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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대 위에 펼쳐진 하얀 종이를 걷어내자 푸른색 철릭이 나타났다. 철릭은 조선시대 왕과 문무백관이 군사의례 시 입은 옷. 저고리와 치마를 연결한 형태로 치마에 주름이 많은 게 특징이다. “치마 엉덩이 부분이 다 찢어져서 너덜너덜했어요. 훼손이 심해 원래 형태를 잡는 데만 3개월 가까이 걸렸죠.” 12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의 서화·직물 보존처리실. 안지윤 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가 철릭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날 살펴본 철릭은 제멋대로 나풀대던 천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은 상태였다. 안 연구사를 비롯한 직물 보존처리 전문가들이 지난해 말부터 찢어진 수십 군데를 기존 주름 방향에 맞춰 한 땀 한 땀 바느질한 덕이다. 가장 가는 명주 실로 바느질해 접착제로 붙인 듯 바느질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안 연구사는 “지금은 보강 직물을 덧대 느슨하게 바느질해 놓은 것으로 아직 갈 길이 멀다”며 “3개월 정도 세부 바느질을 하는 등 마무리 작업을 하면 더 자연스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박물관의 유물 보존처리 전문가는 직물, 서화, 금속, 목칠기 등 8개 분야에 걸쳐 총 14명이다. 2005년 박물관 개관 당시 3명이었지만 유물 보존관리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인원이 보강됐다. 이들의 역할은 철릭처럼 훼손이 심한 유물을 원상태에 가깝게 되살리는 것이다. 원형 복원이 불가능할 경우 현재의 상태가 유지되도록 관리한다. 유물 생명 연장 전문가인 셈이다. 보존처리 과정은 재질별로 다르다. 철릭 같은 직물 유물은 염료 등 직물분석(처리 전 조사), 접착제를 이용한 안정화(강화 처리), 오염물 제거, 형태 보정, 보강 작업 등 여러 단계를 거친다. 재질과 구조를 분석하기 위해 전자현미경 등 과학 장비도 동원된다. 보존처리에 들어가는 덧댐 천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등 제약 사항이 많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의 유물 취급 매뉴얼에는 ‘가역성(可逆性) 있는 재료와 기술을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시간이 흘러 보존 재료나 기술이 더 발전할 경우 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제거 가능한 재료를 써야 한다는 것. 고궁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안녕, 모란’ 특별전에 처음 공개된 조선시대 활옷(궁중 여성 혼례복)도 3년여의 보존처리를 거쳤다. 이 작업에 참여한 김주영 연구원은 “보존처리는 모든 과정에 일일이 사람 손이 가야 한다”며 “증류수를 묻힌 거즈를 옷에 잠깐 얹어놓거나 바느질을 하는 등 최대한 간접적인 방법을 써야 해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설명했다. 안 연구사는 “기다림이 반복되지만 바스라질 것 같던 유물이 안정적인 모습을 되찾아 전시되는 걸 보면 뿌듯하다”고 했다. 24년째 유물 보존처리 작업을 하고 있는 권혁남 고궁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내년에 전시될 조선시대 궁궐 현판들을 보여줬다. 가로로 두 쪽이 나는 등 훼손된 현판들은 접합 및 색 맞춤 작업을 거쳐 재탄생될 예정이다. 창덕궁과 종묘에 보관하다가 박물관으로 이관된 유물들도 수장고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권 연구관은 2009년 미륵사지 석탑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봉안한 기구)가 발견됐을 당시 보존처리를 맡은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1370년 만에 발견된 백제 유물을 처리하는 역사적 순간에 함께한다는 생각에 영광스러웠어요. 화려하게 전시된 유물 뒤에 이를 후세에 전하려고 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콜드플레이, 에드 시런 등 세계적인 가수들과 함께 대규모 글로벌 라이브 무대에 선다. 13일(현지 시간) 버라이어티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자선단체 글로벌 시티즌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기후변화 등 세계적 위기를 함께 극복하자는 취지로 개최하는 ‘글로벌 시티즌 라이브’에 BTS가 참여한다고 밝혔다. 올 9월 25일 열리는 공연은 서울을 비롯해 뉴욕, 영국 런던, 나이지리아 라고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등 6개 대륙 주요 도시에서 24시간 라이브로 진행된다. 미국 ABC와 영국 BBC 등 세계 주요 방송국과 유튜브,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생중계될 예정이다. 이번 행사에는 BTS를 포함해 다양한 장르의 음악가들이 대거 참여한다. 콜드플레이, 메탈리카, 듀란듀란, 빌리 아일리시, 리조, 숀 멘데스, 어셔, 안드레아 보첼리, 에드 시런 등 수십 명의 유명 가수와 밴드가 무대에 선다. 휴 에번스 글로벌 시티즌 최고경영자(CEO)는 “BTS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중 하나”라며 “그들은 그동안의 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등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코로나19 변이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있지만 주최 측은 뉴욕 센트럴파크 등 일부 행사장에 관객 수만 명을 수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에번스는 “전 세계에서 청중이 모일 것으로 보인다. 센트럴파크에는 6만 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글로벌 시티즌은 2008년 설립된 비영리기구로 세계 빈곤 퇴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해 4월에도 롤링스톤스, 빌리 아일리시 등 세계적인 스타들이 집에서 실내복 차림으로 ‘무관객 콘서트’를 여는 등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온라인 합동 콘서트를 열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어렵게 들어간 첫 직장을 퇴사한 20대 청년은 흔히 있다. 높은 보수나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등 퇴사 이유는 다양하다. 그런데 이 경우는 좀 특이하다. 연세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노인복지관 사회복지사로 일하다 2년 만에 사표를 냈다. 도배사가 되겠다면서. 한 달간 도배학원을 다니고 2019년 가을부터 아파트 건설 현장에 투입됐다. 2년간 8곳의 현장을 누비며 자신의 팀을 꾸려도 될 만한 도배사로 성장했다. 5일 출간된 ‘청년 도배사 이야기’를 쓴 배윤슬 씨(28·여) 이야기다. 배 씨는 11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했다. 20대 도배사의 직업 생활과 인생에 대한 고찰, 성장기를 담은 이 책이 직장인들의 관심을 이끌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 “20대 도배사는 흔치 않잖아요. 이 나이대 여성은 더 희귀하죠. 특이한 경우라 제 얘기를 해봐야 공감받기 어렵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직장인들이 많이들 공감하더라고요. 직장에 대한 회의와 불안, 이직 고민….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그의 말대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사무실’을 나와 도배사가 된 이유는 뭘까. 그는 “도배사는 정직한 직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 회사는 실력보다 태도나 충성심을 더 중시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실제 성과보다 말로 과대 포장한 성과가 더 인정받기도 하고요.” 그는 스스로를 ‘조직 문화에 취약한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실력으로만 승부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았다. 그는 책에 도배 일을 ‘비교적 내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일’이라고 썼다. “도배는 꼼수를 쓰면 도배지가 우는 등 바로 결과가 드러나요. 성과를 포장할 수도 없죠. 결과가 좋으면 태도나 과정은 문제 되지 않아요. 노력한 만큼 기술이 늘고 성장하는 재미도 있죠.” 그는 도배사라는 직업의 매력을 공유하고 싶어 2019년 말부터 자신의 ‘도배 일상’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글을 올린 지 5개월 후 궁리출판사로부터 “책을 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주 5일제 시대에 주 6일 일하는 그에게는 난감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곧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공사장 가림막 너머의 세상을 알리고 싶었다. ‘막노동’ ‘험한 일’로 뭉뚱그려지는 도배사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었다. 사실 그동안 주변에서 받은 질문들도 이런 편견에 뿌리박힌 것들이었다. “아직도 그 일 하니?” “몸 쓰는 일 하니까 몸 많이 좋아졌겠네?” 그는 황금 같은 일요일을 고스란히 책 집필에 투자했다. “도배 일을 ‘언제 그만둬도 이상하지 않은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도배는 한번 배우면 평생 가는 가치 있는 기술인데도요. ‘몸 좋아졌겠다’는 사람들에겐 반대로 묻고 싶어요. ‘머리 쓰는 일 하시니까 머리 많이 좋아지셨겠네요’라고요.” 그는 책에 “몸이 점점 닳아가는 느낌이다. … 늘 무릎에 멍이 들어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부어 헐겁던 반지가 잘 들어가지 않는다”라고 썼다. 책이 나온 지금도 그를 따라다니는 질문이 있다. “좋은 대학을 나와 왜 도배사를 하느냐” “학벌이 아깝지 않느냐”는 것. 그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고 했다. “어떤 일을 하건 발전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정체돼 회의만 느끼며 시간을 허비하는 일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아요. 도배는 갈수록 성장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거든요. 제가 하는 일이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선택한 ‘그런 일’이 아니라는 것, 더 많은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A와 B는 직장 동료다. 이름 난 직장에서 10년 넘게 일하며 비슷한 월급을 받고 있다. 임금과 직업의 사회적 지위가 같은 A와 B는 언뜻 ‘같은 계급’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럴까. 호주 시드니대 사회학과 교수와 정치경제학과 교수, 호주국립대 사회학부 교수로 구성된 저자들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A가 부모에게서 받은 돈으로 대출 없이 산 서울의 아파트는 최근 5년 새 10억 원이 올랐다. 자산이나 대출 여력이 없던 B는 같은 기간 돈을 모으며 집 살 날만 기다렸다. 하지만 단기간에 천정부지로 오른 서울 아파트 값 때문에 B의 꿈은 물 건너 갔다. 자산 격차가 하늘과 땅 차이가 된 두 사람을 같은 계급이라고 한다면 A는 불쾌해할 수도 있다. 저자들은 현대 사회의 계급을 5가지로 나눈다. 아래에서부터 홈리스, 임차인, 주택담보대출이 있는 주택 소유주, 대출이 없는 소유주, 주택을 포함해 다각화된 자산으로 소득을 얻는 투자자다. 이들은 임금은 정체된 반면에 자산 가치는 크게 오른 만큼 주택이 핵심인 자산 소유 여부를 기준으로 계급을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용과 임금, 교육이 계급을 결정하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는 것이다. 임차인에서 주택 소유주로 가는 사다리가 끊긴 이동 불가 시대가 됐다고도 진단한다. 그나마 사다리를 이어주는 건 자녀가 자산시장에 진입하는 시점에 부모가 해주는 증여와 양도다. 저자들은 이를 ‘엄마 아빠 은행’이라 표현한다. 심화될 대로 심화된 자산 인플레이션에다 ‘엄마 아빠 은행’의 도움도 받지 못해 집을 포기해버린 상당수 밀레니얼 세대를 두고 저자들은 ‘미래의 불발’이라는 용어로 애통해한다. 호주 교수들이 전 세계적인 자산 인플레이션 현상을 분석해 지난해 5월 영국에서 먼저 출간한 이 책은 마치 한국만을 분석해 쓴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집값 상승으로 분노하는 한국 밀레니얼 세대에게 ‘벼락거지’가 된 원인을 사회학적, 정치경제학적으로 짚어준다. 다만 원인을 명확하게 알았다고 해서 분노가 누그러질지는 의문이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조선시대 궁궐에서 사용되던 공중 화장실 유구(遺構·옛 건축물의 자취)가 처음 발견됐다. 15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이 화장실엔 현대식 개별 정화시설이 설치돼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2019년부터 경복궁 동궁(세자의 거처 및 직무공간, 각종 지원 시설이 있던 곳) 남쪽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근정전 동쪽 지역에서 화장실 하부 구조물을 발굴했다고 8일 밝혔다. 이 구조물은 길이 10.4m, 너비 1.4m, 깊이 1.8m의 좁고 긴 직사각형으로, 석조 구덩이 형태였다. 해당 지역에 있던 각종 전각의 도면을 기록한 경복궁배치도(1888∼1890년)와 북궐도형(北闕圖形·1907년) 등의 문헌을 토대로 분석한 결과 이 시설은 당시 궁녀와 하급관리, 군인들이 쓰던 공중 화장실이었다. 토양 분석에서 기생충 알 다량과 오이속, 들깨씨앗 등이 검출된 점도 화장실이었음을 뒷받침했다. 연구소 측은 “터에서 발견된 소뼈 등을 이용해 연대를 측정한 결과 화장실은 1868년 경복궁 중건 당시 만들어져서 20여 년 동안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문헌 기록과 전문가 분석을 종합하면 이 화장실은 총 4, 5칸으로 구성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화장실이 1칸에 2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됐던 점을 고려할 때 한 번에 최대 10명이 사용할 수 있었던 셈이다. 주목할 점은 화장실 하부 구조에 분변의 발효 및 침전 등을 위한 정화수를 유입하는 입수구와 오수를 배출하는 출수구가 있다는 것. 각각 높이를 달리해 설치된 입수구와 출수구 등은 개별 화장실마다 설치된 현대식 정화조 구조와 비슷하다. 바닥과 벽면을 돌로 만들고, 틈새는 진흙으로 메워 분뇨가 새거나 토양에 스며들지 않도록 한 것 역시 현대식 정화조와 비슷한 부분이다. 연구소 관계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현대식 정화조 시설 관련 기술을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유구 터의 토양 분석을 통해 당시 식생활을 분석하는 등 궁궐 사람들의 생활사를 복원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모란 향기가 바람에 실려 콧속으로 파고든다. 전시장 바닥을 밟자 모란이 하나둘 피어난다. 비밀의 모란 정원 같은 전시장 곳곳엔 모란 무늬를 담은 조선왕실 유물 120여 점이 자리 잡았다. 모란 무늬가 사용된 가구, 의복 등 유물을 통해 조선 왕실 문화를 살펴보는 특별전 ‘안녕, 모란’이 7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개막했다. 조선 왕실은 왕실의 번영과 풍요를 기원하는 뜻에서 생활 곳곳에 모란 무늬를 사용했다. 왕실의 위엄과 화려함을 강조하기 위해 혼례복 등 혼례용품은 물론이고 병풍, 가마 등 장례용품에도 모란꽃 무늬를 애용했다. 전시 유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모란 무늬가 수놓인 활옷(궁중 여성 혼례복)이었다. 창덕궁에서 발견된 후 1980년대부터 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온 이 옷은 보존 처리 작업을 거쳐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주인을 알 수 없는 이 활옷에는 옷 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종이심이 들어 있었는데, 조사 결과 1880년에 작성된 과거 시험 답안지로 드러났다. 낙방한 이들의 답안지를 재활용한 것. 전시장에선 혼례용품과 장례용품 외에도 장신구 상자 등 생활용품, 허련의 모란 그림 화첩 등 18, 19세기에 활동한 화가들의 모란 그림도 볼 수 있다. 전시장에는 실제로 모란향이 퍼져 관객들이 모란에 빠져들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올봄 창덕궁 낙선재 뒤뜰 화계(花階·계단식 화단)에서 모란 향기를 포집한 다음 이를 재현한 합성향료를 만들어 활용했다. 전시장 한편에는 모란 정원을 만들고, 새소리와 빗소리를 들을 수 있게 했다. 벽면과 바닥에 흐르는 모란 무늬 영상과 살랑이는 바람은 조선왕실 모란꽃 정원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휴식하는 듯한 효과를 준다. 전시는 10월 31일까지. 사전 예약과 현장 접수를 통해 시간당 100명, 일일 최대 1000명까지 관람 가능하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살아있는 6·25전쟁 영웅’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이 10일 오후 11시경 별세했다. 향년 100세. 고인은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백척간두에 선 대한민국을 온 몸을 바쳐 지켜낸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6·25 전쟁 발발부터 정전협정 체결 때까지 1128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전선에서 격전을 치렀다. 숱한 생사의 고비를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며 국가와 민족에 헌신한 영웅으로 평가 받는다. 살아생전 그는 항상 자신을 ‘노병’으로 불러달라며 스스로를 낮추며 “시대가 부여한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백 장군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 평남 강서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살 많은 누나 효엽과 세 살 어린 남동생 인엽과 함께 보낸 유년기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7세 때 부친(백운상)이 작고하자 모친(방효열)은 삼남매를 데리고 평양으로 옮겨 힘든 생계를 꾸렸다. 교사가 되기 위해 평양사범학교에 진학한 그는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갔다. 만주국 장교로 복무하던 중 해방이 되자 그는 미군정이 조직한 국방경비대의 중위로 임관해 한국군 창설에 기여했다. 이후 1사단장(당시 29세) 재임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군단장과 육군참모총장 등을 맡아 최전선에서 군을 지휘하며 여러 차례 기념비적인 전과를 올렸다. 6·25전쟁의 최대 격전인 다부동 전투에서 그가 일궈낸 값진 승리는 전설로 회자된다. 1950년 8월 북한군의 파죽지세와 같은 공세에 밀려 아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대한민국의 명운이 경각에 달린 위기상황에서 1사단장이던 그는 불굴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는 공포에 질려 퇴각하는 부하들을 향해 “내가 물러서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너희들이 물러서면 내가 너희들을 쏘겠다”고 독려하며 선두로 달려나갔다. 그와 부하들의 결사항전으로 부대는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고 그 기세를 몰아 인천상륙작전 이후 평양까지 진격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다부동전투가 벌어진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에는 그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 전투는 미국의 주요 군사학교가 그의 회고록을 수업 교재로 활용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 백 장군은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추앙받는 전쟁영웅이다. 주한미군은 그를 ‘살아 있는 전설(living legend)’로 대우한다. 역대 주한미군 사령관들은 ‘한국전쟁의 영웅이신 백선엽 장군님’이라고 부르며 이·취임사를 시작하는 게 전통이다. 미군 장성 진급자와 미 국방부 직원들도 방한하면 백 장군을 만나는 게 필수코스다. 주한 미8군은 미군 부대에 배속된 한국군(카투사·KATUSA) 우수 병사에게 주는 상을 ‘백선엽상’이라 명명했다. 2013년 8월엔 미 8군은 그를 ‘미8군 명예사령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미 8군은 “6·25전쟁 당시 한반도를 방어하는 데 탁월한 업적을 달성했고 한국의 미래를 결정해 온 역사적 순간의 증인”이라고 존경의 뜻을 전했다. 그가 1992년 펴낸 영문판 ‘From Busan to Panmunjeom(부산에서 판문점까지)’ 등은 미국내 전사(戰史) 부분의 스테디셀러다. 미 국립보병박물관은 백 장군의 6·25 경험담을 육성으로 담아 전시하고 있다. 자서전인‘군과 나’는 미국의 주요 군사학교에서 교재로 쓰인다. 백 장군은 휴전 이후 한국군의 재건과 숙군작업, 국방력 강화에 주력했다. 한국군 최초로 4성 장군으로 진급했고, 초대 1야전군사령관으로서 아시아 최초로 야전군을 창설했다. 그와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얽힌 일화도 유명하다. 1949년 군이 남로당 연루자를 가려내는 숙군(肅軍) 작업을 할 때 당시 정보국장이던 백 장군은 남로당 연루 혐의로 조사를 받던 박정희 소령의 구원 요청을 수용해 육본에 재심을 요청했다. 그의 배려로 박 소령은 불명예 제대로 일단락됐다. 몇 년 뒤 군에 복귀한 박 전 대통령이 소장 진급 과정에서 좌익 활동 전력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도 참모총장이던 백 장군이 보증을 섰고 박 전 대통령이 준장 시절 미국 포병학교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1960년 예편 이후엔 외교와 경제발전에 기여했다 10년간 중화민국(대만) 프랑스(유럽 5개국과 아프리카 7개국 대사 겸임) 캐나다 주재 대사를 지냈다. 교통부 장관으로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을 시작했다. 충주비료 호남비료 한국종합화학사장을 역임하며 중화학공업의 토대를 닦기도 했다. 선인재단 운영을 비롯한 각종 교육 활동에도 나섰다. 고령의 나이에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과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강연과 저술 활동을 계속해 왔다. 백 장군은 1940년대 일본군(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다는 이력 때문에 친일파 논란에 시달리기도 했다. 2013년 10월 민주통합당 김광진 의원으로부터 “민족 반역자”라는 공격까지 받기도 했다. 이에 보수단체와 장성 출신 의원들이 나서 “일제 치하에 나라가 없어진 상황에서 군 복무지를 선택할 수 없었던 그를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반발했다. 태극무공훈장(2회),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미국 은성무공훈장, 캐나다 무공훈장 등을 비롯해 미국 코리아소사이어티 ‘2010 밴 플리트 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한국전쟁一千日’(1988), ‘軍과 나’(1989), ‘실록 지리산’(1992), ‘한국전쟁Ⅰ,Ⅱ,Ⅲ’(2000), 회고록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2010), ‘노병은 사라지지 않는다’(2012) 등이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노인숙씨, 아들 백남혁·백남흥 씨, 딸 백남희·백남순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 발인은 15일 오전 7시.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02-3010-2000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손효주기자 hjson@donga.com}

6·25전쟁 참전용사인 이근엽 전 연세대 교수(90)는 지난해 뒤늦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그에게 훈장 수여가 결정된 건 최전방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1953년 6월. 그러나 하루에도 여러 번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고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던 탓에 훈장을 전달받지 못했다. 훈장이 나온 사실도 몰랐다. 당시 포탄 파편에 부상을 입은 그는 지난해 상이기장(傷痍紀章)을 찾겠다며 국방부에 전화했다가 서훈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죽고 나서 훈장을 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 생전에 받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6·25전쟁 70주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현재 6·25 참전 유공자의 평균 연령은 우리 나이로 90세. 정부가 70주년을 앞두고 참전 유공자들을 예우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공을 들이는 것도 이들이 생존해 맞는 사실상의 마지막 10주기가 될 가능성이 커서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지난달 말 현재 생존 6·25 참전 유공자는 8만4013명. 2010년 12월 18만6315명에서 10만 명 넘게 줄었다. 지난해 12월에는 8만9600명이었다. 5개월 새 5600명가량이 별세했다. 참전 유공자들에게 무공훈장을 찾아주는 일을 두고 일분일초가 급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처럼 참전 유공자들의 내일을 기약할 수 없어서다. 국방부는 지난해 7월 육군인사사령부에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조사단’을 설치했다. 조사단 임무는 전쟁 당시 혼란 등으로 훈장이 전달되지 못한 5만6000여 명에게 훈장을 찾아주는 것. 기한은 2022년까지다. 그러나 이달 중순 현재 5만6000여 명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6200여 명에 그쳤다. 이 중 훈장 전달이 완료된 사람은 2500여 명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단시간 내에 수만 명의 소재를 정확하게 찾아야 하지만 조사단 인원은 15명에 불과하다. 소재지 파악을 위한 관련 부처 및 각 지방자치단체와의 협업도 쉽지 않은 등 곳곳이 난관이다. 더군다나 2500여 명 중 수훈자 본인이 직접 훈장을 수령한 경우는 10%에도 못 미쳤다. 군 관계자는 “훈장을 수령한 유가족들은 아버지나 남편이 훈장이 나온 사실조차 모르고 돌아가신 것을 아쉬워한다”고 전했다. 생전에 훈장을 받았더라면 국가와 후손들이 자신의 희생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더 명예롭게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다. 참전 유공자의 증언을 청취해 6·25 전쟁사라는 큰 그림의 누락된 퍼즐 조각을 채워 넣는 일도 시급하다. 본보는 지난달 중순부터 6주에 걸쳐 참전용사들이 겪은 전쟁의 참상과 그들이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기록하는 기획 기사 시리즈 ‘노병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했다. 이 기사 준비 기간 인터뷰 후보자 명단에 오른 참전용사 1명이 별세했다. 역사의 산증인들이 하루아침에 유명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비교적 건강하던 또 다른 참전용사는 며칠 새 치매 증상이 악화됐다. 본보가 만난 참전용사들은 “나 때는 말이야”라는 식의 전쟁 무용담을 펼쳐놓는 데 집중하지 않았다. 이들이 들려준 전쟁 이야기는 각기 달랐지만 궁극적으로 전하려는 메시지는 같았다. 다시는 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것. 이들은 자신들이 증언한 날것 그대로의 전쟁 이야기가 비극의 재발을 막는 밑거름이 되길 바랐다. ‘숨은 영웅’으로 살아온 참전용사들은 무엇보다 비교적 젊은 세대인 기자가 자신들이 겪은 전쟁 이야기를 듣고 이를 기록한다는 사실과 젊은 세대가 기사를 읽게 된다는 사실을 뿌듯하게 생각했다. 참전용사들과의 인터뷰를 1인칭 형식으로 재구성해 보도한 기사 댓글에는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꼭 찾아뵙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대한민국을 있게 한 진정한 영웅이다” “어르신 덕분에 제가 있을 수 있다”는 등의 감사와 예우를 표하는 내용이 많았다. “우리의 현재는 6·25 참전용사들이 준 선물이다. 그 선물에 대한 보답은 기억이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가 내건 대국민 캠페인용 문구다. 참전용사들에게 뒤늦게나마 훈장을 수여하는 일도, 증언을 듣고 기록하는 일도 모두 그들을 기억하겠다고 약속하는 일일 것이다. 고령의 참전용사들은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들에게 ‘기억’이라는 선물로 보답할 수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손효주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hjson@donga.com}

도대체 김정은―김여정 남매는 왜 이럴까. 북한이 2018년 비핵화 대화 시작 후 전례 없는 초강경 대남 드라이브를 걸면서 한미 외교가에서 끊이지 않고 나오는 질문 중 하나다. 지난해에도 ‘삶은 소대가리’ 등 격한 표현의 ‘말 폭탄’은 있었지만 이번에는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물리적으로 폭파하고, 9·19 군사합의를 깨는 군사 도발을 예고하고 나선 만큼 완전히 다른 판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군 총참모부가 17일 한국을 향해 “대적 군사행동 계획들을 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비준에 제기할 것”이라고 하면서 국무위원장 겸 중앙군사위원장인 김정은이 직접 등장해 강도 높은 대남 압박을 펼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대남 메시지에 침묵했던 김 위원장이 직접 나선다면 앞선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과는 다른 차원의 메시지와 행동 강령을 내놓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과 세 번 회담을 갖고 서울 답방까지 동의했던 김 위원장, 그리고 이를 가장 옆에서 지켜본 여동생 김여정은 왜 이렇게까지 나오는 것일까.○ 가중된 제재로 위기에 놓인 경제난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다음 날인 17일 김여정이 내놓은 담화에서 문 대통령을 향한 원색적인 비난을 걷어내면 북한 수뇌부의 한국 정부에 대한 불만의 윤곽이 드러난다. “미국 눈치를 보면서 대북제재 완화나 해제 시도 등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여정은 문 대통령이 15일 “(제재와 관련해) 더디더라도 국제사회의 동의를 얻으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 “사대 의존의 본태가 여지없이 드러났다”고 일갈했다. 김여정이 직접 나서 문 대통령을 향해 제재 불만을 쏟아낸 것은 북한 경제난이 한층 심각해졌다는 것을 방증한다는 분석이 많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북한의 대중무역 적자액은 2016년 5억5800만 달러였지만, 2017년 16억7700만 달러, 2018년 20억2200만 달러에 이어 지난해엔 23억7300만 달러로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다. 그마저도 수출과 수입 모두 쪼그라들고 있다. IBK북한경제연구센터에 따르면 4월 북한의 대중무역액은 수출 221만 달러, 수입 218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10% 수준이다. 이렇게 북한 경제난이 가중되는 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의 대북 경제제재가 누적되면서 그 파괴력을 더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2017년 8월 6일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 2371호는 북한에 경험해 보지 못한 ‘지옥’을 보여줬다. 이 제재로 북한은 석탄, 철과 같은 핵심 광물 자원의 수출이 막혀 가장 큰 달러원을 잃게 됐다. 지난해 12월 해외에 나와 있던 북한 근로자들도 전부 철수하는 수순을 밟은 것도 크다. 해외 북한 근로자들은 벌목공 등으로 일하면서 받은 월급 중 상당 부분을 달러는 물론 미국 재무부의 단속망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 루블화, 중국 위안화, 유로화 등으로 바꿔 전산 시스템이 아닌 외교 행낭을 통해 평양으로 보내왔다. 그런데 그 달러벌이를 위한 ‘일자리’ 자체가 끊긴 것이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조치로 북한이 올해 1월 말부터 국경을 폐쇄하면서 그나마 있던 물품 교역마저 급격히 위축된 상황이다. 윌리엄 브라운 미 조지타운대 교수는 “대북제재가 북한의 수출을 큰 폭으로 줄였다면, 코로나19는 수입을 급감시키는 역할을 했다”며 “최근 북한의 수입품은 주민들의 민생과 연결된 생필품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수출과 수입 모두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북한은 사실상 무역이 가장 없는 나라 중 하나가 됐다”고 밝혔다고 미국의소리(VOA) 방송이 19일 전했다. 결국 이런 극심한 경제난은 통치자금 잔액을 ‘깡통계좌’로 만들면서 김정은 체제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 북한 상품무역수지 적자는 지난해 23억6000만 달러, 2018년 20억 달러여서 북한의 외환보유액 규모(2018년 25억∼58억 달러)가 줄고 있다. 이 때문에 버락 오바마 정부 시기부터 본격화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트럼프 정부 내내 이어지면서 경제난으로 촉발된 대내적 위기가 본격화되자 상황 변화를 위해 ‘대남 때리기’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북한 경제는 제재와 코로나19로 인해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며 “코로나 때문에 늦긴 했지만 뭔가 하긴 해야겠고, 그러니까 제일 약한 고리인 한국을 공격하면서 제재 이슈를 만들어 나가려는 속셈”이라고 했다. 하지만 북한의 거센 대남 공격이 제재와 관련해 한미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당장 트럼프 대통령이 17일(현지 시간) 북한에 대한 기존 경제제재를 1년 더 연장하며 북한을 “비상하고 특별한(unusual and extraordinary) 위협”으로 규정했다. 개성 연락사무소를 완파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문 대통령을 겨냥해 제재 불만을 쏟아낸 지 하루 만에 트럼프 대통령이 제재 고삐를 틀어쥔 셈이다.○ 김정은 지도력 실추, 반전 노려2019년 3월 5일 오전 3시, 김정은 위원장이 탄 전용열차가 평양역 구내에 들어섰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베트남 하노이 회담을 위해 2월 23일 오후 4시 30분 평양역을 출발한 지 226시간 30분 만의 귀환이었다. 앞서 박태성 당 중앙위 부위원장은 김 위원장의 하노이행에 대해 2월 25일 노동신문 1면에 “애국애민, 애국헌신의 대장정”으로 치켜세웠지만 김 위원장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열차역 플랫폼은 환영 인파로 가득했다. 북―베트남 회담 성과를 김 위원장의 치적으로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런 풍경과는 달리 김 위원장의 ‘하노이 노딜’의 충격은 한미 정보당국의 평가보다 심각했고 오래갔다. 김 위원장은 하노이에서 돌아오자마자 ‘흰쌀밥에 고깃국’을 언급한다. 그해 3월 6일 평양에서 열린 ‘제2차 전국 당 초급선전일꾼대회’에 보낸 서한에서다. 김정은은 서한에서 “전체 인민이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살게 하려는 것은 수령님(김일성)과 장군님(김정일)의 평생 염원”이라고 했다. ‘하노이 빅딜’을 기대했던 북한 주민들에게 김일성이 약속했던 ‘쌀밥에 고깃국’을 다시 언급하면서 ‘하노이 노딜’로 대북제재 중 일부가 해제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인민’들의 실망감을 줄이려고 나선 셈이다. 한 대북 소식통은 “일부 강경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이 하노이 북―미 회담에 나섰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돌아왔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무오류성’ 원칙에 결정적이면서도 공개적인 오점을 남긴 셈”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말까지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거론하며 미국에 양보를 요구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선물’을 얻지 못했다. 그러자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김정은은 올해 초 다시 자력갱생을 강조하며 허리띠 졸라매기를 독려했다. 문성묵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은 “2012년 김정은이 다시는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이 없다고 하면서 핵 개발에 집착했지만 결과는 경제난으로 돌아왔다”며 “모든 실패의 책임을 사실 김정은이 져야 하는 상황이지만 최고 존엄이 질 수는 없으니 그 책임을 한국에 돌리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 김여정을 앞세우는 것도 김정은의 영도력 실추나 건강 이상과 연관이 돼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일각에서 김여정을 북한의 후계자를 뜻하는 ‘당중앙’이라고 호칭하고 있다는 분석까지 나오는 상황. 이에 대해 또 다른 대북 전문가는 “김정은이 자신의 실정 책임을 스스로 한국에 돌리는 모습이 불편하니, 일단 김여정을 앞세웠다는 분석이 많다”고 했다. ○ 美대선 앞두고 워싱턴 관심 끌기이런 북한은 결국 미국 대선을 4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방식, 다시 말해 도발적 언행과 사무소 폭파와 같은 다분히 ‘북한식’ 이벤트로 국제사회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낼 필요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선 정국에 돌입하면 미국 정계는 표심을 좌우하는 국내 문제에 집중하는 만큼 북한과 같은 골치 아프고 해결하기 어려운 해외 이슈들은 뒤로 돌리는 경향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평양이 이번 대남 강경 드라이브를 통해 워싱턴의 관심 돌리기에 본격 나섰다는 것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김여정 담화를 보면 대북전단 문제에 대한 불만도 있지만 한미 태도 문제를 이야기한다”며 “답답한 국면에서 자기들이 아무것도 안 하면 존재감도 잊혀질 뿐 아니라 이 상태를 수용하고 수긍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 세게 판을 흔들어서 상대가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반응하려고 하는 의도가 크다”고 했다. 앞서 북한은 워싱턴의 눈길을 잡아끌기 위해 폭파 이벤트를 자주 사용해왔다. 2008년 6월 27일 미국 대선을 4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한 게 대표적이다. 이는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대북 치적으로 비쳤고, 북한은 이미 효용이 다해 ‘깡통’으로 평가받기도 했던 냉각탑의 폭파 비용으로 미국으로부터 수십만 달러를 받으며 장사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북한은 2018년 5월 24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하며 비핵화 의지를 드러내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결국 이런 강력한 이미지는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첫 정상회담 성사로 이어졌다. 이번에 북한이 개성 연락사무소를 가공할 만한 폭발력으로 완파시킨 것도 결국 미국이 평양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하나의 이벤트라는 것이다. 특히 미국 대선 전망이 한층 혼조세로 최근 들어선 것은 북한이 이런 도발 이벤트로 더 몸값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레드라인을 넘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비롯한 고강도 도발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평양의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고,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에게도 과거 오바마 대통령 때 부통령을 하면서 선보였던 ‘전략적 인내’와 같은 시간끌기용 대북정책을 향후에는 펴지 말라고 선제 경고장을 날린 것일 수도 있다. 전성훈 전 통일연구원장은 “북한은 상황을 의도적으로 최악으로 끌고 간 다음에 극적으로 대화 기조로 전환할 것으로 보인다. 상당 기간 우리에겐 뼈아픈 고통의 시간이 될 것 같다”고 했다. 황인찬 hic@donga.com·주성하·손효주 기자}

《6·25전쟁에는 여군도 참전했다. 국난을 방관할 수 없다며 자진 입대한 이들이었다. 여자의용군 이복순 씨(87)는 전방에서 활약했다. 그와의 인터뷰를 1인칭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사람들은 농담인 줄 안다. 내 말을 한 번에 믿는 이는 거의 없다. 나는 여든일곱 할머니다. 동네 어귀 의자에 앉아 볕을 쬐는, 어느 동네에나 있는 백발노인이다. 젊은 시절에 잰 키는 148cm였다. 나이가 들고 몸이 위축되면서 이마저도 더 작아졌을 것이다. 동네 지하철역까지는 걸어서 50분이 걸린다. 남들은 10분이면 가는 거리다. 척추부터 고관절까지 성한 곳이 없다. 열여덟 살에 당한 사고 후유증이 평생 나를 따라다녔다. 지팡이에 의지해 한 걸음씩 옮기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나는 6·25 참전용사다. 70년 전 육군 여자의용군에 자원입대한 군인이었다. 강원 정선의 끝없이 펼쳐진 눈밭 한가운데 소총을 메고 서서 눈물을 훔치던 소녀 병사였다. 해마다 눈 쌓인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시절이 오롯이 떠오른다.○ 군인이 된 17세 소녀 실눈을 뜬 채 수원시청 벽을 봤다. 똑바로 볼 용기가 없었다. 3일 전 시험장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면접관들은 내게 “키가 정말 작다”고 하더니 “이 논술 답안 정말 네가 쓴 거냐”라고 여러 번 물었다. ‘이렇게 작은데 뽑아줄 리가….’ 합격자 명단 벽보를 훑어 내려갔다. ‘106번 이복순’ 1950년 11월, 나는 육군 여자의용군 2기 시험에 합격했다. 열일곱 살이던 나는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불합격자들은 주저앉아 고무신으로 바닥을 치며 울었다.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는 이도 있었다. 지원자 중엔 인민군이나 그 편에 선 주민들에게 남편이나 아버지 등 가족을 잃은 이들이 다수 있었다. “총 들고 싸우겠다. 원수를 갚게 해 달라.”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통곡이 이어졌다. 개전 이후부터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수원도립병원 조제실에 몸을 숨긴 채 일했다. 인민군 편에 서라는 위협을 받고서였다. 병원 영안실엔 인민군 편 사람들 손에 죽은 주민 시신이 밀려들었다. 분노가 일었다. 그즈음 여자의용군 모집 소식을 들었다. 11월 말 어머니가 만들어 준 코트와 솜바지를 챙겨 입었다. 김소월 등 시집 3권을 품속에 챙겼다. 짐은 그게 다였다. 수원지역 합격자 50명은 트럭 2대의 짐칸에 나눠 탔다. 훈련소인 서울 일신국민학교로 향했다. 일찍 찾아온 혹한의 칼바람이 온몸에 파고들었다. ○ “이슬같이 죽겠노라”12월 1일 훈련이 시작됐다. 새벽 6시부터 남산을 달렸다. 나는 사람 한 명이 더 들어갈 정도로 큰 남자 군복을 입고 뛰었다. 맹추위를 떨치려 목청 터져라 군가를 불렀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총이 없어서 나무 작대기로 훈련했다. 수류탄은 돌멩이로 대신했다. 각개전투 등 훈련이 계속됐다. 늘 배가 고팠다. 나는 키가 큰 순으로 서는 대열 맨 뒤에 섰다. “니들 배 안 고파?” 여고생들처럼 소곤거렸다. 3주로 예정됐던 훈련은 12월 17일 일찍 마무리됐다. 중공군이 남진해오고 있어서였다. 훈련소는 부산으로 피란했다. 전황이 긴박해지자 전방에도 여군 일부를 배치한다는 결정이 났다. “일선(전방) 갈 사람?”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이듬해 1월 12일 여자의용군 1, 2기 중 130명이 전방의 3개 군단과 10개 사단에 배치됐다. 나는 1월 말 9사단에 합류했다. 훈련소 짐을 옮기다 늑골이 골절된 탓에 출발이 늦어졌다. 동기들은 “그 몸으로 어딜 가느냐”며 말렸다. 나는 “어차피 죽으려고 군대 온 것 아니냐”며 고집을 부렸다. 정선까지 가는 지프차는 눈길 위에서 휘청휘청했다. 어린 시절을 따뜻한 일본 오사카에서 보낸 나는 그렇게 많은 눈이 쌓인 풍경을 처음 봤다. 눈 구경에 정신이 팔렸다. 끝없이 이어지는 하얀 눈밭을 보고 있자니 눈이 시렸다. 날이 어둑해져서야 사단본부에 도착했다. 무릎 높이만큼 쌓인 눈밭에 천막이 있었다. “신고합니다! 일병 이복순 명받아서 왔습니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저런 꼬마한테 뭘 시키나”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방의 ‘꼬마병정’인사과 사병계에 투입됐다. 9사단 29연대 병력 현황 파악이 임무였다. 병사 이름과 군번, 주소 등 신상정보를 연일 기록했다. 전방에 배치된 여군들에겐 주로 행정지원 임무가 주어졌다.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여군이 많았다. 후퇴와 전진은 수없이 반복됐다. 한밤중 비상 나팔 소리가 들리면 군장을 챙겨 재빨리 트럭을 탔다. 전장에서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나를 사람들은 지프차라 불렀다. 꼬마병정도 내 별명이었다. 중공군이 진격해 올 때면 꽹과리 소리와 나각(螺角) 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들리면 ‘오늘 많이 죽겠구나’ 생각했다. 2월 중순 어느 밤에도 비상 나팔이 울었다. 인사과장은 내게 소총과 수류탄, 라이터를 줬다. 눈밭 가운데 서류 무더기가 있었다. 아군 정보가 담긴 기밀 자료였다. 그는 “한 장도 뺏겨선 안 된다”고 했다. 나와 문관 2명을 제외한 이들은 중공군 진격로를 차단한다며 급히 떠났다. ‘적군이 오면 서류를 태울 것, 수류탄과 총으로 대응할 것.’ 내 임무였다. “끝까지 사수하겠습니다.” 자신 있게 말했지만 총을 만져본 건 처음이었다. 눈 속에서 기약 없이 서 있었다. 문관들은 줄담배를 피웠다. 하얗게 위장한 중공군이 기습해오는 것만 같았다. ‘내가 죽으면 부모님이 얼마나 슬퍼할까.’ 전사할 각오를 다지는데 눈물이 났다. 그사이 동이 텄다. 해가 중천에 떠올랐고, 날이 저물었다. 내내 초긴장 상태였다. 밤이 돼서야 트럭이 왔다. 짐칸에 올라 후퇴하는데 옆 사람들 온기에 언 몸이 풀렸다. 졸음이 몰려왔다. 순간 ‘꽝’ 하는 소리가 났다. 몸이 붕 떠올랐다. 차 사고였다. 척추부터 꼬리뼈까지 부상을 입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작은 지옥’ 앰뷸런스빈 농가에서 진통제를 먹으며 버텼다. 며칠이 지나자 앰뷸런스가 왔다. 전방 곳곳에서 태워 온 부상병이 가득했다. 모두 피투성이였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차는 쉴 새 없이 덜컹거렸다. 그럴 때마다 다친 부위에 고통이 밀려왔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나와 영양실조에 걸린 동기는 10분도 지나지 않아 하차했다. 부대로 돌아갔다. “소총부대에 보내주십시오. 앰뷸런스 타고 가다 죽느니 적 한 명이라도 죽이고 전사하겠습니다.” 서러워 악을 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업무에 복귀했다. 앉을 수가 없어 서서 상반신을 엎드린 채 병력 신상 기록 업무를 했다. 4월에 있을 전군 현황 각개점호에 대비해야 했다. 부대는 삼척, 강릉 등 강원도 곳곳으로 이동했다. 5월엔 특별 휴가를 갔다. 부상한 몸으로 각개점호 임무를 끝낸 것에 대한 포상이었다. 휴가를 다 채우진 못했다. 현리전투(1951년 5월 16∼22일)가 벌어졌다. 3사단과 9사단, 7사단 병력이 후퇴 중 대거 전사했다는 소식이 수원까지 들려왔다. 동기들은 무사할까. 휴가가 남았지만 서둘러 짐을 꾸렸다. 9사단 여자 동기들은 입술이 다 터지고 얼굴이 새까맣게 됐다. 3사단 여자의용군 1명이 전사하고 3명이 실종됐다고 했다. 그런 난리 통에 휴가 간 것이 미안해 챙겨간 빨랫비누로 동기들 군복을 빨고 또 빨았다. 여군 전사 소식은 이승만 대통령에게까지 전해졌다. 여군까지 죽게 하느냐는 질책과 여론의 비난이 있었다. 여군은 8월쯤 후방으로 철수했다. 총 한번 쏴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흩어졌던 동기들은 부산 훈련소에서 재회했다. “살아서 다행”이라며 부둥켜안았다.○ 백발의 무명초들1955년 이등상사(중사)로 전역했다. 2남 1녀를 낳아 키웠다. 평범한 주부로 긴 세월을 살았다.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포로로 잡혀와 나를 노려보며 “미제의 앞잡이”라고 욕을 퍼붓던 북한 여군의 눈빛도, 얼어붙은 개울물을 돌멩이로 깨 세수할 때 살을 에던 느낌도. 사람들은 모른다. 그 시절 국난을 지켜만 볼 수 없어 여자도 군대에 갔다는 사실을. 힘을 보태려 애썼다는 사실을 말이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버거웠던 그때 나를 위해 눈 속을 걸어 군의관을 불러준 동기들은 아직 살아 있을까. 그들도 다리가 아파 앉을 자리만 찾는 나 같은 노인이 됐을까. 돌이켜보면 우리는 참 소녀 같았다. 서로 쳐다만 봐도 웃음이 새어나왔던 소녀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군가를 불렀다. 여생에 바라는 건 없다. 다만 그때 나라를 지키려 나선 무명초 같은 여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알아준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 10년 후엔 여자의용군에 대해 증언할 사람이 없을 텐데…. 그것이 못내 걱정이다.▼ 의용군 970명… 6·25 참전 여군 1700명 넘어 ▼6·25전쟁 당시 참전 여군은 육군 여자의용군 970명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1751명이다. 현지 입대 등으로 명단이 확보되지 않은 인원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 8월부터 육군 여자의용군 1기 모병이 시작됐다. 1기는 대구와 부산 지역에 한해 모집했다. 500명 선발에 2000여 명이 지원했다. 합격자 대부분이 교사, 중학교 이상 졸업자, 대학생이었다. 2기는 9월부터 전국에서 모집했으며 400명 가까이 선발됐다. 전쟁 기간 3, 4기까지 뽑았는데 1, 2기가 주로 참전 활동을 했다. 이들은 행정지원, 첩보, 정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여자 해병 75명, 항공병 26명, 간호장교 664명도 참전했다. 일부 여성은 유격대원, 예술대원 등으로 군번도 없이 참전했는데 확인된 인원만 600여 명이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6·25전쟁에는 여군도 참전했다. 국난을 방관할 수 없다며 자진 입대한 이들이었다. 여자의용군 이복순 씨(87)는 당시 전방에서 활약했다. 그와의 인터뷰를 1인칭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사람들은 농담인 줄 안다. 내 말을 한 번에 믿는 이는 거의 없다. 나는 여든일곱 할머니다. 동네 어귀 의자에 앉아 볕을 쬐는, 어느 동네에나 있는 백발노인이다. 젊은 시절에 잰 키는 148cm였다. 나이가 들고 몸이 위축되면서 이마저도 더 작아졌을 것이다. 동네 지하철역까지는 걸어서 50분이 걸린다. 남들은 10분이면 가는 거리다. 척추부터 고관절까지 성한 곳이 없다. 열여덟 살에 당한 사고 후유증이 평생 나를 따라다녔다. 지팡이에 의지해 한 걸음씩 옮기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나는 6·25 참전용사다. 70년 전 육군 여자의용군에 자원입대한 군인이었다. 강원 정선의 끝없이 펼쳐진 눈밭 한가운데 소총을 매고 서서 눈물을 훔치던 소녀 병사였다. 해마다 눈 쌓인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시절이 오롯이 떠오른다.● 군인이 된 17세 소녀실눈을 뜬 채 수원시청 벽을 봤다. 똑바로 볼 용기가 없었다. 3일 전 시험장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면접관들은 내게 “키가 정말 작다”고 하더니 “이 논술 답안 정말 네가 쓴 거냐”라고 여러 번 물었다. ‘이렇게 작은데 뽑아줄 리가….’ 합격자 명단 벽보를 훑어 내려갔다. ‘106번 이복순’ 1950년 11월, 나는 육군 여자의용군 2기 시험에 합격했다. 열일곱 살이던 나는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불합격자들은 주저앉아 고무신으로 바닥을 치며 울었다.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는 이도 있었다. 지원자 중엔 인민군이나 그 편에 선 주민들에게 남편이나 아버지 등 가족을 잃은 이들이 다수 있었다. “총 들고 싸우겠다. 원수를 갚게 해 달라.”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통곡이 이어졌다. 개전 이후부터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수원도립병원 조제실에 몸을 숨긴 채 일했다. 인민군 편에 서라는 위협을 받고서였다. 병원 영안실엔 인민군 편 사람들 손에 죽은 주민 시신이 밀려들었다. 분노가 일었다. 그즈음 여자의용군 모집 소식을 들었다. 11월 말 어머니가 만들어 준 코트와 솜바지를 챙겨 입었다. 김소월 등 시집 3권을 품속에 챙겼다. 짐은 그게 다였다. 수원지역 합격자 50명은 트럭 2대의 짐칸에 나눠 탔다. 훈련소인 서울 일신국민학교로 향했다. 일찍 찾아온 혹한의 칼바람이 온몸에 파고들었다.● “이슬같이 죽겠노라”12월 1일 훈련이 시작됐다. 수도가 얼어 쌓인 눈을 얼굴에 비벼가며 세수를 했다. 새벽 6시부터 남산을 달렸다. 나는 사람 한 명이 더 들어갈 정도로 큰 남자 군복을 입고 뛰었다. 맹추위를 떨치려 목청 터져라 군가를 불렀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총이 없어서 나무 작대기로 훈련했다. 수류탄은 돌멩이로 대신했다. 제식훈련, 각개전투 등 훈련이 계속됐다. 늘 배가 고팠다. 나는 키가 큰 순으로 서는 대열 맨 뒤에 섰다. “니들 배 안 고파?” 여고생들처럼 소곤거렸다. 3주로 예정됐던 훈련은 12월 17일 일찍 마무리됐다. 중공군이 남진해오고 있어서였다. 훈련소는 부산으로 피란했다. 전황이 긴박해지자 전방에도 여군 일부를 배치한다는 결정이 났다. “일선(전방) 갈 사람?”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이듬해 1월 12일 여자의용군 1, 2기 중 130명이 전방의 3개 군단과 10개 사단에 배치됐다. 나는 1월 말 9사단에 합류했다. 훈련소 짐을 옮기다 늑골이 골절된 탓에 출발이 늦어졌다. 동기들은 “그 몸으로 어딜 가느냐”며 말렸다. 나는 “어차피 죽으려고 군대 온 것 아니냐”며 고집을 부렸다. 정선까지 가는 지프차는 눈길 위에서 연신 휘청휘청했다. 어린 시절을 따뜻한 일본 오사카에서 보낸 나는 그렇게 많은 눈이 쌓인 풍경을 처음 봤다. 눈 구경에 정신이 팔렸다. 끝없이 이어지는 하얀 눈밭을 보고 있자니 눈이 시렸다. 날이 어둑해져서야 사단본부에 도착했다. 무릎 높이만큼 쌓인 눈밭에 천막이 있었다. “신고합니다! 일병 이복순 명받아서 왔습니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저런 꼬마한테 뭘 시키나”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방의 ‘꼬마병정’ 인사과 사병계에 투입됐다. 9사단 29연대 병력 현황 파악이 임무였다. 병사 이름과 군번, 계급, 주소 등 신상정보를 연일 기록했다. 총 들고 싸우러 가는 줄로만 알았던 나는 조금 섭섭했다. 전방에 배치된 여군들에겐 주로 행정지원 임무가 주어졌다.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여군이 많았다. 후퇴와 전진은 수없이 반복했다. 한밤중 비상나팔 소리가 들리면 군장을 챙겨 재빨리 트럭을 탔다. 전장에서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나를 사람들은 지프차라 불렀다. 꼬마병정도 내 별명이었다. 중공군이 대거 진격해올 때면 꽹과리 소리와 나각(螺角) 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들리면 ‘오늘 많이 죽겠구나’ 생각했다. 2월 중순 어느 밤에도 비상나팔이 울었다. 인사과장은 내게 소총과 수류탄, 라이터를 줬다. 눈밭 가운데 서류 무더기가 있었다. 아군 정보가 담긴 기밀 자료였다. 그는 “한 장도 뺏겨선 안 된다”고 했다. 나와 문관 2명을 제외한 이들은 중공군 진격로를 차단한다며 급히 떠났다. ‘적군이 오면 서류를 태울 것, 수류탄과 총으로 대응할 것.’ 내 임무였다. “끝까지 사수하겠습니다.” 자신 있게 말했지만 총을 만져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눈 속에서 기약 없이 서있었다. 문관들은 줄담배를 피웠다. 하얗게 위장한 중공군이 기습해오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내가 전사하는 날이다. 내가 죽으면 부모님이 얼마나 슬퍼할까.’ 전사할 각오를 다지는데 눈물이 계속 났다. 무엇보다 포로로 잡히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그사이 동이 텄다. 해가 중천에 떠올랐고, 날이 저물었다. 내내 초긴장 상태였다. 밤이 돼서야 트럭이 왔다. 중공군 차단에 실패했다고 했다. 짐칸에 올라 후퇴하는데 옆 사람들 온기에 언 몸이 풀렸다. 졸음이 몰려왔다. 순간 ‘꽝’하는 소리가 났다. 몸이 붕 떠올랐다. 차 사고였다. 척추부터 꼬리뼈까지 부상을 입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작은 지옥’ 앰뷸런스 빈 농가에서 진통제를 먹으며 버텼다. 며칠이 지나자 앰뷸런스가 왔다. 전방 곳곳에서 태워온 부상병이 가득했다. 모두 피투성이였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차는 쉴 새 없이 덜컹거렸다. 그럴 때마다 다친 부위에 고통이 밀려왔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나와 영양실조에 걸린 동기는 10분도 지나지 않아 하차했다. 부대로 돌아갔다 “소총부대에 보내주십시오. 앰뷸런스 타고 가다 죽느니 적 한 명이라도 죽이고 전사하겠습니다.” 서러워 악을 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업무에 복귀했다. 앉을 수가 없어 서서 상반신을 엎드린 채 병력 신상 기록 업무를 했다. 4월에 있을 전군 현황 각개점호에 대비해야 했다. 부대는 삼척, 강릉 등 강원도 곳곳으로 이동했다. 5월엔 특별 휴가를 갔다. 부상한 몸으로 각개점호 임무를 끝낸 것에 대한 포상이었다. 휴가를 다 채우진 못했다. 휴가 간 사이 현리전투(1951년 5월 16~22일)가 벌어졌다. 3사단과 9사단, 7시단 병력이 후퇴 중 대거 전사했다는 소식이 수원까지 들려왔다. 동기들은 무사할까. 휴가가 남았지만 서둘러 짐을 꾸렸다. 9사단 여자 동기들은 입술이 다 터지고 얼굴이 새까맣게 됐다. 3사단 여자의용군 1명이 전사하고 3명이 실종됐다고 했다. 그런 난리 통에 휴가 간 것이 미안해 챙겨간 빨래비누로 동기들 군복을 빨고 또 빨았다. 여군 전사 소식은 이승만 대통령에게까지 전해졌다. 여군까지 죽게 하느냐는 질책과 여론의 비난이 있었다. 여군은 8월쯤 후방으로 철수했다. 총 한 번 쏴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흩어졌던 동기들은 부산 훈련소에서 재회했다. “살아서 다행”이라며 부둥켜안았다.● 백발의 무명초들육군본부에서 근무하다 1955년 이등상사(중사)로 전역했다. 결혼을 앞두고서였다. 동기들은 울며 나를 보냈다. 2남 1녀를 낳아 키웠다. 평범한 주부로 긴 세월을 살았다.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포로로 잡혀와 나를 노려보며 “미제의 앞잡이”라고 욕을 퍼붓던 북한 여군의 눈빛도, 얼어붙은 개울물을 돌멩이로 깨 세수할 때 살을 에던 느낌도. 사람들은 모른다. 그 시절 국난을 지켜만 볼 수 없어 여자도 군대에 갔다는 사실을. 힘을 보태려 애썼다는 사실을 말이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버거웠던 그때 나를 위해 눈 속을 걸어 군의관을 불러준 동기들은 아직 살아있을까. 그들도 다리가 아파 앉을 자리만 찾는 나 같은 노인이 됐을까. 돌이켜보면 우리는 참 소녀 같았다. 서로 쳐다만 봐도 웃음이 새어나왔던 소녀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군가를 불렀다. 여생에 바라는 건 없다. 다만 그때 나라를 지키려 나선 무명초 같은 여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알아준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 10년 후엔 여자의용군에 대해 증언할 사람이 없을 텐데…. 그것이 못내 걱정이다.의용군 970명…6·25 참전 여군 1700명 넘어6·25전쟁 당시 참전 여군은 육군 여자의용군 970명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1751명이다. 현지 입대 등으로 명단이 확보되지 않은 인원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1950년 8월부터 육군 여자의용군 1기 모병이 시작됐다. 1기는 대구와 부산 지역에 한해 모집했다. 500명 선발에 2000여 명이 지원했다. 합격자 대부분이 교사, 중학교 이상 졸업자, 대학생이었다. 2기는 9월부터 전국에서 모집했으며 400명 가까이 선발됐다. 전쟁 기간 3, 4기까지 뽑았는데 1, 2기가 주로 참전 활동을 했다. 이들은 행정지원, 첩보, 정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여자 해병 75명, 항공병 26명, 간호장교 664명도 참전했다. 일부 여성은 유격대원, 예술대원 등으로 군번도 없이 참전했는데 확인된 인원만 600여 명이다.손효주기자 hjson@donga.com}

#1. 가정 간편식 레시피와 브랜드를 개발하는 스타트업 ‘오픈더테이블’이 최근까지 유치한 누적 투자금은 약 40억 원. 2017년 말 창업 이후 3년도 되지 않아 거둔 성과다. 오픈더테이블은 대형 유통업체 등으로부터도 투자를 받았다. 이 회사는 자체 개발한 레시피로 만든 간편식 제품으로 미국, 중국 시장에 진출할 계획도 세웠다.#2. 드론으로 건설 현장을 모니터링하는 드론 플랫폼 스타트업 ‘엔젤스윙’은 최근 국내 대형 건설사에서 투자받을 때 약 350억 원의 기업가치를 평가받았다. 약 2년 만에 기업가치가 10배 넘게 증가했다. 건설사들이 경쟁적으로 스마트 기술을 도입하는 추세여서 이 회사 가치가 더 오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시장의 평가다. 급성장세를 보이는 두 스타트업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기업 설립 초창기 유치한 투자금이 성장의 마중물이 됐다는 것. 이 회사의 경영 역량, 후속 투자 유치 가능성 등을 종합 평가해 투자를 결정한 회사는 서울대기술지주회사다. 서울대기술지주회사는 편드를 조성해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 2017년 1호 펀드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조성해 투자를 진행 중인 펀드만 4개다. 운용 규모는 약 400억 원(누적 기준). 투자한 스타트업은 30개 이상이다. 100억 원 규모의 5호 펀드도 조성 중이다. 2008년 설립한 서울대기술지주회사는 이름 그대로 기술지주회사 역할에 주력해왔다. 서울대가 보유한 학내 기술 및 특허 중 사업화가 가능한 기술과 특허를 출자해 기업을 설립하고, 이 기업 지분을 20% 이상 보유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했다. 이런 방식으로 설립된 서울대기술지주회사 자회사는 지난해 기준 27개. 약콩두유로 널리 알려진 ‘밥스누’가 대표적이다. 서울대기술지주회사가 기존 대학 기술지주회사의 틀을 넘어 펀드 조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한 건 2017년부터다. 이를 주도한 건 2017년 초 투자전략팀 팀장으로 입사한 목승환 서울대기술지주회사 대표대행(42)이다. 3월 전 대표의 임기 만료로 대행을 맡고 있다. 그는 서울대 재료공학부 재학 당시 스타트업을 창업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2009∼2016년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개발·서비스 기업 ‘나무앤’을 경영했다. 대기업 신사업 태스크포스(TF) 팀장, 초창기 기업 전문 투자사 이사 등을 지낸 다양한 이력도 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초기 투자금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스타트업의 마중물은 무엇보다 현금 투자’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가 조성한 1호 펀드는 정부가 출자한 모태펀드 비중이 50% 안팎, 서울대기술지주회사 자금이 30%였다. 나머지는 서울대 동문 개인의 출자금이다. 약 60억 원 규모로 ‘오픈더테이블’ 등 15개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2호부터는 민간 기업이 참여했다. 4호 펀드엔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 같은 대기업 계열 금융사와 은행권청년창업재단 디캠프도 출자했다. 1일 만난 목 대표대행은 “처음엔 서울대기술지주회사의 펀드 운용 능력에 의구심을 갖던 민간 투자자 및 기업들이 펀드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들의 성장세를 보면서 투자 역량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서울대기술지주회사 펀드의 특징은 기존 벤처투자사 펀드와 달리 민간 기업 출자 비중이 20% 안팎에 그친다는 것. 그는 “코로나19 사태로 경제가 위축되는 상황에서 일반 펀드는 출자사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며 “우리는 자금의 약 80%를 정부 및 서울대에서 조달하는 만큼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에 뚝심 있게 투자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달 30건 이상의 사업계획서를 검토하고 있는 목 대표대행의 목표는 ‘1·10·100’이다. 5년 내에 펀드 총 운용자산 규모를 1조 원대로 만들고, 10년 내에 투자 기업 중 10곳을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 원 이상 비상장기업)으로 육성하는 것. 또 서울대기술지주회사가 투자한 금액 대비 100배 이상의 수익률을 거둔 회사를 10년 내에 탄생시키는 것이다. ‘대학도 투자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다. 목 대표대행은 “향후엔 서울대기술지주회사 자회사에도 펀드로 조성된 현금을 투자할 것”이라며 “투자금이 회수되면 대학의 연구와 교육에 더 많은 돈이 투자되는 선순환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대학이 앞장서 건전한 창업 생태계 조성에 힘쓰고 있는 셈”이라고 강조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93·예비역 대장)은 6·25전쟁 당시 한국군 최초로 100차례 이상 전투기 출격을 한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러나 100회 출격을 한 영광의 그날이 그에겐 전쟁 중 가장 착잡했던 날이기도 했다. 그가 겪은 6·25와 소회를 1인칭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3시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나는 급한 대로 여의도 논둑에 몸을 숨겼다. ‘저거 다 부서지면 큰일인데. 한 번 타보지도 못했는데….’ 애태우며 지켜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정오였다. 북한군 야크 전투기 대여섯 대가 여의도 공군기지 상공에 나타났다. 곧장 격납고(항공기 보관·정비 시설)에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격납고는 벌집이 됐다. 격납고엔 T-6 10대가 있었다. T-6는 그해 5월 초까지 캐나다에서 들여온 ‘건국기’였다. 비무장 정찰기밖에 없던 공군을 위해 국민 성금 3억5000만 원을 모아 마련한 훈련기였다. 6월 25일까지도 공군엔 전투기가 없었다. T-6는 그나마 전투기 대신 투입해볼 만한 유일한 기종이었다. 나는 T-6 탈 날만 고대하던 스물세 살 중위였다. 종이연 수준의 L-5, L-4 정찰기만 조종하던 내게 T-6는 꿈의 항공기였다. 그 귀한 항공기가 눈앞에서 고철이 될 위기였다.○ 200대 vs 0대 25일 아침 서울은 평온했다. 장승백이 하숙집에서 느지막이 일어난 나는 오전 9시쯤 동기 전봉희 중위와 함께 노면 전차를 탔다. 극장에 가던 길이었다. 한강인도교에 들어서던 찰나 비행기 굉음이 전차를 뒤덮었다. 당시 공군 항공기는 L-4, L-5 정찰기 12대와 T-6 10대가 전부였다. 하늘에 낯선 항공기 2대가 보였다. “이야, 저 비행기는 뭐지?” 얼마 전 영국 항공모함이 인천항에 입항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건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때 사이렌이 울렸다. 헌병 차량이 질주해왔다. “국군 장병은 즉시 부대로 귀환하라.” 안내방송이 반복됐다. 항공기 정체는 북한군 전투기였다. 공군 조종사임에도 북한군 전투기를 몰라볼 만큼 우리는 전투기에 대해 무지했다. 이튿날 등장한 미군 F-80 전투기 연료 탱크를 보고는 비밀 무기라고 여길 정도였다. 북한은 소련에서 지원받은 전투기와 지상공격기를 200대 가까이 확보해놓고 있었다. ‘전투기 한 대 없이 어떻게 싸우나….’ 군용 차량을 타고 여의도로 가는 길. 막막함이 밀려왔다.○ 전투기 없는 맨손 전투그날 저녁 L-5를 타고 문산(경기 파주시) 상공에서 내려다본 전황은 서글펐다. 북쪽에선 소련제 155mm 포가 남쪽을 향해 무더기로 불을 내뿜고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날아가는 포탄은 없었다. 군인 한 명이 105mm 포를 끌고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이 정도 열세면 나는 정찰기만 타다가 죽겠구나.’ 죽을 운명이라면 T-6 훈련기를 타다가 죽고 싶었다. 그래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26일 밤 기회가 왔다.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이 “T-6 탈 자신 있나”라고 물었다. T-6를 타던 선배들은 미군 F-51D 전투기를 긴급 지원받기 위해 그날 일본으로 갔다. 그 덕에 온 기회였다. 다행히 격납고에 있던 T-6 중 9대는 북한군의 집중 포화가 비켜가 멀쩡했다. 나는 기대에 부풀었다. 27일 동이 트기도 전에 여의도기지로 달려갔다. 아무리 조종이 쉬운 기종이라도 기종 전환 훈련에는 2, 3개월이 걸린다. 나는 교관도 없이 1시간가량 비행한 뒤 T-6로 전환했다. 전시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곧바로 문산 철교 폭파 작전에 투입됐다. 단번에 끝장내겠다는 패기와 달리 철교 인근 상공에서 구름에 갇혀버렸다. 구름 속에선 계기(計器)비행(계기에 의존해 고도 등을 측정해 비행하는 것)을 해야 하지만, 나는 계기비행 훈련을 못 받은 상태였다. 기체가 뒤집혔다. 추락하던 비행기는 지표면을 40m 남겨두고서야 수평을 되찾았다. 후방석 정비사가 “하나님이 우리를 살렸다”고 중얼거렸다. 그는 얼이 빠져 있었다. 그날 공군은 후방석 탑승자가 폭탄을 안고 있다가 100여 m 초저고도에서 맨손으로 투하해 가며 싸웠다. 폭탄걸이가 있는 건 항공기 22대 중 2대가 다였다. 경기 의정부, 서울 미아리고개 등 북한군이 내려오는 전선 곳곳에서 소형 폭탄 270발을 거의 다 썼다. 공군이 보유한 폭탄 전부였다. 북한군 전차 대열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역대 최강의 소련제 T-34 전차 240여 대에 장갑차까지 앞세우고 내려오는 북한군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 고민했다. ○ 운 좋은 사람27일 저녁 서울이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공군은 수원으로 철수했다. 나는 이후 대전 등으로 기지를 옮기며 출격을 거듭했다. 수차례 죽을 위기를 겪었다. 7월 6일 T-6를 타고 평택에 갔다가 시커멓고 긴 행렬을 발견했다. T-34 전차였다. 모두 몇 대인지 확인하는 순간 전차포 수십 발이 날아들었다. 7월 9일엔 충북 음성의 북한군 포진지에 집결해있던 트럭을 목표로 폭격에 나섰다. 폭격 결과를 확인하려는데 ‘꽝’ 하는 소리가 났다. 가까스로 빠져나와 보니 조종석과 날개를 잇는 부분에 대공포 탄흔이 선명했다. 간발의 차이로 조종석을 비켜갔다. 전쟁 기간 “나는 참 운이 좋다”고 여러 번 생각했다. 전쟁은 계속됐고 불안감을 호소하는 조종사는 늘었다. 6월 30일 조명석 대위(추서 계급)를 시작으로 공군이 연이어 전사했다. 조종사들은 공포심을 잊으려 출격 전날 밤에도 술을 마셨다. 1951년 5월엔 조종사 한 명이 여의도기지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1950년 7월 도입된 F-51D 전투기를 타고 몇 차례 출격했던 그는 “내가 죽으면 애랑 마누라는 어떡하나” 하며 울었다. 우리를 교육하고 함께 출격하던 딘 헤스 미 공군 중령이 위스키를 따라주며 그를 달랬다. 통곡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 최초 100회 출격의 슬픔개전 후 1년 반 가까이 나는 이상하리만큼 무덤덤했다. 두려움과 공포는 남의 일이라 여겼다. 그런 내게도 죽음의 충격이 찾아왔다. 1952년 1월 9일이었다. 그날 F-51D 3대로 편대를 이뤄 출격했다. 1950년 10월부터는 나도 F-51D를 탔다. 강원 원산 철도 조차장, 금강산 부근 창도리 일대 북한군 보급기지를 폭격하는 것이 임무였다. 문제는 창도리에서 발생했다. 나와 다른 조종사가 1, 2차 폭격을 한 뒤 후배 이일영 중위(추서 계급)가 폭격하는데 대공포탄이 날아들었다. 이 중위 전투기가 땅에 내리꽂혔다.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저공비행을 하며 그를 찾아 헤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금강산에서 강릉기지로 돌아오는 50분 동안 나는 백지상태였다. 본능적으로 조종했을 뿐 정신이 나가 있었다. 비행할 때면 늘 후련했던 하늘이 그날은 버거웠다. 그간 동료들의 전사 소식을 들었을 때와는 달랐다. 눈앞에서 동료가 전사한 건 처음이었다. 기지에 돌아와 그의 전사를 보고했다. “뭐 어떻게 하겠나”라는 읊조림이 돌아왔다. 이틀 뒤, 북한군 보급기지를 파괴한 후 강릉기지에 착륙하자 정비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한국군 최초의 전투기 100회 출격 기록을 달성했다고 했다. 정비사들이 몰려와 헹가래를 쳤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일영이 시신을 찾아야 하는데….’ 1952년 1월 13일 평양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에 투입된 것을 끝으로 경남 사천기지로 갔다. 후배 조종사 양성 임무를 부여받고서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됐다. 하늘에 바친 청춘들을 생각하면 나라가 반으로 갈라진 채 휴전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 40년 만의 비행2015년 6월 23일. 원주 공군기지에서 40년 만에 조종복을 입었다. 최초의 국산 전투기 FA-50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국산 전투기를 꼭 한 번 타보고 싶었다. 비록 후방석에 앉았지만 88세이던 나는 20대 조종사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상공에서 본 조국은 아름다웠다. 6·25 때 산야는 헐벗은 황톳빛이었다. 1950년 8, 9월 T-6를 타고 정찰한 낙동강과 인근의 산은 핏빛이었다. 유엔 공군의 공습이 한 차례 끝나면 능선엔 북한군 시체 수백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나라가 초록빛이 돼 있었다. 고속도로까지 뻗어 천지개벽한 모습을 보니 감개무량했다. 올해 1월 9일엔 이일영 중위 추모식에 다녀왔다. 생전에 이 중위가 전사한 곳에 가보고 싶다. 그의 유해를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금강산댐이 생겼다는데 그가 산화한 곳이 수몰되진 않았을까. 일영이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그가 살아 있다면 덕담이나 나누며 함께 늙어갈 텐데. 해마다 6·25가 되면 그 친구 생각이 많이 난다. 6·25 기간 공군 수십 명(조종사 27명 등 84명)이 전사했다. 그들은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젊음을 창공에 묻었다. 그들의 희생이 아직 결실을 맺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다. 여생엔 한반도 평화 정착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해보려 한다. 전쟁은 비참한 일이다. 그런 비참한 일이 후대에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말이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전투기를 타고 하늘을 날고 싶다. 마음으로는 아직도 현역 시절처럼 창공을 가를 수 있을 것만 같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93·예비역 대장)은 6·25전쟁 당시 한국군 최초로 100차례 이상 전투기 출격을 한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러나 100회 출격을 한 영광의 그날이 그에겐 전쟁 중 가장 착잡했던 날이기도 했다. 그가 겪은 6·25와 소회를 1인칭 형식으로 재구성했다.》3시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나는 급한 대로 여의도 논둑에 몸을 숨겼다. ‘저거 다 부서지면 큰일인데. 한 번 타보지도 못했는데….’ 애태우며 지켜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정오였다. 북한군 야크 전투기 대여섯 대가 여의도 공군기지 상공에 나타났다. 곧장 격납고(항공기 보관·정비 시설)에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격납고는 벌집이 됐다. 격납고엔 T-6 10대가 있었다. T-6는 그해 5월 초까지 캐나다에서 들여온 ‘건국기’였다. 비무장 정찰기밖에 없던 공군을 위해 국민 성금 3억5000만 원을 모아 마련한 훈련기였다. 6월 25일까지도 공군엔 전투기가 없었다. T-6는 그나마 전투기 대신 투입해볼 만한 유일한 기종이었다. 나는 T-6 탈 날만 고대하던 스물세 살 중위였다. 종이연 수준의 L-5, L-4 정찰기만 조종하던 내게 T-6는 꿈의 항공기였다. 그 귀한 항공기가 눈앞에서 고철이 될 위기였다.●200대 vs 0대 25일 아침 서울은 평온했다. 장승백이 하숙집에서 느지막이 일어난 나는 오전 9시쯤 동기 전봉희 중위와 함께 노면 전차를 탔다. 극장에 가던 길이었다. 한강인도교에 들어서던 찰나 비행기 굉음이 전차를 뒤덮었다. 당시 공군 항공기는 L-4, L-5 정찰기 12대와 T-6 10대가 전부였다. 하늘에 낯선 항공기 2대가 보였다. “이야, 저 비행기는 뭐지?” 얼마 전 영국 항공모함이 인천항에 입항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건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때 사이렌이 울렸다. 헌병 차량이 질주해왔다. “국군 장병은 즉시 부대로 귀환하라.” 안내방송이 반복됐다. 항공기 정체는 북한군 전투기였다. 공군 조종사임에도 북한군 전투기를 몰라볼 만큼 우리는 전투기에 대해 무지했다. 이튿날 등장한 미군 F-80 전투기 연료 탱크를 보고는 비밀 무기라고 여길 정도였다. 북한은 소련에서 지원받은 전투기와 지상공격기를 200대 가까이 확보해놓고 있었다. ‘전투기 한 대 없이 어떻게 싸우나….’ 군용 차량을 타고 여의도로 가는 길. 막막함이 밀려왔다.●전투기 없는 맨손 전투 그날 저녁 L-5를 타고 문산(경기 파주시) 상공에서 내려다본 전황은 서글펐다. 북쪽에선 소련제 155mm 포가 남쪽을 향해 무더기로 불을 내뿜고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날아가는 포탄은 없었다. 군인 한 명이 105mm 포를 끌고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이 정도 열세면 나는 정찰기만 타다가 죽겠구나.’ 죽을 운명이라면 T-6 훈련기를 타다가 죽고 싶었다. 그래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26일 밤 기회가 왔다.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이 “T-6 탈 자신 있나”라고 물었다. T-6를 타던 선배들은 미군 F-51D 전투기를 긴급 지원받기 위해 그날 일본으로 갔다. 그 덕에 온 기회였다. 다행히 격납고에 있던 T-6 중 9대는 북한군의 집중 포화가 비켜가 멀쩡했다. 나는 기대에 부풀었다. 27일 동이 트기도 전에 여의도기지로 달려갔다. 아무리 조종이 쉬운 기종이라도 기종 전환 훈련에는 2, 3개월이 걸린다. 나는 교관도 없이 1시간가량 비행한 뒤 T-6로 전환했다. 전시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곧바로 문산 철교 폭파 작전에 투입됐다. 단번에 끝장내겠다는 패기와 달리 철교 인근 상공에서 구름에 갇혀버렸다. 구름 속에선 계기(計器)비행(계기에 의존해 고도 등을 측정해 비행하는 것)을 해야 하지만, 나는 계기비행 훈련을 못 받은 상태였다. 기체가 뒤집혔다. 추락하던 비행기는 지표면을 40m 남겨두고서야 수평을 되찾았다. 후방석 정비사가 “하나님이 우리를 살렸다”고 중얼거렸다. 그는 얼이 빠져 있었다. 그날 공군은 후방석 탑승자가 폭탄을 안고 있다가 100여 m 초저고도에서 맨손으로 투하해가며 싸웠다. 폭탄걸이가 있는 건 항공기 22대 중 2대가 다였다. 경기 의정부, 서울 미아리고개 등 북한군이 내려오는 전선 곳곳에서 소형 폭탄 270발을 거의 다 썼다. 공군이 보유한 폭탄 전부였다. 북한군 전차 대열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역대 최강의 소련제 T-34 전차 240여 대에 장갑차까지 앞세우고 내려오는 북한군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 고민했다.●운 좋은 사람 27일 저녁 서울이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공군은 수원으로 철수했다. 나는 이후 대전 등으로 기지를 옮기며 출격을 거듭했다. 수차례 죽을 위기를 겪었다. 7월 6일 T-6를 타고 평택에 갔다가 시커멓고 긴 행렬을 발견했다. T-34 전차였다. 모두 몇 대인지 확인하는 순간 전차포 수십 발이 날아들었다. 7월 9일엔 충북 음성의 북한군 포진지에 집결해있던 트럭을 목표로 폭격에 나섰다. 폭격 결과를 확인하려는데 ‘꽝’ 하는 소리가 났다. 가까스로 빠져나와 보니 조종석과 날개를 잇는 부분에 대공포 탄흔이 선명했다. 간발의 차이로 조종석을 비켜갔다. 전쟁 기간 “나는 참 운이 좋다”고 여러 번 생각했다. 전쟁은 계속됐고 불안감을 호소하는 조종사는 늘었다. 6월 30일 조명석 대위(추서 계급)를 시작으로 공군이 연이어 전사했다. 조종사들은 공포심을 잊으려 출격 전날 밤에도 술을 마셨다. 1951년 5월엔 조종사 한 명이 여의도기지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1950년 7월 도입된 F-51D 전투기를 타고 몇 차례 출격했던 그는 “내가 죽으면 애랑 마누라는 어떡하나” 하며 울었다. 우리를 교육하고 함께 출격하던 딘 헤스 미 공군 중령이 위스키를 따라주며 그를 달랬다. 통곡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최초 100회 출격의 슬픔 개전 후 1년 반 가까이 나는 이상하리만큼 무덤덤했다. 두려움과 공포는 남의 일이라 여겼다. 그런 내게도 죽음의 충격이 찾아왔다. 1952년 1월 9일이었다. 그날 F-51D 3대로 편대를 이뤄 출격했다. 1950년 10월부터는 나도 F-51D를 탔다. 강원 원산 철도 조차장, 금강산 부근 창도리 일대 북한군 보급기지를 폭격하는 것이 임무였다. 문제는 창도리에서 발생했다. 나와 다른 조종사가 1, 2차 폭격을 한 뒤 후배 이일영 중위(추서 계급)가 폭격하는데 대공포탄이 날아들었다. 이 중위 전투기가 땅에 내리꽂혔다.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저공비행을 하며 그를 찾아 헤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금강산에서 강릉기지로 돌아오는 50분 동안 나는 백지상태였다. 본능적으로 조종했을 뿐 정신이 나가 있었다. 비행할 때면 늘 후련했던 하늘이 그날은 버거웠다. 그간 동료들의 전사 소식을 들었을 때와는 달랐다. 눈앞에서 동료가 전사한 건 처음이었다. 기지에 돌아와 그의 전사를 보고했다. “뭐 어떻게 하겠나”라는 읊조림이 돌아왔다. 이틀 뒤, 북한군 보급기지를 파괴한 후 강릉기지에 착륙하자 정비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한국군 최초의 전투기 100회 출격 기록을 달성했다고 했다. 정비사들이 몰려와 헹가래를 쳤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일영이 시신을 찾아야 하는데….’ 1952년 1월 13일 평양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에 투입된 것을 끝으로 경남 사천기지로 갔다. 후배 조종사 양성 임무를 부여받고서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됐다. 하늘에 바친 청춘들을 생각하면 나라가 반으로 갈라진 채 휴전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40년 만의 비행 2015년 6월 23일. 원주 공군기지에서 40년 만에 조종복을 입었다. 최초의 국산 전투기 FA-50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국산 전투기를 꼭 한 번 타보고 싶었다. 비록 후방석에 앉았지만 88세이던 나는 20대 조종사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상공에서 본 조국은 아름다웠다. 6·25 때 산야는 헐벗은 황톳빛이었다. 1950년 8, 9월 T-6를 타고 정찰한 낙동강과 인근의 산은 핏빛이었다. 유엔 공군의 공습이 한 차례 끝나면 능선엔 북한군 시체 수백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나라가 초록빛이 돼 있었다. 고속도로까지 뻗어 천지개벽한 모습을 보자니 감개무량했다. 올해 1월 9일엔 이일영 중위 추모식에 다녀왔다. 생전에 이 중위가 전사한 곳에 가보고 싶다. 그의 유해를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금강산댐이 생겼다는데 그가 산화한 곳이 수몰되진 않았을까. 일영이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그가 살아 있다면 덕담이나 나누며 함께 늙어갈 텐데. 해마다 6·25가 되면 그 친구 생각이 많이 난다. 6·25 기간 공군 수십 명(조종사 27명 등 84명)이 전사했다. 그들은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젊음을 창공에 묻었다. 그들의 희생이 아직 결실을 맺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다. 여생엔 한반도 평화 정착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해보려 한다. 전쟁은 비참한 일이다. 그런 비참한 일이 후대에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말이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전투기를 타고 하늘을 날고 싶다. 마음으로는 아직도 현역 시절처럼 창공을 가를 수 있을 것만 같다.손효주기자 hjson@donga.com}

파리바게뜨는 식빵 본연의 맛에 집중한 프리미엄 식빵 ‘상미종 생(生)식빵’을 선보였다. ‘상미종’은 SPC식품생명공학연구소가 서울대, 충북대와 함께 15년간 토종 유산균과 토종 효모의 혼합 발효에 관한 연구를 지속해 지난해 개발에 성공한 발효종이다. SPC그룹 모태가 된 제과점인 ‘상미당(賞美堂)’에 ‘차원이 다른 건강한 맛’이라는 뜻을 더해 ‘상미종’으로 명명했다. 상미종 생(生)식빵은 다른 식빵에 비해 첫 식감이 훨씬 쫄깃쫄깃하다. 입안에서는 부드럽게 풀어지는 등 갓 지은 밥 같은 식감을 자랑한다. 식빵 크러스트(빵의 겉면)도 얇아 가장자리 마지막 한 입까지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수 공법을 이용해 반죽을 긴 시간 발효하고 숙성해 매일 먹어도 속이 편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꿀, 버터, 생크림을 넣어 씹을수록 배어 나오는 은은한 맛도 특징. 그대로 먹었을 때도 맛있지만 생크림, 아몬드스프레드, 각종 잼 등을 곁들이면 다채로운 맛을 즐길 수 있다. 파리바게뜨 관계자는 “상미종 생(生)식빵은 식빵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할 것”이라며 “파리바게뜨는 지속적인 연구개발(R&D) 투자를 통해 차원이 다른 베이커리 식문화를 제공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8만9600명. 정부에 등록된 6·25전쟁 참전 유공자 중 지난해 12월 현재 살아있는 이들이다. 2010년 12월까지만 해도 생존자 수는 18만6315명이었지만 9년 사이에 10만 명 가까이 줄었다. 6·25 참전 유공자의 평균 연령은 우리 나이로 90세다. 동아일보는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와 공동으로 6·25 참전용사들이 직접 전쟁의 참상과 후대에 남기고 싶은 말을 전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취재진이 만난 참전용사들이 들려준 각자의 전쟁 이야기는 6·25 전쟁사의 숨겨진 퍼즐이었다. 소총수로 참전했던 이근엽 전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90)는 이등중사(현재의 병장) 시절인 1953년 6월 화랑무공훈장이 나왔지만, 이를 모르고 있다가 지난해에야 수훈한 잊혀진 영웅이었다. 이 전 교수와의 인터뷰를 1인칭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몸소 겪은 날것의 전쟁 이야기다. 》 지옥에서 빠져나오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침 공기를 실컷 들이마셨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전쟁 없는 공기’였다. 트럭 한 대가 산 중턱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1952년 늦봄이었다. 전쟁통에도 봄은 왔다. 중부전선 오성산(강원 김화군·현재 북한) 고지를 벗어나 서울로 가는 길. 트럭 짐칸에 앉아 둘러본 전쟁 한복판의 봄은 허허벌판이었다. 사람들은 종적을 감췄다. 생명력 잃은 들판이 끝없이 이어졌다. ●‘저들은 저렇게 자유로운데…’ 입대 1년 반 만의 첫 휴가였다. 그간은 여러 번 휴가를 포기했다. 고향이 함경남도 함흥이어서 휴가를 가봐야 갈 곳도, 만날 이도 없어서였다. 당시 중대장 편부만 대위는 그런 나를 안타까워했다. 그는 “우리 집으로 휴가 가면 되지 않느냐”며 등을 떠밀었다. 편 대위 집이 있는 종로로 가는 내내 이른 뙤약볕을 받고 앉아 산야를 구경했다. 어쩌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를 풍경이었다. 서울에서의 2박 3일 휴가 기간 대부분 잠을 잤다. 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이 계속되면서 대규모 전투는 없었지만,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려는 38선 중심의 고지 쟁탈전은 치열했다. 한밤중 계속되는 진지 이동과 전투에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유엔군이 공습을 실시하는 낮을 피해 야간에 집중 공격했다. 한 밤중 소변을 보러 나간 전우는 머리에 조준사격을 받고 죽었다. 비슷한 일이 비일비재했다. 밤은 공포였다. 먹고 자는 것 외에 휴가 중 한 유일한 일은 종로의 극장에 간 것이었다. 점령과 수복, 재점령과 재수복을 겪은 서울은 폐허를 방불케 했지만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극장을 채우고 있었다.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사람 구경을 했다. 영상이 빛을 터뜨리며 관객석을 밝혔다. 그때마다 웃음기 머금은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어쩌다 사람 죽는 곳, 그것도 한복판에 들어가게 됐나. 저들은 저렇게 자유로운데….’ 내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군복을 입고 M1 소총을 세워놓은 채 앉아있던 나는 총구를 이마에 갖다 댔다. ‘여기서 죽을까. 지금 죽지 않으면 다시 지옥에 가야 하는데…. 여기서 죽으나 거기서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다. 방아쇠를 당기자.’ 하지만 끝내 방아쇠를 당기진 못했다. 전장에서 머리가 터지고 팔다리가 잘린 채 죽은 전우를 볼 때면 그 모습이 내 모습처럼 보였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의연하게 죽는 이는 없었다. 현실의 죽음은 비장하지 못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 아이처럼 “엄마” 하고 중얼거리며 죽는 이들을 나는 여러 번 봤다. 광복 이후 내겐 남쪽의 대학에 다니고 영어 공부를 해보자는 구체적인 꿈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내 꿈은 “살자, 살자”뿐이었다. 다른 꿈을 꿀 수도, 계획을 세울 수도 없었다.● 전쟁은 낭만이 아닌 죽는 일 1950년 전쟁이 발발할 때만 해도 전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북한 체제와 소련을 혐오하고 남한과 미국을 동경하던 스무 살 청년이었다. 미군 전투기가 지나갈 때는 산꼭대기에 올라 러닝셔츠를 벗어 흔들며 반겼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해 오기만을 고대했다. 1950년 10월 수도사단이 함흥에 왔다. 나를 포함한 함흥남부교회 청년들은 그해 12월 국군에 자진 입대했다. 군대에 안 가려고 나이를 열 살씩 올리는 식으로 호적을 바꾸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그건 사나이로서 치사해보였다. 12월 14일부터 흥남 철수작전이 시작됐다. 그즈음 어느 저녁, 나는 미군 수송선(LST)에 올랐다. 나와 다른 훈련병들은 함정 아래 선창(船倉)에 몸을 실었다. 밤새 파도 소리가 새어 들었다. 동이 트고 배에서 내려보니 묵호항(강원 동해시)이었다. 기상나팔이 울리면 새벽 5시부터 밤까지 훈련을 했다. 소총을 쏘고 얼어붙은 논밭 위로 포복했다. 훈련병들은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전방에 보내 달라. 싸우고 이겨서 고향에 가겠다.” 저마다 아우성이었다. 나는 전쟁을 낭만적인 무언가로 생각했다. 전방에 투입된 건 1951년 5월(중공군 제6차 공세)이었다. 수도사단 1연대 1대대 2중대 소총수로 첫 전투에 나섰다. 강원 양양군 오색리 350m 고지 전투였다. 그날 ‘전쟁의 낭만’은 끝났다. 첫날 투입된 1중대 병력 대부분이 전사했다. 뒤이어 2중대가 진격하는데 기관총탄이 날아들었다. 북한군 수류탄이 바위에 부딪힌 뒤 제멋대로 튀며 폭발했다. 전술도 작전도 무의미했다. 죽고 사는 건 그저 운이었다. 9분 능선부터 일제히 돌격해 올라가보니 머리가 깨진 북한군 시체가 가득했다. 우리 중대도 16명이 전사했다. 밤새 시체를 옮겼다. 그제야 알았다. 사람 죽는 곳에 왔구나. 순간 철이 들었다. 그때부터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전방엔 영웅도 낭만도 없었다. 전방은 죽는 곳이었다. 수도사단은 이후 중공군 주도의 공세가 이어진 가리봉, 향로봉 등으로 진지를 이동하며 전투를 치렀다. 전투 현장에서 나는 미군 병사가 건네준 노래책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 총탄에 죽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해 10월 공비 토벌 임무를 맡아 후방에 가기까지 매일 “살자, 살자” 되뇌었다.● 전장 최고의 행운은 부상 후방 생활은 길지 않았다. 1952년 봄 김화로 투입됐다. 트럭에 실려 다시 최전방으로 향하는 길. 나는 무덤으로 가는 기분이었다. 최전방은 쉴 틈이 없었다. 내 꿈은 그즈음 바뀌었다. 부상당하는 것이었다. 부상당하면 후방에 갈 수 있었다. 병사들은 “살아있으면 고생이요, 죽으면 행복이요, 부상당하면 100만 달러”라고 말하곤 했다. 부상은 병사에게 전장 최고의 행운이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지(死地)에도 희망을 가진 이는 있었다. 1952년 가을 윤필효 중위가 중대장으로 부임해 왔다. 그는 나를 불러 “곧 휴전이 될 거 같다”고 했다. 북한에서의 생활은 어땠는지도 종종 물었다. 1953년 1월 초엔 고향인 경남 함안으로 휴가를 가 여교사와 약혼하고 왔다고 했다. “휴전이 되면 결혼식을 올릴 것이다. 너는 고향에 갈 수 없으니 함안에서 나와 같이 살자”고도 했다. 그는 내게 남쪽 고향을 만들어주고 싶어 했다. 일주일 후 윤 중위는 전사했다. 1월 15일 북한군과 중공군은 김화군 원남면에 구축한 우리 진지를 공격했다. 전우들이 눈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중대장 벙커엔 윤 중위가 쓰러져 있었다. 오른손에 대검을 쥔 채였다. 머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해 7월 중공군은 휴전 직전 최후의 공세에 돌입했다. 7월 13일 밤 소대장은 “우측 5사단이 무너졌다. 우리가 포위되고 있다. 제2방어선으로 이동하라”고 소리쳤다. 금성전투의 서막이었다. 나는 죽자 사자 뛰었다. 1연대가 2500명쯤이었는데 제2방어선에 모인 병력은 600명이 안돼 보였다. 14일 밤엔 부슬비가 내렸다. 중공군의 총공격이 이어졌고, 그날 백암산(강원 화천)에 있던 나는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 파편을 맞았다. 다리와 머리에 파편이 박혔다. 적정(敵情)을 살피려는 섬광탄이 연이어 터졌다. 나는 혼자였다. 소총을 지팡이 삼아 짚고 고지로 올라갔다. 배가 고팠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건빵은 비에 젖어 밀가루 반죽이 돼 있었다. 이를 입으로 욱여넣었다. 섬광탄이 또 터졌다. 산 아래를 보니 국군 차량 수십 대가 후퇴하고 있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더군다나 휴전이 코앞이었다. 대검으로 칡넝쿨을 끊어내며 아래로 향했다. 새벽 4시쯤 되자 큰길이 나왔다. 어쩐 일인지 국군 앰뷸런스가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속으로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외쳤다. 나의 전쟁은 그렇게 끝났다. 부산 제5육군병원에 도착했다. 미군이 구호품으로 준 분유를 따뜻한 물에 타 단숨에 들이켰다. 처음 먹어보는 우유의 온기가 몸 곳곳에 퍼졌다. 이제는 살았다 싶었다. 나는 인간 세상에 돌아와 있었다. 8개월간 병원 생활을 했다. 그사이 휴전(1953년 7월 27일)이 됐다고 했다. 휴전은 내게 그리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살았으면 그걸로 된 것이었다.● “기억은 힘이 없다”지난해 뒤늦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953년 훈장이 나왔다는데 전쟁통이라 까맣게 몰랐다. 지난해 9월 수도기계화보병사단(전쟁 당시 수도사단)에 가 훈장을 받았다. 사단에선 장갑차를 내보내 나를 연병장 사열대까지 태워갔다. 사단장과 장병들이 나와 예우를 다했다. 하사(당시 일등중사)로 전역한 나는 맥아더 장군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날 후배 장병들에게 말했다. “다시는 전쟁이 나면 안 됩니다. 전쟁이 나면 다 죽습니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대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라고 하는데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고,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통일을 해야 합니다.” 여생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나지 않도록 각성시키는 글을 쓰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떤 방법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기억은 아무런 힘이 없다. 시신을 후송할 겨를조차 없어 산 아래 아무렇게나 묻어둔 내 전우들을 누가 기억해 줄까. 죽기 전에 잠든 전우들이 있는 백암산에 가보려 한다. 초목 무성해진 그곳에서 그들은 편히 쉬고 있을까. **이제는 다 잊고 고이 쉬게나. 종달새 울음소리가 나거든 이따금 잠에서 깨어나 주시게. 나는 젊은 당신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오.**▼ ‘철의 삼각지대’서 전투 치러…금성전투서 중공군에 부상 ▼이근엽 전 교수가 6·25전쟁 당시 주로 전투를 치른 북한의 강원 김화군은 철원군, 평강군과 함께 중부전선 최대 격전지인 ‘철의 삼각지대’다. 철의 삼각지대는 38선 일대 전략적 요충지이자 동서로 연결되는 주요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 요지여서 아군과 중공군, 인민군 간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던 곳이다. 백마고지 전투(1952년 10월 6~15일), 저격능선 전투(1952년 10월 14일~11월 24일) 등 유명한 고지 쟁탈전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철의 삼각지대에서의 아군 사상자만 2만4000여 명에 이른다. 전쟁 기간 가장 많은 전사자가 발생한 지역 중 한 곳이다. 그가 부상당한 금성전투는 1953년 7월 13~19일 김화군 금성면, 원남면 등에서 벌어진 6·25전쟁 마지막 대규모 전투다. 당시 중공군은 7월 13일 15개 사단 병력을 동원해 유엔군이 1951년 10월부터 확보한 금성돌출부(전선이 헬멧처럼 북쪽으로 돌출된 지역)를 차지하기 위한 공세를 감행했다. 금성돌출부를 방어하던 수도사단, 5사단 등 국군 6개 사단은 금성천 남쪽으로 후퇴한 뒤 반격해 ‘아이슬란드선’(간진현~금성천~462고지)까지 회복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8만9600명. 정부에 등록된 6·25전쟁 참전 유공자 중 지난해 12월 현재 살아있는 이들이다. 2010년 12월까지만 해도 생존자 수는 18만6315명이었지만 9년 사이에 10만 명 가까이 줄었다. 6·25 참전 유공자의 평균 연령은 우리 나이로 90세다. 동아일보는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와 공동으로 6·25 참전용사들이 직접 전쟁의 참상과 후대에 남기고 싶은 말을 전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취재진이 만난 참전용사들이 들려준 각자의 전쟁 이야기는 6·25 전쟁사의 숨겨진 퍼즐이었다. 소총수로 참전했던 이근엽 전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90)는 이등중사(현재의 병장) 시절인 1953년 6월 화랑무공훈장이 나왔지만, 이를 모르고 있다가 지난해에야 수훈한 잊혀진 영웅이었다. 이 전 교수와의 인터뷰를 1인칭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몸소 겪은 날것의 전쟁 이야기다. 》 지옥에서 빠져나오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침 공기를 실컷 들이마셨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전쟁 없는 공기’였다. 트럭 한 대가 산 중턱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1952년 늦봄이었다. 전쟁통에도 봄은 왔다. 중부전선 오성산(강원 김화군·현재 북한) 고지를 벗어나 서울로 가는 길. 트럭 짐칸에 앉아 둘러본 전쟁 한복판의 봄은 허허벌판이었다. 사람들은 종적을 감췄다. 생명력 잃은 들판이 끝없이 이어졌다. ●‘저들은 저렇게 자유로운데…’ 입대 1년 반 만의 첫 휴가였다. 그간은 여러 번 휴가를 포기했다. 고향이 함경남도 함흥이어서 휴가를 가봐야 갈 곳도, 만날 이도 없어서였다. 당시 중대장 편부만 대위는 그런 나를 안타까워했다. 그는 “우리 집으로 휴가 가면 되지 않느냐”며 등을 떠밀었다. 편 대위 집이 있는 종로로 가는 내내 이른 뙤약볕을 받고 앉아 산야를 구경했다. 어쩌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를 풍경이었다. 서울에서의 2박 3일 휴가 기간 대부분 잠을 잤다. 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이 계속되면서 대규모 전투는 없었지만,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려는 38선 중심의 고지 쟁탈전은 치열했다. 한밤중 계속되는 진지 이동과 전투에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유엔군이 공습을 실시하는 낮을 피해 야간에 집중 공격했다. 한 밤중 소변을 보러 나간 전우는 머리에 조준사격을 받고 죽었다. 비슷한 일이 비일비재했다. 밤은 공포였다. 먹고 자는 것 외에 휴가 중 한 유일한 일은 종로의 극장에 간 것이었다. 점령과 수복, 재점령과 재수복을 겪은 서울은 폐허를 방불케 했지만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극장을 채우고 있었다.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사람 구경을 했다. 영상이 빛을 터뜨리며 관객석을 밝혔다. 그때마다 웃음기 머금은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어쩌다 사람 죽는 곳, 그것도 한복판에 들어가게 됐나. 저들은 저렇게 자유로운데….’ 내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군복을 입고 M1 소총을 세워놓은 채 앉아있던 나는 총구를 이마에 갖다 댔다. ‘여기서 죽을까. 지금 죽지 않으면 다시 지옥에 가야 하는데…. 여기서 죽으나 거기서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다. 방아쇠를 당기자.’ 하지만 끝내 방아쇠를 당기진 못했다. 전장에서 머리가 터지고 팔다리가 잘린 채 죽은 전우를 볼 때면 그 모습이 내 모습처럼 보였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의연하게 죽는 이는 없었다. 현실의 죽음은 비장하지 못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 아이처럼 “엄마” 하고 중얼거리며 죽는 이들을 나는 여러 번 봤다. 광복 이후 내겐 남쪽의 대학에 다니고 영어 공부를 해보자는 구체적인 꿈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내 꿈은 “살자, 살자”뿐이었다. 다른 꿈을 꿀 수도, 계획을 세울 수도 없었다.● 전쟁은 낭만이 아닌 죽는 일 1950년 전쟁이 발발할 때만 해도 전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북한 체제와 소련을 혐오하고 남한과 미국을 동경하던 스무 살 청년이었다. 미군 전투기가 지나갈 때는 산꼭대기에 올라 러닝셔츠를 벗어 흔들며 반겼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해 오기만을 고대했다. 1950년 10월 수도사단이 함흥에 왔다. 나를 포함한 함흥남부교회 청년들은 그해 12월 국군에 자진 입대했다. 군대에 안 가려고 나이를 열 살씩 올리는 식으로 호적을 바꾸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그건 사나이로서 치사해보였다. 12월 14일부터 흥남 철수작전이 시작됐다. 그즈음 어느 저녁, 나는 미군 수송선(LST)에 올랐다. 나와 다른 훈련병들은 함정 아래 선창(船倉)에 몸을 실었다. 밤새 파도 소리가 새어 들었다. 동이 트고 배에서 내려보니 묵호항(강원 동해시)이었다. 기상나팔이 울리면 새벽 5시부터 밤까지 훈련을 했다. 소총을 쏘고 얼어붙은 논밭 위로 포복했다. 훈련병들은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전방에 보내 달라. 싸우고 이겨서 고향에 가겠다.” 저마다 아우성이었다. 나는 전쟁을 낭만적인 무언가로 생각했다. 전방에 투입된 건 1951년 5월(중공군 제6차 공세)이었다. 수도사단 1연대 1대대 2중대 소총수로 첫 전투에 나섰다. 강원 양양군 오색리 350m 고지 전투였다. 그날 ‘전쟁의 낭만’은 끝났다. 첫날 투입된 1중대 병력 대부분이 전사했다. 뒤이어 2중대가 진격하는데 기관총탄이 날아들었다. 북한군 수류탄이 바위에 부딪힌 뒤 제멋대로 튀며 폭발했다. 전술도 작전도 무의미했다. 죽고 사는 건 그저 운이었다. 9분 능선부터 일제히 돌격해 올라가보니 머리가 깨진 북한군 시체가 가득했다. 우리 중대도 16명이 전사했다. 밤새 시체를 옮겼다. 그제야 알았다. 사람 죽는 곳에 왔구나. 순간 철이 들었다. 그때부터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전방엔 영웅도 낭만도 없었다. 전방은 죽는 곳이었다. 수도사단은 이후 중공군 주도의 공세가 이어진 가리봉, 향로봉 등으로 진지를 이동하며 전투를 치렀다. 전투 현장에서 나는 미군 병사가 건네준 노래책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 총탄에 죽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해 10월 공비 토벌 임무를 맡아 후방에 가기까지 매일 “살자, 살자” 되뇌었다.● 전장 최고의 행운은 부상 후방 생활은 길지 않았다. 1952년 봄 김화로 투입됐다. 트럭에 실려 다시 최전방으로 향하는 길. 나는 무덤으로 가는 기분이었다. 최전방은 쉴 틈이 없었다. 내 꿈은 그즈음 바뀌었다. 부상당하는 것이었다. 부상당하면 후방에 갈 수 있었다. 병사들은 “살아있으면 고생이요, 죽으면 행복이요, 부상당하면 100만 달러”라고 말하곤 했다. 부상은 병사에게 전장 최고의 행운이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지(死地)에도 희망을 가진 이는 있었다. 1952년 가을 윤필효 중위가 중대장으로 부임해 왔다. 그는 나를 불러 “곧 휴전이 될 거 같다”고 했다. 북한에서의 생활은 어땠는지도 종종 물었다. 1953년 1월 초엔 고향인 경남 함안으로 휴가를 가 여교사와 약혼하고 왔다고 했다. “휴전이 되면 결혼식을 올릴 것이다. 너는 고향에 갈 수 없으니 함안에서 나와 같이 살자”고도 했다. 그는 내게 남쪽 고향을 만들어주고 싶어 했다. 일주일 후 윤 중위는 전사했다. 1월 15일 북한군과 중공군은 김화군 원남면에 구축한 우리 진지를 공격했다. 전우들이 눈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중대장 벙커엔 윤 중위가 쓰러져 있었다. 오른손에 대검을 쥔 채였다. 머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해 7월 중공군은 휴전 직전 최후의 공세에 돌입했다. 7월 13일 밤 소대장은 “우측 5사단이 무너졌다. 우리가 포위되고 있다. 제2방어선으로 이동하라”고 소리쳤다. 금성전투의 서막이었다. 나는 죽자 사자 뛰었다. 1연대가 2500명쯤이었는데 제2방어선에 모인 병력은 600명이 안돼 보였다. 14일 밤엔 부슬비가 내렸다. 중공군의 총공격이 이어졌고, 그날 백암산(강원 화천)에 있던 나는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 파편을 맞았다. 다리와 머리에 파편이 박혔다. 적정(敵情)을 살피려는 섬광탄이 연이어 터졌다. 나는 혼자였다. 소총을 지팡이 삼아 짚고 고지로 올라갔다. 배가 고팠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건빵은 비에 젖어 밀가루 반죽이 돼 있었다. 이를 입으로 욱여넣었다. 섬광탄이 또 터졌다. 산 아래를 보니 국군 차량 수십 대가 후퇴하고 있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더군다나 휴전이 코앞이었다. 대검으로 칡넝쿨을 끊어내며 아래로 향했다. 새벽 4시쯤 되자 큰길이 나왔다. 어쩐 일인지 국군 앰뷸런스가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속으로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외쳤다. 나의 전쟁은 그렇게 끝났다. 부산 제5육군병원에 도착했다. 미군이 구호품으로 준 분유를 따뜻한 물에 타 단숨에 들이켰다. 처음 먹어보는 우유의 온기가 몸 곳곳에 퍼졌다. 이제는 살았다 싶었다. 나는 인간 세상에 돌아와 있었다. 8개월간 병원 생활을 했다. 그사이 휴전(1953년 7월 27일)이 됐다고 했다. 휴전은 내게 그리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살았으면 그걸로 된 것이었다.● “기억은 힘이 없다” 지난해 뒤늦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953년 훈장이 나왔다는데 전쟁통이라 까맣게 몰랐다. 지난해 9월 수도기계화보병사단(전쟁 당시 수도사단)에 가 훈장을 받았다. 사단에선 장갑차를 내보내 나를 연병장 사열대까지 태워갔다. 사단장과 장병들이 나와 예우를 다했다. 하사(당시 일등중사)로 전역한 나는 맥아더 장군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날 후배 장병들에게 말했다. “다시는 전쟁이 나면 안 됩니다. 전쟁이 나면 다 죽습니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대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라고 하는데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고,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통일을 해야 합니다.” 여생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나지 않도록 각성시키는 글을 쓰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떤 방법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기억은 아무런 힘이 없다. 시신을 후송할 겨를조차 없어 산 아래 아무렇게나 묻어둔 내 전우들을 누가 기억해 줄까. 죽기 전에 잠든 전우들이 있는 백암산에 가보려 한다. 초목 무성해진 그곳에서 그들은 편히 쉬고 있을까. **이제는 다 잊고 고이 쉬게나. 종달새 울음소리가 나거든 이따금 잠에서 깨어나 주시게. 나는 젊은 당신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오.**▼ ‘철의 삼각지대’서 전투 치러…금성전투서 중공군에 부상 ▼ 이근엽 전 교수가 6·25전쟁 당시 주로 전투를 치른 북한의 강원 김화군은 철원군, 평강군과 함께 중부전선 최대 격전지인 ‘철의 삼각지대’다. 철의 삼각지대는 38선 일대 전략적 요충지이자 동서로 연결되는 주요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 요지여서 아군과 중공군, 인민군 간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던 곳이다. 백마고지 전투(1952년 10월 6~15일), 저격능선 전투(1952년 10월 14일~11월 24일) 등 유명한 고지 쟁탈전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철의 삼각지대에서의 아군 사상자만 2만4000여 명에 이른다. 전쟁 기간 가장 많은 전사자가 발생한 지역 중 한 곳이다. 그가 부상당한 금성전투는 1953년 7월 13~19일 김화군 금성면, 원남면 등에서 벌어진 6·25전쟁 마지막 대규모 전투다. 당시 중공군은 7월 13일 15개 사단 병력을 동원해 유엔군이 1951년 10월부터 확보한 금성돌출부(전선이 헬멧처럼 북쪽으로 돌출된 지역)를 차지하기 위한 공세를 감행했다. 금성돌출부를 방어하던 수도사단, 5사단 등 국군 6개 사단은 금성천 남쪽으로 후퇴한 뒤 반격해 ‘아이슬란드선’(간진현~금성천~462고지)까지 회복했다.손효주기자 hjson@donga.com}

경남 함양안의농협사과작목반은 지난해 설날 전후로 큰 성과를 거뒀다. 작목반 내 10개 농가가 도내 무역회사에 도매시장에 파는 것보다 2.8배 높은 가격에 사과를 납품한 것. 이들 농가는 2016년 국가 인증인 농산물우수관리(GAP) 인증을 받았다. 작목반 이대준 대표는 “GAP 인증으로 안전한 사과라는 점이 입증된 것이 좋은 가격을 받은 결정적 이유였다”며 “지난해 GAP 인증 농가를 작목반 내 73개 농가까지 확대한 만큼 올 추석엔 납품 물량도 늘어나고 농가 소득도 증가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2006년 국내에 도입된 GAP 인증 농가가 10만 가구를 돌파했다. 12일 농림축산식품부와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 따르면 2016년 7만4973가구였던 GAP 인증 농가 수는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다 지난해 말 기준 10만 가구를 넘어섰다. 전체 농가(102만 가구)의 10%가량이 GAP 인증을 통해 안전성이 입증된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GAP 인증은 생산부터 수확, 저장 등 관리, 유통에 이르기까지 용수, 토양, 저장 시설 등 농업 환경과 농약 등 유해 요소를 안전하게 관리한 농가의 농산물을 국가가 인증하는 제도다. 농가엔 일반 농산물 생산 및 출하의 기본을 지키게 하고, 국민에겐 보다 안전한 농산물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제도 도입 취지다. GAP 인증 농가가 10만 가구를 돌파한 데는 함양안의농협사과작목반처럼 농가의 적극적인 참여는 물론이고 유통업체의 요구도 큰 몫을 했다. 국내 대형 유통업체는 판매 농산물에서 농약이 검출되는 등 문제 발생 시 후폭풍이 큰 만큼 GAP 인증을 계약 기본 조건으로 요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기존 거래 농가에도 계속 거래하려면 GAP 인증을 받아올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는 것이 GAP 제도를 운영하는 농식품부의 설명이다. 최근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언택트(비대면) 구매’가 활성화되면서 GAP 인증 여부로 농산물의 안전성을 판단한 뒤 구매를 결정하는 소비자도 증가하는 추세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유통업체 GAP 인증 요구는 물론이고 소비자의 GAP 인증 농산물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GAP 인증을 받으려는 농가가 크게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농식품부는 현재 토양 및 수질 등 안전성 검사 비용을 100% 국고로 지원하는 등 GAP 인증 각 과정에 드는 비용 상당 부분을 지원하고 있다. GAP 인증 농가의 판로를 확보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도 진행 중이다. 농산물품질관리원이 운영하는 웹사이트 ‘GAP 정보서비스’에는 지난해 7월부터 ‘출하정보 서비스’가 신설됐다. GAP 인증 농가가 농산물 출하 관련 각종 정보를 올려놓으면 유통업체가 관련 정보를 본 뒤 해당 농가에 연락해 납품 협상을 진행하도록 유도하는 서비스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GAP 인증을 받은 뒤 이를 홍보에 활용해 농산물을 납품하는 방식으로 소득을 늘리는 농가도 증가하고 있다”며 “GAP 인증 농가 수를 늘려 국민들이 더 안전한 농산물을 구매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군 생활을 수십 년간 했지만 군이 이렇게까지 북한을 변호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북한군이 우리 군 감시초소(GP)에 총격을 가한 3일 이후 한 군 간부가 한 말이다. 현역 군인인 만큼 우리 군 편에 서려 해봐도 이번 사안에 대한 군의 대응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군 당국이 사건 발생 당일 진행한 언론 브리핑의 초점은 북한군 변호에 맞춰져 있었다. 당시 군 관계자는 우리 군 대응사격은 몇 시에 이뤄졌는지, 북한군과 우리 군이 각각 이용한 총기 종류가 무엇인지 등 총격 사건 발생 시 기본적으로 공개해온 사건 개요조차 함구했다. 그 대신 어떤 대응 조치가 이뤄졌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가운데 “현장에서 우리 군의 대응은 잘 이뤄졌다”고 ‘셀프 평가’했다. 군은 당일 대응 조치에 대해 군사 보안을 지키는 선에서 조목조목 설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것이 잘한 조치였는지에 대한 평가는 사건 팩트에 기반해 판단하는 언론과 국민의 몫이다. 더 큰 문제는 군이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데 있다. 군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의 질의에 앞서 진행한 사건 설명의 상당 부분을 군이 왜 이번 총격을 북한의 우발적 오발로 평가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짙은 안개로 시계(視界)가 나빴던 점 등 의도적 도발로 볼 수 없는 서너 가지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북한군이 근무교대를 하며 화기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오발이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이 역시 군은 객관적인 팩트만 제시하면 될 일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이번 총격이 의도적 도발인지, 실수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역시 언론과 국민이 할 일이지 사건 당일 군이 앞장서서 할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사건 개요가 당장 파악할 수 있는 것인 데 반해 북한의 의도는 심도 있는 조사를 거친 뒤 보다 신중하게 결론내야 할 부분이었다. 군은 정반대로 사건 개요는 조사 중이라는 이유로 답변을 보류하면서도 의도성 여부에 대해선 전례 없이 신속하게 답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일주일 이상 지난 11일 현재도 군은 구체적인 사건 개요에 대해선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가 조사 중이어서 추후 설명하겠다”는 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나중에 설명하겠다는 말은 결국 사안에 대한 관심이 식은 다음에는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이 사건과 연관된 군 고위 관계자들은 사건에 대한 관심이 식기만을 기다리는 듯하다”며 분위기를 전했다. 군은 총격으로 피해를 입은 우리 군 GP를 언론에 공개할 계획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GP 외벽의 북한군 고사총 탄흔은 이번 총격이 우발적 오발인지를 가려줄 결정적 증거다. 현역 장교인 A는 “2018년 남북 군사합의에 따라 남북 초근접 GP 시설물을 철거할 때는 굴착기 진입부터 모든 과정을 연일 생중계하다시피 하며 GP 곳곳을 공개했던 게 군 아니냐”며 “파격 공개까지 불사하던 군이 이번엔 ‘GP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공개하기 어렵다’며 비공개 방침을 고수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정부 차원의 대대적인 홍보가 필요한 사안은 GP를 공개하면서 정작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최소한의 공개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선 ‘GP의 특수성’을 명분으로 난색을 표하는 등 원칙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군 내부에선 이태원 클럽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군 내부까지 번지면서 GP 총격 사건에 집중됐던 언론과 여론의 관심이 분산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는 데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이번 사건의 진실은 공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분명한 건 북한을 변호하는 듯한 태도와 사건 현장인 GP는 물론이고 사건 개요 공개조차 꺼리는 모습은 군답지 않다는 것이다. 군의 이런 모습은 남북 대화와 협력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는 통일부를 연상시킨다. 북한을 코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분단국가의 군은 냉정하게 군사·안보적 판단만 하면 될 일이다. 대북 유화책이 정부 정책 기조라고 해도 통일부 역할까지 하며 북한 변호인을 자임하는 분단국가 군의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손효주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hjson@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창궐하면서 해군 장병들이 마스크 수급에 어려움을 겪을 것에 대비해 면 마스크를 손수 제작해 공급한 군무원의 사연이 27일 알려졌다. 주인공은 해군 군수사령부 보급창 병참지원대 피복·세탁팀 조미혜 군무주무관(47·여·사진). 조 씨가 면 마스크 제작에 뛰어든 건 2월 23일 코로나19 경보 단계가 ‘심각’으로 격상된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해군 수병들에겐 KF94 마스크가 보급되고 있었지만 부사관, 장교 등 간부들은 마스크를 각자 구해야 했다. 그러나 마스크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에 군부대 측에선 의류학과 출신으로 의류 제작 강사 경력이 있는 조 씨에게 면 마스크 제작이 가능한지 물어왔다. 함정, 잠수함, 지휘통제실 등은 밀폐된 공간 특성상 집단 감염 위험성이 높아 간부들이 면 마스크라도 확보해 놓는 것이 시급했다. 조 씨는 부대의 문의를 받자마자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행동에 나섰다. 성인용 마스크 제작 경험이 없던 그는 인터넷에 올라온 마스크 제작 영상부터 뒤졌다. 몇 차례 시행착오 끝에 견본 3개를 만들었다. 이때부터는 의류 부자재 시장을 돌며 원단을 구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마스크 5000장가량을 만들 수 있는 면 100% 고밀도 원단을 확보했다. 이런 추진력을 바탕으로 조 씨는 문의를 받은 지 만 이틀도 되지 않은 2월 25일 오전부터 마스크 생산에 들어갔다. 피복·세탁팀 팀원은 물론이고 재봉틀을 조금이라도 다룰 줄 아는 병참지원대 군무원까지 16명이 동원됐다. 마스크 대란이 이어진 3월 한 달은 야근은 물론이고 주말까지 근무하며 마스크 생산에 온 힘을 쏟았다. 하루에 길게는 10시간 이상 재봉틀을 돌렸다. 조 씨와 동료들이 최근까지 만들어 낸 면 마스크는 1만2000여 장. 이 중 약 1만 장이 함정, 잠수함, 지휘통제실에서 근무하는 간부에게 지급됐다. 3월 9일부터 마스크 5부제가 시행되면서 수급이 안정됐다고 하지만 함정, 잠수함 근무 간부들은 긴 시간 바다에서 근무해야 해 5부제 일정에 맞춰 마스크를 구매하기 어려웠다. 이들에게 면 마스크는 그 무엇보다 유용한 보급품이었다. 조 씨는 27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비상 상황에서 주어진 임무인 만큼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 없이 최선을 다해 마스크를 만들었다”며 동료들과 공을 나눴다. 조 씨와 동료들의 목표는 이달 말까지 면 마스크 1만3000여 장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만든 마스크를 쓰고 지나가는 간부들을 볼 때마다 코로나19 확산 방지에 미약하게나마 힘을 보탠 것 같아 뿌듯하다”며 “목표량을 모두 생산해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결의를 다졌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