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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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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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2~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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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중근 폄하한 日帝… 이토 죽기 전 “어리석은 녀석” 발언은 조작

    “舍生取義(목숨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하고)/殺身成仁(자신을 죽여 인을 이루었네)/安君一擧(안중근의 의거에)/天地皆振(온 천지가 들썩이네).” 일본의 대표적 사회주의자이자 평화운동가인 고토쿠 슈스이(1871∼1911)가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며 쓴 한시다. 1910년 샌프란시스코평민사가 제작한 안 의사 사진엽서에 그의 친필로 실렸다. 26일 안 의사 서거 109주기를 앞두고 관련 연구가 잇따라 나왔다. 최근 발간된 ‘3·1독립만세운동과 식민지배체제’(지식산업사)에 실린 김봉진 일본 기타큐슈시립대 국제관계학과 교수의 논문 ‘안중근과 일본, 일본인’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기 전 ‘어리석은 녀석이다(馬鹿ナ奴ダ)’라고 말했다는 건 “조작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이 논문에서 이토의 수행원들 증언을 추적했다. 이토가 ‘범인은 한인’이라는 말을 듣고 ‘어리석은 녀석’ 운운했다는 일화는 수행원이었던 귀족원 의원 무로다 요시부미의 이야기에만 나온다. 1909년 11월 1일자 오사카마이니치 신문의 무로다 인터뷰 기사와 무로다가 12월 16일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한 증언이다. 그러나 다른 수행원의 증언이나 기사, 전문, 보고서에는 이런 얘기가 전혀 없다. 무로다가 1909년 11월 20일 시모노세키시 재판소에서 한 첫 번째 증언에도 없다. 그럼에도 이 말은 ‘이토 공 전집(伊藤公全集·1928년)’에 “‘한인 안중근’이라는 말을 듣고 한마디 했을 뿐”이라고 실리며 마치 사실인 것처럼 후대에 전해졌다. 김 교수는 “의거 당일 보고서에 들어있는 이토의 직속 비서관 후루야 히사쓰나의 증언이 신빙성이 높다”면서 “후루야는 이토가 죽은 지 약 1시간 15분 뒤에야 ‘범인은 한국인’임을 알게 됐다고 증언했다”고 설명했다. 현장을 목격한 러시아 대신 코코프체프의 증언 등으로 미뤄보면 이토는 치명상을 입고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로 의식을 잃은 채 객차로 옮겨졌다. 의거 다음 날 일본 신문도 이토의 즉사(卽死)를 전하는 전문을 보도했다. 한상일 국민대 명예교수는 저서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까치)에서 “이토의 죽음을 극화하고 병탄을 왜곡하기 위해 뒷날 만들어진 기록”이라며 “이토를 암살하는 ‘어리석은 짓’이 결국 한일병탄을 자초했다고 왜곡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제가 이처럼 안 의사를 폄하하고자 했던 이유는 안 의사가 ‘항일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들은 안 의사를 숭모하며 뜻을 이어갔다. 김대호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최근 논문 ‘일제강점기 안중근에 대한 기억의 전승, 유통’에서 안 의사의 사진과 노래 등에 주목했다. 안 의사의 사진은 1909년 11월 초 처음 공개됐고, 사후 사진을 넣고 ‘충신 안중근’이라고 쓴 엽서 등이 불티나게 팔렸다. 일제의 강력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사진엽서는 서시베리아와 북만주부터 미국 샌프란시스코까지 퍼져나갔다. 창가 ‘영웅모범가’나 ‘독립군가’ 역시 안 의사를 기렸다.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안 의사 사진에 관련된 일부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았다. “몰골이 초췌하다”며 일제의 ‘안중근 비하물’이라는 주장이 나온 사진이 사실은 뤼순 감옥 초기 안중근의 모습을 증언하는 귀중한 사진이라는 것이다. 도 교수는 “일제는 오히려 안 의사를 인도적으로 대우하고 있다고 선전하고자 했다”며 “민족을 넘어 동양 평화를 모색한 안 의사의 이 사진은 고토쿠 슈스이가 간직했던 안중근 사진엽서의 모본”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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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그림으로 이해하는 유쾌한 과학 이야기

    다양한 과학 이야기를 그림으로 쉽게 풀어낸 책이다. 일례로 빙하의 작용을 설명하면서 그 구조를 초콜릿 바에 빗대 그렸다. 지표의 눈은 초콜릿 코팅, 빙하는 캐러멜, 빙하가 녹으면서 떨어진 돌은 땅콩, 흙은 쿠키로 표현했다. “남극의 빙하는 무척 무거워서 지구의 표면을 짓눌러 으깬다”는 설명과 함께 모루 위에 지구의 모습을 그리는 식이다. “인간은 유전적으로 포도와도 24% 비슷할 뿐 아니라 빵을 만드는 효모와도 18%는 비슷하다” 같은 정보가 깔끔한 그림으로 표현돼 눈길을 끈다. 숲속 어둡고 조용한 곳에서 잘 자라는 고사리는 ‘내성적인 사람’에 비유했다. ‘팔에 난 털은 왜 1m까지 자라지 않는지’ 같은 주제에서 알 수 있듯 생명과학, 지구과학, 물리 등 분야별로 흥미를 당길 만한 소재를 다뤘다. 통념과 다른 포인트도 잡아냈다. 나무를 이루는 물질은 뿌리를 박고 있는 땅 밑의 흙과 물의 도움이 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대부분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수분에서 왔다고 한다. 저자는 미국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상어 이빨만 3000여 개를 수집한 괴짜다. “과학에 대한 학문적인 지식 없이 이 책을 썼다”고 겸손해하지만 내용이 꽤 알차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이제 82년이 지났으니 확실히 죽었을 것이다” 같은 유머도 나쁘지 않다. 다만 ‘즐길 수 있는 과학’을 추구한 탓인지 허술한 구석이 없진 않다. ‘꿈을 꾸는 이유’는 여러 설이 있는 데도 한 가지 주장만 소개됐다. 벌거숭이두더지쥐 그림 아래 물곰 등 완보동물의 설명을 달아놓은 건 좀 뜬금없다. 장수나 생명력이 두 동물의 공통점이어서라고 추정되지만 별다른 설명이 없기에 평범한 독자라면 벌거숭이두더지쥐가 완보동물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심지어 그림으로는 모양도 얼핏 비슷해 보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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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고전적 총규모 2만9252종 고전번역원, 52만건 자료 검토

    우리나라 고전적(古典籍)의 총규모가 2만9252종으로 잠정 집계됐다. 김재훈 한국고전번역원 원전정리실장은 22일 고전번역원 주최 학술대회 발표 논문에서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KORCIS)에 포함된 기관 116곳의 자료(46만여 건)와 주요 소장기관 8곳의 자료(21만여 건), 문화재청 지정 문화재 목록 및 한국고전번역원 자체 조사 자료 등 52만여 건을 종합 검토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한국 고전적 총규모를 국가적 차원에서 산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김 실장은 한국 고전적을 “한국인이 1909년 이전 한자 또는 한글 등으로 일정한 체재를 갖춰 저작해 간사(刊寫·인쇄나 필사)한 동장본(東裝本·전통 방식으로 장정한 책)”으로 정의했다. 또 서명과 저작자가 같으면 동일한 서종으로 간주했다. 일례로 이중환의 ‘택리지’는 이본이 200종이 넘고, 명칭도 여러 개지만 1종으로 계산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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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로웠던 만세시위, 日헌병 무차별 발포로 유혈사태 격화

    “조선독립만세의 소요가 조선 각지에 발발함을 따라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오륙천 명의 군중이 모여 태극기를 높이 들고…(중략)…강서군 반석면 사천리 헌병주재소를 향하고가는 길에 그 헌병주재소로부터 총소리가 일어나며 선두에 섰던 청년대가 붉은 피 속에 삼대 쓰러지듯 넘어지는 광경을 본 노인대는 주재소에 불을 놓고….”(동아일보 1921년 12월 18일 기사 ‘증언은 피고에게 유리’) 3·1운동 초기임에도 매우 격렬한 항쟁을 벌였던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강서군 ‘사천 3·1운동’을 조명한 연구가 나왔다. 기독교 세력이 주도한 사천 3·1운동은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과 더불어 일제의 탄압도 극심했던 3·1운동으로 꼽힌다. 박경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강사는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98집)에 게재할 예정인 논문 ‘평안남도 강서군 사천 3·1운동’에서 “만세시위 참여자들은 시위가 평화적으로 진행됨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일본 헌병들이 시위 시작부터 시위대에 총을 무차별 난사하면서 완강히 저항하게 됐다”고 말했다. 사천 지역에 3·1운동 소식을 처음 전한 건 평양에서 만세를 부른 뒤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온 반석교회의 조진탁 장로(1867∼1922)였다. 원장교회의 임이걸 장로(1898∼1961) 역시 평양에서 독립선언서 수백 장을 원장리로 챙겨 왔다. 사천 3·1운동은 대동군과 강서군의 원장, 반석, 사천, 산수리 교회 등 4개 교회가 연합해 기획했다. 거사일은 사천시장 장날인 3월 4일. 계획이 발각돼 10여 명이 체포됐지만 원장리 합성학교로 장소를 변경해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거사 당일 임이걸은 “우리의 힘으로 자주독립 해야 할 것이며 독립을 해야 살 수 있다. 조금이라도 난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연설했다. 10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앞서 체포된 이들을 구하려 사천 헌병주재소로 향했지만 일본 헌병들과 보조원들이 총을 난사했다. 여기서 무려 시위대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논문은 “일제는 3월 1일 평양 시위가 대규모로 진행되자 만세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걸 확실하게 막고자 운동 초기부터 무차별 폭력으로 대응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가족과 이웃이 총탄에 쓰러지는 걸 보고 격분한 군중들은 맨주먹으로, 또는 돌을 들고 헌병들에게 대항했고, 헌병분재소에 불을 질렀다. 그 결과 헌병분재소장 사토 지쓰고로와 조선인 헌병 보조원 3명이 사망했다. 3월 6일 원장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이 끝난 뒤 유가족을 비롯한 200여 명이 다시 만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일제의 보복은 거세고 집요했다. 기독교 신자 중심으로 400여 명을 붙잡아 20여 일간 고문했고, 교회 지도자 등 49명을 평양 검사국에 송치했다. 주동 인물들은 사형, 무기징역, 징역 15년 등을 받았고, 검거를 피해 도피한 이들도 궐석 재판을 통해 극형이 언도됐다. 조진탁 장로는 뚜렷한 증거가 없었음에도 헌병과 보조원을 살해한 혐의로 1922년 10월 사형당했다. 이들의 형 집행이 보복적 성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합성학교를 설립한 지석용 장로는 다행히 만주로 몸을 피했지만 15년 뒤인 1934년 중국 대련에서 체포됐다. 논문은 “사천 지역민은 3·1운동 이후에도 사천대한독립청년회, 반석대한애국부인청년단 등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고 설명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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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 보며 배우네 나무도 숲도 읽어 내는 안목… 63회 신문의 날 표어 대상 선정

    한국신문협회(회장 이병규)와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회장 김종구), 한국기자협회(회장 정규성)는 제63회 신문의 날 표어 대상에 ‘신문 보며 배우네 나무도 숲도 읽어 내는 안목’(채승혜·64)을 선정했다. 우수상에는 ‘착 펴면 척 보이는 세상, 다시 신문이다’(김현진·43)와 ‘급류를 타는 세상, 방향키 잡는 신문’(이주상·18)이 뽑혔다. 심사위원들은 “신문의 정수인 정확한 팩트, 팩트들이 엮여 일궈 내는 가치의 중요성을 울림과 여운 가득하게 담아 낸 작품”이라고 대상작 선정 이유를 밝혔다. 대상 상금은 100만 원, 우수상 상금은 50만 원이다. 시상식은 4월 4일 오후 4시 반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리는 신문의 날 기념대회에서 진행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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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신문 “3·1운동 1주년에 도쿄 유학생 200여 명 만세시위”

    1919년 2·8독립운동을 보도한 일본 신문기사를 비롯해 일제강점기 독일과 일본 언론에서 한국 관계 기사를 모은 자료집 4권이 새로 나왔다. 독립기념관은 ‘독일 신문 한국관계기사집’과 일본 신문을 발췌한 ‘시사신보 한국관계기사집Ⅰ·Ⅱ’, ‘대판조일신문 한국관계기사집 Ⅲ’ 등을 최근 발간했다고 19일 밝혔다. 이 책들은 독립기념관이 해마다 내는 한국독립운동 자료총서 시리즈다. 1919∼32년 기사를 발췌한 ‘시사신보 한국관계기사집Ⅱ’에는 2·8독립선언을 한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기사가 실렸다.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시사신보 1919년 2월 9일자는 조선인 600명이 간다(神田)조선기독청년회관에서 눈이 오는 가운데 경관과 격투를 벌여 29명이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한 조선 학생이 “우리는 어떠한 압박을 받더라도 최후의 1인이 될 때까지 목적을 위해 노력할 생각이며 구인된 자는 주의(主義)를 위해 그렇게 된 것이므로 오히려 명예로운 일”이라고 소회를 밝혔다고 전했다.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일본 유학생들이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벌인 만세시위 보도도 있다. 시사신보 1920년 3월 2일자에는 유학생 2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여 53명이 검거됐다고 보도했다. 기사와 함께 히비야 경찰서에 구금된 황신덕 등 여학생 7명의 사진도 실렸다. 독립기념관은 “3·1운동 전후 일본에서 벌어진 학생독립운동의 양상을 알 수 있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독일 신문 ‘포시셰 차이퉁’은 일본 간토(關東) 대지진(1923년 9월)을 다룬 1923년 10월 9일자 기사 ‘일본에서 지진을 목격한 베를린 사람의 증언’에서 한국인 학살을 명기했다. 기사는 “군이 한국인들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은 모두 총살당했다”고 적었다. 독립기념관은 당시 일본이 한국인 학살을 해외에 은폐하고자 했음에도 진실이 외국 언론에 폭로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독일 주요 일간지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1907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위종(1887∼?)의 활동상을 상세히 다뤘고, 중국 톈진에서 발행된 독일어신문 ‘도이치 히네지셰 나흐리흐텐’은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보도했다. 이번 자료총서는 대학과 공공도서관 등에 배포할 예정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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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노인용’ 상품은 왜 실패할 수밖에 없나

    통조림에 담긴 순하고 담백한 맛의 저렴한 죽. 빠르지는 않지만 목을 꺾지 않아도 높이 매달린 신호등이 잘 보이고, 운전대가 쉽게 돌아가고, 연료가 적게 드는 자동차. 버튼을 누르면 응급구조대를 호출하는 펜던트. 모두 과거 미국에서 고령층을 타깃으로 선보였다가 크게 쓴맛을 봤거나 별 재미를 보지 못한 상품들이다. 이유는 뭘까. 하인즈가 개발했던 죽은 맛은 간과한 채 노인을 치아가 성치 못하고, 소득이 거의 없는 존재로 취급했다. 크라이슬러의 연료 절약형 자동차는 ‘노인들이나 타는 차’로 인식됐고, 결국 노인들도 사지 않았다. 펜던트는 구매자에게 자신이 쇠약하고 고립된 존재라는 느낌을 줬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에이지랩’을 설립하고 50세 이상 연령층을 위한 기술과 디자인을 연구하는 저자는 이 같은 상품들은 고령층을 미적인 욕구도, 다양한 인간적 욕구도 없는 존재로 바라보고 있다고 꼬집는다. “노인을 디자인이나 다른 요소를 따질 겨를이 없는 중환자와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침대 매트리스 아래 설치돼 야간에 심박수나 호흡, 행동 데이터를 의사에게 보내는 감지기를 성생활을 즐기는 고령자가 과연 환영할까.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와 시니어그룹의 소비 비중이 높은 ‘장수 경제’의 도래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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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장해제 당한 한민족, 민족의식으로 갑옷과 무기 삼았다”

    《“헌법학자로서 일본 헌법을 연구하다가 한국의 현행 헌법은 1919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을 잇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의 헌법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맥아더 군정이 만들어 준 것인 반면 한국의 헌법은 일본제국주의의 압제에 항거하여 쟁취한 헌법이란 차이를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 사사가와 노리카쓰 일본 국제기독교대 명예교수는 3·1운동 때 체포된 한국인들의 법원 판결에 관한 연구를 하는 동기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지식산업사 간행 ‘3·1독립만세운동과 식민지배체제’). 바로 이 ‘대한민국 임시헌장’(헌법)을 기초한 이가 독립운동가 조용은 선생(1887∼1958·사진)이다. 필명이자 호(소앙·素昻)로 많이 알려져 조소앙 선생으로 불린다. 조소앙 선생의 대표적 문집으로 대한민국 건국강령(1941년)의 바탕이 된 삼균주의(三均主義·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추구) 사상이 깔려 있는 ‘소앙집’이 최초로 완역된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조소앙 선생의 글은 순한문이나 국한문 혼용체로 쓰여 평범한 시민이 깊게 이해할 기회가 적었다”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선생의 ‘소앙집’과 ‘유방집’, ‘여협남자현전’을 번역해 출간할 예정”이라고 13일 밝혔다. 소앙집은 다음 달 간행되며, 항일 의열사 81명의 공적을 담은 유방집과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의사(1872∼1933)를 조명한 여협남자현전은 한 권으로 묶어 올 8월 출간할 계획이다. 선생은 1930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삼균주의를 창시했으며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기초했다. 1932년 중국 상하이에서 간행된 소앙집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상황을 정치·경제·교육으로 나눠 분석하고 일제를 비판한 논문과 역대 사회제도와 3·1운동까지의 혁명운동을 정리한 글, 임시정부 등 명의로 발표한 각종 선언서가 담겼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한 장을 할애해 마치 파노라마처럼 서술하기도 했다. 조소앙은 “한국 민족은 일본에 무장 해제를 당했으나 스스로 깨달은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을 갑옷과 무기로 삼았다”고 썼다. 소앙집은 객관적 자료와 명료한 논리가 특징이다. 일제의 탄압과 유린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동아일보 보도를 되풀이해 인용하기도 했다. “1929년 8월 6일, 한글 신문인 동아일보에 사설이 실렸는데 제목이 ‘극단으로 제한된 언론 집회’였다.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노총(勞總·노동동맹), 농총(農總·농민동맹), 청총(靑總·청년동맹) 세 총맹(總盟)의 집회를 금지한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각 지방의 청년회 강습소, 학생 연구회 등 현존하는 모든 단체가 다 봉쇄되고 해산되었으며, 그 밖의 강연회와 연설회도 금지의 대상이 되었다. 갑산(甲山) 화전민 충돌 사건에 대해 또 조사반의 출범과 기사 게재를 제한하고 이어서 이 사건을 알리는 연설회를 금지하는데, 혹 압박하는 일을 반대하는 연설회도 금지한다. …”(‘소앙집’에서) 선생은 “국내 한글 신문은 이미 착취당하고 탄압을 받아 비록 양껏 드러내지 못하였지만 (자유를) 제한받은 정도가 여기에서 반증된다”고 덧붙였다. 또 전국의 항일운동을 나열하고 ‘정치범’에 대한 중형을 비판한 동아일보 1930년 3월 8일자 ‘법정에 나타난 조선상’ 기사를 인용하며 “이 기사를 통해 살펴보면 학생계가 해방 운동을 도모하는 것이 전국에 가득 퍼져서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들며 산을 감싸고 언덕을 넘을 기세이니, 참으로 혁명사에서 색다른 사례”라고 쓰기도 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이전 ‘의열단 사건, 보천교 사건, 임시정부 사건, ML당 사건, 간도 격문 사건’ 등 항일운동의 활성화를 묘사하면서 “한글 신문인 동아일보 등의 신문에서 적극적으로 선전해 민족의식을 충분히 부추길 수 있었고, 아울러 혁명의식을 환기시킬 수 있었다”고 썼다. 김보성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소앙집 번역본 해제에서 “소앙집에는 고국의 참혹한 현실을 국내외에 알리고 항일투쟁 궐기를 촉구한 독립운동가의 투혼이 여실히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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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정근 교수 “20년 땀의 결실… 동아시아 미학은 의경 탐구의 역사”

    “영화를 보면 이야기를 집중해 따라가다가도, 감동을 주는 지점에서 의식이 영화에서 살짝 빠져나와 과거의 추억이나 자기가 탐구하던 물음 같은 세계로 가게 되지요?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던 것이 정화되고 풀리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걸 동아시아 미학에서는 ‘의경(意境·작품의 예술적 경지, 정취)’이라고 표현합니다.” 철학 중심으로 연구돼온 동아시아 사상을 미학에 초점을 둬 조명한 ‘동아시아예술미학총서’(전 6권·성균관대출판부)가 최근 마지막 권인 ‘중국 미학사: 상고 시대부터 명·청 시대까지’(장파 지음·사진)를 번역 출간하며 완간됐다. 시리즈를 책임 번역한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54·유학대 학장)는 8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에서 “동아시아 미학은 의경 탐구의 역사”라며 “현대 미술을 감상할 때도 작품이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고, 찾던 길을 열어주는 체험을 한다면 ‘저 작품은 의경이 있구나’라고 표현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시리즈는 ‘중국 현대 미학사’, ‘소요유, 장자의 미학’, ‘대역지미, 주역의 미학’,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이상 2013년 출간), ‘동아시아 미의 문화사’(2017년) 등으로 구성됐다. 신 교수가 성균관대에 부임한 2000년 ‘예술철학’ 전공 수업에 쓸 교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시리즈를 구상해 번역 도서 선정과 강독에 착수했으니 19년 만에 작업의 마침표를 찍은 셈이다. 각 권마다 2∼4명씩 모두 연구자 13명이 번역에 참여했다. 실은 원본보다도 번역된 책들이 두 배가량 두껍다. 각 권마다 600쪽 이상이고 두꺼운 건 1000쪽을 넘는다. 인용한 원전의 한자 원문과 독음, 인명 지명 등의 풀이, 국역본과 관련 국내 연구 소개 등을 더했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동아시아 미학과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별다른 도움 없이 혼자 읽을 수 있는 번역을 추구했다”고 했다. 국내 학계에서 번역은 들어가는 공력에 비해 가치가 폄하되기 일쑤다. 신 교수는 “동아시아 근대는 ‘번역의 시대’이고, 번역은 해외 우수 연구 성과를 소개하는 전령의 역할을 맡아왔다”면서 “한국이 세계적으로 학술 연구를 선도하고 근원적 지식을 창출하고 있다면 또 모르지만, 여전히 번역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맹자 여행기’ 등을 냈던 신 교수는 이제 중용을 소재로 한 책을 구상하고 있다. 자신이 설립한 인문예술연구소에서 정기 강연과 공연을 열기도 한다. 신 교수는 “인문학이 작금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생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예술성을 가미하는 게 실마리가 된다”고 말했다. 문자와 언어로만 사람을 집중시키고 재미를 주는 건 한계가 있기에 인문학은 미술, 음악, 무용, 영화 등 예술과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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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글]트와이스-아이즈원… K팝 요정들, 日음악차트 싹쓸이

    케이팝 걸그룹들이 일본을 비롯한 해외에서 엄청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트와이스는 일본에서 6일 발매한 새 앨범 ‘#TWICE2’가 발매 이후 오리콘 데일리 앨범차트 정상을 계속 지키고 있다. 트와이스는 2017년 6월 일본 데뷔 앨범 ‘#TWICE’가 25만 장 이상 팔려 일본레코드협회로부터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 지난해 9월 낸 정규앨범 ‘BDZ’는 오리콘 월간 앨범차트 정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20일부터 시작하는 일본 오사카 도쿄 나고야 투어 공연은 티켓 오픈 1분 만에 매진됐다. 신인 걸그룹 아이즈원(IZ*ONE)도 열기가 뜨겁다. 지난달 6일 일본에서 발표한 데뷔 싱글 ‘좋아한다고 말하게 하고 싶어’는 최근까지 31만 장이 팔리며 9일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 이 싱글 앨범은 라인뮤직, 오리콘을 비롯한 현지 음원 사이트 정상을 휩쓸었다. 블랙핑크는 ‘뚜두뚜두’ 뮤직비디오가 9일 케이팝 그룹 최초로 유튜브에서 7억 뷰를 넘어서기도 했다. 지난해 6월 15일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지 267일 만이다. 블랙핑크는 ‘뚜두뚜두’뿐 아니라 ‘마지막처럼’과 ‘붐바야’ 등 뮤직비디오 3편이 유튜브에서 5억 뷰를 넘겼다. 블랙핑크는 4월 미국 유명 음악 페스티벌인 ‘코첼라’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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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만의 반지 만들며 ‘소만행’… “참, 묘하게 힐링되네”

    “드르르륵, 드르르륵.” “위이이잉! 탕! 탕!” 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카페에 들어서자 잔잔한 음악 대신 금속과 나무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귀에 박혔다. 한쪽에선 손님들이 치과에서나 사용할 법한 드릴을 잡고 ‘위이잉’ 소리를 내며 무언가에 열중해 있다. 이들 손에는 머그잔 대신 망치, 쇠막대기가 들렸다. 카페라기보다는 수공예 작업실로 보이는 이곳은 ‘반지 공방 카페’다. 직원 설명에 따라 기자도 반지를 만들어봤다. 손가락 둘레를 재고 얇고 긴 은막대를 고른 뒤 망치로 두드리며 동그란 모양으로 굽혔다. 평소 별로 써본 일이 없는 여러 공구를 들고 ‘나만의 것’을 만들다 보니 40여 분이 훌쩍 지났다. 모양이 잡히면 취향에 따라 세세한 장식이나 문구를 새기면 된다. 접착제와 은가루를 바른 양 끝을 가스 토치로 붙이면 끝. 욕심을 내 광까지 내면 1시간 만에 나만의 반지가 탄생한다. 취재차 해봤지만 생각보다 훨씬 뿌듯했다. 완성된 반지를 손에 끼웠다 빼 보며 자꾸 셔터도 누르게 됐다. 최근 ‘소만행(소소하게 만들며 느끼는 행복)’을 찾아 공방 카페를 찾는 이가 늘고 있다. 공방 카페는 대략 4, 5년 전부터 조금씩 들어서기 시작했지만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흐름을 타고 주목받고 있다. 1만∼3만 원 정도 비용으로 친구, 연인과 함께 또는 홀로 카페에서 뭔가를 만들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매력. 카페 손님 임재훈 씨는 “본업과 무관하게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오히려 휴식이 된다”고 말했다. 카페를 운영하는 임익분 씨는 “과거엔 20, 30대가 주로 카페를 찾았다면 요즘은 40, 50대부터 부모님과 공방 카페를 찾는 아동 및 1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고 말했다. 공방 카페에서 만들 수 있는 물건도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간단한 팔찌 등 30분이면 만들 수 있는 장신구 위주였지만, 근래에는 도자기나 미니어처처럼 짧게는 2시간부터 길게는 며칠씩 손님이 시간을 투자해 만들도록 하는 카페도 생겨났다. 대부분 고도의 기술은 필요 없어 어렵지 않게 따라 만들 수 있다. “재봉틀 소리를 들으며 옷감 작업에 집중하다 보면 일상의 스트레스도 사라져요.” 서울 마포구 연남동 ‘재봉틀 카페’는 2시간에 1만 원가량 요금을 내면 마치 PC방처럼 친구들과 재봉틀 앞에 앉아 대화하며 각종 소품을 만들 수 있다. 천에 문양을 달아 에코백을 만들거나 아예 옷을 만들기도 한다. 매주 사흘은 재봉틀 카페를 찾는다는 최정선 씨는 “재봉틀에 앉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했다. ‘재봉틀 카페’를 운영하는 김윤주 씨는 “재봉틀을 구매하기엔 부담스러워하는 직장인들이 잠시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이곳을 찾아 1∼2시간씩 작업을 하고 간다”고 말했다. 일반인들이 재봉틀로 직접 옷이나 소품을 만들어 사용하는 문화의 확산은 출판시장에서도 확인된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 생활 공예·DIY 분야 도서 가운데 ‘옷 만들기’ 도서 매출의 비중이 2014년(7.2%)보다 두 배 이상(16.5%)으로 늘었다. 일본의 옷 만들기 강의를 정리한 번역서 ‘패턴 학교’(이아소) 시리즈 등이 꾸준히 인기를 모으고 있다. 최근에는 물건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이 먹는 샌드위치에 넣을 상추 등 채소를 직접 재배해 먹을 수 있도록 한 ‘식물공방 카페’도 등장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카페가 단순히 사람들을 만나 함께 커피를 마시는 곳에서 머물면서 무언가 창작하고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다”며 “숍인숍(Shop In Shop·매장 안에 매장을 여는 것)이나 상이한 공간이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형태로 카페는 계속 진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김기윤 pep@donga.com·조종엽 기자}

    • 2019-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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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르르륵, 탕탕! 소리 들으면 스트레스 사라져요” 공방 카페의 진화

    “드르르륵, 드르르륵” “위이이잉! 탕! 탕!” 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카페에 들어서자 잔잔한 음악 대신 금속과 나무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귀에 박혔다. 한 쪽에선 손님들이 치과에서나 사용할 법한 드릴을 잡고 ‘위이잉’ 소리를 내며 무언가에 열중해있다. 이들 손에는 머그잔 대신 망치, 쇠막대기가 들렸다. 카페라기보다는 수공예 작업실로 보이는 이곳은 ‘반지 공방 카페’다. 직원 설명에 따라 기자도 반지를 만들어봤다. 손가락 둘레를 재고 얇고 긴 은 막대를 고른 뒤 망치로 두드리며 동그란 모양으로 굽혔다. 평소 별로 써본 일이 없는 여러 공구를 들고 ‘나만의 것’을 만들다 보니 40여 분이 훌쩍 지났다. 모양이 잡히면 취향에 따라 세세한 장식이나 문구를 새기면 된다. 접착제와 은가루를 바른 양 끝을 가스 토치로 붙이면 끝. 욕심을 내 광까지 내면 1시간 만에 나만의 반지가 탄생한다. 취재 차 해봤지만 생각보다 훨씬 뿌듯했다. 완성된 반지를 손에 끼웠다 빼 보며 자꾸 셔터도 누르게 됐다. 최근 ‘소만행’(소소하게 만들며 느끼는 행복)을 찾아 공방 카페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공방 카페는 대략 4, 5년 전부터 조금씩 들어서기 시작했지만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흐름을 타고 주목받고 있다. 1만~3만 원 정도 비용으로 친구, 연인과 함께 또는 홀로 카페에서 뭔가를 만들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매력. 카페 손님 임재훈 씨는 “본업과 무관하게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오히려 휴식이 된다”고 말했다. 카페를 운영하는 임익분 씨는 “과거엔 20~30대가 주로 카페를 찾았다면, 요즘은 40, 50대부터 부모님과 공방 카페를 찾는 아동 및 1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고 말했다. 공방 카페에서 만들 수 있는 물건도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간단한 팔찌 등 30분이면 만들 수 있는 장신구 위주였지만, 근래에는 도자기나 미니어처처럼 짧게는 2시간부터 길게는 며칠씩 손님이 시간을 투자해 만들도록 하는 카페도 생겨났다. 대부분 고도의 기술은 필요 없이 어렵지 않게 따라 만들 수 있다. “재봉틀 소리를 들으며 옷감 작업에 집중하다 보면 일상의 스트레스도 사라져요” 서울 마포구 연남동 ‘재봉틀 카페’는 2시간에 1만 원 가량 요금을 내면 마치 PC방처럼 친구들과 재봉틀 앞에 앉아 대화하며 각종 소품을 만들 수 있다. 천에 문양을 달아 에코백을 만들거나 아예 옷을 만들기도 한다. 매주 사흘은 재봉틀 카페를 찾는다는 최정선 씨는 “재봉틀에 앉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했다. ‘재봉틀 카페’를 운영하는 김윤주 씨는 “재봉틀을 구매하기엔 부담스러워하는 직장인들이 잠시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이곳을 찾아 1~2시간씩 작업을 하고 간다”고 말했다. 일반인들이 재봉틀로 직접 옷이나 소품을 만들어 사용하는 문화의 확산은 출판시장에서도 확인된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 생활 공예·DIY 분야 도서 가운데 ‘옷 만들기’ 도서 매출의 비중이 2014년(7.2%)보다 두 배 이상(16.5%)으로 늘었다. 일본의 옷 만들기 강의를 정리한 번역서 ‘패턴 학교’(이아소) 시리즈 등이 꾸준히 인기를 모으고 있다. 최근에는 물건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이 먹는 샌드위치에 넣을 상추 등 채소를 직접 재배해 먹을 수 있도록 한 ‘식물공방 카페’도 등장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카페가 단순히 사람을 만나 함께 커피를 마시는 곳에서 머물면서 무언가 창작하고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다”며 “숍인숍(Shop In Shop·매장 안에 매장을 여는 것)이나 상이한 공간이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형태로 카페는 계속 진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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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존폐 위기에서 부활… ‘혁신’ 도요타를 가다

    2008년 미국에서 대량 리콜 사태가 일어나 존폐 위기까지 내몰렸던 세계적 자동차 회사 도요타는 지난해 사상 최대의 실적을 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미래형 자동차 개발에도 뒤처지지 않는다. 지난해에는 자율주행하며 피자를 배달하는 수소전기차 ‘툰드라 파이 트럭’을 피자헛과 손잡고 개발해 처음 선을 보이기도 했다. 도요타의 탄생부터, 현대적 기업의 생산 방식에 적지 않은 족적을 남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를 일본의 논픽션 작가가 다뤘다. 불량품 최소화를 강조하는 도요타의 생산방식은 기업의 뿌리에서도 드러난다. 창업자 도요다 기이치로(1894∼1952)의 아버지 도요다 사키치(1867∼1930)는 자동 직조기(織造機)를 개량해 성공했다. 그의 직조기는 작업 도중 실이 끊어지면 자동으로 정지해 불량품 발생을 막는 장점이 있었다. 저자는 도요타의 저력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협업하며 끊임없이 진화하는 현장’에서 나온다고 했다. 도요타의 생산관리 방식이나 경영정신이 신선한 주제는 아니다. 관련 도서도 이미 적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7년 동안 일본과 미국의 도요타 공장을 70여 회 답사하면서 공장에서 일하는 간부와 근로자들을 만났다고 한다. 미국 공장에 도요타의 생산 방식을 도입하면서 벌어진 에피소드를 비롯해 여러 현장의 목소리가 잘 담겨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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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7년 275냥이던 서울 양반집, 1846년에는 1000냥으로

    《조선 후기 서울 집값은 ‘장기적으로 우상향’ 했을까? 18세기 후반∼19세기 중반 서울의 집값 상승을 보여주는 희귀 문서가 최근 발견돼 주목된다. 김문경 일본 교토대 명예교수(67·쓰루미대 일본문학과 교수·사진)는 최근 교토대에서 열린 ‘가와이 문고’ 목록 간행 기념 심포지엄 ‘한국 고문헌의 세계’에서 가와이 문고에 포함된 조선시대 가옥 매매문서를 소개했다.》 이 매매문서들은 1777∼1846년 한성부(서울) 정선방 대묘동(현 종로3가 북쪽 종로구 봉익동)의 한 민가가 11차례 사고팔린 기록을 담고 있다. 이 민가는 기와집 14간(間)반과 초가집 3간, 빈터(空垈·공대) 30간으로 이뤄졌다. 서민들이 ‘초가삼간’에 살았던 것을 고려하면 중상층 양반이 살았던 꽤 으리으리한 집이다. 이 집은 1777년 275냥에 거래됐고, 1783년에도 같은 값이었다. 하지만 1798년에는 500냥에 팔렸다. 김 교수는 “문서상 건물 구성에 변동이 없어 서울 중심 땅값이 오른 결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초가집을 헐고 기와집을 늘리는 ‘부분 재건축’이나 증축이 이뤄지기도 했다. 1816년 매매문서에는 초가집 3간이 사라지는 대신에 기와집이 18간으로 늘었다. 집값도 600냥(1816년), 700냥(1821년) 등 단계적으로 올랐다. 문서상 마지막 거래도 흥미롭다. 우치홍(禹治洪)이라는 인물은 1845년 750냥에 이 집을 샀다가 기와집 3간을 증축한 뒤 이듬해인 1846년 무려 1000냥에 팔았다. 김 교수는 “1년 만에 큰 이문을 남기고 집을 되판 건 부동산 투기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적어도 이 집을 기준으로 보면 근로자의 임금 상승이 집값 상승을 따라잡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전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에 따르면 학계의 기존 연구는 1780년대 날품팔이(日雇·일고)의 품삯은 은으로 약 1.06g이었고, 1840년대에는 약 1.34g으로 올랐다고 본다. 같은 기간 은 1냥(37.5g)과 상평통보 1냥의 교환 비율은 1 대 4에서 1 대 4.75로 변했다. 은 대비 동전 화폐의 가치가 하락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추정하면 1780년대 날품팔이가 이 집(275냥)을 사려면 2433일(약 6년 8개월)치 임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한다. 1840년대에 이 집값(1000냥)을 모으려면 5882일(약 16년 1개월)치 임금이 필요했다. 임금이 다소 오르긴 했지만 화폐 가치의 하락과 지가 상승, 재건축 등으로 인해 집값 상승이 더 컸던 셈이다. 물론 사례 하나로 당시 주택 가격 변화를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문헌 전문가인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연구실장은 “서울은 지방 출신 관료들이 세를 사는 경우가 많아 오늘날처럼 상업적 가옥 매매가 이뤄졌다”며 “서울의 주택 거래를, 그것도 수십 년간 누적해 보여주는 문서는 아마도 이 자료가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심포지엄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센터장 정우봉 교수)와 일본 교토대가 공동 개최했다. 해외한국학자료센터는 2014년부터 일본 교토대 소장 한국 고문헌을 교토대와 공동 조사했고, 교토대 부속도서관에 있는 ‘가와이 문고’의 전모를 밝혔다. 이 문고는 일본의 조선 경제사 학자인 가와이 히로타미(河合弘民·1872∼1918) 박사가 수집한 자료다. 최근에는 목록집을 우리말과 일본어로 각각 간행했고, 심포지엄과 함께 귀중한 한국 고문헌 공개 전시도 3일까지 교토대에서 열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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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요즘 뜨는 맛집은?’… 한권에 담은 외식 문화

    프리미엄 ‘냉삼’(냉동삼겹살), 차이니즈 바, 오마카세(손님이 고르지 않고 주인이 알아서 음식을 내주는 것)…. 오늘날 한국의 최신 외식 문화를 알차게 담았다. 외식 경기의 침체에도 디저트는 편의점 디저트부터 고급 디저트까지 골고루 인기다. 밥도 먹고 술도 즐기는 프랑스식 선술집 ‘비스트로’는 외식 장르 전반에서 통용되는 상용어가 됐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외식이 어떻게 변화 중인지 ‘파인 다이닝’, ‘캐주얼 다이닝’, 디저트와 베이커리, 술 문화, 건강한 먹거리 열풍, 골목 상권 등 카테고리를 나누어 분석했다. 두 저자는 2000년부터 발간된 외식정보지의 발행인과 기자다. 책을 갖고 다니며 맛집 골목을 돌아다녀도 좋고, 집에서 진득하게 읽어봐도 좋겠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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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전 외침을 기억하자” 전국에 태극기 물결

    1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 곳곳이 뜨거운 만세 소리와 태극기 물결로 가득 찼다. 이날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는 문재인 대통령과 시민 1만5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문 대통령은 유관순 열사에게 최고등급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는 등 독립유공자 334명에게 포상했다. 참석자 일부는 오전 9시 20분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과 중구 덕수궁 대한문에서부터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해 기념식장에 합류했다. 광화문광장 주변 건물들에는 독립운동을 할 때 쓰인 ‘남상락 자수 태극기’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태극기’ ‘진관사 소장 태극기’ 등을 크게 만든 태극기가 내걸렸다. 시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한복 차림의 고등학생 예효민 양(17)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분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함께 행사장을 찾았다”고 말했다. 유관순 열사의 모교인 이화여고 학생과 졸업생 등 400여 명은 오전 10시경 서울 중구 교내의 유 열사 동상 앞에서 헌화 예배를 올린 뒤 서울광장까지 “100년 전 오늘을 기억하자” 등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종교계는 당시 희생된 선열을 추모하고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타종 행사를 열었다. 이날 낮 12시 전국의 교회와 성당, 사찰, 교당 등에서는 동시에 종소리가 울렸다. 오후 2시 반에는 서울광장에서 약 3100명의 시민이 함께한 ‘100년 대합창’이 펼쳐졌다. 서울시가 주최한 대합창에서는 ‘3·1운동 노래’ ‘애국가’ ‘압록강 행진곡’ ‘독립군가’ ‘아리랑’ 등이 울려 퍼졌다. 보수 단체들은 태극기 집회를 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운동본부’ 회원 등 1만 명(경찰 추산)은 오후 1시 반 서울역에서 집회를 열고 광화문광장까지 걸어갔다. 이들 시위대와 기념식 참석자들 간에 마찰은 없었다.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는 독립유공자를 비롯해 3000여 명이 참석해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을 열고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벌어졌던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했다. 경북 안동시에서는 시민 1000여 명이 거리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군가를 따라 불렀다. 가로막는 일본 순사들을 물리치는 퍼포먼스도 펼쳐졌다. 부산 동구에서는 오후 3시 ‘강제징용 노동자상과 함께하는 3·1운동 100주년 부산시민대회’가 열렸다. 지난해 5월 1일 일본영사관 인근에 설치하려다 무산된 노동자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왼손에는 횃불을, 오른쪽 어깨와 오른손에는 비둘기와 곡괭이를 든 청동 입상이다. 시민들은 노동자상 목에 노란 목도리를 둘렀고 ‘일본은 사죄하라’는 푯말을 붙였다. 제주에서도 시민 3000여 명이 선열들을 추모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시설인 경기 광주 나눔의 집에서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추모제’가 거행됐다. 구특교 kootg@donga.com·조종엽 기자·전국종합}

    • 2019-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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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사편찬위-본보 학술회의 “3·1운동 전체 조망할 기념비적 성과”

    “3·1운동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드론’이 떴다.” “3·1운동 100주년 무게에 값하는 데이터베이스가 마련됐다.” “1969년 동아일보가 간행한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이후 50년 만의 기념비적 성과다.” 국사편찬위원회와 동아일보가 27일 공동 주최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백년 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에 참가한 역사학자들은 학술대회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일민미술관 2층에서 열린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국사편찬위가 현존하는 3·1운동 사료 대부분을 망라해 만든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국편DB)를 바탕으로 한 연구 논문 등 10편이 발표됐다. 조광 국사편찬위원장은 개회사에서 “100년 전 3·1운동은 민족적 각성과 일치감을 불러일으키며 한민족을 근대 민족으로 새로 출발하도록 한 전환점”이라며 “국편은 물론이고 외부 학자들이 힘을 합쳐 만든 이번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앞으로 3·1운동 연구가 더욱 심화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사편찬위는 이 DB를 2015년부터 기획했으며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착수해 최근 구축했다. 국편DB는 앞으로 3·1운동 연구에 초석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날 종합토론 사회를 맡은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3·1운동은 그동안 방대한 사료가 산재해 연구에 난관이 많았고 그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연구가 충분치 못했다”며 “국편DB 구축으로 이제 3·1운동 연구가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강조했다.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도 “개별 사례 연구에서는 불가능했던 거시적 분석이 국편DB를 통해 가능해졌다”고 평가했다.조종엽 jjj@donga.com·유원모 기자}

    • 2019-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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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양한 세대와 계층, 만세 부르며 한민족의 일원 공감”

    “3·1운동 기록물 데이터베이스(DB)는 연구자들에게는 숙원이었습니다. 3·1운동을 완전히 새롭게 정리할 수 있게 됐습니다. 3·1운동사는 앞으로 새로 쓰여야 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와 동아일보가 27일 공동으로 주최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백년 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에서 ‘3·1운동 데이터베이스와 3·1운동의 주체’를 발표한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은 “이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3·1운동의 전체상을 구성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이날 1∼3부에 걸친 개별 발표에 이어 4부에서는 열띤 토론이 진행됐다. “학생 15명은 깃발을 흔들며 조선 건국 만세라고 크게 외쳤고 의관을 갖춰 입은 어른들은 또한 대한독립 만세라고 크게 외쳤으며 떠꺼머리(蓬頭亂髮者·봉두난발자)들은 단지 만세를 외치며 크게 웃었다.” 이기훈 연세대 사학과 교수가 이날 발표문 ‘3·1운동의 미디어와 상징체계’에서 소개한 일제 판결문 내용이다. 이 증언을 한 노용주는 1000여 명의 군중이 참가한 1919년 3월 17일 함경남도 정평군 고산면 시위 현장에서 체포됐다. 학생, 어른, 교육받지 못한 젊은이 등 3·1운동에 참여한 다양한 세대와 계층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 교수는 “학생들이 건국해야 하는 조선은 아마도 공화국일 것이고, 어른들이 독립해야 한다고 한 ‘대한’은 제국일 수도, 민국일 수도 있다”며 “만세를 외치며 웃었던 많은 민중에게도 만세를 불러야 한다는 사실은 명확했고, 만세를 부르면서 그들은 같은 민족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날 토론에서는 시위 건수나 참여자 수의 지역별 차이가 쟁점이 됐다. 이번에 구축된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상에서는 호남 지역의 3·1운동 참여자가 비교적 적은 것처럼 보인다. 이는 3·1운동 시위를 집계했던 기존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원인에 대해 학계의 기존 통설은 호남의 항일 의병항쟁이 특히 치열했기에 일제 탄압도 극심해 피해가 컸고, 천도교·기독교 등 종교 조직이 다른 지방보다 취약했던 것이 영향을 줬다는 것. 그러나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호남의 3·1운동 참여율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토론자로 나선 조건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교수는 “최근 종합되고 있는 일제 관헌 자료 ‘범죄인명부’에는 3·1운동 시위로 체포되거나 재판에 회부되거나 실형을 받은 이들의 명단이 등장하는데 전남 지역 피해자의 비중이 결코 작지 않다”고 말했다. ‘조선총독부의 3·1운동 탄압책과 피해 현황’을 발표한 이양희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 역시 “호남 지역의 체포자 수는 다른 지역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면서 “시위 양상에서 차이가 있었거나 일제 군경 보고에서 시위가 누락됐을 소지가 있다고 보고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군별로도 당시 220개 군 가운데 211개 군에서 일어나 9개 군에서는 시위가 집계되지 않은 것도 정밀 분석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류준범 국사편찬위 연구편찬정보화실장은 “자료의 정밀도를 높이는 것이 이번 DB의 목적”이라며 “향후에도 지속 보완할 것”이라고 말했다. 3·1운동 시위의 비폭력성도 쟁점이 됐다. 한국 학계는 대체로 구체적 실증 분석이 없는 상황에서 비폭력 시위가 중심이었다고 해석한 반면, 북한이나 그 영향을 받은 재일조선인 학계는 그와 달랐다. 근래에는 격렬한 저항이 벌어진 개별 시위의 폭력성 연구도 상당히 축적됐다. 이날 학술회의에서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시위대의 폭력은 발포라는 진압 방식과 연관돼 있다고 봤다. 윤 교수는 “대부분 시위는 평화적으로 시작했으나 일제의 탄압 탓에 폭력적으로 바뀌었다”며 “일제 군경이 비폭력 시위에 총을 발포한 경우도 굉장히 많이 나타난다”고 강조했다. 3·1운동 시위를 공세적 폭력을 중점에 두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해석이다. 토론자로 나선 허수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윤 교수의 발표를 “방대하고 구체적인 데이터베이스 자료를 분석해 3·1운동의 전체상에 다가감으로써 기존 연구를 일신하는 한 전범(典範)을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진압 양상과 폭력 시위의 연동 정도를 해석하는 데는 입장을 달리했다. 향후 연구과제도 제기됐다. 허 교수는 “데이터를 분석해 지역별 추세 등 요점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신문 자료 등을 추가해 데이터베이스를 계속 확대·보완하는 게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3·1운동연구소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정은 원장은 “의주 시위는 30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였고, 민족 대표가 직접 주도했는데도 관련 논문이 지난해에서야 처음 나왔다”며 “연구 과제가 많다”고 강조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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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 100년 디지털 전시관’ 3월 1일 동아닷컴서 공개

    3·1운동의 숨결을 지도와 함께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인터넷 홈페이지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디지털 정보관’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3월 1일 공개된다. 동아일보는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구축)의 자료를 활용해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디지털 정보관’을 마련하고, 동아닷컴을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이 디지털 정보관에서는 3·1운동 당시 벌어진 약 1700건의 시위 정보를 관련 기사 및 현장 사진과 함께 볼 수 있다. 시위는 날짜와 지속된 기간에 따라 오늘날 지도상에 표시된다. 시위 규모와 피해자 수, 시위대의 행동 양상 등 관련 정보도 함께 제공된다. 특히 지난해 3월부터 본보 기자들이 국내와 해외를 넘나들며 취재해 연재하는 ‘1919∼2019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시리즈 역시 해당 시위에 연동해 볼 수 있다. 당대 및 오늘날 사진을 함께 볼 수 있다. 디지털 정보관에서는 시위 발생 지역명으로 시위를 검색할 수 있고, 날짜별로도 전체 시위 발생 추이를 볼 수 있다. 스마트폰에서는 그에 맞게 디자인된 화면을 볼 수 있다. 동아일보가 지난해부터 연재해 온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시리즈의 기사 아카이브도 연계될 예정이다. 3·1운동 당시 활동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삶, 역사의 현장을 통해 3·1운동의 정신을 생생하게 되새길 수 있다. 디지털 정보관은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가 널리 활용되도록 국사편찬위가 공개한 시위 정보와 좌표 등을 활용해 구축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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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public of Korea’ 사용한 1919년 외교문서 새로 찾았다

    대한민국의 영문 명칭인 ‘Republic of Korea’를 표기한 1919년 외교문서가 발견됐다. 주미 특파원 출신 언론인 모임인 한미클럽은 “파리강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밝히기 위해 파견된 김규식 선생(사진)이 1919년 5월 24일 로이드 조지 당시 영국 총리에게 보낸 독립청원 서한에 ‘Republic of Korea’라고 국호를 표기했다”고 26일 밝혔다. 한미클럽은 제임스 퍼슨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의 도움을 받아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문서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한미클럽이 이날 공개한 독립청원 서한에서 영문 국호 ‘Republic of Korea’는 “President of the Cabine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대한민국 임시정부 내각 대통령)” “I am authorized by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권한으로…)” 등의 구절에 반복 사용됐다. 김규식 선생은 독립청원 서한에서 조지 총리가 영향력을 발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각 대통령인 이승만의 요구사항(note)을 평화회의에 환기시켜줄 것을 당부했다. 이승만 임정 대통령은 평화회의가 새로운 대한민국과 임시정부를 한국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정통성 있는 체제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또 임시정부는 일본의 지배에 항거하는 3·1운동 등 독립운동의 결과로 창설됐으며, 독립선언에 따라 국제적 합의나 약속, 계약은 임시정부를 통하지 않을 경우 한국 국민들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미클럽에 따르면 이 문서는 1919년 5월 30일 영국 정부가 접수해 조지 총리에게 전달했고, 접수된 문서 제목에도 ‘대한민국 인정을 위한 청원(Appeal for Recognition of Republic of Korea)’이라고 표시됐다. 이번에 한미클럽이 공개한 문서에는 1919년 4월 초순 당시 미국 소재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인 안창호 선생이 조지 총리에게 보낸 전문도 있다. 전문은 김규식 선생을 우리 측 대표로 인정해줄 것과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한민족의 독립이 인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요청을 수용하지 말 것’을 건의하는 영국 정부 내부 의견서도 전문에 첨부된 채 발견됐다. 한미클럽은 “냉혹한 국제질서 앞에 독립투사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무산되는 상황을 목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1919년 5월 3일 영국 정부가 대한인국민회로부터 전달받아 조지 총리에게 보고한 3·1독립선언서 영역본, 김규식 선생이 1919년 5월 13일 작성해 조지 총리 앞으로 전달한 독립청원 서한, 영국 정부를 통해 당시 파리평화회의 의장인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보낸 6월 11일자 서한도 공개됐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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