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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들을 갖고 있는데 북한이 왜 핵을 포기하겠는가?” 북-미 정상회담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가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공격적 현실주의’로 유명한 국제정치이론가 존 미어샤이머 미국 시카고대 교수(71)는 20일 우려 섞인 전망을 내놨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이날 서울 강남구 한국고등교육재단에서 열린 특별강연 ‘중국의 부상과 한미관계의 미래’에서 “핵 보유는 북한 관점에서는 합리적 선택”이라며 “김정은은 트럼프를 믿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주장은 무정부적인 국제 체제에서 국가는 다른 나라의 의도를 확실히 알 수 없기에 생존을 위해 힘의 극대화를 추구하기 마련이라는 자신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북-미 회담이 실패한다면 양국 관계가 악화되는 것뿐 아니라 정말 위험한 상황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중국 역시 북한에 핵 포기를 압박하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중국이 우려하는 건 북한의 도발적인 ‘레토릭(수사)’과 행동이 미국의 공격이나 일본의 핵무장을 자극하는 것뿐이라는 얘기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관해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줄지 예측하기 어렵다면서도 “북-미 긴장 완화를 위해 ‘스마트(smart)한’ 정책을 취했다”고 평가했다. 전면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미국의 ‘코피 작전’(제한적 대북 선제타격)을 실행할 위험을 줄였다는 얘기다. “제한적 공격을 받았다고 주권국가가 반격하지 않는다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그러면 바로 (국민의) 신뢰를 잃고 체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미국 정책입안자들이 (북한은 반격을 못 한다고) 오판하면 재앙을 불러올 것이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강대국은 지역 내 패권을 추구하고, 다른 지역에서도 패권국의 등장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고 주장해왔다. 이날도 그는 부상하는 중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미국 사이에 언젠가 전쟁이 일어날 위험이 높다고 경고했다. 그는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이 중부 유럽에서 전쟁을 벌일 위험보다 가능성이 더 크다. 특히 안보 경쟁에 따라 동아시아가 전장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경제 협력이 긴밀해지면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반론에 관해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독일도 영국, 프랑스 등과 적극적으로 무역을 하는 등 경제 협력이 활발했다”며 “갈등이 벌어지면 안보 경쟁이 결국 경제 협력을 꺾게 된다”고 답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한말의병에서 독립군으로―후기의병’(홍영기 지음)과 ‘한국 근대 역사학의 성립과 발전’(류시현 지음) 등 독립운동 관련 교양서 2권을 최근 발간했다. ‘한말의병에서…’는 1907년 군대 해산부터 1910년 이후 의병이 독립군으로 전환되는 시기까지 지역별 의병활동을 분석했다. 저자는 후기에 속하는 이 시기 의병이 일제의 식민화 정책을 지연시키고 국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기초를 닦는 데 공헌했다고 밝혔다. 전기·중기 의병 활동을 분석한 지난해 책 ‘한말의병운동’의 후속 작이다. ‘한국 근대 역사학의…’는 조선 말부터 1940년대까지 한국 근대 역사학의 특징을 분석했다. 신채호, 문일평, 안재홍 등 일제강점기 대표적 역사학자들의 역사관도 정리했다. 저자는 한국 근대 역사학이 일제 식민 사학에 학문적 사상적으로 대결하는 방안이었고, 일제의 문화적 지배에 대응해 민족운동의 이념을 도출하려는 운동이었다고 평가했다. 두 책은 ‘주제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시리즈의 일부다. 이 시리즈는 누구나 독립운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획됐다. 컬러 그림과 사진도 적지 않게 수록하고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역사연구회가 서울 종로구 덕성여대 종로캠퍼스에서 17일 개최한 학술대회 ‘3·1운동의 메타 역사, 3·1운동 연구사의 재검토’에서 3·1운동의 원인과 영향 등을 새롭게 조명한 주장들이 제기됐다. 도면회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발표문 ‘3·1운동의 원인으로서의 무단통치론 재고’에서 3·1운동의 주요 원인으로 ‘민족적 차별’을 꼽았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6월 각 지역 일본 헌병대장·경무부장 연석회의가 제출하고 조선헌병대 사령부가 편찬한 ‘조선소요사건상황’에 그런 면모가 드러난다는 것. 각 도 단위로 ‘조선인의 불평과 희망사항’이 수집돼 있는데 ‘불평’으로 일본인이 신분 고하를 불문하고 조선인을 멸시하고, 모욕적으로 호칭하고, 차별대우하는 것, 각종 제도적 변화, 과중한 세금 등이 많았다. 도 교수는 “3·1운동의 원인은 식민지 근대가 만들어낸 사회경제적 부담과 민족적 차별”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3·1운동은 무단통치 또는 헌병경찰 정치와 경제적 수탈에 분노한 한민족이 민족자결주의와 고종의 사망 등을 계기로 결집해 일어났다는 인식이 유지돼 왔다. 도 교수는 “이 같은 인과론은 일제강점기 초기 한국 사회가 정체됐고, 일제가 토지 조사사업으로 막대한 토지를 가로챘다는 인식에 바탕에 두고 있다”며 “1990년대 이후 연구를 통해 토지조사 사업의 수탈성이 강하지 않았다는 게 드러났으므로 3·1운동 발발의 사회경제적 근본 원인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토론자로 나선 배성준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1918년의 쌀값 폭등, 1918년 말∼1919년 초 스페인 독감의 유행도 민심 이반으로 3·1운동 발생에 단기적으로 영향을 주었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박준형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일본의 인식 변화를 살폈다. 박 교수는 “1969년 동아일보사가 펴낸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은 논문 76편이 수록된 거대한 기획이자 기념비적인 연구 성과였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해 일본의 학술잡지 ‘시소(思想)’도 특집을 꾸렸는데, 여기서 사학자 와타나베 마나부는 ‘조선 민중을 관통해 온 일관된 사상’을 인정하면서 근대적 정신이 결여됐다는 일본의 3·1운동관을 비판했다”고 말했다. 한국역사연구회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 연구총서를 5권으로 발간할 계획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 왕실도서관인 궁내청(宮內廳) 서릉부(書陵部)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반출해간 조선왕실 도서가 엄청나다. 2012년 1205책이 환수됐지만 아직 얼마나 더 남아있는지 정확히 모를 정도다. 반면 교토대 부속도서관의 가와이 문고는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의 조사로 그 전모가 거의 드러났다. 일본의 조선 경제사 학자인 가와이 히로타미(河合弘民·1873∼1918) 박사가 수집한 이 자료들의 가치는 기대한 대로였다. 지난해 확인된 19세기 후반 면주전(綿紬廛·육의전의 하나로 나라에 명주를 납품) 상업문서만 해도 그렇다. “조선은 상업을 천시한 탓인지 상인의 기록이 굉장히 부실합니다. 한데 이 면주전 문서들은 굉장히 방대하고 회계장부와 낱장 고문서가 함께 남아있어요. 이런 컬렉션은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어디서도 찾기 어렵습니다. 면주전 문서는 상인 조직이 실제로 어떻게 운영됐는지, 우리가 모르는 상업사의 공백을 채워줄 겁니다.” 조선 상업사·재정사 전공자로 면주전 문서를 연구 중인 조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도 “한마디로 가치가 굉장히 높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다. 본보가 보도한 선조가 임진왜란 때 마부에게 내린 공신 교서(13일자 A14면)를 비롯해 가치 있는 우리 고문서와 고서가 해외에 산재해 있다. 향후 한국학 연구의 보고(寶庫)라고 할 만하다. 해외한국학자료센터는 2008년부터 미국 버클리대 동아시아도서관, 일본 동양문고, 도쿄대 오구라 문고, 오사카 부립도서관 등을 조사하고 서지 목록, 해제, 디지털 이미지 등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개해 왔다.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일본만 해도 와세다대, 도호쿠대 도서관, 야마구치 현립도서관, 도쿄대 아가와 문고를 비롯해 조선본의 목록만 있거나, 그마저도 없고 조사가 전혀 안 된 기관이 수십 곳이다. 그러나 올해 6월 이후로는 센터의 해외 조사가 어찌 될지 불투명하다. 이 사업을 포함해 10년 동안 진행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자료센터’ 사업 연장안이 지난해 정부 예산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센터가 발로 뛰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공개하는 데 한 해 3억 원이 좀 넘게 들었다. 이공계 연구에서는 하나당 10억 원이 넘는 장비가 즐비하다. 국가 연구개발 예산 가운데 인문사회부문이 2%도 안 되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반백년을 내다보고 해야 할 일도 ‘10년이면 할 만큼 한 것 아닌가’라는 근거 부족한 판단 탓에 중단되는 듯싶어 안타까울 뿐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자신의 말고삐를 잡은 마부에게 내린 보물급 공신교서(功臣敎書)가 일본에서 처음 발견됐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센터장 정우봉 국문학과 교수)는 지난달 18∼24일 일본 교토대 부속도서관 서고를 조사해 마부 오연(吳連)에게 내린 호성공신(扈聖功臣)교서를 비롯한 유물과 인쇄본이 극히 적은 경오자(庚午字·안평대군의 글씨로 주조한 금속활자) 간행 서적 등 귀중 고문헌 약 500책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호성공신은 선조가 자신을 의주까지 호종하는 공을 세운 86명에게 1604년 내린 것이다. 공신교서는 국내에 9개가 남아 있는데, 그중 6개가 보물로 지정돼 있다. 기존 교서는 문신(8개)과 의관(1개)의 것뿐이어서 ‘이마(理馬, 사복시·司僕寺에서 궁중의 말을 관리하던 잡직)’가 받은 공신교서가 발견된 것은 ‘오연교서’가 처음이다. 이번에 발견된 교서는 “조정 안팎의 신하와 백성들이 대부분 짐승이 달아나듯 새가 숨어버리듯 하였는데, 너는 하례(下隷·낮은 신분)로서 임금을 뒤로하지 않고 어가와 세자의 출정에 말고삐를 짊어지는 공을 이루었고”라며 오연이 낮은 신분임에도 충성을 다했다고 강조했다. 오연은 석성군(石城君)에 봉해졌다. ‘용사호종록(龍蛇扈從錄)’은 그가 “부여(扶餘)의 정병(正兵)으로서 어가를 따랐다”고 기록했다. 박영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정병은 정규군으로, 오연은 양민 출신으로 군대에 갔다가 선조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당시 선조의 공신 책봉은 형평성 면에서 오늘날까지도 비판을 받는다. 전투에서 목숨 바쳐 싸운 장수 등에게 내린 ‘선무(宣武)공신’이 18명에 불과하고 그나마 주요 장수와 의병장이 제외된 탓이다. 반면 선조는 ‘호성공신’을 대규모로 책봉해 자신을 보좌한 이들은 마부까지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챙겼다. 그러나 당대 사신(史臣)이 호성공신을 “미천한 복례(僕隷·종)들이 20여 명이나 됐다”고 비판하며 이마를 비롯한 하층민의 책봉에 마뜩잖아 한 시각은 신분 차별적이라는 평가다. ‘비운의 활자’ 경오자로 인쇄된 ‘역대병요(歷代兵要)’ 유일본도 확인됐다. 당대 명필이었던 안평대군의 서체를 자본(字本)으로 만든 경오자는 당시에도 “책의 인쇄에 으뜸인 활자”로 평가됐지만 불과 6년(1450∼1456년)만 사용됐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뒤 안평대군이 썼다는 이유로 녹여버리고 새 활자를 만든 탓이다. 경오자로 인쇄된 서적은 국내외에 6종만 남아 있다. 최다 인명이 기록된 19세기 중엽의 ‘만성보(萬姓譜·온갖 성씨의 족보에서 큰 줄기를 추려 모은 책)’ 40책 역시 발견됐다. 조선 후기에 작성됐으며 딸과 사위까지 포함했다. 조사에 참여한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연구실장은 “기존 만성보보다 3, 4배 방대한 분량”이라며 “과거 합격 이력, 관직, 혼맥 등 조선 지배 세력의 인적 네트워크를 파악할 수 있는 최대 ‘인물 뱅크’다”라고 말했다. 세종의 일곱 번째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1427∼1445)의 장서인 ‘근행지당(謹行之堂)’이 찍힌 ‘대학연의(大學衍義)’도 포함됐다. 이번 조사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자료센터 사업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정우봉 교수는 “한중연의 이 사업은 10년간 진행됐으나 연장안이 정부 예산 심의를 통과하지 못해 올해 6월을 마지막으로 해외 조사도 잠정 중단된다”며 “한국학 연구의 보고(寶庫)인 해외 자료 조사가 장기적 안목으로 지속되길 바란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우주에 관해 흥미로운 지식들이 잘 정리된 책이다. 학자들이 관측하는 하늘은 자연사박물관 벽면에 과거의 모습을 시대별로 나열한 그림과 같다. 박물관이 화석 등을 바탕으로 상상해 그렸다면, 우주는 진짜 과거의 모습을 드러낸다.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시간만큼, 먼 별들은 먼 과거를, 가까운 별들은 가까운 과거를 보여준다. 관측 대상에는 ‘마이크로파 우주 배경 복사’도 있다. 빅뱅 이후 38만 년 동안 우주는 물질과 에너지의 밀도가 아주 높은 수프와 같았다. 관찰자가 있었다고 해도 앞을 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우주 온도가 3000K(절대온도) 아래로 떨어지자 광자의 움직임을 방해하던 전자들이 주위의 양성자에 붙잡혔고, 광자는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됐다. 광자들은 우주 팽창에 따라 에너지를 잃었지만 여전히 우리 앞에 나타난다. 이것이 우주 배경 복사다. 과학자들은 최근 배경 복사 분포지도를 세밀하게 만들었다. 이 지도는 우주 초기 물질 분포의 구조를 보여준다. 은하와 은하 사이는 그저 텅 빈 공간일까? 별의 수가 적은 왜소은하(dwarf galaxy), 은하를 벗어나 폭주하는 별, 고온 기체, 기체 구름, 우주선(線) 입자, 암흑 물질 등이 그 공간을 채우고 있다. 주요 관측 대상도 아닌, 은하에서 멀리 떨어진 하늘에서 초신성 폭발이 적지 않게 관측되는 건 은하의 중력을 벗어나 떠도는 별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천문학자인 저자는 국내에도 방영한 다큐멘터리 ‘코스모스: 스페이스타임 오디세이’(내셔널지오그래픽) 진행자이기도 했다. 난해한 주제를 대중의 눈높이에서 풀어가는 정제된 서술, 위트 있는 문장, 천문학이 인류에게 주는 의미에 대한 통찰을 보면 저자가 왜 널리 사랑받는 학자인지 알 수 있다. 원로 천문학자의 번역도 매끄럽다. 원제는 ‘Astrophysics for People in a Hurry’.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임진왜란 도중 군영(軍營) 훈련도감이 만들어져 서울 수비를 맡았고, 병력은 17세기 후반∼19세기 5000명가량으로 유지했다. 이들의 훈련 장소는 어디였을까? 군사들은 주로 노량진 모래사장이나 서대문 밖 모화관 트인 곳에서 한 달에 세 번 진법 훈련을 했다. 이런 이야기는 조선 후기 약 300년간 훈련도감에서 수발한 문서들을 필사한 ‘훈국등록(訓局謄錄)’에 나온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역주 훈국등록’ 1(사진), 2권과 이를 쉽게 풀어낸 ‘인정사정, 조선 군대 생활사’, ‘조선 최정예 군대의 탄생’을 최근 각각 펴냈다. 책에 따르면 훈련도감 군병들은 급료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채소 농사를 지어 팔거나 한강변에서 하역 등 품팔이 노동을 했다. 도망병도 끊이지 않았다. 1593∼1613년에 1644명이 도망쳤는데, 504명만 다시 잡혔다. 책에는 이 밖에 훈련도감 군병들의 호랑이 포획, 도성 축조, 동전 주조 등 활약상과 함께 총기 사고, 군법 집행, 군복의 변천, 군기(軍旗)와 군대 음악에 관한 이야기 등이 함께 담겼다. ‘역주 훈국등록’은 앞으로 20권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조선시대 국왕 호위와 궁궐 수비, 도성 경비를 맡았던 중앙 군영에서 만든 군영등록 569책을 소장하고 있다”며 “조선 후기 생활사, 사회사를 살피는 데 귀중한 자료”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임진왜란 도중 군영(軍營) 훈련도감이 만들어져 서울 수비를 맡았고, 병력은 17세기 후반~19세기 5000명가량으로 유지했다. 이들의 훈련 장소는 어디였을까? 군사들은 주로 노량진 모래사장이나 서대문 밖 모화관 트인 곳에서 한달에 세 번 진법 훈련을 했다. 이런 이야기는 조선 후기 약 300년간 훈련도감에서 수발한 문서들을 필사한 ‘훈국등록(訓局謄錄)’에 나온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역주 훈국등록’ 1, 2권과 이를 쉽게 풀어 낸 ‘인정사정, 조선 군대 생활사’, ‘조선 최정예 군대의 탄생’을 최근 각각 펴냈다. 책에 따르면 훈련도감 군병들은 급료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채소 농사를 지어 팔거나 한강변에서 하역 등 품팔이 노동을 했다. 도망병도 끊이지 않았다. 1593~1613년 동안만 1644명이 도망쳤는데, 504명만 다시 잡혔다. 책에는 이밖에 훈련도감 군병들의 호랑이 포획, 도성 축조, 동전 주조 등 활약상과 함께 총기 사고, 군법 집행, 군복의 변천, 군기(軍旗)와 군대 음악에 관한 이야기 등이 함께 담겼다. ‘역주 훈국등록’은 앞으로 20권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조선시대 국왕 호위와 궁궐 수비, 도성 경비를 맡았던 중앙 군영에서 만든 군영등록 569책을 소장하고 있다”며 “조선 후기 생활사, 사회사를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사람들은 종이책을 어디에서 살까? 2017년 국민 독서 실태 조사에 따르면 ‘시내 대형서점’(38.5%), ‘인터넷 서점·쇼핑몰’(23.7%), ‘동네 소형서점’(10.6%) 순으로 나타났다(성인 기준). 동네 서점을 이용하는 이들이 1할가량에 불과한 것이다. 1997년 이후 20년 동안 국내에서 약 3000개의 서점이 문을 닫았다는 또 다른 조사 결과도 있다. 문 닫은 서점은 거의 전부가 동네 서점이다. 일본 교토의 구석진 동네에 있는 중형 서점 게이분샤 이치조지 지점을 지역 명물로 만든 호리베 아쓰시는 ‘거리를 바꾸는 작은 가게’(민음사)에서 “거리가 살아야 점포도 살 수 있다”고 했다. 점포들이 ‘스토리’를 개발하는 동시에 여러 가게가 연계해 ‘거리의 영향력’을 키워야 한다는 얘기다. 책은 “나는 샛길이 많은 사회일수록 좋은 사회라고 생각한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을 인용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또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가진 가게가 나타날까’ 하는 기대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런 골목을 걷고 싶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연애플레이리스트(연플리)’ 시즌3이 올여름 제작된다. 이 소식에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 ‘연알못’(연플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40대 이상일 가능성이 높다. ‘연플리’는 지난해 3월 모바일과 웹으로 시즌1이 공개돼 청소년과 젊은층에 인기를 모으며 에피소드 하나가 무려 2000만 뷰를 기록했던 드라마다. 10대들은 이미 유튜브를 검색 포털 애플리케이션(앱)보다 많이 쓰는 상황(닐슨코리아클릭,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사용 현황 조사). 최근 모바일 콘텐츠 시장이 이미지와 텍스트에서 동영상 중심으로 급속히 재편되는 가운데 그 핵심 중 하나인 드라마 장르를 들여다봤다.○ ‘숏폼’ 세대 맞춤 ‘숏폼’ 드라마 “‘웹드라마’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 취재 중 한 모바일 드라마 제작업체 관계자는 기자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5, 6년 전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웹드라마’는 이름 그대로 웹에서 주로 유통됐고, 아이돌이 출연하거나 기업 홍보 목적이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내용과 제작 방식이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다. 정확한 시장 통계는 없지만 과거 ‘웹드라마’로 불렸던 콘텐츠는 근래에는 웹이 아니라 페이스북 페이지나 유튜브 앱을 비롯한 모바일에서 주로 소비된다. 길이도 확연히 짧아져 ‘숏폼’(짧은 형식) 콘텐츠로 불리기도 한다. 과거 웹드라마의 에피소드 하나가 약 10∼15분이었던 데 비해 ‘숏폼’ 콘텐츠는 1∼5분가량.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보거나 출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잠깐 동안 보기 딱 좋은 길이다.○ “10초 안에 눈길 잡아야” 형식 변화에 따라 내용도 진화했다. 과거 웹드라마는 기존 드라마 문법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어 붙이기만 하면 TV 단막극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전지적 짝사랑 시점’ 등을 만든 와이낫미디어 이민석 대표는 “개인 크리에이터가 만드는 콘텐츠가 유행한 이후 영상의 문법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짝사랑, 시작도 끝도 나 혼자”(전지적 짝사랑 시점, ^티비), “헤어지고 친구로 남으려는 구 남친”(‘오구실’, 72초TV), “대학 신입생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연애플레이리스트)…. 숏폼 콘텐츠는 제목에 에피소드의 주제가 다 담길 정도로 서사가 단선적이다. 한마디로 ‘제곧내’(제목이 곧 내용)다. 기성세대의 눈엔 ‘만들다 만 것’같이 보일 수 있지만 젊은 세대는 제목만 보고 클릭했다가 처음부터 ‘정주행’하는 이들이 상당수다. 이는 짧은 길이에도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는 ‘후킹 요소’를 담기 때문. 연애플레이리스트 작가 겸 제작자인 이슬 씨는 “모바일 사용자는 터치 한 번으로 다른 앱으로 이탈할 수 있다. 보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건 처음 10초”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연애 소재라면 ‘심쿵 포인트’가 필수다. 시청자가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섬세하고 촘촘하게 감정을 짜 넣어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제작자들은 입을 모았다.○ 친구 태그하고 공유하며 모바일 놀이 시청자를 모으는 것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입소문이다. 이용자들은 콘텐츠를 자신의 피드에 ‘공유’하거나 ‘내 이야기’ 혹은 ‘네 이야기’라며 댓글로 서로의 이름을 태그(SNS 친구를 소환하는 방식)한다. 이 덕에 소규모 제작사도 성공 가능성이 커졌다. 과거 대형 포털의 영상 플랫폼에서 메인 화면에 배치돼야 조회수가 보장됐던 데에서 사뭇 달라진 현상이다. 실제 현재 유행하는 숏폼 콘텐츠를 제작하는 주요 회사들은 딩고티비, 72초TV, 와이낫미디어처럼 3년 미만의 ‘젊은’ 회사인 경우가 많다. 72초TV 이윤미 매니저는 “대학을 갓 졸업한 PD들이 기획해 성공시킨 작품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숏폼’ 드라마는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연애나 직장 생활 고민이 주요 소재였지만 최근에는 스릴러 ‘호러 딜리버리 서비스’(72초TV)가 등장하는 등 장르가 확대되고 있다. 연플리 제작자 이슬 씨는 “형태와 포맷, 주제의 확장성이 숏폼 콘텐츠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조윤경 yunique@donga.com·조종엽 기자}

‘연애플레이리스트(연플리)’ 시즌3이 올 여름 제작된다. 이 소식에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 ‘연알못’(연플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40대 이상일 가능성이 높다. ‘연플리’는 지난해 3월 모바일과 웹으로 시즌1이 공개돼 청소년과 젊은 층에 인기를 모으며 에피소드 하나가 무려 2000만 뷰를 기록했던 드라마다. 10대들은 이미 유튜브를 검색 포털 애플리케이션보다 많이 쓰는 상황(닐슨코리아클릭,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사용 현황 조사). 최근 모바일 콘텐츠 시장이 이미지와 텍스트에서 동영상 중심으로 급속히 재편되는 가운데 그 핵심 중 하나인 드라마 장르를 들여다봤다. ●‘숏폼’ 세대 맞춤 ‘숏폼’ 드라마 “‘웹드라마’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 취재 중 한 모바일 드라마 제작업체 관계자는 기자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5~6년 전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웹드라마’는 이름 그대로 웹에서 주로 유통됐고, 아이돌이 출연하거나 기업 홍보 목적이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내용과 제작 방식이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다. 정확한 시장 통계는 없지만 과거 ‘웹드라마’로 불렸던 콘텐츠는 근래에는 웹이 아니라 페이스북 페이지나 유튜브 앱을 비롯한 모바일에서 주로 소비된다. 길이도 확연히 짧아져 ‘숏폼’(짧은 형식) 콘텐츠로 불리기도 한다. 과거 웹드라마의 에피소드 하나가 약 10~15분이었던데 비해 ‘숏폼’ 콘텐츠는 1~5분가량.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보거나 출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잠깐 동안 보기 딱 좋은 길이다. ●“10초 안에 눈길 잡아야” 형식 변화에 따라 내용도 진화했다. 과거 웹드라마는 기존 드라마 문법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어 붙이기만 하면 TV 단막극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전지적 짝사랑 시점’ 등을 만든 와이낫미디어 이민석 대표는 “개인 크리에이터가 만드는 콘텐츠가 유행한 이후 영상의 문법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짝사랑, 시작도 끝도 나 혼자”(전지적 짝사랑 시점, 콕 티비), “헤어지고 친구로 남으려는 구 남친”(‘오구실’, 72초TV), “대학 신입생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연애플레이리스트)…. 숏폼 콘텐츠는 제목에 에피소드의 주제가 다 담길 정도로 서사가 단선적이다. 한마디로 ‘제곧내’(제목이 곧 내용)다. 기성세대의 눈엔 ‘만들다 만 것 같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젊은 세대는 제목만 보고 클릭 했다가 처음부터 ‘정주행’하는 이들이 상당수다. 이는 짧은 길이에도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는 ‘후킹 요소’를 담기 때문. 연애플레이리스트 작가 겸 제작자인 이슬 씨는 “모바일 사용자는 터치 한번으로 다른 앱으로 이탈할 수 있다. 보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건 처음 10초”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연애 소재라면 ‘심쿵 포인트’가 필수다. 시청자가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섬세하고 촘촘하게 감정을 짜 넣어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제작자들은 입을 모았다. ●친구 태그하고 공유하며 모바일 놀이 시청자를 모으는 것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입소문이다. 이용자들은 콘텐츠를 자신의 피드에 ‘공유’하거나 ‘내 이야기’혹은 ‘네 이야기’라며 댓글로 서로의 이름을 태그(SNS 친구를 소환하는 방식)한다. 이 덕에 소규모 제작사도 성공 가능성이 커졌다. 과거 대형 포털의 영상 플랫폼에서 메인 화면에 배치돼야 조회수가 보장됐던 데에서 사뭇 달라진 현상이다. 실제 현재 유행하는 숏폼 콘텐츠를 제작하는 주요 회사들은 딩고티비, 72초TV, 와이낫미디어처럼 3년 미만의 ‘젊은’ 회사인 경우가 많다. 72초TV 이윤미 매니저는 “대학을 갓 졸업한 PD들이 기획해 성공시킨 작품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숏폼’ 드라마는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연애나 직장 생활 고민이 주요 소재였지만 최근에는 스릴러 ‘호러 딜리버리 서비스’(72초TV)가 등장하는 등 장르가 확대되고 있다. 연플리 제작자 이슬 씨는 “형태와 포맷, 주제의 확장성이 숏폼 콘텐츠의 장점”이라고 말했다.조윤경 기자 yunique@donga.com조종엽기자 jjj@donga.com}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75)가 45년 전 스승과 함께 한문 단편의 문학적 가치를 처음으로 조명했던 책 ‘이조한문단편집’을 제자들과 다듬어 다시 발간했다. 임 교수가 스승인 고 이우성 성균관대 명예교수(전 민족문화추진회 회장)와 공동 연구해 냈던 책이다. 최근 서울 종로구 연구실에서 만난 임 교수는 “이우성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한문학 연구의 길로 들어서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이 교수의 대학 제자도 아니고, 논문 지도를 받지도 않았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65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 교수는 서울대 국문과 졸업을 앞두고 한문학을 연구하겠다고 결심했지만 앞이 막막했다. 당시 대학에 한문학은 전공이 없었고, 우리 문학으로 취급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학과 한문학에 명성이 높던 이 교수님의 연구실을 불쑥 찾아갔지요. 우리 문학 유산으로 굉장한 가치가 있으니 열심히 공부해서 깊이 분석하면 훌륭한 학자로 대성할 것이라고 용기와 자극을 주셨지요. 연구실에서 나와서 명륜동 길을 함께 걸으면서 시내버스를 탈 때까지 정말 많은 말씀을 해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스승의 도움은 말로 끝나지 않았다. 군 복무를 마치고 온 임 교수에게 이 교수가 고서적 복사물을 한 무더기 내밀었다. 일본 국회도서관 동양문고에서 발견한 우리 한문 단편 원전이었다. 연구 과제를 던진 것이다. 이후 임 교수는 전국의 도서관을 돌아다니면서 한문 단편을 수집했다. 복사시설을 갖춘 도서관이 거의 없던 시절이어서 원전을 손으로 일일이 베꼈다. “제가 초역을 해서 서울 미아리의 교수님 댁으로 가져가면 수정을 해 주셨지요. 전형적인 학자의 집이었지요. 묵향과 책 냄새가 댁 안에 가득하던 것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그렇게 ‘이조한문단편집’ 초판이 1973년 나왔다. 이 책과 후속 연구를 통해 실체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던 한문 단편이 우리 문학사에서 사실적인 서사문학의 출발점으로 자리매김했다. “당대 현실을 리얼하게 반영한 한문 단편은 16세기 말부터 등장하기 시작해 18, 19세기 야담이라는 이름으로 꽃을 피웁니다. 20세기 들어서도 창작성은 떨어지지만 옛것을 통속적으로 다시 살린 ‘야담’이라는 대중잡지가 있었지요.” 임 교수는 우리 근대 소설이 서구와 달리 단편이 중심이 되는 특수함을 가지게 된 것도 한문 단편에서 연원한다고 설명했다. ‘장길산’이나 ‘객주’와 같은 장편이 탄생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는 것. 임 교수는 최근 5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독회를 하면서 문장을 요즘의 언어 감각에 맞게 고치고, 그동안 새로 드러난 작자를 명기하는 등 연구 성과를 반영해 4권으로 새로 냈다. 한문 단편은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용재총화’에 나오는 금강산 유람 이야기 ‘관동만유(關東漫遊)’는 2016년 연극 ‘불역쾌재’(장유승 연출)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임 교수에게 수많은 단편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아 달라고 했다. “양반에 대한 중인의 역사적 승리를 상징하는 이야기 ‘김령(金令)’과 박진감 넘치는 군도(群盜)의 이야기 ‘월출도(月出島)’입니다. 잠재 가치가 무궁무진한 한문 단편이 현대적인 문화예술로 재창조되기를 기대합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동아일보사 사장과 회장, 명예회장과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을 지낸 화정 김병관(化汀 金炳琯) 선생의 10주기 추모식이 23일 오전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 묘소에서 엄수됐다. 추모식은 김재호 동아일보·채널A 사장을 비롯한 유족과 이용훈 인촌기념회 이사장(전 대법원장)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 묵념, 약력 보고, 추모사 순으로 진행됐다. 화정 선생의 기일은 25일이지만 주말과 겹쳐 이틀 앞당겨 열렸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추모사에서 “동아일보는 고비마다 시대의 나침반이었고, 화정은 험한 항로를 헤쳐 가는 조타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며 “동아 100년에 분명한 획을 그었다”고 말했다. 남시욱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 이사장은 “화정 선생이 발행인이었던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동아일보가 보도해 민주화의 불길을 붙였다”며 “그때 화정 선생의 투철한 신념이 흔들렸더라면 우리는 역사적 소임을 다하지 못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남 이사장은 1987년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다. 염재호 고려대 총장은 “화정 선생은 고려대 대운동장을 지하주차장과 중앙광장으로 바꾸고 최고 수준의 스포츠 시설과 이공계 인프라를 확충하는 전기를 마련했다”며 “고려사이버대 설립 등 미래 온라인 교육을 선도한 혜안도 놀랍기만 하다”고 말했다. 김재호 사장은 이날 추모식에서 ‘언론 교육 문화에 바친 열정―김병관을 생각한다’는 제목의 추모집을 봉헌했다. 추모집에는 화정 선생과 인연을 맺고 교분을 쌓은 지인 64명이 선생에 관해 쓴 글이 담겼다. 안숙선 명창은 생전에 국악 진흥에 깊은 관심을 쏟아 온 화정 선생을 회고하며 판소리 ‘춘향가’ 중 ‘하루가고 이틀가고’ 대목을 추모창으로 불렀다. 이낙연 국무총리와 이명박 전 대통령 등이 조화를 보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참석자 명단 (가나다순)▽정·관계김진호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 방형남 국립4·19민주묘지관리소장, 오정소 전 국가보훈처장,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 이상혁 변호사, 이진강 전 대한변협 회장, 장성원 전 국회의원, 정성진 대법원 양형위원장,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학계·교육계김병수 전 연세대 총장, 김병준 강남대 교수, 김병휘 한양대 명예교수, 김재천 전 고려중앙학원 사무국장, 김종필 중앙고 교장, 김학준 인천대 이사장, 박명식 고려중앙학원 이사, 송창범 고대부중 교감, 이용균 중앙고 교감, 이재호 동신대 교수, 이주현 고대부중 교장, 이홍우 상명대 석좌교수, 정구종 동서대 석좌교수,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진덕규 이화여대 명예교수, 허도영 고대부고 교장, 황호택 서울시립대 교수 <고려대> 김병철 김정배 어윤대 이기수 전 총장, 공정식 관리처장, 김규혁 생명과학대학장, 김동환 그린스쿨대학원장, 김성철 도서관장, 김영준 사무처장, 김재욱 기획예산처장, 명순구 법과대학장, 박길성 교육부총장, 박종웅 의무기획처장, 변동을 전 의료원 관리부장, 서성규 기획처장, 안정오 세종부총장, 오상철 연구교학처장, 유병현 대외협력처장, 윤성택 이과대학장, 이경호 정보전산처장, 이관영 연구부총장, 이기성 총무처장, 이기형 의무부총장, 이원규 정보대학장, 이재학 학생처장, 임상호 대학원장, 장동식 교수, 정진택 공과대학장, 조대엽 노동대학원장, 진서훈 입학홍보처장, 최종택 교학처장, 한금선 간호대학장, 현진해 전 의무부총장 <고려사이버대> 김진성 총장, 김원희 총무처장, 나홍석 창의공학계열부장, 박연정 교학처장, 염철현 인문사회계열부장, 이민영 입학대외처장, 이의길 연구개발처장▽경제계권이상 전 경방 감사, 김명하 김앤에이엘 회장, 김상영 CJ 상근고문, 김선휘 삼양염업 고문, 김승유 전 하나금융그룹 회장, 김영 코나딥코리아 대표, 김영로 전 SDI 사장, 김준 경방 회장, 김한 JB금융지주 회장, 박진오 비젼세무회계법인 대표, 안병모 유창건축사사무소 사장, 안병지 수창양행 사장, 유준상 한국정보기술연구원장, 이강 리앤다이렉트 대표, 이동영 수창양행 고문, 이병연 세화애드컴 대표▽언론·문화·체육계강하구 전 동아PDS 대표, 고우석 전 동아일보 출판영업국장, 권혁순 전 동아프린테크 사장, 김갑수 동아일보 수도권상조회장, 김기경 한국오리엔티어링연맹 명예회장, 김달수 울산김씨대종회장, 김두곤 전 동아일보 총무국장, 김병건 동아꿈나무재단 이사장, 김복수 전 동아일보 관리국 부국장, 김상준 울산김씨대종회 부회장, 김은 인촌기념회 이사, 김일동 동우회 이사, 김정웅 전 동아일보 사업국장, 김종심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김종완 전 국민체육진흥공단 상무이사, 김진현 세계평화포럼 이사장, 김창혁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김태령 일민미술관 이사장, 김태선 동우회 명예회장, 노재성 전 국민일보 부사장, 노한성 전 동아일보 광고국장, 박문두 동우회 이사, 박종섭 동아일보 경기상조회장, 박찬종 중앙중고 교우회장, 박충서 동아꿈나무재단 이사, 배인준 EBS 감사, 성낙오 전 영남일보 사장, 송대근 전 스포츠동아 대표, 신근철 동우회 이사, 심규선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양철화 전 동아일보 관리국장, 여영무 뉴스앤피플 대표, 오명 전 동아일보 회장, 오명철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윤미용 전 국악방송 이사장, 이규민 한국시장경제포럼 운영위원장, 이대훈 전 동아일보 이사, 이두환 전 동아일보 출판영업국장, 이명득 전 동아일보 시설본부 국장, 이연택 대한체육회 상임고문, 이종세 한국체육언론인회장, 이채주 전 화정평화재단 이사장, 이현락 전 경기일보 사장, 임연철 전 국립극장장, 전만길 전 대한매일신보 사장, 전진우 전 동아일보 대기자, 정준기 전 동아일보 광고국장, 조강환 동우회장, 조병조 전 프레컴 대표, 조천용 동우회 이사, 최규철 전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 최맹호 전 동아일보 부사장, 최명우 안전신문 주필, 허승호 한국신문협회 사무총장, 홍공선 동우회 이사, 홍성훈 동아꿈나무재단 이사, 홍인근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황재홍 전 한국방송광고공사 감사}
논란 속에 ‘출판 불가’ 결정이 났던 동북아역사재단의 동북아역사지도가 2020년까지 새로 발간될 것으로 전망된다.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65)은 22일 기자간담회에서 “기존에 제작했던 역사지도를 바탕으로 임기(2020년 11월까지) 내 동북아역사지도를 다시 만들어 모두 간행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동북아역사지도는 8년간 47억 원을 들여 제작했으나 비주류 사학계와 정치권에서 ‘동북공정 추종’ 논란을 일으켰고, 재단은 ‘지도학적 부실’을 들어 2016년 지도를 출판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김 이사장은 “한 군현 위치처럼 이견이 합의되지 않는 부분은 지도에 글로 설명을 다는 방법, 근대처럼 논란이 없는 시기의 지도부터 순차적으로 발간하는 방법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정유재란의 역사를 복원하고 돌이켜 보면서 한중일 3국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했습니다.” 정유재란의 진면목을 살핀 책 ‘정유재란―잊혀진 전쟁’(안영배 지음·박영철 사진)의 출판기념회가 22일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에서 열렸다. 저자인 안영배 동아일보 기자는 “정유재란은 역사에서는 살아있되 ‘잊혀진 전쟁’이나 다름없다”며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수군 주둔지였던 전남 순천의 장도 섬을 비롯해 주요 전적지가 방치되고 훼손됐다”고 말했다. 책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지 420년(7주갑)이 되는 2017년을 맞아 본보가 6개월에 걸쳐 연재한 시리즈를 다듬어 묶었다. 기사는 연재 당시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꼼꼼히 읽은 뉴스’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임진정유역사재단추진위원회(위원장 김병연)와 재경순천향우회(회장 최대규)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김세옥 전 대통령경호실장, 박경서 대한적십자사 회장, 송석구 전 동국대 총장, 신중식 전 국회의원, 이영일 전 국회의원, 정숭열 전 한국도로공사 사장,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가나다순) 등 250여 명이 참석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황현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73·사진)이 건강상의 이유로 21일 문화체육관광부에 사직서를 냈다. 황 위원장은 이날 “예전에 암 때문에 항암치료를 받았는데, 최근 새로운 암이 발견돼 사직서를 냈다”고 말했다. 문예위는 “정상적인 직무 수행이 곤란하다고 판단해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문학평론가인 황 위원장은 지난해 11월 문예위원장에 취임했다. 임기는 2020년 11월까지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400만 명이 넘게 본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에는 “신파에 불과” “신파지만 괜찮네”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처럼 영화 자체의 호불호와 관계없이 ‘신파’는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신파는 단순히 나쁘기만 한 것일까.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학술회의 ‘근대의 시간관과 학술사회’를 21, 22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에서 연다. 이승희 성균관대 초빙교수는 발표문 ‘신파와 막장의 시간성’에서 ‘한국적 신파’의 역사를 살폈다. 발표문에 따르면 1910년대까지 신파극은 그저 ‘새로운 연극’을 두루 지칭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이후 “객관세계에 대한 주체의 절대적인 무력감 속에서도 이를 완전히 수락하지 않는 주체의 이율배반적인 태도”라는 ‘신파성’이 형성된다. 신파극의 주인공들은 관습, 가족, 제도, 식민주의, 자본주의를 비롯한 거대한 힘과 대결하면서 투지를 드러낸다. 이승희 교수는 “반면 최근의 ‘한국적 신파’는 공통적인 역사적 기억 속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인정과 가족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한편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될 가능성은 작다”고 지적했다. 학술회의에서는 이 밖에도 다양한 발표가 진행된다. 한기형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구소설의 서사가 근대의 시간과 만날 때’라는 발표를 통해 일제강점기 ‘춘향전’과 같은 구소설이 널리 읽혔던 사실에 관해 분석한다. 그는 이른바 ‘구소설’은 식민지 하위 대중의 심상을 드러냈고, 근대적 문학 질서에 파열음을 냈지만 주류 문학사에서 배제됐다고 봤다. 이기훈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는 ‘시대구분론의 파장: 역사단계론의 지식 지형’에서 1960년대 말 역사학계에서 벌어진 시대구분 논쟁을 회고했다. 이기훈 교수는 이 논쟁이 민족사 체계의 확립, 근대화에 대한 강렬한 사회적 요구에 대한 부응이라는 차원에서 진행됐지만 구체적으로 전개될 만한 이론적 공동 기반이 없었다고 봤다. 윤해동 한양대 교수는 ‘세계 시간과 국민국가: 한국의 사례를 중심으로’에서 정치권력이 기년법과 역법을 통해 시간을 지배하는 과정을 탐구한다. 김백영 광운대 교수는 ‘식민지 근대 시공간의 오감도(烏瞰圖)로서 이상 시 읽기’에서 근대적 시공간으로 떠오르는 식민지 도시의 초상화를 이상의 시로 해석한다. 이 밖에 ‘문학에서의 역사와 반(反)역사: 이기영의 고향을 중심으로’(황종연 동국대 교수) ‘두 평양시간: 북한 특유의 시간인식’(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교수) 등이 발표될 예정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정한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土門江)이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 지류이며, 두만강 너머 북간도는 원래 조선의 영토라는 주장은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런 ‘간도 문제’의 뿌리에 19세기 말 조선 지방당국의 ‘식민지 경영’이 있었다는 연구가 나왔다. 김형종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청일전쟁 이전 간도 관련 양국의 대응에 대한 자료와 연구를 망라한 ‘1880년대 조선-청 공동감계와 국경회담의 연구’를 최근 발간했다. 책에 따르면 간도 개척은 가난한 백성 소수가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넌 것이라기보다 지방당국의 비호 아래 대규모로 이뤄졌다. 김 교수는 1909년 용정촌에 광성서숙을 세운 윤상철의 아들 윤정희가 19세기 후반∼1930년대 초반 간도의 교육·종교·독립운동을 정리한 ‘간도개척사’에 주목했다. 이 책에 따르면 1880년 회령부사로 부임한 홍남주는 ‘국토를 넓히는(廓拓·확척)’ 공을 세우고자 “기근으로 인한 민생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월변(越便·두만강 북쪽 지역)의 토지를 개간하고 이주를 허가할 것이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원서(願書)를 올리게 하라”고 지시했다. 함경북도 안무사 조병직도 이를 묵인했다. 이른바 ‘경진(庚辰)개척’이다. 1880년과 이듬해 수천 명이 두만강을 건너 회령 맞은편 평야 100여 정보를 순식간에 개발했다. 이전에도 수십∼수백 명이 개별적으로 강을 건넌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대규모로 정착한 건 처음이었다. 1881년 9월 청나라 관리 이금용은 두만강 북안 약 200리 이내 지역을 조사해 대규모 월간민(越墾民)을 발견하고 결과를 보고하면서 “조선의 함경도자사는 그들에게 경작을 허가하는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다”고 했다. 조선의 함경북도 당국이 월간민에게 호적을 편성하고 각종 세금과 소작료를 거두는 등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것이다. 1885년 무렵 조선월간민의 수는 2만 명이 넘었고, 지역 경제는 두만강 북안 간도에 심각하게 의존하게 된다. 김 교수는 “조선 지방당국은 일단 백성을 대규모로 월간, 이주시켜 두만강 북쪽에 실질적 통제력을 행사하고 이후의 분쟁에서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대응하려는 자세를 보였다”며 “일종의 식민지 경영을 시도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책은 이후 조선과 청이 국경회담과 두 차례에 걸친 공동 조사(勘界·감계)를 벌이는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한다. 조선은 여기서 백두산정계비에 따라 원래 간도가 조선 땅이라고 주장하고 나섰지만 조선의 토문감계사 이중하(1846∼1917)는 고종에게 사뭇 다른 내용으로 비밀 보고를 올렸다. 애당초 정계비를 세울 때 물길을 착각한 것이며, 토문강과 두만강은 같은 강이고, 조선과 청의 경계는 두만강이 맞다는 취지였다. 양국은 국경 문제에서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월간민은 청나라 당국이 통제하게 됐다. 김 교수는 전화 통화에서 “민족사의 무대가 됐던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은 감성적으로는 호응하기 쉽지만 사실 곤란한 발상”이라며 “천지 남쪽 5km 지점에 있는 백두산정계비를 근거로 들면 백두산이 오히려 중국 땅이 되는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환갑 때는 새 출발을 한다고 생각했소. 아흔 살을 넘기니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고) 오래 산다는 것도 참 힘든 일이라고 느꼈지요. 노인의 장수 역시 우리 사회가 다 같이 고민하고, 올바른 길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과 대면한 노(老)철학자의 진솔하고 담담한 문장이 수필 문학의 진경을 보여준다. 올해 한국 나이로 백수(白壽·아흔아홉 살)를 맞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98)의 산문집 ‘남아있는 시간을 위하여’(김영사·사진) 얘기다. 김 교수는 18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50여 년간 쓴 수필 중에서 독자들에게 의미를 줄 수 있는 글만 엄선해 담았다”며 “독자들이 인생의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책에는 김 교수의 산문 25편이 담겼다. 표제작은 새로 썼고, 나머지는 에세이스트로 널리 사랑받아온 저자가 ‘영원과 사랑의 대화’(1961년) 뒤에 쓴 글 가운데 골라 모았다. 많은 후학을 길러내고 1960년대부터 ‘고독이라는 병’을 비롯해 기록적인 베스트셀러를 내며 삶의 지침을 전파했던 김 교수는 어느덧 스스로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깨닫는다. 어느 날 오후 그는 산책길에 서산 너머로 장엄하게 저무는 해를 바라봤다. ‘해가 지는 데 몇 분이 걸릴까. 내 나이도 저 태양과 같은 순간에 이르고 있는데 몇 해나 남아 있을까. 몇 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주어져 있을까. 그 시간 동안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김 교수는 이에 대해 “지금도 언제나 어떻게 인간관계를 선하고 아름답게 이끌어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며 “그것이 도덕과 윤리의 기본이다. 모두가 무엇을 위해 살지 고민하고, 그것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함께 가져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 교수는 ‘또 하나의 나’와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고독에 관하여’). ‘나’는 친구가 죽었을 때,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랑하던 사람이 운명했을 때 자신의 행동을 살피고 무언가를 묻고 싶어 하던 표정을 그대로 가지고 나타났다. 저자는 영원, 죽음, 무한, 허무, 운명 같은 주제를 두고 스스로와 대화한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그는 ‘신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자 귀를 기울였다. 장수하는 건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일이기도 했다. 김 교수는 노모를 모시는 동시에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하는 아내의 병 수발을 하며 10여 년을 살았다. 그동안 ‘어깨에 쌀가마니 두 포대를 지고 가는 것같이 힘들었다’. 그러나 7년 사이 모친과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외로움과 서글픔이 온몸을 덮쳐왔다. ‘사랑을 주고받을 삶의 앞길이 없어진 것이다. 두 분의 사랑을 영원히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 그러나 내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생각이 한 가닥 피어올랐다. 이제부터 두 분에게서 받은 사랑을 더 많은 사랑해야 할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야겠다.’ 김 교수는 고고한 현자의 높이에서 내려다보지 않는다. 그 자신도 ‘백수를 맞이하는 오늘까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온 셈’이라고 고백한다. 그 열정은 인생의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간절해진다. 김 교수도 “나이가 들었기에 민족과 국가, 사회를 걱정하는 마음은 더욱 커져간다”고 말했다. 노화와 죽음이 주요한 화두로 부각된 오늘날 서가에 꽂아두고 곱씹으며 벗으로 삼을 만한 책이다. 표제작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그래도 나를 위한 시간들이 아직은 남아 있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와 ‘힘드시지요?’라고 물으면 나는 ‘예,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할 것 같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와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3·1운동 유적지를 소개하는 지도 1만 부를 제작해 14일부터 전 세계에 배포한다고 밝혔다. 이 지도에는 3·1운동 당시 1만 명 이상이 모였던 장소 총 40곳이 표시돼 있다. 지도는 3·1운동을 “1919년 3월 1일 일제에 항거해 들불처럼 일어났던 한반도 곳곳의 독립운동”이라며 “당시 한국 인구의 10%인 200만 명 이상이 참여하고, 시위 건수가 2000회를 넘는 등 사실상 모든 국민이 참여한 독립운동”이라고 소개했다. 지도 왼쪽에는 전국의 3·1운동 유적지 33곳을 설명했다. 일례로 서울의 ‘서대문형무소’는 “3·1운동 당시 1600여 명의 시위 관련자가 수감됐던 곳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투옥돼 고초를 당한 장소이다. 이 형무소는 잔혹한 일제 탄압의 역사를 보여주는 동시에 끊임없이 저항한 한국 독립운동 역사를 보여준다”고 소개했다. 이 밖에 ‘아우내장터 만세시위지’를 비롯해 서울의 ‘용산인쇄소 직공 파업시위지’ ‘보신각 앞 3·1운동 만세시위지’ 등이 33곳에 포함됐다. 반크는 지도를 글로벌 독도홍보대사와 세계 곳곳의 한글학교 교사 등에게 배포할 계획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