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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받을 용기’(인플루엔셜)의 속편인 ‘미움 받을 용기 2’(사진)가 출간된다. 교보문고에서 51주 연속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최장 기록을 세운 까닭에 속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하지만 29일 공식 출간에 앞서 미리 본 속편은 저자 기시미 이치로의 또 하나의 자기 복제에 그쳤다. 전편에서 아들러의 사상에 감화됐던 청년은 3년 후 다시 철학자를 찾아온다. 교사가 돼 그의 사상을 실천하려 했지만 아이들을 가르쳐 보니 이론은 번번이 벽에 부닥쳤다며 항의하러 온 것. 전편과 마찬가지로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체로 정리했다. 흥분한 청년이 철학자의 말에 점점 감화돼 나가는 구성 역시 동일하다. 출판사는 전편이 아들러의 사상을 알려줬다면 속편은 이를 실천하는 방안을 제시한다고 소개한다. 하지만 내용을 분석한 결과 전편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은 물론이고 기시미의 수많은 저서인 ‘행복해질 용기’, ‘나답게 살 용기’, ‘엄마를 위한 미움 받을 용기’ 등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이 반복되고 있었다. ‘지금’이 과거를 결정하고,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존경이라는 것뿐 아니라 칭찬하지도 야단치지도 말 것, 문제 행동의 ‘목적’을 파악할 것 등 익숙한 내용이 가득했다. 인생을 선택하는 건 바로 나이며 자립을 강조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본 멜로디를 살짝 변주해 앨범 포장만 바꿔 나온 노래를 듣는 기분이었다. 독자들도 실망감을 토로하고 있다. 출간 전 네이버 연재 및 출판사의 독자 모니터링 등을 통해 작품이 알려진 터다. 인터넷에는 ‘호기심을 끄는 내용을 짜내서 짜깁기할 수는 있겠지만 1편으로 충분하다’, ‘불필요한 단어들로 언어 유희를 한 느낌이다. 전편의 감동도 의심된다’는 서평이 올라오고 있다. 출판계에서는 기시미의 계속되는 자기 복제를 먼저 일본 출판계의 특성에서 찾는다. 일본에서는 자기계발서 저자들이 기존 책에서 사례나 서술 방식을 바꿔 새 책으로 출간하는 게 일반화돼 있기 때문이다. 국내 출판사들이 앞다퉈 기시미의 책을 들여오다 보니 그의 자기 복제가 두드러져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 기시미의 책 가운데 80∼90%가 국내 출판사와 계약된 상황이다. 그의 책을 낸 한 출판사 관계자는 “저자의 기존 책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회의를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또 다른 출판사 관계자도 “자기 복제는 떴을 때 빨리 한몫 챙기려는 저자의 안일함과도 맞물려 이뤄진다”며 “당장은 책을 팔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스스로의 가치를 갉아먹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지적했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알파고’로 대표되는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 요즘,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 이스라엘 히브리대 역사학 교수(40)가 25일 한국을 찾았다.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으로 호모사피엔스가 지구를 지배했다는 통찰을 담은 이 책은 30개 언어로 번역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11월 출간된 후 14만 권 넘게 판매됐다. 하라리 교수와 이광형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62)가 26일 서울 중구 환경재단에서 만나 인공지능과 인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교수는 KAIST 미래전략대학원장이자 올해 초대 미래학회장으로 선출됐다. 중국, 대만에 이어 한국에 온 하라리 교수는 “베이징에서 목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에 갔다. 서울은 베이징보다 공기가 훨씬 좋다”며 연신 물을 들이켰다. 이 교수가 주로 질문하고 하라리 교수가 답했다. ―인공지능으로 인간이 쓸모없어진다고 했는데 ‘쓸모없다’는 건 누가 정의하는가. “경제 시스템이다. 가령 목적지로 더 빨리 싸게 데려다 주는 인공지능이 나타난다면 택시 운전사는 쓸모없어지게 된다. 인공지능은 의사가 하는 일도 더 많이, 더 잘 해낼 수 있다.” ―‘직업=인간’은 아니다. 인공지능이 여러 직업을 대체하면 인간은 더 적게 일하고 여가를 즐길 수 있다. 여가를 즐기는 활동이 늘어나면 새로운 직업이 또 생기지 않을까. “일리가 있다. 나도 여유로운 삶을 꿈꾼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30∼40년 후 거의 모든 직업에서 인간을 밀어낼 것으로 보인다. 새 직업이 생기겠지만 인공지능이 그 일도 더 잘하게 될 것이다. 직업이 없어 정부 보조금으로 생활한다고 해도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는 게 문제다. 직업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지 정신적인 측면을 면밀히 고려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인공지능의 위협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완전히 새로운 경제적인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모습일지는 예측하기가 힘들다. 공산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은 훌륭하지만 현실에 적용했을 때는 전혀 달랐던 걸 생각해 보면 된다.”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조직화된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상상하고 인지하는 능력은 사람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의식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류가 지구를 지배하면서 많은 재앙을 초래했다. 해결 방법이 있나. “200여 개의 독립된 국가 체제로는 지구온난화, 인공지능의 위협 등을 해결할 수 없다. 지구온난화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경제 성장을 멈추는 것이지만 어떤 국가도 경제 성장을 멈춰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개별 국가 위에 존재하는 전 지구적 기구가 필요하다.”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나. “2050년의 세상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 아이들은 교사나 연장자에게 기존의 지식을 배워 미래를 준비하는 게 불가능한 역사상 첫 세대일지 모른다. 모르는 걸 인정하고 어떻게 하면 늘 변화하며 살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게 중요하다.” ―기술은 발전하고 있지만 인간이 느끼는 행복은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나. “인간은 경제, 정치 등 주변 환경을 바꿔서 행복해지려고 애썼다. 무엇을 더 가져서 맛보는 행복은 일시적이다. 자기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찾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매일 두 시간씩 위파사나 명상(호흡 중심의 불교 수행법)을 하고, 매년 30∼60일 정도 외부와 완전히 단절한 채 명상을 한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 하라리 교수는 우유, 달걀도 먹지 않는 엄격한 채식주의자다. 무자비하게 사육되는 가축들의 고통에 공감해 육식을 끊었다. 인류가 미래에 맞을 기회와 위협 등을 짚은 ‘미래의 역사(The History of Tomorrow)’가 올해 9월 영어로 출간된다. 한국에는 내년쯤 나올 예정이다. 하라리 교수는 새 책에 대해 “미래에 대한 예언서가 아니다. 인류가 미래에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는지 지도를 그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위한 역사책을 쓰는 작업도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는 힘주어 말했다. “기술이 답을 주기를 원하는데, 그렇게 되면 기술이 사람을 통제하게 됩니다. 기술은 우리가 묻는 질문에 답을 할 뿐 질문을 하는 건 우리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우리 미술관의 대표작이에요. 이것만 보러 오는 분도 있으니 잘 봐두세요.” 8일 방문한 서울 종로구 율곡로 미술관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의 상설전 ‘리얼리?’. 이 전시에서 도슨트(설명자) 유경영 씨는 영국 작가 마크 퀸의 미술품 ‘셀프’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작품은 마크 퀸이 5년 동안 자신의 피 4∼5L를 뽑아 얼려 조각한 본인의 두상이다. 관람객 20명의 시선이 일제히 이 작품에 꽂혔다. 백남준, 앤디 워홀 등 작가 35명의 작품 140여 점으로 구성된 ‘리얼리?’에서는 사람이 안내하는 도슨트, 이어폰에서 정보가 나오는 오디오 가이드, 전자책 가이드 등 3가지 방법으로 관람객의 감상을 돕는다. 전자책 서점 리디북스의 전자책 단말기 ‘페이퍼’를 활용한 전자책 가이드는 2월 23일부터 도입됐다. 세 가이드의 특징을 비교해봤다. 모두 무료이며 걸리는 시간도 1시간으로 비슷하다. 도슨트의 설명은 주목도가 높았다. “‘셀프’가 보관된 곳은 영하 20도 이하의 냉동고예요. ‘셀프’는 세계에 4개가 있었는데 영국에 있던 작품이 냉동고의 전원이 빠져 망가졌어요. 삶의 유한함, 인간의 나약함이 드러나죠.” 박제된 사슴 두 마리에 수백 개의 반짝이는 구슬을 붙인 일본 작가 고헤이 나와의 ‘픽셀-더블 디어#7’ 앞에서도 설명이 이어졌다. 수백 개의 구슬을 붙인 두 마리 사슴을 보며 “와, 예쁘다”를 연발하던 관람객들은 그 안에 실제 박제된 사슴이 있는 걸 확인하고는 놀랐다. 본질에 대한 인식을 의도적으로 방해한 작품이다. “작가가 주문한 오브제와 전혀 다른 게 도착한 데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죠.” 이런 설명은 오디오 가이드와 전자책 가이드에는 없다. 다만 도슨트가 설명하는 작가는 15명 내외로 오디오 가이드(19명)와 전자책 가이드(18명)에 비해 적었다. 전체 관람객의 7% 정도가 도슨트를 이용한다. 오디오 가이드의 이어폰을 꽂자 남자 성우의 목소리가 나왔다. 눈은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영어와 중국어로도 지원돼 외국인이 많이 이용한다. 사용하는 관람객 비율은 34% 정도다. 이어폰을 귀에 걸어야 해 불편하고 목소리 톤이 일정해 단조로운 느낌이 든다. 오디오 가이드는 앞뒤로 한 개 작품씩 옮겨갈 수 있는 데 비해, 전자책 가이드는 목록을 보며 작품을 자유자재로 찾아볼 수 있었다. 작품당 설명도 오디오 가이드보다 많았다. 망가진 ‘셀프’가 세계적 컬렉터인 영국의 찰스 사치가 소장하던 것이었고, 이 얘기로 작품이 더 유명해졌다는 내용도 전자책 가이드에만 있었다. 하지만 눈이 침침한 고령자라면 조금 불편하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전자책 가이드 이용률은 도입 당시 12%에서 최근 32%로 늘었다. 오디오 가이드와 맞먹는 수준이다. 양민희 ㈜아라리오 홍보담당은 “전자책 가이드에 대한 호응이 커서 다음 달 5일 제주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Ⅱ에서 시작하는 ‘실연에 관한 박물관’ 전시에도 도입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다채로운 이야기를 듣길 원한다면 도슨트가 ‘딱’이다. 설명 시간에 맞추는 게 쉽지 않고, 도슨트별 실력 차가 있다는 건 감안해야 한다. 조용히 집중해서 풍부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전자책 가이드를 권한다. 작품 감상에만 눈을 두고 싶다면 오디오 가이드가 제격이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도 번다면 금상첨화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다르거나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몰라 괴로운 이가 많겠지만. 트랙처럼 정해진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개척한 ‘선구자’들의 이야기는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헌데 갈수록 이런 판타지를 실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사는 법’(한명석 등 지음·사우)에는 세상의 기준을 내던지고 자신만의 길을 간 10명의 인생이 담겨 있다. 외교관이 우동집을 운영하고 공기업을 다니다 양봉가가 된 이가 있다. 변호사를 하다 전통주 제조에 뛰어들고 교사를 그만두고 농사를 시작한 사람도 있다. 저자는 “이들은 자기 인생을 진두지휘한 결과 살아있다는 희열을 느꼈다”고 말한다. 한번쯤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면, 필요한 건 결단을 내리는 용기다. 줄어든 수입과 불투명한 미래를 견뎌낼 배짱과 함께.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한국 문화에 관심을 넘어서 애착을 가진 이방인을 만나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미국에서 자라 1982년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후 많은 칼럼을 쓰고 ‘미래시민의 조건’ ‘서울의 재발견’ 등을 펴낸 저자는 자신만의 눈으로 한국을 바라본다. 그 중심에 한옥이 있다. 서울 북촌과 서촌의 한옥에서 모두 살아본 저자는 서촌에 강하게 끌렸다. 북촌에 비해 가치를 더디게 인정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규모가 더 작고 원형이 잘 보존된 데다 이웃 간의 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서촌지킴이를 자처하며 한옥마을을 유지하고자 애쓸 정도였다. 서촌에서 한옥을 사들여 ‘어락당’을 만드는 과정은 저자가 한옥에 매료된 이유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집을 고치는 과정은 공개됐고 마을 사람들은 자주 와서 이를 구경한다. ‘어락당’이 완공된 날, 동네잔치를 벌인 것처럼 함께 모여 기뻐했다. 집이 완공된 후 오히려 허탈함을 느끼는 저자를 보노라면 그가 추구했던 가치는 결국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사람 간의 부대낌이 있고 살아온 자취가 간직된 곳, 오늘도 평범한 이들이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곳이 골목이 있는 한옥 마을이었다. 책은 미국인의 한옥 사랑가에 그치지 않는다. 88 서울 올림픽 후 선진국으로 도약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고 독재 정치를 끝내려는 열망에 차 있던 한국의 현대사가 제3자의 시선으로 펼쳐진다. 유교 사상이 강한 이유를 일제가 조선을 억압한 데 따른 반대급부로 해석하고 상업적인 대중문화를 국가 브랜드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우려하는 모습에서 애정이 느껴진다. 현재 미국에 있는 그는 서촌에서의 두 번째 인생을 꿈꾸고 있다. 옛것에 매료된 이유를 말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깊은 울림을 준다. ‘주위에 오래된 것이 많고 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면 지금의 인생이 얼마나 짧으며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셰익스피어의 삶은 미스터리하다. 직접 작품을 썼는지조차 끊임없이 논란이 분분하다. 최근 출간된 ‘세계를 향한 의지: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민음사)에서 미국 하버드대 교수로 셰익스피어 연구의 권위자인 저자는 셰익스피어의 ‘흐릿하고 비밀스러운 삶’과 당시 시대상을 치밀하게 추적해 작품 곳곳에 녹아 있는 흔적을 핀셋으로 끄집어낸다. 당시 파격적으로 여덟 살 연상의 앤 해서웨이와 결혼했고 그의 아버지가 대금업을 했다는 사실 등을 제외하고 책은 상당 부분 추론에 의존한다. 그럼에도 책장을 넘기다 보면 셰익스피어가 진짜 작품을 썼다고 차츰 믿게 된다. 집요할 정도로 촘촘하게 셰익스피어의 삶을 복원해낸 저자의 땀방울 덕분이다. “양피지는 양의 가죽으로 만드는 것이잖은가?”라고 햄릿이 묻자 친구 호레이쇼는 수긍하며 “송아지 가죽으로도 만들지요”라고 답한다. 장갑 가게도 운영한 아버지 덕분에 가죽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곰을 묶어 놓고 사나운 사냥개와 싸우게 하는 유흥거리를 즐겼던 시대상도 보인다. 맥베스는 적들이 포위해 오자 외친다. “곰처럼 나는 이 과정을 싸워내야 하리라!” ‘헨리6세’에서 “서두른 결혼은 거의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한 건 ‘속도위반’으로 결혼 6개월 만에 딸 수재너를 낳은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재산 대부분을 큰딸에게 물러주고 아내에게는 거의 남기지 않은 이유는 ‘좋으실 대로’에서 “아가씨인 동안은 5월이지만 아내가 되면 날씨가 확 바뀐다”고 노래한 데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성장에는 동갑내기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도 빼놓을 수 없다. 여성들을 몰살시키고 이집트 공주를 신부로 맞이하며 끝나는 말로의 ‘템벌레인’에 환호하는 관객을 보고 셰익스피어는 경쟁심에 불타오른다. 그의 윤리관을 단박에 전복시켰기 때문이다. 29세에 말로가 세상을 떠나자 ‘좋으실 대로’에서 말로 작품의 유명한 대사를 인용한 건 라이벌에 대한 헌사였다. 셰익스피어가 불멸의 생명력을 가진 작품을 토해낼 수 있었던 건 천재성과 함께 엄청난 성실성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희곡 작업에 매달린 결과라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내세울 것 없는 시골 출신이지만 자신의 뿌리를 잃지 않고 시골 생활의 경험을 상상 속의 세계로 그려내는 재능도 지녔다. 사람들의 잡담이나 사소한 사건도 지루해하지 않고 모두 흡수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냈다. 엄청난 다독가였던 셰익스피어는 당시 출간된 책들을 통해 세계를 아우르는 넓은 안목을 키웠을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살던 시대로 가보자며 손목을 잡아끄는 저자를 따라가다 보면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가 서로를 죽이던 잔인한 현실은 물론이고 연극을 보기 위해 목을 빼고 몰려들었던 군중의 모습이 실사 영화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이 모든 현장을 바라보며 골똘히 사색하고 글을 쓰던 한 남자를 만날 수 있다. ‘흐릿하고 비밀스러운’ 셰익스피어의 삶을 조각조각 맞춰 선명하게 보여준 솜씨가 일품이다. 책장을 덮은 후 ‘로미오와 줄리엣’ ‘줄리어스 시저’ ‘햄릿’을 함께 묶은 ‘셰익스피어 전집 4: 비극 1’(민음사) 등을 읽으면 셰익스피어의 인생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2016 엠디엠 한국여자바둑리그’가 2월 개막된 후 뜨거운 열기 속에 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시작된 여성바둑리그는 종합부동산개발회사인 엠디엠이 여성 프로기사의 실력 양성을 위해 만들었다. 엠디엠 문주현 회장은 후원 이유에 대해 “양궁 탁구 등 대한민국 여성이 세계적으로 뛰어난 분야가 많은데 여성 바둑도 적절한 무대를 지원하면 스타가 나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엠디엠은 후원 액수를 지난해 2억 원에서 올해 3억 원으로 올렸다. 최근 중국 장쑤 성에서 열린 황룡사쌍등배 1차전에서 한국이 5승 1패로 선전한 것도 여성바둑리그 활성화가 큰 도움이 됐다는 분석이다. 문 회장은 “여자바둑리그의 활성화로 많은 국민들이 생활 속에서 바둑을 즐길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올해 여자바둑리그엔 지난해 초대 우승팀인 인제 하늘내린(감독 현미진 5단)을 비롯해 서울 부광탁스(권효진 6단), 경기 호반건설(이다혜 4단), 경기 SG골프(윤영민 3단), 부안 곰소소금(김효정 2단), 서귀포 칠십리(하호정 4단), 여수 거북선(강승희 2단), 포항 포스코켐텍(이영신 5단) 등 8개 팀이 출전했다. 경기 SG골프와 경기 호반건설, 여수 거북선은 올해 창단됐다. 개막전은 2월 18일 서울 성동구 마장로 한국기원에서 경기 SG골프와 여수 거북선의 대결로 막이 올랐다. 다음달까지 열리는 정규리그에서는 총 56경기, 168국을 치러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4개 팀을 선발한다. 포스트시즌에 오른 4개 팀은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 챔피언결정전의 3판 2선승제로 최종 순위를 가린다. 포스트시즌은 5, 6월에 열릴 예정이다. 모든 경기는 바둑TV에서 생중계한다. 18일 현재 포항 포스코켐텍이 7승 2패로 팀 1위를 달리고 있다. 2위는 서울 부광탁스(6승 2패)이며 인제 하늘내린(6승 3패)이 3위다. 개인 전적에선 중국 기사인 위즈잉 5단(서울 부광탁스)이 6승 1패로 1위를 달리고 있다. 조혜연 9단(포항 포스코켐텍)과 김혜민 7단(부안 곰소소금), 최정 6단(서울 부광탁스)이 각각 6승 2패로 공동 2위를 달리고 있다. 오유진 2단(인제 하늘내린·6승 3패)이 5위이며 루이나이웨이 9단(경기 SG골프·5승 1패)이 뒤를 잇고 있다. 바둑TV의 한 관계자는 “남자 바둑대회보다 시청률이 잘 나오는 경우가 많다”며 “선수들에게 팀별로 고유한 유니폼을 입도록 한 것도 흥행의 한 포인트”라고 말했다. 총상금은 7억8000만 원이며 우승상금은 5000만 원, 준우승상금은 3000만 원이다. 우승상금과 별도로 승자 100만 원, 패자 30만 원의 대국료가 각각 지급된다. 각 팀은 3명의 주전 선수와 1명의 후보 선수로 구성된다. 지역연고제를 정착하기 위해 팀별 주전 선수 가운데 2명 이상을 최소 2년간 보유해야 한다. 외국인 선수 선발, 주전 선수 트레이드, 후보 선수 방출도 도입했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경험만큼 처절한 깨달음을 주는 건 없다. 드라마 ‘추노’의 유명한 대사도 있지 않은가. “당해 봐야 아는 거야.” 미국 컬럼비아대 정신과 교수인 저자는 9·11테러로 여동생을 잃은 후 우울증에 빠졌다. 몸이 무너져 내리고 말로 하기 힘든 고통을 겪었다. 처음 느낀 감정은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이었다. 대부분의 의사처럼 저자 역시 의사는 아프지 않을 것이란 착각에 빠졌던 것이다. 이후 저자는 환자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자신처럼 환자가 된 의사 70명을 심층 인터뷰해 그들의 목소리를 날것 그대로 담아냈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을 비롯해 유방암, 백혈병, 복부암 등의 판정을 받은 의사들은 현실을 부정하지만 이내 공포에 휩싸인다. 병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로 유명한 김혜남 정신과 전문의는 책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에서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뒤 그 끔찍한 고통을 환자들처럼 견뎌낼 수 있을지 두려웠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이들의 육성은 공감이 결여된 진료 현장과 진료 시스템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도려내 보여준다. 진료를 받느라, 온갖 검사를 받느라 하염없이 기다리는 건 기본이고 약으로 인한 불면증, 구역질, 두통 등 이른바 ‘가벼운 증상’은 실제 겪어보니 진을 다 뺀다. 암 환자인 내과 전문의 샐리는 말한다. “항생제를 맞기 전 구토방지제를 달라고 고집 피우지 않았으면 몇 시간 동안 게워냈을 거예요.” 유방암에 걸린 정신과 전문의 데보라는 금발 머리카락을 잃는 것이 항암 치료로 인한 고통보다 훨씬 괴로웠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담당 의사는 방사선 치료 후에 한번 빠진 머리카락은 다시 나지 않는다고 설명해주지 않았다. 환자들이 평소 말하고 싶었거나 말해도 무시당했던 사연들이 의사 환자들 입에서 그대로 흘러나오는 걸 읽노라면 아프면 누구나 같아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하게 된다. 조울증을 앓는 정신과 전문의 수잔은 외친다. “환자에게 ‘왜 약을 안 먹고 있나요?’라고 말하는 건 쉽죠. 그러나 하루에 열일곱 개의 알약을 먹는 게 쉬운 일인가요!” 가슴을 할퀴는 의사들의 무심한 한마디는 ‘의사 환자’ 역시 피해가지 않았다. 림프종을 앓는 내과 전문의 월터는 “암이 구석구석 퍼졌습니다. (중략) 죽게 될 것입니다”란 건조한 말을 듣는다. 심근경색을 앓는 신생아의학 전문의 허브는 말한다. “수술 전날 내가 죽을 가능성이 5%라는 말을 듣고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생존 가능성이 95%라고 들었으면 훨씬 나았을 거예요.” 이들은 환자 체험을 통해 “두 눈을 완전히 떴다”고 고백한다. 병원에 복귀하자 회진할 때 서서 환자를 내려보는 대신 의자에 앉아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환자들이 호소하는 통증에도 더 귀를 기울였다. ‘환자 의사’의 솔직한 이야기는 의료계 종사자들의 인성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권위와 관료주의에 갇혀 ‘사람’을 보지 못하는 의료계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특히 의사에게 환자와 대화하는 법과 환자를 대하는 자세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의료계 종사자들에게 간곡히 권하고 싶은 책이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대학 시절, 학교 앞 기찻길 옆 외진 곳에 있던 작은 서점이 기억난다. 힘겹게 버티던 그 서점은 결국 문을 닫았고 서점의 ‘죽음’을 애도하는 플래카드가 캠퍼스 곳곳에 걸렸다. 서로 생각을 나누고 교감했던 곳이었기에 작은 서점의 빈자리는 크게 느껴졌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가 펴낸 ‘세계서점기행’에는 1294년 지은 고딕성당에 들어선 네덜란드 도미니카넌 서점을 비롯해 나라별 역사와 문학, 사상을 망라한 책을 보유한 영국 돈트북스 등 철학이 있는 서점 22곳이 담겨 있다. 한국은 부산 영광도서와 보수동 책방골목이 포함됐다. 저자는 95년 역사를 지닌 채 2002년 문을 닫은 종로서적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다행히 작은 서점들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종로서적과 학교 앞 그 서점도 다시 깨어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사그라들고 있는 책에 대한 관심을 키우는 방법부터 연구해야겠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 출판계 게릴라들이 등장했다. 20, 30대 편집자, 디자이너, 번역가 등 ‘12명+알파(α)’로 구성된 ‘읻다 프로젝트’가 2년간 작업해 문학성이 짙은(한편으로 팔릴지는 의문스러운) 책 3권을 최근 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 쓴 세 권의 일기를 묶은 ‘전쟁일기’, 루이페르디낭 셀린이 스스로를 인터뷰해 쓴 소설 ‘Y교수와의 대담’, 일본 시인 미즈노 루리코가 제2차 세계대전의 공포를 회상한 ‘헨젤과 그레텔의 섬’이다. 》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 5일 저녁 6명의 게릴라가 모였다. 낭독회, 페이스북 등을 통해 알게 된 이들은 출판사 직원, 어학 강사 등 생업이 있다. 퇴근 후와 주말 시간을 투자해 책을 만든 건 상업성만 추구하는 출판계에서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기 때문이란다. “러시아 소설을 내고 싶어 제안을 해도 번번이 물을 먹었어요. 안 팔린다는 거죠.”(다다 씨·예명) “이름 있는 작가들하고만 작업해요. 그게 안전하니까요. 실험해 보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여지가 아예 없어요.”(김잔섭 씨·예명) 판매 부수와 유명 작가에 대한 섭외력에 따라 편집자의 등급을 매기는 시스템에 숨이 막혔다는 이도 있었다. 한 대형 출판사 면접에서는 면전에서 탈락 통지를 받았단다. 편집을 시킨 후 곧바로 채점한 뒤 “당신은 B마이너스다. 우리 회사는 B플러스 이상만 올 수 있다”고 통보한 것. 오랜 시간이 걸려도 책을 잘 만드는 사람보다는 단시간에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을 원하는 게 한국 출판계의 현실이라고 입을 모았다. 번역자는 디자인 등에 대해 어떤 의견도 낼 수 없는 구조 역시 답답했다. “책이 나온 후 표지나 장정이 별로면 힘들게 번역했던 숱한 날들이 산산조각 나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어요.”(정수윤 씨) 이들은 작업 과정에 누구나 의견을 낼 수 있다. 전원합의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한다. 세 권을 만드는 데 모두 600만 원가량 들었다. 인건비는 포함되지 않은 액수다. 서로에게 자료를 보낼 땐 퀵서비스 대신 대중교통을 타고 직접 전해주는 방식으로 한 푼이라도 비용을 줄였다. 클라우드 펀딩으로 1500만 원을 모았고, 게릴라들의 갹출로 2000만 원을 따로 마련했다. “순수하게 책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내가 이 책의 주인이라는 생각도 많이 들고요.”(김보미 씨) 박술 씨는 “책을 보니 꿈만 같았어요!”라고 외쳤다. 책은 좀 팔릴까. “초판을 각각 1000권씩 찍었는데 ‘전쟁일기’는 출간 일주일 만에 추가로 1000권을 더 찍게 됐어요.”(최성웅 씨) 각각 700권씩만 팔리면 제작비는 건진다고 한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 릴케의 ‘두이노 비가’ 등 7권을 더 출간해 모두 10권을 내는 게 1차 목표다. “인문·철학책을 누가 사보냐고들 하지요. 밤에 택시를 탔는데 기사분이 희미한 불빛 아래서 인문학 책을 읽고 계시더라고요. 그런 분이 대한민국에 1000명은 계시지 않을까요? 그러면 가능한 작업이라고 믿어요.”(최성웅 씨)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1. 테스가 알렉 더버빌에게 짓밟힌 날, 숲 속을 에워싼 건 안개였다. 테스를 노리던 알렉은 ‘모든 것을 감추는 안개’를 이용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숲 속에서 길을 잃는다. 그리고 욕망을 채운다.(토머스 하디의 ‘더버빌가의 테스’) #2. 1790년 7월 14일, 바스티유 함락 1주년을 기념해 파리에서 열린 축제에서는 하염없이 비가 내렸다. 시민들은 의기소침했다. 반전이 일어났다. 빗물에 흠뻑 젖은 병사와 시민들이 함께 춤추기 시작한 것. 악천후도 혁명에 대한 열정을 억누를 수 없음을 증명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와 문학자, 지리학자 등 10명이 함께 쓴 이 책은 세상을 바라보는 수많은 뷰파인더 가운데 날씨를 선택했다. 비, 햇빛, 바람, 눈, 안개, 뇌우가 인류의 역사와 예술 등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며 흥미로운 지적 여행으로 초대한다. 안개는 그 형태의 신비스러움으로 인해 예술가에게 창조적 영감을 불어넣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에세이 ‘의향’에서 안개를 야수에 비유한다. 클로드 모네는 템스 강의 안개가 사물의 윤곽을 지우는 순간을 포착하려 애썼다. 모네는 “이 엄청나게 멋진 광경은 고작 5분간 지속될 뿐이오! 미칠 노릇이지!”라며 안타까워한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정벌이 실패한 데 혹독한 추위가 한몫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빅토르 위고는 시 ‘속죄’에서 1812년 겨울 나폴레옹 군대가 러시아에서 눈을 맞으며 회군한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하늘은 굵은 눈발로 소리 없이/이 거대한 군대를 위한 거대한 수의를 지었다.’ ‘시민왕’을 자처한 루이 필리프 1세는 1831년 도열한 병사들이 비를 맞고 있자 망토를 쓰는 것을 거절하고 함께 비를 맞았다. 모든 프랑스인은 자연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의외의 사실을 발견하는 재미가 적잖다. 햇빛은 기력을 소진시킨다는 생각에 오랜 기간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1787년 광합성 작용의 발견으로 햇빛이 생명의 원리를 조절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햇빛이 찬양의 대상으로 드라마틱하게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장 자크 루소는 ‘에밀’에서 아이들이 햇볕을 쬐어 땀을 흘리며 자라야 단련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맑은 날씨는 여행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인식돼 휴가 때 비가 오면 보험금을 지급하는 ‘우천 보험’까지 나올 정도였다. 괴테는 ‘기상 이론의 초안’을 펴낼 정도로 날씨에 관심이 많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첫눈에 사랑에 빠진 로테와 짜릿한 춤을 출 때 ‘그녀와 함께 공중의 뇌우처럼 날아오르다니!’라며 환호한다. 항상 곁에 있기에 무심코 지나쳤던 날씨라는 존재를 감성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제작비 때문에 풍성한 그림과 사진이 흑백으로 인쇄된 점은 다소 아쉽지만 보는 즐거움이 크게 반감되지는 않는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호랑이에게 쫓기듯 허겁지겁 하루를 달려온 후 허탈감이 밀려드는가. 느리게 살고 싶다! 많은 이들이 간절히 소망하는 일이다. ‘여행의 기쁨: 느리게 걸을수록 세상은 커진다’(실뱅 테송 지음·어크로스)는 자동차, 기차 대신 두 다리와 말(馬)로 세상을 누빈 이야기를 담았다. 여행 작가인 저자는 히말라야에서 5000km 넘게 걷고 중앙아시아 초원에서는 말을 타고 3000km를 달린다. 느림이 속도에 가려진 사물의 모습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란다. 고비 사막을 지날 때는 몇 분이 몇 년 같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강조한다. ‘우리의 영혼이 시계에 맞서 힘겹게 이어가고 있는 달리기에서 벗어나려면 느릿느릿,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여 이동해야 한다.’ 시간이라는 말의 고삐를 당기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고삐를 당기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삶의 거친 호흡이 잦아드는 길이 열릴 수 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저는 유가족으로, 생존 학생 역시 그 이름으로 평생을 살 텐데, 그 오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우리가 많이 아프다는 걸 알려 주고 ‘세월호 세대’라 불리는 또래들과 함께 잘살 수 있게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고 박성호 군의 누나 박보나 씨가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세월호 생존 학생 11명과 희생자의 형제자매 15명의 육성을 담은 ‘다시 봄이 올 거예요’(창비)의 출간 간담회가 5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렸다. 지난해 출간된 ‘금요일엔 돌아오렴’의 후속편 격인 이 책은 이들이 2년 동안 말하지 못했던 속내를 기록했다. 희생자 부모들의 육성을 담은 ‘금요일엔…’을 쓴 4·16 세월호 참사 작가 기록단이 참여했다. 책에는 상주가 뭔지도 모른 채 상주 역할을 하고, 바다를 보면 눈물이 나는 자신을 보며 감정이 무뎌졌으면 좋겠다고 기원하는 목소리가 그대로 실려 있다. 고 남지현 양의 언니 남서현 씨는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서로에게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이제 비로소 서로의 마음을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고통의 시간을 보냈지만 동시에 성장했고, 다시 일어섰다고 말한다. 이호연 작가는 “피해자들은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미묘하게 입장 차이가 나는데 서로 이해하고 보듬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건웅 윤필 등 만화가 5명은 책 내용을 웹툰 5회로 제작해 다음카카오 스토리펀딩에 지난달 29일부터 한 달간 예정으로 연재하고 있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열세 살 소녀 시리는 누군가의 제삿날 엄마를 따라 산자락 좁다란 동굴로 간다. 어머니는 10여 년 전 일을 두런두런 말하기 시작한다. 토벌에 참가했던 외삼촌이 숨진 여인의 품에 안긴 채 살아있던 어린아이를 데려왔다고. 나무도장을 손에 꼭 쥐고 있던 그 아이는 시리였다. 제주4·3사건을 서정적 그림과 절제된 문체로 담아낸 그림책이다. 저자(56)를 서울 종로구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꽃할머니’(2015년)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말 잇기 놀이인 제주도의 꼬리따기 노래를 모아 재해석한 ‘시리동동 거미동동’(2003년)을 내면서 제주와 인연을 맺었다. 실화인 ‘빌레못굴의 학살’을 바탕으로 한 책을 내기 위해 저자는 3년간 취재했다. 제주4·3평화재단, 우당도서관, 탐라도서관을 뒤졌다. 권영옥 도서출판 장천 대표를 비롯해 30명이 넘는 관련 전문가와 관계자들에게 자문을 받았다. 북촌초등학교 교지도 확인하며 제주의 정서를 이해했다. 엄마가 시리에게 이야기를 해 주는 날을 당초 시리의 생일날에서 시리 생모의 제삿날로 바꾼 것도 이유가 있다. “제주는 생일보다는 제사를 중요시하더라고요. 배를 타다 혹은 물질하다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다 보니 제사를 정성껏 올리며 안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기원하는 문화가 강했어요.” 철저한 고증을 통해 다큐멘터리 못지않게 당시 풍경을 정확하게 그려냈다. 광복 후 제주로 사람들이 돌아올 때 타고 온 관부연락선은 물론이고 당시 입었던 옷, 보따리 등도 세세하게 확인했다. 경찰과 국방경비대의 복장이 비슷하지만 모자에 붙은 마크가 다른 점도 반영했다. ‘빌레못굴의 학살’에서는 일곱 달 아기가 숨지지만 저자는 아이가 살아남아 토벌군의 누나가 데려가 키우는 것으로 바꾸었다. 감정적인 표현은 자제하고 이념 대립으로 비칠 수 있는 단어도 가급적 쓰지 않으려 애썼다. 피도 푸른색과 갈색으로 그렸다. 끔찍했던 현실을 완곡하고 담담하게 표현해 보는 이의 가슴을 더욱 시리게 만든다. 그리고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인간의 잔인함보다는 냉전 시대에 국가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구조에 주목했어요. 사람들을 총살할 때 비켜 쏜 군인도 있었다고 해요. 그 사람이 갖고 있었던 건 인간에 대한 희망 아닐까요.” 책은 제주4·3평화기념관에 헌정됐다. “아이들에게 이념 대립보다는 평화의 섬으로 제주가 기억되길 바랍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조정해 나가는 방법에 대해 질문하고 함께 답을 찾아갔으면 좋겠어요.”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23일은 셰익스피어(1564∼1616)가 서거한 지 400년이 되는 날이다. 셰익스피어에 천착하는 이들은 그의 작품에 대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입을 모은다. 셰익스피어 연구의 대가인 오다시마 유시 도쿄대 명예교수는 ‘셰익스피어, 인생의 문장들’(푸른숲)에서 작품 속 명대사를 정리했다. “슬픔은 혼자 오지 않소, 반드시 한패를 데리고 오지”(‘페리클레스’) “인간의 가치가 정해지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헨리 4세’) “끝이 좋으면 다 좋아요. 끝이야말로 늘 왕관이거든요”(‘끝이 좋으면 다 좋아’)…. 모두 삶의 속성을 꿰뚫는다. 이 말은 어떤가. “남자는 사랑을 속삭일 때는 4월이지만 결혼하면 12월, 아가씨도 아가씨인 동안은 5월이지만 아내가 되면 날씨가 확 바뀐답니다.”(‘좋으실 대로’) 격하게 공감한다면, 그 후 조금은 쓸쓸해질지도 모르겠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한 번 들어도 귓가에 여운이 남는 선율, 춤추는 듯한 조명, 그리고 화려한 군무. 프랑스 뮤지컬의 강점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뮤지컬 ‘아마데우스’의 아시아 첫 내한 공연이 열리고 있다. ‘모차르트, 오페라 락’이라는 제목으로 2012년 국내에서 라이선스 공연으로 선보였다. 모차르트 역할을 맡은 미켈란젤로 로콩테(43)와 살리에리 역의 로랑 방(41)을 26일 공연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났다. 이탈리아 출신인 로콩테와 프랑스인 로랑 방은 친구 사이로, 같은 무대에 서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로콩테가 로랑 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뮤지컬 ‘알라딘’에서 지니 역을 하는 걸 보며 ‘살리에리 역을 소화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완벽한 살리에리가 됐어요. 배역을 몸에 흡수하는 배우예요.” 얼굴이 빨개진 로랑 방이 손뼉 치고 웃으며 쑥쓰러움을 표현했다. “미켈레(로콩테의 애칭)는 모차르트 그 자체예요. 피아노, 드럼, 기타를 연주하고 조각, 시 쓰기, 작곡까지 하죠. 이런 모습이 배역에 그대로 녹아든 것 같아요.” 로콩테는 모차르트를 방탕한 천재가 아니라 사람들이 한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연기한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언론이 없었기 때문에 소문이 진실로 여겨지면서 과장된 측면이 많을 거예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곧바로 알리지 않아요. 알로이지아에게 청혼을 하죠. 미친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저는 모차르트가 진짜 남자가 된 후 아버지를 만나려 했다고 생각해요.” 로콩테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영적인 느낌을 받는단다. “그의 음악은 우주의 소리예요. (휘파람으로 오페라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 아리아를 불며)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힘든 멜로디예요.” 로랑 방은 살리에리의 복합적인 심리를 보여주는 데 주력하고 있다. “모차르트를 라이벌로 여기지만 증오하지는 않아요. 다만 자신에게는 천재적인 재능이 없음을 알고 좌절할 뿐이죠. 모차르트와 우정을 나누는 것도 그래서 가능한 거고요. 단단해 보이지만 내면에서 치밀어 오르는 고통을 함께 표현하고 싶어요.” 로랑 방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는 강한 노래와 잘 어울린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어린 왕자’로 아시아 공연을 했던 로랑 방은 중국과 일본, 대만 팬이 많다. 이날도 대극장에는 여기저기서 중국어, 일본어가 들렸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코스프레를 하고 오는 일본 팬도 있을 정도다. 로콩테는 자유롭게 무대를 누비다가 점점 죽음에 짓눌리는 모차르트를 물 흐르듯 연기한다. 극 중 어머니, 아버지에 이어 자신까지, 연달아 죽음을 접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공연할 때마다 몸 안에서 죽음을 느껴요. 모차르트와 이어진 것 같기도 하고요. ‘나를 새겨주오’라는 노래를 녹음할 때는 열이 38도까지 올라간 적도 있어요.” 로랑 방은 커튼콜 때 ‘악의 교향곡’을 또렷한 우리말로 불러 뜨거운 환호를 받고 있다. 그는 한국 배우가 부른 노래를 인터넷에서 찾아 발음을 받아 적고 한국어 교사까지 구했다. 요즘도 매일 발음 연습을 한다. “손짓 하나하나까지 기억해주는 팬들을 보면 가슴이 뜨거워져요. 목소리만으로도 감동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로랑 방) “다양한 장르에 도전해 제 속에 있는 더 많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로콩테) 4월 24일까지, 6만∼16만 원. 02-541-6236 ▶공연 Tip!개막 초 ‘프리뷰’를 잡아라 뮤지컬을 저렴한 가격에 가장 먼저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주로 뮤지컬 마니아층이 애용하는 ‘프리뷰 기간 할인’을 통해서다. 공연 기획사들은 개막 초기 3∼7일을 프리뷰 기간으로 정하고, 이 기간에 티켓을 구매하는 관객들에겐 할인 혜택을 준다. 기획사 입장에선 관객의 초기 반응을 살피며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장점이 있고, 관객 입장에선 저렴한 가격에 공연을 즐길 수 있다. 29일 정식 개막한 뮤지컬 ‘마타하리’는 개막 전 25일부터 27일까지 총 5회의 프리뷰 공연에 한해 전 등급 30%의 ‘통 큰 할인’을 진행했다. 4월 12일 아시아 초연하는 ‘뉴시즈’ 역시 프리뷰 할인에 나선다. 12∼14일 공연에 한해 30% 할인에 나서는 것. 1인 4장까지 할인받을 수 있다. 4월 1일 디큐브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리는 뮤지컬 ‘삼총사’도 프리뷰 할인에 동참한다. 22일 개막한 뮤지컬 ‘마리아 마리아’도 4월 10일 공연까지 티켓가의 40%를 할인해준다.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 “나 또 임신했어. … 그 인간, 수술하라고 입이 닳도록 말했어.나 두 번이나 중절했다고. … 내가 무슨 암탉이야. 달걀만 낳는 암탉이냐고!”기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신세 한탄하는 올케를 연기했다.오디오북 제작업체인 오디언(서울 은평구)의 스튜디오에서 22일 이은조 작가의 소설 ‘수박’ 낭독에 도전한 것. 정성용 PD는 계속 “다시”를 외치며 말했다. 》“별로 화난 것 같지가 않아요. 딱딱하고 책 읽는 것 같아요.” 듣는 책인 오디오북은 30, 40대 직장인이 출퇴근할 때 주로 이용한다. 어린이와 오래 책을 보기 힘든 고연령층도 애용한다. 여준호 예스24 e북 팀장은 “남성은 자기계발서, 여성은 소설과 자녀용 동화를 많이 구입한다”고 했다. 국내 오디오북 시장은 연간 100억 원 규모로 추산되는데,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오디오북 제작 1위인 오디언이 만든 물량은 2006년 100여 권에서 지난해 1000여 권으로 늘었다. 한만재 오디언 기획팀 과장은 “오디오북은 북미와 유럽에서 도서시장의 10%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기자는 채널A에서 2년 가까이 근무하며 리포트를 만든 경험이 있다. ‘오디오북 낭독도 귀에 쏙쏙 들어오게 또박또박 읽으면 된다’는 가설을 세웠다. 낭독은 보통 성우가 한다. 미국에서는 제러미 아이언스, 조디 포스터 등 유명 배우가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2012년 배우 이보영이 ‘노인과 바다’를 낭독해 수익금 일부를 기부했다. 소설은 주인공의 성별에 따라 남녀 성우를 정한다. 등장인물이 많으면 4, 5명이 투입된다. 역사물은 남성이, 에세이는 여성이 주로 맡는다. 300쪽짜리 책을 낭독하면 10시간쯤 걸리기 때문에 대본작가가 2∼3시간 분량으로 줄인다. 원래 문장을 살리면서도 핵심 내용이 잘 담기도록 추려 내는 게 중요하다. 정 PD는 “기왕 하는 거 난도가 높은 소설을 해보라”며 ‘수박’을 권했다. 가슴에 멍울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소설집으로, ‘수박’ 편은 여기저기서 치이지만 꾹꾹 누른 채 버티는 여주인공 난주를 그렸다. ‘수박’ 편은 1시간 분량이어서 원문 그대로 낭독했다. 집에서 여러 번 연습하고 녹음해서 들으며 교정했지만 연기는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다. 대학 교양 연극 수업에서 조별 연극을 할 때 ‘행인1’을 해 본 게 전부인 기자에게 연기의 벽은 에베레스트 산만큼 높게 느껴졌다. 결국 유경선 성우가 긴급 투입됐다. “화를 내다 넋두리하는 식으로 해보세요. 이렇게요.” 시범을 보이는 그를 보니 입이 딱 벌어졌다. 순식간에 감정을 저렇게 잡다니. 과연 프로였다. 10번 이상 NG를 낸 끝에 겨우 OK 사인을 받았다. 내레이션을 할 때도 “발음은 정확한데 너무 딱딱하다. 힘을 빼고 편안하게 하라”는 조언을 연거푸 받았다. 고비는 또 찾아왔다. 난주의 엄마가 전화해 푸념을 늘어놓은 후 중국 여행 경비를 은근히 요구하는 대목이었다. “너무 빠르다. 랩 하는 것 같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약사, 노파, 남편, 과일가게 주인까지…. 정 PD가 녹음한 것을 들려주자 ‘발연기’에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3시간 가까이 걸려서야 녹음이 끝났다. 성우가 하면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NG 부분을 잘라내고 효과음과 음악을 넣는 등 편집을 거쳐야 오디오북이 완성된다. 목이 따갑고 빨리 눕고만 싶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소설을 낭독하려면 ‘DJ+배우’가 돼야 하고 자기계발서나 에세이는 ‘DJ’가 돼야 한다는 것을. 가설은 무너졌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요즘처럼 어려운 때가 없었다.” 출판사 대표들의 입에서 비명처럼 터져 나오는 말이다. 출판계는 추락하고만 있는 걸까. ‘출판의 미래’(장은수·오르트) 저자는 영미권으로 눈을 돌리면 출판계가 차츰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랜덤하우스와 펭귄출판사가 합병해 탄생한 펭귄랜덤하우스처럼 출판사들은 몸집을 불려 언어, 지역에 상관없이 독자를 공략하고 있다. 컬러링북인 ‘비밀의 정원’이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일으킨 것처럼 단일 상품이 동시에 유행하는 흐름도 강화되는 추세를 보인다. 독자들이 원하는 콘텐츠를 골라주는 큐레이션을 원하는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출판 산업의 본질을 종이책이 아닌 ‘읽기’로 생각하면 전자책처럼 다양한 그릇에 콘텐츠를 담아 볼 수 있다. 변화의 소용돌이에서는 두려움이 커진다. 그러나 멀리서 비추는 희미한 불빛 하나만 있어도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책이 반가운 이유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안네는 뛰어난 소녀였습니다. 제 팬이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요.” 캐나다 팝스타 저스틴 비버가 2013년 안네 프랑크의 집을 방문한 후 방명록에 남긴 글이다. 미국 힙합스타 카녜이 웨스트는 “저는 카녜이 웨스트란 이름이 스티브 잡스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인터넷, 다운타운, 패션, 문화의 스티브죠.” 이쯤 되면 병이다 싶다. 도널드 트럼프는 트럼프 모기지, 트럼프 골프, 트럼프 대학까지, 소유한 모든 것에 자기 이름을 붙인다. 자기애의 ‘끝판왕’이다. 저자는 나르시시즘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분석한다. 나르시시스트의 마음에는 인정, 관심, 보상에 대한 마르지 않는 샘이 자리한다. 성욕도 강해 자신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자손도 많이 낳는 편이다. 무리한 합병으로 주가가 반 토막 나고 직원 3만 명을 해고하고서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은 칼리 피오리나 HP 전 최고경영자(CEO)는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다. 그는 오히려 “합병은 좋은 아이디어였고 수십억 달러나 절감했다”고 강변했다. 미디어와 인터넷,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발달하면서 정치인, 연예인, 기업인은 물론이고 일반인까지 앞다퉈 “날 좀 봐 줘요”라고 아우성치는 세상에서 나르시시즘은 이들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유효하다. 히틀러, 사담 후세인처럼 재앙을 초래한 인물의 심리에도 나르시시즘이 깔려 있다. 풍부한 사례를 읽다 보면 술자리에서 유명인의 뒷담화를 듣는 기분이다. 멋진 연기를 보여주는 숀 펜과 러셀 크로는 사진기자에게 주먹을 날리거나 호텔 직원에게 전화기를 던지는 남자들이었다! 앨릭 볼드윈은 카메라만 꺼지면 신경질을 부리기 일쑤란다. 여성 보좌관이 있어도 홀딱 벗은 채로 돌아다니고, 기자회견에서 소변을 보며 대화하는 린든 존슨 미국 전 대통령의 엽기적인 행동에는 입이 떡 벌어진다. 이 모든 게 나르시시즘 때문이란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애인이라면 헤어지는 게 좋다고 저자는 조언한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하거나 더 매력적인 상대를 발견하는 즉시 떠날 것이므로. 부하의 공을 가로채는 일에도 거리낌 없는 상사를 뒀다면 주변에 자신의 업적을 미리 알리는 게 좋다. 그래도 안 되면 회사를 옮기는 게 낫단다. 헌데 한 번 상사가 영원한 상사는 아닌 법인데 직장을 그만두는 게 옳을까 고개가 갸웃해진다. 관심에 목마른 이라면 책을 보면서 자신이 애교 수준의 나르시시스트인지, 자기 외에는 아무도 안중에 없는지, 혹은 즐거움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악’의 단계에까지 와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축에 속하는 사람은 도대체 왜들 저러고 사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해낸 일에 뿌듯해지고,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감탄하더라도 너무 놀랄 필요는 없다. 과하지만 않다면 나르시시즘은 인생을 즐기고 기쁨을 맛보게 하는 요소가 되니까. 중요한 건 절제다. 책 뒤에는 자기애 성격 검사(NPI)가 실려 있다. 원제는 ‘The Narcissist next door’.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파리 남자들이 편안함 대신 우아함을 추구하고 있다. 최근 출간된 패션저널리스트 이자벨 토마의 책 ‘유아 소 프렌치 맨!’은 지난 몇 년간 겉모습에 무심한 듯했던 파리 남자들이 타이트한 트위드 재킷을 선호하고 캐시미어나 이집트 면사로 만든 옷에 감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디자이너 옷과 중저가 브랜드의 옷을 섞어 입는 경향도 두드러진다. 이들은 또 재킷은 짧게, 바지통은 좁게 만들어 남성미를 강조한 정장을 입는다. 자주, 빨강, 초록, 노랑, 파란색 정장도 더 이상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분석이 나온다. 30대 남성들은 넥타이 대신 다양한 소재로 만든 화려한 스카프를 애용한다. 예전에는 모직이나 캐시미어로 된 회색이나 적갈색 목도리를 둘렀다. 요즘은 저지, 실크, 얇은 니트 등 부드럽고 얇은 소재를 사용해 강렬한 색상으로 염색하거나 화려한 무늬를 넣은 스카프가 사랑받고 있다. 구두코를 장식하는 것도 유행이다. 구두코에 그림을 그려 놓은 제품이 주목받고, 구두코를 반짝반짝하게 윤을 내는 건 필수가 됐다. 마지막으로 패션을 완성하는 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매너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