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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에서 하룻밤 잘 수 있는 ‘궁(宮)스테이’를 정부가 추진한다. 문화재청은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1912∼1989)와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 여사(1901∼1989)가 1989년까지 살았던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일대의 전각을 VVIP급 객실로 꾸며 숙박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29일 밝혔다. 또 최근 복원된 경복궁 내 외소주방(外燒廚房)을 본래의 기능을 살려 조리가 가능한 시설로 개조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문화재로만 보존돼 오던 궁궐 내 일부 전각을 개방함으로써 관광 등에 적극 활용해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취지다. 현행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국가지정문화재는 훼손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활용할 수 있다. 이 안은 문화재위원회의 승인을 거쳐 빠르면 2017년 시행을 목표로 추진 중이다. 헌종이 1847∼1848년 지은 창덕궁 낙선재 권역은 본채와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 등 총 9개 건물로 구성됐다. 헌종의 서재로 지어진 낙선재 본채와 나란히 붙어 있는 석복헌과 수강재는 각각 헌종의 후궁(경빈 김씨)과 할머니(순원왕후)의 거처로 쓰였다. 근대에는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가 1960년대 일본에서 귀국해 1989년 숨을 거둘 때까지 이곳에서 머물렀다. 현재 낙선재 권역은 마당까지만 출입이 가능하고 건물 안은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구역’이다. 문화재 훼손 논란을 피하기 위해 문화재청은 낙선재의 여러 전각 가운데 보물 제1764호로 지정된 본채 건물은 개방을 하지 않고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궁스테이 객실로 추진 중인 전각은 석복헌과 수강재로, 낙선재 권역에는 포함되나 잦은 증개축으로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되지는 않았다. 문화재청은 두 전각에 냉난방 시설과 화장실을 갖춰 꾸밀 예정이다. 경빈 김씨의 생활공간이었던 석복헌은 168년 묵은 목조건물. 이중의 행각으로 둘러싸여 포근한 느낌을 준다. 대청마루를 지나면 가로, 세로 약 5m 크기의 안방이 나오고 한쪽에는 여종이 머무르는 윗방이 딸려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예부터 집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곧 폐가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문화재도 활용을 통해 더 오래 보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해외에서는 문화재 활용과 보호의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궁궐이나 고성(古城), 수도원 등을 숙박시설로 사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영국의 문화재 보호기관인 내셔널트러스트는 1666년 지어진 클리브덴 성(城)을 하루 숙박료가 최대 300만 원이 넘는 고급호텔로 탈바꿈시켰다. 이곳은 호텔 전문업체가 38개 객실을 운영하는데 연간 숙박객이 1만2000명에 이른다. 스페인 역시 그라나다와 세고비아, 톨레도 등 유서 깊은 도시의 고성과 수도원, 요새 등을 개조한 ‘파라도르(parador) 호텔’을 93개나 운영하고 있다. 안창모 경기대 교수(건축학)는 “우리나라도 문화재를 더이상 화석화하지 말고 국민들의 삶과 함께할 수 있도록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604년 4월 두만강변 여진족 ‘노토 부락(老土 部落)’. 새벽녘 어스름 속에서 적군 병사 3000명이 출몰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놀란 여진족 병사들은 서둘러 무기를 챙겨 산꼭대기로 달아났다. 군대가 자취를 감춘 부락은 이미 무주공산. 토벌군은 가옥 1000여 채를 불사르고 땅속에 묻어둔 저장 식량을 파내 태웠다. 이어 밭에 뿌린 곡식 종자마저 찾아내 일일이 짓밟았다. 생계수단을 아예 뿌리 뽑는 강경한 조치였다. 이로써 경작지 면적이 40여 리에 달해 여진족 부락 중 가장 번성했던 이곳은 하루 만에 황무지가 됐다. 자, 여기 등장하는 적군은 누굴까. 역사에 해박한 독자가 아니라면 인근의 다른 경쟁 부족이나 명나라 관군을 떠올리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 철저한 토벌을 감행한 주체는 조선 관군이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외세에 당하기만 한 문약(文弱)한 이미지의 바로 그 조선이다. 임진왜란 이후 북방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진 틈을 타 여진족이 끊임없이 약탈을 자행하자 본거지 소탕에 나선 것이다. 이 책은 대마도나 여진족 토벌처럼 조선왕조 500년에서 극히 드물었던 해외 정벌을 집중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독특한 내용에 걸맞게 저자들은 모두 국방부에서 근무한 군사(軍史) 편찬 전문가들이다. 그래선지 해외 정벌의 역사적 배경은 물론이고 군대의 움직임과 전법 등이 폭넓게 다뤄져 흥미롭게 읽힌다. 이 책에서 다루는 조선시대 해외 정벌은 대마도 왜구 정벌, 여진족 토벌, 나선(러시아) 정벌이다. 방어전을 기본으로 했던 조선의 군사정책상 국외에서 군사작전은 이 세 가지가 거의 전부였다. 조선은 고려 말부터 준동한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 여진족을 토벌하고 그 유명한 4군 6진을 개척해 영토로 편입시켰다. 관직과 곡식으로 회유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했지만 여진족의 약탈이 극심해지면 근거지에 대한 토벌 작전에 나서는 식이었다. 문제는 부족 단위로 산발적으로 공격하는 여진족의 게릴라전 패턴 때문에 한 번의 대규모 군사작전으로 이들을 무력화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강조한 대외 정벌이 결국 절반의 성공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지적한다. 조선 위정자들의 어처구니없는 현실 인식이 결정적인 한계로 작용했다. 소중화(小中華) 사상에 젖어 여진족과 왜구를 오랑캐라며 깔보고 제대로 대처하지 않다가 온갖 수모를 당하기 일쑤였다. 예컨대 1419년 5월 13일 왜구가 불과 8일 만에 장소를 옮겨 황해도 해주 연평곶이를 공격했지만 방비에 소홀했던 조선 수군은 이내 포위를 당하고 만다. 조전절제사 이사검은 왜구에 아전을 딸려 보내 쌀 5섬과 술 10단지를 주고 퇴각할 것을 읍소했다. 정규군이 아닌 도적 떼에 불과했던 왜구에게 한 나라의 정규군이 뇌물을 바친 셈이다. 가장 압권은 승냥이 떼 운운하며 경멸한 여진족의 청나라에 패해 1637년 인조가 ‘3배 9고두례’의 노예 의식을 치른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한 번 절을 올릴 때마다 머리를 세 번씩 땅바닥에 부딪치는 이 의식에 인조의 이마는 피투성이가 됐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만주지방에서 항일 독립투쟁사 취재차 중국 동북부를 다녀왔다. 주요 도시를 이동하는데 차로 4, 5시간씩 걸리는 광활한 만주벌판에는 한민족의 숨결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우리말 간판과 더불어 중국 사람들이 흔히 수전(水田)이라고 부르는 논을 볼 때마다 어딘지 모를 친근함이 느껴졌다. 한반도와 지리적 정서적으로 가까운 만주가 해외 항일투쟁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 지린(吉林) 성 메이허커우(梅河口) 시의 혁명열사 능원에 소개된 항일투사 15명 가운데 3명이 한국인이었다. 이 중 우당 이회영 선생을 전시한 코너에서는 그가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세세히 소개하고 있었다. 마치 한국의 독립기념관에 와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이와 관련해 광복 70주년(중국에서는 전승 70주년)인 올해 양국에서 항일 공동투쟁사를 기념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독립기념관은 이달부터 중국 광둥(廣東)혁명역사박물관과 ‘황푸(黃포) 군관학교와 항일전쟁’을 주제로 전시회를 열고 있고, 중국 쓰촨(四川) 성 청두(成都) 시도 다음 달 개막하는 ‘외국인 항일열사 추모 특별전’에 한국인 전투비행사 2명을 소개하기로 했다. 앞서 지난해 7월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의 승전 70주년과 한국의 광복 70주년을 공동으로 기념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이와는 다른 미묘한 분위기도 감지됐다. 최근 지린 성 투먼(圖們)에서 열린 봉오동전투 승전 95주년 기념식은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고 한다. 한국과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관계자 40여 명이 참석한 기념식에 중국 공안이 들어와 무전으로 상황을 보고하는 모습이 목격됐다. 봉오동전투는 1920년 6월 7일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벌어진 첫 대규모 격돌이었다.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독립군은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고,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 승리로도 이어졌다. 이 때문에 기념식에서 공안의 감시가 중국 내 소수민족의 민족주의 움직임에 민감한 중국 정부의 속내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앞서 장백산(백두산의 중국 측 영토)과 만주지역을 여행하던 일부 한국인들이 공공연히 “만주는 우리 땅”을 외치는 모습이 중국 측을 자극한 적도 있다. 특히 항일투쟁사 연구에서도 만주지역 한인들의 활약상을 강조하는 데 대해 “너희만 일본에 맞서 싸웠느냐”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는 중국인이 적지 않다는 얘기도 들린다. 봉오동전투 기념식에 참석한 한 인사는 “중국인들에게 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고 전했다. 중국 땅에서 전개된 항일투쟁사를 바라보는 한중 양국의 시각이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동의 적을 맞아 함께 피를 흘렸다는 사실만은 세월이 흘러도 바뀌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신뢰만 있다면 장강(長江)의 작은 지류쯤은 문제가 되지 않을 터다.김상운 문화부 기자 sukim@donga.com}

신라 왕릉인 경주 금관총(金冠塚)이 원형 복원돼 내년 상반기쯤 일반에 공개된다. 이로써 금관총은 본래의 네모꼴(방형·方形) 봉분으로 복원되는 첫 신라고분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1976년 복원된 천마총도 원래는 방형이었지만 원형(圓形)으로 잘못 복원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23일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최근 마무리된 중앙박물관의 금관총 재발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고분을 원형 복원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발굴이 끝난 고분을 그대로 메워 방치하는 것보다 옛 모습대로 복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에 따른 것이다. 문화재청과 중앙박물관, 경주시 관계자들은 최근 두 차례 실무회의를 열고 복원, 공개 방식과 예산확보 방안을 논의했으며 경주시가 국고 보조금을 지원받아 복원을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 문화재청 고위 관계자는 “서울 종로구 피맛골의 조선시대 유구처럼 유리로 고분 단면을 보여주는 것을 포함해 다양한 전시방식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금관총의 재발굴에서는 고분의 전체 규모와 형태, 축조 방식 등이 새롭게 밝혀졌다. 특히 목곽을 둘러싼 돌무지(적석)의 평면구조가 모서리를 둥글게 만든 방형이며, 수직 단면은 50도의 경사를 이루는 사다리꼴임이 확인됐다. 고고학계는 금관총 천마총 등 신라시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 원형이 아닌 방형 고분인 것으로 보고 있다. 왕릉급 무덤인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전체 규모도 파악됐다. 발굴단이 봉토 끝부분의 곡률을 계산한 끝에 금관총 장축의 길이가 본래 46m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지름이 47m인 천마총과 비슷한 대형 고분이어서 귀족 무덤보다는 왕릉일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이는 금관총에서 출토된 칼에서 ‘이사지왕(이斯智王)’ 명문이 발견된 이후 피장자의 신분을 둘러싼 논란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또 금관총에서 돌무지를 쌓을 때 통나무를 엮어 만든 틀인 ‘목조가구’를 사용한 흔적이 발견돼 눈길을 끈다. 목조가구 안에 돌을 쌓는 축조방식은 황남대총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이 밖에 시신이 놓이는 목곽 밑에 큰 강돌을 70cm 이상 두껍게 깔았다는 점과 봉분에 성분이 다른 점토를 교대로 쌓아올린 사실도 향후 복원할 때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22일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한국 일본 미국 독일의 4개국 한일관계 전문가들이 모여 얼어붙은 양국 관계를 풀기 위한 해법을 제시했다. 이날 한일 정상은 자국(自國) 주재 상대국 대사관에서 치러진 기념행사에 교차로 참석했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진정한 과거사 사죄를 시작으로 동아시아 3국이 상호 협력의 경험을 쌓아 평화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들은 동북아역사재단이 주최한 ‘한일협정 50년의 성찰과 평화공동체의 모색’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이날 대담은 재단 회의실에서 이장희 교수의 사회로 진행됐다. ▽이 교수=아베 신조 정권의 우경화와 관련해 일본 일반인의 역사 인식에도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아라이 교수=최근 도쿄 코리아타운에서 공격적인 혐한 시위나 ‘헤이트 스피치’가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데도 일본 정부가 제재하지 않고 있다. 조선인학교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 등을 보아도 일반인의 인식에 제국주의 의식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 것 같다. 이는 식민주의 청산을 경시하는 역사 인식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교수=중국의 급속한 부상으로 동북아에서 ‘한중 vs 미일’의 갈등 구도가 펼쳐지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이런 구도가 향후 동북아에서 역사 화해와 평화공동체 성립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가. ▽더든 교수=아베와 그의 지지자들은 동북아 역사 이슈를 안보 이슈로 전환해 마치 한중 대 미일 블록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겉만 보면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런 대치 상태를 얘기하는 것은 비관적인 전망이 현실화되는 일종의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페니히 교수=중국이 예전의 패권적 지위로 되돌아가려고 한다는 시각이 있는데,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과 다르다. 초강대국 미국이 동아시아에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중국의 부상은 그리 염려할 것이 못 된다. 중국이 아직 정치적으로는 ‘사춘기’에 머물러 있어 미국 등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과거사를 시인하고 한국과 협력해 세력균형을 이루는 것이 유리하다. 이런 측면에서 양국이 첨예한 역사 문제보다 환경이나 이민 문제처럼 서로 긍정적인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교류를 우선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더든 교수=페니히 교수 의견에 공감한다. 과거 중국이 동아시아 중심에 있을 때에는 환경 문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환경 이슈뿐만 아니라 비핵화 등에서도 중국과 러시아까지 끌어들여 적극 협력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최근 울릉도에 있는 기후 변화 감시소를 가본 적이 있는데 이런 기후 변화 모니터링에서 3국이 함께 협력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이 교수=이 밖에 동북아 3국의 역사적 화해를 위한 아이디어를 제시해 달라. ▽더든 교수=워싱턴의 당국자들은 듣기 싫어하겠지만 미국도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사실 미국은 베트남전 발발로 한국에 투입한 군사 자원을 베트남으로 돌리기 위해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을 양국에 압박했다. 여러 잠재적 문제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미국이 개입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페니히 교수=독일의 과거사 청산은 종교인 등 여러 계층이 참여했기에 가능했다. 소수의 정치인이 모든 걸 해결해주기를 바라면 안 된다. 특히 동아시아 젊은이들의 참여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 한국은 케이팝처럼 다른 나라를 끌어 모을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동아시아 3국이 한자문화권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이 교수=8월에 발표될 아베 총리의 담화는 과거사를 시인한 고노 담화를 계승해야 한다. 한국과 중국에 끼친 고통을 재확인하고 진정한 반성의 뜻을 표명해야 한다. 또 한일 역사 화해를 정부에만 맡겨선 안 되고, 시민사회가 주도해야 진정한 역사 화해와 동북아 평화공동체 실현이 가능할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전쟁이 도리어 번영을 가져온다?’ 이 책은 도발적이다. 충분히 논란을 일으킬 만한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6·25전쟁 발발 65주년을 맞아 온갖 반전(反戰) 서적이 쏟아지는 마당에 아마도 가장 튀는 신간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 책의 최대 매력이다. 고리타분한 도덕주의 설교가 아니라 다양한 고고학 데이터와 인류학 관찰기록으로 탄탄한 반전(反轉)의 논리를 세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부터 세게(?) 나온다. ‘대한민국은 전쟁의 산물이다. 2차 대전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냉전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 역시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의 논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루소보다 홉스의 성악설에 가깝다. 통제되지 않은 개인의 폭력적 성향으로 인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진다. 이른바 ‘평화로운 원시시대’는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 오히려 수많은 전쟁을 거쳐 부족이 통합되고 국가가 생기면 사인(私人)들 사이의 처절한 폭력은 점차 사라지고 평화와 번영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자유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인간들이 순순히 리바이어던(Leviathan·국가권력)에 자신을 예속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고대 어떤 기록을 뒤져봐도 사람들이 합의에 의해 그냥 모여서 큰 사회를 형성했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모두 폭력이나 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강력해진 리바이어던이 전체주의 괴물로 나타난 금세기는 고대보다 더 평화로운 시대인가. 양차 세계대전의 대량학살을 떠올리면 도저히 수긍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러나 고고학과 인류학의 최신 연구 성과는 인류가 갈수록 평화에 가까워졌음을 보여준다. 이 책에 따르면 1, 2차 대전이 벌어진 최근 100년 동안 전 인구의 1∼2%에 해당하는 1억∼2억 명이 전쟁 등 온갖 폭력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에 비해 석기시대의 소규모 사회에서 폭력으로 사망한 인구비율은 현대보다 무려 10배나 높은 평균 10∼20%에 이른다. 고대 사회의 가족묘를 발굴할 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무기가 함께 출토된다는 저자의 경험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만큼 고대인들이 상시적 폭력에 노출돼 있었다는 의미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시대 적석목곽묘를 비롯한 삼국시대 무덤에서 ‘둥근 고리 큰칼(環頭大刀·환두대도)’ 등 다량의 무기가 발견됐다. 저자는 전쟁이 평화를 가져오는 역설적인 현상을 다양한 역사적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대표적인 예가 로마제국이다. 로마가 군사력으로 대변되는 하드파워와 문화적 혜택의 소프트파워로 주변 야만족을 끌어들이면서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마제국에 의한 평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로마가 ‘정주형(定住型) 도적(stationary bandits·한 곳에 머무르는 도적)’이라는 점에서 다른 제국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소위 지속가능성의 관점에서 로마가 속주민들의 기본적인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착취하지 않는 적절한 규제 강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미국인 교수가 쓴 글답게 팍스 로마나에 대한 시각은 고스란히 ‘팍스 아메리카나’로 이어진다. 이 대목에서는 마치 공화당 매파 정치인이나 주장할 법한 내용이 나와 약간의 불편함이 느껴질 수도 있다. 세계 평화를 위해 미국이 상황에 따라 국제관계에 적극 개입해 경찰국가 노릇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저자는 이렇게 썼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이야기했듯 미국은 여전히 ‘지구의 차선적 희망’이다. 만일 미국이 실패하면 전 세계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 미국은 앞으로 다음 40년 동안에도 군비를 유지해야 하고 믿을 만한 리바이어던으로서 항상 준비된 자세를 갖춰야 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사진)가 미국 로스앤젤레스 영화제의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 대상을 받았다. 한국 영화가 로스앤젤레스 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수상한 것은 처음이다. 노부부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지난해 11월 개봉해 국내에서 480만 명의 관객을 끌어 모았다. 13일 로스앤젤레스 영화제 첫 상영회에서 전석 매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진모영 감독은 “사람과 사람이 사랑으로 존중하는 진심을 읽어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소감을 밝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일 외교당국이 후원하는 양국 수교 5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가 열린다. 올 들어 국교 정상화와 관련해 양측 외교부가 후원하는 행사가 열리는 것은 처음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17∼19일 제주 하얏트리젠시 호텔에서 한국 외교부와 일본 외무성 후원으로 ‘한일관계의 과거를 넘어 미래로’ 국제학술회의를 연다”고 16일 밝혔다. 동북아역사재단을 비롯해 현대일본학회, 한국국제정치학회,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일본국제정치학회, 현대일본학회, 현대한국조선학회, 도쿄대 한국연구부문, 현대한국조선학회, 일한문화교류기금이 공동 주최한다. 이번 학술대회에는 한일관계 연구에서 손꼽히는 학자들이 대거 참석한다. 일본에서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이오키베 마코토 효고 지진기념 21세기 연구기구 이사장,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교수, 와카미야 요시부미 전 아사히신문 주필, 이즈미 하지메 시즈오카현립대 교수, 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교수 등 30여 명이 나선다. 한국에서는 김학준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과 김태현 국제정치학회 회장, 이원덕 현대일본학회 회장, 진창수 세종연구소 소장 등 100여 명의 학자가 참여한다. 사흘 동안 참석자들은 9개 분과로 나눠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분야에서 한일관계의 역사와 실태를 점검하고 새로운 한일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모색한다. 한배호 고려대 교수(현대일본학회 초대 회장)와 이오키베 마코토 이사장이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의 회고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각각 기조강연을 할 예정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우리 민족의 조상이 시베리아 유목민이라는 북방기원설은 사실이 아니며, 기원전 8∼9세기 고조선이 동시대의 스키타이 문화와 대등한 수준에서 교류했다는 주장을 담은 논문이 나왔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는 최근 발표한 ‘스키토-시베리아 문화의 발생과 동북아시아의 청동기시대’ 논문에서 러시아 시베리아 남부의 아르잔(Arzhan) 1호 고분과 중국 랴오둥(遼東) 반도 남쪽 끝에 있는 강상묘(崗上墓)를 비교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아르잔 1호 고분은 기원전 9세기경 조성돼 흑해 연안보다 발생시기가 앞서는 스키타이 문명의 기원지. 그런데 비슷한 시기(기원전 8세기)에 만들어진 고조선 문화의 강상묘가 아르잔 1호 고분과 일부 유사한 특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유사점은 두 고분 모두 한가운데 족장급의 무덤을 먼저 만든 뒤 이를 중심으로 친족이나 측근의 무덤을 방사형으로 배치한 ‘집단묘’ 형태라는 것이다. 예컨대 아르잔 1호 고분은 지름 120m, 높이 3∼4m의 대형 봉분 안에 통나무로 사방을 두른 목곽이 70여 개나 들어 있다. 이들은 중앙 목곽을 중심으로 마치 거미줄처럼 뻗어 있다. 강상묘 역시 동서 19m, 남북 20m의 직사각형 무덤 안에 중앙 석곽묘를 중심으로 23개의 석곽이 들어서 있다. 강상묘에서는 총 144개체의 인골이 출토됐다. 중심부를 둘러싼 주변 묘역이 서로 다른 집단에 의해 점진적으로 채워진 점도 비슷하다. 특정 구역은 빈 공간이 많은 데 비해 다른 구역은 무덤을 조성할 공간이 부족해 목곽이나 석축을 덧댄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개별 구역에서 나온 청동기 등 부장품의 종류가 조금씩 다른 것도 여러 집단이 함께 무덤을 만든 사실을 뒷받침한다. 강 교수는 “두 문화권에서 느슨한 형태의 부족 간 통합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며 “두 고분의 유사성은 고조선 문화권이 시베리아 주변 초원지대와 교류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유목민이 만든 아르잔 고분과 농경민이 조성한 강상묘는 2000km 넘게 떨어진 두 곳의 거리만큼이나 본질적으로 다른 구조를 지닌다. 아르잔 고분이 통나무로 주변을 두르고 측신굴신장(側身屈身葬·마치 말을 타는 형상처럼 피장자를 옆으로 비스듬히 뉘어 매장하는 것)의 매장법을 취한 반면, 강상묘는 돌로 석축을 쌓고 시신을 화장했다. 이는 두 문명이 비슷한 시기에 독립적으로 존재한 별개의 문화권이라는 점을 시사한다는 것. 시베리아 유목민이 한민족의 뿌리라는 북방기원설이 성립될 수 없는 셈이다. 기원전 8∼9세기 무렵 두 지역에서 비슷한 유형의 사회적 변환기를 맞았다는 정황을 보여주는 흔적도 나왔다. 아르잔 고분과 강상묘에서 비파형동검처럼 발달된 청동기가 등장했고, 이후 조성된 무덤에서 권력집중이 심화되는 경향이 공통적으로 발견된 것이다. 예컨대 아르잔 1호에 뒤이은 아르잔 2호 고분과 강상묘 다음의 누상묘(樓上墓)는 무덤의 전체 규모가 거대해졌지만, 내부의 무덤 수는 오히려 줄고 부장품은 더 풍부해졌다. 느슨한 부족연합체에서 특정 집단의 지배층으로 ‘권력 쏠림’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강 교수는 “기원전 8∼9세기 시베리아와 랴오둥 지역이 비슷한 사회발전 단계를 겪었다는 사실은 시베리아 유목민이 한민족의 기원이 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실증한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광복 직후 ‘대일(對日) 청구권’을 둘러싼 한일 갈등에서 미국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는 사료가 발굴됐다. 제2차 세계대전 교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기 힘들었던 국제정치의 현실이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 따른다. 박진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최근 발표한 ‘한일회담 관련 국사편찬위원회 수집 자료 연구’ 논문에서 1950년대 한일회담이 이뤄질 당시 미 국무부와 한국·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 사이에서 오간 공문을 입수해 분석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국(NARA)에 보관된 당시 재외공관 문서 중에는 ‘한일관계(ROK-Japan Relations)’라는 주제로 따로 분류된 문서철이 존재할 정도로 양국 관계는 미국에 중요한 외교 현안이었다. 미국이 한일협정의 막전막후에 깊이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중 주목할 만한 문건은 1952년 4월 29일 존 앨리슨 대일평화조약 수석고문 보좌역이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에게 보낸 일본의 ‘대한(對韓) 청구권’ 요구에 대한 문건이다. 앞서 일본 정부는 한국의 대일 청구권 요구에 대해 “한국 내 일본인들의 사유재산 몰수는 국제법 위반”이라며 역으로 대한 청구권을 주장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적반하장식 요구’라며 강력히 반발하면서 일본의 주장에 대한 미국 측 입장을 요청했다. 앨리슨은 양 대사에게 보낸 문건에서 “대일평화조약과 미 군정청 법령에 따라 한국 내 일본인들의 모든 권리와 청구권은 상실됐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한 가지 단서를 붙였다. “일본의 대한 청구권 문제는 한일 양국이 특별협정에 따라 적절히 처리할 것을 미국은 권고한다”고 밝힌 것. 법적으로는 일본의 역청구권 요구가 적법하지 않다고 명시하면서도 한일협상으로 책임을 떠넘긴 셈이다. 박 편사연구관은 “미국이 냉전시기 동아시아 안보전략을 고려해 정치적으로 일본의 체면을 세워준 것으로 풀이된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애매한 태도는 오히려 한일 갈등을 촉발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양국이 이후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각서를 자국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며 끝까지 맞섰기 때문이다. 결국 한일회담은 1953년 10월부터 무려 4년 6개월이나 결렬된 끝에 미국의 압력으로 가까스로 1958년 4월에야 재개됐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공자의 철학이 서구 계몽주의와 근대화를 낳았다.’ 누군가 이런 주장을 내놓는다면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반응부터 터져 나올 것이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구도에 익숙한 일반인들에게 르네상스 이후 동서양의 사상은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린 별개의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서구 근대화에 대한 상식을 뒤엎고 색다른 주장을 내놓고 있다. 정치, 문화, 사상, 기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공자로 대표되는 중국 문명이 유럽 근대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저자는 동아시아 문명이 크게 두 시기에 걸쳐 유럽에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었다고 본다. 우선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진 14∼16세기 유럽 르네상스기에 중국의 물질문명이 집중적으로 수입됐다. 대항해 시대를 가능케 한 나침반과 화약은 물론이고 근대 지식체계를 낳은 금속활자 등이 대표적이다. 물질적 풍요에 뒤이어 사상이나 문화에 대한 수요가 커지듯 공자의 사상이 유럽 식자층에 깊숙이 침투해 18세기 서구 계몽주의로 이어졌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를 두고 호주의 정치학자 존 아서 패스모어는 “17, 18세기 유럽 사상계의 변화는 유럽 철학의 공자화”라고 규정했다. 독일 계몽주의 철학의 거두 크리스티안 볼프의 시련이 가장 극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신학, 철학, 수학 등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볼프는 1721년 독일 할레대에서 공자를 찬양하는 강연을 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나 17년간 고국을 떠나 있어야만 했다. 볼프는 문제의 강연에서 “공자는 덕과 학식이 뛰어났고 신의 섭리에 의해 중국에 선물된 사람이었다. 철학자들이 다스리는 곳에서 국민이 행복한 것은 당연하다. 중국의 오제(五帝)는 플라톤이 말한 이상적인 철인 정치가들이다”라고 주장했다. 미·적분학을 창시한 천재 수학자 라이프니츠도 과학기술을 제외한 정치와 도덕 분야 등에서 중국이 우월하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 책은 철학뿐 아니라 유럽의 자본주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경제학마저도 공자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고 주장한다. 애덤 스미스의 사상적 스승인 프랑스 중농주의 경제학자 프랑수아 케네 역시 공맹(孔孟)의 농본주의와 무위이치(無爲而治·성인의 덕을 통해 백성에 대한 간섭 없이도 저절로 다스려지는 경지)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가 의도치 않게 공공의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역시 공자의 무위이성(無爲而成)과 같은 개념이라고 설파한다. 저자는 애덤 스미스를 비양심적인 표절학자로 몰아붙인다. 동시대 스승인 케네는 물론이고 공자의 사상을 분명 참고했음에도 이에 대한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겁 많은 애덤 스미스가 이교도인 공맹과 사마천을 경제철학의 가장 결정적인 출처로 밝힌다는 것은 자신의 독창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으로 여겼을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쯤에서 드는 의문이 하나 있다. 최고의 사상체계를 가졌다는 동아시아 문명이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진 이유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저자는 중국이나 조선 모두 자신의 문명에 심취해 다른 문명을 수용하지 않은 ‘오만’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 석연치 않다. 본토인 중국 이상으로 공맹을 극진히 섬긴 조선에서 그토록 강조한 겸손의 예(禮)가 어느 순간, 어떻게 사라져버렸다는 것인가.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쇼팽의 친필 악보부터 코페르니쿠스의 관측도구까지. 폴란드를 대표하는 두 위인의 손때가 묻은 작품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린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바르샤바 국립박물관과 손잡고 ‘폴란드, 천년의 예술’ 전시회를 5일부터 연다고 밝혔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이 1830년 직접 쓴 악보인 ‘마주르카 마장조 op.6 No.3’는 폴란드 전통 무곡을 바탕으로 한 피아노곡이다. 쇼팽 생전에 쓰인 ‘플레옐 피아노’로 연주해 관람객의 눈과 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도록 했다. 지동설을 주창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의 자필 원고와 당시 천문 관측에 사용했던 도구들도 선보인다.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었던 16세기 실제 관측기구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폴란드 19개 전시기관에서 출품한 250여 점의 국보급 예술작품들도 공개한다. 폴란드 국민화가로 불리는 얀 마테이코의 대형 역사화가 대표적이다. 이 중 바르샤바 왕궁 소장품인 ‘프스코프의 스테판 바토리’는 폭 6m, 높이 4m에 이르는 대작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프레임과 캔버스를 분리한 뒤 1주일의 보존 작업을 거쳐 운송했다. 8월 30일까지. 1688-9891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잃어버린 조선 불화 3점을 해외 경매시장에서 구입해 국내로 들여온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3일 오전 11시(현지 시간) 진행된 미술품 경매에서 부산 범어사와 함께 조선시대 불화 3점을 7만8500스위스프랑(약 9400만 원)에 사들였다”고 4일 밝혔다. 이 불화는 부산 범어사 극락암에 봉안됐다가 1950∼60년대에 외부로 유출된 ‘칠성도(七星圖·사진)’이다. 조선후기에 많이 그린 칠성도는 북두칠성을 형상화한 칠성신을 그린 불화다. 이번에 환수한 불화 3점은 비단에 채색한 그림으로 가로 55cm, 세로 84cm 크기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강원 춘천시 중도에서 고구려 금귀고리 한 점이 출토됐다. 고구려 변방지역에서 유력 귀족이 사용한 금귀고리가 나온 것은 이례적이다. 문화재청은 “춘천 중도 2차 조사지역에서 삼국시대 소형 돌덧널무덤(석곽묘·石槨墓·땅을 판 뒤 돌덩어리로 벽을 쌓은 무덤) 1기와 ‘굵은고리 금귀고리’ 한 점을 발견했다”고 3일 밝혔다. 무덤 안 북쪽에서 발견된 금귀고리는 전체 길이가 4.5cm 정도로 중심 고리(主環)와 노는 고리(遊環), 연결고리, 구체(샛장식·연결고리 아래에 달리는 꾸미개), 원판 모양 장식, 추 모양 장식 등으로 구성됐다. 이 가운데 중심 고리는 지름 1.8cm, 너비 1.4cm의 원형이며 이에 맞물린 노는 고리는 길이 1.4cm, 너비 약 2.1cm의 타원형이다. 특히 구체는 14개의 조그마한 고리(小環)들을 오밀조밀하게 이어 붙여 멋을 더했다. 연구팀은 이 귀고리가 평양 대성구역 안학동과 충북 청원 상봉리 유적에서 나온 고구려 금귀고리와 유사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단, 구체와 원판 모양 장식, 추 모양 장식이 더 커지고 세련된 모습을 띠고 있어 이들보다 늦은 6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했다. 금귀고리가 매장된 무덤은 구덩이의 규모가 길이 3.2m 너비 2.6m로 돌덧널을 세운 뒤 구덩이와 돌덧널 사이를 깬돌로 채웠다. 바닥에는 지름 5∼7cm의 강돌을 깔아 시신을 올려놓는 시상(屍床)을 만들었다. 무덤 남쪽에서 발견된 다리뼈 일부는 거의 흙으로 변한 상태였다. 앞서 이곳에서는 1400여 기에 달하는 청동기시대 무덤과 주거지가 발견된 바 있어 레고랜드 개발을 둘러싼 논란이 가열될 것으로 보인다. 올 3월 시작된 2차 조사에서도 청동기시대 집터와 고인돌, 삼국시대 농경지 등이 잇달아 확인됐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올해 광복 70주년과 중국의 항일승전 70주년을 기념해 한국과 중국의 공공기관이 ‘항일 공동투쟁’ 특별전을 연다. 독립기념관은 다음 달 15일까지 특별기획전시실에서 중국 광둥(廣東)혁명역사박물관과 ‘황푸(黃포)군관학교와 항일전쟁’을 주제로 전시회를 연다. 10, 11월에는 중국 현지에서 ‘중국 광동지역과 한국 독립운동’이라는 주제의 전시회가 열릴 예정이다. 독립기념관은 보훈처 산하기관이며 광둥혁명역사박물관은 광저우(廣州) 시가 운영하고 있다. 1924년 쑨원이 중국 광둥 성 광저우 시에 세운 황푸군관학교는 중국인 장교는 물론이고 김원봉 최원봉 오성륜 등 다수의 한국인 독립투사를 양성했다. 1925년 7월 이 학교 3기로 처음 입학한 한국인 청년들은 중국군에 입대하거나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 등에 들어가 항일 무장투쟁에 헌신했다. 이번 전시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황푸군관학교에서 사용한 교재와 필기노트, 졸업앨범 등 19점의 실물 자료들. 1926년 출판된 교과서인 ‘중앙군사정치학교 정치강의’와 전술학 지형학 등 강의 요점을 빼곡히 적은 ‘학생 린광마이의 수업노트’ 등이 대표적이다. 황푸군관학교 개교 당시 모습과 군사훈련, 실제 항일전쟁 등을 담은 다양한 사진도 함께 선보인다. 홍일교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이번 전시는 양국이 항일투쟁에 함께 나선 역사적 증거를 중국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중국 쓰촨(四川) 성 청두(成都) 시가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을 맞아 개최하는 외국인 항일열사 추모 특별전에 한국인 전투비행사 2명이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끈다. 7월 7일부터 청두 당안국(기록보관소)이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아 여는 ‘동맹자-외국인의 청두에서의 항전기록(同盟者-外籍人士在成都的抗戰記錄)’ 전시다. 당안국의 보관 자료를 중심으로 항일 투쟁을 한 외국인들을 조명하는 행사인데, 이 중 한국인 전상국(1908∼1938), 김원영(1922∼1945)이 포함된 것. 난징(南京) 항공열사공묘(航空烈士公墓)에는 두 사람의 추모비도 마련돼 있다. 중국의 항일열사 추모전에 한국인 전투비행사가 선정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행사는 일본의 역사왜곡에 맞서 한중이 함께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과 맞물려 주목된다. 이에 앞서 지난해 7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방한해 박근혜 대통령에게 중국의 승전 70주년과 한국의 광복 70주년을 공동으로 기념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청두시 특별전의 주인공인 전상국 김원영은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망명해 1930, 40년대 전투기 조종사로 일본에 맞섰다. 당시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 전투기인 ‘제로기’를 동원해 중국 공군을 괴멸 직전까지 몰고 갔다. 중국은 1943년부터 미 공군과 연합 작전을 벌인 뒤에야 가까스로 제공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전상국은 1908년 황해도 신천군에서 태어났다. 1930년대 초반 일본 제1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1931년 중앙항공학교를 거쳐 1935년 9월 중국 공군 중위로 임관했다. 1937년 난창(南昌) 1군구사령부 1중대 부대장에 오른 전상국은 공중수송 17번과 적기 요격임무 15번을 완수했다. 하지만 1938년 8월 21일 한커우(漢口)에서 청두로 이동하던 도중 비행기 고장으로 서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60년 대만 공군이 발행한 공군충열록은 그에 대해 “성격이 침착하고 끈기가 있으며 과감했다. 싸울 때마다 용기를 내 항상 앞장섰다”고 기록했다. 김원영은 같은 황해도 출신으로 중국 공군 군관학교를 16기로 졸업한 뒤 1935년 김구 선생이 난징에서 조직한 독립군 특무대에서 활동했다. 그는 1944년 미군 비행훈련을 받고 중미 연합 항공부대에 배치됐다. 김원영은 일본 대공포에 항공기가 피격되자 낙하산으로 탈출한 뒤 강을 헤엄쳐 부대에 돌아올 정도로 강한 정신력과 체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중일전쟁 말기인 1945년 3월 24일 기기 고장으로 추락해 순국했다. 난징 항공열사공묘에 이름을 올린 160명의 중일전쟁 참전 비행기 조종사 가운데 한국인은 전상국과 김원영뿐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한국인 비행사들이 중국 공군에서 일본과 맞섰다. 한국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은 중국의 타이위안(太原) 비행학교 교관으로 활동했다. 서왈보는 중국의 펑위샹(馮玉祥) 군벌 휘하에 들어가 항공대를 만들었고, 한국의 첫 여성 비행사인 권기옥은 윈난(雲南) 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공군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했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20명가량의 한국인 조종사가 중국에서 일본과 맞섰다”며 “한중 학계가 양국의 공동 항일투쟁사 연구 차원에서 이들의 행적을 제대로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국정신문화재단이 주관하는 ‘21세기 인문가치 포럼 2015’가 29∼31일 경북 안동시에서 열린다. 유교문화를 재조명함으로써 한국적 인문정신을 찾아보자는 취지다. 자본주의가 낳은 물질 만능주의와 인간소외 문제에 대한 해법도 모색한다. 올해 2회째를 맞는 이번 행사에서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오늘날 공감과 배려의 덕목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기조강연을 한다. 이어 유럽에서 초기 한국학 연구를 이끈 1세대 학자인 바우데베인 발라번 성균관대 석좌교수(전 유럽한국학협회장)가 ‘이타주의와 인(仁): 유럽인 아시아 학자의 고찰’을 주제로 강연에 나선다. 대중참여 세션으로 ‘영화 콘서트’와 ‘토크 콘서트’ ‘북&뮤직 콘서트’를 마련해 공감과 배려의 공간으로서 가정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인문가치 포럼 조직위원인 유석춘 연세대 교수는 “이번 행사는 유교문화의 본산인 안동에서 전통사상을 재조명하는 한국판 다보스포럼을 지향한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국정신문화재단이 주관하는 ‘21세기 인문가치 포럼 2015’가 29~31일 경북 안동시에서 열린다. 유교문화를 재조명함으로서 한국적 인문정신을 찾아보자는 취지다. 자본주의가 낳은 물질 만능주의와 인간소외 문제에 대한 해법도 모색한다. 올해 2회째를 맞는 이번 행사에서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오늘날 공감과 배려의 덕목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기조강연을 한다. 이어 유럽에서 초기 한국학 연구를 이끈 1세대 학자인 보데왼 왈라번 성균관대 석좌교수(전 유럽 한국학협회장)가 ‘이타주의와 인(仁): 유럽인 아시아학자의 고찰’을 주제로 강연에 나선다. 대중참여 세션으로 ‘영화 콘서트’와 ‘토크 콘서트’ ‘북&뮤직 콘서트’를 마련해 공감과 배려의 공간으로서 가정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인문가치 포럼 조직위원인 유석춘 연세대 교수는 “이번 행사는 유교문화의 본산인 안동에서 전통사상을 재조명하는 한국판 다보스 포럼을 지향한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sukim@donga.com}

고려시대인 1333년 만들어진 아미타삼존불의 복장물(腹藏物·불상 몸통 안에 넣는 시주 물품) 가운데 소원을 담은 발원문은 독특한 점이 있다. 가로세로 60cm 크기의 발원문에는 극락왕생을 비는 내용과 원형의 다라니(범어로 적은 주문), 발원자의 이름이 함께 나열돼 있다. 이름 중에는 길덕이, 어리가이, 금이 등 당시 성(姓)이 없었던 평민들의 이름도 포함돼 있다.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간 불상 건립에 귀족뿐 아니라 평민까지 참여해 간절한 소원을 담은 것이다. 불상이 조성된 때는 원나라의 간섭으로 한때 물러났던 충숙왕이 복위한 직후. 친원파와 개혁파로 양분된 혼란한 시기를 맞아 백성들이 나라의 평안을 갈구했던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석가탄신일을 맞아 불교 공예품을 통해 우리 불교미술의 후원자들을 조명한 ‘발원, 간절한 바람을 담다’ 특별전을 8월 2일까지 연다. 최초로 공개되는 아미타삼존불의 복장물 등 총 126점이 전시되며 이 중 34점은 국보와 보물이다. 발원의 내용도 다양하다. 1334년 만들어진 안새한의 ‘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보물 752호)’은 원나라 황제와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고 자기 집안과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 친원파였던 안새한은 원나라에서 위계 2품의 직위를 하사받고 고려로 귀국했다. 화엄경을 금가루로 필사한 이 보현행원품은 당시 친원파의 권세를 상징하듯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보현보살을 그린 그림은 옷자락과 보살의 표정을 가는 금가루로 섬세하게 표현했다. 신소연 학예연구사는 “발원자가 친원파인 탓에 보현보살의 얼굴에 원나라가 받아들인 티베트·몽골 불교 미술 양식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02-2077-9496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국제사회는 과연 먹고 먹히는 야생의 ‘정글’인가. 20세기 들어 두 번의 세계대전에 이어 냉전까지 겪으면서 국제정치학계에서는 이른바 ‘현실주의’가 득세했다. 현실주의에서 국가 간 관계는 마치 자릿세를 놓고 패싸움을 벌이는 건달들처럼 철저한 힘의 세계로 그려졌다. 일본인으로 미국 하버드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현실주의가 이제 종언을 고했다고 선언한다. 재미있는 것은 외교사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저자가 1980년대 이전 자신의 연구 성과는 글로벌 시대에 들어맞지 않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었다고 시인한 점이다. 그러면서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과 헨리 키신저의 ‘외교’와 같은 이 분야의 대표 저작 역시 후진적이라며 대놓고 비판했다. 강대국들의 권력정치를 중심으로 세계사를 기술하는 것은 이제 편협한 시각이 돼 버렸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람과 상품이 국가를 넘어 글로벌하게 움직이는 요즘 시대는 새로운 역사관을 필요로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국가가 아닌 지구를 틀로 삼는, 그리고 국가 사이의 관계가 아닌 국경을 초월하는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 연계에 주목한다”고 썼다. 국경을 초월한다는 의미인 트랜스내셔널 역사 연구는 강대국 위주가 아닌 세계 전체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동시에 환경이나 에너지 이슈 같은 생태 연구까지 포괄하고 있다. 저자가 중시하는 글로벌화가 결국 미국의 패권이 반영된 결과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예컨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으로 상징되는 글로벌 금융 시스템도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1970년대를 예로 들어 글로벌화와 미국의 신제국주의는 같지 않다고 반박한다. 이 시기 일본과 독일, 프랑스 등의 경제 규모가 급격히 커지면서 1960년대까지 국제경제에서 미국이 차지한 절대 우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후 한국과 중국, 대만, 브라질, 인도네시아 등 신흥국 경제 비중이 급격히 높아진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된다. 국가 중심 사관을 비판하면서 일본의 우경화에 일침을 가한 것도 눈길을 끈다. 그는 “일본인이 국가 중심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현 세계를 배척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일본의 국익에도 역행한다”고 적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