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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외(號外)요!’ 1923년 3월 15일 동아일보 판매원이 달랑거리는 방울을 허리춤에 차고 일제강점기 서울의 거리를 뛰며 외친다. “총을 맞아 숨이 진한 후에도 육혈포에 건 손가락을 쥐고 펴지 아니하고 숨이 넘어가면서도 손가락으로는 쏘는 시늉을 하였다.” 손에 들린 호외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 의사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두 달 전 벌어진 일이지만 일제 당국이 보도를 금지해 알리지 못하다가 해제 즉시 호외를 낸 것. 동아일보가 26일 지령 3만 호를 발행하지만 ‘호외’가 있기 때문에 실제 발행한 신문은 그보다 많다. 호외는 중요한 뉴스를 빨리 전하기 위해 임시로 발행하는 신문으로, 지령을 세는 호(號)에는 포함되지 않는다(外). 호외는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을 전한 뉴스 속의 뉴스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 소식을 담은 호외를 압수하는 당국과 동아일보가 힘겨루기를 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나석주 의사의 폭탄 의거 보도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1927년 1월 13일 바로 호외를 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허락받지 않은 내용이 담겼다며 호외를 압수했다. 동아일보는 다음 날 또 ‘호외의 호외’를 발행하면서 “경무국이 기사 내용을 딕테이트(dictate)한다는 것은 경찰 만능의 조선에서도 초유의 사(事)엿다. 아모리 주책없는 경무당국이라도…”라며 날 선 비판을 가했다. 첫 호외는 창간 보름 만인 1920년 4월 15일 평양에서 벌어진 만세운동 기사로 신문이 발매 금지 처분을 당하자 다시 낸 것인데 남아 있지 않다. 순종 승하를 전한 호외(1926년 4월 27일),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소식을 알린 두 차례의 호외(1936년 8월 10일) 등 민족의 아픔과 기쁨이 호외로 전파됐다. 광복 이후에도 호외가 주요한 속보 매체였다. 6·25전쟁 발발 이틀 뒤인 1950년 6월 27일 오후에도 동아일보는 ‘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이라는 호외를 찍었다. 피란으로 배포할 사람이 없어 시경에서 빌린 지프차를 타고 기자들이 시청 앞, 광화문, 중앙청, 안국동을 돌며 포탄이 산발적으로 시내에까지 날아드는 가운데 호외를 뿌렸다. 동아일보의 호외는 민주주의의 전진을 이끈 신호탄이었다. 1960년 3·15부정선거가 일어나자 불법·무효를 알리고, 4월 11일 마산에서 시위에 참가했다가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된 일을 알린 것도 호외다. 1990년대 이후에는 TV와 인터넷의 발달로 이전에 비해 호외를 내는 일이 확 줄었다. 그러나 △‘김일성 사망’(1994년 7월 9일) △‘성수대교 붕괴’(1994년 10월 21일)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1995년 4월 28일) △‘삼풍백화점 붕괴 속보’(1995년 7월 3일) △‘KAL기 괌서 추락’(1997년 8월 6일) 등 굵직한 뉴스가 호외로 다뤄졌다. 21세기에도 호외는 월드컵 승전보나 김정일 사망,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전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국립민속박물관(서울 종로구 삼청로)은 2018년 무술년(戊戌年)을 맞아 2월 25일까지 특별전시 ‘공존과 동행, 개’를 연다. 이번 전시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십이지신 추(錘)’와 개와 사람이 함께 사냥하는 모습의 토우 장식이 달린 ‘굽다리접시’를 비롯해 여러 전통 유물을 만날 수 있다. 도화서 화원 김두량(1696∼1763)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모견도(母犬圖)’도 나온다.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어미 개의 모정이 잘 표현된 그림이다. 사도세자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개 그림(犬圖)도 볼 수 있다. 승정원일기 등의 자료를 통해 조선의 궁궐에서도 개를 길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개의 상징과 의미를 알 수 있는 유물도 많다. ‘개 부적’은 새해에 액을 쫓고 복을 빌며 대문이나 벽장에 붙였던 세화(歲畫)의 일종이다. 20세기 민화 ‘당삼목구’는 그림 상단에 ‘세 개의 눈을 가진 개가 짖어 삼재를 쫓는다(唐三目狗吠逐三災)’라고 적혀 있다. 개는 전통적으로 호랑이, 해태, 닭과 마찬가지로 벽사(辟邪·귀신을 물리침)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광복 이후 정부에서 처음 발행한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 ‘바둑이와 철수’도 볼 수 있다. 또 시각장애인 안내견, 인명 구조견 등 오늘날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개와 관련된 영상을 비롯해 70여 점의 자료를 전시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인간이 개를 바라보면, 개도 인간을 바라보고 눈을 맞춘다. 이것이 단순히 반려동물과 감정을 나누는 행동이 아니라 오늘날의 인류를 만든 중요한 사건의 하나라는 주장이 최근 제기됐다. ‘개의 해’ 무술년(戊戌年)의 시작을 앞두고 인간과 개의 역사에 대한 이모저모를 살펴봤다. ‘왜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하고 현생 인류는 살아남았는가?’는 인류학의 오랜 질문이다. 최근 발간된 ‘침입종 인간’(팻 시프먼 지음·푸른숲)은 그 답으로 ‘현생 인류와 개의 동맹’을 꼽는다. 책에 따르면 약 5만 년 전 유라시아 대륙에 도착한 현생 인류는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종류의 먹잇감을 사냥하며 경쟁했다. 그러나 인류는 적어도 3만6000년 전에 늑대를 ‘늑대-개’(원시 개)로 길들이면서 더 다양한 동물을 사냥할 수 있게 됐고, 사냥 성공률도 비약적으로 높이면서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주장이다. 왜 늑대였을까? 인간의 공막(눈의 흰자위)은 영장류 중 유일하게 희다. 멀리서도 시선의 방향을 알 수 있다. 소리 내지 않고 눈으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조직적으로 사냥하기에 좋다. 늑대도 그렇다. 갯과 동물 25종을 분석한 결과 대부분의 늑대는 얼굴과 눈 색깔, 홍채와 눈동자가 강하게 대비돼 시선의 방향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개가 늑대보다 인간을 응시하는 시간이 평균 2배 길다는 것도 인간이 그런 개체를 선택해 길들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보여준다. ‘침입종 인간’의 저자는 “인간이 개를 가축화한 건 도구의 발명과 맞먹는 도약”이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길들인 개는 오랜 세월 충직함의 대명사였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에서 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때 그를 반긴 유일한 존재가 늙은 개 ‘아르고스’였다. 불길에서 주인을 구한 전북 임실의 ‘오수의 개’ 이야기도 유명하다. 최근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이 연 학술강연회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 문화 속의 개 이야기를 살펴봤다. “십이지의 열한 번째 동물인 개(戌)는 시간으로는 오후 7∼9시, 방향으로는 서북서, 달로는 음력 9월에 해당하는 방위 신(神)이자 시간 신이다. 개는 이 방향과 이 시각에 오는 사기(邪氣)를 막는 동물 신이다.”(천진기 관장) 천 관장에 따르면 개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동물로 인식됐다. 이런 생각은 중앙아시아에 광범위하게 분포돼 있다. 알타이 샤먼은 저승에 갈 때에 지옥문에서 개를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무속신화인 세민황제본풀이, 저승 설화에서도 그렇다. 제주도의 차사본풀이에서 염라대왕은 자신을 만나고 돌아가는 강림차사가 이승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흰 강아지 한 마리와 떡 세 덩이를 주면서 ‘떡을 조금씩 떼어 강아지를 달래며 뒤따라가면 알 도리가 있으리라’고 했다. 옛날에는 개의 이상한 행동이 미래의 일을 예견한다고 믿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진평왕 53년 춘2월에 흰 개가 궁중의 담장 위에 올라갔다. 5월에 이손과 아손이 모반한 것을 왕이 알았다”라고 나온다. 흰 개의 행동을 모반을 암시한 것으로 본 것이다. 백제본기에도 백제가 망하기 한 달 전 “들 사슴 모양을 한 개가 서쪽에서 와서 사비성 강둑에 이르러 왕궁을 보고 짖어대다가 갑자기 사라졌다”라고 기록돼 있다. 선조들은 ‘개가 지붕 위에 올라가면 흉사가 있거나 가운(家運)이 망한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개 그림도 적지 않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의 벽화 견우직녀도에는 직녀는 개를 데리고 서 있고 무용총과 각저총에도 충직해 보이는 개 그림이 있다. 신라 토우의 개는 외견이 아주 다채롭다. 조선시대에도 개를 많이 그렸다. 나무 아래 개가 그려진 그림은 ‘집을 잘 지켜 도둑을 막는다’는 것을 뜻한다. ‘개 술(戌)’자는 ‘지킬 수(戍)’자와 모양이 비슷하고 ‘나무 수(樹)’자와도 음이 같기 때문이다. 오동나무, 대나무, 복숭아나무 밑에 그려진 개는 각각 상서로움과 평화로움, 영생과 불변, 장생을 오래 누리기를 기원하는 뜻이다. 개 중 흰둥이는 전염병과 도깨비, 잡귀를 물리치고, 집안에 좋은 일이 있게 하고, 재난을 경고해 준다고 믿었다. 농가에서는 노란색이 풍년과 다산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누렁이를 많이 길렀다. 물론 사람의 통제를 벗어난 들개는 위협이 됐다. 천명선 서울대 수의과대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패관잡기’에도 조선 중종 말부터 서울 돈의문 근처 인가에서 키우던 개들이 북쪽 산에 올라가 살며 6, 7년 사이에 40∼50마리로 불었고, 떼를 지어 사람을 공격하기도 했다고 나온다. 천 교수는 “개가 위협하지 않아도 개에 공포를 느끼거나 공황에 빠질 수 있는 ‘개 공포증’이 오늘날 동물 공포증 가운데 35%를 차지한다”고 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3만 호에 이르는 동아일보의 족적에는 취재 현장을 지키다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기자들의 안타까운 죽음들이 있었다. 동아일보 창간 멤버인 장덕준 기자(1892∼1920)는 한국 언론사에서 첫 번째 순직 기자로 기록됐다. 1920년 독립군이 큰 전과를 올리자 일제는 간도의 한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통신부장 겸 조사부장이었던 장 기자는 이를 취재하기 위해 10월 간도 현지로 떠났다. 당시 본보는 무기정간을 당해 보도할 지면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주위에서는 위험하다며 간곡하게 말렸으나 “속간이 되면 반드시 보도해 국내외에 널리 알리겠다”는 장 기자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11월 초순 룽징(龍井)에 도착한 장 기자는 일본 영사관과 군사령부를 찾아가 학살의 진상을 추궁했고, 한 여관에 묵었다가 일본군과 함께 떠난 뒤 실종됐다. 여러 기록은 그가 일본군에 피살됐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장 기자는 간도에서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이냐고 쫓아와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고 첫 소식을 보내왔다.(동아일보 1925년 8월 29일자) 그로부터 77년 뒤인 1997년 7월 5일 본보 출판국 신동아부 이기혁 기자가 장 기자가 실종된 곳과 멀지 않은 중국 훈춘시 남방 두만강변에서 접경지역 취재 중 교통사고로 순직하는 일도 벌어졌다. 당시 34세였다. 생사가 교차하는 베트남전을 종군 취재하다가 유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백광남 기자는 1966년 11월 28일 적군 출몰이 심한 작전지구에서 비극적인 교통사고를 당했다. 디안에 있던 국군비둘기부대를 방문해 취재하고 모터사이클로 혼자 사이공으로 귀환하던 중 베트남 민간인 삼륜차와 충돌했다. 31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백 기자는 베트남 전선에서 숨진 유일한 한국인 기자다. 이중현 본보 사진부 기자는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양곤에서 일어난 북한의 아웅산 폭탄 테러로 순직했다. 당시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등 대통령 수행단 17명과 미얀마인 7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했다. 정부 인사가 아닌 민간인으로 순직한 한국인은 이 기자뿐이다. 여러 차례의 보도사진전에 입상했고, 평소에도 취재 의욕이 남달랐던 그였다. 테러 당일에도 가장 앞줄에서 취재에 열중하다 참변을 당했다. 34세의 아까운 나이였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올해 95회를 맞은 ‘동아일보기 전국정구대회’는 단일 종목 스포츠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전국여자연식정구대회라는 명칭으로 시작한 이 대회는 남성이 아닌 여성들의 경기로 시작됐다. 1923년 6월 30일 서울 정동에 있던 경성제일고등여학교 코트. 무명치마를 입은 여학생들이 댕기머리를 휘날리면서 힘찬 스매싱을 했다. 서울의 진명 숙명 배화 동덕여고, 공주영명학교, 개성호수돈여고 등 8개교 40여 팀이 참가했다. 여성이 치마를 입은 채 코트를 누빈다는 건 사회 통념상 받아들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해괴한 짓’이라는 비난도 나왔다. 대회 불가(不可) 여론이 워낙 거세자 ‘가족과 대회 임원 외 남성의 입장을 불허한다’는 조건을 걸고 겨우 대회를 열 수 있었다. 하지만 3만 명으로 추산되는 구름 관중이 몰렸다. 당시 경성 인구가 25만 명이었으니 대성황이라는 표현조차 부족할 지경이었다. 몰려든 남성 관중은 학교 담장 위로 촘촘히 머리를 내밀었고,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근처 나무에도 매달려 있었다. 대회 당일 동아일보 사설은 “모성의 권위를 역창(力唱)하야 남자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과 직업의 기회균등을 주장하야 전 세계의 남자와 당당히 맞서는 일반 부인운동의 대세는 물론이라”라며 스포츠를 통한 여성 지위 향상을 강조했다. 2006년부터 남자 선수의 출전을 허용했다. 동아일보는 2년 뒤인 1925년 3월 20일에는 조선 최초로 ‘전조선여자웅변대회’를 개최해 여권 신장의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 천도교 기념회관에서 열린 이 대회는 평양에서 온 김화진 여사가 ‘남녀평등을 부르짖노라’는 제목으로 힘찬 첫 연설을 시작했다. “남녀는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습니다. 우리 조선의 여성이 남자의 지위와 대등하게 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살림살이다운 살림살이를 하게 될 것입니다!” 전조선여자웅변대회에는 전국에서 6개 단체와 6개 학교의 대표가 참가했다. 개막 한 시간 전에 초만원을 이뤘고 회관에 들어오지 못한 이들만 3000명이 넘었다. 전례 없이 청중 투표로 결정된 우승자는 평양의 여자엡윗청년회(단체부), 평양의 정미유치사범과 대표(학생부)였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고전번역원이 올해 개발에 착수한 고전문헌 자동(인공지능) 번역 시스템의 번역 결과물들이 최근 전문 번역자 평가에서 평균 3점(5점 만점)을 맞았다. 개발 초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괜찮은 성과다. 어떤 번역을 틀렸을까? 일례로 승정원일기 영조 5년(1729년) 11월 26일 20번째 기사 “今月二十五日初覆入侍時, 捕廳罪人虎狼, 還發配所事…”는 이렇게 번역했다. “이달 25일 초복(初覆)했을 때, 포도청의 죄인 호린(虎麟)을 도로 배소(配所)로 보내도록….” ‘호랑(虎狼)’을 ‘호랑이와 이리’ 등이 아니라 사람 이름으로 맞게 옮겼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러나 원문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기린 린(麟)’자를 추가해 가며 ‘호린’으로 틀리게 옮겼다. 이 인공지능은 사람이 잘 번역해 놓은 짧은 문장 35만 개를 원문과 함께 학습했다. 학습의 알고리즘은 사람이 짜지만 학습 결과 만들어진 ‘단어들의 좌표’는 사실 개발한 이들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인공지능에는 호랑이라는 사람이 기린과 비슷하게 느껴졌던 걸까? 인공지능을 의인화하는 건 여러 오해를 불러온다고 하지만 어딘가 이제 막 말을 하기 시작한 아이와 닮은 듯해 웃음이 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31년 7월 만주를 침략하려는 일제의 음모로 중국 지린성 창춘현 완바오산에서 한중 농민들이 충돌하는 ‘만보산(萬寶山) 사건’이 일어났다. 진상이 와전되면서 조선에서 평양을 중심으로 중국인 보복 폭행과 학살이 벌어지자 동아일보는 ‘허무한 선전에 속지 말라’는 사설을 내고 “우리가 조선에 와 있는 중국사람 8만 명에게 하는 일은 곧 중국에 있는 100만 명 우리 동포에게 돌아옴을 명심하십시오”라며 폭행 중지를 호소했다. 중국 정부에도 조선인들은 일제의 간계에 휘말린 것뿐임을 알려 탄압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나라가 없으니 대사관도 외교관도 없는 게 현실이었다. 당시 신언준 동아일보 상하이 특파원은 중국 국민정부의 왕정옌 외교부장을 만나 사태의 진상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한편으로 “만주의 한인들을 특별히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의 해외 특파원은 나라 없는 조선인들의 대사이자 영사였다. 같은 해 9월 만주사변이 터지자 동아일보는 서범석 특파원을 만주에 머물게 해 재만 동포들의 참상을 신속히 보도하면서 피란 동포를 위한 위문금품을 모집했다. 전 조선에서 6만여 명이 구호물품 1만7809점, 구호금 3만2714원20전을 보내왔다. 서 특파원과 양원모 영업국장은 만주 각처의 수용소를 찾아가 이를 전달했다. 회고에 따르면 당시 편집국장 춘원 이광수는 서 특파원을 보낼 때부터 “전황(戰況) 보도는 필요 없다”고 했다. 동포를 구호할 방책을 강구하는 게 우선이라는 얘기다.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고 조선인 대학살이 번져가던 1923년 9월 일본 도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일 중국 영사가 경찰서에 나타나 말했다. “여러분 중 중국인은 나오시오.” 수용된 한 조선인은 자신을 ‘주인 없는 개’와 같다고 생각했다는 기록도 있다. 얼마 뒤 당시 편집국장이기도 했던 이상협 동아일보 특파원이 경찰서에 나타나 조선인들을 석방시켜줬다. “무슨 구세주를 만난 듯 반가웠으며, 그때의 우리들이 믿고 의지할 곳은 오직 신문사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실하게 느꼈다.” 책 ‘신문야화―30년대의 기자수첩’(김을한·1971년)에 나오는 얘기다. 이 특파원은 빵과 통조림, 음료수 등 식량 2만2000점을 동포에 전달했다. “속히 물러가라”는 협박 속에서도 교포 구제에 온 힘을 기울이고, 생존자 명단을 작성하는 등 현장의 참상과 문제점을 보도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죽음보다 슬프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시행하는 한편 언론 탄압도 극에 달했던 1939년 10월. 동아일보는 백제 멸망 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웠던 실존 영웅의 이야기 ‘흑치상지’를 소설로 연재하기 시작했다. 소설은 첫 장 제목부터 나라 잃은 백성의 참담함을 “죽음보다 슬프다”고 강조했다. “백제의 백성들이 뭉게뭉게 몰려나왔다. … 다 꼬부라진 늙은 한 할머니도 낑낑하며 … 원한과 분노에 차고 맺힌 돌팔매! 당병의 꼭뒤에 비 오듯 쏟아졌다.”(‘흑치상지’에서) 일제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얼마 못 가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연재를 강제로 중단시키지만 소설은 조선인들의 모습을 백제 유민의 현실과 투쟁에 투영하며 저항의식을 고취했다. ‘흑치상지’의 저자는 ‘빈처’ ‘운수 좋은 날’ 등 사실주의 소설의 선구자로 익숙한 빙허 현진건(1900∼1943·사진)이다. 현진건은 시대일보 등을 거쳐 1927년 동아일보에 입사했고, 이듬해부터는 사회부장으로 일했다. 당대 대표적 문인답게, 사회면을 편집하면서 문장력이 뛰어나고 제목을 잘 붙이기로 유명했다. “내가 편집한 지면에서는 교향악의 황홀한 선율이 들리는 듯하다”라고 했다는 회고도 전해진다. 그는 ‘고도 순례·경주’(1929년) ‘단군 성적(聖跡) 순례’(1932년) 등 국토 순례기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며 유려한 필치로 민족의식을 드높이기도 했다.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 사건’ 당시 사회부장으로 구속돼 고초를 겪었다. 이후 일제의 강압으로 회사를 떠나야 했지만 동아일보는 무기정간이 해제된 뒤 그를 학예부장으로 복귀시켰다. 회사를 그만둔 뒤에도 석가탑 전설을 소재로 소설 ‘무영탑’(1938년 7월∼1939년 2월)을 본보에 연재하며 민족혼을 고취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동아일보에는 100년 가까이 게재되는 코너가 있다. 1920년 4월 10일자에 처음 등장한 ‘휴지통’과 같은 해 7월 25일자(지령 100호)부터 시작된 ‘횡설수설’이다. 국내 언론사상 최장수 고정란, 칼럼으로 만 97년을 넘어 오늘도 연재되고 있다. 제목에 대해 ‘횡설수설’은 첫 회에서 “천언만어(千言萬語)가 횡설수설에 불과할 것”이라고 운을 뗐다. 휴지통은 마치 ‘휴지통에 버릴 만한 원고’ 같다. 그러나 실제로 두 코너는 당대의 권력에 정면으로 맞선 창(槍)이자 서민들의 애환을 대변하는 창(窓) 역할을 했다. 휴지통은 첫 회부터 1년 전 3·1만세운동 얘기를 꺼내며 조선총독부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 씨는… 조선말을 배우려면 제일 먼저 ‘만세’가 어떤 말인지 투철히 궁리해야.” 횡설수설도 “인기(印機·인쇄기)에서 떨어지는 신문지를 산더미같이 실어서 경찰서로 잡아간다”며 ‘언론자유’가 유린되는 상황에 대해 총독부를 비판했다. 초기에는 이상협 편집국장이 두 고정란을 직접 썼다. 총독부는 촌철살인과 같은 단평(短評)에 아픈 곳을 계속 찔리자 무척 당황했다. 일본어 혼용을 비판한 1920년 4월 27일자 휴지통 때문에 발매 금지와 삭제 뒤 재발매 처분이 내려지기도 했다. 3·1운동 7주년 축전 게재로 무기정간을 겪고 난 뒤 “언론기관은 정지가 아니면 금지”라고 비판한 횡설수설 집필 기자 최원순이 징역 8개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광복과 6·25전쟁 뒤에도 두 코너는 권력을 비판한 정론, 세태를 응축한 기사로 오래도록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독자 조사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내용 3, 4위에 꼽히기도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50, 60년대 가수와 영화배우로 활약하며 전쟁으로 상처받은 국민들을 위로했던 나애심(본명 전봉선·사진) 씨가 20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난 고인은 6·25전쟁 중 오빠 전오승이 작곡한 ‘정든 화랑님’ 등의 노래를 부르며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대구로 피란해 이북 출신 예술인들로 구성된 ‘꽃초롱’ 단원으로 입단했다. 1953년 데뷔 첫 앨범에서 전오승이 작곡한 ‘밤의 탱고’ 등을 불렀고, 가수 겸 작곡가 한복남이 ‘나애심(羅愛心)’이라는 예명을 지어줬다. 이후 ‘언제까지나’ ‘미사의 종’ ‘황혼은 슬퍼’ ‘맘보는 난 싫어’ ‘해 떨어지기 전에’ ‘아카시아 꽃잎 질 때’ 등 수많은 히트곡을 포함해 300여 곡을 불렀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외모로 영화배우로도 큰 사랑을 받았다. ‘구원의 애정’ ‘물레방아’ ‘백치 아다다’ ‘쌀’ ‘감자’ 등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80년대 들어서 연예활동을 중단했다. 고인은 딸 김혜림이 1989년 ‘DDD’라는 노래로 데뷔해 인기를 얻는 등 연예인 집안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22일 오전 9시. 02-3410-3151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저는 미국의 제일인자 슈로더 선수와 병주(병走)하야 육초 팔의 차로 그만 패하엿읍니다. 저는 힘껏, 맘껏, 가슴이 아프도록 뛰엇읍니다. 뻬스트(베스트)를 다하엿읍니다. 조금도 후회가 없읍니다.” ‘오직 뻬스트를 다할 뿐’이라는 제목과 함께 동아일보에 실린 이 기고는 1936년 2월 제4회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겨울올림픽 빙속(氷速)에 출전한 김정연 선수가 전날의 5000m 경기 결과를 보내온 것이다. 동아일보는 17회에 걸쳐 김 선수의 ‘빙상 정도기(征途記)’를 연재했다. 빙상은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과 더불어 조선인의 자존심이 걸린 스포츠였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 최초의 빙상대회는 동아일보 평양지국이 1923년 1월 연 ‘대동강 빙상 운동대회’다. “관람자가 강 좌우와 성벽의 양편과 운동장에 무려 수만 명이나 되어 인산인해의 대성황을 이뤘다.” 본보는 1940년 마지막 대회까지 평양청년회, 관서체육회와 이 대회를 공동주최하거나 후원했다. 실내 경기장이 없었던 시절이라 얼어붙은 강 위에서 경기가 열렸다. 본보 주도로 결성된 조선체육회는 1925년 1월 제1회 전조선빙상경기대회를 한강에서 열었다. 대회 명칭을 ‘전조선빙상경기선수권대회’로 바꾸어 해마다 선수가 100명 넘게 참가했고, 1938년 마지막 대회까지 김정연 선수를 비롯한 당대의 빙상 스타를 여럿 배출했다. 최초의 여자빙상경기를 후원한 것도 동아일보였다. 1934년 열린 제1회 전조선여자빙상경기대회에서는 관객이 링크 주위를 스무 겹으로 에워싸고도 넘쳤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여성에게 완전히 문호를 개방해…빙반 상에서 진취적 기백을 함양할 것”이라고 했다. ‘빙속 여제’ 탄생의 뿌리인 셈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17년 문화계는 참으로 ‘오락가락’했다. 행복이 지나가면 슬픔이 왔고, 아픔이 아물면 기쁨이 돋아났다. 새로운 한 해 ‘오는 즐거움(樂)’을 맞아들이기 위해 2017년 한 해 문화계의 사연과 화제를 모아봤다. “약간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집권 23일째를 맞은 문재인 대통령이 올 6월 초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불쑥 꺼낸 ‘뜬금’ 없는 얘기는 올 한 해 문화재·학술계를 뜨겁게 달궜다. 문 대통령은 이날 “지방 공약에 포함된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국정과제에 꼭 포함시켜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문화재청은 내년도 가야유적 발굴에 32억 원, 보수정비에 145억 원을 투입하는 내용의 ‘가야문화권 조사·연구와 정비사업’을 최근 발표했다. 학계는 “신라사 연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가야사 연구가 활성화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며 환영 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권 개입으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앞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발굴현장을 방문한 이후 경주 월성 발굴조사가 속도전으로 흐른 전례가 있어서다. 가야유적이 있는 영·호남 지방자치단체들이 최근 정부에 요청한 가야사 관련 예산은 무려 3조 원에 달한다. 가야사 복원의 본래 취지와 무관하게 지자체 간 과열 경쟁과 예산 낭비가 우려되는 대목이다. 7년을 끈 이른바 ‘증도가자(證道歌字)’ 논란이 올해 일단락된 것도 특기할 만하다. 문화재위원회는 올 4월 증도가자에 대한 국가문화재 지정을 전격 부결시켰다. 앞서 증도가자 재검증을 실시한 조사단의 ‘지정 보류’ 의견에서 한발 더 나간 예상 밖 결정이었다. 문화재위는 부결 사유에 대해 “증도가자의 출처와 구입 경로가 불확실하다”고 밝혔다. 증도가자 논란은 국가문화재 지정에서 출처 규명이 핵심이라는 교훈을 남겼다. 올해 학술분야에서는 인공지능(AI)과 인문학 연구의 결합이 주목받았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세계 최초로 AI를 이용해 한문 고전을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첫 대상은 ‘승정원일기’. 번역기간을 45년에서 18년으로 27년가량 단축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이 일본 교토대 서고에서 추사 김정희의 친필 시첩을 비롯해 조선후기 문화의 정수가 담긴 희귀 고문헌과 서화 등 수천 점을 발견했다. 경주 석굴암의 원모습을 보여주는 논문도 나왔다.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19세기 말 석굴암 중수 공사를 기록한 상량문을 정밀 분석해 공사 이전에는 지금과 달리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대사와 관련해서는 문 대통령의 “2019년 건국 100주년을 맞는다”는 8·15 경축사가 해묵은 건국 시점 논쟁을 다시금 촉발했다.김상운 sukim@donga.com·조종엽 기자}

‘동아일보(東亞日報)’라는 제호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 민족이 발전하려면 시야를 넓게 해 조선을 넘어 동아시아 전체, 나아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왔다. 나라를 강제로 빼앗긴 식민지 현실임에도 제호부터 ‘글로벌’한 포부를 담은 것이다. 제호를 제안한 이는 1919년 3·1운동 뒤 한성 임시정부를 조직했던 석농(石농) 유근(1861∼1921)이다. 조선 말기 민중 계몽에 앞장섰던 황성신문의 창간 멤버이자 사장을 지내기도 했던 유근은 동아일보 창간 시 편집감독으로 참여했다. 독립 정신을 고취한 민간 신문의 정신을 동아일보가 이어 받은 것이다. 다른 한편 동아는 곧 조선을 뜻하기도 했다. “동방 해뜨는 곳의 주인은 조선됨(임)이 바꾸지 못할 것이요.” 창간호 5면에 실린 국어학자이자 사학자인 애류(崖溜) 권덕규(1890∼1950)의 기고 ‘동아해(東亞解)’에 담긴 표현이다. 이 글은 옛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를 북아시아에서 동아시아까지로 폭넓게 바라보면서 지난날 부강하고 찬란한 문명을 이뤘음을 강조했다. “‘동아’란 넓게는 조선,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를 모두 가리키는 것이지만 좁게는 만몽(滿蒙·만주와 몽골) 대륙과 조선반도의 옛 조선 땅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다.”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하는 목적의 역사관 아래 동아시아가 곧 조선의 옛 땅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글은 또 조선 민족의 사명은 ‘홍익인간’이며 세계를 구제하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오늘날에 비춰도 장대한 포부를 담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도형)은 6일 최근 일본 정부가 낸 ‘침략 전쟁의 역사 관련 조치’에 대한 재단 입장 자료를 통해 “일본 정부는 독도의 일본 영유권을 주장하는 상설 전시관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철회하라”고 밝혔다. 최근 교도통신 보도로 내년 3월 도쿄의 한 공원에 이 같은 전시관을 연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동북아재단은 “독도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영토이며, 이 같은 계획은 한반도 침략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재단은 또 일본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일본 근대산업시설을 등재하면서 산업시설의 한국인 강제 동원과 강제 노동 사실을 알리겠다고 약속했으면서 이를 이행하지 않는 점을 비판했다. 일본은 세계유산 등재 뒤 외무성 홈페이지에서 강제동원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했으며, 공통 안내판은 물론이고 각 시설 안내판에도 거의 기술하지 않고 있다. 재단 측은 “이 같은 조치들은 식민 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사죄와 반성을 표해 온 일본 정부의 입장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효꽈(효과·效果)’ ‘관껀(관건·關鍵)’ ‘교꽈(교과·敎科)’의 된소리 발음이 표준 발음으로 새롭게 인정됐다. 국립국어원은 표준국어대사전 수정 내용 40건을 최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안간힘은 ‘안깐힘’ 말고도 ‘안간힘’이라고 읽어도 되고, 순이익은 ‘순니익’ 또는 ‘수니익’으로 읽어도 된다. ‘반값’은 ‘반갑’뿐 아니라 ‘반깝’으로 읽어도 되며, 성적을 나타내는 숫자 ‘점수(點數)’의 발음 역시 ‘점쑤’와 더불어 ‘점수’가 새로 인정됐다. 새로 사전에 오른 단어도 있다. ‘기다랗게 되다’라는 뜻의 ‘기다래지다’가 표준어로 이번에 인정됐고 접두사 ‘기(旣)’도 ‘그것이 이미 된’ ‘그것을 이미 한’이라는 뜻과 함께 표제어에 더해졌다. ‘기구축’ ‘기출석’과 같이 사용할 수 있다. ‘노랫말을 고치거나 다시 짓다’라는 뜻의 ‘개사(改詞)’도 사전에 등재됐다. 듣는 이를 부르는 말 ‘이보십시오’가 새로 사전에 오르면서 ‘이보세요’ ‘이보쇼’ ‘이보시게’ ‘이봐요’ 등도 함께 등재됐다. 미망인의 뜻풀이는 ‘아직 따라 죽지 못한 사람이란 뜻으로, 남편이 죽고 홀로 남은 여자를 이르는 말’에서 ‘남편을 여읜 여자’로 바뀌었다. “아직 따라 죽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미망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례가 된다”는 각주가 달렸다. 널리 쓰이지만 아직 뜻풀이가 없던 말도 뜻이 추가됐다. ‘줄’ ‘줄을 대다’는 말에는 “자신에게 이익이 될 만한 사람과 관계를 맺다”라는 풀이가 더해졌다. “관리자에게 줄을 대어 승진을 하던 시대는 지났다”는 예시 문장도 실렸다. ‘올라오다’라는 단어에는 “컴퓨터 통신망이나 인터넷 게시판 따위에 글이 게시되다”라는 풀이가 추가됐고, ‘잎’에는 ‘꽃잎을 달리 이르는 말’이라는 뜻이 추가됐다. ‘잘생기다’ ‘못생기다’ ‘잘나다’ ‘못나다’ ‘낡다’ 등은 형용사에서 동사로 품사가 수정됐다. ‘잘생겼다’ 등이 과거가 아니라 현재 상태의 의미를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국립국어원은 설명했다. ‘빠지다’ ‘생기다’ ‘터지다’도 보조 형용사에서 보조 동사가 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개봉 예정이라는 소식에 원작인 동명 TV 드라마를 만든 일본 이와이 슌지 감독이 떠올랐다. 감독을 한국에 널리 알린 건 영화 ‘러브레터’. 국내 개봉은 1999년으로 지금으로부터 무려 18년 전이다. 1999년에서 다시 18년을 빼면 1981년이고, 그해 국내 개봉한 해외 영화로는 ‘슈퍼맨2’ ‘13일의 금요일’이 있다. 그러니까 지금 영화 ‘러브레터’에 관한 기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1999년 기준으로 그런 케케묵은 영화를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사실 ‘러브레터’는 국내에서 3번이나 재개봉됐고, 또다시 재개봉을 앞두고 있다. 마치 ‘오겐키데스카∼ 와타시와 겐키데스(잘 지내나요, 저는 잘 지냅니다)!’라는 주인공의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것 같다. 기억도 묵어가고, 사람도 묵어가는데 영화는 여전히 설원처럼 차가운 처음의 느낌을 그대로 전한다. 예술가들이 작품을 남기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부제를 보고 펠리페 2세 시대의 국제정치 변동만이 담겼다고 생각하면 낭패를 볼 것이다. 1권에 담긴 1부 제목은 ‘환경의 역할’이다. 산지, 고원, 평야, 바다, 연안, 사막, 기후, 계절 등에 관한 서술이 이어진다. ‘아날 학파’의 거두로 20세기 역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저자(1902∼1985)는 이 같은 지리적 환경을 인간 행위의 배경이 아니라 기초적인 인간 활동을 지배하는 또 다른 행위 주체로 봤다. ‘지리적 시간’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듯 느리게 흘러간다. 반복적이고 거의 영속적이다. 저자는 2차대전 중 독일군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서 이 책을 썼다. 훗날 ‘역사학의 교황’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역사학을 중심으로 다른 학문들을 통합하는 인간학 연구를 주도했다. 책은 역사를 3개의 시간대로 구분한다. 지리적 시간 다음은 ‘사회적 시간’이다. 이는 인간 집단 활동의 층위로, 넓은 의미의 사회사라고 할 수 있다. 2부가 여기 해당한다. 경제, 제국, 사회, 문명, 전쟁 등의 주제가 각각 상, 하로 나눠 담겼다. 마지막으로 정치 투쟁과 같은 ‘사건들의 역사’가 담긴 3부는 향후 출간 예정이다. 역사적 시간의 3분(分) 구조는 ‘구조―국면―사건’으로 변형돼 저자의 또 다른 고전 ‘15∼18세기 물질문명, 경제, 자본주의’(‘물질문명과 자본주의’로 번역 출간)로 이어졌다. 끊임없이 정보들이 이어지는 연구서이기에 웬만한 서양사 지식이 없는 독자가 읽기에는 만만치 않지만 ‘고전이 왜 고전인지’ 보여주는 깊이가 담겼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직후 동아일보는 가장 먼저 호외를 내며 소식을 알렸고, ‘조선인 윤봉길’이라는 이름도 당일 호외를 통해 처음으로 밝혔습니다. 이는 당시 동아일보가 상하이의 통신원과 직접 교류하고 있었다는 걸 뜻하죠.” 독립기념관은 한국의 독립 의지를 만방에 알린 윤봉길 의사의 순국 85주기(19일)를 맞이해 2, 3일 일본 가나자와대에서 ‘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을 주제로 한일 공동 학술회의를 연다. ‘윤봉길 의거에 대한 국내외 언론 반응’을 발표하는 홍선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1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상하이와 직통하지 않고서는 이처럼 발 빠르게 보도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동아일보는 1932년 4월 29일 윤 의사 의거 직후 첫 호외를 내고 “조선인이 폭탄을 던졌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 두 번째 호외에서는 머리기사 제목으로 “조선인으로 판명, 윤봉길, 연령 25세”라며 이름도 처음으로 밝혔다. 5월 1일까지 호외만 4번을 낸 신문도 동아일보뿐이다. 윤 의사의 사진을 처음으로 게재한 것도 동아일보 5월 3일자다. 윤 의사의 가족사진도 함께 실었다. 5월 4일자에는 윤 의사 체포 장면 사진을 실었고, 7일자에는 윤 의사와 가족의 근황을 자세히 보도했다. 8일자에는 일본 육군성이 사건의 전모를 밝히자 이를 토대로 임시정부를 비롯해 상하이의 독립운동 근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이후 윤 의사 순국 때까지 의거로 체포당한 안창호 선생의 국내 압송, 윤 의사 군법회의, 일본 호송 등 속보를 이어갔다. 그해 11월 22일자 윤 의사의 사형이 오사카에서 집행될 예정이라는 기사에도 윤 의사의 사진을 실었다. 홍 연구위원은 “당시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뒤로 언론 통제도 극심했던 상황”이라며 “동아일보가 ‘목숨을 걸었다’ 싶을 정도로 통제를 비집고 계속 윤 의사 관련 기사와 사진을 올리면서 민족지로서 사명을 다했다”고 말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도 윤 의사의 의거 당일 바로 호외를 내는 등 보도를 했다. 그러나 ‘조선인 윤봉길’에 대한 보도를 애써 지우려 하면서 폭탄 폭발 상황과 일본인 부상자의 피해, 그리고 사건에 대한 국제사회의 동정에 무게를 뒀다는 게 홍 연구위원의 분석이다. 당시 미국을 제외하고 영국, 프랑스, 스위스 등 해외 언론은 대체로 윤봉길 의거를 ‘테러 사건’으로 규정하고, 부상당한 일본인에 대한 동정과 중일 간에 추진하던 정전협상에 주목했다. 한편 다무라 미쓰아키 전 일본 호쿠리쿠대 교수는 학술회의 발표문 ‘세계사적 저항운동의 관점에서 본 윤봉길 의거’에서 “윤봉길의 의거는 프랑스의 반(反)나치 레지스탕스 활동과 같다”고 평가했다. 다무라 교수는 “레지스탕스는 점령군에게 타격을 주는 모든 활동”이라며 “조선의 의병투쟁이나 윤봉길의 의거는 히틀러 암살 시도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열강에 저항한 세계 독립운동사에 큰 의의를 지닌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사, 광복 뒤 반민특위재판부장, 붓으로 대한민국 법률 초안을 써내려 간 법전편찬위원장, 정권의 독재화에 맞서 사법부 독립을 지켜낸 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1887∼1964) 없이 대한민국 사법부의 역사는 성립이 불가능하다. 김병로의 법률가적 면모에 집중한 일대기 ‘가인 김병로’(박영사)가 최근 발간됐다. 저자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1995년까지 대법원이 있던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 앞에서 27일 만났다. “이승만 대통령의 진노를 샀던 판사들이 김병로 대법원장 재임 시기(1948년 8월∼1957년 12월)에는 자리와 소신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 집권 연장 목적의 개헌에 반대하던 서민호 의원이 총격 사건으로 구속되자 안윤출 판사는 법과 양심에 따라 구속집행정지를 결정해 서 의원을 석방했다. 그러나 시위와 살해 협박에 시달렸다. 이승만 대통령이 결정에 불만을 표하자 김병로 대법원장은 말했다. “판결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절차를 밟아 항소하시오.” 이승만 대통령은 김 대법원장이 못마땅해 장관에게 “요즘 헌법(김병로) 잘 계시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 교수는 “김병로가 대법원장이었다면 1959년 조봉암의 사형 판결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며 “김병로는 힘없는 신생 국가의 사법부의 독립과 법관의 소신을 외풍으로부터 지킨 법조 윤리의 화신”이라고 말했다. 그 바탕은 극도의 청렴함과 강직함이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변호사 개업을 하려는 판사를 김 대법원장이 “나도 죽으로 살고 있어요. 서로 죽을 먹어가면서 일해 봅시다”라며 만류한 일화도 전해진다. 920쪽에 이르는 이 책은 법학 지식을 바탕으로 가인의 활동과 고뇌를 추적했다. 가인이 독립운동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론했는지도 세밀하게 담겼다. “가인은 일제강점기 내내 광복 뒤 법률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일례로 피고인의 인권 침해를 막기 위해 구속기간을 제한하는 한국 형사소송법은 일본 미국 독일 등에도 유례가 없다. “독립운동가들이 붙잡히면 판결 뒤 복역보다 더 고통스러운 게 무기한 연장되는 수사와 재판입니다. 2, 3년 구속돼 있는 동안 고문당해서 죽거나 몸과 마음이 상합니다. 그들을 변호했던 김병로 선생이 6·25전쟁 중 대한민국 형사소송법 초안을 만들며 집어넣은 것이지요.” 한 교수는 인터뷰에서 가인과 동아일보의 깊은 인연도 소개했다.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고하 송진우와 가인은 더없이 가까웠지요. 일본 유학 뒤 가인은 변호사, 고하는 언론에서 활약하며 상승작용을 했습니다. 언론은 독립운동가가 붙잡혀도 피고인을 직접 접촉 못 했지요. 가인이 변호하며 얻은 정보를 언론이 크게 보도하며 독립운동을 나라 전체에 알렸던 겁니다. 광복 뒤에도 헌법정신을 바탕으로 정권을 비판하는 가인의 기고가 동아일보에 제일 많습니다.” 한 교수는 “가인은 안창호, 김성수, 이인 등 지도자는 물론이고 홍명희, 허헌, 여운형 등 우파 중도파 좌파와 두루 절친했다”며 “한결같이 정치적 좌우를 가리지 않고 통합노선을 추구했다”고 강조했다. 자료 수집에만 10년이 걸렸다. 그동안 방학 때만 되면 ‘20세기에 들어가’ 살았고, 일제강점기 고문 관련 기사를 하도 읽어 자신도 몸에 통증이 오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한 교수는 “김병로 선생은 한국 법제, 사법, 법률, 윤리의 초석을 놓은 법의 거인”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