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 “…가만히 있으면/미쳐버릴 것 같다거나/죽고 싶다거나 죽여 버리고 싶어진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면/하지 마./네 안의 태양이/네 속을 불태우고 있는 게 아니라면/하지 마.…” 지난달 21일 저녁, 서울 마포구 희우정로의 작은 서점 ‘책방 만일’에 찰스 부코스키의 시 ‘그래 작가가 되고 싶으시다고?’가 울려 퍼졌다. 황유원 시인이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는 영어 원문도 낭독했다. ‘if∼’로 시작해 ‘don‘t do it’이 반복되며 리듬이 느껴졌다. 대학생, 회사원, 주부 등 20, 30대 남녀 16명이 모여 시와 소설을 돌아가며 소리 내 읽고 있었다. 최근 낭독 모임이 확산되고 있다. 작품을 분석하거나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단지 낭독만 하는데도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뭘까. 》○ 누워 있는 글자를 소리를 통해 세우다 독립 출판 그룹 ‘읻다 프로젝트’에서 매달 셋째 주 목요일에 여는 낭송회는 이번이 16회째로, 이번 주제는 ‘반하고 읻다’였다. 이 그룹의 명칭은 고어로 ‘좋다’, ‘아름답다’는 뜻이면서 ‘잇다’ ‘존재한다(있다)’ 등의 의미도 담은 것이다. 16명이 동그랗게 둘러앉으면 꽉 차는 공간에서 차분하게 육성으로 읊는 시를 듣고 있자니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김영승 시인의 ‘별’이 소개됐다. 러시아 작가 미하일 시시킨의 ‘서간집’과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젖은’은 우리말은 물론 러시아어, 프랑스어로도 낭송됐다. 이후 각자 준비해 온 것을 읽기 시작했다. “…비닐의 몸을 통과하는 무한한 확률들/우리는 유려해지지 말자/널 사랑해.”(이장욱 ‘근하신년-코끼리군의 엽서’) “처음 만났던 날부터 당신을 조각내었다/함께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당신을 온전히 담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곽은영 ‘불한당들의 모험10’) 그림책 ‘아무것도 아닌 것’(쇠렌 린)이나 ‘야간 비행’(생텍쥐페리)을 읽는 이도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편하게 하거나 낭독만 하고 끝내기도 했다. 기자는 일본에서 50년간 서점을 운영하는 책방지기를 인터뷰한 ‘시바타 신의 마지막 수업’의 일부를 낭송했다. 회사원 차서현 씨는 “사람의 목소리, 호흡, 떨림을 느끼며 텍스트에 따라 그려 낸 이미지에 잠길 수 있어서 좋았다. 육성으로 러시아어를 듣기는 처음인데 참 아름다웠다”며 밝게 웃었다. 주부 안혜윤 씨는 “누워 있는 글자를, 소리를 통해 일으켜 세우고 싶었다”며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문요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정제된 언어를 통해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는 행위는 내부에 꾹꾹 쌓여 있던 스트레스를 해소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 내면 성찰과 스트레스 발산 효과 낭송회를 주관한 최성웅 씨는 “자기만의 눈으로 책을 보고 문장을 느끼는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어 모임을 만들었다”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일주일 전에 공지해도 15∼20명이 모인다”고 말했다. 회사원 김경란 씨는 낭송회 참석이 다섯 번째다. 그는 “회사에서 높은 톤으로 싸우듯 말하는 소리를 듣다가 정제된 언어를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들으니 낯설면서도 편안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문학 작품을 소리 내 읽는 것이 심리적인 안정을 준다고 말한다. 김상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담긴 문학 작품을 곱씹으며 읽으면 스스로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다. 시각과 청각, 발성할 때 몸의 떨림 등 여러 감각 기관을 활용할수록 만족감이 높아지고 기억도 오래 간다”고 말했다. 읽을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은 물론이고 낭송할 때 주목을 받으며 주인공이 되는 기분도 느낄 수 있다. 이나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고 지식과 정서를 공유하면 치유되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운율과 리듬을 통해 노래를 부르는 듯한 즐거움도 맛볼 수 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열세 살 이후로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게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 소설 ‘한 명’(현대문학)의 주인공인 아흔세 살 할머니는 말한다. 그는 열세 살 때 고향 강가에서 다슬기를 따다 낯선 사내들에게 잡혀 만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많게는 하루 70명이 넘는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것이다. 소설가 김숨 씨(42)가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한 글을 묶어 최근 펴낸 이 소설은 위안부 할머니가 한 명만 생존한 상황을 배경으로, 위안부들이 겪은 모진 고통을 다큐멘터리처럼 묘사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실제 증언을 포함해 316개에 이르는 참고 자료 목록은 책 속에 묘사된 참상이 대부분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증명한다. 20만 명이 위안부로 강제 동원됐고 그 가운데 2만 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시작으로 위안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후 238명의 위안부 피해자가 공식으로 등록됐다. 현재 생존자는 40명뿐. 김 씨는 “피해를 증언할 할머니가 아무도 계시지 않는 시기가 올 것이므로 소설을 통해 경각심을 갖게 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주인공인 할머니는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평생 숨긴 채 살아왔다. 그러다 TV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위안부 생존자가 인공호흡기를 끼고 숨을 모아 쉬며 버티는 모습을 본다. 죽을 때까지 꼭꼭 숨기고 싶었지만 아직 한 명이 더 있음을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결심한다. 열세 살 소녀가 겪은 만주는 지옥 그 이상이었다. 군인들이 다녀갈 때마다 그녀는 식칼로 아래를 포 뜨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진딧물처럼’ 달려드는 군인들 때문에 몸뚱이가 하나인 것이 원망스러웠다. 얼른 늙고만 싶었다. 반항한 소녀는 발가벗겨진 채 300개의 못이 박힌 판자 위에서 굴려져 숨졌다. 손가락을 잘라 피를 빨면서 아편을 먹고 자살한 또 다른 소녀의 얼굴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선명하다. 임신을 하면 곧바로 낙태를 시키는 건 물론이고 자궁까지 들어내는 일도 다반사였다. 매독에 걸려 배꼽까지 썩어 들어간 이도 있었다. 위안부들이 겪은 지옥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과정은 참으로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적 상상력의 산물이 아닌 현실에 기반을 둔 것이기에 고개를 돌릴 수가 없다. 아니, 고개를 돌려서는 안 된다. 할머니의 유일한 소원이 가슴을 시리게 만든다. ‘신에게 소원을 빈다면 그녀는 하나만 빌 것이다. 고향 마을 강가로 자신을 데려다 달라고. 열세 살 그때로.’ 인세와 출판사 수익금 일부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나비기금’에 기부된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문학잡지는 문학을 키우는 화분 역할을 한다. 인터넷이 활성화하면서 작품을 발표할 경로가 다양해졌지만 문학잡지에 연재한 글을 묶어 책으로 펴내는 경우는 여전히 많다. 민음사에서 최근 격월간 문학잡지 ‘릿터(Littor·1만 원)’를 창간했다. ‘문학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만든 이름이란다. 40년 전통의 계간지 ‘세계의 문학’을 지난해 말 종간한 후 펴낸 것. 커버스토리로 경제 분야에서 주로 다뤘던 ‘뉴 노멀’을 조명하고, 아이돌 그룹 ‘샤이니’ 종현의 인터뷰를 싣는 등 상당히 파격적이다. 고정된 편집위원 대신 책임 편집자와 함께 사이언스북스, 황금가지, 반비 등 계열사 편집자들로 그때그때 멤버를 구성해 잡지를 만드는 구조도 독특하다. 앞으로 얼마나 실험적이고 다양한 도전을 할지 궁금해진다. 침체됐던 한국 문학이 부활하고 있다. 문학잡지의 혁신이 이 흐름에 기여하길 응원해본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히스로 공항 라운지 바에서 마주친 테드와 릴리. 테드는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며 농담처럼 “아내를 죽이고 싶다”고 말한다. 릴리의 눈빛은 진지하다. “나도 당신과 같은 생각이에요”라며. 부모의 새 애인과 전 애인이 섹스 파티를 벌이던 집에서 자란 릴리는 기르던 고양이를 괴롭히던 길고양이를 죽여 버렸고,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차례차례 죽인다. 테드의 복수극이 펼쳐질 것이란 예상이 빗나가고 반전이 펼쳐지는데…. 1만4800원.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버트런드 러셀, 윌리엄 포크너, 아서 밀러…. 쟁쟁한 작가 12명을 모아 놓은 것만으로도 일단 눈길을 끈다. 노벨 문학상 혹은 퓰리처상 수상자들이다. 20세기 미스터리 소설의 거장인 엘러리 퀸(사촌 간인 프레더릭 더네이, 맨프레드 리의 공동 필명)은 이들이 쓴 범죄·미스터리 단편 21개를 엮어 ‘미스터리 걸작(Masterpieces of Mystery)’을 펴냈다. 이 가운데 12편을 출판사가 추려냈다. 제목이나 작가의 이름을 보고 손가는 대로 펼쳤다. 개성 강한 글쟁이들의 면면만큼이나 작품의 결도 제각각이다. ‘설탕 한 스푼’(윌리엄 포크너)은 조엘 플린트라는 사내가 아내를 죽였다고 자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플린트는 감옥으로 가지만 곧 연기처럼 사라진다. 괴팍한 프리첼 영감은 딸이 죽고 사위가 사라진 후 집에 칩거한 채 챙겨주러 찾아오는 이웃들에게 성질만 낼 뿐이다. 눈치 빠른 이라면 어찌된 상황인지 알아채기 어렵지 않지만 진실이 드러나는 장치가 신선하다. 미국 최초의 여성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수전 글래스펠이 쓴 ‘여성 배심원단’은 여성의 심리를 세밀하게 포착했다. 같은 침대에서 자던 남편이 밧줄에 목이 졸려 죽은 채 발견되자 아내인 라이트 부인은 용의자로 지목돼 수감된다. 하지만 그녀가 남편을 죽였다는 단서는 물론 이유도 알 길이 없다. 검사와 마을 남성들이 2층 침실 수색에 집중하는 동안 여성들은 라이트 부인이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옷가지를 챙기려고 부엌 주변을 돌아보다 과일조림병, 허름한 검정 치마, 텅 빈 새장을 발견한다. 얼핏 사소해 보이는 물건에서 여성들은, 처녀 시절 예쁜 옷을 입고 성가대에서 노래 부르기를 즐겼던 라이트 부인이 남편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차츰 알게 된다. 그리고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버드나무 길’(싱클레어 루이스)에는 1인 2역을 하며 치밀한 계획을 세워 원하는 바를 손에 쥐지만 허망함에 빠지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다시 되돌리려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블랙 코미디 같은 상황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의 심리를 파헤친다. ‘사인 심문’(마크 코널리)과 ‘기밀 고객’(제임스 굴드 커즌스)은 마지막에 깜짝 반전을 선사한다. ‘헤밍웨이 죽이기’(매킨레이 캔터)는 제목 때문에 내용이 정말 궁금했다. 갱단 두목과 경찰의 추격전을 그렸는데, 두목 이름이 체스터 헤밍웨이다. 아, 낚인 기분이다. 1934년에 출간했다는데 그 시절에도 ‘낚시’란 게 있었던 걸까. 아니면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대한 일종의 비틀기였을까. 한층 빠르고, 더 복잡하고 치밀하게 전개되는 요즘 범죄 소설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다소 예스러운 느낌을 줄 것 같다. 여유롭게 흘러가는 흑백 영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물론 흑백 영화도 나름의 멋이 있는 법. 범죄·미스터리물을 전문적으로 쓰지 않았던 유명 작가들이 이런 작품에 도전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다. 다만, 몇몇 단편은 읽다 보면 세계적인 작가라 해도 모든 작품을 다 잘 쓰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진리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이웃집 할망구가/가방 들고 학교 간다고 놀린다/지는 이름도 못 쓰면서/나는 이름도 쓸 줄 알고/버스도 안 물어보고 탄다/이 기분 니는 모르제.’ 평생 까막눈으로 살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한글을 깨친 할머니가 쓴 시 ‘내 기분’이다. 저자가 만난 할머니는 또박또박 반듯하게 쓴 국어 공책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평생 자식 위해 살다가 이제야 세상을 읽을 수 있게 된 할머니들에게 저자는 진심으로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일상에서 만난 작은 행복, 소중한 깨달음, 감사한 마음이 잔잔하게 담긴 이 책은 2013년부터 올해 6월까지 3년 반 동안 매주 본보에 같은 제목으로 연재한 181편 가운데 60편을 골라 엮었다. 동기들보다 30여 년 늦게 결혼한 여고 동창에게 친구들이 건넨 덕담 한마디. “딱 좋은 나이야. 너는 진짜 결혼 적령기에 결혼한 거야.” 다들 까르르 웃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다면 더 지혜롭게 살았을 것이라 아쉬워했지만 이제 그렇지 않단다. 늦은 나이란 없음을, 누구나 자신의 장단에 춤출 때가 가장 돋보인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택배로 물건을 받은 후 칭칭 동여맨 매듭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싹둑 매듭을 잘라내듯 무엇이든 단칼에 베어내지 못했던, 돌아가신 속 좋은 엄마를 떠올린다. 인생에서도 차근차근 풀다보면 풀리지 않는 매듭은 없으리라 믿어본다. 목련 나무 아래서 꽃을 기다리듯 마음에 담을 향기로운 사람을 기다리는 소녀 같은 모습도 있다. 삶에 대한 성찰을 쉬운 언어로 담백하게 풀어냈다. 위로와 휴식이 필요한 이에게 포근한 선물처럼 다가온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친구, 아무튼 지치면 안 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고 말 테니까.” 운명적으로 신학자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한스를 위해 신학교 교장이 충고했던 이 부분을 반복해서 읽었다. 나에게 수레바퀴란 어떤 것일까. 지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예술가의 삶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헤르만 헤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다. 자신의 삶을 재구성한 ‘수레바퀴 아래서’는 20대 후반에 쓴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자서전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신학교에서 7개월 만에 뛰쳐나와 변변치 못한 삶을 이어가던 헤세는 주인공 하일너와 한스에 자신을 투영시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슈바벤 지역 북서쪽의 낡고 아담한 수도원. 차석으로 입학한 한스는 내성적이고 섬세한 성격에서 벗어나 조금씩 신학교에 적응해갔지만 같은 방을 쓰던 힌딩거의 죽음을 비롯해 가장 친했던 하일너와의 감정싸움과 그의 퇴학 처분은 한스가 이고 가던 수레바퀴에 무게를 더한다.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의 손을 잡고 러시아에 처음 도착했던 날, 나의 운명도 수레바퀴 아래로 내던져졌다. 20여 년 동안 발레리나로 살아오면서 나 역시 수도 없이 하일너를 만나고 힌딩거의 죽음을 경험했던 것 같다. 지인이 불나방과 같다고 표현했던 발레리나의 삶을 걸어가면서 물에 빠져 쓸쓸히 생을 마감했던 한스가 생각나 정처 없는 슬럼프에 허덕였던 적도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뿐만 아니라 오늘의 나에게도 한스는 다가와 수레바퀴 아래의 삶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시인이자 소설가로 평생을 살아간 헤세는 어떤 통찰을 갖고 예술에 대해 정의했을까. “나는 곧잘 예술은 모두 대가(代價)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한다. 실패한 인생의, 발산하지 못한 수성의, 순조롭지 못한 연애의, 몹시 힘들고 실제 가치의 열 배나 높은 보상을 치른 대가라고 말이다.” 그렇다. 예술가의 삶은 고단하다. 끊임없는 내면의 전쟁, 표현의 고통은 발레리나의 수레바퀴다. 하지만 치열한 과정을 견뎌낼수록 정신세계는 빛나고 비로소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예술가로서의 삶이 고달파도 이 아이러니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기꺼이 무대에 오른다. 덕분에 수레바퀴가 조금 더 가볍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더 젊었을 때,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가 아닌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이 조금 억울하지만 뭐 어떤가. 헤세 역시 칠순 가까이 되어서야 노벨문학상을 받았는걸. 이제는 조금 덜 무거운 수레바퀴를 짊어지게 되었으니 더 멀리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의 기나긴 여정을 위해 오늘도 작은 발끝에 의존해 견뎌야 하는 연약한 예술이여!김주원 발레리나·성신여대 교수}

책장을 스르르 넘기면 화사한 색채와 경쾌한 터치로 가득한 그림이 사이사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 한참을 바라보게 된다. 마음이 편안하고 따스해진다. 그림을 그린 소녀는 올해 일곱 살인 아이리스 그레이스. 아이 엄마인 저자는 말타기를 좋아하고 멕시코, 베네수엘라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모험을 즐기는 영국 여성이었다. 집안의 첫 손주로 태어난 아이리스는 잘 자지 않았다. “다다”, “마마” 외에는 말하지 않고 같은 그네만 타길 고집하는 딸을 보며 엄마의 불안은 커져 갔다. 지난한 기다림 끝에 받은 검사 결과는 두 살인 아이가 자폐라는 것. 원인과 완치 가능성에 대해 거의 알려진 게 없는 질환이었다. 엄마는 “자폐는 밤도둑처럼 찾아와 소중한 뭔가를 훔쳐 달아났다”며 절규했다. 선진국인 영국에서는 자폐아에 대한 지원 체계가 비교적 잘돼 있을 것이라 여긴 기자의 예상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빗나갔다. 아픈 아이를 키우는 일은 상대적일 순 있어도 어느 나라에서도 결코 쉽지 않다는, 잔인한 현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사설 유아원은 ‘자폐’라는 말만 들어도 대기자 명단을 닫아버렸고, 특수 보육원은 집에서 너무 멀었다. 유아원에서 다른 아이가 갖고 노는 기차장난감 소리에 자지러지는 아이리스를 안고 울면서 뛰쳐나와야 했다. 저자의 솔직한 서술은 자폐아를 키우는 일상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게 만든다. 잠자고 말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보통의 아이가 자연스럽게 해나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아이리스에게는 높은 장벽을 넘는 것과 같았다. 신발을 신기는 데도 반나절이 걸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답 없는 질문을 끝없이 하며 지쳐 간다. 하지만 ‘비교는 부질없다.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마음을 다잡는 모습을 보며 강인함의 근원은 사랑임을 깨닫게 된다. 웨딩 사진가인 저자는 일과 육아를 함께하며 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연구했다. 자연과 음악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자기만의 교육 방식을 만들어 나갔다. 피아노를 들여놓고 전문가를 불러 언어교육, 음악치료를 하며 집에서 딸을 가르치고 정원과 숲속에서 마음껏 놀게 했다. 새끼 고양이 툴라와의 만남은 구원과도 같았다. 툴라는 아이리스와 함께 자고 눈을 맞췄다. 목욕시킬 때마다 할퀴며 달려드는 딸과 전쟁을 벌였지만 신기하게도 욕조 속으로 들어오는 툴라 덕분에 목욕도 수월해졌다. 딸의 미소 한 번에, 아빠를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이는 손짓 하나에서 희망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자폐아는 무언가에 매혹되면 완전히 빠져들어 상상력을 발휘한다. 크레파스와 물감, 붓은 아이리스의 재능을 폭발적으로 끌어냈다. 어마어마한 집중력으로 다채로운 색상을 사용해 예사롭지 않은 터치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 그림은 많은 이들에게 기쁨과 위로를 선사했다. 아이리스가 자기만의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쓰다듬어 준 것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세상으로 걸어 나온다. 마침내 지난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외삼촌의 결혼식에 참석하며 생애 첫 해외여행에 성공한다. 저자는 말한다. 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다고. 자폐를 가진 한 아이와 엄마의 성장일기이자 다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책이다. 지금도 딸의 손을 잡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저자의 한마디가 귓가에 맴돈다. “장애가 아닌 가능성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원제는 ‘Iris Grace’.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2050년의 세상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모르는 걸 인정하고 어떻게 하면 늘 변화하며 살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게 중요하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의 말이다. 세상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까. 미국 혁신 전문가가 쓴 ‘알렉 로스의 미래산업보고서’(알렉 로스 지음·안기순 옮김·사회평론)는 로봇공학, 사물인터넷, 데이터 분석을 유망 산업으로 꼽는다. 저자는 버락 오바마 대선 캠프에서 일했고 힐러리 클린턴이 국무장관 시절 혁신 담당 수석 자문관으로 영입됐다. 한국의 학부모에게는 이렇게 당부한다. 자녀에게 외국어뿐 아니라 기술·프로그래밍·과학 언어를 가르치고 평생 배워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 주라고. 미래에는 지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변화에 적응하는 사람이 살아남기 때문이란다. 이래저래 살기 힘든 세상이 오는 건 분명한 것 같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아, 서울대학교’라는 책이 있었다. 서울대 합격 수기집으로, 1990년대 중고교생들 사이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모의고사 후 OX 노트를 어떻게 정리했는지, 하루 4시간 이상 자지 않고 일과를 짰던 방식 등 세세한 공부법을 담은 책을 돌려가면서 읽었다. 서울대에 갈 수 있는 성적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았다. 욕망을 대놓고 자극한 고색창연한(?) 제목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아이도 있었다. 서울대에만 합격하면 인생의 비단길이 펼쳐질 거라는 굳건한 믿음이 팽배했던 분위기였기에. 막노동을 하며 공부해 서울대 법학과에 수석입학한 장승수 씨(현 변호사)가 쓴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는 전국을 강타했다. 그토록 어려운 환경에서도 서울대, 그것도 법대를 갈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 그의 삶에 독자들은 열광했다. 섹시한 제목은 ‘○○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각종 패러디를 낳았다. 홍정욱 전 국회의원(현 헤럴드 회장)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하버드대에서 공부한 과정을 담은 ‘7막 7장’은 국내 명문대에 쏠려 있던 시선이 해외 명문대로 옮겨가고 있던 당시 변화상을 반영했다. 인생의 여러 단계가 한참 남았다는 의미에서 문장마다 마침표 없이 쓴 이 책은 아이비리그를 꿈꾸게 만들었다. 입시제도는 갈수록 복잡해졌다. 고학력의 학부모조차 대입 전형표를 해석해 내지 못했다. 2000년대 들어 화제를 모은 ‘사교육 1번지 대치동 엄마들의 입시전략’은 아이를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서는 정보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엄마의 정보력, 할아버지의 재력, 아빠의 무관심’이 명문대 합격에 필수적인 3요소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던 때였다. 요즘에는 아주 ‘핫한’ 입시 전략책이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어려운 환경이나 부진한 성적을 딛고 명문대에 합격한 저자들이 쓴 ‘이토록 공부가 재미있어지는 순간’ ‘미쳐야 공부다’ 등이 주목받고 있지만 모두가 알 만할 정도는 아닌 듯하다. 왜일까. 대학 서열화를 비판하며 활동했던 시민단체인 ‘학벌 없는 사회’가 올해 3월 자진해산한 건 학벌의 위상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단체는 학벌보다는 자본의 힘이 훨씬 강력해졌다며 해산 이유를 설명했다. 명문대에 가려면 자본이 필요하고, 자본 없이 학벌만으로는 안정된 삶을 보장받기 힘든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나와도 흙수저는 영원히 흙수저’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머니를 탈탈 털어 아이의 사교육에 쏟아붓는 부모가 적지 않다. “명문대 나와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걸 알아. 그래도 안정적으로 살 확률이 조금은 높아지지 않을까?” 초등학생 자녀를 둔 친구의 말이다. 반면 사교육 시킬 돈을 모아 아이가 컸을 때 가게를 사는 데 보태주는 게 더 낫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부모도 봤다. 점점 작아지는 명문대 졸업장의 힘은 세월의 흔적이 쌓인 책장 속에서 그렇게 확인할 수 있었다. 손효림 문화부 기자 aryssong@donga.com}

흥행 보증수표로 통하는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에 대한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지난해 말 국내 출판사들은 하루키의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판권을 따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선인세(인세 중 계약금 성격으로 미리 지급하는 금액)가 수억 원으로 치솟았고, 출판계에서는 5억 원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최종 승자는 현대문학 출판사였다. 올해 4월 ‘직업…’이 출간된 후 현재까지 판매된 물량은 5만여 권. 선인세를 회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현대문학 측은 “생각보다 판매가 안 돼 추가 인쇄를 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루키가 작가가 된 계기와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이 책은 평단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폭발적인 판매로는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반면 지난달 출간된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문학동네)는 빠르게 판매돼 추가 인쇄를 했고 현재까지 5만 권을 제작했다. 문학동네는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돼 누적 판매 부수가 10만 권은 넘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선인세는 충분히 거둬들일 수 있다는 것. 출판계에서는 발랄한 하루키의 문체에 익숙한 독자들이 진지하고 묵직하게 느껴지는 ‘직업…’ 대신 경쾌하고 편하게 읽히는 ‘라오스…’를 선택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독자 반응이 예상과 다른 책은 적지 않다. ‘앵무새 죽이기’로 유명한 하퍼 리가 쓴 소설 ‘파수꾼’(열린책들)은 뜨거운 관심 속에 지난해 7월 출간됐다. 대대적인 마케팅을 벌이며 10만 권을 찍었지만 판매량은 7만 권을 채 넘기지 못했다. 3만여 권은 고스란히 재고로 남았다. 이에 비해 2013년 낸 스웨덴 소설가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열린책들)은 누적 판매량이 60만 권에 이른다. 지금도 매달 3000권 이상 나간다. 김영준 열린책들 주간은 “북유럽 소설은 생소해서 선인세로 1000만 원 조금 넘게 줬는데 반응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역시 스웨덴 작가인 프레드릭 배크만의 ‘오베라는 남자’(다산책방)도 5만 권 정도 팔릴 것으로 전망했지만 지난해 5월 출간된 후 현재까지 30만 권이 나갔다.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가 쓴 ‘만들어진 신’(김영사·2007년 출간)도 기대를 뛰어넘었다. 김윤경 김영사 편집주간은 “3만 권 정도 팔리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충돌 등 종교를 둘러싼 갈등이 커지면서 모두 18만 권이 나갔다”고 말했다. 지금도 매달 500권씩 판매되고 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이야기와 짜임새, 문체가 중요한 소설은 독자의 반응을 예측하기 어려운 반면 인문과학, 경제·경영서 등은 독자층이 정해져 있어 비교적 예상에 부합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영화 ‘인천상륙작전’ 개봉(27일)에 맞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1880∼1964)의 일대기를 다룬 평전 ‘맥아더’(미래사)가 재출간됐다. 두 권짜리 양장본인 ‘맥아더’는 2007년 같은 출판사에서 원제 그대로 ‘아메리칸 시저: 맥아더 평전’으로 냈다. 당시에는 3000권이 판매됐다. 재출간한 책은 제목과 표지 디자인을 더 단순화시켰다. ‘맥아더1’은 6·25전쟁 발발일에 맞춰 지난달 25일 출간했고, ‘맥아더2’는 이번에 냈다. 영화 개봉과 리엄 니슨의 출연에 따른 언론 보도로 독자들이 2007년에 비해 좀 더 빠르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 출판사의 설명이다. 고영래 미래사 대표는 “교보문고에 ‘맥아더1’을 100권 입고한 후 재주문이 들어와 80권을 추가로 넣었다”며 “한 달 동안 ‘맥아더1’을 여러 서점에 1500권 배포했는데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고 말했다. ‘맥아더’는 고상하면서도 비열하고, 오만하면서도 수줍음을 타는 맥아더의 양면성을 있는 그대로 조명했다. 1권에는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맥아더의 성장기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승리한 내용이 담겼다. 2권에서는 6·25전쟁에 참전해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과정을 다뤘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김웅진 전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게놈연구소장(59)이 한국에서는 자신의 책을 팔면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북한을 찬양하는 글을 올려 논란이 되고 있다. 미국 시민권자로 지난해 현직에서 물러나 캘리포니아 주에서 개인적인 연구 활동을 하고 있는 김 전 소장은 2000년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미국립보건원(NIH)의 휴먼게놈프로젝트(HGP)에 참여해 유명해졌다. 서울대 출신의 유명 생물학자인 그가 지난해 1월 출간한 저서 ‘생물학 이야기’는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인증한 우수과학도서에 선정됐다. 이 책은 올해 초까지도 저명인사들이 직접 추천한 도서로 언론에 소개돼 서점에서 잘 팔리고 있다. 하지만 김 전 소장은 2014년부터 페이스북에 “김일성은 정말 대단한 리더다. 아무도 그를 대체할 수 없다. 북한의 권력 계승은 효율성과 국가 보전을 위한 일이다. 북한은 최고의 체제”라며 북한을 찬양하고 나섰다. 또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내용을 그대로 복사해 공유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세기와 더불어 8권 전부 구글에 있습니다. 필독서. 완독하지 않은 무지한 자와는 대화가 불가능”이라는 글을 올렸다. 11일 올린 “한쪽(북한)에서는 어찌해서라도 외세가 갈라놓은 조국을 다시 하나로 통일시키려고 무진 애를 쓰는데 다른 한쪽은…제 동족을 물어뜯고 해코지하고 짖어대며 통일을 막으려고 발광한다”고 썼다. 김 전 소장의 이런 이중적인 행태에 미래부는 올해 그의 책에 대한 우수과학도서 선정을 취소했다. 일부에서는 “한국에서 책을 팔아 영리활동을 하는 사람이 북한을 공개적으로 찬양하는 게 말이 안 된다. 그의 정체성이 의심된다”는 비판이 나온다. 북한 찬양 세력들은 김 전 소장이 올린 글에 ‘좋아요’를 누르며 활발히 댓글을 달고 있다. 이 중에는 간첩단 ‘일심회’ 총책으로 7년 징역 후 2013년 국내에서 추방된 장민호 (미국명 마이클 장·54) 씨도 포함됐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전 국회의원 등 국내 인사들과도 페북 친구로 교류하고 있다. 이들은 페이스북의 ‘DPRK(북한) 스터디 그룹’ ‘우리는 하나’ 등 친북한 그룹에 가입해 노동신문과 북한 관련 기사를 올리며 활동 중이다. 문제는 이렇게 공개적으로 북한 체제를 찬양해도 해외에 서버를 둔 SNS에서 활동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개적인 글이지만 해외 서버에 저장됐다면 해당 기관에 공조를 요청해야 해 수사에 어려움이 있어 통제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전주영 aimhigh@donga.com·손효림 기자}
“잘 운영해 최대한 버텨 보려고요.” ‘고양이책방’ ‘음악책방’ 등 특색 있는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이들이 한 말이다. 운영비만 건지면 계속 문을 열겠다는 그들이 대단해 보였다. 한편으로는 ‘인건비까지 확보돼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지속 가능하니까. ‘시바타 신의 마지막 수업’(이시바시 다케후미 지음·정영희 옮김·남해의 봄날)은 도쿄의 유서 깊은 책거리 진보초(神保町)에서 50년간 인문 서점을 운영한 시바타 신 씨(86)를 인터뷰한 책이다. 매일 서점으로 출근하는 그는 ‘진보초 북 페스티벌’을 지휘하고 역시 고령이 된 2세 서점 경영인들을 독려한다. 그가 말하는 양서란 ‘세상에 해야 할 말을 제대로 된 문장으로 표현하고 편집한 책’이다. 그러면 사는 손님이 반드시 있단다. 양서가 있고, 이를 알아보는 이들로 북적대는 한국의 서점들을 상상해 본다. 마음이 풍성해진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여름휴가 피크인 ‘7말 8초(7월 말 8월 초)’가 다가왔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숨을 고를 때, 곁에 책을 둔다면 좀 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책의 향기팀’ 기자 4명이 휴가철에 권하고 싶은 책을 4권씩 골라 이야기를 나눴다.》○ 더위 피해 이야기 속으로 ▽김지영=추천 16권 중에서 소설이 7권이네. 역시 휴가철에는 소설이야. ▽손효림=책 고르는 게 만만치 않더라. 성별, 직장인, 전업주부 등 대상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도 고민되고. ▽김배중=완전 동감. 책장을 바라보며 머리를 감싸 안고 한참을 서 있었다니까. ▽조종엽=‘고래’(천명관)는 자신 있게 추천해! 파리 출장 가는 비행기에서 읽었는데 10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어. 어른에게 들려주는 옛 이야기 같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향연이어서 다 읽고 나면 꿈을 꾼 느낌이야. ▽지영=문학동네소설상을 받은 작품 중에 제대로 ‘터진’ 책 중 하나지. ▽종엽=‘왕좌의 게임’(조지 R R 마틴)은 말이 필요 없어. 중세를 배경으로 한 역사 판타지야. “겨울이 오고 있어!”. 휴가 끝도 곧 오겠지. ▽배중=윽, 갑자기 슬퍼지려고 한다.(웃음) ▽효림=멀리 놀러가지 않고 시원한 데서 책만 읽어도 좋잖아. ‘인페르노’(댄 브라운)는 단테의 ‘신곡’을 주제로 한, 전형적인 댄 브라운 스타일의 작품이야. 대표작 ‘다빈치 코드’처럼. 실제 휴가 때 시원한 카페에서 읽었는데 이탈리아와 터키를 여행하는 기분이 들더라. 역사 문화 과학 지식이 총출동해서 지적으로도 뭔가 풍요로워진 듯하고. ▽지영=‘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폴 오스터)는 담배 가게 주인이 물건을 훔쳐간 소년의 지갑에서 주소를 발견하고 돌려주려고 집으로 찾아가. 그곳에서 손자를 기다리는 눈먼 할머니를 만나자 손자 역할을 대신하지. ▽효림=한강 작가를 더 알고 싶다면 ‘내 여자의 열매’를 보면 좋을 것 같아. 여기선 아내가 진짜 식물이 돼. ‘채식주의자’의 프리퀄을 보는 기분이랄까. ▽지영=맞아. 난 참 독특하고 좋았어. ‘보건교사 안은영’(정세랑)은 사립고의 보건교사 겸 퇴마사인 교사가 학교의 귀신을 잡아내는 내용인데 진짜 웃겨. ▽배중=싸우자 귀신아! ‘마크 트웨인의 미스터리한 이방인’(마크 트웨인)은 ‘사탄’이라는 이름의 천사가 사람을 만들었다 죽여 버리는 모순을 보여줘. 하지만 다른 이를 착취하고 괴롭히는 존재는 결국 인간뿐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 ○ 묵직하게 혹은 부담 없이 ▽종엽=‘중력파: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선물’(오정근)은 상사에게 깨지고 작은 일로 지지고 볶는 일상에서 광대하게 탈출하자는 의미로 골랐어. 우주로 시야를 확대하면 이런 일은 진짜 별거 아니잖아. 보고 들을 수 없을 뿐이지 중력파가 우리 몸을 일렁이며 지나가고 있는 걸 상상해 봐. ▽효림=오, 표현이 완전 문학적이야. ‘잉카 최후의 날’(킴 매쿼리)은 잉카 멸망 과정을 상세하고 드라마틱하게 썼어. 잉카가 단시간에 제국으로 성장하면서 복종하지 않은 다른 부족을 잔인하게 다뤘는데, 그 부족들이 잉카를 공격하는 스페인 군대를 도와 길잡이도 하고 식량도 댔다고 해. 대규모 전투 장면도 웅장하게 펼쳐지고. ▽종엽=호기심이 확 생기는 걸. ▽효림=‘한 말씀만 하소서’는 박완서 씨가 외아들을 잃고 쓴 일기를 엮은 에세이야. 힘들 때 여러 번 읽었어. ‘왜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라는 절규에 ‘왜 너여서는 안 되는가’라는 걸 깨닫지. ▽지영=생전의 박 씨는 진짜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일도 잘하고 자녀도 잘 키우려 온 힘을 다하셨지. 사람들은 잘못한 게 없으면 험한 일을 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잖아. ▽배중=맞아. 현실은 그렇지 않지. ‘자유론’(존 스튜어트 밀)을 고른 건 휴가 때 마음먹고 고전읽기에 도전하는 이에게 잘 맞다고 생각해서야. 두껍지 않고 판형도 작아서 그리 부담스럽진 않아. 남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누리는 게 자유라는 걸 말하고 싶어. ▽종엽=아, 너무 무거워. 난 휴가 때 다 풀어헤치고 쉬고 싶어. ▽효림=‘중력파…’ 추천한 사람이 그런 말하면 좀 이율배반적인 거 아냐?(웃음) ▽종엽=‘중력파…’는 술술 읽히게 쉽게 썼어. 진짜야. ▽배중=‘조선의 엔터테이너’(정명섭)는 기생, 음담패설의 대가, 못생겨서 유명했던 광대 등의 이야기인데, 짧은 에피소드로 돼 있어 물가에서 수박 먹으면서 읽다가 덮다가 하기 좋아. ▽지영=휴가 때 더 바쁜 엄마 아빠들에게 추천하는 건 시집이야.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마종기)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어. 시어도 어렵지 않고. ▽종엽=경남 통영 뒷골목에서 혼자 술 먹으면서 읽으면 좋겠다. ▽배중=결혼하고 아이 생기면 휴가 때 묵직한 책은 읽기 어렵겠지? ▽종엽=(끄덕끄덕) ‘자유론’이 제일 신선했어. 엄지 척! 그런데 정말 휴가 때 이걸 읽고 싶니?정리=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고양이 구슬’이라는 제목의 일본 사진집을 펼치자 온통 ‘땅콩’(수컷 고양이 고환을 가리키는 은어)들이 가득했다. 갈색, 검은색, 흰색 등 다양한 색깔의 털로 뒤덮인 하트 모양의 ‘땅콩’이 여러 각도에서 찍혀 있었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길에 6월 문을 연 고양이책방 ‘슈뢰딩거’에서 인기 있는 책이다. 17일 찾은 18m²(약 5.5평) 규모의 이 책방은 엽서, 스티커, 열쇠고리, 펜, 메모지 등 고양이와 관련된 것들로 가득했다. 음악책방, 문학책방 등이 최근 속속 문을 열고 있다. 그림책방, 여행책방, 술 파는 책방 등이 몇 년 사이 서울 마포구 홍익대 입구를 중심으로 생긴 데 이어, 보다 세분화된 주제의 책을 다루는 작은 서점들이 눈길을 끈다. ○ ‘고양이 덕후’의 사랑방 슈뢰딩거를 연 김미정 씨(31·여)는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운다. 출판계에서 일한 적도 없지만 그저 고양이와 책이 좋아서 저지른 일이란다. 회사원인 남편의 응원도 컸다. “몰라서 용감한 거예요. 고양이는 도도한 줄만 알았는데 애교도 많고 ‘허당’ 짓도 잘해요. 반전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어요.” 슈뢰딩거는 밀폐된 상자 속에 독극물과 함께 있는 고양이의 생존 여부를 이용해 양자역학의 원리를 설명하는 이론을 제시한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다. 고양이 발바닥만 찍은 사진집, 혀를 내민 고양이만 담은 사진집을 비롯해 무라카미 하루키가 고양이에 대한 추억을 쓴 그림책 ‘후와 후와’도 반응이 좋다. 책장을 빨리 넘기면 고양이가 마중 나오는 모습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플립 북(flip book)과 계란을 고양이 얼굴 모양으로 프라이할 수 있는 에그몰드도 있다. 고객은 남성이 30%나 된다. “고양이 얘기를 원 없이 나눌 수 있어 참 재미있어요. 완전 ‘덕업일치’(좋아하는 일과 직업이 같음)죠.”(웃음) 지난달엔 할머니와 길고양이의 동거 생활을 담은 에세이 ‘무심한 듯 다정한’(정서윤 지음) 출간을 기념해 사진전을 열었다. 고양이 드로잉 전시회도 열 예정이다. “1년간 적자 볼 각오를 하고 있어요. 최대한 오래 버티는 게 목표예요. 책방이 고양이를 사랑하는 이들의 플랫폼이 됐으면 좋겠어요.” ○ 음악, 문학… 취향 따라 오세요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에 5월 문을 연 ‘라이너 노트’는 음악책을 전문적으로 판다. 이름은 음악 해설문을 뜻한다. 음반공연기획사인 ‘페이지터너’가 만든 책방이다. 박미리새 페이지터너 이사는 “음악가의 이야기와 작품을 책과 콘서트, 강의를 통해 직접 소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트럼펫 연주가 마일스 데이비스의 탄생 90주년을 맞아 4차례 연주회를 열었고, 재즈 평론가 황덕호, 김현준 씨가 강연도 했다. ‘슈만, 내면의 풍경’(미셸 슈나이더 지음), ‘쇼팽 노트’(앙드레 지드 지음) 등이 많이 판매됐다. 벌써 임차료와 운영비를 벌 정도다. 소설책과 시집을 파는 ‘검은책방 흰책방’은 소설가 김종호 씨(46)가 16일 조선대 정문 앞인 광주 동구 백서로에 낸 서점. 커피와 그가 직접 만든 목공예 소품도 판다. 직장을 다니는 김 씨는 아내와 함께 서점을 운영한다. 김 씨는 “서울에서 4년 전 내려왔는데 문화 공간이 많지 않아 갈증이 컸다”며 “낭독회도 열고, 세미나 공간도 제공해 운영비가 나오는 한 계속 유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당신, 숙제 다 끝냈어요?” 이영우 학교법인 이화학원 이사장(79)은 매주 주말이 다가오면 아내 김승애 씨(74)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이 이사장의 ‘숙제’는 미국, 홍콩에 사는 손주 5명에게 동서양의 격언과 그에 대한 생각을 영어로 정리해 e메일로 보내는 것. 20년 넘게 해외 근무를 해서 영어는 익숙했다. 그는 한국수출보험공사(현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을 지냈고, 현재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이사도 맡고 있다. 그는 2011년 10월부터 시작해 4년 반 동안 매주 보낸 격언을 엮어 최근 ‘할아버지의 선물’(호미)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한국어판과 영문판 두 가지다. 미국에서 휴가 중인 그는 17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더 많은 아이에게 삶의 지혜를 들려주면 좋겠다는 아내의 권유로 책을 내게 됐다”고 말했다. 삼남매를 둔 그는 멀리 있는 손주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눌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10년 큰아들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충격으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하지만 손주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슬픔에 사로잡혀 있게 둘 수만은 없었어요. 멀리 떨어져 살지만 우리가 한 울타리 안에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줘야겠다고 결심했죠.” 마음을 다잡고 시작한 일이 격언과 그에 대한 설명, 당부를 적은 메일을 매주 보내는 것이었다. 인터넷과 책을 뒤져 자료를 찾을 때면 가슴이 설렜다. 여행이나 출장을 갈 때도 숙제는 빠뜨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할아버지의 메일에 환호했다. 꼬박꼬박 답장도 보냈다. 한 번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격언을 보내자 당시 일곱 살이던 손녀 카이아(11)가 진지하게 물었다. ‘할아버지, 우리 옆집 가족이 어제 이사 갔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 그는 폭소를 터뜨리며 차근차근 설명하는 내용의 메일을 다시 보냈다. 첫째 손자 태희(16)는 “할아버지는 마술사 같아요. 게으름 피우고 싶을 때면 어떻게 아시고는 ‘고통 없이 얻는 것은 없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는 말씀을 보내세요”라고 말했다. 아이들과 한층 가까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 태희 군의 말에 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자주 업어주셨죠. 연세가 드신 지금, 몸으로는 업어주실 수 없지만 좋은 말씀으로 저를 계속 업어주고 계세요.” 그는 요즘도 메일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아이들이 대학에 가고 결혼도 해야 하잖아요. 성장 과정에 맞춰 필요한 이야기를 해 줄 거예요.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요. 아이들이 기다리니까요.”(웃음)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바쁘게 살지 않으면 불안한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가슴을 짓누르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힘’(울리히 슈나벨 지음·김희상 옮김·가나출판사)은 그러면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한다. 몸과 마음을 쉬게 해야 창의성도 생기고 업무도 더 잘할 수 있다는,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을 과학적 근거를 들어 조목조목 설명한다. 존 레넌, 존 케이지 등 ‘위대한 게으름뱅이들’도 소개한다. 독일의 여성 영화감독 도리스 되리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해골이 된 자신을 상상하며 지금 하는 일을 어떻게 보느냐고 죽은 자신에게 묻는다. 대부분은 우스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돼 영혼의 평안을 지킬 수 있단다. 한데 책 뒤에는 핵심 내용이 요약돼 있다. 바쁜 이들이 후딱 읽을 수 있게 한 거란다. 휴식을 강조한 책인데 말이다! 아이러니한 세상의 축소판 같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금발머리가 빛나 ‘햇살’이라 부른 아들이었다. 부모는 텔레비전 시청과 설탕이 많이 든 시리얼 섭취를 제한했고 책을 읽어 주고 기도하며 아이를 재웠다. 종이접기를 잘하던 아이는 수줍음을 조금 탔지만 예의 바르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1999년 4월 미국 콜럼바인고교에서 총기를 난사하고 폭탄을 터뜨려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을 살해하고 24명을 다치게 한 두 남학생 중 딜런 클리볼드가 바로 ‘햇살’이다. 이 학교 졸업반이던 두 학생은 사건 현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딜런의 어머니인 저자는 화목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둘째 아들이 ‘괴물’이 된 과정을 16년간 찾아다녔다. 딜런을 키운 18년도 되짚어 보고 또 되짚었다. 마음을 사정없이 베어 버리는 칼날 같은 퍼즐 조각을 맞추는 일이었지만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알아야만 했다. 저자가 마주한 건 완전히 낯선 아들이었다. 천연 항우울제를 복용했고 술도 마셨다. 딜런의 일기장에는 죽기 2년 전부터 우울감과 자살 충동에 대해 적혀 있었다. 학교에서는 호모라고 놀림 받았고, 때때로 맞았다. “좋은 부모라면 아이들이 어떤 상황인지 알죠.” 저자가 너무나 많이 들었던 힐책이다. 누가 봐도 그는 ‘좋은 부모’였다. 아이가 우울함을 언뜻언뜻 내비쳤지만 해석해 내지 못했을 뿐이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고통을 철저히 감춘다는 사실을 전문가에게 뒤늦게 확인했다. 똑똑할수록 더 치밀하단다. 딜런은 친구들에게는 사건의 단서를 일부 흘렸다. 권총을 사려 한 사실도 친구는 알았다. 사이코패스 성향을 지닌 에릭과 어울리면서 딜런은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축구 경기에 졌다는 이유로 딜런에게 달려들어 미친 듯이 화낸 에릭을 봤지만 저자와 남편은 참았다. “두 아이를 무자비하게 갈라놓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라며 아이의 친구 관계에 세밀하게 주목하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에릭만을 탓하진 않는다. 에릭은 다른 아이들도 총기 난사 계획에 끌어들였지만 그 아이들은 거부했다. 반면 딜런은 끌려 들어갔다고 담담히 기술한 대목에서는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딜런이 죽기 위해 학교로 향했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죽였음을 알게 된 저자는 자살 유족 모임에 참여한다. 그리고 고백한다. “뇌의 건강을 잘 살피고 건사하는 방법을 몰랐다. 내 삶에서 가장 크게 후회하는 것은 딜런에게 그걸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가 자살 예방 활동에 나선 건 ‘스쿨버스에 탄 아이들을 테러로부터 구하기 위해 내 목숨을 대신 내주는 것 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족 혹은 친구는 전혀 모르는 가운데 한 아이가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타인이나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서는 안 된다. 비극이 벌어진 뒤 ‘그때 그랬다면’을 수만 번 되뇌어도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괴물이 된 아들마저 받아들인 저자의 깨달음에 많은 이가 귀 기울이기를 소망한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위기에 처하기 전에 도울 수 있다면 세상이 더 안전한 곳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원제는 ‘A mother‘s reckoning: Living in the Aftermath of Tragedy’.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딸이 태어나니 지금까지 강조했던 인문학 교육법대로 키울 수 있을지 걱정되더라고요. 두려워하니까 안심은 돼요. 지키기 위해 그만큼 애쓸 거니까요.” ‘인문학 전도사’로 불리는 이지성 작가(42)는 지난해 11월 태어난 딸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입꼬리가 한없이 올라갔다. 최근 ‘내 아이를 위한 인문학 교육법’(차이정원)을 낸 그를 경기 파주시 자택 인근의 작은 북카페에서 12일 만났다. 그는 딸을 자연 가까이에서 키우고 싶어 마당이 있는 집을 지어 5월 이사했다. 딸 이름을 물으니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이가 원할 때까지는 언론에 절대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것이 아내이자 ‘당구 여신’으로 불리는 차유람 씨(29)와의 약속이란다.○ “행동으로 보여 주겠다”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리딩으로 리드하라’, ‘꿈꾸는 다락방’ 등을 펴내며 스타 작가가 된 그는 구체적인 인문학 교육법을 알리고 싶어 ‘내 아이를…’을 출간했다. 일요일에 가족이 서점 나들이를 하고 어릴 때부터 봉사하는 케네디 가문의 교육법을 비롯해 통독과 정독 뒤 필사하기 등 고전 읽는 방법을 안내한다. “인문학 교육법을 아우르는 총론에 해당해요. 앞으로는 ‘내 아이를 위한 논어 교육법’처럼 각론에 해당하는 책을 하나씩 낼 거예요.” 그는 인문학 교육을 위해 2014년 차이에듀케이션을 설립했고, 한국기아대책과 함께 캄보디아, 인도, 라오스 등의 빈민가에 학교를 짓고 있다. 인세와 강연료도 적지 않지만 교육과 기부에 만만치 않은 금액이 들어간다. 한번 시작하면 멈추기 힘든 일이다. “고전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면 행동해야 해요. 실천이 빠진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니까요. 인문학을 강조한다면 시간 털고, 재산 털어 교육에 나서야 해요.” 15년 가깝게 무명작가로 설움을 겪었고, 아버지의 빚 때문에 교사 월급을 차압당하며 옥탑방을 전전하는 등 가난을 맛본 그의 말이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상 행복 맛보며 세상 적응 중” 하루 일과가 궁금했다. 몇 시에 일어나는지 물어보자 “일어나고 싶을 때요…”라며 목소리가 작아졌다. 열변을 토하던 스타 강사는 사라지고 머리를 긁적이는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글 쓸 때는 이틀, 사흘간 한숨도 안 자요. 밥은 라면, 어묵, 과자로 때우고요. 아내가 ‘그렇게 살다간 빨리 죽는다’며 기겁했어요. 해외 오지에서 봉사하고 폭삭 늙어서 돌아오니 울더라고요. 나이 차(13년)도 많이 나는데 이러면 안 되겠다 싶었죠.” 그래서 오전 2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기로 약속했단다. “필라테스와 수영도 함께 하기로 했어요. 내일 등록할 거예요. ‘남편 생존 프로젝트’랄까요. 딸이 결혼하는 건 봐야죠. 하하.” 올해 3월 태국 푸껫으로 뒤늦은 신혼여행(2014년 결혼)을 다녀왔고, 4월에는 프랑스 이탈리아도 여행했다. “아내가 해외여행이 처음이래요. 여권에 도장이 가득 찍혀 있지만 모두 경기 등 일하러 간 거라 뭘 구경한 적이 없대요.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라요. 우린 둘 다 외계인처럼 살아서 일상의 행복을 잘 몰라요. 함께 작은 즐거움을 맛보면서 ‘보통의 삶’을 하나하나 배워 가는 중이랍니다(웃음).” 파주=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