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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는 H, 산소는 O, 질소는 N…. 학창 시절 화학 시간에 줄기차게 원소 주기율표를 외웠다. 그땐 무작정 외우기만 했는데 문득 이 암호 같은 원소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궁금하다. 원소명은 대개 그리스어나 라틴어에서 유래됐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화학 명명법 개혁’이 계기다. 라부아지에 등 당대 화학자들은 “현대어는 서로 달라 일률적으로 이름을 정하기 힘들다”며 이미 사어(死語)가 된 그리스어, 라틴어에서 원소명을 따왔다. 예를 들어 나트륨(Na)은 라틴어 ‘natrium’에서 따왔다. 이는 이집트의 니트리아 지역 이름에서 유래됐다. 고대 이집트인은 이곳의 호수들에서 염 혼합물을 채집해 세탁, 방부 처리, 의약품 제조에 사용했다. 이 염을 가리키는 이집트어 단어는 로마자로 ‘ntr’로 표기되는데 이후 nitron(그리스어)과 nitrum(라틴어)으로 변형됐다. 라부아지에 등이 원소 기호를 정하기 전에는 사물에 빗댄 원소 표시법이 쓰였다. 중세 연금술사들이 사용한 기호였다. 예를 들어 원소 기호 Au인 금(라틴어 aurum)은 원으로 표시했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고 광채를 발하는 모습이 태양과 비슷하다는 게 이유였다. 반면 원소 기호 Ag인 은(라틴어 argentum)은 자주 변색된다는 이유로 매일 모양을 바꾸는 달, 그중에서도 초승달로 표시됐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오래된 중세 필사본까지 두루 뒤졌다. 종교, 신화와도 얽힌 화학 원소명의 유래가 궁금하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도니체티의 오페라 ‘안나 볼레나’가 6년 만에 돌아온다. 2015년 라벨라오페라단이 국내 초연 후 업그레이드한 이번 작품은 29, 30일 이틀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선보인다. 이 오페라는 16세기 영국 왕실의 실화를 다뤘다. 영국 국왕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로 참수형을 당한 앤 불린의 사랑과 복수를 그린다. 펠리체 로마니가 대본을 쓰고 벨칸토 오페라의 대가 가에타노 도니체티가 작곡을 맡았다. 안나 볼레나는 ‘마리아 스투아르다’ ‘로베르토 데브뢰’와 더불어 도니체티의 여왕시리즈 3부작으로 통한다. 1830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카르카노 극장에서 처음 선보일 당시 큰 성공을 거뒀다. 이 오페라를 본 작곡가 빈첸초 벨리니가 감격한 나머지 자신이 작곡 중이던 악보를 찢은 일화가 전할 만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곡으로 유명하다. 이번 무대는 오페라 전문 지휘자 양진모가 지휘를 맡고, 연출가 이회수가 세 주인공의 우울함과 불안한 심리를 그린다. 1만∼20만 원.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동화 ‘배고픈 애벌레(The Very Hungry Caterpillar)’를 쓴 미국 작가 에릭 칼(사진)이 23일(현지 시간) 별세했다. 향년 92세. 26일 외신에 따르면 칼은 23일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작업실에서 신부전증으로 숨을 거뒀다. 1969년 출간된 칼의 대표작 배고픈 애벌레는 허기진 애벌레 한 마리가 일주일 동안 음식을 먹고 자라나 나비로 성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 출판사 펭귄 랜덤하우스에 따르면 224개 단어와 그림들로 구성된 배고픈 애벌레는 한국어를 포함한 70여 개 언어로 번역돼 5500만 부 넘게 팔렸다.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인 부모 사이에서 1929년 태어난 칼은 6세 때 향수병을 호소하던 어머니를 따라 독일로 돌아갔다. 칼은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대에서 그래픽 예술 공부를 마치고 미국으로 가 뉴욕타임스에서 삽화와 광고디자인을 그렸다. 이후 작가 빌 마틴 주니어를 만나 작가의 길에 입문하고, 1967년 ‘갈색곰아, 갈색곰아, 무엇을 보고 있니?’로 데뷔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 부조종사가 몬 전투기가 러시아 크림반도에서 격추됐다. 그를 구해준 이는 타타르 유목민. 동물 지방과 펠트 천으로 감싸여 치료를 받은 그는 이후 미술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이름은 요제프 보이스(1921∼1986). 그는 한때 자신을 죽음에서 구해준 펠트를 이용해 여러 작품을 만들었다. 그에게 펠트는 생명을 지키는 에너지이자 따뜻함 자체였다. 22일 열린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재난과 치유’ 기획전의 포스터 작품은 요제프 보이스의 ‘곤경의 일부’다. 작품을 통해 개인적, 사회적 상처를 치유하고자 한 그의 의도처럼 이번 전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맞아 관람객에게 예술을 통한 위로를 건넨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25일 언론 간담회에서 “감정 표현이 매우 절제된 한국 미술문화에서 재난과 희비애락이 대담하게 표현된 경우는 드물다. 이런 전통에 도전하는 전시”라고 소개했다. 행위예술가 프란시스 알리스의 영상 작품 ‘금지된 발걸음’은 전시 취지와 맞닿아 있는 대표작이다. 뿌연 화면 사이로 숲 어딘가에 버려진 듯한 콘크리트 건물이 나온다. 난간 하나 없는 옥상. 경계를 벗어나는 순간 추락할 수밖에 없는 옥상을 한 남자가 더듬거리듯 걷는다. 지난해 10월 홍콩 라마섬을 배경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인간에게 닥친 팬데믹의 불확실성을 상징한다. 이진주는 구조물의 단면에 회화를 그려 넣은 작품 ‘사각’에 코로나19로 인한 고통을 담았다. 핏물이 채워진 수영장에 마스크를 끼고 앉은 소년들과 흰 천을 뒤집어쓴 사람들의 모습은 답답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불안은 단지 감정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방역당국이 “코로나19 발생 이전의 세상은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고 밝혔듯 코로나 이후 일상의 공간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게 됐다. 서도호는 손잡이를 매개로 이 같은 변화를 포착했다. 손잡이를 만지는 행위는 어느새 강박과 두려움을 낳았다. 3차원(3D) 모델링을 활용한 설치 작품은 손잡이 모형 주위로 바이러스가 퍼지는 형상을 연상시킨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도 누군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직장에 나와야 한다. 상당수는 플랫폼 노동자들이다. “누군가의 안전은 누군가의 위험을 담보로 성립된다”는 홍진훤은 배달 노동자들에게 주목한 작품을 선보였다. 한쪽 다리를 절며 하염없이 움직이는 영상작품 ‘Injured Biker’를 보고 있노라면 재난이 불러온 소외를 직면하게 된다. 불가항력의 재난 현실에도 김범은 희망을 찾는다. 그는 높이 4m, 폭 3m의 거대한 화폭에 미로를 그려 재난이 뒤덮은 현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상단 왼쪽에 작은 입구가, 하단 오른쪽에 출구가 각각 있다. 전시를 기획한 양옥금 학예연구사는 “전시기획 때부터 크게 다가온 작품이다. 분명 어딘가에 출구는 있다고 말해주는 듯하다”고 말했다. 이배는 설치예술작 ‘불로부터’를 통해 나무가 타고 남은 숯에 존재감을 부여하며 긍정의 메시지를 전한다. 숯은 우리 생활의 에너지원이다. 재난이 닥쳐도 그 이후의 삶을 꿈꾸며 살아가자는 바람을 담았다. 전시는 5가지 소주제로 나뉘어 있지만 이에 국한하지 않고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그만큼 코로나19가 우리 삶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단편영화 ‘인플루엔자’도 이번 전시에 포함됐다. 국내외 작가 35명이 6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8월 1일까지. 무료.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제17회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의 주제다. 전 세계 46개국이 참여한 이번 건축전에 한국관은 ‘미래학교’로 답했다. 22일 오전 11시(현지 시간) 이탈리아 베니스 자르디니 공원 안, ‘미래학교’가 문을 열었다. 교실 중앙에는 충남 서천군의 갈대로 엮어 만든 원형 카펫이 자리해 있다. 관람객은 누워 쉬거나 명상해도 된다. 부엌에는 제주 옹기에 담은 차와 음료가 있으며, 전남 완도군에서 채취한 미역으로 끓인 미역국도 소개됐다. 언뜻 보면 ‘건축전이 맞나?’ 의아하다. 한국관 전시 총괄을 맡은 신혜원 예술감독은 21일 서울 종로구 아르코 미술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세계가 공통적으로 직면해 있는 기후위기, 디아스포라(난민 문제), 혁신 등을 다루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폭넓게 대화하면서 더 좋은 미래를 구상해 보자는 취지에서 ‘미래학교’를 열게 됐다”며 “전시는 문제에 대한 정답을 보여주기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구심점을 만들어주자는 취지”라고 소개했다. 안락한 공간인 카펫은 자연을 되짚어보게 한다. 갈대 카펫을 만든 김아연 작가는 로봇 청소기 등이 늘면서 갈대 빗자루 제작이 줄고 있다는 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의 작품은 생명이 사라진 상태의 자연(블랙메도우)을 고찰하는 공간인 것이다. 미역국은 송호준, 리오 제임스 스미스 작가가 준비한 ‘미래학교 식량 채집’ 전시다. 송 작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돌아다니는 미역의 이동에서 난민의 모습을 포착했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을 대비해 온라인 가상 캠퍼스 ‘미래학교 온라인’도 만들어졌다. 학교에서 진행되는 워크숍, 토론 등 20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한 50여 개의 프로그램은 미래학교 온라인 홈페이지를 통해 기록하고 송출될 계획이다. 신 감독은 “작가들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권위적인 면을 벗어나 많은 이가 함께 연대하는 과정으로서의 전시가 코로나19 이후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해 코로나19로 한 해 연기된 이번 건축전은 11월 21일까지 진행된다. 가장 우수한 건축을 선보인 국가관을 뽑는 ‘황금사자상 국가관’은 8월 발표 예정이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19일 종영한 tvN ‘마우스’는 배우들의 호연과 꼬리를 무는 반전 덕에 평균 5∼6%대의 안정적인 시청률을 유지했다. 특히 사이코패스의 아들 성요한(권화운)은 바른 청년 정바름(이승기)과 대치되는 캐릭터로 시청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결국 진짜 살해범은 바름으로 밝혀지지만 요한은 절제된 감정 연기로 극중 몰입도를 높였다. 이번 작품에서 신스틸러로 존재감을 각인시킨 배우 권화운(32)을 21일 만났다. 그는 “반전의 키를 쥔 인물이라 부담감은 있었지만 악인과 선인의 이미지를 다 보여드릴 수 있어 의미 있고 즐거웠다”고 종영 소감을 밝혔다. 극 초반 시청자들이 살인자로 지목했을 때 그는 “의도한 대로 잘 나왔구나”라며 안도했단다. ‘왜 더 폭발적으로 연기하지 않느냐’는 일부 시청자 댓글에 답답하기도 했다. “정말 그렇게 하고 싶은데 결말을 밝힐 수도 없고 참…. 범인 캐릭터가 다시 들어온다면 광기 어린 연기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권화운이 해석한 요한은 사이코패스의 자식을 향한 주변 시선 때문에 상처받지만, 그 아픔을 묵묵히 삼키는 인물이다.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촬영 기간 8개월 내내 두문불출한 채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원래 성격이 밝은데 고독한 상황에 스스로를 묶어두니 차분해지더라고요. 종영했으니 이제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중입니다.(웃음)” 데뷔 6년 차인 그는 조연으로 꾸준히 활동하다 KBS ‘좀비탐정’(2020년)에서 주연을 맡은 후 올해 마우스와 KBS ‘달이 뜨는 강’을 통해 주목받고 있다. 깡패, 의사, 비서, 군인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아온 그에게 이번 작품은 터닝 포인트다. 그는 “그간 주로 발랄한 역할을 맡았는데 나도 차가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배우 권화운의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었다”고 말했다. “늘 궁금하고 다음이 기대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권화운의 차기작은 로맨스코미디 ‘이벤트를 확인하세요’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인생은 살이 쪘을 때와 안 쪘을 때로 나뉜다.’ ‘죽지 않을 만큼 먹고 죽을 만큼 운동해라.’ 다이어트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는 여성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말들이다. 그런데 이 책 저자(1959∼2002)는 음식을 그냥 욕망해 보라고 말한다. 그는 거식증을 앓은 적이 있다. 키 162cm에 몸무게 37kg. 21세의 허벅지는 무릎보다도 가늘었다. 그는 3년 내내 하루에 베이글과 요거트, 사과, 치즈 1개씩만을 먹었다. 그리고 매일 수 km를 달렸다. 저자가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는 나중에야 알았다.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 것 같던 20대 초반에 저자는 불안했다. 때는 1980년대였다. 어떤 대학을 갈지, 누구와 잘지, 선택의 순간마다 ‘여성인 내가 정말로 그래도 되나’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저자는 일이나 진로 같은 거대한 대상 대신 눈앞에 보이는 음식으로 자기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굶기 같은 일련의 의지력 시험은 자신을 남다르고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듯했다. 식욕만이 아니다. 성욕, 소유욕, 권력욕. 여성에게는 욕구를 상상하는 일이 유난히 어렵다. 욕구 자체가 어쩐지 부당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죄책감의 근원을 사회 역학관계에서 찾는다. 세상은 남성의 욕구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왔다. 집, 직장에서 남성들에겐 대개 조력자가 있다. 조력자는 주로 여자들로, 청소 요리 파일 정리 심부름 등을 해준다. 잡지와 광고판엔 ‘날 언제든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 여성들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오늘날 여성들의 삶에도 기회가 엄청나게 늘었다고는 한다. 그러나 저자는 앞서 말한 봉사와 제공의 이미지들이 여성 주변에 존재하는지 묻는다. 여성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누군가 성심성의를 다해 줄 거라는 기본적인 신뢰조차 없다. 약 20년 전에 나온 이 책에서 우리는 얼마나 나아갔나. 성차별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해도 집으로 돌아와선 케이크를 먹은 자신을 혐오하고 벌주고 있진 않은가. 머리가 아닌 몸으로 페미니즘을 받아들이기엔 여전히 ‘하지 마’라는 말이 분신처럼 여성들을 쫓아다닌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정중하게 정리된 망자의 생전 흔적을 받아든 유족의 심정은 어떠할까. 14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무브 투 헤븐’(10부작)은 유품정리사라는 다소 생경한 직업을 다룬다. 모든 인생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이 드라마는 닷새 만에 국내 넷플릭스 순위 1위를 차지했다. 드라마는 아스퍼거 증후군(자폐증과 비슷한 발달장애)이 있는 그루(탕준상)와 그의 후견인 상구(이제훈), 그루의 친구 나무(홍승희)가 유품정리사로 일하며 세상을 떠난 이들이 미처 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산업재해, 고독사, 스토킹 범죄, 노인 동반 자살 등 사회적 사건 속에서 주목받지 못한 채 쓸쓸히 떠난 망자들을 조명한다. 20일 인터뷰한 무브 투 헤븐의 윤지련 작가는 “범죄사건 등이 소재가 되는 만큼 수사물이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범죄 장면이나 처벌 과정보다 고인들의 삶이 더 궁금했다”고 밝혔다. ‘어떤 마음으로 돌아가셨을까.’ ‘아쉬움은 없었을까.’ 작가의 고민은 자극적인 콘텐츠들 속에서 빛을 발하는 휴먼 스토리로 이어졌다. 윤 작가의 이번 작품은 그의 이전 대표작인 반올림3(2006∼2007년), 꽃보다 남자(2009년) 등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유품정리사 소재는 2015년 읽은 김새별 작가의 에세이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에서 착안했다. 그는 “사실 당시 ‘드라마를 다시 쓸 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기였다. 김새별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다시 글을 쓰고 싶게 했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 나도 많이 위로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집필에 앞서 철저히 사전조사를 했다. 한국, 미국, 일본의 유품정리사 사례를 취재했다. 유품정리사 3명을 인터뷰하고 업무 현장에도 따라갔다. 가장 기억에 남은 건 70대 노인의 고독사였다고 한다. “고독사 에피소드 집필을 마친 상태였는데 현장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어요. 수많은 물건들이 각자 한마디씩 내뱉는 것 같았죠. 하루에 이만큼 약을 드셨구나, 젊을 때는 이런 일을 하셨겠구나…. 불과 몇 시간 만에 모르던 분의 인생을 엿본 것 같았습니다.” 윤 작가는 “사회적 편견과 유족의 반대에도 고집스레 고인의 마음을 전달하려는 유품정리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감정 변화가 없고 배운 대로 행동하는 아스퍼거 증후군 캐릭터(그루)를 창조했다. 그는 “담담히 유품을 전달하며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게 그루”라고 말했다. 누군가의 죽음이 집값 하락의 원인인 양 여겨지는 사회에서 망자를 오로지 한 인간으로만 바라보는 그루는 윤 작가의 메시지와 맞닿아 있다. 윤 작가는 그루 캐릭터를 만든 뒤 상구와 나무, 주변 인물들의 서사와 관계성을 촘촘히 엮어 나갔다. 회차별로 이야기 전환이 잦은데도 시청자들이 주인공들에게 몰입할 수 있는 이유다. 권투를 한 상구는 그루에게 흑기사가 되고, 나무는 그루의 감정을 사회적 언어로 통역해 준다. 그는 “시청자들에게도 이 드라마가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나도 배우들도 시즌2에 대한 바람이 크다”고 덧붙였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한 여성이 있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공부를 하고, 명문대를 졸업했으며, 대기업에 취직했다. 그 후로도 엄마는 동료나 애인의 스펙을 따져 물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편을 만나 10년간 결혼생활을 했지만 아이 낳기가 두렵다. 엄마 같은 엄마가 될까 봐. 남편과 아이가 자기 때문에 불행해질까 봐. 뒤틀린 관계로 살아가는 부모와 자녀들에게 소통하고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56)가 나섰다. 가정의 달을 맞아 채널A가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금요일 오후 8시)에 이어 내놓은 ‘요즘 가족 금쪽 수업’(일요일 오후 7시 50분)을 통해서다. 오 박사와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배우 신애라가 차례로 실제 사연을 듣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강연 형식이다. 8일 첫 방송 이후 두 번째 방송 만에 ‘치료 받는 기분’이라는 호응이 나오고 있다. 20일 전화 인터뷰로 만난 오 박사는 “많이들 좋은 영향을 받으셨다고 하니 자체 평가로는 ‘지축을 흔들었다’고 표현하고 싶다”고 전했다. 이런 그의 소감은 예능계의 현주소와 맞닿아 있다. 연예인 가족이 나오는 오락형 육아 프로그램만이 가족 예능의 맥을 잇고 있는 상황에서 강연 형식의 가족 예능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그는 “시청률만 생각했다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며 “코로나19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면서 이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많아진 시기에 자신과 가족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금쪽’ 시리즈는 작품별 차이를 통해 위로의 폭을 넓힌다. ‘금쪽같은 내 새끼’가 아이들의 입장에서 아이를 이해하는 프로그램이라면, ‘금쪽 수업’은 성인이 된 나를 이해하기 위해 삶을 되돌아보는 인생 수업에 가깝다. 16일 방송에서 배우 이윤지가 “부정적인 감정 표출이 어렵다”고 상담하자 오 박사는 “부정적 감정도 나쁜 게 아니다. 그동안 착하게 잘 커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어릴 때도 듣지 못했던, 그리고 어른이라 더 듣기 힘든 위로였다. 오 박사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아이 시절에 자신을 투영해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의 장단점을 이해하게 된다”며 되돌아보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만 성인이 된 후에도 자신의 문제를 부모 탓, 가정 탓으로만 돌리는 건 지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분명 부모는 자식을 사랑했지만 그 방법이 잘못됐을 거다. 용서하란 말은 아니다. 그저 부모를 ‘불완전한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른이든 어린이든 약점은 있으니 대화하고 깨우치면 얼마든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방송과 강연 등 여러 곳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며 오 박사는 지금 시대 가족에게는 감정 소통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고 한다. 그는 “시대에 따라 가정환경은 달라지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다. 바로 부모는 자식에게 중요한 사람이고, 자식은 부모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기대한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방식에 변화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육아 회화’를 강조한다. ‘제대로 안 할 거면 하지 마!’라고 말하기보단 ‘열심히 하려는 자세가 가장 중요해’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전자처럼 말하면 알아듣고 분발할 거라 착각하지만 감정이 상할 뿐이다. 오늘 하루 한마디만 달라져도 나중에는 전혀 다른 곳에 도달해 있을 것”이라며 실천해보기를 권한다. 그는 가족의 기본은 ‘마음을 나누는 인생의 대화를 하는 관계’라고 말한다. 힘들 때 진솔하게 버팀목이 되어줄 거란 바람이 있기에 엄마, 아빠, 아이를 호명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일렁인다. 금쪽 시리즈를 통해 저마다의 상처를 극복하고, 따듯하게 결속돼 있는 동시에 각자 개인으로 존중해주는 가족이 늘고 있다. 별다를 것 없어도 매회 시청자들이 공감하고 눈물을 쏟아내는 이유일 테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깎지 않는 조각가. 수식어만으로도 우성 김종영(又誠 金鍾瑛·1915∼1982)은 유달랐다. 구태여 깎지 말라는 ‘불각(不刻)의 미’는 김종영이 한평생 읊었을 철학이다. 그의 고유함은 한동안 많은 평론가들의 이목을 끌어왔지만 한편으로는 그 뿌리가 무엇인지 쉽게 간파되지 않는다는 말이 따라다녔다. 묵은 질문의 실마리가 될 전시가 찾아왔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김종영미술관은 개관 20주년을 맞아 7일부터 특별전 ‘김종영의 통찰과 초월, 그 여정’을 열고 그의 작품을 서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다른 시선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김종영의 작품세계를 연구해온 원로 평론가 옥영식 선생과의 공동 연구 결과다. 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은 “김종영 선생은 동서양을 관통하는 추상이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 고유의 우주관을 표현해낼 수 있을지 고민했던 것 같다”며 “양과 음, 하늘과 땅과 사람 등 생성의 원리를 다룬 동양 사상이 작품 곳곳에서 나타난다”고 말했다. 김종영의 명성을 드높인 작품 ‘새’에서부터 그의 고뇌는 드러난다. 이 작품은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작품으로 한국 최초의 추상 조각이다. 당시 김종영은 동양 철학자 우암 김경탁(1906∼1970)의 논고 ‘실생 철학의 구성’(1953년)을 읽고 평생 소장했는데, 그 내용은 음양조화론과 맞닿아 있었다. 음양조화론과 함께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는 천지인삼재(天地人三才)가 통용됐다는 점을 접목해 보면 새의 머리 부분은 하늘, 수직으로 선 새의 가슴과 다리는 각각 사람과 땅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기존의 시각과는 상이하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은 작품 제목이 비슷하다는 이유 등으로 서양 현대조각의 아버지인 브른쿠시의 ‘공간의 새’와 연관된 작품이라고 해석했다. 그가 활동하던 1950년대는 우리나라에 서구 미술이 유입됐고 김종영 또한 이를 능동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김종영 관련 논문 중 상당수가 그의 작품과 서구 작품 간의 형태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어떤 영향 관계가 있었는지 살피는 것에 집중돼 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우주관을 염두에 두면 날아가려는 순간의 모습을 포착한 브른쿠시의 새는 김종영의 새와는 전혀 달리 보인다. 조각뿐 아니라 회화에서도 그의 작품관을 엿볼 수 있다. 1961년에 그린 드로잉 작품은 화면을 위아래로 나눠 마주 본 채 누워 있는 여인을 담았다. 수많은 드로잉 작품 중 하나로 여겨졌던 이 그림에서 새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림 위와 아래에 모두 영문으로 이름을 쓰고 그 옆에는 각각 상형문자로 ‘山’과 ‘水’를 썼다는 사실이다. 바탕색은 각각 양과 음의 색인 갈색과 파란색이다. 미술관은 주역(周易)에서 아래가 물이고 위가 산인 산수몽괘(山水蒙卦)가 있는 점을 볼 때 이 작품 또한 동양 사상을 품고 있다고 분석한다. 불각도인(不刻道人)이라는 그의 정체성은 여러 실험의 결정체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에서 “표현은 단순하게, 내용은 풍부하게”라고 방향성을 설명했다. 그의 절제적 표현은 작가의 이념 등을 표현하지 않고 재료 자체에 관심을 두는 서구 미니멀리즘과는 거리가 멀다고 해석할 수 있다.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 어긋나게 포개 놓아 단순미의 극치라고 평가받는 ‘작품 80-6’도 노자 도덕경 등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분석된다. 시선을 달리하면 해석이 달라진다. 이번 전시는 김종영의 작품을 김종영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작품을 새로 톺아볼 시발점이 될 것이다. 다음 달 27일까지. 무료.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목을 완전히 젖혀야 전체를 볼 수 있는 높이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밝은 색조. 숭유억불에 갇혀 왠지 소박할 것만 같은 조선시대 불화에 대한 편견은 첫눈에 사라졌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공주 신원사 괘불’(국보 제299호)은 높이 10m, 너비 6.5m, 무게 100kg에 이른다. 괘불(掛佛)은 규모가 있는 사찰에서 특별한 법회나 의식을 치를 때 야외에 걸어놓는 대형 불화를 말한다. 신원사 괘불은 1664년 6월 조성 이후 이번 전시까지 단 두 차례만 외부에 전시됐다. 첫 전시는 2005년 경남 양산 통도사의 성보박물관에서 이뤄졌다. 이번에는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지난달 28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조선시대 괘불은 그림에 능한 승려(화승)들이 그렸다. 신원사 괘불은 17세기 충청도에서 주로 활동한 화승 응열(應悅)이 만든 첫 번째 괘불이다. 그를 포함해 총 5명의 화승이 그렸다. 응열은 9년 후 충남 예산 수덕사 괘불도 그렸다. 괘불은 한번 제작하면 오랫동안 사용해 화승 1명이 2개 이상을 그린 예가 드물다. 신원사 괘불은 응열의 독특한 개성이 잘 드러난다. 기존 괘불들이 구름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것과 달리 화폭에서 등장인물 수를 줄이고 부처 주변의 빛을 강조했다.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위대함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섬세하게 장식한 옷과 반짝이는 구슬이 부처의 몸을 감싸고 있다. 색을 칠한 뒤 꽃이나 기하학 무늬를 더했는데 부처를 공경한 화승들의 정성이 느껴진다. 괘불에 그려진 부처는 ‘노사나불(盧舍那佛)’. 초록색 광배 위에 쓰인 한자를 통해 알 수 있다. 노사나불은 불교에서 오랜 수행을 거쳐 부처가 된 보신불이다. 그런데 불화 하단의 화기(畵記)에는 ‘석가모니불을 그렸다’고 적혀 있다. 이는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이 서로 다른 몸으로 태어나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전했지만, 결국 같은 여래라는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부처를 둘러싼 주변 인물도 찬찬히 살펴볼 만하다. 아래는 붉은 얼굴을 한 사천왕(불법을 수호하는 4명의 수호신)이 사방을 지키고 있다. 사천왕 주변에는 깨달음의 과정을 겪는 보살인 월광보살, 일광보살, 지장보살, 관음보살이 절구를 찧는 토끼가 그려진 달, 붉은 태양, 지옥에 있는 중생을 구해주는 구슬, 현실에 있는 중생을 위해 감로수를 담은 정병을 각각 들고 있다. 위쪽에는 부처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5명씩 무리를 지어 찾아온 십대제자들이 있다. 그 위로는 공경의 마음을 담아 복숭아를 공양하는 천인(天人) 2명이 있다. 부처와 눈을 맞추며 그림을 살피다 보면 종교적 장엄함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다. 불교사상을 잘 모르는 이라도 숨은그림찾기처럼 즐길 만한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9월 26일까지. 무료.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열두 살 아이에게 몇 살이냐고 묻는다. 우리라면 한 손으로 손가락 한 개를, 다른 손으로는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일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이전 파푸아뉴기니의 오크사프민 원주민 아이라면 오른쪽 귀를 만졌을 것이다. 이들은 숫자 개념이 없기에 특정한 신체 부위를 가리켜 수를 세기 때문이다. 수렵 채집의 물물교환 사회에서 숫자는 필요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일부 원주민이 농장과 광산의 일자리를 찾아 이주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이들은 화폐경제를 익히기 위해 수학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 사례는 수학은 보편적 언어라는 통념의 한계를 보여준다. 통상 만국 공통의 언어는 없지만 ‘1+1=2’라는 사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3년 미 항공우주국(NASA)의 지원을 받은 외계지적생명탐사 프로젝트에서 과학자들이 셈법 체계에 대한 정보를 외계에 보낸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수학은 사회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언어다. 수학도 사회적 산물이기에 불공정한 룰에 때로 이용된다. 미국 일부 주가 사용하는 재범 예측 프로그램 COMPAS가 내린 2개의 결정이 대표적이다. 수사 과정에서 나온 질의응답 등을 바탕으로 COMPAS는 물건을 훔친 10대 흑인 소녀에게 과거 경범죄 전과를 고려해 10점 만점에 8점을 부여했다. 재범 가능성을 높게 본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값의 물건을 훔친 중년 백인 남성에게는 3점을 부여했다. 그에게 무장 강도 전과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는 COMPAS에 입력된 변수가 빈곤 정도, 실업 여부, 미래에 대한 낙관 등 소수 인종에 불리한 데이터로 구성된 데 따른 것이다. 수학적 알고리즘에 편향이 들어가는 건 이를 사람이 만들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에서 여성이나 유색인종의 진출은 극히 부진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여성과 유색인종 집단에 재능을 가진 이가 적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히려 현재의 사회 시스템이 이런 상황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백인 남성 위주의 집단에 비백인 여성이 진입하기는 상대적으로 힘들며, 들어가더라도 만만치 않은 텃세에 시달릴 가능성이 클 것이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궁궐의 화려한 단청 옆으로 연꽃과 모란꽃이 하늘에서 비처럼 내린다. 9일 ‘궁중문화축전’이 열린 서울 종로구 경복궁 경회루 서쪽 소나무 숲. 20여 개의 야외 빈백에 30여 명이 거의 누운 자세로 편하게 앉아 있었다. 이들 앞에는 80인치 대형 발광다이오드(LED) TV 8대가 놓여 있었다. 화면에는 조선 궁궐과 단청, 연꽃 등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미디어아트 ‘조선의 문화, 꽃으로 피다’가 재생되고 있었다. 자칫 딱딱하게 받아들이기 쉬운 문화재에 첨단 기술이 말랑말랑한 감성을 불어넣고 있다. 궁중문화축전 미디어아트는 주로 전각이나 문루에 영상을 덧입히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전구나 네온관 같은 조명기구를 문화재 위에 직접 걸어놓으면 훼손 우려가 있어서다. 주재연 궁중문화축전기획운영단 감독(56·사진)은 “단순한 영상 투사가 아닌 문화재 유형별로 맞춤형 콘텐츠를 보여주고자 한다”며 “건조물은 평면이 아니기에 형태에 따라 화면 비율을 달리해야 한다. 건물 기둥, 지붕, 문 등과 어울리는 각각의 콘텐츠를 투사하는 방안을 기획 중”이라고 했다. 일각에선 미디어아트가 문화재 고유의 색을 가린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주 감독은 “색과 이미지 변형은 작가의 작품세계”라며 “미디어아트는 궁궐 건축과 역사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수단인 만큼 이를 통해 문화재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 감독은 올 하반기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합친 융합예술을 기획하고 있다. 경복궁 흥례문 앞에 강원 원주 한지로 만든 등불이나 전남 담양 대나무로 조성한 숲을 만들고 그 위에 영상을 입히는 식이다. 그는 “올해부터 궁중문화축전이 매년 두 번씩 열리는 만큼 봄에는 체험 프로그램을, 가을에는 미디어아트를 활용한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궁궐 내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지난해 축전 대표 프로그램 ‘창경궁, 빛이 그리는 시간’은 창경궁 산책로에 사슴이 뛰노는 장면을 홀로그램으로 연출해 호평을 받았다. 그는 “현재 축전에서는 전체 공간의 20% 남짓만 활용하고 있다”며 “관객들이 숨은 공간들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문화재청 산하 한국문화재재단은 유튜브 문화유산채널에 ‘극한직업’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한국 전통문화 창달에 기여하고 있는 ‘극도로 한국적인 직업’을 소개하는 코너다. 이 중 고(古)천문학자와 수중 발굴 조사원에 얽힌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봤다.○교과서 속 ‘천문의기’가 눈앞에 고천문학자는 과거에 일어난 천문현상이나 조상들의 천문학 연구 방식 등을 탐구하는 직업이다. 김상혁 한국천문연구원 고천문연구센터장(50)은 천문우주학 석사 과정에 들어간 1998년부터 고천문학 연구에 몸담았다. 당시 석사 지도교수였던 이용삼 충북대 교수가 세종대왕 때 천문 관측기구인 간의(簡儀) 연구 등에 매달린 영향이 컸다. 두 사람은 이후 천문의기(天文義器·옛 천체 관측기기) 복원에 나섰다. 김 센터장의 천문의기 복원 작업은 정사(正史)를 살피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조선시대 천문의기는 대부분 왕실에서 사용됐다. 이와 관련된 눈에 띄는 인물이 있으면 역사기록을 통해 그의 가계와 교우관계, 사회상 등을 광범위하게 알아본다. 동아시아 등 주변국에 대한 자료조사도 기본. 한자, 일본어, 아랍어로 쓰인 옛 문헌은 관련 분야 학자와 함께 연구한다. 이후 여러 문헌을 토대로 천문의기 설계도면을 만들고 시제품을 만든다. 최근 그가 복원한 건 조선시대 자동 물시계인 흠경각루(欽敬閣漏)다. 총 6년에 걸친 연구 끝에 2019년 복원한 흠경각루는 세종시대 제작된 자격루와 쌍벽을 이루는 물시계다. 김 센터장은 “흠경각루는 장영실이 세종을 위해 천상(天上)의 세계를 표현한 ‘천상 시계’”라며 “당시로선 최첨단 기계장치가 가미된 조선 최고의 시계”라고 강조했다. 학생 시절 교과서에서 과학기기의 명칭만 접하는 게 아쉬웠다는 그는 “최근 천문의기 복원이 진행되며 국민들이 우리의 과학기술사를 직접 살펴볼 수 있게 돼 기쁘다”며 “아직까진 연구 성과가 조선 초기에 몰려 있는 만큼 문헌에만 전하는 중후기 천문의기에 대한 실체 규명에도 힘쓸 것”이라고 밝혔다.○바닷속 영롱한 빛깔의 고려청자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동아시아에선 선사시대부터 해상 교류가 이뤄졌다. 고대, 중세에 이르기까지 각종 물건을 실어 나르다 침몰한 배들이 여럿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최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를 주축으로 문화재 당국이 수중 발굴에 인력과 자원을 동원하는 이유다. 노경정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과 학예연구사(40)는 학부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다. 노 연구사는 2007년 연구소 입사 후 잠수와 수중 촬영, 탐색 등을 배웠다. “물은 마시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는 그는 옛 시대상을 온전히 갖고 있는 침몰선이 타임캡슐과 같다는 생각에 수중 발굴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같은 해 10월 그는 충남 태안군 대섬에서 도자기가 보인다는 어민 제보를 받고 현장에 처음 투입됐다. 그때 푸른 바닷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고려청자와 목간을 봤다. 노 연구사는 “그 광경이 숨이 막힐 정도로 놀라워 호흡기를 놓칠 뻔했다”고 한다. 물속에서 2만5000점의 도자기를 걷어내자 이를 운반한 당시 선원의 인골이 드러나기도 했다. 보통 수중 발굴은 기후와 수온을 감안해 매년 4∼10월에 진행한다. 지난해 12, 13세기 중국 남송(南宋) 무역선의 대형 닻돌이 발견된 제주 신창리 수중 발굴의 경우 올해는 4∼6월에 실시되고 있다. 2019년 시작된 신창리 수중 발굴은 내년에도 이어질 예정이다. 올 7월에는 2011년 도굴범 검거를 계기로 시작된 전남 진도 명량대첩로 해역 발굴이 이뤄진다. 이곳은 고려시대 전남 강진에서 생산된 고급 청자를 개경으로 운송하는 루트로, 명량해전이 발발한 울돌목과 가까워 청자, 총통, 돌 포탄 등이 함께 발견되고 있다. 노 연구사는 “우리가 바다에서 발굴하는 흔적은 어찌 보면 당시 사람들에게는 큰 불행이었겠지만 이로 인해 밝혀지지 않은 과거를 후세에 전달할 수 있다”며 “수중 발굴을 통해 새로운 역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영화 ‘미나리’로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윤여정(74)이 트로피를 안고 8일 오전 귀국했다. 윤여정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걸쳤던 항공점퍼에 청바지를 입고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을 통해 들어왔다.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고려해 공식 행사나 인터뷰 없이 짧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2주 자가 격리에 들어갔다. 윤여정은 앞서 7일 소속사 후크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여우조연상 수상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고, 여전히 설레고 떨린다. 미국에서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잊지 못할 거 같다. 같이 기뻐해주고 응원해준 많은 분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고 귀국 소감을 미리 전했다. 소속사 측은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도록 최우선으로 지원할 예정”이라며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여러분 앞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최근 국내 대기업이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아 추진한 ‘한중 문화타운 조성사업’이 반중 여론으로 무산됐다.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는 중국풍 소품 등이 부른 시청자 반발로 2회 만에 폐지됐다. 중국의 과도한 자국 중심주의로 촉발된 반중 정서가 미중갈등 구도에서 한국의 대응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세계적인 동아시아 연구 석학 에즈라 보걸은 신간 ‘중국과 일본’에서 약 1500년에 걸친 중일관계를 돌아보며 중국과의 공존을 모색했다. 지난해 90세로 영면에 든 보걸은 하버드대 교수 시절 아시아센터 소장을 지내며 동아시아와 미국의 관계를 연구했다. 그는 한국 홍콩 싱가포르 대만을 일컬어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했고, 일본 정부의 군 위안부 역사 왜곡에 반대하는 등 급격한 우경화를 비판하기도 했다. 보걸은 이 책에서 “외부인이 조금 더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역사를 검토해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썼다. 그에 따르면 중일은 6세기 이래 현재까지 갈등과 협력을 거듭하며 교류를 통해 상대방의 성장을 견인해왔다. 고대 일본은 중국 승려를 통해 불교, 건축 등 다방면의 지식을 흡수했다. 근대에 와선 청일전쟁을 계기로 문호 개방에 소극적이던 중국이 일본을 근대화의 모델로 삼았다. 중일전쟁에 이어 냉전기간 양국은 대립했지만 경제 교류의 폭은 꾸준히 넓혔다. 특히 미중 데탕트 시대가 열린 1972년 이후 일본 기업들이 중국에 진출하는 등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중소분쟁을 계기로 소련에 맞서 중국, 일본, 미국이 공유해온 전략적 이해관계는 1991년 소련 붕괴로 사라졌다. 탈냉전 이후 군사력을 꾸준히 증강한 중일은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 분쟁을 맞는다.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미중갈등 구도에서 미국에 밀착하는 양상이다. 이에 중국은 과거사를 내세워 일제로부터 침략 경험을 공유한 한국 등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문제는 일본이 자신들의 역사적 과오가 주변국에 의해 과장됐다고 본다는 점이다. 저자는 “일본인들은 조상들이 나쁜 짓을 했다면 선천적으로 나빠서가 아니라 선택권이 거의 없는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이에 저자는 과거사에 대한 양국의 인식 전환을 제안하며 2007년 중일 정상 간 합의를 상기시킨다. 당시 이들은 양국 간 고위급 교류 확대와 더불어 다방면의 협력안을 제시했다. 신간 ‘보이지 않는 붉은 손’은 보걸의 시각과 대척점에 있다. 중국 공산당은 자본주의 세력을 분열시켜 사회주의를 퍼뜨리려는 이른바 ‘통일전선’ 공작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들과의 진정한 협력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중국이 2013년 조 바이든 당시 미 부통령의 아들 헌터의 사업을 암암리에 도우며 바이든을 포섭하려고 시도한 사실을 예로 들고 있다. 중국 정부가 역점을 두는 일대일로 역시 경제위기에 몰린 빈국들을 끌어들여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포석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동아시아 외부 저자들의 상반된 대중(對中) 시선은 중국과 역사·지리적으로 긴밀히 연결된 한국의 고민이 그만큼 깊어질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준다. 분명한 건 중국 혹은 일본에 의해 동아시아 역내 질서가 불안정해질 때 한국의 번영도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교훈일 것이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셰익스피어, 다윈, 뉴턴, 비틀스, 데이비드 호크니…. 500여 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역사를 빛낸 인물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78점의 초상을 모은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 전문 미술관인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의 전시품이 국내에 소개되는 건 처음이다. 결혼을 거부하고 단독 통치를 한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는 권력자인 여왕을 신성한 존재로 부각하려는 의도가 담겼다. 이 작품은 1575년경 궁정과 대신들의 의뢰를 받아 궁정화가 니컬러스 힐리어드의 화실에서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왕이 쥐고 있는 붉은 장미는 가문을 상징하며, 불사조 모양의 보석은 ‘결혼하지 않은 여왕’을 뜻한다. 이는 엘리자베스 1세가 왕조를 계승해 지속시켜 나갈 것이라는 확신을 드러낸다. 아이작 뉴턴의 초상화는 실제 뉴턴이 사망할 때까지 소장한 작품이다. 당시 동료를 비롯해 각종 기관에서 뉴턴 초상화에 대한 수요가 많았고, 뉴턴은 기꺼이 그 대상이 돼 줬다. 여러 영국 국왕을 그린 화가 고드프리 넬러의 손에서 태어난 이 작품은 넬러와 뉴턴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시점에 그려졌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은 뉴턴의 천재성을 드러낸다. 모델이 되길 좋아했던 뉴턴이나 소설가 찰스 디킨스와 달리 찰스 다윈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초상화 속에서 정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다소 어색한 이유다. 이 초상화를 그린 존 콜리어는 다윈을 둘러싼 논쟁에서 그를 옹호했던 토머스 헉슬리의 사위다. 초상화는 1881년 제작된 작품을 다시 그린 것이다. 다윈의 장남이 초상화미술관에 이를 기증하며 보낸 서신에서 “모작으로서 원본을 능가한 작품”이라 평한 바 있다. 국립초상화미술관은 현재 30세로 ‘Shape of you’ 등 유명 곡을 쓰고 활동하는 가수 에드 시런의 초상을 전시하며 그가 지닌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2016년 사망한 이라크 출신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초상은 시시각각 변한다. 하디드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을 만들고 여성 건축가 최초로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그의 얼굴은 액정표시장치(LCD) 화면에 나타나는데, 윤곽선은 그대로인 반면 하디드와 배경을 채운 색들은 매번 다르게 채워져 영원불멸하는 존재처럼 묘사됐다. 현대에 들어 초상은 그 방식과 역할에 혁신을 맞았다. 유명 동화 작가 루이스 캐럴은 사진 형식의 초상예술을 초기에 주창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다니던 대학의 학장 딸을 사진에 담았고, 훗날 이 소녀에게서 영감을 받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썼다. 유명한 프랑스 군인이자 외교관이었던 슈발리에 데옹의 초상은 정체성을 탐색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그는 태어나 49년을 남자로 살았으며, 나머지 33년은 여자로 살았다. 초상은 그가 여자로 살 때 그렸다. 공적으로 남녀 양성으로 살았던 인물의 모습이 국립초상화미술관에 전시되기는 그가 처음이다. 누군가를 묘사하는 것 이상으로 초상은 시공간, 죽음을 초월해 실제 인물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양수미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각각의 작품들과 눈을 맞추고 강렬히 다가오는 인물을 발견하셨으면 한다”고 전했다. 8월 15일까지. 성인 9000원, 청소년 및 어린이 6000원.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2012년, 대학 만화과를 갓 졸업한 젊은이가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성형학 세미나 현장에서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일이었다. 누군가 다가와 대뜸 “메디컬 일러스트도 그릴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성형외과 전문의라고 했다. 젊은이는 “그려본 적은 없지만, 그려보겠다”고 했다. 당찬 이 젊은이는 현재 네이버 웹툰 상위권을 장식하는 작가가 됐다. 2019년 12월 연재를 시작한 ‘중증외상센터: 골든 아워’의 홍비치라 작가(32)다. 인천에 있는 작업실에서 4일 홍 작가를 만났다. 그는 최근 중증외상센터 1부를 마치고 연재 이후 첫 휴재에 들어갔다. 3주간 가족, 지인들과 휴식을 취한 것도 잠시. 그는 22일 시작하는 2부 연재를 앞두고 고군분투하고 있다. 10m² 정도 되는 작업실 곳곳에는 주인공 백강혁 그림과 참고자료인 책 ‘CIBA 원색도해의학총서’ 세트(정담) 등이 있었다. 자신이 의학 정보를 시각화하는 ‘메디컬 일러스트레이터’라고 불리는 데 대해 홍 작가는 “샛길로 빠졌지만 하고 싶은 일과 이어졌다”고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만화가를 꿈꾼 그에게 23세에 들어온 7장의 인체 삽화 의뢰는 뜬금없었다. 당시 의학지식이 전무했기에 의뢰인에게 많은 조언을 듣고 1장당 100번 넘게 수정했다. 그에게는 우연처럼 찾아온 귀인이었다. 순정 만화체인 캐릭터와 지극히 현실적인 장기 그림이 어우러진 중증외상센터는 홍 작가의 정체성과 닮았다. 그는 메디컬 일러스트 일을 겸하며 2014년 로맨스물인 ‘카사노바의 키스’로 데뷔했다. ‘카사노바…’를 연재할 즈음 메디컬 일러스트 업체인 비치라코믹스를 창업했고, 2018년 로맨스물 ‘루나’를 연재했다. 그러다 2019년 한산이가 작가의 웹소설 ‘중증외상센터: 골든 아워’를 읽고 웹툰으로 만든다는 소식에 자청했다. 일주일에 한 편을 그려내기 위해 그는 휴일도 없이 하루 15시간 이상 일한다고 했다. 가장 어려운 건 원작을 각색하는 것. “웹툰 한 회를 만들려면 1만5000자인 소설을 5000자로 압축해야 해요. 그 작업을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는 매일이 설렌다고 한다. 그는 “제 인생에 이렇게 많은 의사들과 함께 일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 전문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그려냈을 때 성취감이 크다”며 “앞으로도 저만의 색깔로 사람들에게 여러 감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인천=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한 주 수고들 하셨습니다. 모범택시 타고 드라이브 한번 가셔야죠. 오후 10시 출발입니다.” 매주 금요일 밤, SBS 드라마 ‘모범택시’ 시청자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정모’를 한다. 그들이 모범택시를 기다리는 이유는 화끈한 액션과 통쾌함 때문. 드라마가 답답한 현실의 탈출구라는 것이다. 최근 한국형 다크히어로물이 인기를 끌고 있다. 다크히어로물의 특징은 주인공이 자신의 행위가 불법임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 모범택시에서는 “법 테두리 안에서 사라져야 좋은 거죠.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범죄가 되는 거니까”라는 강하나 검사(이솜)의 대사를 통해 김도기(이제훈) 등의 사적 복수가 범법행위임을 명확히 한다. 김도기 등은 범죄 집단에 잠입해 관련자들을 죽이거나 납치한 뒤 장기매매까지 시도한다. tvN ‘빈센조’는 더 적나라하다. “악은 악으로 처단한다”는 부제 하에 빈센조는 비리를 저지르는 바벨그룹뿐 아니라 바벨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자신도 악한 자로 규정한다. 다크히어로는 선량하게만 그려졌던 과거 히어로와 대비된다. 한국판 슈퍼히어로물로 각광받았던 KBS ‘각시탈’(2012년)에서 종로경찰서 형사 이강토(주원)는 일제에 맞서 싸우며 조선인에게 위로를 주는 인물이지만, 이름 없는 영웅의 운명을 택했다. 현실적인 캐릭터도 속속 등장했다. KBS ‘김과장’(2017년)에서 회계 부정의 대가인 김성룡(남궁민)은 악을 처단하며 개과천선하고, OCN ‘경이로운 소문’(2021년)에서 소문(조병규) 등은 생명을 연장하는 조건으로 악귀 사냥꾼인 카운터가 됐지만 진심으로 임무에 임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유일무이하고 무결한 히어로에 대한 숭배보다는 조금씩 결핍을 갖고 살아가는 일반인도 조력자가 될 수 있다는 흐름이 강해졌다. 다크히어로물은 이에 더해 악을 빠르고 통쾌하게 처단하는 방법이 폭력이라는 현실을 꼬집는다. 빈센조 19회에서 “장한석(옥택연) 같은 인간을 징벌할 최선의 법은 존재하지 않아요. 차선의 법도 없고요. 그래서 변호사님의 차악을 따르는 거예요”라는 홍차영 변호사(전여빈)의 대사가 그렇다. 다만, 악을 처단하는 폭력적 방법에 무감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편 피해를 입은 약자들의 사건 이후 삶까지 조명한다는 점이 코리안 다크히어로물의 특징이라는 분석도 있다. 모범택시는 우리 사회에서 커다란 공분을 산 조두순 사건, 웹하드 양진호 회장 갑질 사건, 염전 노예 사건 등을 다룬 후 5회 말 히든 트랙에서 각 회차에 나온 피해자들이 서로 스쳐지나가는 모습을 그렸다. 피해자들이 일상을 계속 이어가고 있으며 어디에나 피해자가 있다는 점을 암시한 것이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15일 21명의 여성이 유서를 쓰고 북한으로 향했다. 이들은 북한 주민들의 전쟁 피해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구성된 ‘국제민주여성연맹 한국전쟁 조사위원회’ 소속이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반(反)식민주의를 주창하며 만들어진 여성단체로, 6·25전쟁 당시 북한 지역을 조사한 첫 외부 조사단이었다. 저자는 그동안 활동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발자취를 추적했다. 21명의 여성 조사위원은 덴마크와 알제리, 아르헨티나, 중국 등 18개국에서 왔는데, 이 중 6명은 당시 소련, 동독 등 공산권 출신이었다. 이들은 열흘간 신의주, 평양 등 10여 개 도시를 조사했다. 중공군 참전 후 연합군의 전방위 폭격으로 인해 폐허 속 토굴을 파고 사는 주민들을 목격했다. 이들은 정당한 사유로 시작된 전쟁이라도 정밀폭격이 아닌 인구밀집지역에 대한 폭격은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매카시즘 등 반공주의로 인해 소련의 선전 팸플릿으로 폄하됐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이 책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제3세계 여성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고자 한 이들을 통해 냉전사와 여성주의, 평화운동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다. 조사위원들은 현장 조사 때 “전쟁이 언제 끝나느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이들이 한반도를 방문한 지 70년이 지난 현재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현실이 안타깝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