의 동행했다. 경찰에 따르면 A 씨는 한 30대 남성과 함께 있었으며, 마약에 취한 상태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경찰은 종이봉투에 담긴 하얀 가루를 전량 압수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분석을 맡겼다. 경찰 관계자는 “얼마 전 국과수로부터 해당 가루가 ‘필로폰이 맞다’ 분석 결과를 받았다”며 “서너 명이 함께 투약할 수 있는 양이었다. A 씨와 같이 있던 30대 남성도 수사 대상”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배달기사가 물건을 건네받았던 역삼동 오피스텔에 마약 판매책이 머물렀을 가능성을 있다고 보고 행방을 추적하고 있다. 서울경찰청은 “마약류 범죄는 신고가 매우 중요하다. 신고자에게 보상금을 적극 지급하는 등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을 유도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광주=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06-20
    • 좋아요
    • 코멘트
  • 아무도 울지 않은 코로나 고독사…아버지의 마지막 흔적 [고별 2화]

    “39호! 영감님! 안에 계세요? 문 좀 열어보세요!”서울 동대문구의 한 고시원. 이영숙(가명) 원장이 아무리 불러 봐도 4층 39호실 주민 강정식(가명·79) 씨는 여전히 기척이 없다. 2021년 1월 11일 월요일. 고시원은 오전부터 시끄러웠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이곳마저 덮쳤다. 35호실에 사는 주민이 확진됐다는 소식이 전달됐다. 이 원장은 고시원의 모든 방을 다니며 말했다.“우리 고시원도 확진자가 나왔대. 다들 검사받으러 가셔야 해.”39호실 강 씨만 오전부터 고시원에서 보이지 않고 반응이 없다. 이 원장은 불길한 예감에 문을 힘껏 밀어본다. 아주 좁은 틈새로 안쪽 풍경이 보였다. 핏기가 없는 강 씨의 손이 보였다. 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원장이 손을 뻗어 만진 강 씨의 손은 싸늘했다.깜짝 놀란 이 원장. 그는 다급하게 휴대전화를 꺼내 119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신고 시간 오후 5시 59분. 구급대원들이 5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무리 밀어도 39호실의 문은 꼼짝하지 않았다. 결국 고시원 복도로 난 창문을 뜯고 진입했다. 발견 시간 오후 6시 20분. 이미 강 씨는 숨이 끊긴 상태였다. 향년 79세. 강 씨는 1평 남짓한 고시원 방에서 홀로 눈을 감았다.시신은 병원으로 옮겨졌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공간에서 숨을 거둔 만큼 검사부터 진행됐다. 다음 날 확진 판정이 나왔다. 부검이나 역학조사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밀접 밀폐 밀집 등 이른바 ‘3밀’ 환경인 고시원에선 강 씨를 포함해 6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10일 늦은 시간까지 기척이 들렸다는 옆방 주민의 진술에 따라 사망 일시는 ‘11일 0시 추정’으로 남았다. 숨진 뒤 18시간이 지나서야 발견된 ‘코로나19 고독사’였다.46년 전 떠난 아버지가 ‘코로나 사망자’로 돌아왔다2021년 1월 12일 화요일 오후. 강상준(가명·50) 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혹시, 강상준 선생님이 맞으실까요?”“네, 제가 맞습니다.”“…주민센터입니다. 아버님이 강정식 선생님이시죠? 부친께서 어제 오후에 홀로 계시다가 소천하셨습니다.”상준 씨는 “아…”라고 입을 떼다 한참 뜸을 들였다. 아버지란 단어를 입에 담아 불러보는 게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아버지는…. 어떻게 지내다가 떠나셨습니까?”“돌아가시기 전까지 고시원에서 혼자 지내셨어요.”상준 씨는 당황스러웠다. 덤덤했고, 슬픈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46년 전 어머니와 삼 형제를 떠났다. 상준 씨 기억에 아버지는 한 번도 가족들을 따뜻하게 안아준 적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혼자 세상을 떠났다고 했을 때, 상준 씨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1975년 어느 날. 아버지가 집을 떠났다. 당시 상준 씨는 네 살, 남동생은 갓 돌을 지났을 때였다. 이혼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서울로 갔다는 것만 어렴풋이 들었다. 어머니도 삼 형제를 키울 상황이 안 됐다. 충남 논산시에 남은 삼 형제는 결국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아버지가 떠나고 삼 형제는 가난하게 자랐다. 할머니는 논에서 이삭을 주워가며 손자들을 거둬 먹였다. 상준 씨의 형은 차비를 아끼기 위해 10km 거리의 등굣길을 고물 자전거로 다니며 버텼다. 아버지가 가끔씩 보내준 적은 액수의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삼 형제는 가족을 떠난 아버지를 원망하고, 또 미워하며 자랐다.2009년 1월 늦은 밤. 강 씨는 조심스럽게 몸을 뉘었다. 그동안 본 적이 없었던 낯선 천장. 키가 180cm에 가까운 강 씨의 발가락 끝에 고시원 벽이 닿을 듯 말 듯했다. 예순일곱 나이에 맞이한 비좁은 고시원에서의 첫날. 추위를 뚫고 구로구에서 동대문구까지 홀로 무거운 이삿짐을 날랐다.수중에 돈이라곤 없었다. 직장에서의 은퇴 뒤 두 번째 이혼. 강 씨는 당장 첫 달 월세 23만 원이 없어 친구에게서 빌렸다. 다 큰 삼 형제에겐 손 벌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월 20만~30만 원의 기초연금으로 버티면서 간혹 친구를 통해 일거리를 구해 월세와 생활비 등을 충당했다.‘외딴 섬’ 고시원에서 홀로 몸부림쳤던 아버지홀로 시작한 고시원 생활은 생각보다 더 괴로웠다. 고시원은 ‘외딴 섬’이었다. 방에서 홀로 누워 있으면 외로움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강 씨는 그럴수록 더 몸부림쳤다. 아침마다 장을 봐 직접 요리를 해먹었다. 꼭 세탁소에서 다림질한 셔츠와 정장을 갖춰 입고 외출했다. 고시원 근처 청과물 가게에서 싸게 내놓은 과일을 가끔씩 사와 고시원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인사를 건넸다. 외딴 섬 고시원에서 느끼는 노년의 외로움을 이렇게 달래곤 했다.“강 선생님이 딸기 같은 것을 잔뜩 가져오셔서 나눠주면 총무나 주민들이 좋아했어요. 고시원에서 신선한 과일을 먹기가 쉽지 않잖아요. 고시원에서 지내는 20대 학생들은 아예 강 선생님을 ‘키 큰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꾸벅 인사를 했죠. 총무들도 ‘선생님’이라고 하면서 잘 따랐고요.”(당시 고시원의 이신우 실장)“고시원에 오시는 여느 분과는 좀 달랐어요. ‘순둥이’라고나 할까. 점잖으시고, 남한테 폐 끼치는 행동은 절대 안 하셨어요. 언젠가 넌지시 자녀 얘기를 에둘러 꺼내신 적도 있긴 해요. 왠지 남모를 아픔이 느껴져 자세히 여쭤보진 못했죠.”(당시 고시원의 김종근 원장)세월은 강 씨와 삼 형제의 관계를 돌려놓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와 아들들은 가끔 안부 전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저 오가는 형식적인 말이 대부분이었다. 서로에게 진심을 담은 따뜻한 말은 건네지 못했다. 상준 씨는 아버지가 고시원에서 혼자 생활한다는 걸 알게 된 뒤 고심 끝에 동생에게 털어놨다.“그래도 아버지인데, 우리가 용돈이라도 모아서 보내드리자.”동생의 반응은 생각보다도 더 차가웠다.“글쎄요, 형. 전 좀 생각해볼게요.”상준 씨는 처음에는 동생에게 화도 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이 이해가 됐다. 동생이 말도 떼기 전에 떠난 아버지. 힘들 때 곁에 없었던 아버지. 동생에게 아버지에 대한 정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아버지 없이 커서 삶이 팍팍했어요. 세상살이에 지치기도 많이 지쳤고요. 2016년 영등포역 근처에서 얼굴 뵌 게 마지막이었어요. 누굴 돌볼 여력조차 없었습니다.” (상준 씨)2020년 12월 20일 일요일. 강 씨는 12년을 보낸 고시원을 떠났다. 건물의 재개발 결정으로 모든 주민들이 쫓겨나듯이 나와야 했다. 어렵사리 찾은 동대문구의 다른 고시원. 살던 곳보단 낡고 퀴퀴했지만 강 씨는 비슷한 월세에 만족했다. 그는 처음 고시원에 들어올 때처럼 추위 속에서 쓸쓸히 무거운 이삿짐을 날랐다.일흔여덟의 나이. 강 씨는 다시 낯선 천장을 마주했다. 좁디좁은 방과 어두운 복도. 그리고 새로운 고시원 주민들. 하지만 강 씨가 이곳에서 머물 수 있었던 기간은 3주밖에 안 됐다.고인이 떠난 곳에 남은 건 박카스 10병과 동전 뭉텅이 뿐2021년 1월 13일 오후 5시경. 서울추모공원에는 전날 내린 흰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시간이 지난 뒤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일반 사망자의 화장이 모두 끝난 뒤, 코로나19 사망자의 화장 절차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아버지의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상준 씨의 형(52)이 대전에서 이곳을 찾았다. 코로나19 감염 우려 탓에 큰아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가까이 지켜볼 수도 없었다. 그래도 큰아들은 1시간 넘게 자리를 지켜 아버지의 유골을 직접 품에 안았다. 이미 오래전 삼 형제에게서 멀어진 아버지를, 이제는 영영 떠나보내기 위해.강 씨가 머문 고시원 39호실에 설치됐던 폴리스라인은 일주일이 지나자 경찰이 거둬갔다. 삼 형제는 아버지가 살았던 고시원을 찾지 않았다. 고시원에서 여러 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해 갈 수도 없었다. 삼 형제는 아버지의 유품을 직접 정리하지 않겠다는 뜻을 동대문구와 보건소 측에 전달했다.강 씨가 남기고 떠난 흔적은 방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영숙 고시원장은 강 씨의 유품을 하나씩 자루에 담았다. 바닥과 침대에 널브러진 옷가지와 각종 서류들. 10원, 50원짜리 동전 뭉텅이. 먹다 남은 채로 까맣게 썩은 밥그릇.강 씨에게 무엇이 소중한 물건이었는지, 또 세상에 남기고 싶은 게 있었는지. 이 원장은 알 길이 없었다. 남은 이는 죽은 자의 흔적을 모두 쓸어 담고 정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방 안 모퉁이에서 박카스 빈병 10개가 나왔다. 강 씨가 마시고 남은 흔적이었다.“강 씨가 떠나기 전에 유독 기침소리가 컸어. 자다가 다들 깰 정도로 자주 기침을 했지. 그러면서 박카스를 엄청 마시더라고. 딱히 약을 먹거나 병원에 다니는 것 같진 않았어. 박카스가 어쩌면 그 사람이 유일하게 건강을 챙기는 수단이 아니었을까.”(옆 방 38호실 이웃)“당황스러웠어요.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단 전화를 받았을 때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결국 이렇게 떠나셨구나….’ 이 생각뿐이었어요.”상준 씨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소식을 전달받은 날을 떠올리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어렸을 때부터 최근까지 저희는 아버지와 ‘정’을 나눈 기억이 없어요.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죠.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거든요. 저희에게 남은 건, 아버지 유골이 담긴 네모난 상자뿐이었어요. 그걸 보니 가슴 한쪽이 먹먹해지더라고요. 이게 제가 느낀 감정의 전부였어요. 아버지가 떠난 뒤, 저는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 걸까요.”코로나19가 아니었어도 강 씨와 삼 형제의 관계는 회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들의 뒤틀린 관계는 46년 전부터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코로나19만 없었다면 조금 더 먼 훗날에 아버지와 아들들은 함께 만나 웃으며 정을 나눌 수 있는 순간이 찾아왔을까. 강 씨는 삼 형제와 손자, 손녀들을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었을까.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코로나19가 실낱같은 가능성마저 없애버렸을 뿐이다.사망 후 확진 판정을 받은 강 씨의 유골은 어린 시절 삼 형제와 함께 살았던 충남 논산에 조용히 안치됐다. ‘서울 2만1915번 확진자’란 이름으로 기록된 채. ::히어로콘텐츠팀::▽총괄 팀장 : 지민구 기자 warum@donga.com▽기사 취재: 이윤태 김윤이 이기욱 기자▽사진 취재: 송은석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프로젝트 기획: 이샘물 이지훈 기자▽사이트 제작: 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개발 최경선 ‘고별-아무도 울지 않은 코로나 죽음’ 디지털페이지(original.donga.com/2021/covid-death2)에서 더 많은 영상과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익스플로러 브라우저는 지원하지 않습니다)}

    • 2021-06-15
    • 좋아요
    • 코멘트
  • 아무도 울지않은 코로나 고독사…한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고별 1화]

    그는 지금도 가끔 그날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전화를 받은 그날.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던 어머니. 4월 6일. 서정수 씨(가명·40)에게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경기 의왕경찰서입니다. 어머니이신 김은숙(가명) 선생님이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정수 씨는 ‘어머니’란 단어가 생경했다. 36년 전 집을 떠난 뒤 평생 연락 한번 나눈 적 없는 어머니. 남보다 멀게 느껴졌던 어머니. 가족도 없이 홀로 다세대주택에서 지내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확진돼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정수 씨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정수 씨와 큰 딸인 누나(45)는 어머니의 시신 인계를 거절했다. 둘째 딸은 연락도 닿지 않았다. 의왕시와 보건소는 유족으로부터 ‘사체 포기 각서’를 받아 4월7일 어머니 김 씨의 시신을 화장했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지난해 1월 20일 국내 첫 코로나19 확진자 발생. 올 5월 말까지 498일째 이어진 길고 긴 코로나19 재난 상황. 그동안 14만799명의 확진자가 나왔고 1963명이 코로나19로 목숨을 잃었다. 감염병 재난 국면에서 소중하고 귀한 생명이 덧없이 쓰러졌다. 모두 누군가의 소중하고 귀한 가족이자 이웃이었다. 숨진 이들 가운데 9명(올 4월 말 기준)은 세상이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뒤, 아무도 돌보지 않은 죽음. 사랑하는 이의 배웅조차 받지 못한 고인. 오래 전 헤어진 딸과 아들이 시신 인계를 거절한 김은숙 씨(가명·67)도 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였다.지독한 허리 통증과 고열…도와줄 가족 없이 홀로 숨진 어머니“몸이 많이 아파…. 일도 못 나가고 꼼짝을 못 하겠어.”2021년 4월 3일 토요일 경기 의왕시의 다세대주택 101호. 김은숙 씨는 몸을 옴짝달싹 할 수도 없었다. 지독한 허리 통증과 고열로 세상이 빙빙 도는 기분이 들었다. 이러기를 벌써 며칠 째. 김 씨는 식사는커녕 대소변을 스스로 가리지도 못했다.홀로 사는 그를 도와줄 가족은 없었다. 하필 옆집 102호 아주머니마저 가족을 만나러 간다며 한동안 집을 비웠다. 김 씨는 마지막 힘을 짜내 이웃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102호 아주머니는 목소리만 들어도 김 씨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주말이 지나고 5일 월요일. 102호 아주머니와 또 다른 이웃은 김 씨를 부축해 근처 병원으로 갔다. 하지만 병원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고열 증세를 보였던 김 씨. 병원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검사부터 받을 것을 권했다. 이들은 다시 의왕보건소로 발길을 돌렸다.세 명 모두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집에서 대기하는 것 말고는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서로에게 별 일이 없기만을 기원하면서. 6일 오전 8시50분경. 102호 아주머니에게 먼저 전화가 걸려왔다. 보건소였다.“선생님, 코로나19 검사 결과는 음성입니다. 그런데 확진자와 밀접 접촉이라 2주 간 자가 격리를 하셔야 해요.”확진자는 고열 증세를 보였던 김 씨였다. 102호 아주머니는 부리나케 김 씨의 집 앞으로 뛰쳐갔다. 문을 두드리고 불러 봐도 반응이 없는 김 씨. 전화도 받지 않았다. 집 안 형광등만 환히 켜져 있었다. 102호 아주머니는 다급히 119로 전화를 걸었다.“옆 집 할머니가 아무리 불러도 인기척이 없어요. …얼른 좀 와주세요.”구급대가 긴급 출동해 잠겨 있는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갔다. 이미 김 씨는 숨을 거둔 상태였다. 오전 9시26분. 구급대는 의료 지도를 받아 김 씨의 사망 판정을 내렸다. 코로나19 확진자인 김 씨는 부검을 할 수 없었다. 방역당국의 역학조사도 불가능했다. 그의 정확한 사인과 사망시간은 모두 ‘불명’으로 남았다. 김 씨의 딸과 아들은 시신 인계를 거부했다.삼남매 두고 떠나온 집…평생 눈에 밟혔던 아이들1985년의 어느 날. 김 씨는 밤에 몰래 집을 나왔다. 잠들어있는 삼남매를 내버려둔 채였다. 아홉 살이었던 김 씨의 첫 딸만 잠결에 어렴풋이 기억하는 장면. 몇 살 터울의 동생들은 어머니가 떠나는 마지막 뒷모습도 보지 못했다.집을 떠나면서도 끝까지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하지만 김 씨는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다. 술만 마시면 손찌검을 하는 남편. 임신 중일 때도 남편의 폭력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걸핏하면 “돈을 달라”며 집에 남은 몇 푼 안 되는 생활비까지 몰래 가져갔다.‘이대로 있다간 죽는다.’김 씨는 살고 싶었다. 언젠가 돈을 모아 아이들을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했다. 서울로 온 김 씨는 악착같이 살았다. 식당과 슈퍼마켓 등에서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벌었다. 시누이인 아이들의 고모가 삼남매를 키운다는 소식을 들었다. 생계에 지친 김 씨가 삼남매를 만나고 싶어 전화했더니 시누이는 단칼에 자르고는 전화를 끊었다.“애들이 (자기들 버린) 엄마 안 만나고 싶대.”남편의 폭력을 피해 아이들을 떠나온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겼던 김 씨는 눈을 감을 때까지 시누이의 말이 사실인 줄 알았다.둘째 딸 죽은 줄도, 남은 아이들 보육원에 맡겨진 것도 몰랐다2002년 의왕시.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아끼며 모으고 살았던 김 씨는 작은 호프집을 열었다. 가족을 떠나온 지 17년 만이었다. 테이블 몇 개뿐인 작은 호프집이었지만 김 씨는 큰 보람을 느꼈다.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매일 새벽 시장에서 직접 재료를 사와 음식을 만들었다. 손맛이 좋고 정성껏 대접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단골도 늘었다. 자정 넘어서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김 씨는 씩씩하게 호프집을 꾸려갔다.주변에서 여러 가게가 생기고 사라졌지만 김 씨의 호프집은 그 자리를 지켰다. 동네 상인과 주민들은 김 씨를 ‘터줏대감’이라고 불렀다. 터줏대감 김 씨는 가끔씩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헤어져 있는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였다.“삼남매가 멀리 경상도에서 시누이와 살고 있다고만 들었어요. 돈이라도 좀 부쳐주고 싶은데, 그걸 전달할 방법도 없네요.”김 씨는 아이들 생각이 날 때마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그리움을 억지로 삼켰다. 2019년부터였다. 김 씨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상하게 발이 붓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찼다. 심부전증에 고혈압 증세까지 온 김 씨는 약을 달고 살았다.이듬해엔 더 큰 난관이 닥쳤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김 씨는 몇 달 간 가게 문을 열지 못했다. 모아둔 돈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 월세는 쌓이고 병원비 부담도 커져만 갔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호프집에 나갔지만 몸도 마음도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온 김 씨. 그때는 다시 호프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2021년 5월 1일. 빗줄기는 강한 바람을 타고 조금씩 굵어졌고, 차량 와이퍼는 바쁘게 돌아갔다. 서정수 씨(가명·40)와 부인은 경남 김해시에서 4시간 반을 달려 의왕시에 도착했다. 다세대주택 101호 앞 화단에는 비를 머금은 초록 잎사귀들이 있었다. 주민 할아버지는 “김 씨가 애지중지하며 키운 식물들”이라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수 씨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전화를 받은 이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지만 이렇게 떠나보는 게 맞는 걸까.’고민을 거듭하다가 부인과 상의 끝에 어머니가 살던 집을 찾았다. 어머니의 유품을 하나씩 정리했다. 그곳에선 어머니의 사진도 나왔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어머니의 얼굴. 정수 씨는 사진을 찍어 함께 오지 못한 큰 누나(45)에게 보냈다.“내 얼굴과 많이 닮았어….”김 씨가 잘 살고 있으리라 믿었던 삼남매였지만, 그들은 이미 삼남매가 아니었다. 정수 씨의 작은 누나는 여섯 살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김 씨가 집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뒤였다. 정수 씨의 아버지도 뒤를 따랐다. 알코올중독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 후 숨을 거뒀다.시누이가 김 씨에게 전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큰 누나와 정수 씨는 친척들 손에 자라거나 도움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한 뒤 고아원에 버려져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그곳에서 생활했다. 친척들과는 연락이 닿지도 않았고, 어머니가 자신들을 찾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듣지 못했다. “김 씨는 둘째 딸 죽은 건 아예 몰랐어. 언제나 삼남매 보고 싶다고 했지. 애들이 안 보고 싶어 해서 찾아갈 수 없다고 했어. 고모랑 친척들이 애들 거둬서 잘 키워주고 있다고만 믿었어. 김 씨는 마지막까지 그렇게 알고 갔어.” (이웃주민)삼남매 그리워했다는 어머니의 진심… 돌아가신 뒤에 알게 돼5월 2일 일요일. 정수 씨와 부인은 어머니가 운영하던 호프집 정리도 끝냈다. 이를 지켜보던 맞은 편 슈퍼마켓 주인이 정수 씨 부부에게 따뜻한 커피 한잔을 타서 건넸다. 이런저런 사연을 물어봐도 정수 씨는 불편해하거나 피곤한 티도 내지 않고 이야길 꺼냈다.“잠깐밖에 얘기를 못 나눴지만, 아들 부부가 참하고 착합디다. 평생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고…. 어머니를 원망하는 눈치는 아니었어요.” (슈퍼마켓 주인)아들 정수 씨는 언론과 직접 접촉하길 꺼렸다. 오랜 고민 끝에 부인이 대신 이야기를 전했다.“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남편이 한동안 힘들어했어요. 아무래도 저희는 다른 유족과는 다른 상황이었으니까요. 다른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죠. 그래도 어머니인데 마지막 가시는 길을 그렇게 보낸 게 마음이 좋지 않았죠. (유품을 정리한 건) 자식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거예요.”말을 마치고 잠시 망설이던 정수 씨의 부인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이번에 남편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었어요. 어머니도 자신들을 그리워했단 것을요. 어머니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떠난 어머니가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었는데…. 사실은 어머님도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찾질 못 했던 거였네요.”‘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 김은숙 씨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평생 가슴의 한이었던 삼남매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로 쓸쓸히 눈을 감았다. 결국 얼마나 아이들이 그리웠는지 한 마디 말도 못했다.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이제는 모두 불가능한 일이 돼버렸다. 이미 떠나 버린 고인. 의왕시 봉안소에 안치된 김은숙 씨의 유골은 말이 없다. ::히어로콘텐츠팀::▽총괄 팀장 : 지민구 기자 warum@donga.com▽기사 취재: 이윤태 김윤이 이기욱 기자▽사진 취재: 송은석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프로젝트 기획: 이샘물 이지훈 기자▽사이트 제작: 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개발 최경선 ‘고별-아무도 울지 않은 코로나 죽음’ 디지털페이지(original.donga.com/2021/covid-death1)에서 더 많은 영상과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익스플로러 브라우저는 지원하지 않습니다)}

    • 2021-06-14
    • 좋아요
    • 코멘트
  • “이런 날벼락이…” 붕괴참사 7명 ‘눈물의 발인식’

    “딸이 살아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마른하늘에 이런 날벼락이 어딨나요.” 12일 광주 동구 조선대병원 장례식장. 9일 발생한 광주 재개발 철거 건물 붕괴 사고로 숨진 김모 씨(30)의 작은아버지가 분통을 터뜨렸다. 딸만 다섯인 집의 막내인 김 씨는 그날 아버지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다 참변을 당했다. 김 씨의 어머니는 막내를 실은 관이 운구차로 옮겨지자 가슴을 부여잡고 흐느꼈다. 언니들은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부축했다. 김 씨는 암 투병 중인 어머니의 병원으로 가려고 아버지와 함께 버스에 탔다. 현재 중환자실에서 치료 중인 아버지(69)는 김 씨의 발인이 진행된 이날에도 딸의 부고를 알지 못했다. 12, 13일 광주에서는 사망자 9명 가운데 7명의 발인식이 엄수됐다. 큰아들의 생일 미역국을 끓여놓고 식당 일을 가다 변을 당한 곽모 씨(64·여)의 발인도 12일 진행됐다. 한 유족은 “이렇게 착하고 고운 사람이 왜 먼저 가냐”며 운구차를 뒤따라 한 걸음씩 걸으며 합장했다. 13일 광주 북구 구호전장례식장에서는 상복을 입은 앳된 손자 두 명이 할머니인 김모 씨(71) 영정과 위패를 품에 안고 장례식장을 나섰다. 김 씨는 9일 지역노인 가정방문 봉사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 사고를 당했다. 딸 이모 씨(44)는 어머니가 누워있는 관이 화로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광주 동구청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도 추모 발길이 이어졌다. 참변을 당한 고등학교 2학년 김모 군(17)의 학교 후배 A 군(16)도 이날 분향소를 찾았다. A 군은 “사고 당일 선배를 학교에서 잠깐 마주쳤다”며 “먼저 다가와주고 후배를 걱정해주는 좋은 선배였다”고 회상했다. 이날까지 3000여 명의 시민들이 분향소를 찾았다.광주=이기욱 71wook@donga.com·김수현 기자}

    • 2021-06-1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30분 얘기할 시간도 없냐던 엄마, 마지막 될 줄은…”

    “며칠 전 엄마가 저한테 그랬어요. 뭐가 그렇게 바쁘냐고, 30분도 얘기할 시간이 없느냐고…. 그게 엄마의 마지막 말이 될 줄은 몰랐어요.” 11일 광주 북구의 구호전장례식장. 9일 발생한 광주 재개발 철거 건물 붕괴 사고로 목숨을 잃은 김모 씨(71·여)의 딸 이모 씨(44)의 목소리에는 짙은 후회가 배어 있었다. 김 씨는 ‘54번 버스’에 타고 가다 버스 위로 갑자기 무너져 내린 건물 더미에 깔려 참변을 당한 사망자 9명 중 한 명이다. 사고가 발생한 동구 학동에서 30년 넘게 살았던 김 씨는 평일이면 인근 지역 노인들의 말벗이 되는 봉사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이 씨는 “어머니가 워낙 활발한 성격에 (고령임에도) 건강하셨다. 사고 당일에도 동구 계림동에서 가정방문 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했다. “지난주 토요일에 마지막으로 엄마를 봤어요. ‘상추 따놨으니 가져다 먹으라’고 하도 말씀하셔서 엄마 집에 잠시 들러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상추만 받아 갔어요. 그때 잠깐이라도 엄마랑 얘기를 나눌걸…. 후회돼서 미칠 것만 같아요.” 9일 버스에서 구조된 한 70대 노모는 건물이 무너져 온몸이 짓눌린 상황에서도 아들만 걱정했다고 한다. 친구들과 산행 후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A 씨는 건물 잔해가 덮친 순간 아들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A 씨는 힘겨운 목소리로 아들에게 “위에서 뭐가 무너져 가지고 확 내려앉았다. 숨을 못 쉬겠다”고 하면서도 “그러니까 (너는) 조심히 오라”고 당부했다. 앞좌석에 앉은 A 씨는 붕괴 직후 구조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동행했던 친구 1명은 숨졌다. 광주=이기욱 71wook@donga.com·이윤태 기자}

    • 2021-06-1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