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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회, 16∼20부작 등 정형화된 드라마 편성 전략이 바뀌고 있다. 한 주에 한 번만 방송하기도 하고, 회차를 10∼12부로 줄이기도 한다. 4일 시작한 SBS ‘펜트하우스3’는 금요일에만 방영한다. 금 토요일 2회 방송하던 이전 시즌과 달리 주 1회씩 12주 동안 방송할 예정이다. 현재 방영 중인 KBS ‘이미테이션’은 금요일만, 17일부터 방송되는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2’는 목요일만 방영한다. 주 1회 방영하면 좀 더 많은 제작 시간을 확보할 수 있어 완성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미니시리즈 드라마 한 편당 회차도 줄고 있다. 16∼24부작이던 과거와 달리 16부작 미만인 드라마가 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종영한 tvN ‘나빌레라’, KBS ‘오월의 청춘’은 모두 12부작이다. 14일 시작하는 KBS ‘멀리서 보면 푸른 봄’은 12부작, JTBC 신작 ‘알고 있지만’은 10부작이다. 이런 시도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먼저 해왔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2019년∼)은 시즌 내내 6부작으로 제작하고 있다. 드라마 ‘인간수업’(2020년), ‘스위트홈’(〃)은 10부작이다. 카카오TV 오리지널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며느라기’(2020년)는 12부작, 방영 중인 ‘이 구역의 미친 X’는 13부작이다. 신종수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본부장은 “광고시간의 제약을 벗어나 작품에 최적화된 에피소드 수, 러닝타임으로 기획했다”며 “단순히 분량을 짧게 편집한 게 아니라 모바일 환경을 고려해 빠른 전개로 몰입감을 높이려 한다”고 말했다. 박정연 CJ ENM IP운영팀장은 “넷플릭스, 카카오TV 등 드라마를 제작·송출할 수 있는 OTT 플랫폼이 늘면서 콘텐츠를 돋보이게 만드는 전략을 고민하게 됐다”며 “드라마 특성에 따라 러닝타임, 전체 회차, 주중 방송 횟수를 유동적으로 정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시즌제는 안착한 지 오래다. 18일 방영하는 tvN ‘보이스4’를 포함해 ‘슬기로운 의사생활2’ ‘펜트하우스3’ ‘결혼작사 이혼작곡2’까지 이달 방송하는 드라마 가운데 4편이 시즌제 드라마다. 편당 평균 제작비가 10억 원가량 드는 드라마는 큰 인기를 얻지 못하면 회차를 늘릴수록 적자가 심해진다. 이에 회차를 짧게 하되 입소문을 타면 시즌제로 돌리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히트를 친 시즌제 드라마는 팬덤이 형성돼 채널 선호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줘 방송사에서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독립기념관 한글현판, 삼성그룹 로고,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백범 김구의 비문. 근현대 서예 대가 일중(一中) 김충현(1921∼2006)이 남긴 서예 작품들이다. 일중은 일제에 맞서 한글서예의 명맥을 이어가는 걸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의 글씨는 유관순 윤봉길 기념비, 수정아파트 등 700여 개 비문과 동상 등에 남아 있다. 서예에 조예가 깊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한강대교 한글 현판 등 국가 주요 건조물에 그의 글씨를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손 글씨보다 컴퓨터 활자가 훨씬 익숙한 시대이지만 우리 일상 곳곳에 일중이 남긴 서예의 흔적이 살아 숨쉬고 있다. 일중선생기념사업회는 8일부터 서울 종로구 백악미술관에서 일중 탄생 100주년 특별전 ‘一中, 시대의 중심에서’를 연다. 일중이 서예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1938년도부터 광복 후 자신만의 독자 서체를 만들어내고 동시대 예술가들과 교류하기까지의 작품 150여 점을 선보인다. 일중은 서예에 눈을 뜬 청소년 시절부터 국한문을 가리지 않고 서예를 익혔다. 17세이던 1938년 그는 동아일보 주최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에서 대학에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문구를 한글로 써 특상을 받았다. 같은 공모전에 한문 해서(楷書)체로 쓴 작품도 출품했다. 국한문 서예에 대한 관심은 말년까지 이어져 여러 작품들에 한글과 한문이 섞여 있다. 광복 전 그가 집중적으로 연구한 건 궁체(宮體)였다. 궁체는 한글이 지니고 있는 붓글씨로서의 멋과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씨체다. 그는 궁체를 한글서예의 근간으로 여겼다. 궁체를 통해 민족의식을 이어가고자 궁체 서법을 정리한 서예 교본을 여럿 편찬했다. 1970년대 한글 고유 글꼴을 찾던 디자인계의 대부 최정호(1916∼1988)는 일중에게 자문해 독특한 궁체를 개발했다. 그는 광복 후 한국적 서체에 더욱 매달렸다. 일제에 의해 억압된 고유문화가 회복되고 독립지사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 제작이 활발히 이뤄지던 시절이었다. 그는 당시 한글 고체(古體)를 창안한다. ‘용비어천가’ ‘훈민정음’ 등 판본체(초기 인쇄체)에 전서, 예서의 필법을 가미한 것. 고체는 현재까지도 고판본을 붓글씨로 쓰려는 사람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 ‘용비어천가’(1960년)에 담긴 고체는 궁체에 비해 웅장해 멀리서도 잘 보인다. 그의 독창성은 비슷한 시기에 쓴 독특한 한문 예서체에서도 드러난다. 전통 예서체에 한글 서체를 혼합한 이른바 ‘일중체’를 창안한 것. 그의 작품 ‘서산만조’(1979년)에서 보듯 직사각형에 가까운 한글의 특징이 반영돼 가장 한국적인 예서체로 평가된다. 1970년대 말 급격한 산업화로 사회가 급변하는 가운데 한국의 정체성을 담으려고 고심한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서예계는 그의 호 일중이 ‘마음(心)에 하나(一)의 중심(中)이 서면 충(忠)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듯 일중의 작품은 한국의 고유성을 일관되게 유지했다고 평가한다. 김현일 백악미술관장은 “다양한 문자가 한 화면에 모여 있는 일중의 작품은 글자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이를 조화롭게 포용하는 서예의 미학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전시는 7월 6일까지. 이후 올 10월부터 제주 소암기념관에서 순회전이 열린다. 무료.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서른 살에 워킹홀리데이 가면 너무 늦을까?” “예순에 유튜브 시작하면 이상할까?” 우리는 삶의 여러 단계에서 자신의 나이에 갇힐 때가 많다.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은 자아를 억압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이런 현상은 심해진다. 환갑에 이르면 은퇴를 고민하는 게 당연시된다. 여기에 치매 등 질병에 대한 불안까지 겹친다. 번쩍이는 아이디어와 삶에 대한 열정은 젊음에 속한 것이라고 믿는다. 맥킨지 경영 컨설턴트 출신으로 영국 칼럼니스트인 저자의 아버지도 그랬다. 그는 늙어가는 걸 매우 두려워했다. 50세 생일에 부친은 “모든 게 끝났다”고 푸념했단다. 생전 고양이를 무척 좋아했지만 자신보다 오래 살면 떠돌이 신세가 될지 모른다며 일부러 키우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건강을 유지하며 86세까지 살았고, 이혼 후 고양이 없이 홀로 지내야 했다. 저자는 아버지의 삶을 보며 노인 개념을 다시 고민했다. 그러곤 나이에 갇혀 살지 않는 인생을 제안했다. 과거에 비해 인간의 기대수명은 늘었고 이에 따라 각 연령대가 갖는 사회적 의미도 달라졌다. 저자는 기대수명 증가로 인생에서 늘어난 건 노년이 아닌 중년이라고 지적한다. ‘엑스트라 타임’, 즉 인생에 추가 시간이 생긴 것. 신(新)중년으로도 불리는 ‘젊은 노인(Young-Old)’이라는 용어가 생긴 것도 이 같은 맥락과 닿아 있다. 저자는 엑스트라 타임을 성취감 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알츠하이머를 예방하는 데에는 퍼즐, 읽기, 쓰기보다 악기 연주가 효과적이다. 그는 하늘에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매들을 마우스로 클릭해 맞추는 두뇌훈련 게임 ‘호크아이’를 추천하면서 이 게임이 노인들의 교통사고 발생건수를 줄인다는 실험 결과를 알려준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수록 의지할 친구가 필요하기에 ‘노인 공동 빌리지’와 같은 공동거주도 고려할 만하다. 개인적 차원을 넘어 정부와 기업도 젊은 노인을 지원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낮은 학력의 저소득층은 상대적으로 더 일찍 ‘늙은 노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제임스 나즈루 영국 맨체스터대 교수는 소득분위 하위 3분의 1이 70세에 경험하는 신체 능력저하를 상위 3분의 1은 80세 이후에나 겪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단순노동 위주의 미숙련 직종은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높아 심장질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또 저학력 노동자는 ‘인지비축분’(두뇌가 즉흥적으로 일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 알츠하이머에도 취약하다. 저자는 대안으로 은퇴 후에도 배울 수 있는 다기능 종합대학이나 노화 관련 질병에 대한 연구 및 제약 투자 활성화, 건강 기대수명을 측정해 대응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 정부는 ‘건강 일본 21’ 프로그램을 통해 소금 섭취량과 혈압 수준, 일일 걸음 수 등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해 생활습관에서 비롯된 각종 질환에 대처하고 있다. 최근 노년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이른바 ‘액티브 시니어’가 주목받는 건 다행스럽다. 모두가 그들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이들을 통해 동년배나 후세대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지적한 ‘중요한 건 삶의 햇수가 아니라 그 햇수 가운데 있는 당신의 삶’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길 때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추상화들 사이로 몽환적인 전자음악이 흘러나온다. 미처 치우지 못한 것처럼 전시장 한복판에 죽은 화초가 놓여 있다. 팸플릿의 QR코드는 작가가 나무 아래에서 연기하는 동영상을 보여준다. 대사도 전시의 일부가 된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PKM 갤러리에서 4일 열리는 백현진의 ‘말보다는’은 체계와 논리성을 거부하는 전시다. 회화, 조각, 음악, 공연, 대사 등 다방면에 걸쳐 60개의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 준비에만 3년이 걸렸다. 백현진(49)은 화가이자 배우 겸 인디밴드 가수다. 최근 종영한 SBS 드라마 ‘모범택시’에서 위디스크 양진호 사건을 모티브로 한 박양진 역을 맡아 입소문을 탔다. 앞서 1994년 밴드 이날치를 이끄는 장영규와 함께 만든 ‘어어부 프로젝트 밴드’로 음악 활동을 했다. 이들의 곡은 김지운 감독의 영화 ‘반칙왕’과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에 사용됐다. 홍익대 조소과 출신인 그는 연기와 음악 활동을 하기 전부터 설치미술과 회화 등의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 왔다. 2017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다. 그는 “배우건 뮤지션이건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좋다”고 했다. 전시에는 어떠한 해설도 없다. “어떻게 끝날지 모르고 그린 그림”이라는 작가의 말이 시사하듯 의미를 굳이 해석하기보다 자유분방함을 느끼는 게 더 적절한 감상법인지 모르겠다. 그는 “작품 설명 글이 재미없고 감상에 되레 방해가 되는 것 같다”며 “관람객이 각자 보고 들리는 대로 감상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일체의 설명 글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별관 1층에 마련된 ‘생분해 가능한 것’ 그림 8점에는 생태계 보호의 의미가 담겼다. 쓰레기 매립 시 빨리 분해되는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그는 “지난해부터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며 ‘자연의 일부인 내가 그림을 그릴 때 환경에 부담을 주는 물건들을 만들어내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사라져가는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7월 3일까지. 전시의 일환으로 19일에는 퍼포먼스가, 다음 달 3일에는 라이브 음악공연이 열린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신과 함께’(2017년)의 주연배우 하정우는 4년 전 인터뷰에서 “없는 칼을 휘두르며 연기하느라 민망했다”고 말했다. 판타지 장르인 이 영화에는 컴퓨터그래픽(CG) 연출이 많이 쓰였다. 배우는 단순한 그린스크린 앞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며 연기했다. 제작진은 CG와 맞물린 배우의 연기가 자연스러운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국내에 ‘버추얼 스튜디오’가 속속 도입되고 있다. 버추얼 스튜디오에서는 실사 촬영과 결합된 CG 결과물을 현장에서 바로 확인하고 수정할 수 있다. 배우를 둘러싼 대형 발광다이오드(LED) 패널에 CG 영상을 띄운 채 촬영할 수 있어서다. 이달 문을 여는 경기 하남시 브이에이코퍼레이션(VA CORPORATION) 스튜디오를 찾아가 제작 과정을 살펴봤다. 스튜디오 안 2번 세트장에는 의자 한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뒤로 놓인 가로 18m, 세로 6m LED 패널에는 한낮의 한산한 인천공항 모습이 담긴 CG가 떠 있다. 배우는 의자에 앉아 공항 장면을 연기한다. 만약 리허설 과정에서 출입국자로 붐비는 장면이 낫다고 판단되면 현장에서 CG를 바꾸면 된다. 6m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비행기가 날아오는 장면이 필요해도 마찬가지. 카메라에는 배우가 실제 공항 한복판에 앉아있는 것처럼 생생한 장면이 잡혔다. 이 같은 촬영방식은 SF(공상과학)나 판타지 장르가 아니더라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현지 촬영에 제약이 따르는 요즘 다양한 장르에 유용하다. 해외 장면이 필요하거나 사람이 북적이는 상황을 연출해야 할 때 활용할 수 있다. 버추얼 스튜디오는 주변 상황에 따라 색 보정 등이 가능해 계획대로 촬영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실제 촬영현장은 기상여건이나 일몰 등으로 인해 촬영시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장소에 따라 차량이나 시민 출입을 통제해야 하는 불편을 겪지 않아도 된다. 영화 ‘1987’(2017년)과 ‘더 킹’(2016년)을 찍은 김우형 촬영감독은 “더 킹 촬영 당시 한 신을 찍기 위해 스튜디오를 만들 수 없어 부산일보 사무실을 어렵게 섭외했다. 그런데 고층이라 외부 조명을 사용하지 못해 CG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필름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무성에서 유성 영화로 발전했듯 버추얼 프로덕션도 자연스러운 과정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런 흐름에 맞춰 비브스튜디오스는 최근 단편영화 ‘The Brave New World’와 이 영화 OST ‘Broken Me’의 뮤직비디오를 버추얼 스튜디오에서 제작했다. 명동시장 뒷골목이나 절벽 CG를 LED 패널에 띄워 촬영했다. 김세규 비브스튜디오스 대표는 “후반작업이 사라져 제작 기간이 예전의 10분의 1로 줄었다”고 말했다. 또 현장 스태프와 엑스트라, 장비 등을 동원하지 않아도 돼 제작비용을 10∼30%가량 줄일 수 있다. CJ ENM과 덱스터스튜디오도 연내 버추얼 스튜디오 제작을 추진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이미 버추얼 스튜디오 제작과 활용이 폭넓게 이뤄지고 있다.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더 만달로리안’(2019년)은 ‘스타워즈’와 마블 영화의 CG 작업으로 유명한 ILM의 버추얼 스튜디오에서 제작됐다. CG를 통해 우주 세계와 다양한 캐릭터를 구현해낸 이 작품은 지난해 미국 에미상에서 특수시각효과상을 차지했다.하남=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김도기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지난달 31일 인터넷 화상 채팅방에 얼굴을 드러낸 배우 이제훈(37)의 대화명은 김도기였다. 5월 29일 종영한 드라마 ‘모범택시’에서 그는 살인 피해자의 유족이자 다른 억울한 피해자들을 대신해 복수하는 김도기 역을 맡았다. “아직 작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해방이라는 기분보다 작품을 떠나보내기 힘들다는 느낌이 강하다”는 그는 ‘모범택시’ 마크가 그려진 검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10년 전 영화 ‘파수꾼’에서 흔들리는 청춘을 연기한 그는 ‘건축학개론’(2012년)에서 첫사랑의 아이콘, 드라마 ‘시그널’(2016년)의 프로파일러, ‘박열’(2017년)의 항일운동가를 거쳐 ‘다크 히어로’로 변신했다. 이제훈은 “매번 성장하고 보여줄 게 많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모범택시는 최고 시청률 18%로 SBS 역대 금토 드라마 중 네 번째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제훈은 매회 캐릭터를 바꿔가며 다양한 연기를 선보였다. 본업은 모범택시 기사지만 어수룩한 기간제 교사나 조선족 등으로 위장해 ‘N도기’라고 불리기도 했다. “제대로 액션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많이 기다리고 준비해 왔다”는 그는 “‘원신 원테이크’로 보여주겠다는 목표로 무술감독과 호흡을 맞춰 어렵지 않게 촬영했다”고 말했다. 극 초반 무술 대역 논란에 대해선 “무술팀이 배우가 다칠 가능성을 우려해 벌어진 일”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사적 복수를 다루는 데 대한 우려도 나왔다. 특히 드라마 결말을 놓고 의아하다는 반응도 있었다. 극 중 강하나 검사(이솜)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김도기의 죄를 눈감아주는 데다 각자의 삶을 살던 무지개운수 멤버들이 재회해 다른 작업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제훈은 “무지개운수 사람들이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돕고 응원해 준다고 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드라마는 조두순 사건이나 위디스크 양진호 회장 갑질 사건, 염전노예 사건 등 실제 발생한 사건들을 이름만 살짝 바꿔 다뤘다. 이제훈은 전적으로 박준우 감독을 따랐다고 했다. 박 감독은 한때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연출했다. 이제훈은 “실제 피해자들에게 제가 사이다 같은 역할이 되고 싶었던 열망이 컸다”고 했다. 이어 “픽션 드라마이지만 시청자들이 재미로 휘발시키기보다 실제 사건을 한번 더 곱씹어 봤으면 했다”며 “박 감독의 이전 작업들과 연출이 나를 더 진심으로 연기하도록 한 원동력이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무브투헤븐’ 등 현실을 반영한 작품들에 참여하고 있다. 이제훈은 “재밌고 오락적으로 즐길 수 있는 작품도 좋아하지만 내가 연기한 스토리를 보고 나서 각자의 마음에 남은 생각들이 아깝지 않은 작품들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데뷔 14년차 배우인 그는 조만간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다. 그는 박정민 등 배우 3명과 함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왓챠가 제작하는 ‘언프레임드’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도 맡는다. 이 작품에서 이제훈은 젊은이들이 무엇을 갈망하고 원하는지를 이야기할 예정이다. 올 12월에 공개된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26일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굴뚝마을의 푸펠’은 약 10년에 걸쳐 제작됐다. 2016년 일본에서 같은 제목의 그림책이 먼저 발표됐다. 언뜻 그림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 같지만 그건 아니다. 영화 제작자이자 그림책 작가인 니시노 아키히로(41)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2011년 영화 각본을 먼저 썼다. 그림책은 영화의 스핀오프”라고 설명했다. 선원작, 후스핀오프가 아니라 선스핀오프, 후원작으로 진행된 건 독특하다. 그는 “영화의 경우 스토리가 재미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그림의 매력은 1초 만에 전달된다. 팬이 아닌 이들의 시선을 끌려면 그림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의 바람대로 그림책은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에서 약 7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다. 서정적인 일러스트가 특히 아름답다는 반응이 많았다. 이는 그의 독창적인 작업방식에 힘입은 것이다. 그는 “4년에 걸쳐 총 33명의 작가와 손잡고 그림책을 만들었다. 그가 이야기와 대략적인 스케치를 넘기면 나머지 작가들이 세부적인 그림을 그려나가는 방식이었다. 제작비는 크라우드 펀딩으로 충당했다. 그는 영화에서도 온기가 느껴지게 하자는 생각으로 손으로 그린 느낌을 살렸다. 지난해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는 18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단순히 그림이 예뻐서 책과 영화가 잘 팔린 건 아니다. 그는 일본의 유료회원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온라인 살롱’을 적극 활용했다. 온라인 살롱 구독자 수 1위(6만5000명)에 오른 그는 저작권을 과감히 포기하고 팬들에게 무료로 그림을 배포했다. 팬들은 이를 활용해 일본 각지에서 그림책 전시를 열었다. 2019년에는 프랑스 파리 에펠탑에서 일본인 작가 중 처음으로 그림책 전시를 개최했다. 지난해 영화 개봉 당시 코로나 사태로 극장가가 철퇴를 맞자 보육원 등에서 영화 관람을 원하는 아이들을 모집하는 한편으로 SNS를 통해 이들에게 영화 티켓을 선물하고 싶어 하는 성인들을 연결했다. 입소문을 탄 이 영화는 세계 40개 배급사로부터 수출 제의를 받았다. 사실 그는 19세 때부터 개그맨으로 활동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언어의 벽을 넘어설 수 있는 영역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29세 되던 해에 그림책 작가가 됐다. 그러나 크라우드 펀딩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한때 사기꾼 취급을 받으며 일본에서 비호감 연예인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꿈을 이야기하면 비웃음을 사는 ‘굴뚝마을의 푸펠’ 세계는 작가의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그는 “코로나 사태에도 최선을 다해 꿈을 꾸는 모든 이들을 응원했으면 하는 바람에 개봉일자를 미루지 않았다. 엔터테인먼트 세계에서 아시아 리더인 한국에서 영화를 개봉하게 돼 영광”이라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수소는 H, 산소는 O, 질소는 N…. 학창 시절 화학 시간에 줄기차게 원소 주기율표를 외웠다. 그땐 무작정 외우기만 했는데 문득 이 암호 같은 원소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궁금하다. 원소명은 대개 그리스어나 라틴어에서 유래됐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화학 명명법 개혁’이 계기다. 라부아지에 등 당대 화학자들은 “현대어는 서로 달라 일률적으로 이름을 정하기 힘들다”며 이미 사어(死語)가 된 그리스어, 라틴어에서 원소명을 따왔다. 예를 들어 나트륨(Na)은 라틴어 ‘natrium’에서 따왔다. 이는 이집트의 니트리아 지역 이름에서 유래됐다. 고대 이집트인은 이곳의 호수들에서 염 혼합물을 채집해 세탁, 방부 처리, 의약품 제조에 사용했다. 이 염을 가리키는 이집트어 단어는 로마자로 ‘ntr’로 표기되는데 이후 nitron(그리스어)과 nitrum(라틴어)으로 변형됐다. 라부아지에 등이 원소 기호를 정하기 전에는 사물에 빗댄 원소 표시법이 쓰였다. 중세 연금술사들이 사용한 기호였다. 예를 들어 원소 기호 Au인 금(라틴어 aurum)은 원으로 표시했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고 광채를 발하는 모습이 태양과 비슷하다는 게 이유였다. 반면 원소 기호 Ag인 은(라틴어 argentum)은 자주 변색된다는 이유로 매일 모양을 바꾸는 달, 그중에서도 초승달로 표시됐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오래된 중세 필사본까지 두루 뒤졌다. 종교, 신화와도 얽힌 화학 원소명의 유래가 궁금하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도니체티의 오페라 ‘안나 볼레나’가 6년 만에 돌아온다. 2015년 라벨라오페라단이 국내 초연 후 업그레이드한 이번 작품은 29, 30일 이틀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선보인다. 이 오페라는 16세기 영국 왕실의 실화를 다뤘다. 영국 국왕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로 참수형을 당한 앤 불린의 사랑과 복수를 그린다. 펠리체 로마니가 대본을 쓰고 벨칸토 오페라의 대가 가에타노 도니체티가 작곡을 맡았다. 안나 볼레나는 ‘마리아 스투아르다’ ‘로베르토 데브뢰’와 더불어 도니체티의 여왕시리즈 3부작으로 통한다. 1830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카르카노 극장에서 처음 선보일 당시 큰 성공을 거뒀다. 이 오페라를 본 작곡가 빈첸초 벨리니가 감격한 나머지 자신이 작곡 중이던 악보를 찢은 일화가 전할 만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곡으로 유명하다. 이번 무대는 오페라 전문 지휘자 양진모가 지휘를 맡고, 연출가 이회수가 세 주인공의 우울함과 불안한 심리를 그린다. 1만∼20만 원.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동화 ‘배고픈 애벌레(The Very Hungry Caterpillar)’를 쓴 미국 작가 에릭 칼(사진)이 23일(현지 시간) 별세했다. 향년 92세. 26일 외신에 따르면 칼은 23일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작업실에서 신부전증으로 숨을 거뒀다. 1969년 출간된 칼의 대표작 배고픈 애벌레는 허기진 애벌레 한 마리가 일주일 동안 음식을 먹고 자라나 나비로 성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 출판사 펭귄 랜덤하우스에 따르면 224개 단어와 그림들로 구성된 배고픈 애벌레는 한국어를 포함한 70여 개 언어로 번역돼 5500만 부 넘게 팔렸다.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인 부모 사이에서 1929년 태어난 칼은 6세 때 향수병을 호소하던 어머니를 따라 독일로 돌아갔다. 칼은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대에서 그래픽 예술 공부를 마치고 미국으로 가 뉴욕타임스에서 삽화와 광고디자인을 그렸다. 이후 작가 빌 마틴 주니어를 만나 작가의 길에 입문하고, 1967년 ‘갈색곰아, 갈색곰아, 무엇을 보고 있니?’로 데뷔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 부조종사가 몬 전투기가 러시아 크림반도에서 격추됐다. 그를 구해준 이는 타타르 유목민. 동물 지방과 펠트 천으로 감싸여 치료를 받은 그는 이후 미술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이름은 요제프 보이스(1921∼1986). 그는 한때 자신을 죽음에서 구해준 펠트를 이용해 여러 작품을 만들었다. 그에게 펠트는 생명을 지키는 에너지이자 따뜻함 자체였다. 22일 열린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재난과 치유’ 기획전의 포스터 작품은 요제프 보이스의 ‘곤경의 일부’다. 작품을 통해 개인적, 사회적 상처를 치유하고자 한 그의 의도처럼 이번 전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맞아 관람객에게 예술을 통한 위로를 건넨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25일 언론 간담회에서 “감정 표현이 매우 절제된 한국 미술문화에서 재난과 희비애락이 대담하게 표현된 경우는 드물다. 이런 전통에 도전하는 전시”라고 소개했다. 행위예술가 프란시스 알리스의 영상 작품 ‘금지된 발걸음’은 전시 취지와 맞닿아 있는 대표작이다. 뿌연 화면 사이로 숲 어딘가에 버려진 듯한 콘크리트 건물이 나온다. 난간 하나 없는 옥상. 경계를 벗어나는 순간 추락할 수밖에 없는 옥상을 한 남자가 더듬거리듯 걷는다. 지난해 10월 홍콩 라마섬을 배경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인간에게 닥친 팬데믹의 불확실성을 상징한다. 이진주는 구조물의 단면에 회화를 그려 넣은 작품 ‘사각’에 코로나19로 인한 고통을 담았다. 핏물이 채워진 수영장에 마스크를 끼고 앉은 소년들과 흰 천을 뒤집어쓴 사람들의 모습은 답답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불안은 단지 감정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방역당국이 “코로나19 발생 이전의 세상은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고 밝혔듯 코로나 이후 일상의 공간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게 됐다. 서도호는 손잡이를 매개로 이 같은 변화를 포착했다. 손잡이를 만지는 행위는 어느새 강박과 두려움을 낳았다. 3차원(3D) 모델링을 활용한 설치 작품은 손잡이 모형 주위로 바이러스가 퍼지는 형상을 연상시킨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도 누군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직장에 나와야 한다. 상당수는 플랫폼 노동자들이다. “누군가의 안전은 누군가의 위험을 담보로 성립된다”는 홍진훤은 배달 노동자들에게 주목한 작품을 선보였다. 한쪽 다리를 절며 하염없이 움직이는 영상작품 ‘Injured Biker’를 보고 있노라면 재난이 불러온 소외를 직면하게 된다. 불가항력의 재난 현실에도 김범은 희망을 찾는다. 그는 높이 4m, 폭 3m의 거대한 화폭에 미로를 그려 재난이 뒤덮은 현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상단 왼쪽에 작은 입구가, 하단 오른쪽에 출구가 각각 있다. 전시를 기획한 양옥금 학예연구사는 “전시기획 때부터 크게 다가온 작품이다. 분명 어딘가에 출구는 있다고 말해주는 듯하다”고 말했다. 이배는 설치예술작 ‘불로부터’를 통해 나무가 타고 남은 숯에 존재감을 부여하며 긍정의 메시지를 전한다. 숯은 우리 생활의 에너지원이다. 재난이 닥쳐도 그 이후의 삶을 꿈꾸며 살아가자는 바람을 담았다. 전시는 5가지 소주제로 나뉘어 있지만 이에 국한하지 않고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그만큼 코로나19가 우리 삶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단편영화 ‘인플루엔자’도 이번 전시에 포함됐다. 국내외 작가 35명이 6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8월 1일까지. 무료.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제17회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의 주제다. 전 세계 46개국이 참여한 이번 건축전에 한국관은 ‘미래학교’로 답했다. 22일 오전 11시(현지 시간) 이탈리아 베니스 자르디니 공원 안, ‘미래학교’가 문을 열었다. 교실 중앙에는 충남 서천군의 갈대로 엮어 만든 원형 카펫이 자리해 있다. 관람객은 누워 쉬거나 명상해도 된다. 부엌에는 제주 옹기에 담은 차와 음료가 있으며, 전남 완도군에서 채취한 미역으로 끓인 미역국도 소개됐다. 언뜻 보면 ‘건축전이 맞나?’ 의아하다. 한국관 전시 총괄을 맡은 신혜원 예술감독은 21일 서울 종로구 아르코 미술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세계가 공통적으로 직면해 있는 기후위기, 디아스포라(난민 문제), 혁신 등을 다루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폭넓게 대화하면서 더 좋은 미래를 구상해 보자는 취지에서 ‘미래학교’를 열게 됐다”며 “전시는 문제에 대한 정답을 보여주기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구심점을 만들어주자는 취지”라고 소개했다. 안락한 공간인 카펫은 자연을 되짚어보게 한다. 갈대 카펫을 만든 김아연 작가는 로봇 청소기 등이 늘면서 갈대 빗자루 제작이 줄고 있다는 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의 작품은 생명이 사라진 상태의 자연(블랙메도우)을 고찰하는 공간인 것이다. 미역국은 송호준, 리오 제임스 스미스 작가가 준비한 ‘미래학교 식량 채집’ 전시다. 송 작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돌아다니는 미역의 이동에서 난민의 모습을 포착했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을 대비해 온라인 가상 캠퍼스 ‘미래학교 온라인’도 만들어졌다. 학교에서 진행되는 워크숍, 토론 등 20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한 50여 개의 프로그램은 미래학교 온라인 홈페이지를 통해 기록하고 송출될 계획이다. 신 감독은 “작가들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권위적인 면을 벗어나 많은 이가 함께 연대하는 과정으로서의 전시가 코로나19 이후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해 코로나19로 한 해 연기된 이번 건축전은 11월 21일까지 진행된다. 가장 우수한 건축을 선보인 국가관을 뽑는 ‘황금사자상 국가관’은 8월 발표 예정이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19일 종영한 tvN ‘마우스’는 배우들의 호연과 꼬리를 무는 반전 덕에 평균 5∼6%대의 안정적인 시청률을 유지했다. 특히 사이코패스의 아들 성요한(권화운)은 바른 청년 정바름(이승기)과 대치되는 캐릭터로 시청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결국 진짜 살해범은 바름으로 밝혀지지만 요한은 절제된 감정 연기로 극중 몰입도를 높였다. 이번 작품에서 신스틸러로 존재감을 각인시킨 배우 권화운(32)을 21일 만났다. 그는 “반전의 키를 쥔 인물이라 부담감은 있었지만 악인과 선인의 이미지를 다 보여드릴 수 있어 의미 있고 즐거웠다”고 종영 소감을 밝혔다. 극 초반 시청자들이 살인자로 지목했을 때 그는 “의도한 대로 잘 나왔구나”라며 안도했단다. ‘왜 더 폭발적으로 연기하지 않느냐’는 일부 시청자 댓글에 답답하기도 했다. “정말 그렇게 하고 싶은데 결말을 밝힐 수도 없고 참…. 범인 캐릭터가 다시 들어온다면 광기 어린 연기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권화운이 해석한 요한은 사이코패스의 자식을 향한 주변 시선 때문에 상처받지만, 그 아픔을 묵묵히 삼키는 인물이다.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촬영 기간 8개월 내내 두문불출한 채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원래 성격이 밝은데 고독한 상황에 스스로를 묶어두니 차분해지더라고요. 종영했으니 이제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중입니다.(웃음)” 데뷔 6년 차인 그는 조연으로 꾸준히 활동하다 KBS ‘좀비탐정’(2020년)에서 주연을 맡은 후 올해 마우스와 KBS ‘달이 뜨는 강’을 통해 주목받고 있다. 깡패, 의사, 비서, 군인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아온 그에게 이번 작품은 터닝 포인트다. 그는 “그간 주로 발랄한 역할을 맡았는데 나도 차가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배우 권화운의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었다”고 말했다. “늘 궁금하고 다음이 기대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권화운의 차기작은 로맨스코미디 ‘이벤트를 확인하세요’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인생은 살이 쪘을 때와 안 쪘을 때로 나뉜다.’ ‘죽지 않을 만큼 먹고 죽을 만큼 운동해라.’ 다이어트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는 여성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말들이다. 그런데 이 책 저자(1959∼2002)는 음식을 그냥 욕망해 보라고 말한다. 그는 거식증을 앓은 적이 있다. 키 162cm에 몸무게 37kg. 21세의 허벅지는 무릎보다도 가늘었다. 그는 3년 내내 하루에 베이글과 요거트, 사과, 치즈 1개씩만을 먹었다. 그리고 매일 수 km를 달렸다. 저자가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는 나중에야 알았다.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 것 같던 20대 초반에 저자는 불안했다. 때는 1980년대였다. 어떤 대학을 갈지, 누구와 잘지, 선택의 순간마다 ‘여성인 내가 정말로 그래도 되나’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저자는 일이나 진로 같은 거대한 대상 대신 눈앞에 보이는 음식으로 자기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굶기 같은 일련의 의지력 시험은 자신을 남다르고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듯했다. 식욕만이 아니다. 성욕, 소유욕, 권력욕. 여성에게는 욕구를 상상하는 일이 유난히 어렵다. 욕구 자체가 어쩐지 부당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죄책감의 근원을 사회 역학관계에서 찾는다. 세상은 남성의 욕구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왔다. 집, 직장에서 남성들에겐 대개 조력자가 있다. 조력자는 주로 여자들로, 청소 요리 파일 정리 심부름 등을 해준다. 잡지와 광고판엔 ‘날 언제든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 여성들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오늘날 여성들의 삶에도 기회가 엄청나게 늘었다고는 한다. 그러나 저자는 앞서 말한 봉사와 제공의 이미지들이 여성 주변에 존재하는지 묻는다. 여성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누군가 성심성의를 다해 줄 거라는 기본적인 신뢰조차 없다. 약 20년 전에 나온 이 책에서 우리는 얼마나 나아갔나. 성차별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해도 집으로 돌아와선 케이크를 먹은 자신을 혐오하고 벌주고 있진 않은가. 머리가 아닌 몸으로 페미니즘을 받아들이기엔 여전히 ‘하지 마’라는 말이 분신처럼 여성들을 쫓아다닌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정중하게 정리된 망자의 생전 흔적을 받아든 유족의 심정은 어떠할까. 14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무브 투 헤븐’(10부작)은 유품정리사라는 다소 생경한 직업을 다룬다. 모든 인생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이 드라마는 닷새 만에 국내 넷플릭스 순위 1위를 차지했다. 드라마는 아스퍼거 증후군(자폐증과 비슷한 발달장애)이 있는 그루(탕준상)와 그의 후견인 상구(이제훈), 그루의 친구 나무(홍승희)가 유품정리사로 일하며 세상을 떠난 이들이 미처 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산업재해, 고독사, 스토킹 범죄, 노인 동반 자살 등 사회적 사건 속에서 주목받지 못한 채 쓸쓸히 떠난 망자들을 조명한다. 20일 인터뷰한 무브 투 헤븐의 윤지련 작가는 “범죄사건 등이 소재가 되는 만큼 수사물이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범죄 장면이나 처벌 과정보다 고인들의 삶이 더 궁금했다”고 밝혔다. ‘어떤 마음으로 돌아가셨을까.’ ‘아쉬움은 없었을까.’ 작가의 고민은 자극적인 콘텐츠들 속에서 빛을 발하는 휴먼 스토리로 이어졌다. 윤 작가의 이번 작품은 그의 이전 대표작인 반올림3(2006∼2007년), 꽃보다 남자(2009년) 등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유품정리사 소재는 2015년 읽은 김새별 작가의 에세이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에서 착안했다. 그는 “사실 당시 ‘드라마를 다시 쓸 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기였다. 김새별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다시 글을 쓰고 싶게 했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 나도 많이 위로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집필에 앞서 철저히 사전조사를 했다. 한국, 미국, 일본의 유품정리사 사례를 취재했다. 유품정리사 3명을 인터뷰하고 업무 현장에도 따라갔다. 가장 기억에 남은 건 70대 노인의 고독사였다고 한다. “고독사 에피소드 집필을 마친 상태였는데 현장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어요. 수많은 물건들이 각자 한마디씩 내뱉는 것 같았죠. 하루에 이만큼 약을 드셨구나, 젊을 때는 이런 일을 하셨겠구나…. 불과 몇 시간 만에 모르던 분의 인생을 엿본 것 같았습니다.” 윤 작가는 “사회적 편견과 유족의 반대에도 고집스레 고인의 마음을 전달하려는 유품정리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감정 변화가 없고 배운 대로 행동하는 아스퍼거 증후군 캐릭터(그루)를 창조했다. 그는 “담담히 유품을 전달하며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게 그루”라고 말했다. 누군가의 죽음이 집값 하락의 원인인 양 여겨지는 사회에서 망자를 오로지 한 인간으로만 바라보는 그루는 윤 작가의 메시지와 맞닿아 있다. 윤 작가는 그루 캐릭터를 만든 뒤 상구와 나무, 주변 인물들의 서사와 관계성을 촘촘히 엮어 나갔다. 회차별로 이야기 전환이 잦은데도 시청자들이 주인공들에게 몰입할 수 있는 이유다. 권투를 한 상구는 그루에게 흑기사가 되고, 나무는 그루의 감정을 사회적 언어로 통역해 준다. 그는 “시청자들에게도 이 드라마가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나도 배우들도 시즌2에 대한 바람이 크다”고 덧붙였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한 여성이 있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공부를 하고, 명문대를 졸업했으며, 대기업에 취직했다. 그 후로도 엄마는 동료나 애인의 스펙을 따져 물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편을 만나 10년간 결혼생활을 했지만 아이 낳기가 두렵다. 엄마 같은 엄마가 될까 봐. 남편과 아이가 자기 때문에 불행해질까 봐. 뒤틀린 관계로 살아가는 부모와 자녀들에게 소통하고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56)가 나섰다. 가정의 달을 맞아 채널A가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금요일 오후 8시)에 이어 내놓은 ‘요즘 가족 금쪽 수업’(일요일 오후 7시 50분)을 통해서다. 오 박사와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배우 신애라가 차례로 실제 사연을 듣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강연 형식이다. 8일 첫 방송 이후 두 번째 방송 만에 ‘치료 받는 기분’이라는 호응이 나오고 있다. 20일 전화 인터뷰로 만난 오 박사는 “많이들 좋은 영향을 받으셨다고 하니 자체 평가로는 ‘지축을 흔들었다’고 표현하고 싶다”고 전했다. 이런 그의 소감은 예능계의 현주소와 맞닿아 있다. 연예인 가족이 나오는 오락형 육아 프로그램만이 가족 예능의 맥을 잇고 있는 상황에서 강연 형식의 가족 예능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그는 “시청률만 생각했다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며 “코로나19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면서 이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많아진 시기에 자신과 가족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금쪽’ 시리즈는 작품별 차이를 통해 위로의 폭을 넓힌다. ‘금쪽같은 내 새끼’가 아이들의 입장에서 아이를 이해하는 프로그램이라면, ‘금쪽 수업’은 성인이 된 나를 이해하기 위해 삶을 되돌아보는 인생 수업에 가깝다. 16일 방송에서 배우 이윤지가 “부정적인 감정 표출이 어렵다”고 상담하자 오 박사는 “부정적 감정도 나쁜 게 아니다. 그동안 착하게 잘 커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어릴 때도 듣지 못했던, 그리고 어른이라 더 듣기 힘든 위로였다. 오 박사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아이 시절에 자신을 투영해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의 장단점을 이해하게 된다”며 되돌아보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만 성인이 된 후에도 자신의 문제를 부모 탓, 가정 탓으로만 돌리는 건 지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분명 부모는 자식을 사랑했지만 그 방법이 잘못됐을 거다. 용서하란 말은 아니다. 그저 부모를 ‘불완전한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른이든 어린이든 약점은 있으니 대화하고 깨우치면 얼마든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방송과 강연 등 여러 곳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며 오 박사는 지금 시대 가족에게는 감정 소통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고 한다. 그는 “시대에 따라 가정환경은 달라지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다. 바로 부모는 자식에게 중요한 사람이고, 자식은 부모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기대한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방식에 변화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육아 회화’를 강조한다. ‘제대로 안 할 거면 하지 마!’라고 말하기보단 ‘열심히 하려는 자세가 가장 중요해’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전자처럼 말하면 알아듣고 분발할 거라 착각하지만 감정이 상할 뿐이다. 오늘 하루 한마디만 달라져도 나중에는 전혀 다른 곳에 도달해 있을 것”이라며 실천해보기를 권한다. 그는 가족의 기본은 ‘마음을 나누는 인생의 대화를 하는 관계’라고 말한다. 힘들 때 진솔하게 버팀목이 되어줄 거란 바람이 있기에 엄마, 아빠, 아이를 호명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일렁인다. 금쪽 시리즈를 통해 저마다의 상처를 극복하고, 따듯하게 결속돼 있는 동시에 각자 개인으로 존중해주는 가족이 늘고 있다. 별다를 것 없어도 매회 시청자들이 공감하고 눈물을 쏟아내는 이유일 테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깎지 않는 조각가. 수식어만으로도 우성 김종영(又誠 金鍾瑛·1915∼1982)은 유달랐다. 구태여 깎지 말라는 ‘불각(不刻)의 미’는 김종영이 한평생 읊었을 철학이다. 그의 고유함은 한동안 많은 평론가들의 이목을 끌어왔지만 한편으로는 그 뿌리가 무엇인지 쉽게 간파되지 않는다는 말이 따라다녔다. 묵은 질문의 실마리가 될 전시가 찾아왔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김종영미술관은 개관 20주년을 맞아 7일부터 특별전 ‘김종영의 통찰과 초월, 그 여정’을 열고 그의 작품을 서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다른 시선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김종영의 작품세계를 연구해온 원로 평론가 옥영식 선생과의 공동 연구 결과다. 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은 “김종영 선생은 동서양을 관통하는 추상이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 고유의 우주관을 표현해낼 수 있을지 고민했던 것 같다”며 “양과 음, 하늘과 땅과 사람 등 생성의 원리를 다룬 동양 사상이 작품 곳곳에서 나타난다”고 말했다. 김종영의 명성을 드높인 작품 ‘새’에서부터 그의 고뇌는 드러난다. 이 작품은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작품으로 한국 최초의 추상 조각이다. 당시 김종영은 동양 철학자 우암 김경탁(1906∼1970)의 논고 ‘실생 철학의 구성’(1953년)을 읽고 평생 소장했는데, 그 내용은 음양조화론과 맞닿아 있었다. 음양조화론과 함께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는 천지인삼재(天地人三才)가 통용됐다는 점을 접목해 보면 새의 머리 부분은 하늘, 수직으로 선 새의 가슴과 다리는 각각 사람과 땅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기존의 시각과는 상이하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은 작품 제목이 비슷하다는 이유 등으로 서양 현대조각의 아버지인 브른쿠시의 ‘공간의 새’와 연관된 작품이라고 해석했다. 그가 활동하던 1950년대는 우리나라에 서구 미술이 유입됐고 김종영 또한 이를 능동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김종영 관련 논문 중 상당수가 그의 작품과 서구 작품 간의 형태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어떤 영향 관계가 있었는지 살피는 것에 집중돼 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우주관을 염두에 두면 날아가려는 순간의 모습을 포착한 브른쿠시의 새는 김종영의 새와는 전혀 달리 보인다. 조각뿐 아니라 회화에서도 그의 작품관을 엿볼 수 있다. 1961년에 그린 드로잉 작품은 화면을 위아래로 나눠 마주 본 채 누워 있는 여인을 담았다. 수많은 드로잉 작품 중 하나로 여겨졌던 이 그림에서 새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림 위와 아래에 모두 영문으로 이름을 쓰고 그 옆에는 각각 상형문자로 ‘山’과 ‘水’를 썼다는 사실이다. 바탕색은 각각 양과 음의 색인 갈색과 파란색이다. 미술관은 주역(周易)에서 아래가 물이고 위가 산인 산수몽괘(山水蒙卦)가 있는 점을 볼 때 이 작품 또한 동양 사상을 품고 있다고 분석한다. 불각도인(不刻道人)이라는 그의 정체성은 여러 실험의 결정체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에서 “표현은 단순하게, 내용은 풍부하게”라고 방향성을 설명했다. 그의 절제적 표현은 작가의 이념 등을 표현하지 않고 재료 자체에 관심을 두는 서구 미니멀리즘과는 거리가 멀다고 해석할 수 있다.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 어긋나게 포개 놓아 단순미의 극치라고 평가받는 ‘작품 80-6’도 노자 도덕경 등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분석된다. 시선을 달리하면 해석이 달라진다. 이번 전시는 김종영의 작품을 김종영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작품을 새로 톺아볼 시발점이 될 것이다. 다음 달 27일까지. 무료.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목을 완전히 젖혀야 전체를 볼 수 있는 높이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밝은 색조. 숭유억불에 갇혀 왠지 소박할 것만 같은 조선시대 불화에 대한 편견은 첫눈에 사라졌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공주 신원사 괘불’(국보 제299호)은 높이 10m, 너비 6.5m, 무게 100kg에 이른다. 괘불(掛佛)은 규모가 있는 사찰에서 특별한 법회나 의식을 치를 때 야외에 걸어놓는 대형 불화를 말한다. 신원사 괘불은 1664년 6월 조성 이후 이번 전시까지 단 두 차례만 외부에 전시됐다. 첫 전시는 2005년 경남 양산 통도사의 성보박물관에서 이뤄졌다. 이번에는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지난달 28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조선시대 괘불은 그림에 능한 승려(화승)들이 그렸다. 신원사 괘불은 17세기 충청도에서 주로 활동한 화승 응열(應悅)이 만든 첫 번째 괘불이다. 그를 포함해 총 5명의 화승이 그렸다. 응열은 9년 후 충남 예산 수덕사 괘불도 그렸다. 괘불은 한번 제작하면 오랫동안 사용해 화승 1명이 2개 이상을 그린 예가 드물다. 신원사 괘불은 응열의 독특한 개성이 잘 드러난다. 기존 괘불들이 구름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것과 달리 화폭에서 등장인물 수를 줄이고 부처 주변의 빛을 강조했다.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위대함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섬세하게 장식한 옷과 반짝이는 구슬이 부처의 몸을 감싸고 있다. 색을 칠한 뒤 꽃이나 기하학 무늬를 더했는데 부처를 공경한 화승들의 정성이 느껴진다. 괘불에 그려진 부처는 ‘노사나불(盧舍那佛)’. 초록색 광배 위에 쓰인 한자를 통해 알 수 있다. 노사나불은 불교에서 오랜 수행을 거쳐 부처가 된 보신불이다. 그런데 불화 하단의 화기(畵記)에는 ‘석가모니불을 그렸다’고 적혀 있다. 이는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이 서로 다른 몸으로 태어나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전했지만, 결국 같은 여래라는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부처를 둘러싼 주변 인물도 찬찬히 살펴볼 만하다. 아래는 붉은 얼굴을 한 사천왕(불법을 수호하는 4명의 수호신)이 사방을 지키고 있다. 사천왕 주변에는 깨달음의 과정을 겪는 보살인 월광보살, 일광보살, 지장보살, 관음보살이 절구를 찧는 토끼가 그려진 달, 붉은 태양, 지옥에 있는 중생을 구해주는 구슬, 현실에 있는 중생을 위해 감로수를 담은 정병을 각각 들고 있다. 위쪽에는 부처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5명씩 무리를 지어 찾아온 십대제자들이 있다. 그 위로는 공경의 마음을 담아 복숭아를 공양하는 천인(天人) 2명이 있다. 부처와 눈을 맞추며 그림을 살피다 보면 종교적 장엄함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다. 불교사상을 잘 모르는 이라도 숨은그림찾기처럼 즐길 만한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9월 26일까지. 무료.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열두 살 아이에게 몇 살이냐고 묻는다. 우리라면 한 손으로 손가락 한 개를, 다른 손으로는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일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이전 파푸아뉴기니의 오크사프민 원주민 아이라면 오른쪽 귀를 만졌을 것이다. 이들은 숫자 개념이 없기에 특정한 신체 부위를 가리켜 수를 세기 때문이다. 수렵 채집의 물물교환 사회에서 숫자는 필요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일부 원주민이 농장과 광산의 일자리를 찾아 이주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이들은 화폐경제를 익히기 위해 수학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 사례는 수학은 보편적 언어라는 통념의 한계를 보여준다. 통상 만국 공통의 언어는 없지만 ‘1+1=2’라는 사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3년 미 항공우주국(NASA)의 지원을 받은 외계지적생명탐사 프로젝트에서 과학자들이 셈법 체계에 대한 정보를 외계에 보낸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수학은 사회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언어다. 수학도 사회적 산물이기에 불공정한 룰에 때로 이용된다. 미국 일부 주가 사용하는 재범 예측 프로그램 COMPAS가 내린 2개의 결정이 대표적이다. 수사 과정에서 나온 질의응답 등을 바탕으로 COMPAS는 물건을 훔친 10대 흑인 소녀에게 과거 경범죄 전과를 고려해 10점 만점에 8점을 부여했다. 재범 가능성을 높게 본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값의 물건을 훔친 중년 백인 남성에게는 3점을 부여했다. 그에게 무장 강도 전과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는 COMPAS에 입력된 변수가 빈곤 정도, 실업 여부, 미래에 대한 낙관 등 소수 인종에 불리한 데이터로 구성된 데 따른 것이다. 수학적 알고리즘에 편향이 들어가는 건 이를 사람이 만들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에서 여성이나 유색인종의 진출은 극히 부진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여성과 유색인종 집단에 재능을 가진 이가 적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히려 현재의 사회 시스템이 이런 상황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백인 남성 위주의 집단에 비백인 여성이 진입하기는 상대적으로 힘들며, 들어가더라도 만만치 않은 텃세에 시달릴 가능성이 클 것이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궁궐의 화려한 단청 옆으로 연꽃과 모란꽃이 하늘에서 비처럼 내린다. 9일 ‘궁중문화축전’이 열린 서울 종로구 경복궁 경회루 서쪽 소나무 숲. 20여 개의 야외 빈백에 30여 명이 거의 누운 자세로 편하게 앉아 있었다. 이들 앞에는 80인치 대형 발광다이오드(LED) TV 8대가 놓여 있었다. 화면에는 조선 궁궐과 단청, 연꽃 등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미디어아트 ‘조선의 문화, 꽃으로 피다’가 재생되고 있었다. 자칫 딱딱하게 받아들이기 쉬운 문화재에 첨단 기술이 말랑말랑한 감성을 불어넣고 있다. 궁중문화축전 미디어아트는 주로 전각이나 문루에 영상을 덧입히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전구나 네온관 같은 조명기구를 문화재 위에 직접 걸어놓으면 훼손 우려가 있어서다. 주재연 궁중문화축전기획운영단 감독(56·사진)은 “단순한 영상 투사가 아닌 문화재 유형별로 맞춤형 콘텐츠를 보여주고자 한다”며 “건조물은 평면이 아니기에 형태에 따라 화면 비율을 달리해야 한다. 건물 기둥, 지붕, 문 등과 어울리는 각각의 콘텐츠를 투사하는 방안을 기획 중”이라고 했다. 일각에선 미디어아트가 문화재 고유의 색을 가린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주 감독은 “색과 이미지 변형은 작가의 작품세계”라며 “미디어아트는 궁궐 건축과 역사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수단인 만큼 이를 통해 문화재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 감독은 올 하반기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합친 융합예술을 기획하고 있다. 경복궁 흥례문 앞에 강원 원주 한지로 만든 등불이나 전남 담양 대나무로 조성한 숲을 만들고 그 위에 영상을 입히는 식이다. 그는 “올해부터 궁중문화축전이 매년 두 번씩 열리는 만큼 봄에는 체험 프로그램을, 가을에는 미디어아트를 활용한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궁궐 내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지난해 축전 대표 프로그램 ‘창경궁, 빛이 그리는 시간’은 창경궁 산책로에 사슴이 뛰노는 장면을 홀로그램으로 연출해 호평을 받았다. 그는 “현재 축전에서는 전체 공간의 20% 남짓만 활용하고 있다”며 “관객들이 숨은 공간들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