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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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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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8~202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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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은 조선민중 승리” 시위 옹호한 일본의 양심

    《“간난이는 조선말로 ‘만세!’하고, 류지는 일본말로 ‘반자이!’해, 좋아, 함께 부르자!” 일본 작가 유아사 가쓰에(1910∼1982)가 1935년 발표한 소설 ‘간난이’에 나오는 구절이다. 3·1운동 당시 조선인 소녀와 일본인 소년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며 나눈 대화다. 작가는 아버지를 따라 1916년 이주한 경기 수원에서 3·1운동을 경험했고, 1927년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조선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수원을 고향으로 생각했다는 작가는 “독립을 바라는 조선인들의 마음에 감동해 울면서 썼다”고 했다.》  3·1운동은 당대 양심적인 일본 지성인들의 마음도 움직였다. 한일 근대문학 연구자인 세리카와 데쓰요 일본 니쇼가쿠샤대 명예교수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논문 ‘3·1독립운동과 일본 문학의 관련 양상’을 냈다. 당시 언론 통제로 대다수 일본인은 3·1운동을 ‘소요 사건’ 정도로만 인식했고 민본주의 논객과 사회주의자들도 조선 문제에는 침묵했다. 그러나 논문에 따르면 3·1운동을 옹호한 일본 지식인과 문인도 적지 않았다. 도쿄대 법학부 학생들로 구성된 ‘신진카이(新人會)’의 기관지 ‘데모크라시’는 1919년 “(조선 병합은) 단연코 불가” “(3·1운동 탄압은) 변호의 여지가 없는 비인도적인 행위의 극치”라는 사설을 실었다. 사설은 “(조선인이) 자유 천지에서 진실로 인류의 바른 생활을 획득할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란다”며 조선 독립을 지지했다. ‘신진카이’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비판한 민주주의 단체 ‘레이메이카이(黎明會)’의 중심 요시노 사쿠조(1878∼1933)의 영향 아래 있던 그룹이다. 중국의 혁명을 지원한 미야자키 도텐도 상하이일일신문에 3·1운동을 조명하며 “힘에 기대는 자는 힘에 쓰러지고, 칼에 기대는 자는 칼에 패한다”고 총독정치를 비판했다. 가시와기 기엔 목사는 일본 언론의 왜곡된 제암리 학살사건 보도를 바로잡고 학살의 진상을 소개했다. 당시 조선에 있던 스즈키 다카시 목사도 일제를 비판하며 반성을 촉구했다. 1923년 도쿄제국대 교수가 된 야나이하라 다다오는 1924년 조선 출장에서 3·1운동을 알게 됐고 이후 산미증식계획과 동양척식회사 등을 비판한 논문을 냈다. 1926년 6·10만세운동을 접한 뒤에는 ‘조선 통치의 방침’을 통해 3·1운동을 “조선 민중의 승리”이자 “총독정치의 패배”로 규정했다. 3·1운동을 다룬 일본 문학 작품도 적지 않았다. 모리야마 게이의 소설 ‘불’(1928년), 마키무라 히로시의 서사시 ‘간도 빨치산의 노래’(1932년), 영문학자 사이토 다케시의 시 ‘어떤 살육사건’(1919년) 등이다. 세리카와 교수 등 일본 학자가 쓴 3·1운동 관련 논문 6편은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와 사사가와 노리카쓰 국제기독교대 명예교수가 편집해 최근 발간한 한일 공동 연구 논문집 ‘3·1독립만세운동과 식민지배체제’(지식산업사·3만3000원)에 실렸다. 책에는 2014년부터 석오문화재단(이사장 윤동한)의 후원으로 이뤄진 관련 연구 논문 15편이 실렸다. 22일 열린 간담회에서 세리카와 교수는 “모두 조선의 완전 독립을 지지하는 데 이른 건 아니었지만 정의와 인권 실현 차원에서 3·1운동을 옹호한 일본 지식인들이 분명히 존재했다”고 말했다. 이태진 교수는 “동아일보가 논문 76편을 담아 1969년 발간한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이후에는 눈에 띄는 3·1운동 기념논집이 별로 없었다”며 “이번 논집은 한일 공동 연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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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광문회는 독립운동 산실”… 복원위원회, 학술대회 개최

    사단법인 3·1정신 조선광문회 복원위원회(이사장 송상현)는 22일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기미독립선언서와 조선광문회’를 개최했다. 조선광문회 터인 서울 중구 미래에셋센터원빌딩에서 열린 이날 학술대회에서 송상현 이사장은 “조선광문회는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신문화운동의 요람이며, 애국지사가 우국충정과 독립방략을 논의하던 사랑방이었다”고 말했다. 송 이사장은 “조선광문회를 복원하면 기미독립선언서 원본과 각종 조선광문회 간행물의 전시장뿐 아니라 3·1운동 정신의 계승 발전을 위한 교육, 연구, 출판의 장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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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병자호란 끝낸 건 조선의 천연두였다

    병자호란은 인조가 청 태종(홍타이지)에게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치욕으로 기억된다. 참패한 까닭으로는 위정자들의 무능이 첫째로 꼽힌다. 그러나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책임을 묻기에 앞서 전쟁 자체의 실상에 주목한다. 저자는 당시 청군의 규모부터 기존 학설과는 다르다고 했다. 통설인 12만8000명은 조선 문헌 기록을 비판 없이 채택한 결과 생긴 오류라는 것. 청 측 기록을 바탕으로 보면 정규군 기준 약 3만4000명이라고 한다. 저자는 특히 만주어로 기록된 청나라 사료를 많이 활용했다. 청나라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조선에 적극 협상을 시도하고 서둘러 전쟁을 끝내려 한 건 천연두 탓이라고 봤다. 청군 진영에서도 천연두가 발병하자 청 태종이 이를 피해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는 것이다. 천연두가 조선을 구한 셈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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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정신 조선광문회 복원위원회, 3·1운동 100주년 학술대회 개최

    사단법인 3·1정신 조선광문회 복원위원회(이사장 송상현)는 22일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기미독립선언서와 조선광문회’를 개최했다. 조선광문회 터인 서울 중구 미래에셋센터원빌딩에서 열린 이날 학술대회에서 송상현 이사장은 “조선광문회는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신문화운동의 요람이며, 애국지사가 우국충정과 독립방략을 논의하던 사랑방이었다”고 말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3·1독립선언서의 국외 전파’(김도형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등 주제발표 4편이 진행됐다. 송 이사장은 “조선광문회를 복원하면 기미독립선언서 원본과 각종 조선광문회 간행물의 전시장 뿐 아니라 3·1운동 정신의 계승발전을 위한 교육, 연구, 출판의 장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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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 시위현황 지도위에 표시… ‘그날의 함성’ 한눈에 본다

    현존하는 3·1운동 관련 국내외 사료의 데이터를 종합하고 이를 지리정보시스템(GIS)과 연동해 제공하는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국편DB)가 20일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됐다. 국사편찬위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2016년부터 구축한 이 DB를 바탕으로 1919년 3·1운동 시위 참여자가 모두 80만∼103만 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3·1운동 참여자 수는 그동안 학계 연구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에서 50만∼200만 명으로 추산돼 왔다. 이번 추계는 사료를 총망라하는 한편, 중복과 누락을 정리해 확실한 근거를 갖는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국편DB는 일제 측 사료와 임정이 간행한 ‘한일관계사료집’, 외국인 선교사 보고 등 문서 8915건을 검토하고 관련 정보 2만1407건을 추출해 정리한 결과다. 국사편찬위는 DB를 바탕으로 3·1운동 당시 사망자가 발생한 시위는 174건이고, 사망자는 모두 725∼934명이라고 분석했다. 지역별로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평안북도에서, 날짜별로는 1919년 3월 31일에 사망자가 가장 많았다. 국사편찬위는 “참여자·사망자 수는 동맹휴학이나 철시 등을 제외한 시위 사건만 추린 것이며, 연구가 심화되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국편DB는 3·1운동 사건을 △시위 1692건 △철시 25건 △파업 3건 △휴학·휴교 61건 △(시위)계획 333건 등 모두 2464건으로 종합했다(20일 기준). 국편DB의 각종 수치는 향후에도 자료 발굴과 연구 진전에 따라 보완될 예정이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사편찬위와 동아일보가 27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일민미술관에서 공동 주최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백년 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에서 발표된다. 이번에 구축된 국편DB는 시위 등 각종 3·1운동 사건을 사건명, 시위 장소, 사건 개요 등 키워드로 간편히 검색할 수 있다. DB에는 3·1운동의 개별 사건이 시기와 지역뿐 아니라 활동 유형과 시간대에 따라 분류돼 있다. 아울러 △만세, 집단항의 등 시위대의 행동 양상 △깃발, 문서, 노래, 구호, 횃불 등 운동에 활용한 매체 △일반인, 종교인, 학생, 상인, 노동자 등 운동 주체 △발포, 도검, 기타 무기, 파괴, 방화 등 일제의 탄압 양상까지도 구분했다. 게다가 사건의 세부 장소와 함께 연구자가 사료를 종합해 요약 설명한 글도 볼 수 있다. 서술의 근거가 되는 사료 역시 원문 이미지와 함께 제공된다. 관련된 인물과 연관된 사건, 일제의 탄압 정보까지 확인 가능하다. 특히 이번 국편DB는 전국적인 3·1운동 사건 정보를 GIS와 연동해 일제강점기와 오늘날 지도 위에 구현했다. 시위의 전체 양상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날짜와 지역을 바탕으로 검색하거나 사용자가 지도를 확대해 개별 시위를 선택해도 역시 상세한 설명으로 연결된다. 지도 위에는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도로, 철도, 경찰 및 헌병 관서의 위치도 함께 제공된다. 국사편찬위는 3·1운동의 양상을 각종 인포그래픽으로 만들어 DB 홈페이지에서 함께 제공한다. 조광 국사편찬위원장은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는 국사편찬위가 축적한 역사자료 정보화 경험과 기술이 집약된 동시에, 많은 역사연구자가 사명감을 갖고 협력해 만든 고도의 연구 결과물”이라며 “앞으로 연구가 딛고 나아갈 수 있는 탄탄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국사편찬위는 이 DB를 널리 활용할 수 있도록 시위 정보와 좌표 등을 데이터 모음으로 만들어 DB 홈페이지에 함께 공개했다. 동아일보는 이 자료를 활용해 ‘3·1운동 역사의 현장 디지털 정보관’(가제)을 구축하고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다음 달 1일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이 정보관에선 국편DB가 제공한 시위의 위치, 규모 등 정보와 본보가 1년 가까이 연재하고 있는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시리즈 등 관련 기사와 사진을 함께 볼 수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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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눈에 보는 ‘3·1운동’…국사편찬위, 100주년 맞아 3·1운동 DB 공개

    현존하는 3·1운동 관련 국내외 사료의 데이터를 종합하고 이를 지리정보시스템(GIS)과 연동해 제공하는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국편DB)가 20일 인터넷 홈페이지(db.history.go.kr/samil/)를 통해 공개됐다. 국사편찬위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2016년부터 구축한 이 DB를 바탕으로 1919년 3·1운동 시위 참여자가 모두 80만~103만 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3·1운동 참여자 수는 그동안 학계 연구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에서 50만~200만 명으로 추산돼 왔다. 이번 추계는 사료를 총 망라하는 한편, 중복과 누락을 정리해 확실한 근거를 갖는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국편DB는 일제 측 사료와 임정이 간행한 ‘한일관계사료집’, 외국인 선교사 보고 등 문서 8915건를 검토해 관련 정보 2만1407건을 추출, 정리한 결과다. 국사편찬위는 DB를 바탕으로 3·1운동 당시 사망자가 발생한 시위는 174건이고, 사망자 수는 모두 725~934명이라고 분석했다. 지역별로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평안북도에서, 날짜별로는 1919년 3월 31일에 사망자가 가장 많았다. 국사편찬위는 “참여자·사망자 수는 동맹휴학이나 철시 등을 제외한 시위 사건만 추린 것이며, 연구가 심화되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국편DB는 3·1운동 사건을 △시위 1692건 △철시 25건 △파업 3건 △휴학·휴교 61건 △(시위)계획 333건 등 모두 2464건으로 종합했다(20일 기준). 국편DB의 각종 수치는 향후에도 자료 발굴과 연구 진전에 따라 보완될 예정이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사편찬위와 동아일보가 27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일민미술관에서 공동 주최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백년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에서 발표된다. 이번에 구축된 국편DB는 시위 등 각종 3·1운동 사건을 사건명, 시위장소, 사건개요 등 키워드로 간편히 검색할 수 있다. DB에는 3·1운동의 개별 사건들을 시기와 지역 뿐 아니라 활동 유형과 시간대에 따라 분류돼 있다. 아울러 △만세·집단항의 등 시위대의 행동양상 △깃발·문서·노래·구호·횃불 등 운동에 활용한 매체 △일반인·종교인·학생·상인·노동자 등 운동주체 △발포·도검·기타무기·파괴·방화 등 일제의 탄압 양상까지도 구분했다. 게다가 사건의 세부 장소와 함께 연구자가 사료를 종합해 요약 설명한 글도 볼 수 있다. 서술의 근거가 되는 사료 역시 원문 이미지와 함께 제공된다. 관련된 인물과 연관된 사건, 일제의 탄압 정보까지 확인 가능하다. 특히 이번 국편DB는 전국적인 삼일운동 사건정보를 GIS(지리정보시스템)와 연동해 일제강점기와 오늘날 지도 위에 구현했다. 시위의 전체 양상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날짜·지역을 바탕으로 검색하거나 사용자가 지도를 확대해 개별 시위를 선택해도 역시 상세한 설명으로 연결된다. 지도 위에는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도로, 철도, 경찰 및 헌병 관서의 위치도 함께 제공된다. 국사편찬위는 3·1운동의 양상을 각종 인포그래픽으로 만들어 DB 홈페이지에서 함께 제공한다. 조광 국사편찬위원장은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는 국사편찬위가 축적한 역사자료 정보화 경험과 기술이 집약된 동시에, 많은 역사연구자들이 사명감을 갖고 협력해 만든 고도의 연구 결과물”이라며 “앞으로 연구가 딛고 나아갈 수 있는 탄탄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국사편찬위는 이 DB를 널리 활용할 수 있도록 시위 정보와 좌표 등을 데이터 모음으로 만들어 DB홈페이지에 함께 공개했다. 동아일보는 이 자료를 활용해 ‘3·1운동 역사의 현장 디지털 정보관’(가제)을 구축하고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다음달 1일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이 정보관에선 국편DB가 제공한 시위의 위치·규모 등 정보와 본보가 1년 가까이 연재하고 있는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시리즈 등 관련 기사와 사진을 함께 볼 수 있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 2019-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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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미독립선언서 해외로 어떻게 전파됐나

    “We herewith proclaim….”(영어) “吾等今玆宣言….”(중국어) “Nous, les representants….”(프랑스어) “Por la presente proclamamos….”(스페인어) 조선은 독립국이고, 조선인은 자주민이라고 세계만방에 밝힌 기미독립선언서는 여러 언어로 번역돼 각국으로 퍼져나가며 독립의 당위성과 의지를 명백하게 전했다. 김도형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은 22일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기미독립선언서와 조선광문회’(주최 ‘3·1정신 조선광문회 복원위원회’)에서 독립선언서의 국외 전파 과정을 담은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에 따르면 1919년 3월 1일 배포된 독립선언서 최종본이 중국어로 처음 번역돼 실린 건 톈진에서 창간돼 영향력이 컸던 신문 ‘익세보(益世報)’ 1919년 3월 11일자다. ‘짓밟아도 죽지 않는 기자의 혼(최殘不死之箕子魂)’이라는 제목의 기사 가운데 독립선언서 전문(全文)이 실렸다. 기사에는 번역본을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 보냈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김 연구위원은 “실제 번역자는 다른 인물이고, 신문에 쉽게 게재할 목적으로 안중근 동생이라며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또 적어도 3월 20일경에는 인쇄본 선언서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중국과 러시아 지역으로 전달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독립선언서 영역본은 지금까지 5종류가 발견됐다. 전문을 처음으로 보도한 신문은 하와이의 ‘퍼시픽 커머셜 애드버타이저’ 3월 28일자 1면이다. ‘한국 독립선언서 공개되다(Korean Independence Declaration Bared)’라는 제목의 톱기사와 함께 ‘Manifesto(선언서)’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후 미국 신문들은 거의 이 번역본을 전재하고 있다. 김 연구위원에 따르면 여기 실린 선언서는 캘리포니아 지역신문 ‘새크라멘토 비(Sacramento Bee)’의 발행인이자 ‘원동특별통신원’이었던 매클래치가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1919년 2월 25일 서울에 들어온 매클래치는 3월 4일 서울에서 출발해 일본을 거쳐 호놀룰루에 들렀다. 다시 미국 본토로 와서 독립선언서를 AP통신사에 전했다.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 ‘국민보’ 기사는 매클래치가 독립선언서를 구두 속에 숨겨서 가져왔다고 했다. 김 연구위원은 “미국인 광산업자이자 AP통신 서울통신원이었던 앨버트 테일러가 직접 또는 동생을 통해 매클래치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영역은 테일러의 집사인 ‘김 주사’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덕희 하와이한인이민연구소장은 “하와이 ‘애드버타이저’는 1919년 4월 30일 무오독립선언서 영역본 역시 게재했다”고 밝혔다. 이 연구는 다음 달 15일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 주최로 3·1절 독립운동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된다. 이 밖에 3·1운동 당시 한국에 있던 외국인 선교사 등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영역해 해외로 전파했고, 영문학자이며 시인인 변영로(1897∼1961)도 번역했다고 증언했다. 김 연구위원은 “서울 경신학교 교장인 쿤스가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보낸 ‘영문 독립선언서’는 번역자가 한국인이라고 나온다”며 “이것이 변영로 번역본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독립선언서는 멀리 멕시코에서 스페인어로도 번역됐다. 기미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한 달여가 지난 1919년 4월 15일 멕시코 교민들은 경축식을 열고 독립선언서를 발행했다. ‘신한민보’ 5월 20일자에는 한인들이 번역한 독립선언서를 멕시코 각처의 교회에 보내고 독립 의지를 전파했다고 전했다. 교민 이순녀(Rocardo Lee)가 번역해 당대 3·1절 기념식에서 사용한 번역본이 멕시코 메리다 한인회에 남아 있다. 프랑스어 번역본은 1919년 9월 파리위원부 통신국에서 발행하는 선전책자인 ‘한국의 독립과 평화(L'indépendance de la Corée et la Paix)’ 부록에 전문이 실렸고, 월간잡지 ‘자유한국(la Corée Libre)’ 제2호(1920. 6)에도 실렸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불특파위원인 서영해가 1929년 간행한 자전적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Autour d’une vie coreenne)’에도 게재됐다. 러시아어 번역본은 3·1운동 당시 서울의 러시아 총영사관에서 번역해 3월 31일 본국에 보낸 문서에 첨부돼 있다. 모스크바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있다. (L'indépendance de la Corée et la Paix)’ 부록에 전문이 실렸고, 월간잡지 ‘자유한국(la Corée Libre)’ 제2호(1920. 6)에도 실렸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불특파위원인 서영해가 1929년 간행한 자전적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Autour d’une vie coreenne)’에도 게재됐다. 러시아어 번역본은 3·1운동 당시 서울의 러시아 총영사관에서 번역해 3월 31일 본국에 보낸 문서에 첨부돼 있다. 모스크바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있다. 김 연구위원은 “지금까지 발견된 독립선언서 번역본은 중국어와 영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 5개 언어지만 앞으로도 더 다양한 외국어본이 발굴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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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터-관청-山위 1717건 시위… 전체 郡의 96%서 3·1운동 활활

    1919년 3월 20일 경남 합천군 대병면 창리 장날. 40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이자 일본 헌병이 선두에 선 이병추를 총으로 쐈다. 분노한 군중이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서류를 불태웠다. 같은 날 합천읍 장터에서도 일제의 무차별 사격으로 4명이 목숨을 잃었다. 다음 날인 21일 초계면 초계리 장날에는 4000여 명이 만세를 부르다 일본 경찰에 의해 2명이 순국했다. 23일 오후 3시경 삼가읍 광장에서는 시위대 1만3000여 명이 일제를 규탄했다. 마지막 연사 임종봉의 강연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일경이 발포를 시작했고, 총에 맞은 임종봉이 강단에서 굴러떨어졌다. 분노한 군중은 경찰주재소와 우편소로 몰려갔고, 군경의 발포에 13명이 다시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경남 합천군에서 며칠 새 벌어진 이 사건들은 3·1운동 ‘장터 시위’의 전형을 보여준다. 장터 시위는 수천 명 단위의 대규모로 전개됐다는 특징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국편)가 새로 구축한 ‘3·1운동 기록물 데이터베이스’(국편DB)를 통해 당시 3·1운동 확산과 특성을 분석한 결과 지역별로 차이가 드러났다. 이송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교수의 농촌지역 3·1운동 양상 분석에 따르면 △경남지역에서는 장터 시위 △황해도에서는 관청 앞 시위 △경기 충청도 지역에서는 산상(山上)-횃불시위 등 3가지 형태가 많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러한 농촌지역의 다양한 독립만세 시위로 당시 한국인의 3분의 1 이상이 3·1운동을 경험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 같은 연구 결과는 국편과 동아일보가 27일 서울 세종대로 일민미술관에서 공동 주최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백년 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장터 시위가 활발했던 대표적인 지역은 경남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경남지역 86개 면 가운데 장터 시위가 일어난 곳이 43곳으로 절반을 차지했다. 장이 서는 닷새마다 같은 장터에서 시위가 되풀이되기도 했다. 관청 시위는 마을 단위로 모인 만세시위대가 군청이나 면사무소, 경찰주재소, 헌병분견소 앞에서 시위를 벌인 경우다. 시위대가 식민행정과 무단통치 기관을 직접 타깃으로 삼은 시위였다. 무장한 진압병력 앞에서 시위하는 건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일제는 관청 시위에 ‘내란죄’를 적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위가 가장 많았던 지역은 황해도였다. 황해도 시위 발생 면(109개 면)의 84.4%가 경찰·헌병 기관이 소재한 곳이었다. 1919년 3월 3일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에서는 천도교도들이 헌병 분대로 몰려가 헌병 경찰의 철수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헌병의 발포로 9명이 순국했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교수는 “황해도는 천도교, 기독교계의 조직적 시위가 많았고, 서울과 평안도의 3·1운동 소식을 접하며 고양된 시위대가 위험을 무릅썼던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밤에 산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친 산상 시위는 경기도가 가장 많았고, 충청남북도가 뒤를 이었다. 산상 시위는 시위대가 대중과 접촉하기 어려운 고산준령에서는 벌어지지 않았다. 경기 강화군은 횃불 시위가 9곳에서 일어났다. 3월 18일 강화군청에서 1만∼2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뒤, 4월 1∼11일 곳곳에서 잇달아 횃불이 올랐다. 산 위에서 횃불을 올려 섬과 해안으로 떨어진 시위대 사이의 연대의식을 높인 것이라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국편DB에서 3·1운동은 시위만 1717건이 벌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역시 DB를 분석한 정병욱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는 “1919년 3∼4월 기준으로는 1689건”이라며 “이는 기존 연구의 집계(1180건)보다 509건 늘어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편DB는 시위 외에도 시위 등의 계획(335건), 동맹휴학·휴교(60건), 철시(25건), 파업(3건), 기타 활동(327건)을 포함해 모두 2467건의 1919년 3·1운동 사건을 담았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시위 횟수를 1542건으로 전하고 있다. 3·1운동이 당시 행정구역인 12개 부(오늘날의 시) 전체, 220개 군 가운데 95.9%에 이르는 211개 군에서 벌어졌다는 것도 밝혀졌다. 당시 한국인들의 지역 인식 토대인 조선의 ‘옛 군’ 단위로 봐도 317개 군 가운데 288곳(90.9%)에서 운동이 일어났고, 군청 소재 면(220곳)의 86.8%(191곳), 전체 면(2509곳)의 40.4%(1013곳)에서 운동이 전개됐다. 대체로 평안, 황해, 함경도는 기독교 천도교 등 종교계의 조직적 운동으로 시위가 대규모로 벌어진 경우가 많았고, 한반도 중남부 지역은 3·1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마을 단위의 시위가 많았다고 분석됐다.▼ 日帝, 영덕 시위엔 경찰-헌병-군대 모두 투입해 탄압 ▼ 경찰서가 시위 군중 감당 못하자 軍-헌병 동원해 발포… 8명 순국시위 번지자 4월엔 군대 한국 증파국사편찬위원회의 3·1운동 기록물 데이터베이스(국편DB)를 통한 일제 탄압 분석에서는 헌병과 경찰이 각각 군대와 공조해 탄압한 사례가 적지 않게 발견됐다. 경찰, 헌병, 군대가 모두 함께 만세시위를 탄압하기도 했다. 김명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은 27일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발표할 논문에서 경북 영덕군 영해면의 사례를 소개했다. 영해면에서는 1919년 3월 18일부터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장터에 모인 군중 약 3000명은 만세를 부르며 행진한 뒤 경찰주재소로 몰려가 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인 순사부장이 태극기를 빼앗으려 들자 분노한 군중은 주재소를 파괴했다. 그러자 영덕경찰서가 나섰다. 서장이 순사 4명과 함께 출동했으나 오히려 시위대에 포위돼 무장 해제됐다. 이번에는 군과 헌병이 무력 탄압에 나선다. 도장관(도지사)의 요청으로 18일 포항 헌병 분대 7명이 출동했다. 도장관은 대구에 주둔한 보병 80연대에도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80연대 장교 등 21명이 자동차편으로 포항에 왔고, 다시 배를 타고 영덕에 도착했다. 이 병력이 영해에 도착한 건 19일 오후 4시. 이들은 헌병과 함께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경찰, 헌병, 군대의 시위 탄압 과정에서 8명이 순국하고, 16명이 다쳤으며, 170명이 재판에 회부됐다. 김 연구원은 “헌병이나 경찰 말단 경찰관서는 단독으로 수천 명의 시위대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이들이 군대와 협력해 만세운동을 탄압한 경우가 많았다”고 분석했다. 일제는 조선 주둔 일본군을 3월 중순부터 분산 배치해 병력 파견 지역을 넓혔지만 3·1운동은 더욱 불타올랐다. 일제는 병력이 부족하다고 보고 4월 5일 보병 6개 대대를 한국에 증파하기도 했다. 이들의 배치는 4월 22일 완료됐다. 일본군의 탄압 실태를 분석한 김상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원은 조선 주둔 일본군이 초반에는 주로 각 지역에 파견돼 경계를 하며 ‘위력 시위’를 벌였고, 후반기 본격적으로 강경 탄압에 앞장섰다고 봤다. 김 연구원은 국편DB를 활용해 군대에 의한 사상자 수가 일제 보고문서(470명)보다 훨씬 많다(1057명)는 걸 밝히기도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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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 발포로 평양서 5명 숨져… 은폐 지시에 총상 보고 못해”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광명정대하게 밝혀라.”(기미독립선언서 중에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발표한 ‘기미독립선언서’는 질서 있는 만세시위를 통해 정정당당하게 독립을 주장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평화로운 시위 군중을 향해 3·1운동 첫날부터 군대를 투입해 총을 발포하여 피를 흘리게 했고, 착검한 소총으로 찌르고 개머리판이나 곤봉으로 구타하는 등 잔인하게 탄압했다. 당시 끔찍했던 상황은 평양의 3·1운동 시위 상황을 기록한 선교사 보고서에 기록됐고, 일제 문서에서도 확인됐다. “(3월 1일) 군중은 저녁에 다시 나가 행진했는데 군인들이 총을 쐈고 3명이 총에 맞았다.” “교사 한 명이 총검에 심하게 찔렸고, 여러 학생들이 총검에 찔리고 총대로 맞고 몽둥이에 맞았다.” “(3월 3일) 군인들이 착검한 채 달려들었고…소총의 개머리판으로 구타하고 사람을 차고 짓밟고 때려 쓰러뜨렸다.” 국사편찬위원회 구축 ‘3·1운동 기록물 데이터베이스’(국편DB)를 분석한 정병욱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평양 서쪽 강서군 반석면 사천에서는 3월 4일 헌병이 시위대에 발포해 58명(임정 자료·일제 집계는 12명)이 목숨을 잃었다. 동북쪽 맹산군 맹산면에서도 10일 일제 집계로 시위대 54명이 사망했다. 국편DB를 분석한 윤해동 한양대 교수는 “만세시위에 굉장히 당혹한 일제는 시위 초기부터 잔혹한 수단을 동원했다”며 “발포와 같은 강경 진압이 격한 시위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탄압으로 시위의 격렬함이 줄어들었는데도 일제의 발포는 오히려 늘어났다. 1919년 4월 4일 이후 시위대가 헌병 주재소 등을 파괴하거나 군경을 처단하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의 발포 건수는 4월 5∼8일 오히려 큰 폭으로 증가하고 22일까지도 단속적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시위의 양상과 관련 없이 증가하는 발포 건수는 3·1운동을 압살하려는 군경의 진압정책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분석은 국편DB가 현존하는 각종 사료를 거의 망라해 종합했기에 가능했다. 첫날 평양 시위의 일제 발포도 기존 일제의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일일 보고 등에는 첫 발포가 3월 3일 벌어진 것으로 나타나 단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국편DB를 통해 일제의 ‘조선소요사건일별조표’와 선교사 보고 등 여러 사료를 교차 검증할 수 있게 되면서 사실을 확정할 수 있게 됐다고 윤 교수는 설명했다. 국편DB에서는 일제가 도검(36건)이나 갈고리·곤봉(9건), 기타 무기를 사용해 진압한 사건도 모두 46건이 발견됐다. 일제가 축소 보고한 결과여서 실제론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3월 1일∼4월 22일 국내 만세시위 1552건 가운데 시위대가 군경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던 사건은 약 132건이 일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윤 교수는 “양상을 보면 군경이 총을 쏘자 시위대가 산에서 나무를 꺾어 몽둥이를 만들거나 돌을 던지는 식이지, 처음부터 낫이나 죽창 등 살상용 무기를 준비한 공세적 시위는 거의 발견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양희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의 국편DB 분석에서는 일제의 탄압으로 최소한 5828명의 한국인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사망 1510명에 부상 2614명이고, 사망인지 부상인지 분명하지 않은 피해자도 1704명이다. 이는 일제 조선헌병대사령관 보고(1920년 1월)보다 3800여 명이 더 많은 수치다.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는 3·1운동 사망자만 7509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연구원은 “일제는 한국인 피해를 축소 보고했고, 이번 분석에도 ‘수명’ ‘수백 명’ ‘다수’ ‘소수’ ‘약간’ ‘있음’ 등으로 기록돼 수치 산정이 어려운 자료는 제외했기에 실제 피해 규모는 훨씬 더 크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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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일제, 3·1운동 첫날부터 평화시위 군중에게 총쏴 진압했다

    “(3월 1일) 총에 맞아 부상한 사람이 5명이나 병원에서 숨졌다. 당국의 명령으로 사인이 총상이라고 보고할 수 없었다고 한다.”(평양 장로교 선교사 기록) ‘3월 1일 발포.’(일제 경무총감부 조선소요사건일별조표·朝鮮騷擾事件日別調表) 일제가 1919년 3·1운동 첫날부터 평화적인 만세시위 군중에게 총을 발포하며 잔혹하게 탄압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구축한 ‘3·1운동 기록물 데이터베이스’(국편DB)를 통해 당시 선교사 보고와 일제 경무총감부 자료 등을 종합한 결과다. 국사편찬위가 지난 3년간 구축한 ‘국편DB’를 통해 3·1운동 만세시위의 전체 윤곽이 100년 만에 드러나고 있다. 이 DB는 일제 자료와 각종 3·1운동 사료를 망라하고 지리정보시스템(GIS)과 연동해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국편DB에 따르면 3·1운동 당시 일제가 시위대에 발포한 사건이 무려 234건으로 기존 연구(185건)보다 49건이 더 많이 확인됐다. 특히 1919년 3월 1∼26일에만 발포가 62건이나 자행됐다.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일제가 만세시위 군중에게 초기부터 발포라는 강력한 진압 방식을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3·1운동이 당시 행정구역인 232개 부·군 가운데 96.1%에 이르는 223개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송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교수는 “분석 결과 3·1운동은 조선인 중 3분의 1 이상이 직접 경험한 전국적, 전 민족적 독립운동”이라고 말했다. 시위가 연속해 일어난 기간도 추가로 확인됐다. 기존에는 3월 1일∼4월 16일 매일 시위가 이어졌다고 파악됐으나 이번 국편DB 분석에서 4월 29일까지도 시위가 연속된 것으로 드러났다. 또 30회 이상 시위가 일어난 날도 24일로 기존 연구(15일)보다 9일이 더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연구는 국사편찬위와 동아일보가 27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일민미술관에서 공동 주최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발표될 예정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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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편 DB, 3·1운동 전체 파악할 밑그림

    국사편찬위원회가 구축하고 있는 ‘3·1운동 기록물 데이터베이스(DB)’는 100년 만에 마련되는 3·1운동 연구의 ‘밑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 연구 성과가 그동안 적지 않게 축적됐지만 사료가 방대하고 각종 사료집마다 누락과 중복이 있어 개별 연구자들이 그 전모를 그리는 건 여전히 쉽지 않다. 국편 기록물 DB는 ‘소요사건서류’(7책 1777건), ‘도장관보고철’(6책 767건), 일제 외무성 기록 ‘불령단관계잡건’ 중 990여 건, 경성지법 검사국 문서 9670여 건, 판결문 2174건, 선교사 문건 670건을 망라한 것으로 현재 3·1운동과 관련해 수집할 수 있는 기초 자료는 거의 모두 포괄하고 있다. 국편은 3·1운동에서 벌어진 개별 사건의 중복을 하나하나 걸러내면서 △시위 △철시 △파업 △동맹휴학(휴교 포함) △(시위)계획 △기타 활동 등으로 분류했다. 또 지리정보시스템(GIS)과 연동해 개별 사건을 당대 및 오늘날 지도에 나타내고, 근거 사료와 연결해 보여줄 예정이다. 27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일민미술관에서 동아일보가 국편과 공동으로 주최하는 학술회의 ‘백년 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에서는 이 DB를 활용한 논문 10편을 소개한다. 학술회의 제1부에서는 ‘3·1운동의 시공간’을 분석한다. ‘3·1운동 DB로 추정한 3·1운동의 규모’(류준범 국편 연구편찬정보화실장)와 ‘3·1운동의 추이 분석’(정병욱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도시 지역에서 3·1운동의 전개와 특징’(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농촌 지역에서 3·1운동의 확산과 공간적 특성’(이송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교수) 등이 발표될 예정이다. 제2부는 3·1운동의 주체와 시위 양상에 초점을 맞춘다. ‘3·1운동 데이터베이스와 3·1운동의 주체’(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와 ‘3·1운동에서의 폭력과 비폭력’(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 ‘3·1운동의 미디어와 상징체계’(이기훈 연세대 사학과 교수)를 발표한다. 제3부는 일제의 탄압과 조선인의 희생을 집중 조명한다. ‘조선총독부의 3·1운동 탄압책과 피해 현황’(이양희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과 ‘3·1운동 전후 조선 주둔 일본군의 배치와 탄압실태’(김상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원), ‘일제 헌병·경찰의 3·1운동 탄압’(김명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등이다. 제4부 종합토론은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가 사회를 맡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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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정전에서 외경까지, 역사로 보는 신약성서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여러 세기에 걸친 논쟁으로 확립된 것이고, 신약에는 직접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신약성서를 경전이라기보다 역사적인 문헌으로 바라보고 분석한 책이다. 미국 예일대 명예교수인 저자가 명강의로 꼽힌 자신의 ‘신약 개론’ 강좌를 정리했다. 죽어서 몸은 지상에 있어도 영혼은 예수님이 계신 하늘나라로 간다는 영원불멸의 관념도 성서가 직접 밝힌 내용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신약은 ‘부활’을 가르칠 뿐 영혼의 영원불멸은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관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기독교 정전(正典)에 속하는 문서뿐 아니라 도마복음 등 외경(外經)으로 분류되는 당대 문헌도 비중 있게 다룬다. 이를 통해 초기 기독교의 다양성을 드러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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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조사해 책자로 펴내야”

    “향후 남북 전문가로 공동 학술답사단을 구성해 3·1운동 사적지를 포함한 독립운동 사적을 답사하고 그 결과를 책자로 펴내야 한다.” 박걸순 충북대 교수는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에서 13일 열린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 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포럼에서 이렇게 밝혔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개최한 이날 포럼은 독립기념관이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2016년 착수한 북한 3·1운동 사적지 문헌 조사 결과를 정리하는 자리였다. 조사에서 북한의 3·1운동 사적지로 거리(470곳)와 건물(244곳), 가옥(77곳), 산야(17곳) 등 812건을 확인했다. 박 교수는 이 밖에도 남북 공동의 독립운동사 학술회의 개최와 총서 간행, 사료 발굴 등 교류 방안을 내놨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북한 독립운동 사적 연구가 더욱 활발해져 평화공존과 통일의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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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돈으로 불평등 해결? 법-교육 개선이 먼저

    지구적 불평등을 설명할 때 세계 인구의 극소수가 소유한 압도적 부(富)와 하위 다수의 빈곤을 대조하며 그 심각함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일랜드 트리니티칼리지 사회학과 명예교수인 저자는 소득과 부의 불평등에만 집중하는 건 협소한 관점이라고 봤다. 건강과 교육, 정치·사회 참여도의 불평등을 비롯해 각 나라의 역사와 문화적 상황에 따라 불평등의 유형은 사뭇 다양하다. 그래서 불평등은 재정 투입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저자는 “인종이나 성, 민족성에 대한 문화적 정치적 편견에 바탕을 둔 불평등은 법, 교육, 문화의 통합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지역, 성별, 세대 등 여러 면에서 갈등이 첨예한 한국 사회도 귀담아들을 만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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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독립선언,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금번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를 기회 삼아 조선 독립의 필요와 우리의 요구가 간절하다는 의사를 표시할 계획으로 결의문과 선언서를 썼다. … 이는 조선 민족뿐 아니라 동양평화와 세계평화, 정의 인도를 위하여 극히 긴절(緊切)한 일로 생각한다.”(동아일보 1922년 1월 18일자 3면 머리기사) 1922년 1월 12일 일본 도쿄지방재판소 형사 제2호 법정.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재일 한인 유학생들은 법정에서도 당당했다. 1919년 2·8독립선언에 이어 1921년 11월 5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차 독립선언을 거행한 이들이었다. 동아일보는 당시 방청석이 한인 유학생과 신문기자가 어깨를 부비고 들어서서 긴장한 기운이 넘쳤다고 보도했다. 중형을 구형한 검사도 논고에서 “우선 망국청년으로 그에 대한 번민을 가진다는 것은 동정하는 바이며…”라고 해 일순 설득당하는 듯했다. 2차 독립선언서를 만들고 배포한 주역인 이동제 김송은 전민철 이정윤 등은 금고 9개월을 선고받았다. 1919년 도쿄에서 조국 독립을 외쳤던 2·8독립선언. 8일 100주년을 맞는 이 선언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재일 한인 유학생들은 1921년 11월 ‘2차 독립선언’과 3·1운동 기념집회 등을 통해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나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동아일보는 이를 지속적으로 보도했다. 김인덕 청암대 교수는 “도쿄 유학생을 비롯한 재일 조선인들은 광복을 맞을 때까지 거의 해마다 3·1독립선언 기념 시위와 집회를 벌였다”고 말했다.▼ 청년들이 싹틔운 일본내 항일투쟁, 광복의 날까지 이어가 ▼在日유학생들 끈질긴 투쟁 1919년 2·8독립선언에 비해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1921년 2차 독립선언은 오늘날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 동아일보가 1922년 1월 3차례에 걸쳐 전한 공판 소식에서 그 전모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작년 11월 5일에 동경신전구서소천정(東京神田區西小川町)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학우회 석상에서 제2회 조선독립선언을 결의하고 인쇄물을 배포한 일로 동경감옥의 쓸쓸한 철창에서 과세(過歲)를 하게 되었던….”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2차 독립선언의 주역들은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일문과 영문으로 번역해 각 대사관과 공사관, 신문사에 배포했다. 그뿐 아니라 유학생 독립운동 동지 방원성을 중국 상하이로 보내, 임시정부와 연계해 독립선언을 워싱턴 회의에 제출하려 했다. 조선청년독립단 공동대표 자격으로 임정에 도착한 방원성은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촉구하고 1923년 이 회의에서 교육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김인덕 청암대 교수는 “이들의 선언서는 ‘조선의 독립이 곧 극동, 세계평화의 원동력’임을 확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재일 한인들의 독립 투쟁은 학우회를 중심으로 지속됐다. 김 교수에 따르면 재일 유학생들은 1920년 2·8독립선언 1주년 기념축하문을 작성해 임정과 국내로 보내려 시도했다. 3·1운동 1주년을 맞은 그해 3월 1일에는 다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였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군중 70여 명은 도쿄 히비야(日比谷·일비곡)공원에 모여 ‘대한국 만세’를 높이 외쳤다. 집회는 1921년에도 이어졌다. 본보는 “조선유학생 약 100명은 일비곡 공원에 집합하여 독립선언의 연설을 하였음으로 경관대는…76명의 학생을 검거하였는데 계속 검거 중이라더라”(1921년 3월 3일자)고 전했다. 1924년 2월 28일 ‘3·1운동 기념식’이라는 연설회에는 학우회와 조선노동동맹회, 북성회 등의 주최로 120명이 참가했다. 1926년 학우회 주최 기념식에는 250명이 참석했고 도쿄 시내와 공원에서 시위를 벌였다. 1927년 이후에는 사회주의 성향의 단체가 3·1 기념 시위와 투쟁을 이어갔다. 김 교수는 “일본 정부는 특히 조선인 유학생을 ‘민족해방운동의 저수지’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윤소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부장은 “2·8독립운동은 3·1운동의 기폭제로 조명돼 왔지만 사상적 배경이나 운동의 성숙도 면에서 볼 때 청년들은 새로운 시대의 싹을 틔운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동아일보도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유학생들의 국내 활동을 전폭 지원했다. 학우회가 1920년 7월 연 전국 순회강연회를 후원하기도 했다. 이 강연회에는 2·8독립선언으로 옥고를 치른 김도연 윤창석 이종근 등 유학생 18명이 연사로 참가했다. 동아일보는 2·8선언의 ‘설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주간 장덕수를 부산에 보냈고, 강연단 활동을 일일이 취재해 보도했다. 연사들이 전국 약 10곳을 거친 뒤 서울 단성사에서 18일 연 강연회에는 3000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 이날 강연회는 시작 1시간 반이 지나 김도연이 ‘조선 산업의 장래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연설하던 중 일본 경찰이 돌연 중지와 해산을 명령했다. 보안법 제2조 “불온의 언사를 용(用)하여 치안을 문란함이 파다”했다는 이유였다. 이를 빌미로 19일 이후 강연은 모두 중지되고 강연단은 강제 해산됐다. 동아일보는 7월 22일 1면 사설로 “무차별이니 일시동인(一視同仁)이니 선정덕정(善政德政)이니 하는 사(蛇·뱀)의 설(舌·혀)을 농(弄)하야 조선인을 기만치 말라”고 조선총독부를 맹렬히 비판했다. 이 날짜 신문은 총독부에 의해 발매금지처분을 당했다. 한편 8일 일본 도쿄 시내 재일본한국 YMCA 건물에서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다. 재일본한국 YMCA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가 후원하는 이 행사에서는 회관 건물 10층 협소한 곳에 자리했던 2·8독립선언기념관을 2층으로 확장 이전하는 기념식과 함께 선언의 의미를 짚어보는 한일 전문가들의 학술대회도 열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안영배 논설위원}

    • 201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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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대왕도 못 이룬 한국 최초 국어사전 ‘말모이’ 편찬史

    ‘어디를 둘러봐도 진실인지 아니할사, 속이고 얼러맞춰 얼쯤얼렁 하는 일들, 어깨를 부비는 위에 나라가 떠 있도다 / 남산과 북악산을 물끄러미 쳐다볼사, 거짓과 겉발림이 하도 많은 세상이매, 저들의 우뚝한 것은 정말인가 하웨라 / 아무리 그렇게야 엉터리 세상이리, 아마도 지나치게 잘못 봄이 아닐까 해, 감았다 떴다 하면서 눈을 의심하여라.’ 최남선의 절절한 애국혼이 넘치는 글이다. 국권피탈 뒤 일제는 조선인의 모든 정치 사회단체 활동을 금지하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한다. 신문화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던 1910년대는 민족운동사의 암흑기이며 진로 모색기였다. 일제가 문화말살정책을 펼치며 조선 고서들을 마구 앗아가자 박은식의 지도를 받은 최남선을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은 한민족의 슬기가 묻혀 후손들이 재능의 원천을 잃어버릴 것을 걱정했다. 1910년 10월. 최남선은 살림집을 서울 삼각동 굽은다리로 옮겨 그 앞채 2층에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발족시킨다. 조선광문회는 신문화운동의 요람이자 조선 최고지식인들의 학문적 근거지, 민족문화운동가들의 ‘양산박’이었다. 주시경 김두봉 이광수 박종화 홍명희 안재홍 정인보 한용운 고희동 안창호 이승훈 김성수 송진우 등 선각들이 속속 모여들어 조선팔도 애국운동과 세계정세를 탐구하며 계획했다. 조선광문회 애국지사들은 민족의 독립의지를 일깨우기 위해 고심을 거듭했으며, 일본 유학생 이광수 김도연 박관수 등의 도쿄 2·8독립선언에 이어 최남선은 김성수 최린 등과 3·1독립운동을 추진해 나아갔다. 조선광문회는 조선의 사기(史記)ㆍ지지(地誌) 등 민족학술 가치가 막중한 부문 저술을 엄밀히 골라내 발간했다. 조선광문회의 최고 업적을 꼽자면, 단연 세종대왕도 이루어내지 못한 우리나라 최초 한글큰사전 편찬이다. 최남선은 주시경과 한글운동을 일으켜 이광수 임규 김두봉 한정 권덕규 등과 함께 1911년부터 1916년에 걸쳐 한국 최초 국어사전인 ‘말모이’와 ‘조선어자전’을 만들어 나아갔다. 이로써 일제가 어용학자들을 동원해 편찬하는 ‘조선어사전’에 맞서 우리말을 지켜냈으며, 그 뒤 여러 한글사전 편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또한 1950년대 이전 한자사전 가운데 가장 우수한 ‘신자전(新字典)’을 1915년에 출간했다. ‘말모이’는 주시경이 편찬 책임자가 되어 어휘 수집을 시작했고, 김두봉과 김여제가 조수로 도왔다. 이후 47년간의 역정을 거쳐 1957년 을유문화사에서 총 6권으로 완간된다. 1947년 10월 9일 을유문화사는 ‘말모이=큰사전’ 첫 권을 펴냈다. 최근 영화 ‘말모이’로 상영되고 있는 이 사전의 편찬과정은 우리 민족과 문화의 수난사나 다름없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도 이 과정에서 일어났고, 옥중고혼으로 사라진 편찬위원들은 ‘말모이’ 원고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다. 조선어학회사건 법정증거물로 압수된 원고가 경찰서와 형무소로 옮겨지면서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러다가 1945년 9월 뜻밖에 사전 원고 보따리가 서울역 운송창고에서 발견되었으니, 그 기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1947년 어느 봄 날, 이극로와 김병제가 을유문화사 편집실에 들어섰다. 두 사람은 ‘조선어학회사건’과 ‘큰사전’ 원고에 얽힌 곡절을 들려주면서 출판을 제의했으나 물자난이 극심한 때여서 을유문화사 측은 두 번씩이나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세 번째는 이극로 김병제가 이희승과 함께 찾아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이극로는 가져온 원고 뭉치로 책상을 내리쳤다. “누구 하나 ‘큰사전’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으니 우리나라가 해방된 의의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래 이 원고를 가지고 일본놈들한테 찾아가서 사정해야 옳단 말이오?” 아호가 ‘고루’ 또는 ‘물불’인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 간사장이었다. 물불의 노호일성은 곧 우리 문화계 전체의 노성(怒聲)이며 질타였다. 한글학자들의 뜨거운 열정에 감동한 을유문화사는 이때부터 모든 능력과 열의를 ‘큰사전’ 간행에 쏟아부었다. 그 뒤 조선어학회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큰사전’은 1957년 10월 9일에 이르러 전6권이 모두 간행됐다. B5판 양장본 3804쪽, 올림말 16만 4125개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이다. ‘말모이 큰사전’의 의의는 당시 동아일보 사설에 담겨 있다. “이제 새로 출판된 우리말 ‘큰사전’을 보건대, 그 인쇄 제본 장정 등에서 진선지미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대 저작이요 인쇄문화의 최고봉일 줄로 안다. …우리의 학술문화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우리 손으로 창조된 것이 없는데 ‘큰사전’만은 본질적으로 우리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정일·동서문화사 발행인}

    • 201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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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총독부, 3·1운동 당시 “무단 결석 학생 퇴학시켜라” 지시

    “무단 결석자 및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하지 않는 자는 퇴학에 처한다.” 1919년 3·1운동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각 학교에 내린 처분 방침 가운데 하나다. 결석한 학생은 퇴학시키라는 지시다. 그동안 3·1운동 탄압 연구가 헌병경찰과 군대 등에 주로 초점이 맞춰졌던 가운데 조선총독부가 만세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학교에서는 어떻게 탄압했는지에 주목한 연구가 나왔다. 최우석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은 29일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연구발표회에서 ‘3·1운동에 대한 학무국과 학교의 대응’을 발표했다. 최 연구원은 일제강점기 ‘조선 소요사건 공로자 조사철’ 등의 자료를 검토해 시위를 구조적으로 탄압했던 시도를 밝혔다. 이 자료는 조선총독부가 3·1운동과 이후 학생운동 탄압에 앞장선 학무국원, 관립학교 교원을 포상하고자 만들었다. 총독부가 각 학교에 내린 처분 방침은 강경했다. 총독부는 유죄 판결 확정 학생은 퇴학, 구류 중인 학생은 정학시키라는 방침뿐 아니라, 등교하지 않은 학생도 졸업·진급 불가 및 퇴학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최 연구원은 “특히 1919년 9월 이후에는 처벌 강도를 더욱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만세시위에 참가한 교원 역시 징계에 회부하거나 고소·고발 시 우선 휴직시키도록 지시했다. 유죄가 확정되면 해직하고 학무국과 각 도장관을 통해 명단을 공유하는 한편 향후 교직원 채용에서 배제하도록 했다. 최 연구원은 이 같은 조치가 관·공립학교에서 우선적으로 집행됐을 것으로 봤다. 관립학교 교장, 각 학급 주임, 기숙사 사감 등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독립운동에 나서는 걸 막고자 학생을 설득하는 한편 일상을 감시했다. 학생들이 만세시위에 쏟아져 나가자 직원을 시위 현장에 파견하거나 주도 학생을 경찰에 이첩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돌입한 뒤 관립학교들은 휴교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기간에도 시위 참여를 막으려는 회유는 계속됐다. 교원들은 집에 돌아간 학생들을 방문해 등교를 설득했다. 학부형을 통해 학생을 압박하기도 했다. 졸업이 임박한 학생들이 졸업시험과 졸업식을 거부하자 한 명씩 회유하기도 했다.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는 1919년 3월 말부터 학생을 한 명씩 불러 만세시위 참여 여부를 조사한 뒤 졸업증서를 줬다. 관립학교들은 1919년 3월 상순부터 짧게는 며칠, 길게는 80여 일이 지난 뒤 수업을 재개했다. 6월 이후 경성의학전문학교와 평양고등보통학교 등은 동맹휴학과 만세시위를 막기 위해 학생들의 임시 기숙사 생활을 강요하고 통제와 감시를 강화하기도 했다. 탄압은 사립학교로도 확대됐다. 총독부는 1920년 3·1운동 1주년 만세시위 당시 배재학당, 숭덕학교, 숭현여학교 등 기독교계 학교가 당국에 협력하지 않는다며 외국인 교장 3명의 취직 인가를 취소했다. 최 연구원은 “3·1운동 뒤 1920년대를 ‘동맹휴학의 시대’라 부를 정도로 학생들은 수많은 동맹휴학을 벌였다”며 “조선총독부의 학생운동 통제, 탄압의 원형도 3·1운동 당시 형성됐다”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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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외교사 정리한 연구서 발간

    우리 역사 전 시기를 아울러 대외관계와 외교사를 통사적으로 정리한 한국외교사 연구서가 발간됐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도형)은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시리즈 가운데 고려, 조선, 근대편 등 3권을 최근 펴냈다”고 28일 밝혔다. 시리즈는 전 4권으로 고대편은 올해 3월 발간할 예정이다. 이번 시리즈는 2015년부터 한국사와 일본사, 중국사, 국제정치학 등 전문가 50여 명이 집필했다. 동북아재단은 “한국 대외관계를 국제정치의 종속변수처럼 보아 온 주변국의 역사 왜곡에 대응해 우리의 시각과 주체적 면모를 서술했다”며 “관련 연구의 활성화와 함께 정책결정자들이 한국외교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2만4000∼3만2000원.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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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치명적 질병 만드는 ‘착한 유전자’의 배신

    구석기 시대 인류는 부상을 입거나 출산 중 출혈로 사망하는 일이 잦았기에 피가 나면 재빨리 응고해 구멍을 막을 수 있도록 진화했다. 혈액응고 단백질 활동이 활발해지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인류에 널리 확산된 건 출혈을 피하는 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보여 준다. 그러나 피가 잘 굳도록 진화한 현대인은 뇌중풍(뇌졸중)을 걱정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출혈로 인한 사망자를 모두 더한 것보다 혈전(혈관 속 피가 굳은 덩어리)으로 인한 질병 사망자가 4배 이상 많다. 먹을 수 있을 때 에너지를 많이 축적하도록 진화한 건 비만의 원인이 됐고, 탈수에 대비해 수분과 나트륨을 몸속에 오래 보존할 수 있는 능력은 고혈압의 위험을 높였다. 미국의 저명 심장병 전문의인 저자가 과거의 ‘착한 유전자’가 각종 질병을 유발하는 까닭과 대처법을 설명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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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의 유토피아” 북만주 독립운동기지 ‘배달촌’ 찾았다

    “사막의 오아시스랄까, 민주의 유토피아랄까. 깊고 먼 북만의 오운(烏雲)에는 우리가 상상도 못하였던 이상적 동포촌락이 건설되어 현재 65호 390여 명 동포가 바야흐로 단꿈에 잠겨 아름다운 장래를 엿보고 있다 한다. … 헤매고 있는 내외지의 불쌍한 동포들은 다 같이 와서 살기를 희망한다고 한다.”(동아일보 1933년 11월 10일자 5면) 일제강점기 본보가 ‘동포의 손 기다리는 무제한의 적농지(適農地·농사에 적합한 땅)’라고 소개하며 이주를 장려했던 북만주 독립운동기지 ‘배달촌’의 정확한 위치와 현재 모습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마을이 세워진 지 100여 년 만이다.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는 학술조사단으로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지난해 9월 배달촌 현지를 방문해 조사했다고 23일 밝혔다. 현지 조사를 벌인 박민영 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배달촌은 이상설(1870∼1917)과 조성환(1875∼1948) 등이 독립운동을 벌이고자 조성한 한인촌”이라며 “하얼빈에서도 동북방으로 700km나 떨어진 중-러 국경 헤이룽강변 오지에 있어서 그 중요성에 비해 덜 조명 받은 대표적 독립운동 근거지”라고 설명했다. 박 연구위원에 따르면 배달촌은 북간도 용정과 서간도 삼원포, 북만주 밀산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립운동 기지였다. 만주, 연해주 한인마을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던 마을이기도 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자인(嘉蔭)현 우윈(烏雲)진 일대에 있었다. 배달촌은 첫 건설 이후 2번이나 마을을 옮겨야 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동포 100여 호가 1916년 3월경 오랍간(烏拉幹·올라까하)으로 이주해 황무지를 논으로 일구고 학교를 세우며 시작했다. 1920년 대한독립군 총재대리 김혁(金爀)이 1921년 임정 국무총리 신규식에게 보낸 편지에선 “한인농호 이백여가(韓人農戶 二百餘家)인데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졸업사관이 200여 명”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이곳은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군단 혈성단의 근거지였다. 혈성단장 김국초(金國礎)는 1920년 11월 28일 소재지를 ‘오운현 배달툰(倍達屯)’이라 명기했다. 안타깝게도 이 당시 마을의 오늘날 위치는 이번 조사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다. 배달촌은 1921년 1월 마적 떼의 습격을 받은 뒤 오운(烏雲)현으로 옮겨 다시 건설됐다. ‘배달촌’이라고 명명된 건 이즈음. 1922년 배달촌에 1년 가까이 머무른 이우석은 “마적은 200여 명이고 우리 학생은 30명인데 마적과 10여 일을 싸웠다”고 들은 얘기를 기록했다. 박 연구위원은 “위치는 오늘날 우윈진 아래 주청(舊城)촌 서쪽 1km 외곽”이라며 “지금은 중국인 묘지가 있을 뿐 한인이 살았던 흔적은 참담할 정도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현지 풍경을 전했다. 배달촌은 1928년 여름 헤이룽강이 범람한 대홍수로 가옥과 전답을 잃은 뒤 다시 한번 ‘오운역 동남쪽’(현재 우윈진 동남쪽 시가지 외곽)으로 옮겼다. 동아일보는 “뿐만 아니라 1931년 9월 18일 사변은 그들로 하여금 다시 죽음의 와중에 헤매게 했다”라며 일제가 일으킨 만주사변이 동포들을 위험에 빠뜨렸다고 전했다. 1933년 본보가 소개한 배달촌은 바로 이곳이다. 시가가 배달촌이었던 재중 동포 유옥자 씨(77)는 연구소 조사에서 “원래 80여 호에 달하는 한인 마을이었으나 광복 뒤 차츰 흩어져 1970년대에는 모두 떠났고 중국인들이 들어와 살았다”고 전했다. 박 연구위원은 “임정 신문인 독립신문은 배달촌의 한인학교 건립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며 “배달촌에서 생겨난 실업회 농민회 등도 독립운동의 방편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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