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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문에는 오메가3 등 각종 의약품 광고물과 약국 운영시간을 알리는 게시물이 걸렸다. 그런데 약 광고 주변으로 에세이, 소설 등 신간 소개가 줄줄이 붙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오른쪽에는 약이, 왼쪽에는 책이 가득하다. 이 수상한 공간은 서울 마포구에 있는 약국이자 ‘아직 독립 못한 책방’이라는 이름의 서점. 최근 이곳에서 만난 박훌륭 약사(40)는 “하루에도 여러 명이 ‘여기가 약국 맞냐?’고 묻는다”며 웃었다. 그가 ‘약국 안 서점’을 연 건 2018년 8월. 책을 읽는 것은 물론이고 사서 모으는 걸 즐기던 그는 좋아하는 일을 아예 자신의 일터에서 해보자는 생각으로 서점을 열었다. 그는 “약국을 하면서 ‘처방전 없이 살짝 약을 달라’는 등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하는 분들이 많아 스트레스가 컸다. 인사를 해도 받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으며 일이 적성에 안 맞다는 생각도 했다”며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 약국 일도 더 즐거워지지 않을까 싶어 서점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잘 팔리지 않는 약국 판매용 화장품을 정리하고 그 자리에 책 100여 권을 진열했다. 서점이라고 하기는 애매한 규모. 그러나 작디작은 이곳을 찾아오는 손님이 점점 늘었다. 그는 “처음 책을 팔았을 때 ‘여기도 손님이 오네’ 싶어 얼떨떨하면서도 이게 작은 동네 책방만의 매력이구나 싶어 신났다”며 “나와 책 취향이 비슷한 이들과 친해지면서 사람 만나는 재미를 다시 느끼게 됐다”고 했다. 작은 서점의 매력을 알게 된 그는 이벤트에도 도전했다. 2019년 7월 김연수 작가와 독자들을 초청한 걸 시작으로 지난해 8월까지 20회 가까이 ‘약국 안 북토크’를 열었다. 지난해 5월 가정의달에는 추첨을 통해 구매자의 집으로 책을 배달해주는 이벤트도 했다. 그는 제주도까지 책 배달을 다녀왔다. 연필, 우산, 과일즙 등을 굿즈로 만들어 증정하는 행사도 진행했다. 그는 “책에 대한 접근이 너무 근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놀이처럼 책을 대할 수 있는 이벤트를 구상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달 초에 펴낸 에세이집 ‘약국 안 책방’(인디고)에서 끊임없이 이벤트를 벌이는 이유로 “작은 책방을 일부러 찾아주는 분들에게 무언가 돌려주고 싶은 마음, 좀처럼 웃을 수 없는 날들 속에 소소한 행복을 나누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썼다. ‘좋아하는 책이나 모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시작한 서점은 어느새 약 1500권 규모로 발전했다. 약품 진열대는 조금씩 서가에 자리를 앙보하는 중이다. 그는 “약국 안 서점이 우리 서점만의 정체성인 만큼 서점을 따로 낼 계획은 없다”며 “본업인 약사 일에 충실하면서 좋아하는 책을 읽고 책을 좋아하는 이들을 만나며 ‘아사장(아직 독립 못한 책방 사장)’으로 불리는 게 행복하다”고 했다. “저도 구체적인 생각을 안 하고 일단 서점을 시작했거든요. 책 몇 권 꽂아 놓는 걸로요.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일단 시작하면 좋겠어요. 고민하느라 시작조차 못 하는 일이 없었으면 해요. 일단 시작하고 보면 어떤 식으로든 방향은 생길 겁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평생 술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은 데다 식단까지 철저히 관리하며 살아온 자타 공인 ‘FM 남편’이 있다. 게다가 직업은 태권도 도장 관장. 건강이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던 이 남자는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대장암 3기 선고를 받은 것. 채널A와 SKY가 공동 제작하는 부부 토크쇼 ‘다시 뜨거워지고 싶은 애로부부’는 20일 방송에서 암 진단을 받은 뒤 비뚤어지기 시작하는 남편 이야기를 다룬다. 실제 사연을 바탕으로 제작된 드라마에서 아내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간병한다. 그러나 헌신적인 아내에게 돌아오는 건 남편의 타박뿐. 남편은 “당신은 언제나 날 환자 취급한다. 그래서 기가 살 남자가 어디 있느냐”며 아내를 몰아붙이기 일쑤다. 실제 부부가 출연해 갈등을 터놓는 ‘속터뷰’에서는 30대 부부가 등장한다. 남편은 ‘예수’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선량한 인상을 자랑한다. 9년간 아내에게 화 한 번 내지 않을 정도로 인자한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아내에게 ‘폭탄 제안’을 한다. 아내는 ‘멘붕(멘털 붕괴)’에 빠졌다. 아내는 “일반인이 집에서?”라고 되묻는 등 당황해하는 모습. MC 이용진은 남편을 보며 “불나방 같은 삶을 살고 계신다”며 놀란다. 순하디순한 남편이 모두를 놀라게 한 ‘반전 제안’은 무엇일까. 이들의 사연은 20일 오후 10시 30분 채널A와 SKY에서 동시에 공개된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1980년대 한국 영화들에선 노출 경쟁이 일었다. 군부정권 시절 대중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시행되던 ‘3S 정책’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영화 제작 의욕상실증’의 결과물이라거나 ‘얄팍한 흥미 영화’라는 비판을 샀다. 이런 에로영화 중에서도 상징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애마부인’(1982년)과 ‘변강쇠’(1986년)가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쳐 29일 CGV에서 재개봉한다. CGV는 올해 3월부터 ‘시그니처K’ 상영관을 통해 한국영화를 재개봉하고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 ‘공동경비구역 JSA’ 등 과거 화제를 모았던 영화들을 다시 선보이고 있는 것. 다양한 테마를 잡아 재개봉작을 선보였지만 이번처럼 에로물을 재개봉하는 건 이례적이다. 황재현 CGV 커뮤니케이션팀장은 “한국영화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1980년대 에로영화는 빼놓을 수 없다”며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인 만큼 영화를 보는 동시에 그 시대 자체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두 작품을 선정했다”고 말했다. ‘애마부인’과 ‘변강쇠’는 이른바 ‘벗는 영화’로 비판받았지만 당시 호평도 없진 않았다. 애마부인은 외도를 일삼다 범죄를 저지른 남편이 감옥에 가자 남편을 기다리던 끝에 자유롭게 연애를 하는 여성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그 끝이 비극은 아니다. 이 때문에 ‘여성 해방의 기류’를 보여준 영화라거나 ‘여자에게만 강요되는 정조의 개념을 떨쳐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변강쇠’ 역시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억눌린 성에 대한 갈망을 해학적으로 보여준 토속 에로티시즘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에로물이지만 표현 부분에서는 예술적 요소도 많다”며 “영화 소재나 표현 방식에 온갖 제약을 받던 당시 영화인들이 영화에서 성을 어떤 방식으로 은유했는지를 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두 영화엔 검열을 피하기 위해 성관계 장면을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게 처리하는 등 정부가 에로물 양산 자체는 방관하면서도 세부 검열은 엄격하게 진행하던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많다. 적나라한 묘사를 피하기 위해 표정과 소리, 음악을 최대한 활용하거나 돌이 굴러가는 모습, 새떼가 날아가는 모습 등 기발한 장면으로 은유한 부분도 관람 포인트다. 두 영화엔 당시로선 파격적인 수위의 노출 장면이 들어가지만, 요즘 기준으로 보면 에로물로 분류하기 힘든 수준. 그럼에도 두 영화는 재개봉을 앞두고 또다시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받았다. 두 영화의 리마스터링 작업을 진행한 김남희 콘텐츠존 이사는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소재 탓에 영화 속 은유적 요소도 선정적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며 “1980년대에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나이 탓에 보지 못한 분들이 당시의 추억을 가지고 이 작품들을 보면 좋겠다”고 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대본을 처음 완성했던 2009년만 해도 내용이 낯설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런데 어느새 이 작품과 어울리는 세상이 돼있었다. 이제는 오히려 현실감 있다는 평가를 듣는다. 매일 살아가는 게 서바이벌(게임) 아닐까 한다.” 17일 공개를 앞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연출한 황동혁 감독(50)은 15일 열린 온라인 제작발표회에서 이같이 밝혔다. ‘오징어게임’은 육군 헌병대의 군무이탈자 체포전담조 이야기를 다룬 ‘D.P.’ 이후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중 가장 큰 기대를 모으고 있는 작품. 1970, 80년대 어린이들이 골목길에서 자주 하던 오징어게임에서 작품명을 따왔다. 오징어게임은 땅에 오징어 몸통 모양의 그림을 그린 뒤 공격자와 수비자로 나눠 서로를 넘어뜨리는 등 그림 안에서 몸싸움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드라마 ‘오징어게임’은 참가자 456명이 우승자 1인에게 돌아가는 상금 456억 원을 놓고 오징어게임을 비롯한 여섯 가지 게임을 하는 내용이다. 456명은 똑같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첫 게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참가한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알록달록한 색으로 꾸며진 게임 세트장은 동심에 절로 빠져들게 하는 평화로운 분위기다. 그러나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공간으로 돌변한다. 첨단 기기로 모든 움직임을 감지하고, 미세하게나마 움직인 이에겐 곧바로 총알이 날아든다. 게임의 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거나 패배한 참가자를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다. 인간을 극한의 경쟁으로 내모는 현대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인간성을 잃은 사람들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주인공 성기훈 역을 맡은 배우 이정재는 이날 “시나리오 속 게임을 어떻게 실제로 구현해낼지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며 “세트장 가는 날이 굉장히 기대되고 재밌었던 작품”이라고 했다. 황 감독은 “오징어게임은 제가 어릴 적 골목에서 하던 놀이 중 가장 경쟁적이고 격렬했던 놀이”라며 “오징어게임이 현대 경쟁 사회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임인 거 같아 제목으로 정했다”고 했다. 잔혹성과 폭력성이 매우 높다는 지적에 대해선 “데스게임 형식이라 잔인한 요소를 뺄 순 없었다”며 “폭력과 잔인함을 과장하려 하지 않았고 경쟁 결과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도록 하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실직한 뒤 사채를 쓰고 도박에까지 손을 댄 성기훈과 서울대를 졸업한 뒤 대기업에 입사해 승승장구하지만 고객 돈을 유용해 투자를 하다 빚더미에 앉은 조상우(박해수) 등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 소매치기를 하며 근근이 사는 새터민, 조직의 자금을 도박으로 탕진한 조직폭력배 등 사연은 다 다르지만 바닥까지 추락한 건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등장한다. 배우 박해수는 “인간 군상들의 섬세한 심리 변화와 성장 과정이 매우 매력적이었다”고 했다. 황 감독은 영화 ‘도가니’ ‘수상한 그녀’ ‘남한산성’ 등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을 통해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췄다고 평가받는 대표적인 감독. 그런 그가 현대사회의 어두운 면을 통째로 은유한 이번 작품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뭘까. 황 감독은 “‘우리는 왜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경쟁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경쟁은 어디서 시작됐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는 작품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 이 작품에 절망과 분노, 공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감독은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인간성을 잃지 않는 인물을 통해 실낱같지만 희망은 존재한다는 메시지도 전한다. 총 8부작.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이 대본을 처음 완성했던 2009년만 해도 내용이 낯설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런데 어느새 이 작품과 어울리는 세상이 돼있었다. 이제는 오히려 현실감 있다는 평가를 많이 듣는다.” 17일 공개를 앞두고 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연출한 황동혁 감독은 15일 열린 온라인 제작발표회에서 이 같이 밝혔다. ‘오징어게임’은 육군 헌병대(현 군사경찰대)의 군무이탈자 체포전담조 이야기를 다룬 D.P 이후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중 가장 큰 기대를 모으고 있는 작품. 1970년대, 80년대 어린이들이 자주 하던 추억의 놀이인 오징어게임에서 작품명을 따왔다. 오징어게임은 땅에 세모, 네모, 동그라미를 이용해 오징어와 유사한 그림을 그린 뒤 공격자와 수비자로 나눠 서로를 넘어뜨리는 등 그림 안에서 몸싸움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드라마 ‘오징어게임’은 참가자 456명이 우승자 1인에게 돌아가는 상금 456억 원을 놓고 오징어게임을 비롯한 여섯 가지 생존 게임을 벌이는 내용이다. 456명은 똑같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첫 게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참가한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분홍색, 노란색 등 알록달록한 색으로 꾸며진 게임 세트장은 동심에 절로 빠져들게 하는 평화로운 분위기다. 그러나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이 세트장은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공간으로 돌변한다. 어린 시절처럼 “난 안 움직였어”라고 한 번 우겨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첨단 기기로 모든 움직임을 감지하고, 미세하게나마 움직인 참가자에겐 곧바로 총알이 날아든다. 게임의 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참가자를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다. 인간을 극단의 경쟁으로 내모는 현대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비인간화된 사람들 모습을 추억의 놀이를 내세워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기훈 역을 맡은 배우 이정재는 이날 “시나리오 속 게임을 어떻게 실제로 구현해낼지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며 “세트장 가는 날이 굉장히 기대되고 재밌었던 작품”이라고 말했다. 황 감독은 “오징어게임은 제가 어릴 적 골목에서 하던 놀이 중에 육체적으로 가장 격렬했던 놀이”라며 “오징어게임이 현대 경쟁 사회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임인 거 같아 제목으로 정했다”고 했다. 잔혹성과 폭력성이 매우 높다는 지적에 대해선 “ 데스게임 형식이라 잔인한 요소를 뺄 순 없었다”며 “대신 폭력과 잔인함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려하지 않았고 경쟁 결과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도록 하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실직한 뒤 사채를 쓰고 도박에까지 손을 댄 기훈과 서울대를 졸업한 뒤 대기업에 입사해 승승장구 하지만 고객 돈을 유용해 투자를 하다 실패해 빚더미에 앉은 상우(박해수) 등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 뇌종양을 앓는데다 치매 증상까지 있는 노인, 소매치기를 하며 근근이 사는 새터민, 조직의 자금을 도박으로 모두 탕진한 조직폭력배 등 저마다 사연은 다르지만 벼랑 끝에 몰린 건 매한가지인 다양한 인간군상이 등장한다. 배우 박해수는 이날 “시나리오에 여러 인간군상이 나오는데 그들의 섬세한 심리 변화와 성장 과정이 매우 매력적이었다”고 했다. 황 감독은 영화 ‘도가니’ ‘수상한 그녀’ ‘남한산성’ 응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을 통해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췄다고 평가받고 있는 대표적인 감독이다. 그런 그가 바닥까지 추락한 인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현대사회의 어두운 면을 통째로 은유한 이번 작품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주려는 메시지는 뭘까. 황 감독은 “‘우리는 왜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경쟁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경쟁은 어디서 시작됐고 어디로 가야하는가’하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는 작품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총 8부작.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답도, 미래도 없는’ 것이 있다. “관객 생각은 하지 않고 ‘예술 뽕’만 차올라 만든 이기적인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독립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단편 7개로 구성된 소설집의 표제작인 ‘0%를 향하여’는 독립영화를 제작하는 청춘들 이야기를 다룬다. 이들은 독립영화를 만들기 위해 ‘영화 과외’를 하고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돈을 번다. 애증의 대상이 돼버린 독립영화를 더는 하지 않겠다며 고향으로 가지만 고향에서 하는 일은 다시 독립영화 만들기. ‘나’와 친구 석우는 차를 타고 달리며 해가 지는 모습을 본다. 이는 얼핏 해가 뜨는 모습처럼 보인다. 지는 해 같지만 뜨는 해 같기도 해서 포기할 수 없는 것. 청춘들의 꿈은 대체로 그렇다. 이 책은 2018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이 포함된 저자의 첫 소설집. 서울 노량진에서 경찰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사운드 클라우드’) 등 인생의 크고 작은 고비를 넘는 청년들이 주인공인 작품이 주로 담겼다.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지만 전개 방식과 문체는 무겁지만은 않다. 이광호 문학평론가는 소설집 해설에서 “서이제의 등장은 문제적”이라며 소설의 특징 중 하나로 ‘여성 작가의 내면적 정체성을 지운 병맛스러운 대화체’를 꼽았다. ‘사운드 클라우드’를 보면 ‘나’와 친구 수철의 대화는 인터넷 게시판의 댓글 대화를 보는 듯하다. ‘수철이는 (중략) 클럽에 가서 기분이나 풀고 올걸 그랬다고 했다. 풀긴 뭘 풀어. 문제나 풀어. 나는 말했고, 그는 내게 이제 그만 화를 푸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는 식의 현실감 넘치는 대화가 대표적인 예. 의식의 흐름대로 마구 튀어버리는 대화를 읽고 있으면 웃음이 새어나온다. 소설은 ‘나도 예전부터 좀 알고 있었음. 쿨한 느낌’처럼 명사형으로 마무리하는 등 하나의 단편 내에서도 어미를 다채롭게 사용한다. 빨리 감기, 정지 등의 기호를 활용해 노래를 재생시키듯 서사를 전개한 부분도 눈에 띈다. 실험적 문체와 순서를 뒤섞어놓은 비선형적 전개 방식 등 젊은 작가의 파격적인 시도를 보는 재미가 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전직 경찰 서준(변요한)은 그날따라 운수가 좋다. 건설현장 반장으로 고생한 끝에 현장감독으로 정식 계약하자는 제안을 받는다. 현장소장의 칭찬도 이어진다. 내 집 마련의 꿈도 눈앞까지 왔다. 운수 좋은 날은 곧 최악의 날이 된다. 서준의 아내가 변호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서다. 그는 자신이 서준의 친구라며 건설현장에서 인부가 사망해 서준이 조사를 받고 있다고 다급하게 전한다. 뒤이어 형사의 전화까지 릴레이처럼 이어지자 당황한 아내는 아파트 중도금 7000만 원을 보낸다. 남편은 그제야 통화가 된다. 이미 돈은 인출된 뒤. 같은 날 현장소장 역시 보이스피싱에 속아 인부들 개인정보를 넘긴다. 인부들이 딸 수술비 등으로 모아둔 돈 30억 원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서준은 경찰 대신 직접 나선다. 보이스피싱 본거지인 중국 선양 콜센터에 위장 취업하며 ‘원점 타격’을 시도한다. ‘보이스’는 보이스피싱 범죄를 주제로 다룬 영화. 보이스피싱이 형사물의 일부 소재로 등장한 적은 있었지만 보이스피싱만 다룬 영화는 처음이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보이스피싱 피해액이 2018년 4040억 원에서 지난해 7000억 원으로 늘었다는 수치를 제시하며 그 심각성을 알린다. 영화에 등장하는 보이스피싱 수법은 과장된 부분이 있지만 모두 실제 사례에 기초한 것. 제작진은 2016년 시나리오 기획 단계부터 금융감독원, 경찰청 관계자 등을 두루 만나 보이스피싱 실체에 파고들었다. ‘변작기’를 이용해 발신번호를 바꾸는 장면, 자신의 통장이 대포통장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수사기관 전화를 받은 피해자가 은행에 확인 전화를 하면 전화에 이미 깔린 악성앱이 작동해 보이스피싱 콜센터의 ‘가짜 은행’으로 연결되는 장면 등 수법과 전체 과정은 그래서 매우 디테일하다. 영화는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걸려들 수밖에 없게끔 지능적으로 설계된 수법들을 소개하며 경각심을 일깨운다. 과거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였던 ‘황해’에서 어설픈 서울말로 뻔한 대본을 읊으며 피해자를 낚던 시대는 오래전 막을 내렸다는 것. 보이스를 제작한 민진수 수필름 대표는 7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중에도 수법이 계속 진화해 2019년 시나리오를 계속 수정했다”고 전했다. 보이스피싱의 본거지 곳곳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100명 안팎이 동시에 전화를 돌리며 하루 종일 덫을 놓는 콜센터 전경은 장관이다. 최신 트렌드에 맞춰 대본을 쓰는 기획실도 있다. 건강보험료 인상이 이슈라면 이를 다룬 대본을 만들어 돈을 노리는 식. 기획실 에이스 곽프로(김무열)와 서준의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 신도 관람 포인트. 배우들이 다치지 않았을까 걱정될 정도로 현실감 넘친다. 다만 도입부를 10분만 보면 누구나 전개 방향과 결론을 예상할 수 있는 점은 아쉽다. 전직 경찰이나 정보기관 요원이 공권력을 대신해 적진에 뛰어들어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의 범죄액션물 클리셰를 따라간 부분도 많다. 서준이 아내에게 윙크를 하며 웃는 부분에서 이 클리셰는 절정에 달한다. 변요한의 연기는 과도하게 비장하다. 민 대표는 “새로운 결론에 대한 욕구도 있었지만 피해자들에게 보이스피싱 사건도 해결된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 예상 가능한 결론을 택했다”며 “이 영화로 관객들이 보이스피싱 수법을 제대로 인지해 피해가 줄길 바란다”고 했다. 15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내년에 개봉할 영화 ‘더 배트맨’에서 주인공 브루스 웨인과 악당들은 양복을 여러 벌 바꿔 입는다. 지난주 개막한 제78회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영화 ‘스펜서’에서도 찰스 왕세자 역을 맡은 배우 잭 파딩은 영국 정통 방식으로 제작된 정장들을 입는다. 이들 영화에 나오는 양복을 만든 사람이라면 으레 나이가 지긋한 백인 재단사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이를 만든 이는 젊은 한국인이다. 영국 런던에서 테일러로 일하다 최근 귀국한 김동현 씨(32)가 주인공. 그는 ‘더 배트맨’ 의상 다섯 벌과 ‘스펜서’ 의상 세 벌을 만들었다. 김 씨는 5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한국인이 만든 영국 정통 양복을 세계인들이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설렌다. 한국인로서 자부심이 생긴다”고 말했다. 김 씨는 런던 새빌로 거리에서 올 3월까지 만 3년간 테일러로 일했다. 이곳은 영화 ‘킹스맨’에 나오는 양복점이 자리 잡은 곳으로 영국 왕족 등 상류층이 주로 찾는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알렉산더 매퀸도 이곳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경력을 쌓았다. 김 씨는 ‘맞춤 양복의 성지’로 불리는 새빌로 거리에서 유일한 한국인 테일러였다. 그는 새빌로 맞춤 협회(Savile Row bespoke association) 소속 양복점에서 일하며 기술을 배웠다. 손바느질 기준을 깐깐히 적용하는 영국 정통 양복 제작법을 고수하는 양복점만이 이 협회에 가입할 수 있다. 김 씨는 ‘스펜서’에서 찰스 왕세자가 입는 슈트 2벌과 코트 1벌을 만들었다. 앞서 지난해 11월 영화 제작사는 왕족의 품격과 영국 양복의 정통성을 한눈에 보여주는 정장을 2개월 안에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김 씨는 “왕가의 복장을 제대로 재현하기 위해 왕족 사진집 등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왕족들의 옷을 자주 제작한 원로들을 취재했다”고 설명했다. 김 씨는 2014년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국내 대학 의류디자인학과에 다니던 그는 여성복 중심으로 진행되는 수업과 유행에 민감한 한국 패션계에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그는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빛을 발하는 옷은 없을까 고민하다 그것이 바로 영국 양복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양복의 고향에서 제대로 된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2014년 런던예술대에서 맞춤 양복(bespoke tailoring)을 전공하며 양복 기술과 문화를 폭넓게 공부했다. 2017년 새빌로 맞춤 협회가 2년에 한 번 양복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는 ‘황금 가위 경연’에서 최종 25인에 올랐다. 졸업 후 3년간 새빌로 거리 양복점에서 일하다 올 3월 귀국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재택근무가 늘어 영국 양복 시장이 침체된 탓도 있지만 한국에서 펼치고 싶은 꿈이 있어서였다. 그는 최근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었다. 조만간 영화 의상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옷을 편집숍 등을 통해 판매할 계획이다. 올해 말에는 자신의 가게를 연다. 김 씨는 “좋은 옷이란 입을수록 빛나고 몸에 잘 들어맞는 옷이라고 생각한다”며 “오래돼도 촌스럽지 않고 더 우아하게 느껴지는 영국 정통 양복 기술을 적용한 옷을 국내에 선보이고 싶다”고 했다. “한국에서 실력을 더 쌓은 뒤 영국으로 돌아가 김동현이라는 한국인이 만든 양복을 영국인들에게 입히는 게 최종 꿈입니다. 누구나 제 옷 한 벌을 갖는 게 꿈이 될 때까지 정진하려고 합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과학 연구라고 해서 머나먼 정글이나 깊은 해저를 탐사해야만 놀라운 발견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공학 박사이자 공상과학(SF) 소설가인 저자는 말한다. 평범하게 지나던 바로 내 곁, 내 집에서도 신기한 현상은 일어나고 있다고. 저자가 과학 연구 중에서도 생물학 연구를 위해 돌아볼 것을 권유하는 곳은 아파트와 그 주변이다. 그곳엔 소나무와 철쭉이 있다. 주차장 차 밑에는 길고양이가 살고 단지 내엔 황조롱이가 오간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와 보면 곰팡이와 집먼지 진드기가 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아파트엔 탐구해 볼 만한 생물들이 널려 있다. 아파트 단지에서 흔한 철쭉에는 ‘로도덴드론 슐리펜바키 막심’이라는 러시아어 학명이 붙어 있다. 러시아 해군장교 바론 슐리펜바흐는 1854년 조선에서 발견한 철쭉을 러시아 식물학자 카를 막시모비치에게 보낸다. ‘붉은 나무’를 뜻하는 ‘로도덴드론’에 두 사람의 이름을 합쳐 탄생한 이름이 철쭉의 학명이 됐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길고양이에 주목하며 ‘고양이 지식 보따리’도 풀어낸다. 조선의 숙종은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 금손을 아꼈고, 효종의 딸 숙명공주도 고양이를 좋아했다. 조상들이 고양이를 꺼림칙한 존재로 여긴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 한반도에 고양이가 전해진 건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한반도에 불교를 전하려 배를 타고 오던 사람들이 배에 실은 불경을 쥐가 파먹지 못하도록 고양이를 태우고 온 것으로 전해진다. 저자는 이렇듯 내 주변의 흔한 것들에서 생물학 여행을 시작할 것을 권한다.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던 생물학과의 거리를 좁혀 보자는 취지다. 저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도 아파트도 연결시킨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엘리베이터 등 공용 공간에서 마스크를 철저히 쓰게 되는 등 아파트 풍경이 바뀌었다는 것. 코로나19처럼 시의성 높은 주제나 아메바 등 저자의 기존 관심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이들 주제와 아파트의 연결 고리를 무리하게 만들어낸 부분은 이 책의 아쉬운 점이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군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있었다. 더 좋은 군대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됐다.” 지난달 27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D.P.’(디피)를 쓴 김보통 작가가 1일 동아일보와의 서면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최근 온·오프라인상에서는 온통 ‘D.P.’ 얘기다. 올해 공개된 국내 영상물을 통틀어 가장 큰 화제를 모으고 있는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드라마 속 군 부대 내 가혹행위 장면을 두고는 예비역 누리꾼들을 중심으로 “군대에 폐쇄회로(CC)TV를 달고 촬영한 것 같다”는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이 드라마 작가이자 원작 웹툰 ‘D.P 개의 날’ 작가이기도 한 김 작가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드라마로는 처음으로 병영 내 가혹행위를 날것 그대로 다룬 데다 예비역들의 트라우마를 건드릴 정도로 실감나게 살려내서다. 김 작가는 “많은 남성이 군 생활을 하며 직접 보거나 경험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리얼함을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D.P.’는 육군 헌병대(현 군사경찰대)의 군무이탈자 체포전담조를 뜻하는 DP(Deserter Pursuit) 조원들의 활약을 다루는 과정에서 가혹행위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그려낸다. 코를 곤다는 이유로 방독면을 씌우는 건 약한 수준. 선임병은 후임병 뒤통수가 벽에 박힌 대못에 찔려 피가 날 때까지 폭행한다. 방독면에 물을 붓고, 침을 먹이는가 하면 각종 방법으로 성적 수치심을 준다. 드라마 속 군대는 분노를 참다 미치거나 탈영하지 않기 위해 온힘을 짜내 버텨내야 하는 지옥처럼 묘사된다. 민감한 주제를 다룬 탓에 군을 소재로 한 영상물로는 이례적으로 군 협조 없이 촬영이 진행됐다. 한 제작진은 “군 당국에 협조를 요청하지 않았다”고 했다. 드라마 속 생활관(내무반)은 실내 세트다. 연병장 등 주요 군 시설물이 등장하는 장면의 촬영은 경기 부천시의 폐쇄된 군부대에서 진행했다. 드라마의 시간적 배경은 현실 세계에서 군 사건사고 역사상 가장 심각한 해로 꼽히는 2014년. 윤 일병 구타 사망 사건과 임 병장 총기 난사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해다. 김 작가는 “2014년은 군도 사회도 변화해야 하는 큰 변곡점을 맞게 된 해”라고 시간 설정 배경을 설명하며 “(드라마 대본 집필에) 두 사건을 일부 참고했다”고 했다. 드라마 속 가혹행위를 두고는 반론도 나온다. A 장교는 “드라마가 그동안 전군에서 일어났던 극단적 사건을 골라 마치 한 부대에서 모조리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처럼 묘사했다”며 “가혹행위 수준만 놓고 보면 (7년 전이 아닌) 20년 전 같다”고 했다. 군 수사기관의 또 다른 장교는 “지금은 병사들이 휴대전화를 쓸 수 있는 만큼 가혹행위 발생 시 곧바로 국방헬프콜에 신고하고 있어 드라마 수준의 가혹행위는 엄두도 못 낸다”고 했다. 실제로 드라마 대본에는 과거 DP로 활동한 김 작가의 경험이 깔려 있는데, 그는 2002년부터 군 복무를 했다. 군 관계자들은 휴대전화 사용이 가능해진 점, 이병부터 병장까지 함께 있던 생활관이 동기 생활관으로 바뀐 점, 소규모 독립부대를 제외하고 생활관이 침상형에서 사생활이 일부나마 보장되는 침대형으로 바뀐 점 등이 복무 스트레스를 줄이면서 과거 수준의 가혹행위는 줄어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드라마 배경인 2014년은 물론이고 최근까지도 가혹행위 사건은 잊을 만하면 터지고 있다. 2014년엔 윤 일병 사건을 계기로 후임병에게 파리를 먹이고 대검으로 찌른 사건, 냉장고에 가둔 사건 등이 줄줄이 드러났다. 2019년엔 육군 일병이 동기에게 대소변을 먹이는 등 가혹행위를 한 혐의로 구속됐다. 올해 7월엔 군인권센터가 한 공군부대 선임병들이 후임병을 용접가스보관창고에 가두고 불붙인 박스 조각을 던지는 등 가혹행위를 일삼았다고 폭로했다. 드라마 특성상 극적 효과를 위해 각종 가혹행위를 한 소대에 몰아넣은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엽기적 가혹행위가 현재 진행형임을 부인하긴 어렵다. 김 작가는 “(2014년 웹툰을 연재할 때부터) ‘언젯적 군대 얘기를 하느냐’는 사람들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군내 부조리가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폭력은 모양만 바뀌었을 뿐 어디엔가 계속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최근 자신의 인스타그램엔 이같이 썼다. “D.P.는 ‘이제는 좋아졌다’는 망각의 유령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 나가는 분들에게 힘을 보탤 수 있기를.”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군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있었다. 더 좋은 군대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됐다.” 지난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D.P.(디피)’를 쓴 김보통 작가가 1일 동아일보와의 서면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최근 온오프라인상에서는 온통 디피 얘기다. 올해 공개된 영화나 드라마 등 국내 영상물을 통틀어 가장 큰 화제를 모으고 있는 작품이라고 확언할 수 있을 정도. 특히 드라마 속 군 부대 내 가혹행위 장면을 두고는 예비역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드라마가 아니라 군대에CCTV 달고 촬영한 것 같다”는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이 드라마 작가이자 원작 웹툰 ‘D.P 개의 날’ 작가이기도 한 김보통 작가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드라마로는 처음으로 병영 내 가혹행위를 날것 그대로 다룬데다 예비역들의 트라우마를 건드릴 정도로 실감나게 살려내서다. 김 작가는 “많은 남성이 군 생활을 하며 직접 경험하거나 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리얼함을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D.P.’는 육군 헌병대(현 군사경찰대)의 군무이탈자 체포전담조를 뜻하는 DP(Deserter Pursuit) 조원들의 활약을 다루는 과정에서 병영 내 가혹행위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묘사한다. 코를 곤다는 이유로 방독면을 씌우는 건 약한 수준. 선임병은 후임병 뒤통수가 벽에 박힌 대못에 찔려 피가 날 때까지 폭행한다. 방독면에 물을 붓고, 라이터를 켜 음모를 태우는가 하면 걸핏하면 성적 수치심을 준다. 드라마 속 소대는 온갖 엽기적인 가혹행위가 매일 일어나는 ‘가혹행위 종합세트’다. 분노를 참다 미치거나 탈영하지 않기 위해 온힘을 짜내 버텨내야 하는 지옥이다. 민감한 주제를 다룬 탓에 드라마는 제작 당시 군 당국 협조를 받지 못했다. 한 제작진은 “군 당국에 협조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했다. 드라마 속 가혹행위의 주무대 중 하나인 생활관(내무반)은 실내 세트다. 연병장 등 주요 군 시설물이 등장하는 촬영은 경기 부천시의 폐쇄된 군부대에서 진행했다. ‘태양의 후예’나 ‘진짜 사나이’ 등 군 관련 기존 영상물이 군의 협조를 받은 것과는 대비된다. 드라마의 시간적 배경은 군 사건사고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해로 꼽히는 2014년. 윤일병 구타 사망 사건과 임 병장 총기 난사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해다. 임 병장이 부대원들의 따돌림과 가혹행위를 참다못해 총기를 난사했다고 주장하면서 “가혹행위를 참으면 윤 일병, 못 참으면 임 병장”이라는 얘기가 회자됐다. 김 작가는 “2014년은 군도 사회도 변화해야 하는 큰 변곡점을 맞게 된 해”라고 시간 설정 배경을 설명하며 “(드라마 집필에) 두 사건을 일부 참고했다”고 했다. 드라마가 묘사하는 가혹행위를 두고는 반론도 나온다. 장교 A는 “드라마가 극적 효과를 주기 위해 전군에서 일어나는 극단적 사건을 골라 마치 한 부대에서 모조리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처럼 묘사한 것”이라며 “가혹행위 수준만 놓고 보면 20년 전 부대 같다”고 했다. 군 수사기관의 또 다른 장교는 “현재는 병사들이 휴대전화를 쓸 수 있어 가혹행위 발생 시 곧바로 국방헬프콜 등에 신고하고 있어 드라마 수준의 가혹행위는 엄두도 못 낸다”고 했다. 실제로 드라마 대본에는 과거 DP로 활동한 김 작가의 경험이 깔려있는데 그는 2002년부터 군 복무를 했다. 군 관계자들은 일부 독립부대를 제외하고 생활관이 침상형에서 사생활이 일부나마 보장되는 침대형으로 바뀐 점, 휴대전화 사용이 가능해진 점, 이병부터 병장까지 함께 모여 있던 생활관이 동기 생활관으로 바뀐 점 등이 복무 스트레스를 줄여 가혹행위의 잦은 발생을 막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배경인 2014년을 전후는 물론 최근에도 가혹행위 사건은 잊을 만 하면 보도되고 있다. 2012년엔 심심하다는 이유로 선임병이 후임병의 발바닥을 20초간 지진 사건이 있었다. 2014년엔 윤 일병 사건을 계기로 후임병에게 파리를 먹이고 대검으로 찌른 사건, 냉장고에 가둔 사건 등 가혹행위가 릴레이식으로 드러났다. 2019년엔 육군 일병이 동기에게 대소변을 먹이는 등 가혹행위를 한 혐의로 구속됐다. 올해 7월엔 군인권센터가 한 공군부대에서 선임병들이 후임병을 부대 용접가스보관창고에 가두고 불을 붙인 박스 조각을 집어던지는 등 가혹행위를 일삼았다고 폭로했다. 드라마의 특성상 극적 효과를 위해 각종 가혹행위를 한 소대 안에 집중시킨 면이 없지 않지만 엽기적 가혹행위는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인 것. 김 작가는 인터뷰에서 “(2014년 웹툰을 연재할 때부터) ‘언젯적 군대 얘기를 하느냐’는 사람들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군내 부조리가 아직까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폭력은 모양만 바뀌었을 뿐 어디엔가 계속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최근 자신의 인스타그램엔 이같이 썼다. “D.P.는 ‘이제는 좋아졌다’는 망각의 유령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 나가는 분들에게 힘을 보탤 수 있기를.”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고3 소녀 3명이 있다. 강이(방민아)는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생각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2명의 의견이 부딪치면 “나는 상관없다”고 하는 게 그의 최선이다. 소영(한성민)은 자기애 충만한 인물로 이들 중 서열 1위다. 모든 상황을 주도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잔인하게 굴복시킨다. 아람(심달기)은 목장갑, 길고양이 등 버려진 것들을 주워 오며 “다 아픈 애들”이라고 말한다. 단순하게 사는 엉뚱한 소녀 같지만 사실은 아빠의 무관심과 폭력에 노출된 ‘버려진 소녀’다. 서로 다른 소녀 3명은 어느 날 가출을 감행한다. 이들은 어떤 결말을 맞을까. 영화 ‘최선의 삶’이 1일 개봉했다. ‘체급 자체가 다른 소설’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2015년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을 수상한 임솔아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원작은 2019년 가수 아이유가 한 방송에서 ‘인생 책’이라며 소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는 시작부터 눈길을 끈다. 소설을 읽으며 떠올린 머릿속 장면들을 그대로 빼내 영상화한 듯하다. 소설에서 튀어나온 듯한 주인공들은 물론이고 학교, 동네 등 주요 장소까지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원작 속 “우리는 자꾸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 했다” 등의 주요 문장은 토씨까지 그대로 살려 강이의 내레이션으로 옮겼다. 여성 관객에게는 학창 시절로 돌아가는 경험도 선물한다. 그 시절 어설프고 불안한 선택이 낳은 결과를 후회하며 살지만 돌이켜보면 당시로선 그게 최선이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이우정 감독은 1일 전화 인터뷰에서 “10대를 지나온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묻어두었던 그 시절의 감정들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고 했다. 강이로 분한 걸그룹 ‘걸스데이’ 멤버 방민아의 연기력도 관람 포인트다. 강이가 엄마 앞에서 무서움과 분노, 후회 등 온갖 감정을 그러모아 오열하는 장면을 보고 나면 아이돌 출신에게 갖기 쉬운 선입견이 사라진다. 방민아는 강이 역으로 7월 뉴욕 아시안영화제에서 국제라이징스타상을 받기도 했다. 아쉬운 부분도 있다. 원작 속 주요 서사 일부가 생략돼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함축이 거듭된 시를 읽는 것처럼 스토리를 이해하기 다소 어려울 수도 있다. 가출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온 주인공들의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소영은 강이를 따돌리고 괴롭힘을 주도한다. 원작은 소영과의 몸싸움 끝에 강이가 ‘최선의 선택’이라며 소영에게 무릎을 꿇는 장면, 이런 강이에게 소영이 폭력을 가하는 장면이 상당 부분 나온다. 결말 부분 소영에 대한 ‘강이의 선택’을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런데 영화는 강이가 상처를 입은 채 공터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장면으로 훌쩍 건너뛴다. 감독은 “해당 장면은 촬영은 했지만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폭력 장면을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편집 과정에서 덜어냈다”며 “사건 자체보다는 10대 주인공 각자가 맞닥뜨리는 감정과 세밀한 변화를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KTH상을, 서울독립영화제에서는 ‘새로운선택상’ 등을 수상했다. 15세 관람가.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옥상을 밝히던 백열등이 꺼지자 200인치 대형 스크린이 빛을 쏟아냈다. 스크린 뒤편에선 경희궁 주위의 키 큰 나무들이 밤바람에 살랑였다. 8월 28일 저녁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의 주택가 언덕에 위치한 에무시네마 옥상. 30여 명이 빈백에 기대거나 의자에 앉아 헤드폰을 끼고 영화 ‘시네마 천국’에 집중하고 있었다. 기승을 부리던 열대야가 물러간 덕에 관객들은 초가을 밤공기를 느끼며 영화에 빠져들었다. 서계원 씨(34·회사원)는 “옥상에서 영화를 보면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든다”며 “실내 영화관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야외에서 영화를 보려면 열대야와의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러나 8월 말부터 밤 기온이 20도 안팎(서울 기준)에 머물면서 야외, 특히 옥상에서 영화 보기에 가장 좋은 시기로 접어들었다. 복합문화공간 ‘에무’에 있는 에무시네마는 8월 19일 ‘라라랜드’ 상영을 시작으로 매주 목·금·토요일 저녁 옥상에서 ‘별빛영화제 시즌2’를 진행하고 있다. 월요일 오후 8시에 다음 주 티켓 예매가 시작되는데, 보통 5분도 되지 않아 32개 좌석 표가 매진된다. 날씨가 선선해진 데다 팬데믹으로 꽉 막힌 실내에서의 영화 관람을 꺼리는 이들이 늘면서 옥상 관람의 인기가 높아진 것. 양인모 에무시네마 프로그래머는 “캠핑 의자와 테이블 등을 제공해 관객들이 캠핑장에 온 기분을 느끼며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영화 관람료는 1만2000원, 10월 말까지 옥상 상영을 진행한다. 서울 중구 퇴계로에 위치한 대한극장도 9월 중순부터 옥상 영화 상영을 시작한다. 대한극장이 젊은 관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2019년 봄부터 시작한 옥상 상영관 ‘시네가든’에서의 영화 상영은 봄과 가을에만 진행된다. 올가을엔 영화 ‘호우시절’ ‘윤희에게’ ‘우리의 20세기’ 등 재개봉작들을 다음 달 말까지 상영할 예정이다. 배도현 대한극장 기획실 팀장은 “유명 멀티플렉스 영화관들과의 차별화 전략을 고민하다 옥상 상영을 기획하게 됐다”며 “주로 젊은 연인들이 찾고 있어 로맨스물 위주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고 했다. 관람료는 음료와 영화 관련 굿즈, 영화 티켓을 묶어 1만4000원이다. 서울 동작구 동작대로의 예술영화관 아트나인도 8월 26일 영화 ‘이도공간’을 시작으로 ‘반옥상’ 격인 12층 ‘시네마 테라스’에서 상영을 시작했다. 무더위와 사회적 거리 두기 탓에 테라스 상영을 잠정 중단했다가 재개한 것. 아트나인은 카페를 겸한 레스토랑 중 일부 공간을 테라스 영화 상영에 활용하고 있다. 과거 50석을 운영했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면서 20석으로 줄였다. 소규모 인원이 모여 스크린 뒤 큰 창에 그림처럼 펼쳐진 하늘을 보며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9월엔 ‘해피 투게더 리마스터링’(9일),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16일) 등 ‘장국영 스페셜’을 진행할 예정이다. 음료를 묶어 1만6000원에 영화 티켓을 판매한다. 박혜진 아트나인 극장사업부 팀장은 “코로나19 탓에 일정을 장담할 순 없지만 난로를 틀고 운영하는 방식으로 한겨울 직전까지는 테라스 영화 상영을 이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팬데믹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집 안 곳곳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막상 정리하자니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수납용품을 사는 데 드는 돈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시간과 비용을 덜 들이면서도 집을 깨끗하게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 최근 ‘오전의 살림 탐구’(라이프앤페이지)를 펴낸 17년 차 살림 전문가 정이숙 작가(43·사진)는 20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약간의 아이디어만 더하면 놀이처럼 즐기면서 집을 정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180가지 살림 아이디어가 담긴 그의 책은 교보문고의 취미·스포츠 분야 책 판매 순위에서 6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살림 책이 이 분야 1위를 차지한 건 이례적이다. 코로나 시대를 맞아 집 정리에 대한 독자들의 높은 관심이 반영된 것. ‘살림 천재’로 통하는 그에게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낼 수 있는 집 정리 노하우를 들어봤다. 개는 게 귀찮아 빨래를 미루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는 “개지 않는 빨래 종류를 늘리라”는 근원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수건은 펴서, 양말은 같은 종류로 사서 모양만 맞춰 켜켜이 쌓아두는 식. 속옷도 편 채로 쌓으면 끝이다. 그날 쓸 개인수건은 개인별 수건걸이를 욕실 문밖에 달아 걸어두면 된다. “수건을 펴서 보관할 만한 공간이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우리 집은 안방 서랍 한 칸을 비워 수건 보관용으로 쓴다. 쓸데없는 물건을 비우면 어느 집이든 보관 장소는 충분하다”고 답했다. 책상 정리를 위한 수납용품으로는 플라스틱 우유통이 제격이다. 수납할 물건 높이에 맞게 우유통을 자른 뒤 책상이나 싱크대 서랍에 넣고 쓰면 된다. 그는 “잘 자른 우유통은 유명 브랜드 잡화점에서 파는 반투명 수납용품과 다를 게 없다”고 했다. 편의점에서 파는 검은색 도시락 용기는 볼펜이나 메모지 등을 크기별로 나눠 보관하기에 좋다. 텀블러의 경우 싱크대 상부 장에 여러 개를 세워 놓으면 꺼내다 쓰러뜨리기 일쑤. 이럴 땐 1000mL짜리 우유팩이 답이다. 윗부분을 제거한 우유팩 여러 개를 양면 테이프로 결합한 뒤 텀블러를 눕혀 넣는 방법. 그는 “우유팩 수납함은 상부 장에 밀어 넣어 쓰는 만큼 기존 상표가 눈에 잘 띄지 않아 좋다”고 말했다. 갑 티슈는 아래로 숨기자. 우선 티슈만 꺼내 과일 플라스틱 용기에 넣은 뒤 벨크로 테이프로 책상이나 식탁 아래에 거꾸로 붙인다. 이어 티슈가 나오는 갑 티슈 입구 부분은 오린 뒤 플라스틱 용기에 붙여 사용하면 된다. 그는 “티슈를 뽑을 때 먼지도 덜 나고 책상과 식탁도 넓게 쓸 수 있다. 티슈 커버도 필요 없다”고 설명했다. 바닥 곳곳에 놓인 물건들은 청소를 포기하게 만드는 원흉이다. 정 작가의 해법은 ‘물건 공중부양’으로 청소하기 쉬운 환경을 만드는 것. 멀티탭은 벨크로 테이프로 책상 주변의 켜고 끄기 편한 위치에 부착해 바닥으로부터 떼어 놓는다. 전선은 정리 클립을 이용해 책상이나 벽에 고정시킨다. 욕실도 마찬가지. 다용도 걸이와 집게, 끈을 활용해 치약, 샴푸 등을 최대한 매달아 놓는다. 욕실 청소는 극세사 수건 2장과 5분의 시간만 있으면 된다. 젖은 수건으로 거울, 세면대 등을 닦은 후 마른수건으로 한 번 더 닦으면 끝이다. 이렇게 하면 물청소는 일주일에 한 번만 해도 충분하다. 그는 “집은 화가 쌓이지 않는 공간이어야 한다”며 “처음부터 깨끗하게 만들기 쉬운 집을 목표를 하면 정리하기가 편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18일 밤 서울 용산구 한강로 삼각지역 일대. 인도 쪽 외벽 전체가 통유리로 된 1층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내부에선 사람들이 와인을 즐기고 있었다. 와인 가게로 짐작은 되지만 간판은 어디에도 없었다. 외벽인 통유리에 붙어있는 건 ‘@hariseoul’이라는 글귀가 전부. 이마저도 하얀색인 데다 출입문 손잡이 옆에 조그맣게 붙어있어 눈에 띄지 않았다. 이곳의 정체는 올해 1월 문을 연 내추럴 와인바 ‘하리’. 하리를 운영하는 정종혁 씨(31)는 “캄캄한 거리를 밝히는 가게 내부 불빛 자체가 간판이라고 생각해 외벽을 통유리로 만드는 대신 간판을 달지 않았다”며 “간판이 없으니 오히려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인터넷으로 검색한 뒤 더 많이 찾아온다”고 했다.○ 일자리 잃은 영업사원 ‘간판’ 지금까지 간판은 가게의 얼굴이자 ‘무언의 영업사원’으로 불렸다. 지나가는 이들에게 가게의 정체를 알리고 이들을 가게로 이끄는 판촉물이었던 것. 간판 활용은 장사의 기본이었다. 몇 년 사이 ‘간판 없는 가게’가 늘고 있다. ‘K간판’으로 불리며 도시 미관을 해치는 원흉으로 꼽히던 평면 간판이 줄고 가게명만 표시하는 입체 글자 간판이 늘더니 이마저도 달지 않게 된 것. 이 같은 추세는 특히 MZ세대(밀레니얼+Z세대) 가게 주인들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삼각지역 일대 또 다른 내추럴 와인바 ‘음(Mmm)’의 경우 간판이 없는 것에 더해 꽃가게 위 2층에 정체를 숨기고 있다. 1층 출입문에도 안내문이 전혀 없다. ‘음’을 운영하는 권은지 씨(34·여)는 “우리 가게를 알고 좋아하는 사람만 찾아와 와인을 즐겼으면 하는 생각에 간판을 달지 않았다”며 “손님들에게 ‘나만 아는 공간’의 매력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MZ세대 “간판 없어도 괜찮아” 이들이 간판을 달지 않는 것도 모자라 은둔에 가까운 기이한 모습을 하고도 장사를 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전문가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MZ세대의 특성을 간판 없는 가게의 전성시대를 여는 원동력으로 보고 있다. ‘하리’의 경우 예약의 95% 이상을 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DM)로 받고 있다. 손님도 대부분 SNS를 잘 활용하는 MZ세대다. ‘음’ 주인 권 씨는 “개업 초기 출입문에 인스타그램 주소를 잠깐 붙여 놨다 뗐는데 이때 홍보가 되면서 소문이 났다”며 “간판이 없어도 장사하는 데 문제는 없다”고 했다. 숨은 맛집을 SNS 검색을 통해 어렵게 발견한 뒤 ‘나만의 아지트’로 삼고 싶어 하는 MZ세대의 특성도 간판 없는 가게의 확산을 부추긴다. 이승윤 건국대 경영학부 교수(디지털문화심리학자)는 “MZ세대 고객들과 SNS를 영업에 활용하는 MZ세대 주인들이 결합하면서 간판을 달지 않는 추세는 더 확산될 것”이라고 했다. ○맛 자신감-워라밸 중시도 한몫 간판 없이도 맛과 분위기로 승부를 낼 수 있다는 MZ세대의 자신감도 간판을 떼게 하는 원인이다. 서울 종로구 익선동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간판 없는 가게’는 간판이 없는 데다 가게 이름까지 ‘간판 없는 가게’다. 호텔 셰프 출신 등 1988년생 친구 3명이 뜻을 모아 2017년 문을 연 이 레스토랑은 익선동 대표 맛집으로 소문 나 늘 손님들이 줄을 서있다. 이 가게 주인 정종욱 씨는 “음식이 맛있으면 그 가게가 산골짜기에 있어도 손님이 찾아온다고 생각했다”며 “음식과 맛이라는 본질에 집중하고 싶어 간판을 달지 않았다”고 했다. ‘대박’이 나 큰돈을 벌며 바쁘게 사는 것보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MZ세대 특성도 간판 없는 가게를 확산시키는 배경이다. 대구 중구에서 ‘코러스커피’를 운영하는 최진영 씨(29)가 그렇다. 그의 가게는 1층에 구제품 가게와 보청기 가게가 있는 건물의 2층에 간판 없이 숨겨져 있어 지나가는 사람이 우연히 들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아는 사람만 아는’ 가게인 것. 최 씨는 “내 가게와 취향이 맞다고 생각해 애써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집중하고 싶었다”며 “대박은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음’ 주인 권 씨는 대기업에서 기획 업무를 하다 퇴사한 뒤 내추럴 와인바를 열었다. 그는 “가게가 너무 잘되는 건 싫다”며 “적당히 돈 벌고 적당히 일하며 내가 좋아하는 내추럴 와인을 즐기며 살고 싶다”고 했다. 이은용 경희사이버대 호텔·레스토랑경영학과 교수는 “MZ세대 주인들도 간판이 없으면 개업 초창기 고객 확보가 어렵다는 걸 잘 알 것”이라며 “그럼에도 간판을 걸지 않는 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을 하며 자아실현을 하면서 워라밸을 지키겠다는 MZ세대의 명확한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18일 밤 서울 용산구 한강로 삼각지역 일대. 인도 쪽 외벽 전체가 통유리로 된 1층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내부에선 사람들이 와인을 즐기고 있었다. 와인 가게로 짐작은 되지만 간판은 어디에도 없었다. 외벽인 통유리에 붙어있는 건 ‘@hariseoul’이라는 글귀가 전부. 이마저도 하얀색인데다 출입문 손잡이 옆에 조그맣게 붙어있어 눈에 띄지 않았다. 이곳의 정체는 올해 1월 문을 연 내추럴와인바 ‘하리’. 하리를 운영하는 정종혁 씨(31)는 “캄캄한 거리를 밝히는 가게 내부 불빛 자체가 간판이라고 생각해 외벽을 통유리로 만드는 대신 간판을 달지 않았다”며 “간판이 없으니 오히려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인터넷으로 검색한 뒤 더 많이 찾아온다”고 했다.●일자리 잃은 영업사원 ‘간판’ 지금까지 간판은 가게의 얼굴이자 ‘무언의 영업사원’으로 불렸다. 지나가는 이들에게 가게의 정체를 알리고 이들을 가게로 이끄는 판촉물이었던 것. 간판 활용은 장사의 기본이었다. 몇 년 사이 ‘간판 없는 가게’가 늘고 있다. ‘K간판’으로 불리며 도시 미관을 해치는 원흉으로 꼽히던 평면 간판이 줄고 가게명만 표시하는 입체 글자 간판이 늘더니 이마저도 달지 않게 된 것. 이 같은 추세는 특히 MZ세대 가게 주인들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삼각지역 일대 또 다른 내추럴와인바 ‘음(Mmm)’의 경우 간판이 없는 것에 더해 꽃가게 위 2층에 정체를 숨기고 있다. 1층 출입문에도 안내문이 전혀 없다. 가게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려 애쓴 듯한 모습. ‘음’을 운영하는 권은지 씨(34·여)는 “우리 가게를 알고 좋아하는 사람만 찾아와 와인을 즐겼으면 하는 생각에 간판을 달지 않았다”고 “손님들에게 ‘나만 아는 공간’의 매력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MZ세대 “간판 없어도 괜찮아”이들이 간판을 달지 않는 것도 모자라 은둔에 가까운 기이한 모습을 하고도 장사를 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전문가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MZ세대의 특성을 간판 없는 가게의 전성시대를 여는 원동력으로 보고 있다. ‘하리’의 경우 예약의 95% 이상을 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DM)로 받고 있다. 손님도 대부분 SNS를 잘 활용하는 MZ세대다. ‘음’ 주인 권 씨는 “개업 초기 출입문에 인스타그램 주소를 잠깐 붙여 놨다 뗐는데 이때 홍보가 되면서 소문이 났다”며 “간판이 없어도 장사하는데 문제는 없다”고 했다. 숨은 맛집을 SNS 검색을 통해 어렵게 발견한 뒤 ‘나만의 아지트’로 삼고 싶어 하는 MZ세대의 특성도 간판 없는 가게의 확산을 부추긴다. 이승윤 건국대 경영학부 교수(디지털 심리학자)는 “MZ세대 고객들과 SNS를 영업에 활용하는 MZ세대 주인들이 결합하면서 간판을 달지 않는 추세는 더 확산될 것”이라고 했다. ●맛 자신감-워라밸 중시도 한몫간판 없이도 맛과 분위기로 승부를 낼 수 있다는 MZ세대의 자신감도 간판을 떼게 하는 원인이다. 서울 종로구 익선동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간판 없는 가게’는 간판이 없는데다 가게 이름까지 ‘간판 없는 가게’다. 호텔 셰프 출신 등 1988년생 친구 3명이 뜻을 모아 2017년 문을 연 이 레스토랑은 익선동 대표 맛집으로 소문 나 늘 손님들이 줄을 서있다. 이 가게 주인 정종욱 씨는 “음식이 맛있으면 그 가게가 산골짜기에 있어도 손님이 찾아온다고 생각했다”며 “음식과 맛이라는 본질에 집중하고 싶어 간판을 달지 않았다”고 했다. ‘대박’이 나 큰돈을 벌며 바쁘게 사는 것보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MZ세대 특성도 간판 없는 가게를 확산시키는 배경이다. 대구 중구에서 코러스커피를 운영하는 최진영 씨(29)가 그렇다. 그의 가게는 1층에 구제품 가게와 보청기 가게가 있는 건물의 2층에 간판 없이 숨겨져 있어 지나가는 사람이 우연히 들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아는 사람만 아는’ 가게인 것. 최 씨는 “내 가게와 취향이 맞다고 생각해 애써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집중하고 싶었다”며 “대박은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음’ 주인 권 씨는 대기업에서 기획 업무를 하다 퇴사한 뒤 내추럴와인바를 열었다. 그는 “가게가 너무 잘되는 건 싫다”며 “적당히 돈 벌고 적당히 일하며 내가 좋아하는 내추럴와인을 즐기며 살고 싶다”고 했다. 이은용 경희사이버대 호텔·레스토랑경영학과 교수는 “MZ세대 주인들도 간판이 없으면 개업 초창기 고객 확보가 어렵다는 걸 잘 알 것”이라며 “그럼에도 간판을 걸지 않는 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을 하며 자아실현을 하면서도 워라밸을 지키겠다는 MZ세대의 명확한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숨겨둔 보석 같은 해변이 있다. ‘사람 반 물 반’인 휴가철 여느 해변과 달리 인적이 드물다. 천혜의 자연 경관까지 더해지니 지상 낙원이 따로 없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근심이 있는 듯하지만 해변에 도착한 순간만큼은 최고의 휴가를 보낼 생각에 들떠 있다. 그런데 이 낙원은 순식간에 지옥이 된다. 30분에 1년씩 시간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흐른다. 6세 남자아이 트렌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성인이 된다. 탁 트인 해변 어디에도 탈출할 곳이 없다. 18일 개봉한 스릴러 영화 ‘올드(OLD)’ 이야기다. ‘올드’는 독창적인 스토리와 반전의 대가인 M 나이트 시아말란 감독의 신작. 시간이 초고속으로 흐른다는 사실을 안 이들은 공포에 휩싸인다. 아름답기만 했던 기암절벽과 바다는 그들을 고립시키는 ‘자연 감옥’으로 바뀐다. 탈출하려고 발버둥을 친 이는 집채만 한 파도에 휩쓸리는 등 죽음을 맞는다. 2011년 출간된 그래픽 노블 ‘샌드 캐슬’이 원작인 이 영화는 ‘관객의 시간’ 역시 빨리 가게 만들 정도로 몰입감 넘친다. 누가 무슨 이유로 이들을 해변에 가뒀을까. 리조트 직원은 왜 하필 이들에게만 이 해변을 소개했을까. 꼬리를 무는 호기심을 쫓아가다 보면 어느새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작곡가 트레버 거레키스가 만든 영화 음악은 의도된 불협화음으로 관객의 긴장감을 끌어올리면서 몰입감을 배가시킨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은 공포지만 정반대로 ‘시간이 약’이라는 점도 보여준다. 노인이 돼버린 인물들은 젊은 시절의 갈등이 사실 별것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노화로 눈이 침침해지면서 아내를 더 자세히 보게 되고 귀가 어두워지면서 남편의 말에 더 귀 기울이게 된다. 스릴러물이지만 인생과 시간에 대한 고찰도 곳곳에 담겨 있다. 영화 속 해변은 도미니카공화국의 ‘플라야 엘 바예’. 공포의 해변이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국내에 갇힌 관객들에게 멋진 해변에 다녀온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다만 영화 후반부 악역을 맡은 배우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내뱉는 대사가 너무 직접적인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영화엔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삼켜버린 현재 상황과 맞물리는 부분도 있다. 영화는 지난달 북미에서 먼저 개봉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12세 이상 관람가.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어떤 시는 시라기보다 신세 한탄에 가깝다. 시작과 동시에 끝나 버리는 한 문장짜리 시도 있다. 집안일을 시키면서 ‘아르바이트비’를 주지 않는 부모에 대한 투정을 다루기도 한다. 최근 발간된 어린이 시집 ‘내 마음에 들어온 시’(그루) 이야기다. 김현희 교사(38·여·사진)가 엮은 이 시집은 경북 칠곡군 약목초등학교 전교생 166명 중 143명의 시를 모아 발간됐다. “내 이름을 단 시가 외부로 공개되는 것이 껄끄럽다”는 의견을 내비친 고학년 몇 명 등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교생의 시가 담긴 것. 김 교사는 이 학교에 부임한 2018년부터 시 동아리 지도를 해왔다. 그러다 올해 1학기엔 전교생을 대상으로 시 수업을 했다. 그는 13일 전화 인터뷰에서 “올해가 약목초등학교에서의 마지막 해여서 모두에게 시를 가르친 뒤 ‘전교생 시집’을 내고 떠나고 싶었다”고 했다. 이를 위해 그는 1학기 학생들에게 “일주일에 3편 이상 시를 써오라”며 숙제를 내줬다. “시 쓸 내용이 없다” “시가 뭔지 모르겠다”는 아이들에겐 일상의 모든 일이 시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아이들이 다투면 화해시키며 “싸운 내용으로 시 써 온나. 니가 경험하고 느낀 게 다 시다”라고 가르치는 식. 한 학생은 이 같은 가르침에 ‘시 쓰기 싫은 심정’을 소재로 시로 쓰기도 했다. ‘선생님이/시를 10편 이상 쓰라고/협박하셨다.//정말 자퇴하고 싶다.’(6학년 최태영 ‘시’) 한 달 뒤 이 학생의 심정은 좀 달라졌다. ‘(전략) 아무래도 김현희 선생님 때문에/시에 중독된 것 같다’(‘주말’) “학생들에게 ‘좋은 시 나쁜 시는 없지만 진짜 시 가짜 시는 있다’고 늘 강조해요. 감정이 묻어나지 않거나 어설픈 말재주를 부리는 시는 ‘가짜 시’라고요. 시를 써오면 무조건 칭찬해줬어요. 그랬더니 아이들이 시를 쓰기 시작하더라고요.” 시집은 숙제 중 학생 각자가 ‘가장 마음에 든다’며 선택한 시로 구성했다. 자유롭고 재기발랄하게 써내려가 개성 넘치는 일상과 생각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코로나 시국이라는 시의성을 반영한 ‘삼행시’(6학년 박현준)라는 시도 있다. ‘집으로 가는 길/우리 가족은 삼행시 삼매경.//“개미집으로 삼행시 해볼게.”/개 미들이 단체로/미 쳤나보다 이 시국에/집 단생활이라니 (중략) 그 말을 들은 막내는/자기도 하겠다며/‘소름’으로 이행시를 한단다.//소 가 운다./름 매.’ 한 문장짜리 시 ‘구구단 외우기’(2학년 이시우)의 내용은 이렇다. ‘2단에서 7단까지는 외울 수 있는데/8단에서 끊긴다.’ ‘치킨의 수명’(4학년 심형준)을 보면 치킨을 진지하게 관찰한 뒤 ‘치킨의 수명은 하루’라는 결론에 도달한 초등학생의 엉뚱함에 웃음이 터진다. 일상에 대한 고찰이 돋보이는 ‘평소와 다른 느낌’(6학년 조율)이란 작품도 있다. ‘평소보다 일찍 집에 온 날./평소에는 보지 못한 것들.//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빛을 즐기는 식물들./그리고 차분한 분위기.//같은 집이지만/평소와는 다른 느낌.’ 조율 군(12)은 “시를 배우며 사소한 것도 자세히 보고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했다. 엄마와 전망대에 놀러간 경험을 녹여 ‘전망대’라는 시를 쓴 전예닮 양(9)은 “시를 쓰면 좋았던 일이 생각나서 행복하다”고 했다. 경북도교육청과 칠곡교육지원청의 지원을 받아 발간된 시집은 약목초등학교를 통해 구입할 수 있다. 김 교사는 남은 한 학기도 전교생 대상 시 지도를 계속할 계획이다. 그는 “아이들이 행복함, 불만 등 내면의 감정을 시를 통해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세계화를 향해 질주하던 인류가 장애물을 만났다. 정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코로나19가 초고속으로 전 세계를 강타한 원인으로 세계화가 지목됐다. 국가 간 장벽은 전례 없이 높아졌다. 세계화는 벼랑 끝에 내몰렸다. 거시경제·국제금융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저자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에 따르면 세계화는 구석기시대부터 크게 7개 시대에 걸쳐 진행된 역행할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다. 세계화 과정에서 인류는 코로나19 외에도 빈곤, 전쟁, 환경오염 등 각종 장애물을 숱하게 만나 왔다. 그렇다고 세계화를 끝내지 않았다. 저자는 “세계화를 멈출 것이 아니라 잘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속 가능한 세계화’를 위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위해 국제사회가 머리를 맞댄 것도 이 같은 노력의 하나였다. 저자는 전 세계가 연구개발 분야에서 협력하고 결과물을 전 세계로 신속하게 보급해야 한다는 해법을 제시한다. 아시아, 아프리카 등 역내 협력 기구를 만들고 세계적인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유럽 국가들이 적용 중인 보편적 의료 혜택 제공 등 ‘사회적 민주주의 제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도 주장한다. 아쉬운 점은 제시된 해법들이 “지역적·국제적 협력이 중요하다”는 등의 교과서적 제언 수준에 그친다는 것. 인류가 걸어온 ‘세계화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은 이 책의 장점이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사진 속 주인공은 사라지려는 찰나에 포착된 듯 반투명하다. 뒷배경인 벽이나 의자는 이런 인물에 투영돼 훤히 보인다. 김동우 사진가(43·사진)가 독립운동가 후손의 사진을 찍으며 의도한 공통된 특징이다. “독립운동가나 후손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들에 대한 기억은 흐릿해지거나 아예 지워졌죠. 역설적으로 흐릿해져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습니다.” 10일 만난 김 사진가는 2017∼2019년 멕시코, 쿠바, 미국 등 10개국을 돌며 촬영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사진과 최근까지 국내에서 담아낸 후손들 사진을 보여주며 이같이 말했다. 김 사진가의 직전 직업은 여행작가였다. 신문사에서 취재기자로 일하다 2012년 퇴사한 뒤 꿈꾸던 세계일주를 하며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 책도 냈다. 여행에 맞춰져 있던 렌즈 초점이 독립운동으로 옮겨간 건 2017년 봄. 당시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해보자’는 큰 그림만 그린 채 출국했다. “인도 여행 중에 문득 과거 지인에게서 ‘카자흐스탄에 홍범도 장군 묘소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델리에도 뭔가 있는지 찾아봤죠. 있더라고요. 충격이었죠.” 그를 놀라게 한 건 1943년 한국광복군 9인이 영국군 요청으로 ‘인면전구공작대’를 조직해 인도로 건너간 뒤 훈련했던 델리 레드포트였다. 역사적 장소였지만 표지판 하나 없었다. 이를 계기로 여행 주제는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서’로 정해졌다. 그는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자취가 있다는 것도, 이것이 방치돼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고 했다. 2018년 멕시코로 간 그는 대사관과 한인회 등을 수소문한 끝에 김익주 선생(1873∼1955)의 묘소와 손자의 사진을 찍었다. 김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멕시코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로 보낸 한인 중 한 명. 그는 “저도 그때 김 선생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이처럼 기억되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현재를 담아 미래에 남기고 싶었다”고 했다. 이런 사명감으로 그가 지금까지 진행한 모든 작업 비용은 개인 경비로 충당했다. 김 사진가는 그간 국외 독립운동에 대해 취재한 내용과 사진을 묶어 지난달 ‘뭉우리돌의 바다’를 출간했다. 3일부터는 부산 사상구에 있는 부산도서관에서 ‘관심없는 풍경, 뭉우리돌을 찾아서 부산경남편’ 전시회를 열고 있다. 올해 1∼7월 부산 경남 일대를 돌며 촬영한 독립운동가 후손 및 사적 사진 80점이 전시돼 있다. 전시장 마지막 사진으로는 안중근 의사 여동생이자 독립운동가인 안성녀 선생의 묘 사진이 걸렸다. 부산 남구 용호동 천주교공원묘지 내에 있는 묘다. 김 사진가는 “안 선생의 묘가 부산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풍경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분명한 건 과거를 제대로 봐야 현재를 직시할 수 있고 그래야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겁니다. 역사는 미래로 나가는 열쇠라는 것, 그러니 기억에서 지워져서는 안 된다는 걸 강조하고 싶네요.”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