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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의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에는 실물 크기에 가까운 나무 호랑이가 전시돼 있다. 호랑이가 누워 있는 영국 군인의 목을 물어뜯는 형상이다. 영국군이 1799년 인도 남서부 마이소르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약탈한 물건으로 원래 왕국의 지배자 티푸 술탄(재위 1782∼1799년)의 소유였다. 술탄의 이름을 따 ‘티푸의 호랑이’라고 불린다. 영국은 당시 이 조각품을 런던으로 옮긴 뒤 다른 전리품과 함께 인도 정복의 첨병인 동인도회사 인도관에서 전시했다. 티푸 술탄은 평소 자신을 호랑이와 동일시했고, 조각의 형상은 술탄의 용맹함과 영국군의 패배를 상징했다. 영국은 이런 ‘티푸의 호랑이’를 전시하면서 자국의 승리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관람객이 ‘동양의 야만성’을 상기하도록 만들었다. 전시는 영국이 티푸 술탄과 ‘인도의 야만성’을 길들이고 지배하는 상징적 행위였던 셈이다. 제국의 문화재 약탈이 어떤 맥락에서 자행됐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특히 영국을 중심으로 문화재 약탈의 역사를 다루는 한편 문화재 개념의 등장부터 반환을 둘러싼 논쟁까지 조명한 책이다. 저자는 약탈당한 나라의 문화재 반환 요구를 지지하면서도, “반환은 당연하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해결이 어렵다고 본다. 사실 약탈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는 나라가 “돌려주지 않겠다”고 하면 별다른 방법이 없다. 반환 거부 논리를 치밀하게 반박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출토된 와당(瓦當·지붕 기와 끝을 막는 막새기와)을 근거로 광개토대왕이 묻힌 왕릉이 태왕릉이 아니라 장군총일 가능성을 뒷받침한 연구가 나와 주목된다. 공석구 한밭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학술지 ‘고구려발해연구’ 최근호에 실은 논문 ‘연꽃무늬 와당으로 본 광개토왕릉 비정’에서 “여러 와당과 명문(銘文) 기와 등의 유물을 종합해 보면 광개토대왕이 태왕릉에 묻혔다고 보기 어렵다”며 “광개토대왕릉은 장군총일 것”이라고 밝혔다. 고구려 국내성이 있던 중국 지안(集安)시에는 고구려 왕릉이 산재해 있다. 대중적으로는 광개토왕릉은 태왕릉, 장수왕릉은 장군총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학계에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중국 학계는 광개토왕릉은 태왕릉이라고 보는 편이지만 한국과 일본 학계에서는 태왕릉설과 장군총설이 경쟁하고 있다. 공 교수는 중국 측이 출간한 발굴보고서를 통해 출토 유물을 비교 분석했다. 그는 먼저 지안시에 있는 또 다른 고구려 고분인 천추총을 광개토대왕이 개·보수했다고 봤다. 천추총에서 광개토대왕의 생전 연호 ‘永樂(영락)’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됐기 때문이다. 또 천추총에서 함께 출토된 이파리 6개짜리 연꽃무늬 와당의 제작 시기 역시 광개토대왕 때라고 봤다. 광개토대왕이 천추총을 개·보수하는 과정에서 ‘영락’ 명문 기와와 이 와당을 함께 제작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공 교수는 이 기와에 등장하는 ‘未(미)’자를 간지로 보아 제작 시점은 광개토대왕 재위 17년인 407년(정미년)이라고 봤다. 문제는 태왕릉에서도 이 와당과 문양의 구성 방식 등 모양이 거의 같은 이파리 6개짜리 연꽃무늬 와당이 출토됐다는 점이다. 공 교수는 “이는 천추총과 태왕릉을 비슷한 시기 개·보수했다는 뜻이고, 태왕릉 역시 광개토대왕 시절인 ‘영락’ 연간에 개·보수했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태왕릉은 광개토왕릉이 될 수 없다. 왕의 사후, 장례의 일환으로 왕릉이 건설됐다고 볼 때 살아있는 광개토대왕이 생전에 무덤을 개·보수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공 교수는 태왕릉에 묻힌 주인공은 광개토대왕의 선대왕인 고국양왕일 것이라고 봤다. 그럼 광개토대왕은 어디에 묻혔을까. 이 역시 또 다른 와당에 힌트가 있다. 태왕릉과 장군총에서는 모두 이파리 8개짜리 연꽃무늬 와당이 출토됐다. 이 역시 서로 모양이 거의 같아 같은 시기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공 교수는 “장수왕이 아버지의 무덤인 장군총을 축조하면서 이 와당을 썼고, 할아버지의 무덤인 태왕릉 역시 이 와당으로 함께 개·보수했던 것”이라며 “결국 장군총의 주인공은 광개토대왕”이라고 밝혔다. 장군총에서 연꽃무늬 와당이 한 종류만 출토된 것 역시 이 같은 정황을 뒷받침한다. 장군총은 축조된 이후 개·보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공 교수는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왕실이 직접 제사를 받들기 어려워진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왜 한국 사회는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달성했는데도 갈수록 악화되는 불평등과 ‘갑질’, 불공정의 폭력으로 고통받는가. 왜, 어떻게 약속은 위반됐고, 권력은 공정하게 향유되고 행사되지 않는가.” 신간 ‘불평등의 세대―누가 한국 사회를 불평등하게 만들었는가’(문학과지성사·1만7000원·사진)가 던지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386세대 정치인들은 소득 불평등, 높은 비정규직 비율, 낮은 최저임금, 재벌의 이윤 추구 탓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저자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48)는 ‘386세대와 산업화 세대가 함께 만든 위계구조 탓’이 크다고 주장한다. 요약하자면 “청년 세대가 불행한 건 그 부모인 386세대가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양질의 일자리와 높은 임금, 권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12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 연구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386세대가 각자 열심히 밥그릇을 챙기며 도생한 결과지만 다음 세대의 고통을 인정한다면 386세대가 앞장서서 노동시장과 정치권력의 운용 시스템,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386세대 역시 연공제 속에서 그저 과실을 차지할 ‘자신들의 차례’가 된 것뿐 아닌가. “386세대는 인구 규모가 크고, 잘 조직화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연공제, 노조의 ‘전투적 경제주의’와 맞물리며 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성과를 냈다. 이 거대한 코호트(인구 집단)를 먹여 살리기 위해 기업은 채용 인원을 줄이거나 비정규직을 뽑았다. 그 결과 청년 세대는 얼마 안 되는 정규직을 두고 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정규직이 너무 잘 싸워서 임금을 올린 폐해가 하층 비정규직과 청년에게 돌아간 것이다. 산업화 세대는 386세대에게 완전 고용에 가까운 정규직 일자리를 물려줬다. 한데 왜 그들은 자식들에게 질 나쁜 노동시장을 물려주는가.” ―이 교수의 주장은 기업에서 386세대의 퇴출을 가속화하는 명분이 되는 것 아닌가. “386세대가 직장에서 나가야 한다거나 고용의 유연화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해 조직에 숨통을 틔우고 청년의 고용을 늘리자는 거다. 유럽식으로 다 같이 조금 덜 받고, 조금 덜 일하면서 일자리를 나누자는 것이다. 상층 정규직들은 지나친 임금 상승 투쟁을 자제하고, 사회적 협약을 통해 ‘세대 간 연대 임금’을 도입하자는 거다. 독일 스웨덴 등은 수십 년 동안 그렇게 해왔다. 누굴 위해서?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다.” ―임금피크제 한다고 기업이 청년 고용을 늘릴까. “국가가 선례를 보여줘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먼저 ‘내 임금을 깎아서 청년 사회복지사 한 명을 더 채용하는 데 쓰자’고 했으면 좋겠다. 장차관도 임금의 1%씩을 줄여서 세금을 올리지 않고 고용을 늘리는 걸 보여줘야 한다. 공기업에 확산시키면 사기업도 따라올 것이다. 기업은 위에 쓸 것을 줄여 신규 고용에 쓰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선례를 통해 룰을 만들면 사회가 바뀔 수 있다. 노사정위원회에 가서 이런 주장을 했는데 반기지 않더라.” ―현 정부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추진했는데…. “자본에게 돈을 더 쓰라고 강제하는 것인데, 이게 386세대 진보 진영의 이념이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소득분배율이 경쟁국과 선진국에 비해 낮다는 분석은 논란이 있다. 자본이 추가 지출할 여력이 없을 가능성도 있다. 기업에 덮어놓고 정규직화하라고 하면 오히려 비정규직을 해고하는 결과만 낳는다. 1970, 80년대까지의 자본은 노동을 쥐어짰지만 오늘날의 자본은 자본 증식에 유리하면 우수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주지 말라고 해도 임금을 더 지출한다.” ―‘정년 65세 연장’이 추진되고 있다. “연장 논의를 하려면 386세대의 임금 삭감 논의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연봉 1억 원 근로자 고용을 5년 연장하면 5억 원이 더 든다. 기업은 당장 연봉 3000만 원인 청년 고용을 몇 자리 줄여야 한다. 단순한 산수다. 정년 연장을 하려면 자식 세대 눈치를 먼저 보는 게 염치다.” ―연금의 소득대체율을 올리려고 하는데…. “그러면 386세대는 지금부터 5∼10년만 연금을 더 붓고, 이후 30∼40년 동안 많이 받게 된다. 그 ‘땜빵’은 인구가 반밖에 안 되는 자식 세대가 해야 한다. 자식 세대는 동의 못 할 거고, 형평에도 맞지 않는다. 연금은 낸 만큼 받는 식으로 세대별 연금 불입률과 수혜율을 조정해야 한다.” ―‘한국형 사회적 자유주의’를 주장했는데…. “지난 20년 동안 안전망 없는 고용유연화의 후과는 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노동권이 해고당하지 않을 권리였다면, 앞으로는 일할 권리로 다시 규정해야 한다. 국가와 노조가 협력해서 일찍 퇴직하는 이들이 다른 일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교육과 훈련을 책임지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이 같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에 대해 기존 진보진영은 고용유연화가 가속화된다며 썩 반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유연화의 비용을 비정규직과 젊은 세대가 계속 지도록 할 것인가.” 이 교수는 “386세대가 민주화를 위해 젊음을 바친 첫 번째 희생에 이어,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두 번째 희생’을 하라”고 말했다. 특정 세대가 손에 쥔 것을 스스로 내려놓는다는 게 정말 가능할까. “386세대는 자식 세대의 몫을 자신들이 끌어 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자산과 기회를 자기 자식에게만 물려주려 하지 말고, 자식 세대 전체에게 물려주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이 교수) ▼외환위기가 386세대 권력강화 낳았다▼‘불평등의 세대…’는 청춘을 희생해 절차적 민주주의 제도화를 이끈 386세대가 오늘날 세대 간 불평등의 정점에 있다는 게 주된 요지다. 1997년 외환위기는 386세대가 ‘저절로’ 권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산업화 세대가 일찌감치 정리해고에 내몰리는 동안 기업의 밑바닥부터 허리를 구성하고 있던 386세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기업들이 10년 가까이 신규 채용을 줄여 아랫세대의 비중 역시 줄었다. 살아남은 386세대와 노조는 ‘사회 연대’ ‘사회 개혁 투쟁’ 대신 ‘전투적 경제주의’에 입각해 자신들의 몫을 챙기는 데 몰입했다. 또한 386세대는 산업화 세대가 만든 부의 불평등을 물려받았고, 2000년대 중반 부동산 폭등 시기에 자산을 축적할 기회를 얻었다. 세대 간 불평등과 386세대 비판은 기존에도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데이터를 통해 정밀하게 이를 보여준다. 국회의원 입후보자 및 당선자 수, 기업 이사진 점유, 대기업 및 정규직 등 상층 노동시장의 점유율, 근속연수, 인구 대비 소득 점유율, 소득 상승률 등 386세대의 독점과 상대적 장기 집권을 그대로 보여주는 각종 지표가 책에 빼곡하다. 이철승 교수는 386세대는 “다른 세대가 취할 수 없는 지위를 통해 뭉친 배타적 권력·이익 독점체”가 됐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묻는다. “이 세대가 오늘날 노동시장에서 고통받는 20, 30대 청년세대와 바로 아래에서 희생한 40대, 그리고 위계구조의 최대 희생자 집단인 여성과 비정규직을 대표하지 못한다면, 산업화 세대의 정치권력과 무엇이 다른가?”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왜 한국 사회는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달성했는데도 갈수록 악화되는 불평등과 ‘갑질’, 불공정의 폭력으로 고통받는가. 왜, 어떻게 약속은 위반됐고, 권력은 공정하게 향유되고 행사되지 않는가.” 신간 ‘불평등의 세대―누가 한국 사회를 불평등하게 만들었는가’(문학과지성사·1만7000원)가 던지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386세대 정치인들은 소득 불평등, 높은 비정규직 비율, 낮은 최저임금, 재벌의 이윤 추구 탓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저자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48)는 ‘386세대와 산업화세대가 함께 만든 위계구조’ 탓이 크다고 주장한다. 요약하자면 “청년 세대가 불행한 건 그 부모인 386세대가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양질의 일자리와 높은 임금, 권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12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 연구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386세대가 각자 열심히 밥그릇을 챙기며 도생한 결과지만 다음 세대의 고통을 인정한다면 386세대가 앞장서서 노동시장과 정치권력의 운용 시스템,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386세대 역시 연공제 속에서 그저 과실을 차지할 ‘자신들의 차례’가 된 것뿐 아닌가. “386세대는 인구 규모가 크고, 잘 조직화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연공제, 노조의 ‘전투적 경제주의’와 맞물리며 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성과를 냈다. 이 거대한 코호트(인구 집단)를 먹여 살리기 위해 기업은 채용 인원을 줄이거나 비정규직을 뽑았다. 그 결과 청년 세대는 얼마 안 되는 정규직을 두고 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정규직이 너무 잘 싸워서 임금을 올린 폐해가 하층 비정규직과 청년에게 돌아간 것이다. 산업화세대는 386세대에게 완전 고용에 가까운 정규직 일자리를 물려줬다. 한데 왜 그들은 자식들에게 질 나쁜 노동시장을 물려주는가.” ―이 교수의 주장은 기업에서 386세대의 퇴출을 가속화하는 명분이 되는 것 아닌가. “386세대가 직장에서 나가야 한다거나 고용의 유연화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해 조직에 숨통을 틔우고 청년의 고용을 늘리자는 거다. 유럽식으로 다같이 조금 덜 받고, 조금 덜 일하면서 일자리를 나누자는 것이다. 상층 정규직들은 지나친 임금 상승 투쟁을 자제하고, 사회적 협약을 통해 ‘세대 간 연대 임금’을 도입하자는 거다. 독일 스웨덴 등은 수십 년 동안 그렇게 해왔다. 누굴 위해서?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한다고 기업이 청년 고용을 늘릴까. “국가가 선례를 보여줘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먼저 ‘내 임금을 깎아서 청년 사회복지사 한 명을 더 채용하는 데 쓰자’고 했으면 좋겠다. 장차관도 임금의 1%씩을 줄여서 세금을 올리지 않고 고용을 늘리는 걸 보여줘야 한다. 공기업에 확산시키면 사기업도 따라올 것이다. 기업은 위에 쓸 것을 줄여 신규 고용에 쓰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선례를 통해 룰을 만들면 사회가 바뀔 수 있다. 노사정위원회에 가서 이런 주장을 했는데 반기지 않더라.” ―현 정부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추진했는데…. “자본에게 돈을 더 쓰라고 강제하는 것인데, 이게 386세대 진보 진영의 이념이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소득분배율이 경쟁국과 선진국에 비해 낮다는 분석은 논란이 있다. 자본이 추가 지출할 여력이 없을 가능성도 있다. 기업에 덮어놓고 정규직화하라고 하면 오히려 비정규직을 해고하는 결과만 낳는다. 1970, 80년대까지의 자본은 노동을 쥐어짰지만 오늘날의 자본은 자본 증식에 유리하면 우수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주지 말라고 해도 임금을 더 지출한다.” ―‘정년 65세 연장’이 추진되고 있다. “연장 논의를 하려면 386세대의 임금 삭감 논의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연봉 1억 원 근로자 고용을 5년 연장하면 5억 원이 더 든다. 기업은 당장 연봉 3000만 원인 청년 고용을 몇 자리 줄여야 한다. 단순한 산수다. 정년 연장을 하려면 자식 세대 눈치를 먼저 보는 게 염치다.” ―연금의 소득대체율을 올리려고 하는데…. “그러면 386세대는 지금부터 5~10년만 연금을 더 붓고, 이후 30~40년 동안 많이 받게 된다. 그 ‘땜빵’은 인구가 반밖에 안 되는 자식 세대가 해야 한다. 자식 세대는 동의 못 할 거고, 형평에도 맞지 않는다. 연금은 낸 만큼 받는 식으로 세대별 연금 불입률과 수혜율을 조정해야 한다.” ―‘한국형 사회적 자유주의’를 주장했는데…. “지난 20년 동안 안전망 없는 고용유연화의 후과는 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노동권이 해고당하지 않을 권리였다면, 앞으로는 일할 권리로 다시 규정해야 한다. 국가와 노조가 협력해서 일찍 퇴직하는 이들이 다른 일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교육과 훈련을 책임지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이 같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에 대해 기존 진보진영은 고용유연화가 가속화된다며 썩 반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유연화의 비용을 비정규직과 젊은 세대가 계속 지도록 할 것인가.” 이 교수는 “386세대가 민주화를 위해 젊음을 바친 첫 번째 희생에 이어,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두 번째 희생’을 하라”고 말했다. 특정 세대가 손에 쥔 것을 스스로 내려놓는다는 게 정말 가능할까. “386세대는 자식 세대의 몫을 자신들이 끌어 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자산과 기회를 자기 자식에게만 물려주려 하지 말고, 자식 세대 전체에게 물려주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이 교수)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8일 1주기를 맞은 고 황현산 문학평론가(1945∼2018)의 트윗 모음집(‘내가 모르는…’)과 평론집(‘잘 표현된…’)이다. 고인은 2014년 11월 8일부터 2018년 6월 25일까지 자신의 계정(@septuor1)에 분야를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트윗을 올렸다. “내 책 제목 ‘밤이 선생이다’는 프랑스의 속담 ‘La nuit porte conseil’을 자유 번역한 말이다. 직역하면 ‘밤이 좋은 생각을 가져오지’라는 말로 어떤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한밤 자고 나면 해결책이 떠오를 것’이라는 위로의 인사다.”2015년 8월 3일 트윗이다. 어느 날 아들이 트위터를 왜 하느냐고 묻자 고인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잘 표현된…’은 절판됐던 고인의 2012년 문학평론집으로 제20회 대산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시와 끊임없이 교섭했던’ 고인의 애정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나에게 시는 말 저편에 있는 말을 지금 이 시간의 말 속으로 끌어당기는 계기이다.…시의 용기와 훈련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이 이 세상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극히 절망적인 순간에 그 절망을 말하면서까지도, 포기하지 않는다.”(‘책머리에’에서)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광화문 현판이 바탕은 검은색, 글자는 동판 위에 금박으로 다시 제작된다. 단청은 전통 소재 안료를 사용한다.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회 보고를 거쳐 최종 결정을 했다”며 “원형 고증과 제작 방침은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소장 사진(1893년경 촬영)과 지난해 발견된 일본 와세다대 소장 ‘경복궁 영건일기’(1902년)를 참고했다”고 14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2010년 8월 광화문 현판을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복원했다. “다른 궁궐 전각 등에 비춰 볼 때 색깔이 잘못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이어졌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2016년 ‘문화재제자리찾기’의 혜문(본명 김영준) 대표가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자료에서 검은 바탕에 밝은 글씨의 현판이 걸린 광화문 옛 사진을 찾아내 본보에 공개했다. 이후 문화재청은 연구 용역을 거쳐 지난해 1월 현판 바탕색이 검은색, 글자색이 금색이라고 인정했다. 지난해에는 ‘경복궁 영건일기’ 등의 사료를 통해 원래 현판 글자가 동판에 도금된 것이 추가로 밝혀졌다. 궁궐 현판에 동판을 쓴 사례는 경복궁 근정전과 덕수궁 중화전 정도이며, 현판 동판을 제작한 경험이 있는 장인이 현재 없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이번 동판의 시범 제작은 국가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가구에 덧대는 금속 장식을 만드는 장인) 보유자 박문열 씨와 문화재수리기능자 박갑용 씨(도금공)가 함께 맡았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광화문 현판은 현재 글자를 새기는 작업까지 마쳤고, 연말까지 채색을 마무리할 예정”이라며 “새 현판을 내년 이후 걸 예정인데, 정확한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 헌법 전문은 일본에 의한 침략전쟁과 식민 지배를 반성하고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전 세계의 평화를 실현하고자 한다. 오늘날 피해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배상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같은 헌법의 취지에 반해 식민지 시대와 침략전쟁을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문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낸 피해배상 소송이 일본의 법정에서 ‘딱 한 번’ 1심에서 일부 승소한 적이 있다. 1992년 12월 제소해 1998년 4월 1심 판결이 난 이른바 ‘관부(關釜·부산―시모노세키) 재판’이다. 이 소송을 비롯해 30년 가까이 일본의 과거사 관련 재판에서 피해자 원고를 대리하고 있는 야마모토 세이타(山本晴太·66) 변호사는 14일 이렇게 말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이날 제2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국제학술회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역사적 과제’를 열었다. 야마모토 변호사는 ‘관부 재판과 헌법재판소 결정, 일본국 헌법과 대한민국 헌법’을 발표했다. 그는 “배상이 실현되지 못한 건 일본 법체계와 헌법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와 국민의 과거 역사 인식 탓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야마모토 변호사는 “전후 배상 문제는 아시아의 피해자들에 대한 입법이 결여된 ‘입법부작위’의 문제”라며 일본 헌법을 근거로 정부 책임을 추궁한 관부 재판 당시의 논리를 설명했다. 그는 “한국 헌법의 근본이념을 근거로 식민 지배와 직결된 불법 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는 한일 청구권협정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 한국 대법원 판결과 일본 헌법의 이념은 모순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한국과 일본 헌법은 개인의 존엄을 최고의 가치로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며 “한국 대법원 판결과 관부 재판 판결 역시 궤를 같이한다”고 덧붙였다. ‘관부 재판’ 이야기는 김희애 김해숙 등이 출연한 영화 ‘허스토리’로 제작돼 지난해 개봉됐다. 그러나 야마모토 변호사는 이날 “영화가 피해자 원고는 물론 재판 관계자를 취재하지 않은 채 만들어졌고, 재판의 실상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며 “픽션이라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영화를 비판했다. 그는 영화 속 피해 사실은 다른 피해자들의 증언집에서 모아 창작한 것일 뿐 실제 재판 원고들과는 다르다고 했다. 일례로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박소득 할머니 이야기가 영화 속에서는 성폭행을 당하고 위안부가 됐다는 픽션이 첨가됐다는 것이다. 야마모토 변호사는 “영화는 재판을 대체로 고립된 투쟁으로 그렸지만 실제 당시 언론과 일본 사회는 피해자들에게 호의적이었다”고 말했다. 왕쭝런(王宗仁)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둥닝(東寧)현의 둥닝요새박물관 연구원은 이날 발표에서 소련 국경에 투입된 일본 관동군 진지 부근 위안소의 실태를 밝혔다. 둥닝요새는 1934년 6월 설치됐으며, 3개 사단과 국경수비대 등이 둥닝에 주둔했다. 1941년 대규모 훈련 때는 이 지역 국경선에 병력 13만 명이 투입되기도 했다. 왕 연구원은 “국경 진지 부근 ‘위안소’는 50여 곳이었다”며 “일본군은 1945년 패망 당시 ‘위안부’를 버리고 도망갔으며, 위안부가 소련군에게 정보를 제공할 것을 우려해 독약이나 폭탄으로 살해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1946년 둥닝현 정부 조사에서 귀향하지 못한 위안부 가운데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고 덧붙였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국립중앙박물관(서울 용산구)은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현존 최고(最古) 태극기인 ‘고종이 데니에게 하사한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82호·사진)를 박물관 중근세관 대한제국실에서 15∼21일 공개한다. 미국인 오웬 데니(Owen N. Denny·1838∼1900)가 청나라의 압력으로 외교고문직에서 파면돼 미국으로 돌아가던 1890년 고종이 선물한 가로세로 263×180cm의 대형 태극기다. 1981년 후손이 한국에 기증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평균적인 한국인들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은 악명 높은 사실이다.” 1919년 3·1운동이 벌어진 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가운데 하나인 영자 신문 ‘Seoul Press(서울프레스)’가 그해 3월 20일 보도한 기사 ‘잔인한 이야기’ 가운데 일부다. 국제 사회에 전해진 3·1운동과 일제의 탄압 양상을 과장이나 거짓으로 매도하고자 했던 것. 조선총독부가 대외적으로 3·1운동을 어떻게 왜곡하고 국제 여론전을 펼치려 했는지에 주목한 연구가 나왔다. 최우석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은 독립기념관이 13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주최한 국제학술심포지엄 ‘국제사회는 3·1운동을 어떻게 보았는가’에서 ‘3·1운동과 조선총독부의 국제언론 대응’을 발표했다. 3·1운동 당시 고종 장례에 참여하러 온 해외 기자, 통신원들과 선교사들이 만세운동의 소식을 외부로 실어 날랐다. 발표문에서 최 연구위원은 “조선총독부는 ‘서울프레스’를 통해 국외 언론 보도를 직접 반박하려 했다”고 밝혔다. 발표문에 따르면 서울프레스는 3월 20일 기사에서 “한국인은 모든 종류의 소문을 제작하고 전파하는 데 능숙하다”고 매도했다. 일제 탄압의 양상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벨기에에서 행한 학살사건에 비유하거나, 여학생이 경찰서에서 고문당해 사망했다는 소식, 서대문감옥의 죄수들이 고문당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한 해외 언론 보도는 “모두 다 사실무근의 거짓말”이라고 이 기사에서 주장했다. 또 조선인의 만세운동은 ‘폭동’으로 묘사하는 반면 탄압했던 일본 군경은 ‘평화의 수호자’로 표현했다(5월 6일 ‘한국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 없음’ 기사). 서울프레스는 스코필드(1889∼1970)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진상이 알려진 수원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은 완전히 부인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역시 공세적인 만세시위 탓에 발생했다고 왜곡했다. 학교 건물과 경찰서가 파괴되고 일본 경찰 2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한 명이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됐기에 진압부대가 운동 참가자들에게 적개심을 품었다는 것이다. 제암·고주리 학살은 무고한 양민에 대한 일제의 끔찍한 보복행위였다. 서울프레스의 야마가타 이소오 사장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문을 받았던 서대문감옥을 방문한 뒤 “감옥이 아니라 기술학교처럼 보인다”는 평가를 내렸다(5월 11일 ‘서대문감옥 방문’). 이에 스코필드 선교사는 감옥에서 몇 주 지내다 나온 사람을 만났는데 생가죽만 남아 있었다고 즉각 반박했다. 1905년 창간한 서울프레스는 이듬해 통감부가 인수한 뒤 일간지로 바뀌었으며,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의 유일한 일간 영자신문이었다. 명목상 개인 경영의 형태였지만 여러 측면에서 ‘경성일보’ ‘매일신보’와 함께 총독부 기관지로 분류된다. 1919년 당시 신문 원본은 남아 있지 않아 1919년 3월 14일∼5월 16일 기사 가운데 25개를 모아 5월 20일 발행된 팸플릿 책자가 분석 대상이 됐다. 한국인은 미개하다며 여론전을 벌이기도 했다. ‘산림 파괴’(4월 6일)라는 기사는 한국인들이 일본 당국의 지시로 심긴 나무들에 적의를 품고 나무를 훼손하는 어리석은 행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라 다카시 당시 일본 총리는 1919년 3월 11일 국무회의 뒤 “외국인이 본 건(3·1운동)을 주목하고 있으니 잔혹하다든가, 가혹하게 추궁한다든가 하는 비평이 생겨나지 않도록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는 훈령을 조선 총독에게 보냈다. 서울프레스의 여론전 역시 그 일환으로 평가된다. 최우석 연구위원은 “서울프레스는 조선인의 피해를 ‘거짓말’로 몰아갔지만 부정할 수 없는 대규모 학살이 확인되면서 식민권력이 유지하려 했던 ‘문명적’ 통치의 이미지는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평균적인 한국인들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은 악명 높은 사실이다.” 1919년 3·1운동이 벌어진 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가운데 하나인 영자 신문 ‘Seoul Press(서울프레스)’가 그해 3월 20일 보도한 기사 ‘잔인한 이야기’ 가운데 일부다. 국제 사회에 전해진 3·1운동과 일제의 탄압 양상을 과장이나 거짓으로 매도하고자 했던 것. 조선총독부가 대외적으로 3·1운동을 어떻게 왜곡하고 국제 여론전을 펼치려 했는지에 주목한 연구가 나왔다. 최우석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은 독립기념관이 1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주최한 국제학술심포지엄 ‘국제사회는 3·1운동을 어떻게 보았는가’에서 ‘3·1운동과 조선총독부의 국제언론 대응’을 발표했다. 3·1운동 당시 고종 장례에 참여하러 온 해외 기자, 통신원들과 선교사들이 만세운동의 소식을 외부로 실어 날랐다. 발표문에서 최 연구위원은 “조선총독부는 ‘서울프레스’를 통해 국외 언론 보도를 직접 반박하려 했다”고 밝혔다. 발표문에 따르면 서울 프레스는 3월 20일 기사에서 “한국인은 모든 종류의 소문을 제작하고 전파하는데 능숙하다”고 매도했다. 일제 탄압의 양상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벨기에에서 행한 학살사건에 비유하거나, 여학생이 경찰서에서 고문당해 사망했다는 소식, 서대문감옥의 죄수들이 고문당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전한 해외 언론 보도는 “모두 다 사실무근의 거짓말”이라고 기사는 주장했다. 또 조선인의 만세운동은 ‘폭동’으로 묘사하는 반면 탄압했던 일본 군경은 ‘평화의 수호자’로 표현했다.(5월 6일 ‘한국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 없음’ 기사) 서울 프레스는 스코필드(1889~1970)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진상이 알려진 수원 제암·고주리 학살 사건은 완전히 부인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역시 공세적인 만세시위 탓에 발생했다고 왜곡했다. 학교 건물과 경찰서가 파괴되고 일본 경찰 2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한명이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됐기에 진압부대가 운동 참가자들에게 적개심을 품었다는 것이다. 제암·고주리 학살은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끔찍한 보복행위로 실상 주민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했을 뿐 이들 동네에서는 만세운동이 벌어지지도 않았다. 서울프레스의 야마가타 이소오 사장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문을 받았던 서대문감옥을 방문한 뒤 “감옥이 아니라 기술학교처럼 보인다”는 평가를 내렸다.(5월 11일 ‘서대문감옥 방문’). 이에 스코필드 선교사는 감옥에서 몇 주 지내다 나온 사람을 만났는데 많은 곳에 껍질이 벗겨져 생가죽만 남아있었다고 즉각 반박했다. 1905년 창간한 서울프레스는 이듬해 통감부가 인수한 뒤 일간지로 바뀌었으며,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의 유일한 일간 영자신문이었다. 명목상 개인 경영의 형태였지만 여러 측면에서 ‘경성일보’ ‘매일신보’와 함께 총독부 기관지로 분류된다. 1919년 당시 신문 원본은 남아있지 않아 1919년 3월 14일~5월 16일 기사 가운데 25개를 모아 5월 20일 발행된 팸플릿 책자가 분석 대상이 됐다. 한국인은 미개하다며 여론전을 벌이기도 했다. ‘산림 파괴’(4월 6일)라는 기사는 한국인들이 일본 당국의 지시로 심어진 나무들에 적의를 품고 나무를 훼손하는 어리석은 행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라 다카시 당시 일본 총리는 1919년 3월 11일 국무회의 뒤 “외국인이 본 건(3·1운동)을 주목하고 있으니 잔혹하다든가, 가혹하게 추궁한다든가 하는 비평이 생겨나지 않도록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는 훈령을 조선 총독에게 보냈다. 서울프레스의 여론전 역시 그 일환으로 평가된다. 최우석 연구위원은 “서울프레스는 조선인의 피해를 ‘거짓말’로 몰아갔지만 부정할 수 없는 대규모 학살이 확인되면서 식민권력이 유지하려 했던 ‘문명적’ 통치의 이미지는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일본군이 1940년대 베트남을 침략하면서 ‘위안소’를 운영했음을 보여주는 프랑스군 공식 자료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조광)는 프랑스 해외영토자료관(ANOM)에서 일본군이 하이퐁, 박닌, 하노이 등 베트남 북부 도시에 위안소를 설치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프랑스군 문서를 확인했다고 12일 밝혔다. 베트남 지역 일본군 위안소는 지금까지는 구술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만 알려졌다. 이번에 확인된 프랑스군의 1940년 10월 7∼10일 보고서에는 베트남 북부 항구도시 하이퐁에 진주한 일본 육군과 해군이 각각 위안소(Maisons de Tol´erance)를 ‘비엔 호숫가’에 설치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보고서는 장교, 부사관, 사병 등으로 구분된 세 종류의 위안소가 설치될 것이라면서, 설립 자금 조달은 폴 베르 거리의 한 환전소를 통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와 별도로 1941년 2월 신원 불명의 여성 25명이 하이퐁항에 도착했다고 기록한 일본군 관련 프랑스군 보고서도 확인됐다.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 비시 정부가 세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는 독일의 동맹인 일본과 협력했다. 일본군은 1940년 9월 북부 베트남에 진주했고, 1941년에는 남부 베트남까지 점령했다. 일본군의 베트남 점령 루트는 하이퐁항에서 박닌, 하노이로 이어졌다. 위안소가 표기된 지도 2점도 확인됐다. 그중 하나인 박닌성 일본군 기지 배치도에는 위안소가 일본군 기지 경계선에 바로 붙어 있어 일본군의 통제와 관리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노이 시내의 일본군 배치도에도 위안소가 일본군 주요 시설과 함께 시내에 설치돼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이번에 확인한 문서들은 위안소 설치의 실질적인 주체가 일본군이었음을 다시금 뒷받침한다. 국사편찬위는 “일본군은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 1년 3개월 전 베트남을 점령하고 곧바로 위안소를 설치했던 것”이라며 “일본군이 전쟁 당시 침략하는 곳마다 위안소를 설치해 운영했음이 다시 한 번 확인된 것”이라고 밝혔다. 조광 위원장은 “일본이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동원 책임 및 반성을 회피하고 있는 현실에서 더욱 가치가 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국사편찬위는 2016년부터 일본군 ‘위안부’와 전쟁범죄 자료를 수집, 편찬하고 있다. 이번 조사에는 파리7대학 마리 오랑주 교수와 재불 사학자 이장규 씨가 참여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 제국 패망사’는 머리말부터 아찔하다. “우리가 타일러 데닛(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밝힌 미국의 외교사가)의 말대로만 했다면, 1941년 미국과 일본의 협상은 전쟁 대신 평화롭게 마무리됐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저자의 이런 가정대로 됐더라면, 그러니까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지 않고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중일전쟁은 2차대전과 별개의 전쟁이 됐을 것이며 일제는 나중에 만주를 잃지 않는 정도에서 중국과 강화를 했을 수도 있다. 물론 ‘김 씨’는 여전히 ‘가네모토(金本) 상’으로 불렸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저명 전쟁사학자가 태평양전쟁의 전사(前史)인 1931년 만주사변부터 태평양전쟁의 개전과 양상, 일본의 항복까지를 다룬 논픽션이다. 1972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방대한 자료와 인터뷰, 취재를 바탕으로 써서 치밀하고 흥미롭다. 앞부분 1936년 황도파(皇道派·일본군 내 일왕 절대주의 급진파) 장교들의 ‘2·26 쿠데타’ 서술부터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박진감이 넘친다. 실패한 이 쿠데타는 오히려 군부가 정치를 더 좌지우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1941년 개전 직전 나가노 해군 군령부 총장은 쇼와 일왕을 만나 일본의 석유 비축량은 2년분이며, 전쟁이 나면 18개월밖에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든 선수를 쳐야 한다”고 말했다. 일왕은 말했다. “전쟁은 절망적이겠군.” 일본은 어째서 제 무덤을 판 이 전쟁으로 달려갔는가. 책은 팽팽하던 전쟁파와 외교파가 일왕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종교적 광신에 휩싸이는 과정을 도쿄의 권력 최상층부에 현미경을 들이대며 보여준다. 이 책의 번역 출간은 때늦은 감이 있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시중에 태평양전쟁 전반을 다룬 통사는 단 한 권도 없다.” 한국의 해방을 직접 가져온 것이 미군의 태평양전쟁 승전인데도 우리는 주로 중국을 무대로 벌어진 무장투쟁이나 의열투쟁에만 큰 관심을 갖는 경향이 없지 않다. 책 서두에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다리를 다쳤던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기 위해 지팡이를 짚고 미주리호에 오른 사진은 그만큼 상징적이다. 제목만 보고 최근 한일 갈등 국면에서 ‘심리적 위안’이 될 책이라고 믿는다면 오해다. 저자의 시선은 ‘일본이 이래서 망했다’는 것보다는 무모했지만 강력했던 적을 이해하려는 데 가깝다. 1970년 첫 출간 당시 원제는 ‘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Japanese Empire’. 에필로그는 패전 몇 달 뒤 황궁과 맥아더 사령부에 번갈아 절을 하는 한 나무꾼의 행동으로 마무리한다. 저자는 말한다. “그는 길 건너편에 있는 영원한 존재(일왕)를 숭배하면서 지금의 쇼군(맥아더 장군)이 가진 일시적인 권력을 솔직하게 받아들였다.” 이처럼 일왕과 천황제도에 전쟁의 책임을 묻지 않은 종전은 일본이 제대로 된 반성 없이 전후 체제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다수 일본인에게 종전은 강자 미국을 받아들이는 문제였지 반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책임에 대하여’가 다루는 주제로 이어진다. ‘책임에…’는 자이니치(在日·재일) 조선인 2세로 일본의 우경화와 국민주의의 위험성을 비판해 온 서경식 도쿄게이자이대 교수와, 일본의 역사왜곡과 인권 문제를 지적해 온 비판적 지식인인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대학원 교수의 대담집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오키나와 미군기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천황제의 모순 등을 다루면서 현대 일본이 퇴행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다카하시 교수는 일본의 현재를 상징하는 천황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천황제가 전쟁 전과 전쟁 중에 야기한 참화에 대해 아키히토 (전) 일왕 자신도, 일본 정부도 공식적으로 반성의 뜻을 표한 적이 없다. 일왕 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천황제”라며 “반민주주의적 사상이 일본의 정치 속에 뿌리 깊이 남은 것도 천황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천황제는 근대 일본의 몬스터 같은 제도로, 실체 없는 유령 같은 것을 설정해 놓고 대립을 조정하며, 그 결과를 지배층의 이익으로 회수한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 제국 패망사’는 머리말부터 아찔하다. “우리가 타일러 데닛(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밝힌 미국의 외교사가)의 말대로만 했다면, 1941년 미국과 일본의 협상은 전쟁 대신 평화롭게 마무리됐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저자의 이런 가정대로 됐더라면, 그러니까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지 않고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중일전쟁은 2차대전과 별개의 전쟁이 됐을 것이며 일제는 나중에 만주를 잃지 않는 정도에서 중국과 강화를 했을 수도 있다. 물론 ‘김 씨’는 여전히 ‘가네모토(金本) 상’으로 불렸을 지도 모른다. 미국의 저명 전쟁사학자가 태평양전쟁의 전사(前史)인 1931년 만주사변부터 태평양전쟁의 개전과 양상, 일본의 항복까지를 다룬 논픽션이다. 1972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방대한 자료와 인터뷰, 취재를 바탕으로 써서 치밀하고 흥미롭다. 앞부분 1936년 황도파 장교들의 ‘2·26 쿠데타’ 서술부터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박진감이 넘친다. 실패한 이 쿠데타는 오히려 군부가 정치를 더 좌지우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1941년 개전 직전 나가노 해군 군령부 총장은 쇼와 일왕을 만나 일본의 석유 비축량은 2년분이며, 전쟁이 나면 18개월밖에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든 선수를 쳐야 한다”고 말했다. 일왕은 말했다. “전쟁은 절망적이겠군.” 일본은 어째서 제 무덤을 판 이 전쟁으로 달려갔는가. 책은 팽팽하던 전쟁파와 외교파가 일왕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종교적 광신에 휩싸이는 과정을 도쿄의 권력 최상층부에 현미경을 들이대며 보여준다. 이 책의 번역 출간은 때늦은 감이 있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시중에 태평양 전쟁 전반을 다룬 통사는 단 한 권도 없다.” 한국의 해방을 직접 가져온 것이 미군의 태평양전쟁 승전인데도 우리는 주로 중국을 무대로 벌어진 무장투쟁이나 의열 투쟁에만 큰 관심을 갖는 경향이 없지 않다. 책 서두에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다리를 다쳤던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기 위해 지팡이를 짚고 미주리호에 오른 사진은 그만큼 상징적이다. 제목만 보고 최근 한일 갈등 국면에서 ‘심리적 위안’이 될 책이라고 믿는다면 오해다. 저자의 시선은 ‘일본이 이래서 망했다’는 것보다는 무모했지만 강력했던 적을 이해하려는 데 가깝다. 1970년 첫 출간 당시 원제는 ‘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Japanese Empire’. 에필로그는 패전 몇 달 뒤 황궁과 맥아더 사령부에 번갈아 절을 하는 한 나무꾼의 행동으로 마무리한다. 저자는 말한다. “그는 길 건너편에 있는 영원한 존재(일왕)를 숭배하면서 지금의 쇼군(맥아더 장군)이 가진 일시적인 권력을 솔직하게 받아들였다.” 이처럼 일왕과 천황제도에 전쟁의 책임을 묻지 않은 종전은 일본이 제대로 된 반성 없이 전후 체제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다수 일본인에게 종전은 강자 미국을 받아들이는 문제였지 반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책임에 대하여’가 다루는 주제로 이어진다. ‘책임에…’는 자이니치(在日·재일) 조선인 2세로 일본의 우경화와 국민주의의 위험성을 비판해 온 서경식 도쿄게이자이대 교수와, 일본의 역사왜곡과 인권 문제를 지적해 온 비판적 지식인인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대학원 교수의 대담집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오키나와 미군기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천황제의 모순 등을 다루면서 현대 일본이 퇴행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다카하시 교수는 일본의 현재를 상징하는 천황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천황제가 전쟁 전과 전쟁 중에 야기한 참화에 대해 아키히토 (전) 일왕 자신도, 일본 정부도 공식적으로 반성의 뜻을 표한 적이 없다. 일왕 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천황제”라며 “반 민주주의적 사상이 일본의 정치 속에 뿌리 깊이 남은 것도 천황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천황제는 근대 일본의 몬스터 같은 제도로, 실체 없는 유령 같은 것을 설정해 놓고 대립을 조정하며, 그 결과를 지배층의 이익으로 회수한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조선 중기 노비 신분의 한 어부가 있었다. 외국어를 잘한 그는 우연히 외국으로 잡혀갔다가 큰 섬이 조선의 영토라고 강력히 주장해 외국 정부의 공식 문서를 받아냈다. ‘드라마틱하지만 개연성은 떨어지는 듯한’ 이 이야기는 숙종 때 실존인물인 안용복(1658?∼?)의 행적이다. 혹시 숨은 배경은 없는 걸까. 안용복의 1696년 2차 도일(渡日)이 소론(少論) 정권의 밀사 파견이었다는 설을 내놨던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가 1693년 1차 도일의 성격에 관해 새로운 주장을 했다. 최 교수는 최근 논문에서 “울릉도 쟁계(爭界)를 촉발한 안용복의 1차 도일은 일본 어민에게 납치를 당한 것이 아니라 안용복이 고의로 납치를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먼저 1차 도일 당시 일본의 대응이 자연스럽지가 않다고 했다. 일본은 안용복을 수인(囚人)으로 취급하다가 나중에는 표류민(漂流民)으로 대우했는데, 그 대우가 지나치게 융숭했다는 것.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요나고에서 조선인의 구서(口書·진술서) 및 (저들이) 소지하고 있던 서(書) 3통, 작은 칼(小刀) 1본을 에도에 보냈다.” 안용복이 머무르던 돗토리번(鳥取藩)의 공식 일지인 ‘공장(控帳)’의 1693년 4월 30일 기록이다. 진술서와 함께 에도 막부에 파발을 띄워 보낼 정도로 중요한 ‘서(書) 3통’을 왜 우연히 납치된 어부가 갖고 있었을까. ‘서 3통’에 관해 또 다른 일본 사료인 ‘어용인일기(御用人日記)’에서는 ‘품속에 간직한 서부 3통’(懷中之書付三通)이라고 했다. 최 교수는 “‘서 3통’이 울릉도 관련 내용인지, 조정의 인물이 일본에 보내는 서한인지, 신원보증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1차 도일이 단순 납치가 아니었음을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라고 말했다. 안용복 일행의 소지품도 심상치가 않다. 최 교수는 안용복과 함께 납치당한 박어둔이 챙긴 ‘보따리’는 중요한 물건을 쌀 때 쓰는 ‘비단 보자기’로 번역하는 게 옳다고 봤다. 갓(笠), 실띠(打帶)도 있었는데, 실띠는 사대부가 정장을 할 때 쓰는 관대(冠帶)라는 것. 반면 어렵 도구는 갈고리 하나뿐이었다. 최 교수는 “소지품도 안용복 일행이 예사 어부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돗토리번사’ 등에는 안용복이 납치되기 한 해 전인 1692년에도 전복을 따던 조선인과 일본인 어부들이 울릉도에서 충돌하면서 대화한 기록이 나온다. 최 교수는 “조선과 일본의 어부들이 1년 간격으로 울릉도에서 조우했고, 조선 어부들 가운데 일본어를 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라며 “안용복이 1692년부터 울릉도를 통해 도일할 기회를 엿봤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안용복이 에도에 실제 갔는지에 대한 논쟁에 관해서는 “납치와 직접 관련된 오오야 가문의 고문서에 일행의 에도행이 기록돼 있고, ‘죽도기사’ 9월 4일자에 실린 ‘조선인구상서(朝鮮人口上書)’에는 일행이 ‘34일간 돗토리에 체류했다’고 써 있다”며 “이 기간에 안용복이 은밀하게 에도에 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경복궁의 정전(正殿)인 근정전(사진) 안에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문화재청은 21일부터 9월 21일까지 매주 수∼토요일만 하루 2회(오전 10시 반, 오후 2시 반) 근정전 내부를 특별 관람 형식으로 개방한다고 밝혔다. 평소 관람객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봐야 하지만 이 기간에는 전문 해설사가 미리 관람 신청한 이들을 근정전 내부로 안내한 뒤 기능과 상징, 구조물을 설명한다. 근정전은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朝會), 외국 사절 접견 등 국가적 의식이 열리던 중심 건물이다. 궁궐 정전은 그동안 문화재 훼손과 사고 우려 탓에 관람객에게 개방되지 않았다. 문화재청은 최근 내부를 정비하고 안전요원을 배치해 올 3월과 4월 각각 창덕궁 인정전과 창경궁 명정전을 개방한 바 있다. 1회당 20명으로 내부 관람 인원이 제한된다. 관람 희망일로부터 7일 전 오전 10시부터 하루 전까지 경복궁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면 된다. 중학생 이상 또는 만 13세 이상만 관람 가능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경복궁의 정전(正殿)인 근정전 안에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문화재청은 21일부터 9월 21일까지 매주 수~토요일만 하루 2회(오전 10시 반, 오후 2시 반) 근정전 내부를 특별 관람 형식으로 개방한다고 밝혔다. 평소 관람객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봐야 하지만 이 기간에는 전문 해설사가 미리 관람 신청한 이들을 근정전 내부로 안내한 뒤 기능과 상징, 구조물을 설명한다. 근정전은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朝會), 외국 사절 접견 등 국가적 의식이 열리던 중심 건물이다. 십이지신과 사신상으로 장식된 상·하층의 이중 월대(月臺 또는 越臺) 위에 세워져 위엄이 더하다. 중층 건물이지만 내부는 위아래가 트여 더욱 웅장하며, 천장 가운데는 여의주를 희롱하는 한 쌍의 황룡 조각이 설치돼 있다. 어좌(御座) 뒤로 병풍 ‘일월오봉병’이 둘러져 있다. 궁궐 정전은 그동안 문화재 훼손과 사고 우려 탓에 관람객에 개방되지 않았다. 문화재청은 최근 내부를 정비하고 안전요원을 배치해 올 3월과 4월 각각 창덕궁 인정전과 명정전을 개방한 바 있다. 1회당 20명으로 내부 관람 인원이 제한된다. 관람 희망일로부터 7일 전 오전 10시부터 하루 전까지 경복궁 인터넷 홈페이지(www.royalpalace.go.kr)에서 신청하면 된다. 중학생 이상 또는 만 13세 이상만 관람 가능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명성교회의 ‘부자(父子)세습’은 교회법상 불법이라는 교단의 판결이 나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재판국(강흥구 재판국장)은 명성교회 설립자 김삼환 목사(73)의 아들 김하나 위임목사(45) 청빙(請聘·교회가 목사를 구함) 결의 무효소송 재심 재판에서 청빙 결의는 위법하다고 5일 판결했다. 재판국원 15명 가운데 14명이 판결에 참여했으며 표결 결과는 공개하지 않았다. 김삼환 목사가 1980년 설립한 명성교회는 등록 교인이 10만 명에 달하는 예장 통합 교단의 대표적인 교회다. 예장 통합노회는 2013년 ‘교회 세습 금지’를 교단 헌법으로 결의했다. 그러나 명성교회는 김 목사가 정년퇴임하고 2년 뒤인 2017년 아들인 김하나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교단 헌법은 “은퇴하는 담임목사의 배우자 및 직계비속과 그 직계비속의 배우자는 담임목사로 청빙할 수 없다”로 규정돼 있다. 명성교회는 김 목사가 이미 은퇴했기 때문에 ‘은퇴하는’ 목사가 아니어서 교단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명성교회가 속한 서울동남노회는 ‘서울동남노회 정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김하나 목사 청빙 결의 무효 소송을 냈다. 지난해 8월 교단 재판국은 청빙이 적법하다며 명성교회 측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교단 총회는 재판국원을 전원 교체한 뒤 재심을 진행했다. 명성교회 측은 6일 장로 일동 명의의 입장문에서 “재판국원이 전원 교체되고 판결이 연기, 번복된 것은 이 사안이 법리적으로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후임 목사 청빙은 당회와 공동의회의 투표라는 민주적 결의를 거쳐 노회의 인준을 받은 적법한 절차였다”고 밝혔다. 강동원 명성교회 장로는 “교회가 교단을 탈퇴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명성교회의 ‘부자(父子)세습’은 교회법상 불법이라는 교단의 판결이 나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재판국(강흥구 재판국장)은 명성교회 설립자 김삼환 목사(73)의 아들 김하나 위임목사(45) 청빙 결의 무효소송 재심 재판에서 청빙 결의는 위법하다고 6일 판결했다. 재판국원 15명 가운데 14명이 판결에 참여했으며 표결 결과는 공개하지 않았다. 김삼환 목사가 1980년 설립한 명성교회는 등록 교인이 10만 명에 달하는 예장통합 교단의 대표적 교회다. 예장 통합노회는 2013년 ‘교회 세습 금지’를 교단 헌법으로 결의했다. 그러나 명성교회는 김 목사가 정년퇴임하고 2년 뒤인 2017년 아들인 김하나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교단 헌법은 “은퇴하는 담임목사의 배우자 및 직계비속과 그 직계비속의 배우자는 담임목사로 청빙할 수 없다”로 규정돼 있다. 명성교회는 김 목사가 이미 은퇴했기 때문에 ‘은퇴하는’ 목사가 아니어서 교단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명성교회가 속한 서울동남노회는 ‘서울동남노회정상화를위한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김하나 목사 청빙결의 무효 소송을 냈다. 하지만 지난해 8월 교단 재판국은 청빙이 적법하다며 명성교회 측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교단 총회가 재판국원을 전원 교체했고, 재심에서 원심을 뒤집은 이번 판결이 나왔다. 명성교회 대외협력실장인 강동원 장로는 이번 판결에 대해 “법리적으로 잘못됐다”며 “재재심 청구도 가능한데, (교회와 교단이) 시간을 두고 조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교인이 목사 청빙권을 가지며 개별 교회가 자율권을 갖는다는 게 장로교의 기본 교리”라면서도 “명성교회가 교단을 탈퇴하거나 사회법에 따라 법원에 소송을 낼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바다 냄새, 솔향기, 그리고 책 냄새. 4일 오후 강원 강릉시 연곡해변캠핑장의 소나무 숲에 자리 잡은 ‘책 읽는 버스’에는 세 가지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해수욕을 마치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아이들과 부모들이 시원한 버스 안으로 모여들었다. ‘책 읽는 버스’는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대표 김수연 목사)이 운영하고 KB국민은행이 후원하는 이동도서관이다. 대형버스를 개조해 서가와 영상·음향시설, 긴 의자를 설치하고 책 1000여 권과 DVD 100개를 들여놨다. 평소 도서관이 먼 산간 도서 지역의 마을이나 농어촌, 사람들이 모이는 축제 현장을 다니는데 이번에는 휴가철을 맞아 강원도의 캠핑장을 찾은 것. 친구 사이로, 가족들이 함께 피서를 온 설유빈 양(서울 월촌초 6)과 서예린 양(서울 가락초 6)이 나란히 버스에 올랐다. “해변에 도서관이라니! 학교에서는 책을 조용히 봐야 하는데, 여기는 그네에 앉아서 자유롭게 읽을 수 있으니까 더 좋네요.”(설 양) “소나무 향기가 나는 곳에서 책을 보니 읽고 싶은 기분이 더 나네요.”(서 양) ‘책 읽는 버스’와 피서객들이 해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곳을 찾다 보니 피서지에서 버스 만나기를 기다리는 팬도 생겼다. 가족과 함께 캠핑장에 놀러 온 윤호상 군(경기 광명시 철산초 6)은 작년에도 이 캠핑장에서 버스를 만났고, ‘탈무드’를 선물로 받아 가기도 했다. 윤 군은 “올해 또 버스가 와 있는 거 보고 정말 반가웠다”고 말했다. 윤 군의 어머니는 서가에서 ‘82년생 김지영’(조남주 지음)을 뽑아 들었다. 그는 “이번에도 책 읽는 버스가 캠핑장에 오길 바랐는데 운이 좋았다. 버스에 볼만한 책이 되게 많다. 일정이 맞아 내년에도 버스와 같은 기간에 여기로 휴가를 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버스가 지난달 26∼31일 찾은 강원 속초시 설악동 오토캠핑장에 온 최민아 씨(경기 군포시)도 “작년에는 연곡해변캠핑장에서 책 읽는 버스를 만났는데, 이번에는 여기서 만나서 또 책을 빌리러 왔다”고 했다. “공부를 할 때!” “시험을 볼 때!” “6교시 할 때!” 버스 안에 둘러앉은 초등학생 20여 명이 동화 ‘눈물바다’(서현 지음)를 함께 읽은 뒤 “언제 화가 나?”라는 물음에 큰 소리로 외쳤다. 강릉에서 독서치료를 접목한 심리상담소 ‘마음놀이터’를 운영하는 최혜경 씨(52)가 자원봉사자로 나서 같이 책을 읽고 다섯 글자로 자신의 감정에 관해 답하도록 한 것. 아이들은 “게임 졌을 때” “만화 못 볼 때” 슬프다고 했다. 종종 학교에서 독서 수업을 한다는 최 씨는 “학교생활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며 “‘책 읽는 버스’처럼 놀러 와서 느긋하게 책을 보는 자유로움을 학교에서 독서할 때도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그럼 아이들은 “언제 행복해?” 질문에 다섯 글자로 뭐라고 답하며 소리쳤을까. “책을 읽을 때!” “여행을 갈 때!” “지금 이 순간!”이었다. 기훈 군(광명 철산초 4)은 “독서 선생님이 특별한 일이 없어도 웃으면 행복해진다고 한 말이 기억에 남았다”고 말했다. 책 읽는 버스는 피서객들이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고 책을 빌려가도록 한다. 날마다 50권 정도를 대여한다. 각자 숙소에서 보고, 다음 날 오전 반납하면 된다. 종종 “뭘 보고 날 믿고 책을 빌려주느냐”, “내가 책을 안 돌려주면 어쩌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독서가들의 인성을 믿는다”는 게 운영진의 말이다. 실제 책 회수율은 ‘99.9% 이상’이라고 한다. 최현진 씨(41)는 김애란 소설가의 ‘바깥은 여름’을 빌려가면서 “휴가 오면서 가족들이 집에서 책을 한 권씩 챙겨왔는데, 안 갖고 와도 될 뻔했다”고 말했다. 버스에 오른 한 학생은 ‘책버스’로 삼행시를 이렇게 지었다. “책을 읽는 것은/버려지는 시간들을/스스로 구원하는 기회다.” 이날 버스에서는 배지 만들기, 논어와 탈무드 등의 포켓북 배포 행사도 열렸다. ‘책 읽는 버스’는 8일까지 연곡해변캠핑장에 머무르고, 10∼12일에는 경남 통영한산대첩 축제 현장을 찾아간다. 책 읽는 버스 방문 신청은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다.강릉=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바다냄새, 솔향기, 그리고 책 냄새. 4일 오후 강원 강릉시 연곡해변캠핑장의 소나무 숲에 자리잡은 ‘책 읽는 버스’에는 세 가지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해수욕을 마치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아이들과 부모들이 시원한 버스 안으로 모여들었다. ‘책 읽는 버스’는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대표 김수연 목사)이 운영하고 KB국민은행이 후원하는 이동도서관이다. 대형버스를 개조해 서가와 영상·음향시설, 긴 의자를 설치하고 책 1000여 권과 DVD 100개를 들여놨다. 평소 도서관은 먼 산간 도서 지역의 마을이나 농어촌, 사람들이 모이는 축제 현장을 다니는데 이번에는 휴가철을 맞아 강원도의 캠핑장을 찾은 것. 친구 사이로, 가족들 함께 피서를 온 설유빈 양(서울 월촌초 6)과 서예린 양(서울 가락초 6)이 나란히 버스에 올랐다. “해변에 도서관이라니! 학교에서는 책을 조용히 봐야 하는데, 여기는 그네에 앉아서 자유롭게 읽을 수 있으니까 더 좋네요.”(설유빈) “소나무 향기가 나는 곳에서 책을 보니 읽고 싶은 기분이 더 나네요.”(서예린) ‘책 읽는 버스’와 피서객들이 해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곳을 찾다보니, 피서지에서 버스를 만나기를 기다리는 팬도 생겼다. 가족과 함께 캠핑장에 놀러 온 윤호상 군(경기 광명시 철산초 6)은 작년에도 이 캠핑장에서 버스를 만났고, ‘탈무드’를 선물로 받아 가기도 했다. 윤 군은 “올해 또 버스가 기다리는 거 보고 정말 반가웠다”고 말했다. 윤 군의 어머니는 서가에서 ‘82년생 김지영’(조남주 지음)을 뽑아들었다. 그는 “이번에도 책 읽는 버스가 캠핑장에 오길 바랐는데 운이 좋았다. 버스에 볼 만한 책이 되게 많다. 일정이 맞아 내년에도 버스와 같은 기간에 여기로 휴가를 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버스가 지난달 26~31일 찾은 강원 속초시 설악동 오토캠핑장에 온 최민아 씨(경기 군포시)도 “작년에는 연곡해변캠핑장에서 책 읽는 버스를 만났는데, 이번에는 여기서 만나서 또 책을 빌리러 왔다”고 했다. “공부를 할 때!”, “시험을 볼 때!”, “6교시 할 때!” 버스 안에 둘러앉은 초등학생 20여 명이 동화 ‘눈물바다’(서현 지음)를 함께 읽은 뒤 “언제 화가 나?”라는 물음에 큰 소리로 외쳤다. 강릉에서 독서치료를 접목한 심리상담소 ‘마음놀이터’를 운영하는 최혜경 씨(52)가 자원봉사자로 나서 같이 책을 읽고 다섯 글자로 자신의 감정에 관해 답하도록 한 것. 아이들은 “게임 졌을 때, 만화 못 볼 때” 슬프다고 했다. 종종 학교에서 독서 수업을 한다는 최 씨는 “학교생활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며 “‘책 읽는 버스’처럼 놀러 와서 느긋하게 책을 보는 자유로움을 학교에서 독서할 때도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그럼 아이들은 “언제 행복해?” 질문에 다섯 글자로 뭐라고 답하며 소리쳤을까. “책을 읽을 때!”, “여행을 갈 때!”, “지금 이 순간!”이었다. 기훈 군(광명 철산초 4)은 “독서 선생님이 특별한 일이 없어도 웃으면 행복해진다고 한 말이 기억에 남았다”고 말했다. 책 읽는 버스는 피서객들이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고 책을 빌려가도록 한다. 날마다 50권 정도를 대여한다. 각자 숙소에서 보고, 다음날 오전 반납하면 된다. 종종 “뭘 보고 날 믿고 책을 빌려주느냐”, “내가 책을 안돌려주면 어쩌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독서가들의 인성을 믿는다”는 게 운영진의 말이다. 실제 책 회수율은 ‘99.9% 이상’이라고 한다. 최현진 씨(41)는 김애란 소설가의 ‘바깥은 여름’을 빌려가면서 “휴가 오면서 가족들이 집에서 책을 한권 씩 챙겨왔는데, 안 갖고 와도 될 뻔 했다”고 말했다. 버스에 오른 한 학생은 ‘책버스’로 삼행시를 이렇게 지었다. “책을 읽는 것은/버려지는 시간들을/스스로 구원하는 기회다.” 이날 버스에서는 배지 만들기, 논어와 탈무드 등의 포켓북 배포 행사도 열렸다. ‘책 읽는 버스’는 8일까지 연곡해변캠핑장에 머무르고, 10~12일에는 경남 통영한산대첩 축제 현장을 찾아간다. 책 읽는 버스 방문 신청은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다. 강릉=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