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욱

이기욱 기자

동아일보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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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 익숙해질 때쯤 다시 경찰서로 돌아왔습니다. 유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여러분의 이야기를 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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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6-01-08~2026-02-07
사건·범죄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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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日상대 외교전 뒤엔 국내외 단체 자금 지원”

    1921년 10월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1879∼1922)은 동아시아 평화에 한국 독립이 필수인 만큼 일본 정부가 이를 태평양회의에서 논의하도록 압박해 달라는 편지를 일본 시민단체들에 보냈다. 이어 중국 광둥(廣東)성에 호법정부를 수립한 쑨원(孫文·1866∼1925)을 찾아가 임정 승인과 태평양회의 공동 대처를 요청했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태평양회의는 1921년 11월 11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회의다. 미국 영국 중국 일본 등 9개국 대표들이 참석해 해군 군비 축소와 아시아태평양 지역 평화 문제를 논의했다.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은 최근 ‘태평양회의와 독립운동가들’ 학술회의를 열고 태평양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해 외교적 해법을 모색한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을 상대로도 외교전을 펼쳤으며 외교전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국내외 단체들의 자금 지원이 있었다.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1877∼1946)은 대표단 파견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를 중국 상하이에서 결성했다. ‘어떤 나라든 우리 독립을 방해하는 자는 우리의 적’이라는 문구를 담은 홍보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장형(1889∼1964)은 국내에서 반도고학생친목회를 조직해 지원 자금을 모았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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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쑨원에 외교전, 국내외선 자금 모금…독립운동가들의 고군분투

    “우리나라를 욕심을 낸 나라는 귀국이다. 귀국은 국제조약에 따라 태평양회의에서 한국독립 문제를 제출해주기 바란다.” 1921년 10월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1879~1922)이 일본 시민단체들에 보낸 편지글 중 일부다. 동아시아 평화에 한국 독립이 필수인 만큼 일본 정부가 이 문제를 태평양회의에서 논의하도록 시민단체들이 압박해달라는 것. 당시 국제사회에서 승인 받지 못한 임정은 일본 내 양심적 시민단체들을 설득하고자 했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태평양회의는 1921년 11월 11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회의다. 미국 영국 중국 일본 등 9개국 대표들이 참석해 해군 군비축소와 아시아 태평양지역 평화문제를 논의했다. 최근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은 ‘태평양회의와 독립운동가들’ 학술회의를 열고 태평양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해 외교적 해법을 모색한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했다. 임정의 한국 대표단 파견이 결국 실패하고 태평양회의에서 한국 독립 문제도 다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념과 소속 단체를 막론하고 힘을 모아 회의를 성사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김희곤 전 경북독립기념관장은 학술회의에 발표한 논문 ‘태평양회의와 신규식’에서 신규식이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을 상대로도 외교전을 펼쳤다는 것을 강조했다. 1921년 10월 12일에는 중국 광둥(廣東)성에서 수립한 쑨원(孫文·1866~1925)의 호법정부를 방문해 쑨원을 만났다. 신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태평양회의에 공동으로 대처할 것을 요청했다. 쑨원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광둥국회에서 한국독립승인안을 통과시켰으며, 신규식과 중한협회(中韓協會)를 설립해 태평양회의에 대한 한중의 요구조건을 전보로 제출했다. 신규식이 외교전을 펼칠 수 있던 배경에는 국내외 단체들의 자금 지원이 있었다. 김용달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태평양회의와 홍진’ 논문에서 임시의정원 의장이었던 홍진(1877~1946)을 조명했다. 홍진은 태평양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1921년 8월 13일 상해에서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외교후원회)를 결성해 대표단이 회의에 참가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어떤 나라든 우리 독립을 방해하는 자는 곧 우리의 적이다’는 선언서를 담은 홍보지 ‘선전’(宣傳)을 발행해 태평양회의 참가국들에게 한국 독립을 승인할 것을 요구했다. 국내에는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한국인 입학생 모집 임무를 수행했던 독립운동가 장형(1889~1964)이 있었다. 박성순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태평양회의와 장형’ 논문에서 장형이 국내에서 임시정부를 지원할 자금을 모금했다고 설명했다. 상해에서 외교후원회가 조직되던 날 장형은 국내 경제인 단체였던 상공진흥회 회원 가운데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반도고학생친목회’(半島苦學生親睦會)를 조직했다. 외교후원회가 국내에 파견한 서무간사 여운홍(1891~1973)은 반도고학생친목회에 합류했고, 장형은 여운홍과 함께 국내에 태평양회의를 알리고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전국으로 순회강연을 다녔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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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난 선포하고 국가서 제사까지… 정조의 ‘독감 대유행’ 신속 대처법

    ‘마을에 또 괴이한 병이 생겼다. 이 병에 걸리면 순식간에 사람이 죽는다. 한양 사람들이 상주 없는 시신을 실어 날라 짚으로 덮어 쌓아둔 게 산과 같다고 한다.’ 조선시대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 살던 류의목(1785∼1833)이 1796∼1802년에 쓴 일기 ‘하와일록(河窩日錄)’의 1799년 독감 관련 기록이다. 김정운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은 최근 전국역사학대회에 발표한 논문 ‘1799년 독감과 국가의 대응 방식’에서 조선 사회의 전염병 대응방식을 다뤘다. 하와일록에 따르면 독감 창궐 두 달여 만에 하회마을에서만 약 400명이 사망했고 한양에서는 6만3000여 명이 숨졌다. 당시 홍문관 대제학과 우의정을 지낸 김종수(1728∼1799),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1720∼1799)을 비롯해 전국 8도 관찰사 8명 중 7명이 독감으로 목숨을 잃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역병이 돌자 백성들 사이에서는 괴소문이 퍼졌다. ‘호인(胡人·청나라 사람)이 단지 2개를 조선에 가져왔는데 하나는 창질(瘡疾·피부병) 단지이고, 하나는 감기 단지다. 지금 이 병은 감기 단지에서 나온 것’이라는 루머였다. 지금이야 독감이 중병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마땅한 치료제가 없었다. 류의목은 일기에 ‘소고기가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되기에 요즘 시골 거리에서 소를 많이 잡는다’고 썼다. 잘 먹고 쉬는 것 외에 뾰족한 대응법이 없던 서민들이 평소 먹기 힘든 소고기로 효험을 기대한 것이다. 농사에 필수인 소를 도축해야 할 정도로 당시 독감 피해가 극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정은 국가적 재난상황에 바싹 긴장했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국가 재난상황을 선포하고 약 20일 만에 대책을 마련한 후 매일 이행사항을 보고받았다. 진휼청(賑恤廳)에 빈민들을 모아 치료하고, 각 지방에도 임시 치료시설을 만들었다. 백성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조세를 줄이고 감염 방지를 위해 군역도 일시 중단했다. 무엇보다 민심 수습에 역점을 뒀다. 여귀(厲鬼·전염병을 퍼뜨리는 귀신)가 병을 일으켰다고 믿는 백성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냈다. 시신 매장을 위한 별도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민간 토지를 매입하기도 했다. 당시는 3년상이 관례였지만 전염병으로 죽은 시신은 철저히 격리해야 했다. 땅이 부족해 시신 매장에 어려움을 겪자 국가가 나선 것. 하와일록에 따르면 백성들은 “임금이 시신 묻을 곳이 없는 가련한 백성들을 위해 슬퍼했다”고 했다. 김 연구원은 “정조는 전염병 사태 속에서도 백성을 위로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도를 통해 재난에 신속하게 대응했다”고 강조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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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품 플렉스, 탄탄한 몸매, 정치인 저격으로 ‘좋아요’를 산 2030

    ‘지금 여의도 ○○ 고깃집에서 한우 먹을 사람, 선착순 3명!’ 서울 여의도 증권가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는 조정호(가명·31) 씨는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이런 글을 종종 올린다. 팔로어들의 충성도를 수시로 확인하기 위한 것. 이들은 ‘우왕 맛나겠당. 저도 사주세요’ ‘지금 홍대인데 바로 한강 건넙니다’ 등의 댓글을 남기며 환호한다. 인스타그램에는 본인 소유의 벤틀리 등 고급 자동차 사진이 즐비하다. 이른바 ‘금수저’인 그는 8년 전 부모 도움으로 성형수술도 받았다. 약 10만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어 중 상당수가 그의 물질적 과시에 열광한다. 최근 출간된 ‘구독, 좋아요, 알림설정까지’(천년의상상)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2000명 이상의 팔로어를 보유한 2030세대 인플루언서 325명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연세대 경영학과 박사과정생인 저자 정연욱 씨(38)가 이들을 심층 인터뷰해 어떤 심리로 SNS에서 활동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 분석한 결과물. 정 씨는 “SNS를 통해 큰 노력 없이 유명해지는 게 가능해졌다”며 “2030세대가 자기 과시나 현실 탈피의 수단으로 SNS를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정 씨는 책에서 인플루언서를 물질파, 육체파, 정신파로 분류한다. 물질파는 조 씨처럼 SNS를 통해 자신의 부를 과시하며 인기를 얻는다. 이들은 돈으로 인기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팔로어들이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면 인간관계에서 공허함을 느끼기 일쑤다. 육체파는 외모를 강조해 유명세를 얻은 이들로 연예인 지망생이 많다. 예컨대 보디클렌저 모델인 김준(가명·26) 씨는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20만 명이 넘는다. 탄탄한 몸매와 뚜렷한 이목구비로 태국에서도 관심을 끌 정도. 그의 계정에는 ‘Oppa, Where are you?(오빠 어딨어?)’라는 글을 다는 태국 여성들이 적지 않다. 팔로어들은 그의 벗은 몸에 높은 관심을 보인다. 이 때문에 김 씨는 광고 촬영 때 속옷까지 벗으라는 요구를 받기도 했다. 그는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내면이 아닌 외모로만 평가받는 것 같아 불안하다고 했다. 정신파는 지적 능력으로 승부를 건다. 정치, 사회, 문화에 걸쳐 대중이 관심을 갖는 이슈에 대해 소위 ‘썰’을 푸는 식이다. 하지만 현실은 업무 시간에 상사의 눈을 피해 SNS 글을 올리는 월급쟁이들이 적지 않다. SNS에 과하게 몰입한 나머지 업무성과가 떨어지고 오프라인 인간관계에 취약한 이들도 있다. 국내 대기업에 다니는 이우성(가명·32) 씨가 대표적인 사례. 그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페이스북 정치비평 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렀는지부터 확인한다. 주로 정치인을 저격한 글에 대한 반응이 좋은 편이다. 소신 발언을 하다 공천에서 탈락한 국회의원에 대해 ‘소신이 아닌 내부 규칙을 흔드는 변절자의 최후’라는 악평을 남겼다. 이 씨는 “내 글이 온라인에서 파급효과를 일으켜 정치권에 영입되는 꿈을 꾼다”고 했다. 저자는 “인플루언서들은 자기 삶을 소재로 삼아 유명해졌다는 점에서 이 세상의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을 끊임없이 유혹해야 하는 행태는 자기주도적인 삶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만 보여주려는 과정에서 현실의 삶과 괴리를 느낄 수밖에 없는 생리를 짚고 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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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떡 만들기’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나눔과 배려의 상징”

    명절이나 잔치마다 만들어 먹는 음식인 떡 문화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 문화재청은 1일 떡을 만들고 나눠 먹는 전통적 생활관습인 ‘떡 만들기’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떡은 곡식가루를 이용해 만든 음식으로, 시루에 안쳐 찌거나, 쪄서 치거나, 물에 삶거나, 혹은 기름에 지져서 굽거나, 빚어서 찌는 등 다양한 조리 방법이 있다. 15세기 요리서 ‘산가요록’(山家要錄), 17세기 요리서 ‘음식디미방’ 등 고문헌에 기록된 떡의 종류만 200종이 넘는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백일·돌잔치 등 주요 기념식과 설날·추석 등 명절에 떡을 만들어 나눠 먹었다. 백일상에 올리는 백설기는 아이가 밝고 순진무구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설날에는 떡국을 먹어야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여겼다. 또 마을의 안녕을 비는 마을신앙, 각종 굿 등 의례와 제사에도 제물(祭物)로 떡을 바쳤다. 오늘날에도 개업떡, 이사떡 등의 형태로 지속적으로 유지 및 전승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떡은 한국인이 일생동안 거치는 각종 의례와 행사 때마다 만들어서 사회구성원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음식으로 ‘나눔과 배려’, ‘정(情)을 주고받는 문화’의 상징이며, 공동체 구성원 간의 화합을 매개하는 특별한 음식”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 철기 시대 유적의 시루에서 떡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황해남도 안악군의 고구려 고분인 안악3호분 벽화의 부엌에도 시루가 그려져 있다. 삼국사기에서도 떡을 의미하는 ‘병’(餠)이 적혀있으며, ‘고려사’ 등에도 떡을 만들어 먹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고대부터 떡을 만들어 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역마다 다양한 떡이 전승되는 것도 떡 만들기 문화의 특징이다. 감자와 옥수수 생산이 많은 강원도에서는 ‘감자시루떡’ ‘찰옥수수시루떡’이 전승되고,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쌀이 귀한 대신 잡곡이 많이 생산된 제주도에서는 ‘오메기떡’ ‘빙떡’이 전해지고 있다. 19세기 말 서양식 식문화 도입으로 떡 만들기 문화가 일부 축소됐지만, 여전히 지역별로 떡 문화는 전승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무형적 자산인 떡 만들기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한반도 전역에서 전승·향유되고 있다는 점, 삼국 시대부터 각종 고문헌에 떡 관련 기록이 확인된다는 점, 현재에도 떡 만드는 지식이 전승·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떡 만들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온 국민이 전승·향유하고 있는 문화라는 점에서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는 인정하지 않았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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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서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 12월 17일까지 특별전 열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장서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 특별전을 12월 17일까지 연다. 총 45종(국보 6종, 보물 30종, 시도 유형문화재 9종) 100여 점의 고서화를 선보인다. 이 중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二十功臣會盟軸-保社功臣錄勳後·국보 제335호)와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보물 제1597호)가 일반에 공개되는 건 처음이다.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는 1680년 조선 숙종 때 열린 회맹제(임금과 공신들이 천지신명에게 지내는 제사)를 기념해 1694년 제작한 왕실 문서다. 역모를 고발해 보사공신으로 녹훈된 서인 공신들이 이후 남인과의 당파싸움으로 파훈에 이어 복훈된 사실이 기록돼 있다. 현존하는 회맹축 2건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이 문서는 국새가 찍혀 있다. 펼치면 가로 길이가 25m에 달하는 문서 양끝에 파란색과 붉은색 비단을 덧댔다. 문서를 둘둘 마는 막대인 축을 옥으로 장식하는 등 정교한 공예 기술도 반영됐다. 아국여지도는 조선이 러시아와 1884년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기 전 조―러 국경을 정탐해 고종에게 보고한 지도다. 20면의 지도를 접어 책으로 만들었는데 펼치면 길이가 약 3m에 이른다. 19세기 말 조선과 청나라, 러시아 국경지대뿐 아니라 연해주 거주 조선인 수와 러시아 군사시설 위치도 담겼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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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산 쌍릉서 백제건물터 2동 확인… ‘제의 창고’ 추정

    백제 무왕과 왕비 무덤으로 알려진 전북 익산 쌍릉에서 제의 창고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 2동(사진)이 확인됐다. 쌍릉 동쪽 구릉에서 발견된 길이 30m 내외의 이 건물지는 원두막처럼 기둥을 세워 땅에서 바닥을 띄운 지상식 건물인 것으로 조사됐다. 발굴조사를 진행한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건물지 2동에서 온돌이나 화덕 시설이 발견되지 않아 일반 거주시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차단하는 지상식 건물로 지어 내부 기물을 보존하려 했다는 점에서 쌍릉과 연관된 제의 기물을 보관하는 창고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26일 밝혔다. 건물지에서는 백제 사비도읍기의 벼루 조각과 인장이 찍힌 기와, 통일신라시대 토기 등이 출토됐다. 건물지 주변에서는 건물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는 구상유구(溝狀遺構·도랑 모양의 터)도 발견됐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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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생들도 경복궁 드나든 것 아시나요?

    “모터사이클을 팔던 역사 문외한인 제가 역사책을 쓸 줄은 꿈에도 몰랐죠.” 신간 ‘사사건건 경복궁’(시대의창)을 펴낸 양승렬 씨(46)는 명품 모터사이클 할리데이비슨과 두카티에서 16년간 영업, 마케팅을 담당했다. 퇴직 직전 직함은 영업본부장(임원). 어렸을 때 본 영화 ‘탑건’에서 톰 크루즈의 오토바이 질주 신을 보고 모터사이클에 푹 빠졌단다. 25일 동아일보와 인터뷰한 그는 검은 라이더재킷을 입고 최신식 두카티 스트리트파이터V4S 모델을 탄 채 나타났다. 학창시절부터 역사와 담을 쌓고 지냈다는 그는 2005년 우연히 들른 경복궁에서 궁궐길라잡이의 해설을 듣게 됐다. 궁궐길라잡이는 관람객을 대상으로 궁궐과 종묘 곳곳을 설명해 주는 자원봉사자다. 관람객 20여 명을 이끌며 경복궁을 흥미롭게 소개하는 모습에 매료된 그는 그해 길라잡이에 지원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역사 비전공자라도 서류심사를 거쳐 이론교육 3개월, 현장실습 9개월을 마치면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 양 씨는 “명품 모터사이클이 수입품 위주다 보니 외국 것만 전달해 아쉬웠다”며 “우리 전통문화를 전달하는 궁궐길라잡이 활동을 통해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18년 건강 악화로 일을 그만둔 그는 막연히 구상한 책 쓰기를 결심했다. 그는 “내가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제 우리 문화를 재밌게 전달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신간은 왕실 전유물인 경복궁을 그곳에 드나들던 비주류 인물들의 삶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예컨대 연회가 열린 경복궁 경회루에는 기생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이곳에서 왕의 눈에 띈 천민 출신 장녹수(?∼1506)는 종3품 후궁까지 올랐다. 연산군일기에는 “녹수는 왕을 조롱하기를 어린아이같이 했고 왕에게 욕하기를 노예처럼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자신과 견해가 다른 신하를 거침없이 처형한 연산군도 장녹수 앞에서는 작아진 것. 이에 양반들은 그녀에게 인사 청탁까지 시도했다. 왕이 정사를 논하고 타국 사신을 맞은 경복궁 사정전(思政殿)은 환관 이야기로 풀어간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환관 300여 명을 바치라는 명나라 사신의 요구에 태종은 “종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많이 얻을 수 있느냐”고 토로한다. 조선은 천민은 물론 양인 중에서도 환관을 뽑아 조공으로 바쳤다. 이들 중 일부는 사신으로 고국에 돌아와 친척의 관직을 조정에 요구하기도 했다. 양 씨는 “기생, 환관 등 비주류를 통해 경복궁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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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정장에 샌들 신은 남성은 왜 상상이 안 될까

    매일 집을 나서기 전 무슨 신발을 신을지 고민한다. 격식을 차릴 땐 구두를, 부담 없는 모임에 갈 땐 스니커즈를 신는 것처럼 신발마다 각각 알맞은 상황이 있다. 신발의 종류마다 다른 사회적 의미는 어떻게 형성됐을까. 캐나다 토론토 바타 신발 박물관 수석 큐레이터인 저자는 오늘날 주로 착용하는 샌들, 부츠, 하이힐, 스니커즈 등 네 종류를 중심으로 신발의 변천사와 그 속에 담긴 사회 문화적 의미를 설명한다. 샌들은 5세기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사라졌다 18세기 말 서구 패션에 등장했다. 자유분방한 히피나 검소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즐겨 신었다. 하지만 발을 드러내는 샌들을 신는 여성은 정숙하지 못하다고 여기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분위기가 강했다. 이에 19세기 중반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저항의 표현으로 샌들을 신었다. 이를 시작으로 점차 인식이 바뀌었고,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대관식에서 신을 정도로 샌들의 지위는 상승했다. 현대 남성들은 1984년 스포츠 샌들이 처음 등장한 후 활동성과 기능성을 강조한 샌들이 속속 나오자 본격적으로 샌들을 받아들였다. 현재도 여성은 공식 석상에서 샌들을 착용하지만, 남성은 구두를 신는다. 샌들이 여성의 전유물이었다면 부츠는 남성이 주로 향유했다. 16세기 군인은 말을 타기 위해 승마용 부츠를 신었고, 18세기 영국 시골 대지주들은 작업용 부츠를 착용했다. 부츠는 육체노동과 연계돼 남성성을 상징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부츠는 군인을 대표했다. 그러던 1960년대 ‘배트맨’의 캣우먼, ‘스타트렉’의 우후라가 부츠를 신고 등장하면서 부츠는 영웅적 여성의 상징이 돼 여성도 부츠를 신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는 어그 부츠가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등 부츠는 남녀 모두가 착용하는 신발이 됐다. 하이힐은 원래 남성 신발이었다. 승마용 발걸이에 신발을 끼우기 위해 굽이 있는 신발이 필요했기 때문.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도 착용했던 힐은 18세기까지 남성을 표현하는 신발이었다. 남성용 힐이 부츠로 대체되자 힐은 여성적인 신발이 됐다. 당시 여성들은 주로 침실에서 뒤축이 없는 힐을 신었고, 남성들은 침실과 힐을 엮어 성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성적 욕망과 힐의 연결은 하이힐의 여성성을 강화했다. 이러한 인식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2015년 칸 영화제는 힐을 신지 않은 여성 참석자들을 복장이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남녀 모두가 즐겨 신는 신발로는 스니커즈가 있다. 19세기 서구에서는 테니스가 유행하고 농구가 고안됐다. 운동에 대한 관심은 그에 특화된 신발을 필요로 했고, 이를 충족하기 위해 스니커즈가 탄생했다. 체육관의 바닥을 보호하고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고무 밑창 신발이 필요했던 것. 스니커즈가 대중화되면서 소비자는 본인을 돋보이게 해줄 신발을 원했다. 스니커즈는 다양한 디자인을 통해 소비자를 만족시키며 운동과 패션 모두 사로잡았다. 저자는 “신발은 신은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확실하고 정확하게 말해준다”고 말한다. 신발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만으로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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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 폄하 논란 ‘일본서기’에 무령왕 탄생 비밀 풀 열쇠가?

    일본서기(書紀)에 따르면 461년 4월 백제 개로왕은 동생 곤지에게 일본에 갈 것을 명했다. 이에 곤지는 형의 임신한 부인을 주면 가겠노라고 답한다. 개로왕은 이를 허락하며 자신의 부인이 해산하면 즉시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일본 열도에서 태어난 아이는 훗날 백제 25대왕 무령왕이 됐다. 한때 국내 학계는 곤지의 이 같은 비상식적 요구를 전하는 일본서기 기록을 백제 폄하를 위한 조작이라고 봤다. 특히 일본서기는 5세기 이전 사건들의 발생연도를 실제보다 약 120년 앞당겨 기록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사료 속 진실은 무엇일까. 올해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관련 전시와 신간이 잇따르고 있다. 이 중 정재윤 공주대 교수(사학)가 최근 펴낸 신간 ‘무령왕, 신화에서 역사로’(푸른역사)는 일본서기를 중심으로 무령왕의 탄생을 추적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무령왕이 개로왕 혹은 곤지의 아들이라는 기록을 담고 있다. 반면 삼국사기는 무령왕을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본다. 이에 대해 국내 고대사학계는 무령왕이 개로왕 혹은 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1971년 무령왕릉 발굴을 계기로 무령왕의 나이가 확인됐는데, 이에 따르면 동성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를 당시인 479년에 무령왕은 이미 18세였기 때문이다.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삼국사기 기록이 잘못된 게 밝혀진 것. 정 교수는 신간에서 일본서기의 백제신찬 기록에 근거해 무령왕을 곤지의 아들로 보고 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무령왕의 친부로 보이는 곤지는 왕위 계승을 하지 못했다.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자신을 개로왕의 아들로 내세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간은 무령왕의 뿌리와 더불어 그의 탄생지도 추적한다. 일본서기는 ‘각라(各羅)의 바다 가운데 주도(主嶋)가 있는데, 왕이 태어난 섬이라 백제인들이 주도라고 부른다’는 백제신찬 내용을 전하고 있다. 무령왕이 현재의 일본 규슈 사가현 가카라시마(加唐島)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국내 학계 다수설도 이곳을 무령왕 탄생지로 본다. 이 섬에는 무령왕이 태어난 동굴로 전해지는 오비야무라(オビヤ浦)가 있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각라의 바다(海)를 일본서기 편찬자가 섬으로 오인했다”며 다수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각라는 섬이 띠처럼 둘러진 모양을 뜻하는 말로, 섬이 많은 후쿠오카현 이토시마((멱,사)島) 지역이 무령왕 탄생지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그의 주장. 이토시마는 1889년 일본 행정구역 개편 전까지 무령왕 이름인 사마와 유사한 시마(志摩)로 불렸다. 경남 김해에서 쓰시마섬, 이키(壹岐)섬을 거쳐 후쿠오카로 향한 곤지의 항로도 감안했다. 일본서기를 신간의 중심 사료로 사용하고 있는 데 대해 정 교수는 “무령왕 탄생 기록을 전하는 사서는 일본서기뿐이다. 백제가 멸망한 지 얼마 안 된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는 당시 모습을 비교적 생생히 담고 있다”며 “일부 기록이 왜곡된 사실을 유념하면서 적확한 정보를 취하면 백제의 본모습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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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주년 맞은 ‘유퀴즈’… 다시 길거리로? “모든 국민이 한 번씩 출연하는 그날까지”

    “모든 국민이 한 번씩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되는 게 목표예요.” 최근 방송 3주년을 맞은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유퀴즈)의 공동 연출자 김민석 PD(35)와 박근형 PD(31)는 팬데믹 이전의 길거리 인터뷰가 그립다며 이렇게 말했다. 각각 KBS ‘1박2일’과 tvN ‘코미디 빅리그’ 조연출 출신인 김 PD와 박 PD를 15일 화상으로 인터뷰했다. 유퀴즈는 당초 MC 유재석과 조세호가 길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을 즉석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다 방역수칙 준수를 위해 지난해 3월부터 세트장 인터뷰로 바뀌었다. 초반의 형식은 일반 시민들의 평범한 삶 속에 녹아 있는 감동을 짚어내 시청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사전 섭외가 없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자연스레 유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PD는 “사람 관찰을 좋아해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해 보자는 마음에서 시작했다”며 “시민들이 MC를 반기고 MC들이 편안하게 응대하면서 이뤄지는 대화를 시청자들이 좋게 봐준 것 같다”고 말했다. 세트장 촬영으로 바뀐 후에는 방탄소년단, 아이유 등 유명 연예인은 물론 다양한 주제에 부합하는 인물들이 출연해 4∼6%대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출연자 섭외 후 촬영까지 한 달 넘게 출연자 배경 조사와 사전 인터뷰를 진행해 출연진의 내면을 진솔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한다. 박 PD는 “비연예인은 작가들이 촬영 전까지 끊임없이 출연자와 교감한다. 연예인 출연자의 경우 이들의 필모그래피를 모두 공부한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 촬영팀(다큐팀)의 역할도 크다. 이들은 출연자가 MC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살아가는 현장을 찾아가 이를 세세히 담는다. 김 PD는 “본촬영에서 부족한 부분을 추가로 담아 깊이와 다채로움을 더하려는 의도에서 다큐팀을 도입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시청자를 의도적으로 웃기거나 울리기보다 출연자를 있는 그대로 담고자 고민한다”며 “출연자가 긴장해 눈을 껌뻑껌뻑하거나 물을 자주 마시는 모습도 모두 담는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현재의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예전 길거리 인터뷰 형식에 대한 미련을 거두지 않았다. 박 PD는 “어르신들이 갑자기 다가와 MC들에게 말을 거는 돌발 상황이 더해준 생동감이 그립다”고 했다. 김 PD도 “우연한 만남이 주는 행복감은 거리에서만 느낄 수 있다”며 “상황이 좋아지면 거리 촬영을 생각하겠지만 지금 형식을 좋아하는 분도 있기에 절충점을 찾겠다”고 말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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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주년 맞이한 ‘유퀴즈’…“전 국민이 한 번씩 출연하는 프로그램 되고파”

    tvN 예능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유퀴즈)이 최근 3주년을 맞이했다. 유퀴즈는 유재석(49)과 조세호(39) 두 명의 MC가 시민들을 인터뷰해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전달한다. 평범한 이야기 속 감동을 주는 요소를 콕 집어 전해준다. 최근에는 방탄소년단, 아이유 등 유명인도 출연하는 영향력 있는 프로그램이 됐다. 유퀴즈는 ‘1박2일’ 조연출이었던 김민석 PD(35)와 ‘코미디빅리그’ 조연출 출신 박근형 PD(31)가 공동으로 연출한다. 두 사람을 15일 화상으로 만났다. 2018년 8월 방송을 시작한 유퀴즈는 두 MC가 휴대용 책상과 의자를 들고 다니며 길거리를 세트장 삼아 그곳에서 만난 시민들을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사전 섭외 작업이 전혀 없음에도 시민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냈다. 박 PD는 “사람 관찰을 좋아해 길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해보자는 마음에서 시작했다”며 “시민들이 MC들을 반기고, MC들이 편안하게 응대하면서 이뤄지는 대화를 시청자들께서 좋게 봐주신 것 같다”고 말했다. 출연진의 내면을 진솔하게 전달하는 것도 유퀴즈가 가진 매력이다. 팬데믹으로 길거리 촬영이 어려워진 지난해 3월부터 세트장 안에서 특정인물 4, 5명을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포맷이 변경한 게 효과를 발휘했다. 출연자를 선정할 수 있게 되면서 유퀴즈가 전달하는 이야기는 더욱 깊어졌다. 섭외 이후 촬영이 이뤄지는 한 달여의 기간동안 출연자 배경 조사와 사전 인터뷰가 추가됐기 때문. 박 PD는 “비연예인이면 작가들이 촬영 전까지 끊임없이 출연자와 교감하고, 연예인은 그들의 필모그래피를 전부 공부한다”고 말했다. 특히 출연자의 내면을 자세히 보여주는 데에는 시즌2부터 합류한 다큐멘터리 촬영팀(다큐팀)의 역할이 있었다. 다큐팀은 ‘다큐 3일’을 제작한 경험을 바탕으로 출연자가 MC들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담고, 그들이 살아가는 현장에 찾아가 그들의 모습을 세세하게 촬영한다. 김 PD는 “본 촬영에서 부족한 부분을 담아 깊이와 다채로움을 가져가려는 의도에서 다큐팀을 도입했다”며 “이 과정이 자신의 인생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는 계기가 됐다는 한 출연자의 말을 들으며 프로그램의 의미를 느꼈다”고 전했다. 연예인, 비연예인 상관없이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시청자들이 그것에 공감한 결과 유퀴즈는 3년이 넘는 시간을 이어올 수 있었다. 김 PD는 “시청자를 의도적으로 웃기거나 울리기보다 출연자를 있는 그대로 담고자 고민한다”며 “출연자가 긴장해서 눈을 껌뻑껌뻑하거나 물을 자주 먹는 모습 등도 담는다”고 말했다. 제작진도 3년간 매회 여러 출연자의 인생을 간접경험하며 변화를 겪었다. 김 PD는 “KBS 생생정보통의 ‘이피디가 간다’ 코너에서 카메라 감독, 리포터 역할을 혼자 다 하는 이지윤 PD를 인터뷰하며 나는 저만큼 열정을 다 하고 있나 반성했다”고 말했다. 박 PD는 눈물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하면서 감정이 풍부해졌다”고 말했다. 이들은 현장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던 포맷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박 PD는 “어르신들이 갑자기 다가와 MC들에게 말을 거는 돌발 상황도 있지만 그것이 프로그램에 더해줬던 생동감이 그립다”고 말했다. 김 PD도 “현장에서 이뤄지는 우연한 만남과 그에 따른 행복감은 거리에서만 느낄 수 있다”며 “상황이 좋아지면 거리 촬영을 생각해보겠지만, 지금의 포맷을 좋아해주시는 분도 있기 때문에 절충점을 찾겠다”고 전했다. “장수 예능이 나오기 쉽지 않은 만큼 한 주 한 주 최선을 다할게요.”(김 PD) “재석이 형, 세호 형이 전국노래자랑의 송해 님처럼 됐으면 좋겠어요. 전 국민이 한 번씩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되는 것이 목표에요.”(박 PD)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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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우리는 문학을 읽으며 어른이 된다

    학창시절 수업시간에 선생님한테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며 교과서 밑에 숨긴 소설책을 몰래 읽어본 적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대학 입시 경쟁과 불안정한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잠시라도 잊고자 했던 몸부림이었다. 작가이자 문학평론가인 저자는 자신이 열일곱 살에 읽었던 책 25권을 어른이 된 지금 다시 읽어보며 그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심리학과 철학 등의 관점에서 전달한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주인공 제제는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온갖 말썽을 부리며 풀다가 뽀르뚜가 아저씨를 만나 치유받고, 어른이 돼 다른 아이들을 돕는다. 개인적 치유가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보며 저자는 한 걸음씩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열린 마음이 보물이라고 전한다. 왕자와 사랑에 빠진 ‘인어공주’는 왕자를 칼로 찔러야만 본인이 살 수 있음에도 물거품이 되는 길을 선택한다. 온갖 사랑의 산전수전을 겪은 뒤 이를 다시 본 저자는 인어공주의 선택에서 고통을 감수하는 인간의 용기를 찾아낸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소크라테스를 보며 저자는 자신의 쓸모를 고민하게 하는 이 질문이 결국 생각이 한 곳에 고여 썩어가는 걸 방지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저자는 문학을 통해 타인의 삶을 인지할 때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다고 전한다. 타인의 이야기가 주는 깨달음이 나다움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읽었던 책들에 다시금 눈길이 간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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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벼슬 버린 조선 문장가, 억만년 이어갈 나라 꿈꾸다

    금 간 방 안 벽에 손가락 하나 끼워 넣기 힘든 작은 틈이 있다. 틈새로 손가락을 들이밀자 갑자기 몸 전체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정신을 차려보니 넓은 들판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한 시간여를 걸었을까, 앞에 큰 시냇가가 나타난다. 작은 거룻배에 올라타 사공이 이끄는 데로 가자 대저택이 나온다. 저택 뒤로는 깎아지른 절벽과 폭포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앞에 늘어선 1000여 호의 민가 사이로 강이 흐른다. 저택 서쪽에 호수와 누각이 있고 동쪽에는 시냇물을 따라 꽃과 버들이 심어져 있다. 풍수명당에 자리 잡은 별세계다. 조선 후기 문장가 홍길주(1786∼1841)가 1829년에 쓴 ‘숙수념(孰遂念)’의 한 장면이다. 박무영 연세대 국문과 교수는 신간 ‘누가 이 생각을 이루어주랴’(태학사)에서 중국 사마천과 겨룰 만하다는 당대 평가를 받은 홍길주의 숙수념을 한글로 처음 완역했다. 홍길주는 명문가 풍산 홍씨 후손으로 22세에 과거에 합격했다. 하지만 순조 때 외척으로 득세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회의를 느껴 벼슬을 버렸다. 그는 숙수념에서 자신이 꿈꾼 이상적 마을 공동체를 그렸다. 시장이 돼 가상의 도시를 짓는 ‘심시티’ 게임의 조선판인 셈이다. 그는 자신의 호를 딴 주인공 ‘항해자’를 저택 주인으로 등장시켜 자신의 이상향을 설명하고 있다. 홍길주는 이상향을 세세하게 설계했다. 저택 안 사당을 시작으로 안채와 바깥채, 서재를 차례로 묘사한다. 건물을 지은 내력을 적은 상량문(上樑文)에 ‘성인이 나라를 다스릴 땐 집안 다스림부터 시작하셨고, 군자가 집을 지을 때는 반드시 내외분별을 먼저 하네’라는 문구를 넣었다. 집안이 바로 서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통해 외척세력이 국정을 좌우하는 현실을 은유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저택 밖에는 주민을 위한 병원과 구휼소가 있다. 병원 건물기(建物記)에는 의사를 많이 뽑고 질병을 연구하는 환경을 만들어 모든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고 돼 있다. 이어 “이런 방법으로 천하와 국가를 운영한다면 어찌 억만 년만 지속되겠는가”라고 써 병든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조정을 비판한다. 홍길주는 자신의 이상향에서 능력에 따라 인재를 쓰는 관직제도를 구상했다. 그는 ‘문벌에 상관없이 능력과 인품이 탁월한 자가 있으면 특채한다’ ‘선대의 음덕만으로 관직에 보임된 경우 9품에 제수하고 중상 이상의 고과를 기록하지 못하면 더 이상 승진하지 못한다’는 규칙을 제정했다. 세도가 자제가 요직을 차지해 과거제가 유명무실해진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또 ‘제사음식은 반드시 간단하게 해야 한다’ ‘갓은 불편하니 복건으로 사당에 들어가도 된다’ 등의 규율을 통해 당대의 허례허식을 경계했다. 하지만 조선판 심시티는 결국 가상의 세계에 불과했다. 홍길주는 책에서 “숙수념은 내 생각일 뿐 실제가 없다”고 한탄했다. 박 교수는 “홍길주의 포부가 담긴 숙수념은 조선 후기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지식인의 슬픔과 자의식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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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ebak’ 등 26개 한국어, 올해 옥스퍼드 사전 등재… 45년치보다 많아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OED)에 한국에서 유래된 영어 표제어 26개가 지난달 새로 등재됐다. 1884년 출간돼 11세기 중반부터 현재까지 영어권에서 사용돼 온 단어 60만여 개를 수록하고 있는 OED는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사전이다. 우리말이 처음 등재된 것은 1976년. ‘김치(kimchi)’ ‘막걸리(makkoli)’ 등이 실렸다. 이를 비롯해 45년 동안 총 20개의 단어가 실렸는데, 올해 무려 26개의 단어가 한꺼번에 등재됐다. 이런 이례적인 일은 왜 일어난 것일까? 이유는 역시 ‘한국 문화의 힘’이다. 올해 이례적으로 많은 한국 단어가 등재 목록으로 선정되자 OED는 한국인 자문위원을 구해 등재를 진행했다. 5월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부의 요청을 받아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사진)는 “이번 등재 단어 수는 한국 문화가 세계적인 영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올해 등재된 ‘치맥(chimaek)’ ‘먹방(mukbang)’ ‘언니(unni)’ ‘오빠(oppa)’ 등의 단어는 한국의 문화 현상을 잘 보여준다. 이들 단어는 한국 콘텐츠에 실려 세계로 전파됐다. 치맥은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를 기점으로 전 세계에 퍼졌고, 먹방은 유튜브를 통해 국경 너머의 시청자들을 모았다. 국내 팬들이 주로 K팝 스타를 부르는 호칭인 언니, 오빠의 등재는 K팝의 위력을 보여준다. 신 교수는 “등재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영국 OED 편집자도 한국 콘텐츠를 자주 접하면서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하더라”며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을 그대로 등재했다는 것은 한국 문화가 그것을 수용하는 이들의 문화보다 영향력이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전했다. OED 등재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문화의 전파 정도에 있는 건 아니다. 해당 단어가 신문이나 책 등의 문헌, 그리고 대중이 이용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됐는지가 최우선적 기준이다. 그에 따라 OED는 새로운 표제어를 등재하기에 앞서 철저한 사전 조사를 진행한다. 다른 사전과 달리 한번 등재한 단어를 절대 삭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등재 단어 중 문헌에 가장 늦게 등장한 먹방도 이미 해외에서 2013년부터 사용한 단어”라고 설명했다. ‘콩글리시(Konglish)’ ‘PC방(PC bang)’ ‘skinship(스킨십)’ 등 국내에서 영어와 결합해 만들어진 신조어가 영어 원조국의 사전에 등재됐다는 점도 특이하다. 신 교수는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문화를 가진 나라로서 언어를 대하는 우리의 관점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어 파괴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줄임말이나 합성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던 단어들이 오히려 한국적인 정서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언어는 문화와 함께 간다”며 “오징어게임의 ‘달고나’를 해외에서 그대로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외래어를 거부하기보다는 우리 나름대로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 쓰는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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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스퍼드사전에 우리말 올해 26개 등재…45년치보다 많은 이유는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OED)에 한국에서 유래된 영어 표제어 26개가 지난달 새로 등재됐다. 1884년 출간돼 11세기 중반부터 현재까지 영어권에서 사용돼온 단어 60만 여개를 수록하고 있는 OED는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사전이다. 우리 말이 처음 등재된 것은 1976년. ‘김치(kimchi)’ ‘막걸리(makkoli)’ 등이 실렸다. 이를 비롯해 45년 동안 총 20개의 단어가 실렸는데, 올해 무려 26개의 단어가 한꺼번에 등재됐다. 이런 이례적인 일은 왜 일어난 것일까? 이유는 역시 ‘한국 문화의 힘’이다. 올해 이례적으로 많은 한국 단어가 등재 목록으로 선정되자 OED는 한국인 자문위원을 구해 등재를 진행했다. 5월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부 요청을 받아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이번 등재 단어 수는 한국 문화가 세계적인 영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올해 등재된 ‘치맥(chimaek)’ ‘먹방(mukbang)’ ‘언니(unni)’ ‘오빠(oppa)’ 등 단어는 한국의 문화 현상을 잘 보여준다. 이들 단어에는 한국 콘텐츠에 실려 세계로 전파됐다. 치맥은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를 기점으로 전 세계에 퍼졌고, 먹방은 유튜브를 통해 국경을 뛰어넘는 시청자들을 모았다. 특히 동남아시아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필리핀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와 예능의 영어 자막을 제작하고, 이 자막이 영국과 미국 등으로 흘러들며 한국 콘텐츠가 영어권 국가에 알려졌다. 국내 팬들이 주로 K팝 스타를 부르는 호칭인 언니, 오빠의 등재는 K팝의 위력을 보여준다. 신 교수는 “등재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영국 OED 편집자도 한국 콘텐츠를 자주 접하면서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하더라”며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을 고유어로 등재했다는 것은 한국 문화가 그것을 수용하는 이들의 문화보다 영향력이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전했다. OED 등재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문화의 전파 정도에 있는 건 아니다. 해당 단어가 신문이나 책 등의 문헌, 그리고 대중이 이용하는 SNS 등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됐는지가 최우선적 기준이다. 그에 따라 OED는 새로운 표제어를 등재하기 앞서 철저한 사전 조사를 진행한다. 다른 사전과 달리 한 번 등재한 단어를 절대 삭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등재 단어 중 문헌에 가장 늦게 등장한 먹방도 이미 해외에서 2013년부터 사용된 단어”라고 설명했다. ‘콩글리시(Konglish)’ ‘PC방(PC bang)’ ‘skinship(스킨십)’ 등 국내에서 영어와 결합해 만들어진 신조어가 영어 원조국의 사전에 등재됐다는 점도 특이하다. 신 교수는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문화를 가진 나라로서 언어를 대하는 우리의 관점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글의 우수성을 해치는 줄임말이나 합성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던 단어들이 오히려 한국적인 정서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언어는 문화와 함께 간다”며 “오징어게임의 ‘달고나’를 해외에서 그대로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외래어를 거부하기보다는 우리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것이 우리 문화를 알리는 길이다”고 전했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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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양성 빗장 열어 당나라에 협력”… 고구려 비운의 역사 생생

    ‘돌로 쌓은 성곽(평양성)을 지키는 자들로 하여금 적을 막는 빗장을 열도록 했다. 이에 당나라 군사를 막는 적이 없으니 곧바로 성을 함락했다.’ 서기 668년 9월 고구려군과 나당연합군의 평양성 전투에 참가한 이타인(李他仁·609∼675)의 묘지명(墓誌銘·죽은 이의 신분과 행적을 석판에 새긴 글) 일부다. 그는 한때 고구려 장수로 동북 변방 12주와 말갈인을 통솔하는 책주도독(柵州都督) 겸 총병마(總兵馬)였다. 그러나 삼국통일의 마지막 정점인 평양성 전투 때에는 당나라 소속으로 모국 침공의 앞잡이가 돼 있었다. 당시 당나라 이세적(594∼669)과 신라 김인문(629∼694)이 이끈 나당연합군은 평양성 외곽을 포위했다. 고구려 보장왕은 항복하려고 했지만, 실권자였던 대막리지 연남건은 최후 항전을 고수했다. 한 달여의 공방전 끝에 연남건의 책사인 승려 신성이 당과 내통해 성문을 연 직후 고구려는 멸망한다. 이때 이타인이 이세적의 지시를 받고 신성과 접촉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 공으로 당의 종3품 관직인 우령군(右領軍) 장군에 오르게 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이타인을 비롯해 7세기 이후 당나라로 망명한 고구려·백제·신라·발해 유민들의 묘지명 32점을 분석한 ‘재당 한인 묘지명 연구’를 최근 발간했다. 이 중 고구려 유민인 이타인과 고진(高震) 고모(高牟) 묘지명은 국내외 문헌에 나오지 않는 인물들이다. 저자 권덕영 부산외국어대 역사관광학과 교수는 “사서는 일정 시간이 지난 후 기록돼 후세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반면 묘지명은 당시 사람들이 직접 기록한 것이어서 상대적으로 신뢰성이 높은 자료”라고 설명했다. 신간에 따르면 고모(640∼694)는 고구려 평양성에서 활동한 무장으로 멸망 전 당나라에 투항한다. 그의 묘지명에는 ‘적절한 때를 기다려 정성을 바치고 백낭(白囊·긴급한 문서를 담아 전달하는 자루)에 의지해 성심으로 (당에) 귀순했다’고 적혀 있다. 묘지명에 고모의 귀순 시기가 나와 있지는 않지만, 평양성과 주변의 병력 배치 등을 담은 군사 기밀을 당에 넘긴 것으로 보인다. 이후 당 조정은 그를 종3품 우표도위(右豹韜衛) 장군에 임명했다. 권 교수는 “이타인이나 고모 등은 조국을 배신하고 당나라에서 호의호식했다”며 “묘지명은 거대 제국으로 도약하던 당나라가 이민족을 포용해 적재적소에 활용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고구려 유민 고진(701∼773)은 고구려 보장왕의 손자다. 보장왕이 당나라에 투항한 후 그의 가문은 대대로 대장군 봉작과 식읍 1000호를 하사받았다. 고진은 당나라 동북 변방 요충지인 중국 허베이(河北)성 친황다오(秦皇島)에서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는 공을 세웠다. 이에 당 조정은 그를 정3품 대장군인 금오위(金吾衛)대장군 안동도호(安東都護)에 임명했다. 이타인의 묘지명에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고구려 부흥운동도 언급돼 있다. ‘고구려가 요사한 기운을 뻗쳐 공(公·이타인)은 조서를 받들어 부여지역으로 나아가 토벌했다’는 내용이 그것. 이는 당시 고구려 멸망 후 현재 중국 지린(吉林)성 일대인 부여지역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이 활발히 일어났음을 시사한다. 권 교수는 “부여지역에서의 고구려 부흥운동은 국내는 물론 당나라 문헌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며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과 시대상을 보여주는 당나라 묘지명은 한국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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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실험실서 고군분투… 과학은 경쟁과 소통으로 성장한다

    노벨상 수상자 발표가 4일부터 이어지고 있다. 최근 노벨 과학상은 단독 연구자가 아닌 연구팀의 공동 연구 성과에 주로 돌아가고 있다. 2001년 이후 3개 노벨 과학상 수상자 162명 중 단독 연구자는 5명(약 3.1%)에 불과하다. 갈수록 연구 분야가 고도화되고 복잡해지면서 여러 과학자들이 팀을 이뤄 연구하는 ‘빅 사이언스’가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서울대 의대 생리학교실 교수인 저자는 변화하는 과학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선 과학의 실상부터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과학자의 관점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연구를 펼치는 실험실이 어떤 곳이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과학의 세계를 소개한다. 과학 연구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시민들도 알아야 그 성과를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는 것. 대부분의 과학지식은 실험실에서 생산된다. 실험실이라고 하면 대중은 장비와 기자재, 시약 등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는 이미지만 막연하게 상상할 뿐이다. 저자는 실험실은 일반인들의 상상보다 훨씬 어수선하고 뒤죽박죽인 곳이라고 말한다. 특히 공동 연구가 이뤄지는 실험실은 고가의 장비를 경쟁적으로 사용하면서 갈등의 장이 되기 일쑤다. 장비 사용 순서를 두고 다투고, 자신의 실험 결과가 유효하다는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에 따라 다른 연구자와의 원만한 인간관계는 연구 성과에 작지 않은 영향을 주는 요소라는 게 저자의 견해다. 과학 연구의 출발점인 가설은 특정한 자연현상이 일어나는 원리를 잠정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실험 결과에 따라 수용 혹은 기각되기 마련이다. 저자는 실험에 앞서 탄탄한 가설이 중요할 수 있지만, 이것이 명료하게 정리돼야 실험을 수행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우연이나 직관 등 비과학적 요소에서 실험을 시작하고, 그 결과로 가설을 설계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하고,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 넘쳐흐르는 물을 보고 부력의 원리를 알아냈다는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꼼꼼하게 세운 가설이 실험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실험실은 자연현상을 인위적으로 유도하고 변수를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이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실제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실험 결과 사이의 차이를 낳는다. 자연과는 다른 인위적 조건에서 실험이 수행되기 때문이다. 특히 한 실험실에서 이뤄진 연구 결과가 다른 실험실에서는 제대로 검증되지 않는 이른바 ‘재현성의 위기’도 과학계에선 종종 발생한다. 실험 결과를 논문으로 담아내기도 쉽지 않다. 과학논문은 서론, 연구 방법, 연구 결과, 고찰이라는 구조화된 형식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실제 연구는 논문 형식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과학자는 연구 과정을 논문 구조에 맞춰 재구성해야 한다. 논문에 연구 결과를 제대로 담아냈다고 해도 연구자가 유명하지 않거나 시대를 너무 앞서가면 묻힐 수 있다. 예컨대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핸스 크레브스와 피터 랫클리프의 연구논문 게재를 거부했다. 하지만 이들은 해당 논문으로 각각 1953년과 2019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당시 크레브스는 무명의 연구자라 다른 학술지에 논문 투고를 제안받았다. 랫클리프는 논문 심사자 중 일부가 연구 가치를 알아보지 못해 네이처에 논문을 게재하지 못했다. 과학자의 성과는 오직 논문으로 평가된다. 논문이 완성되기까지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서로 소통하며 분투한다. 그래서 저자는 과학이 성장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논문 공동저자 등재를 ‘지인 찬스’로 활용하는 일부 과학자들의 행태가 공분을 일으키는 이유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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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우익들 전쟁피해자 행세때 ‘반성’ 촉구한 이소가야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본국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은 조선민족을 마치 ‘가해자’처럼 생각하며 미움을 가득 안고 조선을 떠난 건 아니었을까.”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조선주둔군으로 들어와 약 18년간 한반도에 머문 이소가야 스에지(1907∼1998·사진)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그는 “조선민족에 대한 박해의 역사가 있었던 걸 일본인은 얼마나 반성할 수 있을까”라고도 했다. 패전 후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귀국길에 오른 일본인들은 일부 소련군이나 조선인에게 보복 폭력을 당했다. 이에 몇몇 일본 우익 지식인들은 원자탄 피폭과 엮어 일본을 전쟁 피해자로 규정했다. 일례로 후지오카 노부카쓰 전 도쿄대 교수 등은 지난해 12월 독일 베를린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위해 “일본과 독일은 연합국의 손에 끔찍한 민간인 손실을 입었는데 이는 전쟁범죄로 해석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소가야는 생전에 “집단 보복을 당해도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잘못을 일본인들은 수도 없이 저질렀다”고 했다. 변은진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HK교수는 최근 발표한 ‘이소가야 스에지의 저술을 통해 본 38도선 이북 지역 일본인의 식민지·귀환 경험과 기억’ 논문에서 이소가야가 일본인들의 ‘피해자 코스프레’를 비판한 배경에 주목했다. 변 교수는 “이소가야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자신의 양심에 따라 일본 사회의 반성을 촉구했다”고 말했다. 1928년 징집돼 함경남도 나남의 일본군 19사단에 배치된 이소가야는 억압적인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2년 만에 제대한다. 이후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 흥남공장에 취업한 그는 화학물질을 뒤집어쓰며 주야 3교대로 일하는 엄혹한 노동 환경에 처한다. 그가 좌파 항일운동가 주선규(1908∼?), 송성관(1907∼?)을 공장에서 만나 노동운동에 나서게 된 배경이다. 그는 사상범으로 1932년부터 약 9년간 옥고를 치렀다. 일본의 패전 후 그는 조선공산당 인사들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의 요청에 따라 자국민들의 본국 귀환을 도왔다. 변 교수는 “이소가야는 귀환을 도우며 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잘못을 저질렀고 사과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고 말했다. 이소가야는 이후 ‘조선종전기’ ‘우리 청춘의 조선’ 등의 저서를 통해 가해자로서 일본의 책임을 강조했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이용해 막대한 어부지리를 얻었다. 이런 일본의 자세는 예전의 군국주의 일본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조선종전기’)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민족 분단이라는 조선민족 최대의 불행을 짊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일한병합 80년과 일본’)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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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벨문학상에 ‘탄자니아 난민’ 출신 구르나

    아프리카 탄자니아 난민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 중인 소설가 압둘라자크 구르나(73·사진)가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7일 “식민주의에 대한 단호하고 연민어린 통찰이 수상 배경이 됐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노벨 문학상을 탄자니아 출신 작가가 받은 건 처음으로 아프리카 출신 작가로는 역대 다섯 번째다. 흑인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는 35년 만이다. 1948년 동아프리카 연안 잔지바르섬에서 태어난 구르나는 1968년 난민 자격으로 영국에 갔다. 이후 영어로 소설을 쓰면서 영국 켄트대 교수로 탈식민주의 담론을 연구했다. 동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파라다이스(Paradise)’는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영국 부커상 최종 후보에 1994년 올랐다. 장편소설 ‘바닷가에서(By the sea)’는 2001년 부커상 1차 후보에 올랐다. 한림원은 “난민의 혼란이라는 주제는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이어진다”며 “그는 모국어로 스와힐리어를 썼지만 20세에 영어를 써야 하는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영어는 그의 문학적 도구가 됐다”고 밝혔다. 그는 10편의 장편소설과 다수의 단편소설을 발표했으며 이 중 국내에 번역 출간된 것은 없다. 한림원이 아프리카 출신 작가를 수상자로 선택한 건 최근 유럽과 미국 출신 작가들이 잇달아 수상한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 극단주의 부상에 따른 세계적 혼란상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된다. 왕은철 전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구르나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아랍계 아프리카인들의 디아스포라 경험을 다루고 있다”며 “세계 곳곳에서 이슬람문화와 다른 문화권 사이의 갈등이 불거지는 상황에서 한림원이 아프리카 출신 무슬림 작가에게 눈을 돌린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수상자 발표 당시 자신의 집 주방에 있던 구르나는 “(노벨상 수상 소식이) 장난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1000만 크로나(약 13억5600만 원)의 상금을 받는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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