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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007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던 대니얼 크레이그 유엔지뢰제거 특사(47)가 13일(현지 시간) 키프로스에서 첫 임무를 수행했다. 올 4월 지뢰제거 특사로 임명된 크레이그는 임기인 3년 동안 세계 곳곳을 방문해 지뢰 제거 캠페인과 희생자 돕기 등의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키프로스 일간 키프로스메일 등에 따르면 크레이그 특사는 이날 유엔지뢰대책기구(UNMAS)와 함께 유엔이 설정한 키프로스의 완충지대를 방문했다. 그는 캄보디아 평화유지군이 지뢰를 제거하는 작업을 지켜보고 해제한 지뢰를 손에 쥐고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크레이그 특사는 성명을 통해 “이 아름다운 섬나라에서 지뢰밭을 보는 처음이자 마지막 특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수년 전 캄보디아에서 영화를 촬영해 캄보디아의 지뢰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캄보디아 지뢰제거 전문가들이 키프로스의 평화를 돕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덧붙였다. 크레이그 특사는 올 4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서 특사 임명장을 직접 받았다. 당시 반 총장은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는 ‘살인면허’를 갖고 있지만, 오늘부터 우리는 그에게 ‘구조면허’를 부여한다”며 “유엔 8대 사무총장인 나는 ‘008’로 통한다”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 6대 제임스 본드인 크레이그는 지금까지 ‘007 카지노 로얄’ ‘007 퀀텀 오브 솔러스’ ‘007 스카이폴’에 이어 곧 개봉될 ‘007 스펙터’에도 주연을 맡았다. 유엔은 1963년 지중해의 섬나라 키프로스에서 남부의 그리스계와 북부의 터키계 주민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평화유지군을 파병했다. 유엔은 10년 전부터 남북 완충지대에 매설된 지뢰 해제를 시작해 지금까지 9.7㎢에 묻힌 지뢰 2만7000여 개를 제거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열병식은 북한의 쇠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수십 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행사 조직력은 여전했지만 동원된 사람들은 허약했고 장비는 낡아 보였다. 주석단에 등장한 외국 사절은 류윈산(劉雲山)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유일했다.○ 허약한 병사들 열병 행사 시작 전 교도통신을 통해 북한 군인들이 행렬을 지어 행사장에 입장하는 한 장의 사진이 공개됐다. 드디어 고생이 끝났다고 생각해서인지 군인들의 표정은 밝았다. 하지만 대열 속 곳곳에선 영양실조에 걸린 것으로 보이는 병사들의 모습이 포착됐다. 키가 160cm도 안돼 보이는 병사도 적지 않았다. 북한군의 현재 상황을 백 마디 말보다 더 잘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이었다. 씩씩한 열병식과는 별개로 북한군의 영양 공급이 여전히 열악하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 김일성광장 앞을 꽃다발을 흔들며 지나가던 평양 시민들의 얼굴엔 아직도 햇볕에 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꽃다발로 광장에 여러 글씨를 만드는 훈련도 보통 3개월 동안 진행된다. 평양시민들은 유달리 가물고 더웠던 올여름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하루 종일 신호에 따라 색깔별로 꽃다발을 올리고 내리는 훈련을 했을 것이다. 김정은은 열병식 시작 전에 한 연설에서 ‘인민’이란 단어를 97차례 강조했다. 하지만 인민은 이번 열병식을 위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지나가는 대열마다 말해주는 듯했다. 그래서였을까. 꽃다발을 흔들며 지나가는 대열에서 과거처럼 눈물 흘리는 시민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이 든 간부들 불안에 떨 듯 이번 열병식에서 또 하나 눈에 띄었던 점은 제일 마지막 대열이 소년단 학생들이었다는 점이다. 소년단은 14세 미만의 학생이 가입하는 소년 조직이다. 지금까지 북한은 열병식에서 소년들을 동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소년들을 등장시켜 만주에서 시작된 혁명 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여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연설을 통해 ‘인민중시, 군대중시, 청년중시’라는 노동당의 3대 전략을 제시했는데 청년중시를 노동당 전략에 포함시킨 것도 매우 이례적이다. 김정은이 자기의 나이에 맞게 노동당의 세대교체를 단행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젊음’을 강조한 김정은의 연설을 들은 수많은 노(老)간부들은 당에서 나이 든 간부를 몰아내고 젊은 간부로 세대교체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을 것으로 보인다. 열병 행렬 마지막에 나타난 소년단은 그야말로 ‘세대교체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으로 최근 ‘장마당세대’의 등장과 더불어 청년들 속에서 김정은에 대한 인기가 크게 떨어지는 것도 북한 당국이 청년 계층을 다독이고 내세워야 하는 이유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눈길 끌지 못한 무기들 이번 열병식은 과거 북한이 진행했던 다른 열병식에 비해 규모나 장비 면에서 눈길을 끌지 못했다. 1985년 광복절과 1992년 김일성 80회 생일을 맞아 진행된 열병식이 규모와 장비 면에서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동원된 군 장비는 300mm 방사포와 미사일을 제외하면 30년 전 열병식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열병식에 등장한 무인기는 몇 년 전 김정은이 직접 발사 장면을 지켜보는 모습이 공개된 바 있다. 당시에도 형태만 무인기이지 발사돼 그냥 앞산까지 날아가 들이박히는 포탄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공군이 벌인 에어쇼 역시 북한의 현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40년대 개발된 구식 야크기와 AN-2 항공기들이 노동당 마크와 70이란 숫자를 새기며 날개를 기우뚱기우뚱 흔들며 날았다. 2년 전엔 고려항공 수송기에 군용 얼룩무늬를 새로 칠해 군용기로 둔갑시키기도 했지만 이번엔 그런 성의조차 없었다. 북한 공군은 이번 열병식을 통해 에어쇼조차 할 능력이 없다는 것, 또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군용기도 거의 없다는 것을 드러낸 셈이다. 탱크와 자주포 같은 다른 군용 장비도 과거에 비해 많지 않았다. 수개월 동안 훈련을 하려면 막대한 연료가 필요한데 열악한 북한의 사정을 감안하면 기계화 장비를 대규모로 동원할 연료도 부족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지난달 미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사진)이 전세기에서도 평소와 다름없는 소탈한 행보로 승무원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텍사스 지역신문인 ‘포트워스 스타 텔레그램’은 7일 교황이 미국 방문 기간 중 이용했던 아메리칸항공 전세기 승무원들이 느낀 소감을 소개했다. 이들은 “인생이 바뀔 만한 경험을 했으며 강력한 영감을 받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교황이 내린 축복을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추억했다. 교황은 축복과 축성을 바라는 승무원들의 요청을 모두 들어주면서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요청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조지 그리핀 기장은 필라델피아 공항에 내릴 당시 교황에게 착륙을 축복해 달라고 빌었고, 교황은 축복을 내리면서 그에게 필라델피아 행사를 잘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교황은 귀국 직전에는 기내 승무원들을 모두 불러 모아 직접 감사의 뜻을 건네기도 했다. 아메리칸항공 기술 전문가인 톰 하워드 씨는 “교황은 어떠한 특별대우도 원하지 않았으며 비행기에 탄 모든 이들과 같은 대우를 받기를 바랐다”고 전했다. 또 “교황은 추가로 돈이 들 수 있는 전세기 개조도 바라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 때문에 교황의 전세기는 일등석에 커튼을 치고 교황청 깃발과 휘장만 추가로 달았을 뿐 아무런 개조도 하지 않았다. 전세기는 교황의 로마 귀국까지 함께한 뒤 곧바로 다른 노선에 투입됐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이보게, 젊은이. 여기가 헬조선 맞나. 목숨 걸고 찾아왔더니 하필 지옥이라니…. 왓다헬!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음(끄덕끄덕)…. 듣고 보니 참말 같구먼. 그럼 나와는 반대로 헬조선을 탈출해 북조선에 한번 가보실 텐가. 아무렴 지옥보다 못하려고. 한번 들어나 보고 판단해 보시게나. 일단 헬조선 탈출금 5만 달러만 준비하시게. 그 정도도 없다면 그냥 지옥살이 할 운명인 거야. 요샌 동남아 사람들도 몇 년이면 그 정돈 벌어 간다고 하더구먼. 서울선 방 한 칸 얻기 힘들어도 북조선에선 결혼도 할 수 있고, 집도 살 수 있고, 취직도 할 수 있다네. 북조선에 가면 ‘면죄부’부터 사시게. 올 7월부터 파는 건데, ‘김일성, 김정일 기부금’이라고도 하지. 돈줄 마른 당국이 10일인 노동당 창건 70돌 기념일을 맞아 주민 돈주머니 털어먹느라 만든 것이네. 가격은 북조선 최고액권인 5000원권으로 2만 장, 즉 1억 원이네. 그리 놀라지 말게. 북에선 1달러가 8300원이니 한국 돈 1원이 북조선 돈 7원 정도라네. 1억 원은 1만2000달러쯤 되네. 돈을 바치면 ‘이 동무는 김일성(김정일) 기부금을 냈음을 증명합니다’ 따위의 글과 기부액수가 적힌 ‘애국상장’이란 종잇장 하나 줄 걸세. 김 씨 일가 우상화 사업에 기부하면 김일성 기부금 증서를, 김정은이 지시한 중요 공사에 기부하면 김정일 기부금 증서를 준다네. 효력은 같다니 아무거나 고르시게. 그리고 남쪽 주민등록증 크기의 휴대용 애국상장도 주는데, 이걸 꼭 갖고 다니시게. 이것만 보여주면 웬만한 죄는 다 용서가 되니까. 물정을 잘 몰라 좌충우돌 사고 치는 정도는 눈감아 주지. 다만 김정은을 욕한다거나 홧김에 사람 죽여도 효력이 있는 건 아니니 명심하시게. 기부금 3000만 원(약 3600달러)을 내면 ‘애국’자가 빠진 그냥 ‘상장’이라는 면죄부도 주는데, 약발은 많이 떨어지니 이왕 살 거면 1억 원짜리 사시게나. 어려서부터 훈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평양에선 살기 위험하네. 지방 도시라면 8000달러로 3칸짜리 집은 살 수 있네. 가자마자 역사책에서 배웠던 가렴주구(苛斂誅求)란 것부터 바로 알게 될 걸세. 다음 날부터 인민반장이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와 문을 두드릴 거네. 아침엔 “동상 건설 지원금 내라”, 점심엔 “발전소 건설 지원금 내라”, 저녁엔 “수해복구 지원금 내라”라고 독촉할 걸세. 그게 북조선 일상이니 빨리 적응하게나. 이걸 견디다 못해 도시에서 그나마 수탈이 덜한 깊은 산골로 도망가는 사람들이 요새 급증한다니 도시엔 빈집이 많아지고 집값도 떨어져서 좋은 기회일세. 자넨 돈이 많으니 걱정할 필요 없네. 걷으러 올 때마다 1달러 정도 주면 되네. 면죄부 사고 집 사도 3만 달러는 남아 있지 않은가. 그 정도 조건이면 괜찮은 짝을 골라 결혼하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네. 물론 밤이면 암흑 세상에서 살아야 하고 목욕조차 하기 힘들 거네. 허나 어차피 TV를 봐야 욕만 나올 거고 샤워 좀 못해도 지옥보단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취직이 필요하면 적당한 간부 자리 하나 사시게나. 면죄부 파는 세상인데 매관매직이 없겠나. 아직은 구한말처럼 군수 5만 냥, 관찰사 20만 냥 이런 식으로 딱 정해져 있진 않네. 머잖아 그리 되겠지만 자네에게 권할 자리는 높은 간부가 아니라네. 너무 높이 올라가면 처형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갈 확률이 높다네. 헬조선에서 열심히 학원만 다녔다면 남을 갈구고 돈 뜯는 실력은 어림도 없을 터. 양심이나 자책감 같은 게 남아 있다면 높은 자린 넘보지도 마시게. 안정적인 게 싫고, 도전을 해보겠다면 장사밖에 할 게 없네. 허나 3만 달러면 북조선 금수저하곤 비교가 안 되니, 자기 푼수 정도는 아시게. 금수저 쳐다봐야 제 명만 줄어드는 건 남이나 북이나 똑같다네. 장사 종목 고를 땐 헬조선 체험이 큰 도움이 될 거네. 치킨도 좋고 편의점도 좋네. 다만 휴대전화 가게는 허가가 까다롭네. 장사가 잘될지는 모르겠네. 북조선도 요즘 지독한 불황이라네. 경제는 마비됐는데 모두들 장사판에 뛰어드니, 판다는 사람은 많은데 산다는 사람이 없다는군. 3만 달러 날리는 건 일도 아닐세. 반드시 명심할 건 1만 달러는 꼭 남기시게. 거기가 더 지옥 같다면 다시 도망칠 비상 탈출금은 있어야 하니까. 어떠신가. 5만 달러로 꿈꿔보는 북조선 은수저급 삶이. 그것도 끔찍하다면 해줄 말이 없구먼. 금수저 되는 법은 하늘이 알지 나는 모르네. 물론 희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닐세. 요즘 남북이 통일하면 대박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더구먼. 그거나 한번 꿈꿔 보세나. 둘이 합치면 대박반도가 될지, 지옥불반도가 될지 난 모르겠네. 그래도 뭐가 두렵겠나. 더 떨어질 곳이 있다면 여기가 헬조선이 아닌 거지.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중국이 121년 전 청일전쟁 당시 침몰했던 북양(北洋)함대 소속 ‘치원(致遠)’함을 랴오닝(遼寧) 성 단둥(丹東) 앞바다에서 발견했다. 관영 중국중앙(CC)TV는 29일 지난해 10월 해저 진흙층에서 발견한 침몰선이 고고학자들의 검증 결과 치원함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이 함선은 발견 당시 선체 대부분은 수 m의 두꺼운 진흙층 속에 묻혀 있었고, 현장에서는 주포, 탄약, 포탄, 총구 10개가 있는 기관총 등이 나왔다. 고고학자들은 “이런 기관총은 당시 치원함에만 설치됐다”고 설명했다. 일부 고고학자는 “치원함 갑판이 커다란 돌덩어리로 눌려 있었다”며 “일본군이 중국 풍수를 훼손할 목적으로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일 수 있다”는 관측도 내놓았다. 치원함은 중국에서 외국군의 침략에 최후까지 항거하는 투쟁정신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역사교과서에도 실리고 영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한 함선이다. 등세창(鄧世昌) 함장을 비롯한 장병 240여 명은 1894년 9월 17일 벌어진 ‘황해해전(일명 압록강해전)’에서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싸우다 침몰하는 배와 운명을 같이했다. 당시 등 함장은 부하들에게 “우리가 죽더라도 국가의 명성을 높이게 될 것”이라고 독려하며 일본 전함 요시노(吉野)와 충돌하기 위해 돌진했다. 하지만 이 군함은 일본군이 쏜 포탄에 맞아 폭발하면서 순식간에 침몰했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청일전쟁 120주년을 기념해 3700만 위안(약 69억 원)을 들여 치원함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길이 81m, 배수량 2300t의 장갑순양함인 치원함은 최고속력 18노트의 증기기관과 210mm 주포 5문 등을 장착하고 있었다. 청나라는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해 1885년부터 1887년 사이 영국에서 2000∼7000t급의 최신예 대형 장갑군함 7척을 사들였다. 이런 군함들을 거느린 북양함대는 당시 아시아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수병들의 사기 저하와 훈련 부족, 부패로 인한 불량 포탄 공급 등으로 일본 함대와의 전투에서 주력 전함 5척이 줄줄이 격침됐다. 청나라는 이처럼 해전에서 연패한 뒤 일본에 백기를 들었다. 중국은 1996년 국가문물국 산하에 황해해전 침몰 군함 인양사업 추진 기구를 설치하고 침몰된 함정의 위치를 추적해왔다. 중국 정부가 1985년 산둥(山東) 성에 세운 ‘갑오전쟁박물관’ 내부에는 ‘갑오(청일)전쟁 패전이라는 굴욕적인 역사는 낙후되면 곧 당하게 된다는 도리를 다시 입증하였다’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친필을 새긴 동판이 붙어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지난 주말 경기 안성시 탈북자 정착교육시설인 하나원에서 흥겨운 남한 유행가가 울려 퍼졌다. 하나원을 졸업한 탈북자 60여 명이 참가한 ‘하나원 방문의 날’ 행사에서 탈북 예술단이 교육생 170명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다. 졸업생이나 교육생이나, 추석을 앞두고 실향의 아픔을 서로 달래자는 행사였다. 이날 하나원은 1999년 개원 이래 두 번째로 외부인들에게 내부를 공개했다. 하지만 교육생들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선배’ 탈북자들로 구성된 예술단 공연에 함께 웃으며 박수를 치고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도 공연 도중 눈물을 훔치거나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이들이 보였다. “한국에 와서 첫 추석을 이곳에서 맞으니 마음이 착잡하단 말입니다. 고향을 떠나 처음으로 맞는 추석인데, 북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에 맘이 아픕니다. 북한 가족들도 저를 생각하면서 아파할 겝니다.” 고향이 함북 청진이라고 밝힌 여성 탈북자 김지원(가명) 씨가 이렇게 말하자 옆에 있던 다른 교육생들도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떠올리며 격한 목소리로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들의 꿈은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헤어진 가족과 다시 만나고 싶다”였다. 하지만 이들의 꿈이 이뤄질 날은 점점 더 먼 미래로 잡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요즘은 북한에서 사람 빼오기가 너무 힘들어요. 이젠 한국까지 오는 데 한국 돈 1200만 원을 부른단 말입니다. 그 돈 언제 다 모으겠어요. 게다가 요즘엔 국경에다 철조망 다 둘러친단 말입니다. 중국에 나왔다 잡히면 가족이 한국에 있는 경우엔 무조건 정치범수용소행이지 뭡니까.” 함북 무산이 고향인 20대 여성 최수민(가명) 씨의 말이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고향에서 아버지와 오빠를 데려오고 싶어 했다. “8년 전 제가 탈북할 때는 북한 국경경비대에 중국돈 100위안만 주면 안전하게 건너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안전한 루트가 없어요. 부모 형제를 영영 다시 보지 못하는 건 아닌지 너무 걱정이 됩니다.” 특히 2015년은 탈북자들에게 감회가 깊은 해다. 1995년 북한이 ‘고난의 행군’에 들어가면서 탈북자가 급증했다. 북한을 빠져나와 중국으로 넘어가는 인원이 한 해 수만 명에 육박하던 대규모 탈북 사태였다. 한국 사회에서 ‘탈북자’란 말이 본격 사용된 시기도 바로 1995년이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것이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2010년 이후 탈북자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 추석을 앞둔 탈북자들의 팍팍한 현실과 최근 탈북 추세를 심층 취재했다. ▼ “달님 달님, 北에 두고온 어머니 소식 좀 전해주오” ▼그리움에 사무친 탈북자들, 일부는 “추석 쇠는 법도 잊어” 올해 한국에서 처음으로 추석을 맞는 탈북자 김지선(가명·29·여) 씨와 박선아(가명·28·여) 씨는 추석 명절이 반갑지 않다. 22일 기자와 만난 김 씨는 “추석 연휴가 표시된 달력을 볼 때마다 북한에 있는 가족들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요즘 들어 잠을 설친다”며 고개를 숙였다 김 씨와 박 씨는 먼 친척 사이. 지난해 여름 비슷한 시기에 탈북한 이들은 중국에서 우연히 만났다. 이들이 탈북을 결심한 계기는 가족의 억울한 죽음 때문이었다. 장사를 하던 김 씨의 어머니는 보위부에 잡혀 들어가 고초를 겪은 뒤 풀려난 지 3개월 만에 숨졌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2년 동안 남몰래 탈북을 준비하던 김 씨는 지난해 7월 당시 네 살배기 딸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박 씨도 아버지가 사업 문제로 보위부에 끌려갔다가 숨진 직후 탈북을 준비하다가 김 씨와 비슷한 시기에 두만강을 건넜다. 추석을 앞둔 이들은 한결같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놓았다. 김 씨는 2년 전 북한에서 보낸 마지막 추석 때 모친 산소 앞에 새 비석을 세운 일을 떠올렸다. 그는 목멘 소리로 “어머니 산소에 갈 수 없어 너무 안타깝다”며 말을 이어갔다. 박 씨도 “병든 어머니를 북한에 남겨둔 게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형제들에게는 탈북 계획을 미리 귀띔했지만 어머니에게는 끝까지 알리지 못했다고 한다. 행여 걱정을 끼쳐드려 병세가 악화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박 씨는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엄마 목소리를 꼭 듣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탈북자들은 요즘 가족을 그리워하며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1999년 입국한 장인숙 씨(75·여)는 명절만 되면 북에서 사별한 남편과 탈북 과정에서 붙잡힌 둘째 아들 생각이 난다고 했다. 1978년 세상을 떠난 장 씨 남편의 산소는 평양 인근 공동묘지에 있다. 장 씨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망가져 있을 남편의 산소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며 “아들들에게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간직했다가 통일 뒤 남편 묘에 같이 묻어 달라고 신산당부를 해놓았다”고 말했다. 1999년 함께 탈북하다가 보위부에 붙잡힌 둘째 아들은 아직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원에서 만난 한 탈북 여성은 “하나원은 그래도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있어 덜한데 사회에 나가서 혼자 쓸쓸히 추석을 맞으면 서러워 눈물이 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중국 국경을 넘은 뒤 남한으로 입국하기까지 북한과 중국 당국의 눈길을 피해 장기간 접경지대에서 지낸 일부 탈북자는 추석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도 못했다. 지난주 하나원에서 만난 탈북 여성 4명은 “우린 추석 쇠는 법을 잊어버렸다”며 “중국에서 오랫동안 살다 보니 추석에도 특별히 마음이 아프지도 않고 그저 무덤덤하다”고 했다. 장기간 이국에서 숨어 지낸 결과 추석에 대한 기억이나 공동체 의식도 거의 사라졌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요즘은 이것도 점점 옛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날이 갈수록 탈북자 수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격감하는 탈북자, 브로커도 일감 떨어져 통일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남한에 들어온 탈북자는 614명이다. 이는 지난해 전체 1397명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수치다. 남한에 들어온 탈북자 규모는 2000년부터 2009년까지 10년간 계속 늘었다. 그야말로 대규모 탈북 사태였다. 2001년 1043명이 입국해 연간 입국 탈북자가 처음으로 1000명을 넘어섰다. 2006년 입국한 탈북자는 2028명이었고, 2009년엔 2914명에 이르렀다. 당시까지만 해도 “조만간 연간 입국 탈북자가 5000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했다. 그렇지만 2009년 정점을 찍고 점차 하향 추세를 보이다가 최근에는 급작스레 줄었다. 탈북자 규모가 갑자기 줄자 이들의 정착교육을 맡은 하나원도 놀라는 기색이다. 9월 현재 안성시 하나원에서 정착교육을 받는 여성 탈북자는 17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강원 화천군에 있는 제2하나원에서 생활하는 남성 탈북자까지 다 포함해도 200명 남짓이다. 하나원 교육 일정을 감안하면 최근 3개월 동안 한국에 입국한 규모도 200명 수준으로 짐작할 수 있다. 9월에 하나원에 들어간 탈북자는 30명 정도다. 하나원 측은 몇 년 전 500명 이상 수용이 가능하도록 시설을 확장했다. 하지만 막상 확장하고 나니 탈북자가 크게 줄었다. 화천의 제2하나원은 더 난감한 표정이다. 통일부는 안성 하나원의 수용능력 500명이 부족하다고 보고 2009년 화천에다 새로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제2하나원 건물 건설에 들어가 2012년 12월 완공했다. 제2하나원은 7만7400m² 땅에 예산 349억 원을 투입했다. 그렇데 막상 시설 운영에 들어간 시점에서 이용률이 예상치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고 있다. 현재 제2하나원에서 교육받는 남성 탈북자는 30∼40명 수준. 제2하나원은 요즘 사회에 정착한 일부 전문직 탈북자를 대상으로 직업교육 등 맞춤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이 시설을 착공했던 2009년 당시 탈북자 규모가 이렇게 급속히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한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요즘은 탈북자를 도와주며 수수료를 챙기는 브로커 중에서도 “일감이 없다”며 다른 일자리를 찾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다. 중국의 한 브로커는 “6년 전만 해도 탈북자가 워낙 많아 한꺼번에 8명 정도씩 데리고 3국 국경까지 가 돈을 벌 수 있었다”며 “최근 중국에서 1, 2명씩 움직이다 보니 수중에 남는 돈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탈북자 입국 증가세가 꺾인 2010년부터 북한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 의문을 알아보기 위해 탈북자와 구출 활동가 50여 명을 만나거나 전화로 접촉했다.휴전선처럼 변해 가는 북-중 국경 흔적선, 대못 판, 무인카메라, 철조망, 비상벨…. 올해 탈북해 한국에 입국한 김창민(가명·35) 씨는 이런 말을 나열하며 북-중 국경을 넘던 아찔한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우선 철조망을 넘은 뒤 모래를 말끔하게 깔아놓은 ‘흔적선’을 건너뛰어야 한다. 땅에 묻어놓은 대못 판을 밟을 위험도 피해야 한다”며 말을 꺼냈다. 북한 철조망을 넘어도 안심할 수 없다. 강을 건너 중국에 도착해도 무인카메라가 달린 철책과 탈북자 신고 체계가 또 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요즘에는 중국 철책을 넘어 국경의 중국 가옥에 들어가 도움을 청하기도 두렵다”며 “집집마다 중국 공안이나 변방 부대와 연결된 비상벨이 있는데, 주인이 몰래 누르면 체포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런 다중 경계는 모두 김정은 집권 이후 생겨난 것이다. 요즘도 북한과 중국은 국경의 감시망을 겹겹이 쳐놓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은 올해 3월 김정은이 국경경비대에 “국경연선의 ‘3대 장벽’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최근 보도했다. 3대 장벽은 ‘물리장벽’ ‘감시장벽’ ‘전파장벽’을 뜻한다. 물리장벽은 북-중 경계의 압록강과 두만강에 설치된 물리적 장애물이다. 전기철조망과 함정, 대못을 박은 판자 등이 포함된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북한은 6월 초부터 러시아에서 철조망을 대량으로 수입했다. 높이 1.6m의 러시아산 철조망 위에 10cm 간격의 전기선 4개가 설치됐다고 한다. 물론 전력난 때문에 아직 전기는 통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서 국경 철조망은 2006년부터 설치가 시작됐지만 그동안 진척이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러시아 철조망이 들어온 뒤 탈북이 가장 빈발한 압록강 상류 양강도 지역은 현재 철조망 공사가 끝났고, 지금은 함경북도 두만강 유역 공사가 한창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역시 대규모 탈북 사태를 막는다는 목적에서 2009년경부터 국경 주요 탈북 및 밀수 루트를 철조망으로 차단하는 작업에 들어가 지금 대부분 마무리됐다. 북한은 국경 전역에 철조망과 함께 너비 4m, 깊이 3m의 함정을 파놓는 계획도 세워 뒀다. 하지만 함정 몇 곳에서 물이 자꾸 스며 나와 이 계획이 흐지부지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목함지뢰 수만 개를 설치한다는 소문이 국경 지역에 퍼지고 있다. 감시장벽은 국경에 설치된 최신 감시 장비들이다. 복수의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탈북을 막기 위해 군사분계선에 설치했던 야간 감시 장비까지 뜯어 북-중 국경에 설치했다. 탈북이 주로 밤에 이뤄지기 때문이다. 과거 압록강과 두만강 옆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강에 나가 빨래도 하고 물도 길어 먹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미리 허가를 받은 뒤 정해진 통로로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통행을 허용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가안전보위부, 보안서, 국경경비대, 지방 적위대, 인민반 등 각 기관과 조직에서 차출된 인원이 4중, 5중으로 국경을 순찰한다. 이들은 의심이 가는 사람을 단속해 탈북자인지 조사하고 있다. “몇 년 전 수입해 온 독일산 전파탐지기가 얼마나 (성능이) 좋은지 통화를 하다 붙잡혀 처형된 사람이 많다. 통화 위치가 잡히면 10분도 지나지 않아 수색대가 현장을 둘러싸기 때문에 무서워서 전화를 못하겠다.” 지난달 통화한 북한 주민의 말이다. 최근 북한은 외부 세계와의 휴대전화 통화나 대북 라디오 방송 수신을 막기 위해 전파장벽 구축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전파 방해 장비도 중국이나 독일에서 들여와 국경과 인접한 도시와 마을에선 중국과 통화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통화가 어려워지면 탈북도 쉽지 않아진다. 이제는 북-중 국경을 넘기가 남북 군사분계선을 넘는 것만큼이나 어려워진 것이다.“북조선 최대 적은 남조선 아닌 탈북자” 지난해 탈북한 최준호(가명·36) 씨는 “김정은 체제 들어 달라진 것이라면 탈북하다 체포되면 무조건 민족 배반자로 간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에서 체포되면 무조건 한국으로의 도주를 기도한 것으로 여긴다. 본인이 정치범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정치범관리소로 끌려간다. 뇌물을 많이 주어 판결을 잘 받아내도 최소 3년은 교화소에 갇혀 있어야 한다”고 북한의 살벌한 분위기를 전했다. 최근 만난 탈북자들도 탈북자 격감의 주요 요인으로, 과거에 비해 탈북자 처벌이 훨씬 가혹해진 점을 많이 꼽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탈북자들에게 내려지던 처벌과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대규모 아사 사태가 시작되자 최소 수십만 명의 탈북자가 중국으로 탈출했다. 중국에서 체포돼 북송된 사람도 수만 명에 이른다. 당시 북한은 북송된 탈북자를 조사한 뒤 정상을 참작하며 처벌 수위를 조절했다. 특히 경제난으로 인한 단순 탈북자에 대해선 처벌이 비교적 가벼웠다. 대다수 탈북자는 3∼6개월 노동교화형(강제노동) 판결을 받았다. ▼ 데려오고 싶어도… 강 건너는 비용 500배나 뛰어 ▼하지만 지금은 처벌 수위가 크게 올라갔다. 요즘 체포되는 일반 탈북자는 대개 정치범수용소에, 국경에서 떠도는 꽃제비의 경우도 교화소에 들어간다. 정치범수용소와 교화소엔 수용할 수 있는 자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정치범수용소의 경우 과거 1970, 80년대 수용됐던 정치범들이 거의 다 숨졌다. 최 씨는 “수용소 안에서 정치범이 줄다 보니 수용소 내 탄광이나 농장 등이 돌아갈 수 없다. 과거 정치범의 자리를 지금은 탈북을 기도했다가 체포된 사람들이 메우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런 현실 때문에 북한에선 “탈북하다가 잡히면 인생이 완전히 끝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목숨을 건다는 각오를 해야 탈북을 감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2008년 11월경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은은 김정일에게 “탈북자를 없애겠다”는 계획을 첫 약속으로 내걸었다. 그 후 김정은은 “우리 체제의 최대의 적은 미제나 남조선이 아니라 탈북자”라고 선언하고 “도주하는 탈북자를 즉각 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 이후 북-중 국경에서 탈북자가 사살되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 지금도 김정은은 주요 탈북 사건에 대해 직접 보고를 받고 대책을 지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9일에도 함경북도 무산군에서 2세대 8명이 집단 탈북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바로 다음 날 김정은이 “당장 무산 지역을 철조망으로 완전히 봉쇄하라”는 불호령을 내렸다고 북한 전문 인터넷매체 ‘데일리NK’가 보도했다. 이 지시에 국경경비대가 하계훈련도 급히 단축하고 철조망 공사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천정부지로 뛰는 탈북 비용 지난해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하태민(가명) 씨는 최근 북한에 있는 어머니를 모셔오기 위해 탈북 브로커에게 한국 돈 1000만 원을 건넸지만, 얼마 전 어머니가 탈북 도중 체포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모은 돈인데, 돈이 모자라 어머니 목숨을 빼앗겼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탈북자에 대한 처벌 수위와 함께 탈북 비용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한 탈북 브로커는 “북-중 국경을 넘는 데만 700만 원 정도 써야 한다. 들키면 경비대원 자신들도 총살되기 때문에 웬만한 금액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경비대가 돈을 받으면 자기만 아는 통로로 강을 건너게 해주는데, 우리가 중국 쪽에서 대기하다가 즉시 차에 태우고 번개같이 도시로 달아난다. 그런데 변수가 너무 많아 우리도 옛날보다 훨씬 더 몸을 사린다”고 말했다. 2000년대 후반만 해도 탈북자들이 국경 경비대원에게 중국 돈 100위안(약 2만 원) 정도만 주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비용이 불과 6∼7년 사이 1000만 원 이상으로 올랐다. 500배 넘게 치솟은 것이다. 그런데도 탈북자들은 “정확한 탈북 비용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지금은 성공을 장담하며 북한에서 사람을 빼오겠다는 브로커가 거의 없다고 했다. 가장 큰 불안 요인은 국경 경비대원에게 많은 돈을 주어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처음엔 국경경비대와 단속 초소를 몇 배로 늘리고 탈북자와 탈북 방조자를 엄벌에 처하는 등 고전적인 방지책에 매달렸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래도 뇌물이 통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김정은은 2010년경 “경비대원이 탈북자를 신고하면 받은 뇌물을 절대 빼앗지 않고 오히려 노동당 입당과 승진, 대학 추천을 해준다”는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내걸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조치는 근래의 북한에선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이 같은 파격적인 조치가 내려진 뒤부터 경비대원이 돈을 받고 나서 탈북자를 신고하는 현상이 빈발해졌다. 탈북자와 국경경비대원 사이에 불신이 팽배한 결과 돈 보따리를 싸들고 가도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워졌다. 뇌물을 주고 탈북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줄어드니 국경경비대의 ‘소득’도 떨어졌다. 탈북자들은 “국경경비대도도 결국 손가락만 빨게 됐으니 자업자득인 셈”이라고 입을 모았다. 탈북자가 국경을 넘어 중국 도시로 가도 곳곳에 위험이 도사린다. 중국 당국자들은 최근 기차표를 살 때도 신분증을 검색하고 있다. 이 때문에 탈북자들은 승용차나 버스를 타고 중국 대륙을 횡단한다. 중국 당국은 최근 이슬람 위구르족이 중동의 테러조직 이슬람국가(IS)에 가담하기 위해 중국을 탈출해 태국 등 동남아로 가는 일이 빈발하자 남쪽 국경 통제를 강화했다. 위구르족의 탈출 루트는 탈북자들이 동남아로 이동하는 길과 겹친다. 지난해 3, 4월에도 중국은 남부 지역에서 350여 명의 밀입국 브로커를 체포했다. 이 중엔 탈북자들을 동남아 지역으로 넘겨주던 브로커가 대거 포함돼 있었다. 이 같은 사건도 탈북비용 상승의 또 다른 원인으로 지목됐다. 하나원에서 만난 탈북자들은 “대다수 북한 주민은 탈북의 꿈을 점차 접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는 정말 목숨을 내걸 만큼 위급한 상황에 처한 주민이나 남한에 사는 가족이 브로커 비용을 대줄 수 있을 때만 탈북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내년에도 탈북자가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예상했다.‘생계형’ 탈북에서 ‘이민형’으로 바뀔 조짐도 나타나 “가족을 데리고 오는 것은 포기했어요. 돈을 북에 보내 장사를 하도록 하는 게 훨씬 낫지요. 서로 얼굴을 못 보고 사는 건 안타깝지만, 그 편이 최선인 것 같아요.” 1년에 몇 차례씩 북에 있는 오빠에게 돈을 보낸다는 한 탈북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이어 “오빠가 와봐야 낯선 땅에서 외롭게 힘든 직업을 전전할 게 뻔한데, 차라리 내가 돈을 보내면 고향에서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사업가로 살 수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 주민들의 생활수준이 매년 좋아지고 김정은 체제가 주민 경제활동에 대한 통제를 대폭 완화한 것도 탈북자가 감소하는 이유로 꼽힌다. 최근 ‘돈주’라고 불리는 신흥 부유층이 소규모 기업 경영에 뛰어들면서 노동력만 팔아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주민층이 두꺼워지고 있다. 죽을 각오로 탈북을 결심하는 사람이 줄어드는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탈북 비용을 댈 수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올해 탈북한 이종만(가명) 씨는 “1만 달러가 넘는 브로커 비용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왜 탈북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북한에선 1만 달러 정도의 자본이 있으면 여러 명을 고용해 사장이 될 수 있는데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월 30달러만 주면 인력은 얼마든지 고용할 수 있다고 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도 북한의 가족에게 많은 돈을 들여 성공 확률이 낮은 탈북길에 오르게 하기보단 돈을 보내는 사람이 점차 늘고 있다. 남한에 먼저 온 가족이 보내준 돈을 받고 중국에서 체류하지 않고 곧바로 남한으로 오는 ‘직행’ 탈북자도 거의 늘지 않고 있다. 하나원 관계자는 “하나원 입소자 중 직행 탈북자의 비율은 오래전부터 20∼30%로 고정돼 있다”고 말했다. 최근엔 자식의 미래를 위해 탈북했다는 주민도 가끔 눈에 띈다. 지난 주말 하나원에서 만난 한 여성의 탈북 이유는 중학생 딸 때문이었다. “이 애가 외국어를 공부하고 싶어 하는데, 북에선 김일성대나 외국어대를 가고 싶어도 못 가지 않습니까. 또 배워도 쓸 데가 별로 없고요. 북에서 우리도 잘살았지만 고민 끝에 올봄 딸의 꿈을 위해 탈북했습니다.” 이는 과거 남한이 가난했던 시절 미국 등 선진국으로 자녀를 위해 가족 전체가 이민을 떠나던 상황과 흡사하기도 하다. 앞으로 탈북 양상이 ‘생계형 탈북’에서 가족의 미래를 위한 ‘이민형 탈북’으로 바뀔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주성하 zsh75@donga.com·김호경·권오혁 기자}

추석이면 저도 모르게 구글어스를 엽니다. 10년 전쯤부터 그랬던 것 같습니다. 상업적으로 도움이 안 돼서인지 북쪽 지도는 몇 년에 한 번 업그레이드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은 고향인데…. 위성지도에서 추석 때마다 가던 아버님 산소를 찾아봅니다. 여기 아니면 여긴데, 안타깝게도 점을 찍을 수 없습니다. 기약 없는 탈북의 길에 오르기 전 허름한 묘비가 맘에 걸렸습니다. 장마당에서 제일 좋은 시멘트를 사오고 철근도 구해 제가 직접 하나 든든하게 만들었습니다. 마감 미장도 직접 하고, 아버님과 제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깊게 파 넣었습니다. 탈북하기 3일 전쯤 그 묘비를 메고 산소에 올랐습니다. 하산 길에 ‘내가 돌아와 저 묘비 앞에 다시 설 날이 올까’ 생각해 보니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지금도 추석이면 그때가 생각납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그 묘비가 뽑혀 산소 앞에 누워 있다고 합니다. 2002년에 김정일이 나무 없는 산에 묘지들만 가득한 것이 보기 싫다고 묘비를 눕히고 봉분은 20cm 이하로 깎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위성으로 아버님 봉분을 찾기 어려운 것도 그 때문입니다. 봉분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랬던 김정일이 죽어서 세상에서 제일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무덤에 누워 있으니 화가 납니다. 위성으로 본 고향은 늘 저를 아프게 합니다. 여전히 산은 앙상하고 들은 헐벗었습니다. 매일 지나다니던 다리는 6년 전부터 위성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다리가 없으면 마을 사람들은 강을 어떻게 건너다닐까…. 제가 고향에 돌아가면 다리만큼은 놔 주고 싶습니다. 욕심 같아선 학교도 세워 주고, 병원도 세워 주고 싶지만, 그럴 능력이 아직은 없습니다. 물론 고향사람들끼리 모으면 불가능하진 않겠죠. 그렇지만 그럴 날이 과연 올까요. 한 해 두 해 빠르게 세월이 흘러가니 점점 두려운 생각이 납니다. 남쪽에 갓 왔을 때 임진각 망배단에서 북녘 하늘을 향해 제를 올리는 실향민들을 봤습니다. 그땐 “나는 젊었으니 고향에 꼭 갈 수 있을 거야”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 점점 세월이 덧없이 흐르다 보니 망배단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훔치던, 지금은 살아 계신지도 모를 그분들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문득문득 듭니다. 이달 초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탄생 100주년 세미나에 참가해 토론했습니다. 소 떼를 몰고 고향에 간 이야기, 평양에 류경정주영체육관을 세운 이야기를 들으며 부러웠습니다. 저도 비록 돌아가지 못해도 고향을 위해 뭔가 하고 싶었습니다. 남쪽에 살면서 내일이라도 죽게 되면 가족도 없는 제 유산은 어떻게 될까 늘 궁금했습니다. 그러니 서울에서 집 살 생각도 없고, 돈을 모아 놓을 미련도 없어집니다. 믿을 곳만 있다면 “제 재산을 처분해 나중에 고향에 제 이름을 딴 다리를 좀 놓아 달라”라고 유언장이라도 미리 써 놓고 싶습니다. 지금은 방법이 없습니다. 실향민들의 유지를 받들 재단이 없습니다. 유산을 아무 곳에나 맡길 수도 없습니다. 지금 북한에 무턱대고 돈을 보내면 대부분이 어느 부패 관료의 주머니에 들어갈 것이 뻔합니다. 유언을 확실하게 집행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때까지 수십 년 기다려 줄 수 있으면서도 마무리까지 신뢰할 수 있는 재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일은 국가 차원에서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통일항아리가 별건가요. 이런 생각 저만 하고 있을까요. 매년 수천, 수만 명의 실향민이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분들 중에 저 같은 생각 가진 분이 없었을까요. 아직도 수십만 명의 실향민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내년이라도 고향 방문 길이 열린다면 꿈만 같겠죠. 미국 교포는 30년 전부터 고향을 방문했는데 남쪽 실향민이라고 안 될 게 뭐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 정부가 북한에 제안했다는 기억조차 없습니다. 어차피 남쪽이 잘산다는 것은 이미 북한 사람들도 알고도 남았는데 운신도 어려운 실향민들이 체제에 무슨 그리 큰 위협이 되겠습니까. 김정은을 설득해 북한이 만든다는 19개 경제특구 지역에 고향을 둔 실향민부터라도 고향에 가 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게 당장 안 된다면 비록 북녘 고향에 육신은 돌아가지 못해도 이름 석 자만이라도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주영체육관이 평양에 세워졌듯이 말입니다. 어제 오늘 생각이 아닙니다. 10년 넘은 생각입니다. 더 늦기 전에 실향민들의 유지를 받들 수 있는 재단 설립을 박근혜 대통령께 정중히 요청드립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 정찰총국 소속 해외 암살 및 납치 공작조가 올 3월 중국 지린(吉林) 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에서 한국인을 납치해 북한으로 끌고 가려다 중국 당국에 체포된 것으로 밝혀졌다. 17일 옌볜의 정통한 소식통은 “정찰총국 요원 5∼8명이 한국인 납치를 시도하다가 현재 지린 성 모처에 구금돼 있으며 소속과 직책, 관련 작전 내용을 전부 중국 측에 자백했다”고 말했다. 한국인 납치는 정찰총국과 국가안전보위부의 충성 경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관측됐다.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김영철이 총국장으로 있는 북한 정찰총국과 김원홍이 부장으로 있는 국가안전보위부가 지난해부터 중국에서 한국인들을 경쟁적으로 납치하고 있다”며 “이번 일도 김영철이 김정은에게 납치 공적을 보고하기 위해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북한 간부 출신의 한 탈북자는 “김영철과 김원홍 모두 중국에서 한국인을 납치한 뒤 김정은에게 ‘공화국에 대한 적대행위를 하던 간첩을 잡았다’고 과장 보고해 공을 인정받으려 했다”고 말했다. 북한은 2013년부터 중국에서 김국기 최춘길 선교사 등 한국인을 납치 또는 북한으로 유인해 억류했다. 이들은 모두 몇 달 뒤 북한 TV에 출연해 한국 정보기관의 첩보원으로 활동했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번에 납치될 뻔한 한국인도 선교 활동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의 납치 사건은 북한과 중국 간 외교 갈등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 옌볜 소식통은 “북한은 이번에 공작원들의 존재를 부인하며 방치하고 있지만, 이 사건은 중국 지도부에 보고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과거 자국 내에서의 북한 공작조의 활동을 눈감아 줬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작조 전원 체포를 통해 ‘더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경고를 분명히 보냈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 냉랭해진 북-중 관계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 “김영철 ‘한국간첩 납치’ 공 쌓으려 무리수” ▼북한이 중국에 보내는 납치 요원들은 최정예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공작원은 국경 지역에서 한국인과 탈북자를 상대로 위압감을 조성하는 이른바 ‘위세조’와 암살 또는 납치를 전문으로 하는 ‘납치조’ 등 크게 두 부류다. 이번에 중국 당국에 체포된 이들은 납치조다. 요원 대다수가 특수훈련을 받고 조를 짜서 그림자처럼 움직이고 있다고 전해졌다. 대북 소식통은 “이번 사건으로 북한 요원들이 중국에서 한국인들을 납치해 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잡혀 김영철이 큰 어려움에 빠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영철(사진)은 김정일이 통치하던 당시 인민군 정찰국장으로 지내며 김정은에게 군사 관련 개별 교습을 해준 인연으로 그의 눈에 들었다. 그 후 정찰국이 노동당 35호실과 작전부를 흡수해 정찰총국으로 되던 2009년 5월 당시에는 정찰총국장을 맡았다. 당시 대북 전문가들은 군 정찰국이 노동당 소속의 거대 해외 공작조직을 흡수한 것은 의외라고 분석했다. 노동당 35호실은 1978년 최은희 신상옥 씨 납치, 1987년 KAL 858기 공중 폭파를 기획한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작전부 역시 대남공작과 해외공작 모두를 담당해 왔다. 김영철은 정찰총국장으로 임명된 뒤 김정은의 신임을 받기 위해 크고 작은 도발을 일으켜 북한의 대표적 강경파 인물로 분류돼 왔다. 하지만 그는 2013년부터 지금까지 세 번 승진하고 두 번 강등당하기도 했다. 특히 김영철은 승진한 뒤엔 남한에 대한 도발을 기획해온 인물로 알려져 왔다. 2009년에는 정찰총국 소좌급 공작원 2명을 직접 만나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암살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보당국은 천안함 폭침의 배후로 김영철을 지목했다. 김영철은 2010년 10월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고 한 달 뒤 연평도 포격 도발을 주도했으며 2013년 2월에는 개성공단 폐쇄를 주도했다. 지난달 21일에는 평양에서 외신기자들을 불러 지뢰 도발과 남한 확성기 포격 사실을 부인하고 남측을 위협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대북 소식통은 “8월 초 군사분계선(DMZ) 목함지뢰 도발도 김영철이 공작조 체포 사건을 수습하지 못해 궁지에 몰리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김영철은 8월 기자회견 이후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정은 집권 이후 평양의 변화를 보려면 저녁에 젊은이들로 붐비는 개선청년공원이나 능라유원지에 가보면 된다. 처녀들 옷차림이 야해졌고 커플들이 팔짱을 끼고 활보한다. 5년 전만 해도 볼 수 없었던 광경이다.” 지난해 북한을 탈출한 평양 출신 탈북자는 “평양 여성들의 패션이 바뀐 건 퍼스트레이디 이설주의 공이 크다. 이설주가 하는 목걸이, 귀걸이, 반지, 명품 가방은 곧 유행이 된다.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짧은 스커트도 이설주가 입은 뒤 유행이 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평양의 고급 상점가인 모란봉구역 북새거리에서는 개당 가격이 1만 달러(약 1180만 원)가 넘는 한정판 롤렉스 시계도 팔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화사해진 평양 거리 젊은이들의 급격한 패션 변화에 북한 당국은 한때 당황해 단속에 나섰지만 지금은 손을 놓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정은 체제 초창기엔 규찰대가 길거리에 나가 ‘김정은 동지와 이설주 동지의 머리 모양은 따라 해도 좋지만, 목이 깊게 파인 옷이나 짧은 치마, 발목이 드러나는 바지(7분 바지) 같은 옷은 따라 입지 말라’며 일일이 검열을 했었다. 하지만 막을 수가 없다 보니 곧 포기했다.”(대북 소식통 A 씨) 서울에서 만난 한 탈북자는 “지난해 말 북한에 사는 친척이 남쪽에서 발행되는 헤어 패션잡지 이름을 불러주며 그 잡지를 구해 달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며 “미장원에서 그런 잡지를 몰래 숨겨두고 있다가 단골에게 보여주면서 남조선식으로 머리를 해주면 3배나 비싸게 요금을 받을 수 있다”라고 전했다. 스마트 기기 열풍도 거세게 불고 있다. 요즘 평양에선 학생이나 젊은이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또는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까지 스마트폰 화면을 보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김정은이 집권 이듬해인 2013년 8월 북한산 스마트폰인 ‘아리랑’ 생산 공장을 시찰하는 등 첨단 정보기술(IT) 기기 보급에 큰 관심을 보인 뒤로 평양의 정보화 바람이 더 거세진 것으로 전해졌다. 한 대북 소식통은 본보와 인터뷰에서 “요즘 평양 명문대의 일부 신입생들은 싱가포르에서 수입한 최신형 애플 노트북을 들고 와 강의 내용을 꼼꼼하게 메모하곤 한다”며 “한국이나 미국의 대학가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전했다. 올해 평양에는 국영 모바일 홈쇼핑(옥류)에서 상품을 사고 전자카드(나래)로 결제하는 서비스까지 시작됐다. ‘옥류’를 이용하면 ‘해당화관’ ‘해맞이식당’처럼 유명 식당 음식을 국영 운수사업소 배달서비스를 통해 집에서 먹을 수 있다. 아직은 구매 가능 품목이 많지 않지만 확장 가능성은 크다. IT 기기 보급 확대의 영향으로 남한, 미국 등 외부 문화 콘텐츠를 접하는 북한 젊은이도 늘어나고 있다. 휴대용 저장장치 등을 이용해 외국 영화나 드라마, 전자책 등의 콘텐츠를 노트북과 스마트폰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이 2011년 이후 탈북한 주민 6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에서 한국의 방송 영화 드라마 노래 등을 경험했다는 응답이 80% 이상으로 나타났다. 학력이 높을수록, 소득이 많을수록, 나이가 어릴수록 남한 문화 경험이 많았다. 중국 방문 중 본보와 전화 연결이 된 한 평양 주민은 “현재 북한에서 한국 노래를 가장 많이 유통시키는 세대는 중학생으로 특히 여중생들이 활발하다”며 “(북한 당국이) 평양의 모 중학교에서 학생들의 가방을 불시에 수색했는데 한국 노래가 적혀 있지 않은 수첩이 없을 정도였다. 수첩 하나에 수백 곡의 한국 가요가 적혀 있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일반 사회인들보다는 군인들이 한국 노래를 더 많이 부르고 있다”며 “다양한 연령대가 어우러져 있는 일반 사회 조직보다는, 비슷한 연령대가 모여 10여 년 동안 함께 생활하는 군인들이 더 동질성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보통신 기기에 눈을 뜬 북한 주민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점 중 하나는 전기다. 전력 부족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주민들 중에는 중국산 태양광 전지판을 구입해 설치하는 집도 늘고 있다. 20W용 태양광 전지판 하나는 북한 돈으로 35만 원(약 4만7000원)이다.○ 외부에 대한 호기심도 커져 최근 평양을 다녀온 외국인들도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일상 속 자유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전한다. 실제 만나본 북한 관료들의 태도에서도 미묘한 변화가 느껴진다고도 했다. 매년 세 차례 북한을 방문해 행정 관련 세미나를 열어 온 독일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 관계자는 “과거엔 형식적인 질문 몇 개만이 오갔지만 최근엔 간부들이 저마다 손을 들고 질문을 쏟아내 놀랐다”며 “최근에는 점심식사를 같이하는 것도 허용됐다”고 전했다. 올봄 평양을 방문했었다는 전직 독일 시장은 “최근 북한 간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관광업”이라며 “내가 시장으로 있던 도시가 어떻게 관광도시로 탈바꿈했는지 자세히 물으면서 그 과정에서 총리가 어떻게 결정했는지까지 물었다”고 말했다. 외국어 배우기 열풍도 개방 바람을 상징한다. 평양 출신 탈북자들에 따르면 평양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중국어와 영어 과외가 크게 성행하고 있다고 한다. 평양의 경우 강사 수준에 따라 월 20∼30달러인데 중국어는 조금 더 비싸다고 한다. 최근 평양을 방문한 한 미국 인사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려호텔에서 통역 없이는 체크인이나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는데 얼마 전 가보니 직원들이 영어를 해 의사소통에 불편함이 없었다”고 말했다.○ 서양 따라 하기 열풍 파견이나 사업 형태로 외국 생활을 체험한 북한 주민들이 늘면서 “외국처럼 잘살아 보자”는 바람도 불고 있다. 이들의 욕구가 가장 많이 반영되는 분야는 ‘집’이다. 주택 구매에 대한 당국의 통제가 유명무실해져 국가가 발행하는 주택 사용허가 서류인 ‘입사증(入舍證)’이 자유롭게 매매되면서 돈을 벌어 좋은 집에 살겠다는 것이 주민들의 꿈이 되고 있다. 이러다 보니 평양 부동산 가격도 매년 크게 뛰고 있다. 중국을 방문한 한 평양 시민은 시내 중심부에서 100m²(약 30평) 이상 되는 새 아파트 가격이 10만 달러(약 1억1800만 원)를 호가한다고 말했다. 신흥 부촌으로 뜨고 있는 보통강구역 북한 최고가 아파트는 180m²(약 50평) 이상의 크기에 20만 달러를 호가한다고 한다. 큰 방, 넓은 베란다, 대형 그림이나 화려한 무늬의 장식장 같은 것들이 부의 상징이 되고 있다. TV나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들도 삼성과 LG 제품이 최고로 통한다. 다만 아무리 비싼 아파트라도 전기가 부족해 에어컨을 설치하지 못하고 물이 잘 나오지 않아 샤워하기 힘든 것이 단점이다. 김정은 체제로 들어서면서 평양에 중국식 대형 슈퍼마켓과 각종 해외 요리 전문 식당, 호화 물놀이장과 놀이장, 극장 등이 잇따라 건설되는 것이 해외 경험을 가진 북한의 부유층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지난해 말 평양 보통강구역에 1호점을 낸 북한 최초의 편의점 ‘황금벌상점’은 올해 안으로 평양 20호점 개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현재로서는 평양에만 국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위 간부를 지내다 최근 탈북한 B 씨는 “최근 김정은의 치적을 내세우기 위한 대형 공사가 늘면서 주민 수탈이 김정일 시절보다 몇 배로 가혹해졌다. ‘젊은 놈이 더 지독하다’는 아우성이 빗발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초부터 최소 5명의 해외 파견 북한 고위급 무역 일꾼들이 탈북했는데 이들은 크게 늘어난 외화벌이 할당량을 감당하지 못하자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한국행을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주성하 zsh75@donga.com·김정안 기자}

김정은 체제 들어 가속화되고 있는 북한의 시장화는 주민 생활 개선이란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부정부패 확산이라는 사회적 부작용도 낳고 있다. 시장화의 최대 수혜자는 권력을 쥔 고위 간부 계층이다. 이들은 각종 이권에 개입해 뒷돈을 챙기며 재산을 늘린다. 권력이 클수록 오가는 ‘검은돈’ 규모도 커진다.○ ‘혁명’이란 말 뒤에 숨겨진 부의 세습 김정은 체제 들어 빈발하고 있는 ‘피의 숙청’은 권력 내부의 물갈이로 이어진다. 이와 함께 특정 간부가 처형되거나 숙청되는 바람에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된 경제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추악한 싸움도 벌어지고 있다. 이권 사업을 주도하는 이들은 주로 권력자의 자녀들이다. ‘뉴데일리’ 등 북한 전문 인터넷 매체와 복수의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현재 북한 최대 부자 중 한 명은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의 아들 김철이다. 청봉무역회사 사장인 김철의 개인 재산은 수천만 달러로 추정된다. 우리 돈으로 수백억 원의 자산가다. 김철은 석유 수입 등 다양한 분야에 투자해 거액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매년 중국에서 수입하는 석유는 약 6억 달러(약 7094억 원)어치. 수입 단가를 부풀리는 방법으로 차액을 챙길 수 있어 석유 수입권은 막대한 이권 사업으로 꼽힌다. 북한의 석유 수입권은 김정은 체제 초기까지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의 최측근이던 장수길 행정부부장이 사실상 독점해 왔다. 그러다 장성택 숙청 한 달 전인 2013년 11월 장수길이 처형되면서 김철이 석유 수입권을 거머쥔 것으로 알려졌다. 김철은 현재 북한 내부에서 ‘새끼 보위부장’으로 불린다. 재력과 아버지의 지위를 내세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변 보호를 위해 태권도 사범들을 경호원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철 다음으로 부상한 인물이 이영란이다. 그는 2010년 심장마비로 사망한 이용철 노동당 조직지도부 군 담당 부부장의 맏딸로 아버지가 죽은 뒤 황병서 총정치국장의 양딸이 됐다. 황병서는 이용철이 맡고 있던 핵심 요직인 노동당 조직지도부 군 담당 부부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황병서는 현재 북한 권력 서열 2위다. 이영란은 장성택이 갖고 있던 핵심 돈줄인 노동당 54부를 손에 넣었다. 54부는 석탄 등 광물, 수산물을 중국에 팔아 막대한 외화를 주무르던 부서다. 복수의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해 여름 김철이 이영란이 독점하고 있던 탄광과 어장의 이권에 군침을 흘리고 개입하면서 갈등이 빚어졌다. 그러자 황병서가 이영란을 돕기 위해 보위사령부(우리의 기무사령부 격)를 내세워 김철을 내사하기도 했다고 한다. 3일 중국 전승절 70주년 열병식에 북한 대표로 참석해 주목을 받았던 최룡해 노동당 비서의 아들 최현철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거부(巨富)로 꼽힌다. 대외 무역 등으로 돈을 버는 그는 미녀들을 끼고 다니며 외국을 자유롭게 오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대 말 아버지 최룡해가 섹스 스캔들로 좌천된 전례를 기억하는 평양 주민들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며 수군거리고 있다고 한다. 최현철은 또 과거 평양 시내에서 교통사고를 내고는 상대 운전자가 반체제 발언을 했다고 뒤집어씌워 총살당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 운전자가 평소 고지식하지만 마음은 착한 노(老)당원이어서 평양 시민들이 분노했다고도 전해진다. 복수의 북한 소식통들은 최근 본보와의 통화에서 “부모의 권세를 등에 업은 이런 ‘자녀 권력’에게 잘 보이려고 줄을 서는 돈주가 적지 않다”며 “이들과 친해지려면 최소 20만 달러(약 2억3600만 원)를 뇌물로 주어야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들의 권세는 늘 불안하다. 부모가 숙청되면 모든 부귀영화를 한순간에 빼앗기고 목숨까지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정일 체제 말기 최고 부자로 꼽혔던 이제강 조직지도부 1부부장(2010년 사망)의 사위인 차철마와 최고 여성 부호로 꼽혔던 김일철 전 인민무력부장의 딸(이름은 알려지지 않음)은 무대 중심에서 밀려났다. 북한 최고 간부들이 김정은 말에 절대 복종하는 것은 최소한 무난하게 은퇴해야 가문의 부를 지킬 수 있다는 현실적 이유가 크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들에겐 체제 수호가 곧 자신들의 생존과 기득권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빈부 격차의 심화 김정은 체제 들어 권력층의 부는 증가하는 반면 사회 전체적으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상반기 장사나 친지 방문 등의 목적으로 중국을 방문한 북한 주민 100명을 면접 조사한 강동완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대 다수인 98명이 “빈부 격차가 크다”고 답했다.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 설문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지난 4년간 탈북한 지 1년 미만인 북한 주민 600여 명을 대상으로 매년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북한 최상위 20%의 월평균 소득은 북한 돈 90만 원(약 13만 원)으로 최하위 20%의 월평균 소득 2만 원(약 2900원)의 45배다. 동일한 격차가 5.4배에 불과한 한국보다 훨씬 더 큰 빈부 격차다. 서울대 조사에 따르면 탈북자 78.9%가 북한에서 가장 잘사는 직업으로 중앙당 간부를 지목했고 14.3%가 두 번째로 잘사는 직업으로 법 집행 기관 간부를 꼽았다. 반면 가장 못사는 직업으론 57.1%가 농민을, 21.6%가 노동자를 각각 선택했다. 평양과 지방의 격차, 지방 간의 격차도 급속히 벌어지고 있다. 서울대 조사에 따르면 평양을 제외하고 북한에서 가장 잘사는 지역을 묻는 질문에 35.4%가 평안남도, 22.1%가 함경북도, 16.7%가 평안북도, 15.5%가 양강도를 꼽았다. 평양을 둘러싼 평남을 제외하면 나머지 3개 도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이다. 반면 가장 못사는 지역으로는 강원도(36.7%)와 황해남북도(24.3%)가 꼽혔다. 북한에서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기 전까진 곡창지대인 황해도의 생활 수준이 함경북도와 양강도보다 높았지만 지금은 평양 또는 중국과 얼마나 가깝고 먼가에 따라 잘사는 지역과 못사는 지역이 갈리고 있다. ○ 부정부패의 만연 강 교수의 설문조사에 응한 북한 주민 100명 중 90명은 ‘일을 해결하기 위해 뇌물을 준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준 적이 있다’고 답했다. 그만큼 뇌물 주고받기가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설문조사에서 북한 주민들은 “뇌물을 주지 않으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고 돈 대신 담배를 뇌물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고 대답했다. 북한에선 현재 1보루(10갑)에 10위안 상당의 가치가 있는 ‘고양이’ ‘고향’ ‘금강산’ 같은 담배가 뇌물 대용으로 인기가 있다. 또 중국 방문 허가를 얻으려면 공식적으론 50달러를 국가에 내야 하지만 실제론 300∼1000달러의 뇌물을 줘야 한다고 한다. 물질만능주의가 확산되면서 안전사고도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5월 발생한 평양시 평천구역 아파트 붕괴 사고는 돈과 권력의 유착, 개인의 욕망이 어우러져 빚어진 참사였다. 부정부패가 비리를 낳고, 비리가 부실 공사를 낳은 것이다. 황금만능주의 확산에 따른 사기 범죄도 해마다 크게 증가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으로 나온 평양 주민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최근 여성이 주도하는 사기, 절도와 매춘이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지난해 평양에선 여성 범죄만 전담해 수사하는 단속반이 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고 전했다.■ 글 싣는 순서 조기붕괴 예상 깬 정치권력 떠오르는 ‘붉은 자본가’ 북한 시장화의 그늘 외부로 분출되는 북한의 욕망주성하 zsh75@donga.com·김정안 기자}

김정은 체제 들어 북한 경제는 조금씩 호전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북한 경제는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매년 1% 수준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비록 폐쇄적인 북한의 특성상 정확한 경제 관련 통계를 얻기는 힘들지만 일정한 경향성은 확인할 수 있다. 탈북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북한 경제의 호전은 당국의 노력이 아닌, ‘돈주’로 불리는 신흥 자산계급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김정은 시대 번창하는 붉은 자본가 ‘돈주’ 돈주는 ‘돈의 주인’이란 뜻으로 1990년대 초반부터 북한에서 자산(資産)이 많은 부자를 가리키는 용어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보통 1만 달러(약 1180만 원) 이상을 보유하면 돈주로 불린다고 한다. 북한에 돈주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긴 어렵지만, 최소 수만 명은 될 것으로 추산된다. 돈주들은 다양한 분야에 투자를 하며 북한의 시장화를 빠르게 이끌고 있다. 현재 북한의 돈주들은 투자 분야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는데, 어선에 투자하면 ‘선주(船主)’, 광산에 투자하면 ‘광주(鑛主)’, 운송업에 투자하면 ‘차주(車主)’, 땅에 투자하면 ‘지주(地主)’로 불리는 식이다. 돈주들은 수익금을 다시 다양한 분야에 투자해 이윤을 확대하고 있다. 최근 북한 돈주들의 집중 투자처는 부동산, 운송, 광산업, 서비스업 등이다. 나진선봉 지역에서 대학교수를 했던 현인애 통일연구원 객원 연구위원은 “요즘 평양에서 가장 핫한 투자처는 건설업”이라며 “여럿이 돈을 모아 아파트 한 채를 지으면 최소 30% 이상의 이윤이 남는 것으로 전해진다”고 했다. 그는 “평양에서 건설되는 대다수 고급 아파트들의 건설 주체는 공기업이지만 건설 자금은 돈주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그야말로 자본주의식 투자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중국에 나온 길에 본보 기자와 통화가 된 한 평양 주민은 “돈주가 투자해 건설한 아파트가 평양에만 최근 5년 동안 5만 채가 넘는다”며 “이에 비해 같은 기간 김정은의 지시로 국가가 투자해 건설한 아파트는 5000채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최근 “올해 4월에는 김정일의 경호부대가 사용하던 건물까지 돈주에게 팔려 화제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건물은 평양 시내 노른자위 땅인 중구역 경흥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한 돈주가 60만 달러에 사서 살림집으로 개조한 뒤 되팔아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운송업 또한 돈주의 독무대로 자본주의식 경영이 활발하다. 지난 2년간 중국과 한국에서 탈북자 및 북한 무역상 수백 명을 인터뷰한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신의주나 원산 같은 곳은 시내버스도 민간 자본에 의해 운행되고 있다”며 “중고 버스를 중국에서 5000∼1만 달러에 사와 당국의 비호 아래 운영하고 이윤을 나누는 형태”라고 전했다. 대북 소식통들에 따르면 평양의 택시 운행 대수가 최근 대략 1000대가 넘었는데, 60∼70%는 돈주의 소유라고 전했다. 석탄, 금 등의 채굴도 돈주의 집중 투자처다. 아오지 탄광으로 유명한 함북 은덕군에서 2년 전 탈북한 A 씨는 돈주가 운영하는 탄광에서 일당을 받으며 석탄을 캤다고 한다. 돈주가 국영기업인 탄광에 돈을 주고 폐갱을 산 뒤 일당직 노동자 10여 명을 고용해 탄을 캐서 장마당에 파는 회사였다. 이런 식으로 돈주가 운영하는 탄광은 은덕군에만 100개가 넘으며, 전국적으론 수천 개가 될 것으로 추산된다. 란코프 교수는 “김정은 시대 들어 민간 자본에 대한 단속이 거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며 “현재 북한 경제는 정부가 아닌 돈주에 의해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시장경제 마인드의 급격한 확산 돈주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경쟁을 부르고 있다. 북한 사회주의 경제가 자본주의로 변하는 싹들이 곳곳에서 싹트고 있는 셈이다. 대표적 사례가 초보적 수준의 자본주의적 마케팅 기법이 적극 도입되고 있는 것. 최근 평양을 방문했던 한 외국인은 “평양의 한 카페에서 음료 10잔을 마시면 1잔을 공짜로 주는 쿠폰을 나눠 주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더 이상 국가 주도 공사에 무보수로 끌려가 일하려 하지 않는 사례도 나타난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벌여놓은 평양의 대규모 공사장에서도 돌격대원들이 무리로 이탈하는 현상이 빈발한다는 것. 실제로 평양의 개인집에서 실내 인테리어나 연탄만들기 등을 하면 중국 인민폐 수십 위안을 하루 일당으로 챙길 수 있다고 한다. 군인들도 일당을 챙기기 위해 민가에 가서 며칠씩 일한 뒤 부대로 복귀해 지휘관에게 뇌물을 주는 현상이 전국에 일상화됐다고 탈북자들은 전한다. 인력시장도 형성됐다. 주요 도시 장마당 앞에는 일감을 얻기 위해 젊은 사람들이 몰려 서 있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하는 일과 기술 숙련도에 따라 보수는 인민폐 10위안(북한 돈 1만3000원)부터 100위안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돈주가 주도하는 북한의 경제 성장이나 자본주의화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소규모 상거래나 유통은 활성화되고 있지만 국가 기간산업은 여전히 회복 불능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평양을 다녀온 서방의 한 비정부기구(NGO) 관계자는 평양순안공항 완공 전 활주로 공사 현장을 목격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 건설 현장에는 크레인 등 기계장비를 쉽게 볼 수가 없다. 모두 다 인민이 수작업으로 한다. 아프리카 극빈국보다 못하다. 공항 활주로 건설장에도 기계는 하나 없고 1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활주로 시멘트를 손으로 바르고 있더라. 정말 놀랐다.” 북한 주민생활 개선을 북한 경제 호전으로 보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의 3대 세습이 공식화된 지 27일로 만 5년이 된다. 북한은 2010년 9월 27일 김정은(사진)에게 인민군 대장 칭호를 수여하면서 세상에 ‘김정은’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알렸다. 이렇게 등장한 김정은은 ‘북한 체제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지금까지 끄떡없이 절대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김정은이 권력 안정성 측면에서 안정기에 접어든 것 같다”며 “과거 레닌과 스탈린 모두 공포정치로 권력을 강화했다는 점에서 공포정치가 정권의 불안정성으로 반드시 연결되지는 않는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외향적 안정성과는 달리 지도자에 대한 북한 간부들의 불만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관측도 있다. 북한 외교관 출신인 고영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김정은이 끊임없이 새로운 건설 과제 등을 제시하고 이를 수행하지 못하면 무자비한 처벌을 하기 때문에 간부들은 ‘도저히 이 상태로 더 살지 못하겠다’고 아우성치고 있다”고 전했다. 김정은 등장 이후 주민 생활은 호전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이 김정은 체제에서 살다가 탈북한 북한 주민 600여 명을 대상으로 2012년부터 진행해 온 조사에 따르면 현재 북한에선 굶는 사람이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이 같은 경제 호전은 착시 현상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다. 현인애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주민 생활의 호전은 당국이 아닌 ‘돈주(돈이 주인이라는 뜻으로 ‘부자’의 다른 말)’로 불리는 신흥 자산계급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주성하 zsh75@donga.com·김정안 기자}
김정은의 리더십 한계와 경험 부족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분야는 대외정책이다. 특히 최근 북-중 관계는 ‘혈맹’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북한은 9일 정권 수립 67주년을 맞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보내온 축전을 노동신문 2면에 실었다. 반면 러시아와 쿠바에서 보내온 축전은 1면으로 다루었다. 중국도 이달 초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 때 최룡해 노동당 비서를 톈안먼 성루의 끝자리에 배치하는 등 사실상 홀대했다. 얼어붙은 북-중 관계는 당분간 개선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북한 내부 고위 소식통은 “최근 김정은이 간부들 앞에서 ‘중국놈들에게 역사와 오늘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주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중국도 북한을 과거와 다르게 다루고 있다. 청샤오허(成曉河) 중국 런민대 교수는 7일 “시 주석 집권 이후 중국이 북한과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에서 일방적인 징벌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중국의 한 북한 무역 관계자는 “최근 중국이 금융과 통관 등 여러 분야에서 북한을 옥죄고 있다”며 “여러 계약이 파기됐고 인력 파견도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는 “북한이 유엔 제재 속에서도 버틴 것은 중국이란 ‘뒷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은 그 뒷문이 열렸다 닫혔다 한다”고 말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0년 9월 27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이 ‘인민군 지휘성원들의 군사칭호를 올려줄 데 대한 명령’ 제0051호를 하달했다고 보도했다. 김 위원장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을 비롯해 김경희 당 경공업부장(김 위원장의 여동생), 최룡해 노동당 비서, 현영철 인민군 8군단장, 최부일 인민군 부총참모장, 김경옥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등을 대장으로 승진시킨다는 발표였다. 그해 26세였던 ‘김정은’ 이름 석 자가 북한 관영 매체의 보도에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당시 정보기관과 전문가들은 북한 정권이 김정은 3대 세습을 공식화한 것으로 평가했다. 한국 언론들도 김정일의 3남 이름을 ‘김정운’으로 표기해 오다 이 발표 이후 김정은으로 정정했다. 김정은은 대장 승진 발표 하루 뒤인 9월 28일에 열린 노동당 제3차 대표자회를 통해 처음 공식석상에 얼굴을 드러냈고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당 중앙위원 자리까지 거머쥐었다. 이듬해 12월 17일 아버지 김정일이 갑작스럽게 심근경색으로 숨지면서 김정은은 약 4개월간 애도기간을 거쳐 2012년 4월 11일 노동당 제1비서, 이틀 뒤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취임하면서 1인자 자리에 올랐다. 이후 김정은은 공포의 숙청을 통해 권력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김정은 공식 등장 이후 북한을 탈출한 주민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북한은 지금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과거 어느 때보다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김정은 등장 5년을 맞아 본보는 외국 전문가와 탈북자 30여 명을 지난 2개월간 심층 인터뷰해 간접적으로나마 북한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추적했다.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북한의 정치 경제 문화 분야의 변화상을 4회로 나눠 보도한다. 》 ‘어리고 미숙하다’는 평가에도 김정은이 4년 가까이 끄떡없이 권좌를 지키고 있는 비결은 뭘까. 우선은 오랜 시간 북한 사회에 내재된 순수 혈통이 주는 배타적 정통성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한 노동당 간부 출신 고위급 탈북자는 “김정은 체제를 지탱하는 5할은 ‘김일성’이라는 신적 영역이 만들어놓은 주민들의 잠재의식이고 3할은 공포정치와 굳건한 감시 시스템, 그리고 2할은 개인적 리더십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탈북자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내려오는 이른바 ‘백두 혈통’은 북한에선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라며 “수십 년 동안 다져놓은 이들에 대한 신격화는 주민들의 머릿속에 ‘수령은 백두혈통만 할 수 있다’는 잠재의식을 세뇌시켰다. 김정은이 집권 이후 외양과 행동까지 할아버지 김일성을 흉내 내는 것은 주민들의 이런 잠재의식을 활용하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이라고 했다. ‘백두혈통 세뇌 효과’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지난달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이 발표한 탈북자 656명 대상 설문조사를 보면 ‘주민 과반수가 김정은을 지지하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62.7%나 됐다. 이 조사는 2012년부터 2015년 사이 매년 탈북 1년 미만 탈북자 100여 명을 선정해 진행됐다.○ 붕괴 가능성 당분간 작아 최근 북한을 오간 해외 북한 전문가들 중에는 김정은 정권의 붕괴 가능성이 당분간 희박하다는 시각이 많다. 대니얼 핑크스턴 국제위기기구(ICG) 서울사무소장은 “(북한 입장에서만 보면) 김정은은 상당히 유능한 독재자로 보인다”며 “김정은의 후세대까지 4대 권력 세습이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적어도 수십 년 동안 김정은의 통치가 견고히 유지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분석했다. 제니 타운 38노스 책임연구원도 “북한 현지 경제 상황이 상당히 호전되어 가고 있고 연속적인 가뭄에도 쌀 가격 등은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북한에서 자생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시장 경제 활동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주민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는 평이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해 김정은은 ‘5만 달러까지는 그 출처를 따지지 말라’며 자본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도록 하라는 ‘특명’을 내렸다고 한다. 과거 투자금의 출처를 꼼꼼히 따지고 사회주의법에 반한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투자금을 즉각 회수했던 것과는 차별화된 변화라는 것. 그만큼 이윤을 목적으로 한 개인투자자들의 활동 범위도 이전보다 넓어졌다는 것이다.○ 뉴제너레이션의 등장 김정은 체제에서 가장 주목되는 권력계층은 충성 경쟁을 벌이는 신진 엘리트 집단이다. 관료 출신 한 탈북자는 “김정은은 2012년 중간급 간부들을 50대 미만으로 교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수십 년간 보좌해온 측근들이 뒤로 물러나고 신진 엘리트들이 권력을 잡을 기회가 생긴 것이다. 야심만만한 신진 엘리트들이 김정은의 눈에 들기 위해 그의 명령을 물불 가리지 않고 수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북한을 빠져나온 간부 출신 탈북자는 “김정은 말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유일 영도 체제’는 단순히 공포정치만으론 설명할 수 없다”며 “신진 엘리트들이 북한 정권을 탄탄하게 떠받치고 있다”고 했다. 해외에 체류 중인 한 북한 간부는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충성심 때문만이 아니다. 북한에선 권력과 부가 비례한다. 큰 권력을 잡을수록 이권에 개입하거나 뇌물을 받아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숙청으로 자리가 비는 만큼 기회가 생기는 것이어서 그 자리를 새로운 신진세력이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이른바 외국 물을 먹은 세대들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북한대학원대 이우영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중국과 러시아 내 북한 노동자는 최대 15만 명에 육박한다. 이 교수 연구팀은 최근 2, 3년 동안 중국과 러시아에 나와 있는 북한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 이들의 생활 실태와 인식 조사를 해 오고 있다. 김정은 시대 들어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해외에 파견된 근로자가 김정일 시대에 비해 2배 이상 많아졌을 뿐 아니라 이들이 북한에 돌아가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도 상당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이 북한에 돌아가 자신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해외 노동 경험을 ‘공통분모’로 정기적으로 만나거나 자신들만의 정보망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하면서 해외 생활을 통해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향후 북한 변화를 이끄는 동인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북한 내 신흥 부르주아나 해외 노동 경험이 있는 해외파들은 아직까지는 북한 당국과 협조하고 야합하는 세력”이라며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이들이 생각하는 이득과 북한 당국의 이득이 상충할 때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민심은 이탈… “평양서 김정은 뉴스 나오자 볼륨 줄이기도” ▼○ 노동당이 등을 돌린다 하지만 내부 균열도 커지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간부들의 불만이다. 한 대북 소식통은 “간부들이 공개적으로 얘기하지 못할 뿐이지 불만은 매우 크다”고 덧붙였다. 무리한 요구라도 따르지 않으면 목숨을 보전하기 어렵다. 김정은 시대 들어 할아버지나 아버지 때와는 달리 당원들이 이탈하는 등 하부 조직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다. 우선 당의 통제하에 국가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사회주의 국가 시스템이 급격하게 해체되고 있다. 함경북도 주민 A 씨는 국영기업 하급 간부였지만 3년 전부터 공장에 나가진 않는다. 대신 공장에 매달 북한 돈 5만 원을 내고 있다. 현재 북한 암시장 달러 환율 8200 대 1을 적용할 때 5만 원은 약 6달러(약 7100원)이다. 이 돈이면 장마당에서 쌀 10kg, 옥수수 30∼40kg 정도를 살 수 있다. 서류상으로만 공장에 소속된 A 씨는 가을에는 송이버섯을 캐고, 여름 3개월은 바다에서 오징어를 잡는다. 직장에 5만 원을 내고도 충분히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로 수입이 짭짤하다. A 씨는 본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직장에 매이기보다는 이 편이 훨씬 자유롭고,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다”며 “배급제도가 되살아나 과거 사회주의 체제로 돌아갈 수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때로 돌아갈까 봐 겁을 낸다”고 전했다. A 씨 사례는 김정은 체제 이후 급격히 해체되는 북한의 사회주의 국가 시스템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과거 수십 년간 북한 체제를 지탱하는 전통적 기반은 ‘인민대중-노동계급-노동당-핵심 통치 집단-수령’이었다. 하지만 인민대중과 노동계급의 상당수는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심적으로 수령으로부터 이탈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더는 국가와 지도자가 자신들을 먹여 살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은 스스로 자기 살길을 개척하고 있다.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지도자에 대한 불신은 오히려 당원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 대상인 2013년 이후 탈북한 주민 291명 중 46명은 북한에서 당원이었다. 조사에서 당원 출신 탈북자의 82.6%가 북한 경제가 어려운 이유를 최고영도자 때문이라고 답했다. 비(非)당원 출신 탈북자는 이보다 적은 70.4%가 경제난의 책임을 김정은에게 돌렸다.○ 당원도, 간부도 기피 대상 이런 분위기 속에 노동당원과 간부의 인기가 크게 떨어지고 있다. 특히 김정은 체제 들어 간부를 기피하는 현상이 뚜렷해졌다. 지난해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B 씨는 고위직 진출이 가능할 정도로 출신성분이 좋지 않은 이상 당원도 되지 않으려는 풍조가 팽배해 있다고 전했다. “옛날엔 당원이 돼야 간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기어코 당원이 되려 했다. 당원이 되려고 수백 달러씩 뇌물을 바치던 것이 6∼7년 전이다. 하지만 이제는 당원이 되라고 비서가 사정해도 안 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원이 되면 통제도 더 강해지고, (비리를 저질렀을 때) 처벌도 비당원보다 몇 배 더 세기 때문이다.” 간부 기피 바람은 보위부와 같은 권력기관도 예외가 아니다. 올해 탈북한 북한 관료 출신 C 씨는 평안남도 ○○군 보위부의 경우 정원의 반밖에 차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는 “보위부는 정치적 범죄만을 다루는데 요새는 주민들의 신고가 줄어 정치범을 잡기가 힘들다”고 전했다. 이런 당원과 간부 기피 현상은 북한 체제를 지탱하던 하부 조직이 급격히 썩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정은이 지난 3년 반 동안 공포통치를 펼치는 사이 북한의 팔다리가 서서히 마비되고 있는 셈이다.○ 주민들 “너는 김정은, 나는 나” “누가 지도자가 되건 관심도 없다. 관심이 있다 해도 우리가 뭘 어떻게 할 힘도 없다. 그냥 ‘너는 너대로 왕 노릇 해라, 우린 우리대로 산다. 제발 우리를 못살게 굴지만 말아 달라’는 분위기다.”(함경북도 주민 D 씨) “가족 먹여 살리기도 힘든데 김정은이 간부를 죽이건 말건 그건 남의 일일 뿐이다. 누가 처형됐다고 하면 또 누가 죽어나갔구나, 다음에 또 누가 죽어나가겠구나 다들 쉬쉬한다. 우리야 어차피 권력에 가까운 사람들도 아니니 죽을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니다. 어차피 수십 년째 이러고 사니까 그러려니 한다.”(양강도 주민 E 씨) 지난달 휴대전화로 본보 기자와 통화한 북한 주민들이 전한 현지 민심이다. 김정은 체제를 바라보는 주민들의 의식은 ‘체념’과 ‘무관심’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치에 관심을 끊고 돈이나 많이 벌자는 인식이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집권 3년 반을 맞으면서 북한 정권이 과거 수십 년간 자랑해온 수령과 대중의 ‘혼혈일체(渾血一體)’ 전통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혼혈일체는 주체사상에 뿌리를 둔 북한의 핵심 통치 구호로 모두가 수령과 함께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공동체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북한은 김정은 말 한마디에 벌벌 떠는 고위 간부들의 ‘상위 리그’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이 자기 돈벌이에만 몰두하는 평범한 주민들의 ‘하위 리그’로 갈라져 있다. 김정은 역시 주민들에겐 더이상 ‘경외의 대상’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순종하는 통치자일 뿐이다. 최근 평양에서 근무하고 온 한 서방 외교소식통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평양의 한 식당에서 김정은 관련 뉴스가 나오자 시끄럽다는 듯 TV 볼륨을 줄여버리는 광경도 목격했다”고 전했다. 진희관 인제대 교수는 이와 관련해 “김정은 체제는 과거(김일성 김정일 시대)와 달리 지도자와 핵심 권력 엘리트 간 유대감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라며 “김정은과 핵심 권력 엘리트의 관계는 충성을 바치고 권력과 돈을 얻는 상업주의적 거래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관계는 통치자금이 고갈되는 순간 금이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글 싣는 순서 조기붕괴 예상 깬 정치권력 떠오르는 ‘붉은 자본가’ 북한 시장화의 그늘 외부로 분출되는 북한의 욕망주성하 zsh75@donga.com·김정안 기자}

장성택의 목을 친 김정은의 칼끝이 다음엔 누굴 겨눌까. 지난해 초반 나는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을 지목했다. 김원홍은 고위층들의 구린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 점 때문에 노동당 조직지도부나 군부 간부들은 김원홍을 공공의 적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지난해 8월경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군 보위사령부를 내세워 김원홍의 아들인 김철을 외화 횡령과 경제질서 혼란 주도 혐의로 내사했다는 정보가 흘러나올 때 드디어 올 것이 오는가 싶었다. 그런데 김원홍은 지금까지도 건재하다. 그가 김정은의 신임을 얻는 데 대단한 노하우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북한 고위 소식통에 따르면 김원홍은 장성택 처형의 최대 공신으로 발언권이 커졌던 지난해 초 김정은에게 제안해 조직지도부에 보위부 담당 부부장 직제를 새로 만들고, 그 자리에 자신의 심복을 앉혔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라이벌인 조직지도부 내부에 자신을 막아줄 방패 하나는 갖게 되는 셈이다. 김원홍이 간단치 않은 인물이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역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는 것 같다. 김원홍은 과거 숙청에 이용된 뒤 ‘토사구팽’ 당한 수많은 선배들을 지켜본 사람이다. 김정일 시대에 토사구팽 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사회안전부 정치국장이었던 채문덕이다. 1990년대 후반 김정일은 채문덕을 시켜 ‘심화조’ 사건이라는 것을 조작해 수많은 고위 간부들을 제거했다. 서관희 노동당 농업비서가 간첩 누명을 쓰고 평양시민들 앞에서 공개 총살됐고, 문성술 중앙당 본부당 책임비서와 서윤석 평남도당 책임비서는 가혹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거나 정신병자가 됐다. 이때 수많은 고위 간부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2만5000여 명이 숙청된 것으로 전해진다. 김정일은 대량 아사로 흉흉해진 민심을 딴 곳으로 돌리고 김일성 시대의 노간부도 제거하는 일석이조의 결과를 얻었다. 당시 채문덕은 매일 숙청 명단을 들고 가 김정일의 비준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나친 처형으로 민심이 들끓자 김정일은 채문덕을 ‘공명심과 야망으로 사실을 날조하고 혁명동지들을 억울하게 죽게 한 극악한 살인마’로 낙인찍고 2000년 7월 그를 심복 15명과 함께 공개 총살했다. 채문덕의 일가는 멸족됐고 그의 지휘를 받던 안전원 4000여 명이 군복을 벗고 숙청됐다. 이런 사례를 무수히 목격했던 김원홍이 토사구팽이란 단어를 매 순간 떠올리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일 터. 하지만 김정은이 변심하면 제 아무리 김원홍이라도 방법이 없다. 살기 위해선 자신이 왜 필요한지 김정은에게 부단히 주입시키는 길밖에 없다. 이런 김원홍에게 걸려든 대표적 표적이 ‘미녀 응원단’이었다고 한다. 북한은 지난해 7월 인천 아시아경기에 미녀 응원단을 보내겠다고 했다가 8월에 파견 불가를 통보했다. 북한은 “남측이 응원단 규모와 공화국기 크기, 체류 비용 등을 거론하며 시비를 걸기 때문에 응원단을 보낼 수 없다”고 이유를 밝혔다. 이 때문에 남쪽에선 정부가 속이 좁았다는 비난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소식통이 전해준 진짜 내막을 들어보면, 남쪽이 북한의 요구를 다 들어주었다고 해도 응원단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응원단이 모집되자 숱한 간부들이 자기 딸을 넣으려고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딸에게 남쪽 구경을 시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남쪽에 응원단으로 파견돼 갔다”는 것은 곧 “국가대표 미녀로 인정받았다”는 증명이다. 이는 유학도 마음대로 못 가는 폐쇄된 북한에서 결혼 직전의 여성이 쌓을 수 있는 최대 스펙이기도 하다. 북한은 23∼25세를 여성의 결혼 적령기로 본다. 응원단으로 뽑혔다는 후광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상태에서 혼삿말이 오가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부모들이 딸을 뽑아달라고 담당 부서에 경쟁적으로 뇌물을 찔러 주었는데, 1000∼3000달러 정도가 오갔다고 한다. 보위부장인 김원홍이 과거 응원단 선발 때부터 전해져 온 이런 관행을 몰랐을 리는 없다. 하지만 공교롭게 지난해 여름 김정은이 김원홍을 찾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한다. 더구나 장성택 측근 숙청이 반년 넘게 이어지면서 보위부에서도 장성택과 가까웠던 주요 간부들이 하나둘 사라지게 되니 김원홍도 불안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응원단 비리를 자기의 존재 이유를 보여주는 카드로 써먹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김원홍의 보고를 받은 김정은은 즉각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2005년 인천에 응원단으로 왔던 이설주에게 진짜 그런 일들이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았을까 싶다. 약 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김정은은 김원홍에게 전화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랄발광들 하는군. 역시 믿을 건 보위부밖에 없습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지하철 등 대중교통에서 다리를 넓게 벌리고 앉아 옆자리 승객을 불편하게 하는 ‘쩍벌남’의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 ‘맨스프레딩(Manspreading)’이 영국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새로 올랐다. 옥스퍼드 사전 편집자들은 27일 ‘쩍벌남’을 포함해 신조어 1000여 개를 추가했다. 1985년부터 1992년까지 미국 ABC방송의 인기 시리즈였던 ‘맥가이버(MacGyver)’도 이번에 신조어로 포함됐다. 맥가이버는 ‘가지고 있는 재료나 도구를 기발하게 사용하여 무언가를 만들거나 수리한다’는 뜻의 동사로 등재됐다. 이 밖에 배가 고파(hungry) 화가 난다(angry)란 뜻의 ‘행그리(hangry)’, 호주머니의 휴대전화 버튼이 눌려 의도치 않게 전화가 걸린다는 뜻의 ‘포켓 다이얼(pocket dial)’, 바지 뒷주머니에 넣은 휴대전화가 잘못 눌러져 전화가 걸린다는 뜻의 ‘버트 다이얼(butt dial·엉덩이 다이얼)’ 등도 새로 등재됐다. 신조어는 옥스퍼드 온라인 사전에 분기마다 추가되며 사전에 올라가려면 대중이 꾸준히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남한에서 송출되는 대북 확성기 방송이 들리는 북한 지역 10km 범위 안에는 완전히 상반되는 두 종류의 북한군 병사들이 근무한다. 출신 성분이 가장 좋은 간부 자녀들과 출신 성분이 가장 안 좋은 노동자 농민의 자녀들이다. 간부 자녀들은 군사분계선(MDL) 비무장지대 2km 정도 구간의 경비와 수색을 담당하는 민경(민사행정경찰) 부대에서 주로 일한다. 민경의 선발 요건 제1조는 ‘계급적 토대’, 즉 출신 성분이다. 이렇게 따져 뽑다 보면 주로 간부 부모를 둔 자녀들이 선발될 수밖에 없다. 전방에는 민경대대가 10여 개 있고, 대대마다 1800명 정도 배속돼 있으니 민경 전체는 2만 명이 좀 안 된다. 민경은 북한군에서 최상의 대우를 받는다. 최전방 사단에 소속돼 있지만 보급은 평양에서 따로 받는다. 매주 두세 끼 육류를 먹고, 당과류와 필터담배도 공급된다. 명절 때마다 꿩고기 사탕 귤 등이 담긴 선물박스가 전달된다. 외출 때 장교복을 입고 나가는 특권도 보장되며 제대하면 공산대 졸업증을 받고 곧바로 간부로 등용된다. 반면 민경부대 약 1km 후방에 있는 ‘1제대’ 부대엔 출신 성분이 나쁘고 가난한 집 자녀들이 주로 간다. 부모들은 자식을 배고픈 고생이 덜한 국경경비대나 해안경비대 같은 좀 나은 부대로 빼돌릴 연줄도 돈도 없다. 1제대에 속하는 최전방 1, 2, 4, 5군단 병사들에 대한 보급은 최악이다. 3년 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노크 귀순’ 사건의 당사자가 귀순 후 “배가 고파 칡뿌리를 캐 먹었고 소금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오랜만에 맛본 소금에서 단맛이 났다”고 했던 게 대표적이다. 특히 강원도 1, 5군단은 피복 공급도 제대로 되지 않아 신발 밑창에 나무껍질을 덧대고 다니는 병사도 적지 않다. 김정은 시대 들어 1제대 군단들은 더욱 홀대를 받고 있다. 김정은은 집권 이후 “체제의 최대의 적은 미제나 남조선이 아니라 탈북자”라고 공언한 뒤 북-중 국경을 분계선처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에 최근 북-중 국경이 전기철조망으로 봉쇄되고 지뢰까지 매설된다는 정보도 있다. 식량과 피복 등 군수물자는 국경경비대에 우선적으로 공급된다. 전방 군단이 홀대받는 이유는 북한군의 전력으로 남침하기엔 어림도 없고 그렇다고 한미 연합군이 북진해 올라올 일도 없다는 것을 김정은이 잘 알기 때문이다. 5중의 전기철조망과 조밀한 지뢰밭에 민경까지 지키고 있어 병사들이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남쪽으로 탈출하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분계선 남쪽 비무장지대 한국군 경계초소(GP)와 일반전초(GOP) 사이에 위치한 대북 확성기 방송은 이런 두 부류의 병사들에게 외부 소식을 전해준다. 방송 내용은 2004년 중단하기 전과 별 다를 바가 없지만 그 위력은 11년 전에 비해 몇 배로 더 커졌다. 청취자인 북한 병사들이 ‘장마당 세대’로 완전히 구성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사사전에도 올라온 ‘장마당 세대’는 ‘국가 배급망이 붕괴된 이후 태어나 국가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 세대’이다. 이 세대의 또 다른 특징은 간부 자녀든, 가난뱅이 자녀든 대북 방송에 솔깃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근래에 북한 사회를 휩쓴 한류의 주 소비자가 바로 간부 자녀들이다. 한국 제품을 가장 선호하는 부모들 밑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며 한국 말투를 따라 한 세대가 현재 민경에서 근무한다. 이들의 머릿속에 한국은 부유하고 자유로운 곳으로 각인돼 있다. 1제대 병사들은 부익부빈익빈이 고착화된 사회구조 속에서 체제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부모 밑에서 성장했고 충성심이 매우 희박하다. 이런 병사들에게 김정은 체제의 실상을 전달하면 어떻게 될까. 물론 그들이 당장 폭동을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 입장에선 체제를 지키라고 보낸 수십만 명의 병사가 10년 넘게 반동으로 세뇌돼 제대한 뒤 전국에 흩어지는 상황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민경 병사들은 미래의 북한 간부이기도 하다. 기를 쓰고 탈북하는 북-중 국경경비대만도 골치가 아픈데, 남쪽에서까지 체제 불만 세력이 자란다면 북한 체제는 어떻게 될까. 대북 확성기 방송이 재개되자마자 북한 고위급 대표단이 급히 달려와 사활을 걸고 회담에 매달린 것엔 이런 사정이 숨어 있다. 북한이 이번에 확성기 방송을 중단시켰다고 안심할 순 없을 것이다. 북한이 점점 더 높이 쌓아가고 있는 거짓의 누각은 진실이 파고들수록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동시에 시간이 흐를수록 대북 확성기의 위력도 커지게 될 것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이 “48시간 내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지 않으면 전면전도 불사하겠다”고 22일 공언한 것과는 달리 내부적으론 국지전을 수행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소식통들에 따르면 북한의 핵심 군 장비는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0주년 열병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평양에서 마감 훈련을 하고 있다. 북한이 남북 고위급 당국자 접촉에 전격적으로 나오게 된 배경도 김정은이 공언한 ‘48시간 최후통첩’의 딜레마를 풀기 위한 것이었다는 추정이 나온다. 48시간 내에 행동을 하지 않으면 김정은의 권위가 크게 떨어지고, 도발을 한다 해도 한국의 반격에 큰 타격을 입으면 김정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핵심 군 장비 열병식에 동원 현재 열병식 준비에 동원된 북한 군 병력은 평양 외곽 미림비행장에서 막바지 훈련에 열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소식통은 “9월 3일 중국의 전승절 열병식보다 더 크게 준비하라는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3만 명 규모로 열병식을 준비하고 있으며 핵심 군 장비들이 총출동했다”고 말했다. 중국이 9월 3일 진행하는 전승 70주년 열병식엔 1만2000명의 병력이 참가한다. 소식통은 “열병식에 북한의 최정예 기계화 장비와 전투기 등이 대거 차출됐다”며 “특히 북한 이동식 미사일 발사대의 경우 수량이 많지 않은데 실전에 쓸 만한 차량은 현재 평양으로 상당수 옮겨져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열병식 참가 병력도 후방 군단인 함경북도 9군단과 자강도 12군단, 평양시 대학생 중에서 주로 차출됐지만 무력시위 성격의 핵심 장비는 일선 부대에서 차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국지전에 돌입할 경우 부대가 둘로 나뉘고 핵심 장비들을 평양에 차출당한 부대들의 작전 수행능력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만약 남한 도발을 위해 열병식 훈련을 중단하고 장비들을 부대에 복귀시킬 경우 북한이 야심 차게 준비해 온 노동당 창건 행사는 물 건너 갈 수밖에 없다. 북한은 열병식과 집단체조 관람을 패키지로 묶은 관광상품을 외국인들에게 팔 정도로 당 창건 행사에 공을 들이고 있다.○ 전방 ‘준전시 선포’ 속내는 북한이 전방지역에만 준전시상태를 선포한 것도 전국에 대대적인 공사판을 벌이며 주민을 ‘100일 전투’에 총동원시키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 북한 당국은 7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100일 동안을 ‘건설 전투’ 기간으로 선포한 뒤 주민들을 밤잠도 제대로 재우지 않고 공사 완공에 동원하고 있다. 주요 대상물의 경우 공화국 창건일인 9월 9일까지 완공하라는 김정은의 지시도 하달된 상태다. 만약 전국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면 모든 공사가 중단되고 주민들은 전쟁 준비에 돌입해야 한다. 그러면 노동당 창건일을 맞이해 대규모 건설을 마감하고 김정은의 치적을 선전하려던 노력도 물거품이 된다. 최근 북한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공사는 평양 대동강 쑥섬 10만 m²의 넓은 부지에 짓고 있는 과학기술전당과 미래과학자거리이다. 완공을 앞둔 요즘 수만 명의 군인과 주민들이 동원되고 있으며 군에 공급돼야 할 유류도 공사장에 우선 돌리고 있다.○ 포병 전쟁 준비 안돼 북한의 포병이 한국군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열세인 것도 군사 도발을 망설이게 만드는 대목이다. 북한이 확성기를 포격하고 한국군이 반격할 경우 양측 간에 포병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지만 북한의 포병은 화력전에 매우 취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해 4월 김정은이 한 자주포 대대를 불시에 방문해 전투 상황을 검열했는데, 김정은이 지시한 장소에 3시간이나 늦게 도착했고 목표 근처에 떨어진 포탄은 한 발에 불과했다고 한다. 화가 난 김정은은 해당 대대를 즉시 해산시키고 군단 군관 전원의 별을 하나씩 강등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도발 시 북한은 최정예 포병부대를 3개월 동안 훈련시켰지만 북한의 포탄은 불과 12km 앞에 있는 큰 섬도 못 맞히고 절반 가량이 바다에 떨어졌다. 섬에 떨어진 포탄 중에서도 불발탄이 대거 수거됐다. 한 북한군 출신 탈북자는 “전기난 때문에 온습도 관리를 포기한 갱도에 수십 년 동안 포탄을 보관해왔기 때문에 포탄이 제 기능을 할지 의문”이라며 “포격전이 시작되면 북한은 세계적인 망신거리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대북 심리전 방송이 북한군에 미치는 효과는 남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크다. 북한 병사들은 13년 복무 기간 휴가도 거의 못 가고 최전방을 지키는데 이 기간 동안 듣는 외부 방송이란 건 오로지 대북 방송밖에 없으니 자기도 모르게 세뇌가 된다.” 2002년 한국에 귀순한 주승현 씨(34·사진)는 탈북자들 중 유일한 북한군 대남방송요원 출신이다. 귀순 전 서부전선 최전방 비무장지대 경계를 담당한 민경대대 소속 심리전제압방송국 방송조장(상급병사)을 지냈다. 2004년 남북이 전방 확성기를 철수하기 불과 2년 전까지 대남 심리전 요원으로 활동해 최근 군이 11년 만에 대북 방송을 재개하고 북한이 이에 맞불 방송을 하고 있는 현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최전방으로 나온 뒤 몇 달은 대북 방송 내용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년이 되니 반신반의하게 됐고 2년쯤 되니 방송 내용을 거의 믿게 됐다.” 주 씨는 이번에 목함지뢰가 터진 지역 바로 맞은편 북한군 최전방 초소에서 대남 심리전 요원으로 있었다고 한다. 18일 만난 그는 “사상이 가장 투철한 병사만 선발되는 정예 심리전 요원으로 대북 확성기 방송의 영향을 막기 위해 활동했는데 내가 먼저 목숨 걸고 휴전선을 넘어오게 될 줄이야…”라며 말을 맺지 못했다. 남쪽에서 보내는 확성기 방송은 어디까지 들릴까. 우리 군은 확성기 출력을 최대로 하면 야간엔 24km, 주간에는 약 10km까지 내용이 전달된다고 발표했다.▼ 대남방송 요원 출신이 말하는 심리전 ▼“목숨 바쳐 싸우겠다던 北 심리전 동료들, 대북방송 내용 들은뒤 그런 말 쏙 들어가” “내가 있을 때에는 4, 5km 거리에서도 내용이 다 들렸다. 흐리고 안개 낀 날에 방송 소리가 더 멀리 간다. 지금 북한이 시작한 대응 방송을 제압방송이라고 하는데 확성기 성능이 떨어져 남쪽엔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린다니 좀 안쓰럽다고 할까. 아마 장비는 내가 있을 때 쓰던 것들을 아직도 쓰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가 있었던 서부초소에선 경기 파주 자유로가 보인다. 북한 정치장교들은 병사들에게 “저 도로는 남쪽에 하나뿐인 고속도로로 그나마도 선전용”이라고 교육했다고 한다. “그런 말을 믿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그 정도로 어리석진 않다. 도로에 차들이 끊이질 않는 것을 보고 대북 방송에서 들었던 ‘남쪽에 자동차가 1000만 대가 넘는다’는 말이 사실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조선업 1등, 반도체 1등 이런 말들도 당연히 믿어졌다.” 그가 근무했던 ‘제압방송국’은 군사분계선(MDL)에 11곳이 있다. 남쪽의 확성기 설치 지역이 11곳이니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제압방송국은 1998년까진 대남방송중계국이라고 불렀다. 그전엔 북한 체제의 우월성과 체제 찬양 같은 대남 심리전 방송을 했지만 1998년 명칭이 바뀌면서 방어 개념으로 바뀌었다. 김일성 찬양 노래를 틀어놓는 정도다. 아마도 남쪽을 향한 체제 선전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듯싶다.” 그러다 1999년부턴 전기 사정이 악화되고, 일본산 방송장비가 자주 고장이 나 제압방송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일방적으로 대북 방송을 들어야 했다고 한다. 그는 북한 병사들에게 심리적으로 끼치는 영향은 방송보다는 오히려 전광판이 낫다고 말했다. 전광판은 멀리서도 글씨가 또렷하게 보이기 때문에 머릿속에 잘 각인된다는 것. ‘삐라’도 효과가 좋다고 했다. “처음 북한 지도부의 부패상을 담은 삐라를 봤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최전방 민경대원은 북에서 제일 ‘새빨간 집’ 자식들만 골라 보내고 특히 심리전 요원은 그중에서도 제일 사상성이 투철한 사람만 뽑는다. 처음 전방에 올 때는 조국을 목숨 바쳐 지키겠다는 각오가 투철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니 ‘전쟁이 터지면 내가 과연 싸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입대 동기에게 이 질문을 했더니 답을 하지 않더라. 그 친구도 처음엔 나처럼 목숨 바쳐 싸우겠다던 친구였는데 말이다.” 그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몇 달간 고민하다가 귀순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가 고압 철조망 4개를 돌파해 한국군 초소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25분. 이는 지금까지 최단 시간 귀순 기록이다. “내가 체험을 해보니 MDL 남쪽은 지뢰 구역이 따로 고정돼 있어 북한군이 MDL만 넘으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반면에 북쪽은 70∼500m의 지뢰밭이 펼쳐져 있다.” 목함지뢰 폭발사건이 있기 전 북한군 병사들이 지뢰 매설을 하는 장면이 우리 군에 포착됐다는 발표에 대해선 “남쪽에 침투하려면 사단이나 군단 공병대가 통로를 열어야 하는데, 그 작업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그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와 동 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2014년 탈북자로는 최연소 박사가 됐다. 현재 명지대 외래교수로 북한체제론을 가르친다. 그에게 북한군 심리전 요원이었던 과거는 어떤 의미일까. “귀순 뒤 금호석유화학에서 회사 생활을 좀 했는데, 우연히 나와 비슷한 장소와 시기에 남쪽에서 심리전 요원으로 있었던 여직원을 알게 됐다. 과거 적으로 마주 서서 목소리 경쟁을 했던 남녀가 직장동료가 된 것이다. 처음 서로를 알았을 땐 충격적이었고, 반가웠다. 하지만 그 이후로 우린 둘 다 과거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한국의 대북방송 재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독일의 경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2600여 명의 동독 경비병이 서독으로 귀순했다. 북한 병사도 1000명은 넘어와야 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최근 10년 동안 귀순한 최전방 병사가 6명밖에 되질 않는다. 대북 방송을 재개하면 병사들의 심리 변화에 영향을 미치리라 본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서방이 참가하지 않아 ‘반쪽 대회’란 논란과 함께 인명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제1회 ‘세계군사경기(International Army Games-2015)’에서 러시아가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이 경기에는 이달 1일부터 15일까지 중국 인도 이집트 앙골라 베네수엘라 쿠웨이트 등 17개국 군인 2000여명이 참가해 탱크전, 공군, 특수전 등의 종목에서 실력을 겨뤘다. 대회의 백미는 탱크바이애슬론이었다. 기동과 사격, 장애물 극복 등의 임무를 수행하며 20㎞ 거리를 누가 가장 빨리 돌파하는지를 겨루었다. 각국 팀은 러시아가 제공한 T72B3 탱크를 타고 실전 같은 게임을 벌였다. 이 탱크는 러시아가 올해부터 군에 보급한 T72 계열 탱크의 개량형이다. 중국은 자국에서 최신형 96A 탱크를 직접 공수해왔다. 이 경기에선 1시간 14분 만에 모든 임무를 끝낸 러시아팀이 이겼다. 실전과 같은 경기를 치르다보니 사고도 잇따랐다. 2일 지상 공격 미션에 참가한 러시아 팀의 MI28 헬기가 추락해 조종사 1명이 숨졌다. 쿠웨이트 팀은 탱크가 뒤집힌 바람에 탱크병들이 부상을 당해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15일 시상식에서 종합 우승은 러시아, 준우승은 중국, 3위는 카자흐스탄이 각각 차지했다. 이번 대회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소속 병력이 불참했다. 북한군도 참여하지 않았다. 러시아 측의 한 장성은 “미국을 포함한 NATO 측에 초청장을 보냈지만 참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이런 대회를 통해 수집된 정보를 탱크나 장갑차와 같은 전투 장비의 성능을 올리는 데 활용할 계획이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