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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네 살에 염습(殮襲)을 배웠다. 고인을 마지막으로 목욕시키고 깨끗한 옷을 입혀 관에 모시는 일이었다. “수입이 괜찮다”는 말에 일을 시작했지만 주위의 반대가 심했다. 천대받는 직업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세상의 인연을 매듭짓는 소중한 직분으로 여기고 힘을 다했다. 그렇게 현재까지 서거한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9명 중 6명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최규하(2006년), 노무현(2009년), 김영삼(2015년), 노태우(2021년), 전두환(2021년) 전 대통령을 직접 염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2009년)의 국장에 참여했다. 10일 에세이 ‘대통령의 염장이’(김영사)를 펴낸 장례지도사 유재철 씨(62) 이야기다. 유 씨는 14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사람이 죽으면 언제든 달려가야 하기에 정작 산 사람과의 약속은 거의 잡지 않고 살아왔다”며 “자긍심을 갖고 일하다 보니 어느새 28년간 3000여 명의 마지막을 지켰다”고 말했다. 그는 이맹희 CJ 명예회장(2015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2020년) 등 유명인사뿐 아니라 노숙자, 이주노동자, 홀몸노인 등 무연고자의 장례도 치러왔다. “평범한 사람이건 유명한 사람이건 염습에는 차이가 없죠. 고인이 누구든 마음을 다해 염하는 게 제일입니다.” 지금껏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죽음은 평범한 80세 할머니의 마지막이다. 고인은 볕 좋은 날 세상을 떠났다. 아침에 일어나 죽음을 직감하곤 화장실에 들어가 혼자 목욕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 선물한 분홍색 치마저고리를 차려 입고 소파에 누운 채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 유 씨가 장례 의뢰를 받고 갔지만 따로 염습할 게 없었다. 그는 “고인은 죽음이 다가오는 걸 알고 일주일 전부터 곡기를 끊었다”며 “몸에서 어떤 이물질도 새어나오지 않을 정도였으니 스스로 염습을 마친 셈”이라고 했다. 유 씨는 지도자의 떠나는 길이 장례문화를 개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례로 최종현 SK 회장(1998년)의 화장(火葬)이 매장에만 집착하는 장례풍속을 바꿨다는 것. 그는 “내가 김영삼 전 대통령 장례식 때 간소화 차원에서 상주 완장을 없앤 게 기억에 남는다”며 “관을 짜지 말라는 마지막 유언에 따라 들것에 시신을 올리고 천을 덮은 2010년 법정 스님 다비(茶毘·불교에서 시신을 화장하는 의례)도 자주 생각난다”고 회고했다.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키며 삶을 마무리하는 것을 강조하는 ‘웰다잉’ 시대. 우리가 나아가야 할 장례문화는 어떤 그림일까. “2014년 장모님이 돌아가셨는데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형식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싶지 않았어요. 발인 전날 저녁에 가족과 지인들이 모여 고인의 인생을 요약하는 약력을 읊고 시를 낭송했습니다. 유명인사들만 애도식을 연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고인을 생각하는 방식으로 장례식을 열면 그것이 진정한 애도의 방법입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지난해 3월, 14년의 직장생활로 모은 저축금 수억 원을 가상화폐에 투자했다. 평범한 생활인으로서의 삶은 지긋했고, 재테크로 돈을 버는 친구들 앞에서는 스스로 작아졌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이 아닌 이더리움 등 다른 가상화폐들을 뜻하는 알트코인에 투자했다. 위험도가 높은 만큼 수익률도 높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1주일 만에 수익률 20%를 달성했다. 환호했다. 하지만 2개월 후 투자금의 50% 이상을 잃었다. 직장인의 고충을 상담하는 심리학자이자 자살 예방교육 전문가인 그였지만 스스로 삶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 18일 에세이 ‘심리학자가 투자실패로 한강 가기 직전 깨달은 손실로부터의 자유’(드림셀러·사진)를 펴내는 김형준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수석연구원(41) 이야기다. 그는 15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가난한 삶은 아니었지만 주변에서 가상화폐, 주식, 부동산 투자로 수익을 냈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벼락거지’가 된 느낌이었다”고 했다. “주식 계좌조차 없을 정도로 재테크에는 당초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사람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죠. 나만 돈을 못 버는 것 같은 억울함도 들었고요.” 그가 가상화폐에 대해 알게 된 건 2017년. 당시 비트코인 열풍이 세계를 휩쓸었지만 그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 사이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파트 값이 치솟고 주식시장이 요동쳤다. 직장동료나 친구들과 만날 때마다 “누구 집이 1년 새 3억 원이나 올랐다” “누가 비트코인으로 한 달 만에 1억 원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확행’(작지만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보다 투자를 고취하는 감탄사 ‘가즈아’가 마음에 더 다가왔다. 이윽고 제대로 된 공부 없이 지인들의 추천만 믿고 가상화폐를 사들였다. 출처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정보만 믿고 투자하기도 했다. 투자 실패 후 끙끙 앓고만 있던 그가 가상화폐 투자를 포기한 건 가족 앞에 선 뒤다. 그는 “아내에게 투자에 실패했다는 말을 하지 말까 고민하는 순간 내가 중독자가 되는 문턱에 서 있음을 직감했다”며 “정신건강을 관리하는 직업인으로서 수치심에 시달렸지만 지금은 가상화폐를 모두 팔고 일상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투자 실패를 호소하는 직장인들을 자주 상담한다. 그들에게 자신의 실패담을 들려주며 심리학자도 흔들린다고 위로를 건넨다. 부끄럽지만 자신의 실패담을 책으로 써낸 이유다. “잃은 돈을 되찾는 게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에요. 뻔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마음을 잃지 않으면 일상을 만회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한강 가즈아’처럼 극단적 선택을 은유하는 신조어가 투자의 상징처럼 쓰이는 게 안타까워요. 정말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투자하는지 자문할 때입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지난해 3월. 오랜 직장생활로 모은 저축금 수억 원을 가상화폐에 투자했다. 평범한 생활인으로서의 삶은 지긋했고, 재테크로 돈을 버는 친구들 앞에서 매번 작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비트코인이 아닌 이더리움 등 다른 여러 가상화폐를 뜻하는 알트코인에 투자했다. 알트코인은 위험도도 높지만 수익률도 크다는 생각에서다. 1주일 만에 수익률 20%를 올렸다. 환호했다. 하지만 2개월 후 투자금의 50% 이상을 잃었다. 직장인들의 고충을 상담하는 심리학자이자 자살예방교육전문가였지만 스스로 삶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 18일 에세이 ‘심리학자가 투자 실패로 한강 가기 직전 깨달은 손실로부터의 자유’(드림셀러) 펴내는 김형준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수석연구원(41) 이야기다. 그는 15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가난한 삶은 아니었지만 주변에서 가상화폐, 주식, 부동산 투자로 수익을 얻었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난 ‘벼락거지’가 된 느낌이었다”고 했다. “주식 계좌도 없을 정도로 재테크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죠. 나만 돈을 못 버는 것 같은 억울함도 들었고요.” 그가 가상화폐에 대해 알게 된 건 2017년이다. 당시 비트코인 열풍이 전 세계를 휩쓸었지만 그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 사이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파트 값이 치솟고 주식 시장이 요동쳤다. 직장동료나 친구들과 만날 때마다 “누구 집이 1년 사이에 3억 원이나 올랐다” “누가 비트코인으로 1개월 만에 1억 원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마음속에도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을 추구하는 ‘소확행’보단 투자에서 긍정적인 기대를 표현하는 감탄사인 ‘가즈아’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는 제대로 된 공부 없이 지인들의 추천만 믿고 가상화폐를 사들였다. 출처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정보를 믿고 가상화폐를 사기도 했다. 투자 실패 후 끙끙 앓고만 있던 그가 가상화폐 투자를 포기한 건 가족 앞에 선 다음이다. 그는 “아내에게 투자에 실패했다는 말을 하지 말까 고민하는 순간 내가 중독자가 되는 문턱에 서 있음을 직감했다”며 “정신건강을 관리해주는 직업을 지닌 내가 투자로 돈을 잃었다는 수치감에 시달렸지만 지금은 가상화폐를 모두 팔고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기업정신건강연구소에서 일하는 그는 요즘 투자 실패를 호소하는 직장인들을 자주 상담한다. 그는 직장인들에게 자신의 실패담을 들려주며 심리학자도 흔들린다고 위로를 건넨다. 부끄럽지만 자신의 실패담을 책으로 써낸 것도 같은 이유다. “잃은 돈을 되찾는 것이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에요. 뻔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마음을 잃지 않으면 일상을 만회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한강 가즈아’처럼 극단적 선택을 은유하는 신조어가 투자의 상징처럼 쓰이는 게 안타까워요. 정말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투자를 하는 지 자문할 때입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서기 589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만리장성 너머로 영토를 넓히기 위해 고구려를 압박했다. 특히 수나라 문제(文帝)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정벌하겠다고 위협하며 자국에 복속하라고 요구했다. 고구려가 이를 거부하자 598년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후에도 수나라 양제(煬帝)가 612년, 당나라 태종(太宗)이 645년에 고구려를 잇달아 공격했다. 하지만 이 모든 침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수당 대군을 고구려는 어떻게 물리친 걸까. 인문지리학자로 고려대 명예교수인 저자는 고구려가 수당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던 이유를 땅의 생김새를 뜻하는 ‘지절(肢節)’에서 찾는다. 산지가 많은 땅에 자리한 고구려가 지절을 제대로 이해하고 방어에 적용했다는 것. 고구려에는 산성이 200여 개에 달했다. 특히 산의 능선과 골짜기를 이용한 포곡형(包谷形) 산성이 주류였다. 고구려는 산성 안에서 적을 상대함으로써 적은 병력으로도 방어에 성공했다. 통치 체계가 우수하고 상무 정신이 투철한 군사 강국이었다는 점도 주효했지만, 수당의 침공 루트에 지절을 고려한 산성을 구축해 맞선 전략이 승리의 비결이었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저자는 지절 개념을 ‘지절률’로 확장한다. 지형적 다양성과 복잡성을 기준으로 지절률이 높은 땅과 낮은 땅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 예를 들어 리아스식 해안처럼 해안선이 복잡한 지형은 지절률이 높은 땅이다. 반면 해안선이 일자로 뻗어 있으면 지절률이 낮다. 또 한 지역에 해안과 산악 지형이 복잡하게 섞여 있거나, 땅에 여러 하천이 다양한 갈래로 뻗어 있는 곳도 지절률이 높은 땅이다. 지절률이 높은 땅은 대개 다양한 문명이 생긴다. 예컨대 프랑스는 센강, 루아르강, 론강 등 강의 수가 많다. 이 때문에 각 지역의 특색이 다양하고 하나로 통일될 가능성이 낮았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기에 다른 생각을 가진 이의 입장과 권리를 이해하는 관용(톨레랑스)의 정신이 발달했다. 독일에 비해 음식 종류가 다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저자는 산악, 고원, 평원, 사막, 바다처럼 다양한 지형이 섞인 땅을 ‘잘생긴 땅’이라고 부른다. 서로 다른 문명이 섞이며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것.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가 문명의 발상지로 꼽히는 것도 잘생긴 땅이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확산해 발달한 이유도 지절률과 관련이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 메소포타미아 서쪽인 지중해 동부 에게해와 그리스 일대의 지절률은 높지만, 동쪽인 중앙아시아는 지절률이 낮다는 것이다. 문명의 발달 과정을 땅의 생김새로 풀어내는 시도가 신선하다. 물론 지리적 이유 외에도 인류 역사를 바꾸는 변수는 존재한다. 지절을 역사 발전의 궁극적 원인으로 보기는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책을 읽고 나니 평지가 적어 살기에 좋지 않다고 생각한 우리나라가 지절률 관점에서는 좋은 땅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바다, 산, 평야가 고루 뒤섞인 한반도. 그 덕에 우리는 다양한 음식과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서기 589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만리장성 너머로 영토를 넓히기 위해 고구려를 압박했다. 특히 수나라 문제(文帝)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정벌하겠다고 위협하며 자국에 복속하라고 요구했다. 고구려가 이를 거부하자 598년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후에도 수나라 양제(煬帝)가 612년, 당나라 태종(太宗)이 645년에 고구려를 잇달아 공격했다. 하지만 이 모든 침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수당 대군을 고구려는 어떻게 물리친 걸까. 인문지리학자로 고려대 명예교수인 저자는 ‘지오그래피’(푸른길)에서 고구려가 수당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던 이유로 땅의 생김새를 뜻하는 ‘지절’(肢節)을 꼽는다. 산지가 많은 땅에 자리한 고구려가 지절을 제대로 이해하고 방어에 적용했다는 것. 고구려에는 산성이 200여 개에 달했다. 특히 산의 능선과 골짜기를 이용한 포곡형(包谷形) 산성이 주류였다. 고구려는 산성 안에서 적을 상대함으로써 적은 병력으로도 방어에 성공했다. 통치체계가 우수하고 상무정신이 투철한 군사강국이었다는 점도 주효했지만, 수당의 침공루트에 지절을 고려한 산성을 구축해 맞선 전략이 승리의 비결이었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저자는 지절 개념을 ‘지절률’로 확장한다. 지형적 다양성과 복잡성을 기준으로 지절률이 높은 땅과 낮은 땅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 예를 들어 리아스식 해안처럼 해안선이 복잡한 지형은 지절률이 높은 땅이다. 반면 해안선이 일자로 뻗어있으면 지절률이 낮다. 또 한 지역에 해안과 산악지형이 복잡하게 섞여 있거나, 땅에 여러 하천이 다양한 갈래로 뻗어 있는 곳도 지절률이 높은 땅이다. 지절률이 높은 땅은 대개 다양한 문명이 생긴다. 예컨대 프랑스는 센강, 루아르강, 론강 등 강의 수가 많다. 이 때문에 각 지역의 특색이 다양하고 하나로 통일될 가능성이 낮았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기에 다른 생각을 가진 이의 입장과 권리를 이해하는 관용(톨레랑스)의 정신이 발달했다. 독일에 비해 음식 종류가 다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저자는 산악, 고원, 평원, 사막, 바다처럼 다양한 지형이 섞인 땅을 ‘잘생긴 땅’이라고 부른다. 서로 다른 문명이 섞이며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것.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가 문명의 발상지로 꼽히는 것도 잘생긴 땅이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확산, 발달한 이유도 지절률과 관련이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 메소포타미아 서쪽인 지중해 동부 에게 해와 그리스 일대의 지절률은 높지만, 동쪽인 중앙아시아는 지절률이 낮다는 것이다. 문명의 발달과정을 땅의 생김새로 풀어내는 시도가 신선하다. 물론 지리적 이유 외에도 인류 역사를 바꾸는 변수는 존재한다. 지절을 역사발전의 궁극적 원인으로 보기는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책을 읽고나니 평지가 적어 살기에 좋지 않다고 생각한 우리나라가 지절률 관점에서는 좋은 땅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바다, 산, 평야가 고루 뒤섞인 한반도. 그 덕에 우리는 다양한 음식과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이호재기자 hoho@donga.com}

방탄소년단의 리더 RM이 2022 베이징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m 준결선에서 실격 처리된 한국 쇼트트랙 국가대표 황대헌을 응원해 중국 누리꾼의 악플 공격을 받았다. RM은 7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사진)에 황대헌이 중국 선수들을 추월하는 영상과 함께 박수를 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이모티콘을 올렸다. 1위로 통과하고도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결선 진출에 실패한 황대헌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 것. RM이 해당 게시물을 올리자 중국인 누리꾼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구토하는 모양의 이모티콘을 남기고 비난성 댓글을 대거 달았다. RM이 인스타그램 댓글 창을 닫자 이들은 방탄소년단 공식 인스타그램으로 몰려가 악플을 남겼다. 이에 방탄소년단 팬클럽인 아미는 그룹의 상징인 보라색으로 된 하트를 공식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방법으로 RM을 옹호하며 맞섰다. 앞서 아이돌그룹 에스파의 중국인 멤버 닝닝은 편파 판정 논란을 낳은 중국 대표팀의 쇼트트랙 혼성계주 2000m 우승을 기뻐하는 글을 5일 올려 국내 누리꾼에게 거센 비판을 받았다. 닝닝은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오늘 밤 첫 금메달을 따서 기쁘다”고 썼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치명적 #설레는 #17금 카카오웹툰이 7일부터 진행 중인 ‘어른 로맨스 공모전’에 붙은 해시태그다. 키스나 포옹처럼 남녀 간의 스킨십은 등장하지만 성애(性愛) 중심의 성인용 작품은 아닌 이른바 ‘17금 로맨스’가 대상이라는 것.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하는 사극 로맨스, 회사에서 벌어지는 오피스 로맨스 모두 응모 가능하다. 박계현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카카오웹툰 PD는 8일 “웹툰 시장 규모가 급성장하면서 독자들의 취향이 점점 세분되고 있다”며 “로맨스의 주요 독자인 20, 30대를 사로잡기 위해 17금이라는 연령 등급을 내세워 공모전을 열었다”고 했다. 최근 대형 웹툰 플랫폼들이 이른바 ‘17금 로맨스’ 공모전을 잇달아 열고 있다. 그동안 웹툰 공모전은 사극처럼 시대적 배경을 정하거나 개그, 스포츠 등 특정 소재를 제시한 경우가 많았다. 연령 등급을 앞세운 공모전은 이례적이다. 네이버웹툰이 지난달 31일부터 열고 있는 ‘매운맛 로맨스’ 공모전은 치명적인 캐릭터와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내세웠다. ‘17금’이라는 해시태그도 달았다. 네이버웹툰 관계자는 “최근 성숙한 분위기의 로맨스 작품에 대한 갈증이 큰 상황이어서 학원물이나 청춘물과는 차별화하기 위해 ‘매운맛 로맨스’라는 새로운 명칭을 만들었다”고 했다. 웹툰 플랫폼들이 이런 공모전을 여는 건 17금 로맨스 작품이 잇달아 화제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사내연애를 다룬 웹툰 ‘내일도 출근!’은 2년여 만에 1억5000만 회, 첫사랑과의 재회를 다룬 웹툰 ‘사귄 건 아닌데’는 9400만 회 조회 수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다. 나쁜 남자와 사랑에 빠진 20대 여성이 등장하는 웹툰 ‘알고 있지만’(사진)은 지난해 동명의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일부 소형 플랫폼들은 성인용 웹툰을 통해 화제를 끌고 조회 수를 높인다. 이에 비해 대형 플랫폼은 성인용 작품을 유통하기 쉽지 않은 것이 영향을 미쳤다. 이용자가 많고 기업에 요구되는 사회적 책임도 커 논란을 야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카오웹툰은 ‘어른로맨스 공모전’에서 작품이 과도하게 선정적이거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되면 뽑지 않는다고 밝혔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유튜브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수위가 높은 작품이 많이 유통돼 15세 관람가를 유치하다고 여기는 성인 독자가 증가나면서 벌어진 현상”이라며 “취향이 세분된 독자를 사로잡기 위해 콘텐츠 업계는 더욱 다양한 시도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치명적 #설레는 #17금 카카오웹툰이 7일부터 열고 있는 ‘어른로맨스 공모전’에 붙은 해시태그다. 키스나 포옹처럼 남녀 간의 스킨십은 등장하나 성애(性愛) 중심의 성인용 작품은 아닌 이른바 ‘17금 로맨스’가 공모전 대상이라는 것. 신분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를 펼치는 사극 로맨스, 회사에서 벌어지는 오피스 로맨스 모두 응모 가능하다. 박계현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카카오웹툰 PD는 “최근 웹툰 시장 규모가 급성장하면서 독자들의 취향이 점점 세분화되고 있다”며 “로맨스 의 주요 독자인 20, 30대를 사로잡기 위해 17금이라는 연령등급을 주제로 삼아 공모전을 열었다”고 했다. 최근 대형 웹툰 플랫폼들이 이른바 ‘17금 로맨스’ 공모전을 열고 있다. 그동안 웹툰 공모전이 조선시대, 사극 등 시대적 배경이나 개그, 스포츠 등 특정 소재를 공모전 주제로 내세운 적은 많다. 하지만 연령등급을 주제로 삼은 공모전은 이례적이다. 네이버웹툰이 지난달 31일부터 열고 있는 ‘매운맛 로맨스’는 웹툰 소재로 치명적인 캐릭터와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내세웠다. 또 ‘17금’이라는 해시태그를 달았다. 네이버웹툰 관계자는 “최근 성숙한 분위기의 로맨스 작품에 대한 갈증이 업계 전반에 크게 있는 상황”이라며 “학원물이나 청춘물과는 차별화하기 위해 ‘매운맛 로맨스’라는 새로운 명칭을 만들었다”고 했다. 웹툰 플랫폼들이 이런 공모전을 여는 건 17금 로맨스 작품이 잇달아 화제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사내연애를 다룬 웹툰 ‘내일도 출근!’은 1억5000만 회, 옛 첫사랑과의 재회를 다룬 웹툰 ‘사귄 건 아닌데’는 9400만 회 조회수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다. 나쁜 남자와 사랑에 빠진 20대 여성이 등장하는 웹툰 ‘알고있지만’은 지난해 동명의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일부 소형 플랫폼들은 성인용 웹툰을 통해 화제를 끌고 조회 수를 높인다. 하지만 대형 플랫폼은 윤리적 문제도 신경 써야 한다. 대형 웹툰 플랫폼들이 성인용 작품을 유통하기 쉽지 않은 특성도 영향을 끼친 것. 실제로 ‘어른로맨스 공모전’은 작품이 과도하게 선정적이거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되면 뽑지 않는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유튜브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수위가 높은 작품이 많이 유통되고 있는 만큼 15세 관람가를 유치하다고 여기는 성인 독자가 늘어나면서 벌어진 현상”이라며 “앞으로도 세분화된 독자의 취향을 사로잡기 위한 콘텐츠 업계의 노력은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평생 의사로 일하다 환갑을 맞았다. 전문직이라 은퇴는 없지만 삶이 허했다. 그때 우연히 남극 장보고 과학기지에서 1년을 근무할 월동연구대 의사를 뽑는다는 공고가 눈에 띄었다. 30, 40대 건장한 이들이 근무하는 혹한의 근무지였다. 이 나이에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새로운 일에 대한 호기심, 미지의 땅을 개척한다는 도전정신으로 남극에서 홀로 대원들의 건강을 책임졌다. 최근 에세이 ‘남극일기’(미다스북스·사진)를 펴낸 김용수 외과전문의(68) 이야기다. 김 전문의는 3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2013년 우연히 대한민국 쇄빙선 아라온호 선의로 승선해 3개월간 겨울 남극바다를 항해했지만 1년을 머무는 장보고 과학기지 근무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더 늦으면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마음으로 2015년 11월부터 2016년 11월까지 남극 장보고 과학기지 월동대원 의사로 일했다”고 했다. 남극에 찾아오는 극야 기간에는 햇빛을 보지 못해 불면증과 우울증에 걸릴 정도다. 그만큼 만만치 않은 곳이다. “부모님 상이 나도 돌아갈 수 없다는 각오를 할 정도로 단단히 마음을 먹고 갔죠. 당시 16명의 대원 가운데 제가 가장 나이가 많았습니다.” 장보고 과학기지 의사는 월동대원 16명과 연구와 보급을 위해 기지를 찾는 연구자 수백 명의 건강을 돌본다. 홀로 근무하며 환자를 진료하고 마취, 수술 집도, 간호를 도맡아 한다. 위중한 응급환자가 생기더라도 바다가 꽁꽁 얼어붙으면 쇄빙선이 다니지 못하는 등 이송할 교통수단마저 없다. 의사가 기지 내 병원에서 자체적으로 수술할 수밖에 없다. 급박한 순간도 종종 생겼다. 2016년 1월 대원 한 명이 배가 아프다며 찾아왔다.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대장 벽에 염증이 생기는 게실염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자칫 생명이 위험할 수 있었지만 환자를 1만3000km 떨어진 뉴질랜드로 이송하는 건 쉽지 않은 일. 그는 “사흘간 잠을 거의 자지 않고 수술 없이 환자를 치료했다”며 “환자는 결국 10일 후 건강을 회복해 이송을 막았다”고 했다. 그는 영국 작가 데이비드 데이가 쓴 남극탐험 역사서 ‘남극대륙’(미다스북스)을 최근 번역했다. “700쪽이 넘는 책을 번역한 건 남극에 대한 애정 때문이죠. 아직도 남극의 공기가 어땠는지, 블리자드가 얼마나 거셌는지, 밤하늘과 오로라가 얼마나 황홀했는지, 펭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기억납니다. 혹한을 경험한 뒤 삶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됐어요.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면 늙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평생 의사로 일하다 환갑을 맞았다. 전문직이라 은퇴는 없지만 삶이 허했다. 그때 우연히 남극 장보고 과학기지에서 1년을 근무할 월동연구대 의사를 뽑는다는 공고가 눈에 띄었다. 30~40대 건장한 이들이 근무하는 혹한의 근무지였다. 이 나이에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새로운 일에 대한 호기심, 미지의 땅을 개척한다는 도전정신으로 남극에서 홀로 대원들의 건강을 책임졌다. 최근 에세이 ‘남극일기’(미다스북스)를 펴낸 김용수 외과전문의(68) 이야기다. 김 전문의는 3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2013년 우연히 대한민국 쇄빙선 아라온호 선의로 승선해 3개월간 겨울 남극바다를 항해했지만 1년을 머무는 장보고 과학기지 근무는 차원이 달랐다”며 “하지만 ‘더 늦으면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마음으로 2015년 11월부터 2016년 11월까지 남극 장보고 과학기지 월동대원 의사로 일했다”고 했다. “남극에 찾아오는 극야 기간에는 햇빛을 보지 못해 불면증과 우울증이 찾아오는 곳이에요. 부모님 상이 나도 돌아갈 수 없다는 각오를 할 정도로 단단히 마음을 먹고 갔죠. 당시 16명의 대원 가운데 제가 가장 나이가 많았습니다.” 장보고 과학기지 의사는 월동대원 16명과 연구와 보급을 위해 기지를 찾는 연구자 수백 명의 건강을 돌본다. 홀로 근무하며 환자를 진료하고, 마취, 수술 집도, 간호를 도맡아 한다. 위중한 응급환자가 발생하더라도 바다가 꽁꽁 얼어붙어 쇄빙선이 다니지 못하는 등 후송할 교통수단이 없다. 의사가 기지 내 병원에서 자체적으로 수술할 수밖에 없다. 급박한 순간도 종종 생겼다. 2016년 1월 대원 한 명이 배가 아프다며 찾아 왔다.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진료 결과 대장 벽에 염증이 생기는 게실염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자칫 생명이 위험할 수 있었지만 환자를 1만3000km 떨어진 뉴질랜드로 후송하는 건 쉽지 않은 일. 그는 “사흘간 잠을 거의 자지 않고 수술 없이 환자를 치료했다”며 “환자는 결국 10일 후 건강을 회복해 후송을 막았다”고 했다. 그는 영국 작가 데이비드 데이가 쓴 남극탐험 역사서 ‘남극대륙’(미다스북스)을 최근 번역했다. “7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번역한 건 남극에 대한 애정 때문이죠. 아직도 남극의 공기가 어땠는지, 블리자드가 얼마나 거셌는지, 밤하늘과 오로라가 얼마나 황홀했는지, 펭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기억납니다. 혹한을 경험한 뒤 삶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됐어요.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면 늙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서울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골목길에 동네 서점 하나가 들어선다. 서점 주인인 젊은 여성 영주는 서점 안에서 가만히 앉아 책만 읽는다. 영주를 궁금해하는 동네 사람들이 조금씩 서점에 발을 들인다. 바리스타 민준, 작가 승우, 고등학생 민철, 주부 희주…. 크고 작은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서점에 모이고 서로를 위로한다. 그렇게 ‘휴남동 서점’은 안식처가 돼 간다. 작품은 작은 서점을 배경으로 동네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이야기를 담은 장편소설이다. 지난해 10월 전자책으로 출간돼 전자책 플랫폼 밀리의 서재에서 관심을 끌었고, 지난달 17일 출간된 종이책은 1월 다섯째 주 온라인 서점 알라딘 종합 베스트셀러 9위를 차지했다. 처음엔 성공 여부가 불투명했지만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고 있는 것. 문학평론가보단 독자들의 인기에 힘입어 서점가를 휩쓴다는 점이 1, 2권 합쳐 100만 부가 팔린 장편소설 ‘달러구트 꿈 백화점’(팩토리나인) 시리즈를 생각나게 한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기발한 장르 소설과 달리 이 작품은 평범하기 그지없다. 자극적인 소재를 찾아볼 수 없다. 좀비가 등장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겨야 할 거대한 악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반전도 없고, 독자가 눈에 불을 켜고 찾아야 할 복선도 많지 않다. 그 대신 소설은 서점을 운영하는 영주와 동네 주민들의 일상을 잔잔하게 전한다. 누군가는 심심한 소설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소설은 우리 삶에서 중요하지만 잊고 사는 것들을 건드린다. 자신이 하는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삶을 살아야 하는지. 평범한 인물들의 시선으로 상처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읽는 내내 위로받는 느낌” “지친 일상의 피로해소제 같은 소설”이라는 독자들의 평가가 나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독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힐링 소설이 사랑받고 있다. 죽기로 결심한 여성이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도서관에서 희망을 찾는 장편소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인플루엔셜)는 지난해 4월 출간돼 25만 부가 팔렸다. 노숙인 생활을 하던 남자가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를 하는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나무옆의자)은 지난해 4월 출간됐지만 교보문고 올해 1월 넷째 주 종합 베스트셀러 2위를 차지할 만큼 오랫동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가 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로 지친 마음 때문일까. 자극적인 소재를 앞세운 작품에 싫증나서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숨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우리를 위로하는 작품이 있다는 건 다행이다. 무거운 주제의식이나 기발한 상상력 없이도 소설은 재밌을 수도 있다는 걸 이 작품을 통해 다시 깨닫는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여자 주인공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집안을 차지한 계모는 주인공을 하녀처럼 부리지만 곧 반전이 생긴다. 마법을 쓰는 조력자가 나타나 주인공을 돕는 것. 그 덕에 주인공은 무도회에 참가할 수 있게 된다. 무도회에서 주인공은 운명의 짝을 만난다. 어떤 시험을 통과한 뒤 주인공은 짝과 재회한다. 주인공은 짝과 결혼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양 전래동화 ‘신데렐라’를 떠올릴 것이다. 누군가의 머릿속엔 화려한 궁정, 유리구두, 호박마차가 스쳐갈 것이다.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 ‘신데렐라’의 영향이다. 일본 간사이대 문학부 교수인 저자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다양한 국가와 문화권에 퍼져 있다고 말한다. 신데렐라 이야기는 오직 서양에만 존재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인류의 첫 신데렐라 이야기로 기원전 5세기 고대 이집트의 ‘로도피스의 신발’을 꼽는다. 당시 이집트엔 전설적인 미모를 지닌 여성 로도피스가 있었다. 로도피스는 발칸반도 동부인 트라키아 출신의 노예였는데 이집트로 팔려와 매춘부로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로도피스의 신발 한 짝을 매가 물어가 파라오 앞에 떨어뜨린다. 이 인연으로 로도피스는 이집트의 왕비가 된다. 순탄치 않은 삶을 살던 여성 주인공이 조력자의 도움으로 짝과 만나는 신데렐라 서사의 전형이다. 이 서사는 세계로 퍼진다. 서양으론 ‘양모 소녀’(터키), ‘고양이 체네렌톨라’(이탈리아), ‘상드리용’(프랑스), ‘재투성이’(독일), ‘골풀 모자’(영국)로 전해진다. 동양엔 ‘아름다운 헤나’(예멘), ‘한치 이야기’(인도), ‘콩쥐팥쥐’(한국), ‘누카후쿠와 고메후쿠’(일본)로 발전한다. 신데렐라 이야기는 각 나라의 문화와 풍습에 맞춰 변하기도 한다. 아라비아의 ‘발 장식 이야기’에선 마법의 작은 항아리에서 나온 발찌가 주인공과 왕자를 잇는 역할을 한다. 사막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물건이었던 항아리가 조력자인 것이다. 티베트에 전해져 오는 ‘노예의 딸’에는 소가 조력자로 등장한다. 추운 날씨 탓에 농업보다 목축이 번성했던 지역의 이야기답다. 중국의 ‘예셴’에선 주인공이 잃어버린 신발이 매우 작은 게 특징이다. 여자의 발을 인위적으로 작게 하던 풍습인 전족이 녹아 있다. 전 세계에서 신데렐라 서사가 사랑받는 이유를 인류 문화의 보편성으로 해석하는 저자의 시각이 흥미롭다. 어디서든 여성들은 억압받았고,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조력자의 도움이 필요했고, 결혼 제도를 통해 신분 상승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 저자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남성의 도움을 바라는 여성의 전형을 만든다는 비판은 받아들이되 이 이야기를 없애지는 말자고 한다. 비운의 주인공이 시련 끝에 행복을 찾는 이야기에 빠지는 데엔 이유가 있을 테니까. 남성이든 여성이든 우리는 모두 잿더미에 파묻히기보단 호박마차를 타는 삶을 꿈꾸지 않나.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한겨울 네덜란드의 한 농촌 마을. 10세 소녀 야스의 집에 이웃집 아저씨가 찾아온다. 아저씨는 야스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오빠가 죽었다”고 전한다. 동네 호수에서 열린 스케이트 대회에 나간 오빠 맛히스가 호수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물에 빠져 사망했다는 것. 야스의 엄마와 아빠는 “죽었을 리 없다”, “곧 돌아올 거다”라며 현실을 부정한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야스는 그날 입고 있던 빨간 코트를 한여름이 될 때까지 벗지 못한다. 점점 야스 가족의 삶은 파국으로 치닫는데…. 최근 국내에 출간된 장편소설 ‘그날 저녁의 불편함’(비채·사진)의 내용이다. 이 작품을 쓴 네덜란드 작가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31)는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3세 때 12세이던 오빠를 여의고 오랫동안 죽음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며 “소설 내용은 내 경험에서 비롯됐다”고 밝혔다. 이 책은 2020년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이다. 당시 29세였던 그는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역대 최연소 수상자였다. 2016년 한강 작가가 이 상을 받았다. “소설을 완성하는 데 6년이 걸릴 정도로 치열하게 썼어요. 독자가 책을 읽는 동안 애도의 감정이 땀구멍 하나하나에 스미기를 바랐죠. 부커상 수상 소식을 들은 직후엔 욕조 안에 앉아서 ‘이 일은 평생 못 잊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으로 ‘나도 뭔가 해낼 수 있어’라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야스의 부모는 맛히스의 죽음을 신이 내린 형벌이나 저주로 여기고 일상을 완전히 포기한다. 이 과정에서 야스는 방치된다. “이야기를 생생히 겪게 하는 소설”이라는 부커상 심사평처럼 소설은 야스의 처절한 감정을 생생하게 전한다. 한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동 방치 실태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소설 속에서 부모는 죽은 아들에 대한 크나큰 슬픔 때문에 남은 아이를 돌볼 수가 없다”며 “부모가 자기 문제를 견디지 못해서 아이를 돌보지 못하는 일이 현실의 많은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 “부모도 스스로의 슬픔에 빠져 죽어가곤 한다”며 “아이들에 대한 미움이 아닌 부모의 무력함 때문에 벌어지는 방치를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피폐해진 야스는 집에서 기르는 동물들을 괴롭히고, 압정을 몸에 박는 자해를 시도하는 방식으로 슬픔을 푼다. 한편으론 부모가 자신을 안아주기를, 부모에게 기대기를 끊임없이 갈망한다. 벼랑 끝에 선 여느 아이들처럼. 왜 이토록 슬픈 소설을 썼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이들의 애도에 대해 쓰고 싶었습니다. 애도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인데 아이들은 자신이 느끼는 애도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때가 많아요. 때로 폭력적인 행동을 하지만 악의에서 비롯된 건 아니에요. 어떻게 슬픔을 다뤄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뿐이죠. 애도, 고통, 슬픔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줄 누군가가 아이들에겐 필요하죠.”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어린 여자아이가 캐나다의 한 가정으로 입양된다. 아이는 콘도르의 땅이자 옛 잉카 제국인 페루 출신이다. 가족과 고향에 대한 깊은 애정과 정서의 뿌리를 품은 채 어떻게 낯선 땅의 낯선 가정에 새 뿌리를 내릴까. 그 뿌리가 사랑의 위기 앞에서 심각하게 흔들렸을 때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하고 가정을 지킬까. 마침내 자신의 뿌리의 땅에서 다시 새 생명을 입양함으로써 잉카 제국의 전설의 새, 영원히 죽지 않는 자유로운 새 콘도르의 질긴 생명력의 실현을 보여줄 수 있을까. 1991년 등단한 소설가 김외숙이 최근 펴낸 장편소설 ‘엘 콘도르’의 내용이다. 김외숙 소설가만의 긴장과 반전이 연속으로 일어난다. 새로운 로맨스 스토리를 완성해 낸, 사랑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탄생한다. 작가 특유의 사랑에 대한 깊은 서사적 표현은 로맨스 소설을 읽는 맛을 한층 더 깊이 느끼게 한다. “독자의 예측을 예측하는 작가”라는 수식이 걸맞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1994년 겨울 서울 동작구 노량진의 고서점 진호서적. 장서가 윤길수 씨(60)는 서점 주인이 건넨 김소월(1902∼1934)의 시집 ‘진달래꽃’(1925년) 초판본을 본 순간 전율을 느꼈다. 이것은 기존에 알려진 초판본들과는 달랐다. 표지에 꽃 그림이 없었고, 제목 중 ‘꽃’의 초성 글자가 달랐던 것. 장서가로서 탐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중소기업 회사원인 그에게는 목돈이 부족했다.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만기가 다 돼 가는 적금을 깨고 나서야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최근 에세이 ‘운명, 책을 탐하다’(궁리)를 펴낸 그는 24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귀한 책을 구하기 위해서는 안목도 필요하지만 결심과 희생이 뒤따라야 한다”며 “진본이라고 판단되면 외상 거래 없이 값을 깎지 않고 샀다”고 말했다. 그가 소유한 ‘진달래꽃’ 초판본은 2011년 근대문학 작품 중 처음으로 등록문화재에 지정됐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진달래꽃’ 초판본은 총 4권에 불과한데, 같은 연도의 다른 초판본이 2015년 경매시장에서 1억3500만 원에 팔렸다. 그는 138m²짜리 아파트에 산다. 안방을 제외한 방 3개와 거실에까지 책이 가득 들어차 있다. 조선 후기 정치가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년)을 비롯해 소설가 이광수의 근대 최초 장편소설 ‘무정’(1918년), 독립투사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1926년), 서정주의 시집 ‘화사집’(1941년)은 모두 돈을 주고도 사기 힘든 희귀 초판본이다. 반지하방에 전세로 살던 시절에도 책을 사려고 주택청약 통장까지 해지했다. 그는 “단순히 장서의 양만 늘린 게 아니라 질에 초점을 맞춰 체계적으로 책을 모았다”며 “내가 모은 책에 우리 근현대 문학사가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40년 넘게 평범한 회사원으로 근무한 그가 이처럼 책 수집에 빠져든 이유가 궁금했다. “문학과 책에 대한 열정만으로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책을 모았습니다. 수입의 절반 이상을 털어 50년간 2만 권을 샀어요. 돈을 벌려고 모은 게 아닙니다. 여태까지 제가 구입한 책 중 어느 것도 팔지 않았죠.” 현재 국내 근대문학 책들 가운데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건 없다. 수백 년 묵은 고서뿐 아니라 근현대 책들에 대해서도 충분한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견해다. “세계 최초 금속활자를 우리나라가 발명했다는데 정작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1377년)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어요. 원전이 없으면 충분한 조사연구를 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1994년 겨울 서울 동작구 노량진 고서점 진호서적. 장서가 윤길수 씨(60)는 서점 주인이 건네주는 시인 김소월(1902~1934)의 ‘진달래꽃’(1925년) 초판본을 보는 순간 감전된 사람처럼 전율을 느꼈다. 유심히 살펴보니 그간 알려진 진달래꽃 초판본과는 달랐다. 표지에는 꽃 그림이 없었다. 장서가로서 탐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월급쟁이 회사원에게 목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만기가 다 돼 가는 적금을 깨고 나서야 28년 전 시세로 180만 원에 진달래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최근 에세이 ‘운명, 책을 탐하다’(궁리)를 펴낸 윤 씨는 24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귀한 책을 구하기 위해선 안목도 필요하지만 결심과 희생이 뒤따라야 했다”며 “진본이라고 판단되면 외상 거래 없이, 값을 깎지도 않고 책을 샀다”고 했다. 그가 소유한 진달래꽃 초판본은 2011년 근대문학 작품 중 처음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진달래꽃 초판본은 2015년 경매에서 1억3500만 원에 팔렸을 정도로 귀하다. 부자의 독특한 취미일까 싶지만 그는 최근 은퇴하기 전까지 40년 넘게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았다. “문학과 책에 대한 열망만으로 헌책방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책을 모았습니다. 직장인으로서의 수입 절반 이상을 부어 약 50년 간 2만 권의 고서를 구입해왔죠. 하지만 돈을 벌기위해 투자 목적으로 모은 것이 아닙니다. 여태까지 제가 산 책 중 어느 것도 팔지 않았죠.” 그는 서울의 한 아파트에 산다. 거실과 방 4개 곳곳엔 그가 평생을 모은 책이 가득 차 있다. 조선후기 정치가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년), 소설가 이광수의 근대 최초 장편소설 ‘무정’(1918년), 독립투사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1926년), 시인 서정주의 시집 ‘화사집’(1941년)은 모두 돈을 주고도 사기 힘든 초판인 희귀본이다. 그는 반지하방에 전세로 살던 시절에도 고서를 사기 위해 주택청약까지 해지한 적도 있다. 그는 “단순히 장서의 양만 늘린 것이 아니라 질에 초점을 맞춰 체계적으로 책을 모았다”며 “내가 모은 책에 우리 근·현대 문학사가 담겨 있다”고 했다. 현재 근대문학 작품들 중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책은 없다. ‘진달래꽃’은 현재 시중에 10권이 채 남지 않았다. 국가가 고서를 확보하는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관련 연구가 차질을 빚고 초판이 사라질 거라는 게 그의 지적이다. “세계 최초 금속활자를 우리나라가 발명했다고 말하는데 정작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1337년)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있어요. 원전이 없다면 연구는 물론 그 작품을 증명할 방법도 사라지는 겁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소설가 은희경(63)은 최근 12년 동안 미국 뉴욕에 자주 갔다. 이곳에 사는 지인 집에서 주로 생활했는데 길게는 3개월 넘게 머물렀다. 자리를 잡으려고 발버둥치는 외국인, 인종차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뉴요커, 거리를 채운 각국 여행자들…. 그는 그리니치빌리지, 센트럴파크, 이스트강 등 뉴욕 곳곳을 걸으며 다양한 이들을 만났다. 이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됐다. 그가 18일 출간한 연작소설집 ‘장미의 이름은 장미’(문학동네)다. 20일 경기 파주시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만난 그는 “난 뉴욕을 방문하는 여행자이자 짧게나마 살았던 거주자였다”며 “뉴욕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 도시에 대한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신작에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4편의 단편소설이 담겼다. 그가 소설집을 낸 건 2016년 ‘중국식 룰렛’(창비) 이후 6년 만이다. 신작은 2019년 장편소설 ‘빛의 과거’(문학과지성사) 이후 3년 만이다. “뉴욕은 세련된 도시지만 세련된 형태의 편견과 차별이 존재합니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사는 만큼 도시에 뿌리내리고 싶어 하는 이방인의 좌절도 보였죠. 이 도시에서 생겨나는 미묘한 감정을 다루고 싶었습니다.” 표제작 ‘장미의 이름은 장미’는 이혼 후 서울에서 뉴욕으로 단기 어학연수를 떠난 40대 여성 수진의 이야기다. 수진은 어학원에서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수강생들과 교류하며 가까워지다 이내 멀어진다.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자신의 삶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나 내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고 다른 인생을 꿈꾸지 않느냐”며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고 아름답게 포장하는 게 무조건 허세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는 뉴욕에 대한 환상과 실상을 담았다. 한국에서 계약직 회사원으로 일하는 젊은 여성 승아는 휴가를 내고 뉴욕에 사는 친구 민영의 집을 방문한다. 민영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속 휘황찬란한 모습과 달리 승아가 본 그의 집은 좁고 허름하다. “저 역시 하루에 몇 시간 동안 인스타그램에 빠져 있어요. 게시물로 보는 지인들의 삶은 항상 행복해 보이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다 힘든 일을 겪고 있더라고요.” 은희경은 위악적이고 냉소적인 작품세계로 유명하다. 장편소설 ‘새의 선물’(1995년),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998년), ‘태연한 인생’(2012년)에서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의 모순을 예리하게 파고들던 그의 시선이 신작에서는 조금 둥그스름해진 것 같다. ‘양과 시계가 없는 궁전’은 한국에서 도망쳐 뉴욕으로 온 작가 지망생의 내면을 차분히 전한다. ‘아가씨 유정도 하지’에서는 주인공이 뉴욕에 함께 온 어머니의 마음을 알기 위해 노력한다. 그럼에도 은희경은 소설을 마냥 따뜻하게 끝내지는 않는다. 서로를 오해하던 인물들이 이해의 단초를 찾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왜 해피엔딩을 보여주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조심스레 답했다. “우리는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어요. ‘나와 너는 다르다’, ‘내가 네 마음을 몰랐다’는 마음을 지니고 서로 곁에만 있어줘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제가 추구하는 휴머니즘 소설이에요.”파주=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소설가 은희경(63)은 최근 12년 동안 미국 뉴욕에 자주 갔다. 뉴욕에 살고 있는 가까운 지인 K의 집에 머물기 위해서다. K의 집에 3개월 이상 장기 체류하기도 한 적도 많다. 그리니치빌리지, 센트럴파크, 이스트강, 뉴욕에 자리 잡으려 발버둥치는 외국인, 인종 차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뉴요커, 뉴욕의 거리를 채운 각국의 여행자…. 그는 뉴욕의 곳곳을 걷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이 모든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됐다. 18일 출간된 연작소설집 ‘장미의 이름은 장미’(문학동네)이다. 20일 경기 파주시 문학동네 사옥에서 만난 그는 “난 뉴욕을 방문하는 여행자이자 짧게나마 살았던 거주자였다”며 “뉴욕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 도시에 대한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새 소설집엔 뉴욕을 배경으로 한 4편의 단편소설이 담겼다. 그가 소설집을 낸 건 2016년 ‘중국식 룰렛’(창비) 이후 6년 만, 신작은 2019년 장편소설 ‘빛의 과거’(문학과지성사) 이후 3년 만이다. “뉴욕은 세련된 도시지만 세련된 형태의 편견과 차별이 존재합니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사는 만큼 도시에 뿌리내리고 싶어 하는 이방인의 좌절도 보였죠. 이런 도시에서 생겨나는 미묘한 감정들을 다루고 싶었습니다.” 표제작 ‘장미의 이름은 장미’는 이혼 후 한국 서울에서 뉴욕으로 단기 어학연수를 온 40대 여성 수진의 이야기다. 수진은 어학원에서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수강생들과 교류하며 가까워지다가 이내 멀어진다. 수강생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자신의 삶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나 내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고 다른 인생을 꿈꾸지 않냐”며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고 아름답게 포장하는 게 무조건 허세라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는 뉴욕에 대한 환상과 실상을 담았다. 한국에서 계약직 회사원인 젊은 여성 승아는 휴가를 내고 뉴욕에 사는 친구 민영의 집에 방문한다. 민영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속 휘황찬란한 뉴욕의 모습과 달리 승아가 직접 본 민영의 집은 좁고 허름하다. “저 역시 하루에 몇 시간 동안 인스타그램에 빠져있어요. 게시물로 보는 지인들의 삶은 항상 행복해보이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다 힘든 일을 겪고 있더라고요.” 은희경은 위악적이고 냉소적인 작품세계로 유명하다. 장편소설 ‘새의 선물’(1995)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998) ‘태연한 인생’(2012)에서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의 모순을 예리하게 파고들던 그의 시선이 이번 소설집에선 조금은 둥그스름해진 것 같다. ‘양과 시계가 없는 궁전’은 한국에서 도망쳐 뉴욕으로 온 작가 지망생의 내면을 차분히 전한다. ‘아가씨 유정도 하지’에선 주인공이 함께 뉴욕을 찾은 어머니의 마음을 알기 위해 노력한다. 그럼에도 은희경은 소설을 마냥 따뜻하게 끝내지 않는다. 서로를 오해하던 등장인물들이 이해의 단초를 찾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왜 독자에게 해피엔딩을 보여주지 않냐고 묻자 그는 조심스레 답했다. “우린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어요. ‘나와 너는 다르다’, ‘내가 네 마음을 몰랐다’는 마음을 지니고 서로 곁에만 있어줘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제가 추구하는 휴머니즘 소설이에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나는 처음 그들의 노래 역시 휘황찬란 빛나기만 할 줄 알았어. 그런데 정작 가사 내용은 안 그런 거야. 오늘날 ‘미생’이니 ‘취준생’이니 해서 고통스러워하는 보통 젊은이들의 심정과 형편과 꿈을 그대로 담고 있는 거야….” 시인 나태주는 방탄소년단(BTS) 노랫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BTS의 음악이 세계적으로 공감을 얻은 건 청춘들의 간절한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는 이들의 노래를 통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 젊은이들의 생각과 꿈을 이해할 수 있게 돼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우리에게 위기를 체험하게 하고 그 위기로부터 탈출하고 해방되는 기쁨을 함께 선사한다”고 했다. 이 책은 BTS 노래 가사에 나태주의 산문을 더한 에세이다. 나태주는 자신이 감명을 받은 35편의 BTS 노랫말을 읽어 내려간다. 가사 안에 살아 숨쉬는 메시지를 찾고 이에 대해 느낀 바를 솔직히 털어놓는다. 누군가는 이 책을 BTS의 인기에 영합하려는 시도라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인으로서 모든 것을 이룬 그가 굳이 BTS를 좋아하는 척할 필요가 있을까. 나태주는 자신의 시처럼 BTS의 노랫말에 담긴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자세히 보아야/예쁘다/오래 보아야/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나태주 시 ‘풀꽃’ 중) “나는/저 하늘을 높이 날고 있어/이젠 여긴 너무 높아/난 내 눈에 널 맞추고 싶어.”(BTS 곡 ‘작은 것들을 위한 시’ 중) 나태주는 이들의 음악을 들을 때 자신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소년이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사랑에 빠진 소년의 고백이 담긴 가사를 읽다 보면 하늘에 붕 뜨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담아 표현하는 이 음악이 시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나태주는 “하늘 아래 내가 받은/가장 커다란 선물은/오늘입니다”(BTS 곡 ‘선물’ 중)를 듣고선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는 나 자신을 용서하자 버리기엔/우리 인생은 길어 미로 속에선 날 믿어/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은 오는 거야”(BTS 곡 ‘Answer: Love Myself’ 중)의 주제의식은 자신의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했다. BTS의 가사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강조한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책을 읽으며 어느새 ‘요즘 시’가 청춘에게서 멀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청춘들은 시는 읽지 않는데 BTS 노래에는 열광할까. 어쩌면 우리에게 사소한 것의 소중함을 일러준 나태주의 시와 달리 요즘 시는 거대 담론이나 문학적 실험에 치중했기 때문이 아닐까. 내게는 시보다 BTS의 가사가 더 시처럼 느껴진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2020년 12월 그림책 작가 백희나(51)는 폭설이 내리는 강원 정선군 가리왕산으로 들어갔다. 누더기처럼 해진 노란 저고리와 빨간 치마를 입은 닥종이 인형 연이를 손에 든 채였다. 그는 수북이 쌓인 눈밭 속에서 연이를 촬영할 장소를 찾기 위해 정처 없이 걸었다.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순간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눈길을 헤매는 내 모습이 연이와 다를 바 없다’고. 최근 그림책 ‘연이와 버들 도령’(책읽는곰)을 펴낸 그를 서울 용산구 작업실에서 만난 19일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그는 작업실 창문 밖으로 쌓여가는 눈을 가리키며 “연이 이야기를 하는 날 눈이 내린다”며 해맑게 웃었다. 그런데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그의 낯빛이 홀연 어두워졌다. “지금은 웃고 있지만 제게 표정이 사라졌던 시절이 있었어요. 힘든 시절엔 우울증에 걸려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고 풍 때문에 병원을 드나들었죠. 스트레스로 갑자기 구토가 밀려와 뛰쳐나갈 정도였고요.” 이런 증세는 2020년 6월 일명 ‘구름빵 사건’으로 대법원 판결을 받은 직후 시작됐다. 2004년 발간한 베스트셀러 그림책 ‘구름빵’(한솔교육)은 큰 인기를 끌며 뮤지컬, 문구, 장난감 등 다양한 2차 저작물을 낳았다. 하지만 작가가 실제로 손에 쥔 돈은 계약금을 포함해 200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출판계 관행에 따라 2차 저작물 권리를 출판사에 양도하는 내용의 계약을 맺었기 때문. 출판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결국 대법원에서 패소가 확정됐다. 그는 “소송에서 질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확인 사살을 당한 느낌이었다”며 “작가의 권리에 대한 나쁜 선례를 남긴 것 같아 후배 작가들에게 아직도 미안하다”고 했다. 그에게 표정이 사라진 건 이때부터였다. 2020년 4월 세계적인 아동문학상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을 받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쉽게 추슬러지지 않았다.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감정을 꼭꼭 숨겼다. 신작에서 연이가 ‘나이 든 여인’으로부터 구박을 받으며 고통을 겪어도 무표정으로 일관하듯이. 다행히 옛이야기를 토대로 작품을 쓰고 싶다는 오랜 소망을 신작으로 구현하면서 조금씩 예전의 삶을 회복할 수 있었다. 구름빵을 비롯해 ‘알사탕’, ‘장수탕 선녀님’, ‘이상한 손님’ 등 작은 종이인형들을 손으로 만든 후 자연이나 세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특유의 작업 방식은 신작에서도 여전히 빛난다. 작가는 옛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가족 제도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없애기 위해 민담에서 한집에 살면서 연이에게 궂은일을 시키는 계모를 ‘나이 든 여인’으로만 설정했다. 남녀에 대한 기존 성 역할에서 벗어나 연이와 버들도령의 얼굴을 비슷하게 그렸다. 그는 “버들 도령과 연이가 같은 자아를 지녔다고 봐도 되고 그렇지 않다고 봐도 좋다”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독자에게 열어두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연이가 결국 무릉도원에 머무는 버들 도령과 만나 행복을 추구하듯 그의 작가 인생에도 다시 봄날이 올까. “작가 인생 초반부는 지독히 힘든 비극이었어요. 하지만 신작을 계기로 재기가 시작되는 것 같아요. 버들 도령과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연이처럼 이제는 힘들고 억울한 일은 다 잊고 행복하게 작업하고 싶어요. 연이의 인생도, 제 작가 인생도 해피엔딩을 꿈꿉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