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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현상’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정권 탈환은 커녕 절멸의 위기감에 시달렸던 야권이 재·보선에서 압승하고, 정권교체 가능성을 시사하는 여론조사들이 나오는 현 상황의 밑바탕에는 윤석열의 등장이 있다. 아무리 문재인 정부의 실정(失政)이 극에 달해도 야권에 이렇다할 대선후보감이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면 판세는 달랐을 것이다. 윤석열 현상을 만들어낸 일등공신은 문 대통령이다. 2019년 9월 27일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처음 입을 연 문 대통령이 “검찰개혁”이 아니라 “조 후보자가 그런 삶을 살아왔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며 후보 지명을 철회했다면, ‘윤석열 죽이기’와 ‘윤의 거인화’는 없었을 것이다. 윤석열의 정치적 성장이 스스로 강단 있게 소신과 원칙을 지킨 결과물이라는 점과 별개로, 밟을수록 커지는 ‘헤라클레스의 사과’(이솝우화)를 1년 넘게 짓밟은 어리석음은 오롯이 문 대통령의 몫이다. 조국 사태 내내 이런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왜 조국을 끝까지 끌어안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걸까….’ 10일 취임 4주년 회견은 조국 문제 대응 방식을 낳은 문재인식 사고방식의 본질을 조금은 더 파악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한 기자가 “대통령이 현 정권에 관련된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월성 원전 사건 등에 성역 없이 살아 있는 권력이라도 봐주지 말고 철저하게 수사하라고 김오수 후보자에게 공개적으로 지시할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냥 “분명히 해둡니다. 검찰은 눈치 보지 말고 철저히 수사하십시오”라고 답하면 됐을 터였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이제 검찰은 별로 청와대 권력을 겁내지 않는 것 같다”고 에둘러 갔다. 검찰 제어의 문에 미리 자물쇠를 채우는 것은 피하려는 자기보호 본능의 발호였을까. 설령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지라도 민주주의 견제원리·검찰독립의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는 그런 철학·신념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청와대 관련 수사팀을 공중분해시키는 인사조치가 왜 끊이지 않았는지 곱씹게 되는 장면이었다. 대통령은 회견에서 남북관계를 포함한 외교안보 문제에는 2분만 할애했는데 그중 말미 15초를 대북전단에 대한 강력한 대응 경고로 채웠다. 그 정책의 옳고 그름을 떠나 대통령이 직접 온 국민 상대 회견에서 경고해야 할 사안이었나. 무언가에 집착이 너무 커서 사안의 경중·대소를 구분하는 판단력이 흐려진 게 아닌지 우려되는 대목이다. 친문 댓글 답변을 비롯해 대통령의 발언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지지세력 의존 정치를 고수하겠다는 것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정마을 해군기지, 한미 FTA, 이라크 파병 등을 감행한 결과 퇴임 후 극심한 고립에 처했던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그런 문 대통령의 한계를 확인한 야당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멀리 보면 야당에 유리한 일만은 아닐 수 있다. 최근 친문 핵심들 사이에선 자포자기론이 있었다고 한다. ‘윤석열과 맞붙으면 누굴 내세워도 안 되는 걸로 나온다, 그러니 국회 권력이라도 확실히 쥐자’는 생각에서 원내대표 선거 때 외연확장 대신 친문 후보에 표를 몰아줬다는 것이다. 당 대표 선거에서도 그러려고 했는데 0.59% 차이로 친문 후보가 졌다. 작은 반란이다. 여권의 ‘자가 치유력’의 발현인 것이다. 물론 송영길 김부겸 등이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확실히 할 만큼 과단성 있는 그릇인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앞으로 누가 여당 대선 후보가 되든 대통령과 차별화하며 중도층 영합 행보를 본격화할 것이라는 점이다. 반면 야당은 여전히 제자리를 돈다. ‘영남당 이미지’를 벗어야 한다고 하니 바로 ‘영남홀대론’이 나온다. 영남홀대론이야말로 민심의 수준을 모독하는 주장이다. 호남이든 영남이든 유권자들은 자신의 지지정당이 지역정당의 한계를 벗어나기를 바란다. 자기편이 당권이나 주요 당직을 차지하길 바라는 게 아니라, 정권을 잡아주길 바라는 것이다. 만약 국민의힘이 환골탈태 못한 채 과거 인물들이 무대에 오르내리고 막말 올드보이들이 마이크를 다시 켜면, 윤석열의 합류를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권 전략가들이 내심 가장 노리고 있을 ‘천하 3분지계(計)’다. 대통령 지지율이 지리멸렬하면 할수록 국민의힘 내에선 ‘민주당-윤석열-정통 보수’의 3자 구도로도 승산이 있다는 몽상에 빠지는 이들이 생겨날 것이다. 문 정권의 ‘민주주의 원칙·가치에 대한 철학 결핍+사안의 경중·우선순위 판단 미비+지지세력 집착’ 성향은 조국사태 같은 악수(惡手)를 낳았고 그 결과 윤석열 현상이 창출됐다. 하지만 좌파의 자기변신 능력은 무한대다. 미제축출을 외치던 민족해방(NL)계열 주사파 지도부는 1987년 초 개량노선이라고 비난했던 직선제 개헌투쟁으로 순식간에 노선을 바꿨다. 목적 달성을 위한 놀라운 유연성이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 중진들이 영남홀대론을 들먹이며 기득권에 연연하고, 보수의 몰락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다시 등장한다면 그것은 정권교체를 열망하며 전략적 투표 각오를 다지고 있는 야권 민심을 배반하는 행위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수년 전 영화 겨울왕국을 보고 장차 북유럽 여행을 꿈꿨다. 당시 지도에서 봤던 스웨덴 북부 도시 중 하나가 셸레프테오(Skellefteå)였는데 요즘 외신에서 자주 보게 된다. 아(亞)북극성 기후로 겨울이 길고 혹독한 인구 3만여 명의 이 도시에 연내에 유럽 최대 규모의 배터리 공장이 준공된다고 한다. 공장을 짓는 노스볼트는 전직 테슬라 간부가 2015년 설립한 신생사다. 2019년 유럽개발은행 3억5000만 유로를 비롯해 총 30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했다. 스웨덴을 시작으로 독일과 헝가리에도 배터리 공장을 짓는다. 노스볼트의 급팽창은 전기차 시대 주도권을 미국과 아시아에 뺏기지 않겠다는 유럽 차원 절박감의 산물이다. 장차 EU에서 높은 기준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요구될 텐데 수력이 풍부한 스웨덴에서 친환경 제조공정으로 배터리를 양산해내 블록화하면 한국의 배터리 산업에 막강한 경쟁상대가 될 수 있다. 미국도 GM이 수명을 10배 높인 ‘100만 마일’ 배터리 개발을 코앞에 두고 있고, 영국은 첫 기가팩토리를 구축했다. 반도체, 전기차배터리 같은 미래 산업은 기술·노하우 집약 산업이어서 여럿이 공생하기 힘들다. 각국이 비슷한 출발선에서 스타트하는데 아차 한발 뒤지면 수십 년 먹거리를 뺏기게 된다. 일본도 배터리 관련 55개 기업이 공동 작업에 나서는 등 제조업 초강국 위상 회복을 노리고 있다. 스가 정부는 아예 ‘대만 인계철선’까지 받아들이는 등 미국이라는 큰 우산을 받겠다는 전략을 노골화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미국의 밸류체인에서 한국을 밀어내려는 경쟁 전략도 엿보인다. 이처럼 지구촌은 미중 간에, 그리고 블록 간에 미래 먹거리 선점을 위한 포연이 가득한데 한국의 집권세력은 전혀 다른 시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하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연신 친중, 반미성 메시지를 발신한다. 문 대통령은 26일 “(코로나 백신 개발국들이) 자국 우선주의와 사재기, 수출 통제 등으로 각자도생에 나서고 있다”고 비판했다.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자기 식구끼리만 앉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미국 등 우방국을 비난해서 얻을 이익이 무엇일까. 만약 냉전시대 비동맹회의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면 제3세계에서 영향력이라도 확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미국 등 백신 개발국들에 쓴소리를 하고 싶었다면 뉴욕타임스 회견 같은 자리에서 정색하고 발언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행동은 △골방에 모여 힘센 자를 비난하며 자족감을 느끼는 운동권 문화의 잔재며 △열성 지지층을 향한 프로파간다 목적이며 △백신 정책 실패를 선진국 탓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 문 대통령은 20일 보아오포럼 연설에선 “개발도상국에 백신 기부와 같은 다양한 코로나 지원 활동을 펴는 중국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중국에 대한 찬사는 개인의 세계관이든, 북한을 염두에 둔 민원성 아부든 대통령의 선택이다. 하지만 뜬금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실익도 없는 3무(無) 발언이 엄중한 미중 패권 경쟁 시대에 남발되는 건 문제다. 미중 양자택일 상황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미국이 승자일 수 밖에 없을 이 전쟁에서 미국 중심 가치동맹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밑돌을 까는 노력은 필요하다. 일각에선 중국의 보복을 우려하지만 우리의 대중 수출은 주종이 반도체다. 핵심 기술이 없는 중국이 우리에게 아쉬워해야 하는 입장이다. 미중 갈등이 우리의 대중 수출에 미칠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중국에 잘 보여야 하는 게 아니라 미국을 설득하고 신뢰를 얻어야 하는 상황이다. 문 대통령이 보아오포럼 연설에서 ‘포용적 다자질서’의 회복을 강조한 것도 국제무역사를 오독한 결과물이다. 지난 수십년간의 다자주의 자유무역질서는 미국이 주로 공급하는 글로벌 공공재를 기반으로 중국 등이 수혜를 받으면서 발전한 구도였다. 그런데 세력을 확장한 중국이 그 기본질서의 혜택은 그대로 누리면서 질서를 어지럽히니까, 미국이 이를 다시 짜겠다고 나선 게 지금의 무역질서 재편 국면이다. 실제로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 수출지원금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다자주의 이상(理想)에 배치되는 행태를 보여왔다.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포용적 다자주의 이상론을 편 것은 다시 중국이 서방을 흡혈하는 구조로의 회귀를 원한다는 뜻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1970년대에 고속도로와 철도 항만 발전소로 뒷받침해줬듯이 기업이 무역전쟁에 나설 때 국가는 인프라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4차 산업혁명기의 인프라는 동맹 강화 등 방향을 올바로 설정하고 규제 완화와 제도적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지휘부가 자해성 메시지를 남발하고 가리키는 방향은 역주행이다. 위정자라면 아무리 실정 면피가 시급하다 해도 대외 관계에 손상을 가져올 발언을 삼가야 한다. 대외 관계 손상은 국민에게 피부로 느껴지지 않을 테니, 지지층 환심 사기가 먼저라고 생각한다면 전시(戰時) 총사령관으로서의 자격 미달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10개월 21일 남은 내년 대선에서 이기려면 어떤 코스를 택해야 할까. 답은 명료하다. 여당은 지난 1년간의 궤도대로 직진하면 망하고, 야당은 1년 전으로 유턴하면 망한다. 그런데 집권세력은 직진 태세다. 초선들의 반성 움직임은 친문강경파의 벽을 넘지 못했다. 대통령부터 변할 기미가 없다. 정무수석에 다소 온건파를 앉힌다 해서 바뀌는 게 아님을 모른다. 문재인 대통령은 ‘청년’을 강조하지만 청년들을 좌절시키고 등을 돌리게 만든 원인은 외면한다. 조국류의 위선·특권의 집합체인 인사들을 비호한 것이 청년들이 중시하는 공정의 가치를 짓밟았음을, 귀족노조 편들기와 기업 옥죄기가 청년 일자리 창출을 막았음을, 집값을 폭등시켜 청년을 ‘벼락거지’ 신세로 만든 장본인이 이념에 매몰돼 규제 일변도 정책을 고집한 자신들임을 외면한다. 왜 낙제했는지에 눈감으니 진단도 처방도 없다. 대선으로 가는 길 곳곳에 묻힌 급락의 지뢰밭에 더 취약한 쪽은 국민의힘이다. 조금이라도 과거로 유턴하면 몰락이 명약관화한데도 ‘찍기 창피한 정당’ 시절로의 회귀 조짐이 보인다. 다른 학생이 답안을 밀려 쓴 덕에 석차가 올라간 건데 반장 감투만 눈에 들어온다. 입만 열면 “우리가 잘해서 이긴 게 아니다”라고 하는데, 설령 진심이라고 해도 그 말 자체가 부정확한 표현이다. “우리가 망쳤는데도 운이 좋아 이겼다”가 정확하다. 사무처 직원의 정강이를 걷어찬 송언석 사건이 하루 전에만 터졌다면 수십만 표가 빠졌을 것이다. 지인, 동창들에게 물어봤다. 수십 년 직장 생활 동안 부하 직원의 정강이를 차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 다들 고개를 흔들었다. 수십 년 전 언론사에도 도제식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욕설이나 뺨 때리기 같은 작태가 있었지만, 그 시절에도 실제로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천 명 중 한 명꼴에 불과했다. 구시대 조직문화 속에서도 가장 저급한 방식으로 입신양명한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음이 드러났는데, 더 한심스러운 건 당 지도부의 대응이다. 당연히 사건 발생 직후 제명론이 나왔어야 하는데, 원내대표는 닷새나 지나서야 하나 마나 한 코멘트를 내놓았다. 이런 감과 판단력으로 어떻게 당 이미지 환골탈태라는 고난도의 작업을 지휘하겠는가. 오세훈 진영의 내곡동 문제 대처도 구시대적이었다. 억지스러운 네거티브 공세에 불과했을 이 문제는 오 후보의 ‘투명하지 않은 대응’으로 인해 정치인의 정직성이라는 중요한 문제로 바뀌었다. “존재도 몰랐다” 식의 무조건 부인하기, “기억 앞에 겸손” 식의 모호한 화법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낡은 발상이었다. 과거엔 그런 게 통했을지 몰라도, 요즘 젊은 유권자들은 다 기억하고 다음 선택에서 참작한다. 측량현장 논란은 끝까지 사실관계를 가려 만약 오 시장이 거짓말을 했다면 응분의 책임을 지고,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생태탕집 주인의 사과회견 수준까지 명확하게 결론 내야 한다. 차기 대선에서 누가 야권 후보로 나서든 집권세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네거티브 폭로전을 전개할 것이다. 그중 하나라도 오세훈 식으로 대응하면, 순식간에 곤두박질칠 수 있는 ‘민감한’ 시대다. 야권 성향 국민들의 정권교체 열망은 식민치하 독립 열망을 연상케 할 만큼 간절하다. 그런데 이른바 민족 대표들은 그 열망을 담아낼 그릇을 빚기는커녕, 자기 숟가락 들이미는 데만 골몰한다. 나라(黨)를 말아먹던 구태를 못 버린 것이다.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해 보려고 욕심내는 올드보이들은 이해찬의 행보가 민주당의 확장성에 끼치는 부정적 효과에 자신을 대입시켜 봐야 한다. 만약 홍준표가 복당하고 황교안 김무성류의 인물들이 다시 뉴스를 타면, 애써 넓혀온 외연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번 보선에서 정말 놀라운 대목은 문재인 정권의 그 숱한 실정(失政)에도 박영선 후보가 39.1%나 득표했다는 사실이다. 민주당은 혼내주고 싶지만 국민의힘은 도저히 찍고 싶지 않은 ‘잠재적 진보 지지층’이 대거 투표를 포기했는데도 이 정도를 얻었다. 절벽 끝에서 정신이 버쩍 들면 집권세력은 ‘집 나간 토끼’들을 잡기 위해 도마뱀보다 기민하게 자기 꼬리를 자르고, 자벌레처럼 신중하게 효과를 계산하며 편 가르기를 할 것이다. 집권세력이 친문의 족쇄에 갇힌 지금이 야당에는 천운의 기회다. 오 시장부터 철저히 몸을 낮춰야 한다. 야당 내 논쟁과 이견은 당권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와 정책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국제질서의 펀더멘털이 완전히 바뀌는 구조 전환의 시기에 대한민국이 어떤 좌표를 지향해야 하는지를 놓고 중진 초선을 아울러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면 아무도 집안싸움이라고 손가락질하지 않을 것이다. 야당의 거듭남은 줄탁동시(啐啄同時·병아리가 스스로 알을 깨기 위해 부리로 알을 쪼면 어미닭이 동시에 밖에서 알을 쪼아 도와주는 것)의 과정이어야 한다. 당권을 쥐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야당으로의 변신을 돕는 게 중진들의 소명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2000년대 초 출근길 버스에서 항상 이어폰을 꽂고 EBS FM 라디오를 들었다. ‘모닝스페셜’이란 프로그램이었는데 팝송 영화 등 다양한 소재로 영어회화를 배울 수 있었다. 신도시에서 광화문까지 언제 왔는지 모를 정도로 재미있고 유익했다. 알고 보니 주변에 애청자가 수두룩한 인기 프로였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초 갑자기 ‘진보 언론인’ 손석춘 씨가 국제뉴스를 해설해주는 시사프로가 신설돼 그 시간대를 차지해버렸다. ‘황금시간대 전파를 왜 영어에 낭비하냐, 국민이 진보적 시각으로 세계를 볼 수 있게 교육시켜 줘야지’…우중(愚衆)을 깨우쳐야 한다는 좌파권력의 강박관념이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그래도 양반이었다. 문재인 정권처럼 대놓고 지상파를 프로파간다 도구로 이용하는 정권은 없었다. 진영 내에서도 가장 극단에 서 있는 자칭 논객, 개그맨 등에게 아예 황금시간대 프로그램을 주는 것은 전두환 독재도 엄두를 못 냈던 일이다. 5공 정권은 땡전뉴스 비판이 제기되면 곤혹스러워하는 척이라도 했다. 그런데 친문은 TBS의 김어준 프로그램을 폐지하거나, 교통정보에 충실하라는 요구에 대해 “방송독립 침해”라고 되레 호통을 친다. 김어준류의 인사들이 공영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사실 자체가 권력이 방송을 장악하고 있음을, 방송독립이 제로임을 증명하는 지표다. 공영방송은 물론 공기업이 대주주인 언론사마저 정권이 바뀌면 ‘투쟁 경력자’들이 요직을 꿰차고, 친정권 연예인들이 활개 치는 현상은 방송·통신이 정권에서 독립돼 있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보수진영이 선거에서 이긴 뒤 민경욱, 전광훈 또는 유튜브의 태극기 논객들에게 황금시간대 프로그램을 맡기고 정부와 공공기관 광고를 몰아줘도 친문들은 지금처럼 감싸줄 것인가. 적색신호를 청색이라 우기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꿔버리는 본말전도는 집권세력의 필살기다. 권력자가 화두를 던지면 ‘좌파 괴벨스들’이 진실을 뒤집는 프레임을 확산시킨다. 방송장악을 방송독립으로, 검찰장악을 검찰개혁으로, 성추행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킨다. 그런데 그 필살기의 약발이 떨어지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부동산 적폐 프레임을 내걸었지만 여론이 미동도 않자 당정청이 연일 반성문을 읽는다. ‘검수완박’은 쑥 들어가고, 김상조도 바로 자른다. 선거를 앞둔 ‘연극성 고개 숙이기’지만 프레임 전술만으로는 상황을 조작하기 힘들어진 환경의 산물이기도 하다. 문 정권의 통치전략은 △내정은 갈라치기와 프레임 짜기 △외치(外治)는 남북이벤트와 친중으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드라마 ‘조선구마사’ 파동이 보여주듯 우리사회는 문 정권 출범 초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반중정서가 팽배해졌다. 시진핑 정권의 동북공정 같은 패권주의 행보가 누적된 결과물이다. 문 정권도 더 이상 친중 행보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오매불망 남북이벤트도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운신할 공간이 거의 없다. 반일 프레임도 미국이 워낙 한미일 협력을 중시해 죽창가를 꺼내기에 제약을 받고 있다. 내치는 4년간 쌓은 신(新)적폐의 산에, 외치는 미국 정권 교체와 미중 갈등 벽에 막혀 옴짝달싹하기 어려워 진 것이다. 민심의 저수지는 고갈돼 학철부어(涸轍鮒魚·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놓인 붕어)의 신세다. 친문 정권의 회생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합리적 진보로의 변신이다. 예를 들어 금태섭을 받아들이고 조국 추미애 윤미향처럼 진보가치를 욕보인 인물들과 손절하는 것이다. 하지만 집권세력은 그 반대방향으로 달려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강경파들이 더 높은 죽의장막을 칠 것이다. 제3자에겐 뻔히 보이는 해결책을 외면하는 것은 가치가 아니라 인물메커니즘으로 움직이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친문 재집권을 가능케 할 두 번째 길은 야권의 자멸이다. 윤석열 효과 등으로 정권교체 가능성을 바라보고 있지만, 야당이 자만해 구태가 조금이라도 재연되면 친문에게 대선을 상납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부동산 분노가 대선에 미칠 영향을 너무 단순하게 예측해선 안 된다. 국민들의 분노는 △집값 폭등에 대한 절망감과 △정권 내부의 투기·위선에 대한 분노로 구분된다. 그런데 후자는 시간이 흐르면 수그러들 수 있다. 정권의 위선과 부패에 대한 호된 채찍질의 파도가 지나가면, 결국 남는 문제는 집값 폭등의 책임 소재와 해결방안이다. 문 정권은 집값 폭등 책임을 만성적 투기, 전 정권, 세계적 통화량 증가 등으로 돌리는 논리를 끊임없이 확산시킬 것이다. 정책실패 때문이라는 인식이 굳어지면 영영 만회하기 힘들지만 외부 요인 탓으로 돌리면 뒤집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대선을 앞두고 유주택자와 무주택자, 비싼 집과 덜 비싼 집 사이의 대립을 극대화시킬 방책을 쏟아낼 것이다. 가진 자를 징벌하고, 덜 가진 자에게 주거복지 물량공세를 쏟아붓는 쪽이 유리해질 것이라는 계산을 할 것이다. 문 대통령이 집값폭등과 LH사태를 계속 보편적 투기 문제로 희석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야당이 부동산 실정(失政)의 반사이익으로 대선을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야당이 지금의 우세가 결코 자신들이 잘해서가 아님을 잠시라도 잊고 분열하거나 기득권 구태 DNA가 재발하는 것, 그것이 친문 재집권을 가능케 할 첩경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이 LH사태에 대해 ‘부동산 적폐’ 프레임을 들고나온 날 ‘우공지곡’이란 고사성어가 생각났지만 칼럼에 인용할지를 놓고 한참 망설였다. 제나라 환공이 사냥을 하다가 산골짜기에 들어갔다. 한 노인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우공지곡(愚公之谷)이라고 한다. 어리석은 사람의 골짜기란 뜻이다. 그 노인이 자신의 암소가 낳은 송아지를 팔아 망아지를 샀는데 청년들이 “소는 망아지를 낳을 수 없으니 훔친 것이 분명하다”며 뺏어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노인이 멍청하다며 우공이라 불렀다. 환공이 궁에 돌아와 신하들에게 우스운 이야기라며 그 일을 전하니 재상 관중(管仲)이 무릎을 꿇고 통렬히 사죄했다. “나라에 법률과 제도가 엄격히 살아 있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국정 책임자인 자신의 과오라고 사죄한 것이다. 옛 현인(賢人)이나 성군(聖君)의 고사를 살펴보는 것은 현 위정자의 선택이나 결정을 놓고 과연 더 올바른 길은 없었는지, 어떤 것이 더 이치와 상식에 맞는지 가늠자를 제시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자기 정권에서 벌어진 공직부패마저 적폐 탓으로 돌리는 행태는 옳고 그름이나 이치를 논할 수준 자체가 안 된다. 그래서 고사 인용이 망설여졌던 것이다. 집권세력의 논리대로라면 대한민국 건국 이래 그 어떤 부정부패, 어떤 대형 참사라고 적폐(오랫동안 쌓여온 폐단)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그런 논리면 장관들이 무더기로 뇌물을 받아도 ‘국민학교’ 시대 도덕·윤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옛 정권 탓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추미애, 조국 등은 한술 더 떠 LH사태가 윤석열과 검찰 책임이라고 한다. 전염병이 번지니 병원장과 의사들 탓을 하는 격이다. LH사태는 국책사업 시행 주체들이 정책정보를 이용해 사익을 챙긴 공직부패 문제인데 이를 어느 시절에나 만연한 일반 부동산 투기 문제로 전환시켜 버렸다. 행정부 잘못을 사회 전체와 과거 세대까지 포함한 모두의 책임문제로 돌리고, 자신들은 ‘유책자(有責者)’에서 ‘조사관’ ‘척결자’로 슬그머니 역할을 변신한다. 물론 억지임을 스스로 알 것이다. 문 대통령이 적폐 선언 다음 날 뒤늦게 사과문을 읽은 것도 아무래도 논리가 궁색하다는 진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프레임 조작은 멈추지 않는다. 외부에 공적(公敵)을 만들어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정신승리용’ 논리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상식과 이치에 벗어나고 민망한 일이어도 이기는 게 정의라는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대선이 다가올수록 헌정사에서 경험해본 적 없는 편 가르기와 포퓰리즘 정책을 총동원할 것이다. 하지만 갈수록 스텝이 꼬일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LH사태에서 벗어나려면 대대적인 수사 의지를 과시해야 하는데, 사냥개(검찰)는 이미 삶아 먹겠다며 털을 다 뽑아 버렸다. 검수완박의 자승자박이다. 뱉어놓은 말과 현실의 괴리는 갈수록 커진다. 미중 균형자 역할을 외쳐왔지만, 현실은 미국의 대중 압박 전선 참여 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문 정권도 안다. 그러다 보니 한미 회담이 끝나면 양측 발표에 차이가 나는 현상이 심해진다. 점점 더 다양한 분야에서 괴리 현상이 심해질 것이다. 보수 유권자들에게서도 유의미한 변화가 읽힌다. 최근 만난 지인들은 강경 보수성향들인데 한결같이 앞으로 선거에선 중도성향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작년 이맘때는 그런 정치인 이름만 나와도 고개를 돌렸던 이들이다. 이번 보선에서 만약 국민의힘 후보로 단일화돼 이기면 보수의 힘만으로도 된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걱정들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내 생각과 일치하는 후보보다 상대의 재집권을 막는 데 필요한 후보를 앞세우는 전략적 선택의 보편화는, 공동체 위기의식이 반드시 정권을 바꿔야 한다는 절박한 권력의지로 점화되는 티핑 포인트를 넘어섰음을 시사한다. 그동안은 그런 보수층의 염원을 담아낼 그릇이 부재했는데 윤석열이라는 가능성이 나타났다. 하지만 법치, 공정, 권력비리 척결 등의 가치가 내년 대선에서도 시대정신의 핵심이 될지는 미지수다. 추미애 조국 같은 분노유발재(材)들이 계속 설쳐주지 않으면 그저 안티테제로 축소될 수도 있다. 상대는 레닌과 마오쩌둥에 심취했던 ‘평생 직업이 전술과 선거’인 사람들이다. 문 정권의 리더십은 좀스러움을 넘어서는 후안무치와 이중잣대, 분열통치 같은 특징을 드러냈다. 반면교사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반(反)문재인 만으로는 부족하다. 윤석열의 성패는 반문전사(反文戰士)를 넘어서는 비전과 대안에 달렸다. 국가경쟁력 강화, 지속가능한 미래를 약속할 정책 대안, 약자·청년·소외계층과의 소통과 공감능력에서 분명한 잠재력을 보여야 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집권세력이 장기집권에 생사를 걸고 포퓰리즘 정책을 악착같이 펼 때 1인 1표 투표제가 골간인 현대 민주주의 제도로 막아낼 수 있을까? 그리스, 베네수엘라 등 현대사의 경험이 들려주는 대답은 부정적이다. 배 밑창 나무를 뜯어 선실을 데워주는 격인데도, 환호하는 승객이 반대파보다 매번 숫자가 많았다. 나라가 기우는데도 선거에선 포퓰리스트 세력이 이긴다. ‘덜 가진 자’가 ‘가진 자’보다 많기 때문이다. 편가르기와 공짜의 위력은 이성으론 제어하기 어렵다. 경제가 완전히 거덜나기 전까지는 선거로는 포퓰리스트를 쫓아내기 힘든 것이다. 그나마 우파 독재자는 민중궐기로라도 축출할 수 있지만 좌파 독재자는 그런 걱정도 안한다. 보수진영에는 밤낮으로 거리에서 정권퇴진을 외칠 숙련된 직업 운동가도 거의 없다. 어렵사리 조국 사태 당시 광화문 집회같은 대규모 집회가 성사되면, 정권의 숱한 떡고물을 누려온 좌파네트워크 세력들이 총동원돼 서초동 집회같은 맞불을 놓는다. 드물게 선거로 포퓰리스트를 쫓아낸 경우도 있는데 지난해 미국 대선이 한 사례다. 사법부· 전문 관료· 언론 등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들이 파수꾼으로서의 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한민국은 이제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 그리스 파판드레우의 3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마두로 정권 승계 같은 좌파 포퓰리즘 장기화 궤도냐, 미국처럼 정상적 공화제로의 복귀냐의 기로다. 문재인 정권은 예상대로 보선을 앞두고 포퓰리즘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정권의 매표 전략은 코로나보다 더 악착같고 전방위적인 전염력을 지녔다. 어떤 무리수도 개의치 않는다.그들의 사전에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는 없다. 가덕도 해상에서 “가슴이 뛴다”며 대통령과 수행원들이 짝짜꿍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은, 관객과 시청자들이 웃음을 참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개그맨 자신들은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을 잃지 않는 유머일번지 풍자 코너를 연상시킨다. 문 대통령이 훗날 노년말기에 선상 사진을 홀로 볼 때 어떤 기분이 들까. 오거돈의 못된 손 덕분에 부활한 신공항을 치적 1호로 자랑스레 기억할까. 여권은 재난지원금 속도전에 비판이 제기되면 선진국은 더한다고 반박한다. 위기에 돈 푸는 건 원칙적으로 맞지만 돈을 푸는 방법과 철학이 전혀 다름을 간과한 주장이다. 선진국은 재정을 풀어 경제 전체적으로 생산 부문에 힘이 실리도록 하는데 초점을 둔다. 투입 재정의 구체적 용처가 많다. 그냥 살포해서 소비해 버리는 형태가 아니다. 포퓰리즘 앞에서 무력한 게 민주주의인데 설상가상으로 전쟁·전염병 같은 시기에 선거가 치러지면 민의 반영은 더 어려워진다. 평상시라면 농사를 잘 지은 논과 망친 논의 차이가 확연할 텐데 산사태가 다 덮어버리니 정권의 초라한 성적표가 가려진다. 태풍 속의 승객들은 배가 침몰할까 두려워 선장에게 힘을 몰아준다. 지금 여당의 다수당 지위는 그런 어부지리의 결과인데도 칼을 휘두르는 데 조금의 절제도 없다. 6주 전 칼럼에서 여당의 검찰 수사권 박탈 기도를 경고할 때만 해도 일부 독자들이 너무 성급한 걱정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어느새 현실이 됐다. 국가 시스템의 근간을 바꾸는 일을 허접한 낙서 끄적이는 수준으로 속전속결해버린다. 윤석열 총장이 수사권 박탈에 격하게 반발하자 그제 정세균 총리는 “이게 행정가의 태도냐”고 질타했다. 윤 총장이 결국 사퇴하자 “정치검찰의 끝판왕”이라 성토한다. 전두환 정권이 학생들을 향해 “데모가 학생의 본분이냐”고 비난한 게 연상된다. 학원을 침탈해 공부에 전념하지 못하게 해놓고, 학생답지 못하다고 꾸짖는 적반하장이었다. 차베스의 포퓰리즘을 지탱해준 건 석유였다. 문재인 정권의 석유는 삼성 현대 같은 글로벌 기업과 제조업·혁신기업들이다. 좌파세력이 아무리 구박해도 기업들은 각자 도생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고, 그들이 극한 경쟁 속에서 거둬내는 실적 덕분에 정권이 아무리 실정(失政)을 남발해도 경제가 버티고 있다. 저유가 시대가 닥치자 베네수엘라는 사실상 망했다. 우리 기업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겠지만 이런 악조건이 계속된다면 경쟁력을 잃는 건 한순간이다. ‘포퓰리즘이 매번 승자가 되는 사회’와 ‘선거가 포퓰리즘을 퇴치하는 백신 역할을 하는 사회’… 두 궤도 중 어느 곳으로 진입하느냐는 ‘깨어있는 중산층의 두께+사법부·언론 등 견제시스템의 제 역할+대안세력의 매력도’라는 세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이 중 우리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대목은 ‘대안세력’이다. 문 정권이 아무리 싫어도 국민의힘은 차마 못 찍겠다는 사람이 수두룩한 현실을 방치한다면, 포퓰리즘이 5년 더 횡행해 헤어 나오기 힘든 수준으로 ‘독이 든 꿀물’에 중독될 것이다. 야당 내의 낡은 세력들은 자신들이 좌파 재집권의 결정적 공신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퇴장해야 하다. 수명을 다한 별들이 폭발해 소멸하고 새 별이 생기듯 새로 태어나야 한다. 4월 보선과 내년 3월 대선은 좌파 포퓰리즘을 퇴치할 백신이 있는지를 결정할 중대한 실험장이다. 이 실험에서 실패한다면 백신 없던 시절 인구 대부분이 감염되고 나서야 비로소 바이러스가 사라졌듯, 좌파 포퓰리즘은 나라를 파탄내고 나서야 권력에서 내려올 것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초유의 일들이 이어진다. 조국과 추미애의 위선·독선 퍼레이드에 이어 대법원장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사례를 추가했다. 건국 이래 대법원장의 권위와 신뢰가 지금처럼 바닥에 떨어진 때는 없었다. 인사권자의 선구안 부족, 검증 부족 차원만으로는 왜 유독 이 정부 들어 이런 일이 잇따르는지 다 설명할 수 없다. 본질적 원인은 집권세력이 인사권을 권력 영속화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한 데서 찾아야 한다. 권력 도구로서의 활용 가능성을 척도로 발탁하고, 그렇게 발탁된 이들은 충실한 조직책이 되어 견마지로(犬馬之勞) 하는 악순환 고리의 부작용이 종기처럼 곳곳에서 곪아 터지는 현상이다. 물론 내 편 발탁은 어느 정권이나 있었다. 대법원장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정작 더 심각한 문제는 인사를 통한 재판 개입 징후다. 정권에 불리한 판결을 한 재판부는 전보시키고, 우호적이라 여겨지는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잔류시킨다. 정권의 역린을 건드린 사건들을 잠재적 우리 편으로 여겨지는 판사에게 맡기려는 의도로 의심받는 최근 법원 인사는, 해당 판사들이 실제로 정권에 우호적 판결을 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여부와는 완전히 별개로, 그런 의심을 받을 소지가 있는 인사를 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사법부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행위다. 10년 전 한 판사가 펴낸 ‘미국 법원을 말하다-한국판사가 본 워싱턴 법조계 이야기’(강한승 저)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는 책에서 2명의 미국 소장파 판사를 언급하면서 훗날 대법관 재목이라고 소개했다. 실제로 각각 5년, 7년 뒤 두 판사는 오바마와 트럼프에 의해 대법관에 지명됐다. 책의 저자가 예지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아무리 인사권을 남용해온 트럼프조차도 대법관은 그 진영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받아온 사람을 지명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보수든 진보든 실력과 안정감을 지녔다는 평판을 받는 인물이 장차의 대법관 재목으로 거론되며 성장한다. 한 사회의 이념 스펙트럼을 좌 1, 우 10으로 놓고 볼 때 4~6 사이 인물이 아니면 엄두도 내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는 주요 공직에 1, 2 또는 9, 10의 인물들이 대거 발탁된다. 진보진영 내에서조차 대법원장감으로 거론조차 안 됐던 지방법원장이 단번에 발탁 되고, 대법관과 헌법재판관 자리가 특정 성향의 이너서클 출신으로 채워진다. 물론 자기편인줄 알고 발탁한 인물이 직업적 소명을 지키며 통치자에 거역하는 사례는 동서고금 어디서든 있다. 예기치 않은 ‘심판의 반란’에 직면했을 때 제3세계 독재자들이 동원하는 수법은 경기 규칙, 종목의 본질 자체를 바꿔버리는 입법이다. 20세기 독재자가 탱크와 총칼을 동원했다면, 21세기엔 인사권과 입법권을 무기로 휘두르는 것이다. 현금 살포로 다수당을 차지한 뒤, 나팔수들을 총동원해 입법을 정당화시키는 허위 논리를 확산시킨다. 하필 더불어민주당이 추미애의 검찰장악이 실패하자마자 검찰의 수사권을 아예 없애겠다고 나선 것은 문재인 정권이 제3세계 권력자들의 패턴을 따라 한다는 오해를 자초하기 십상이다. 친문들은 미국 등 선진국에서 검찰은 기소 업무만을 담당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사실과 다른 주장이다. 미국에서도 검찰이 대형 비리를 파헤치는 경우가 숱하다. 지난해 트럼프의 책사 스티브 배넌을 기소한 것도 금융 범죄 수사와 정·재계 거물 수사로 명성을 쌓아온 뉴욕남부 연방지방검찰청(SDNY)이었다. 아베 전 총리의 벚꽃스캔들을 파헤치는 주체도 도쿄지검이다. 경찰은 말할 것도 없고 헌법과 법률로 신분이 보장돼 있는 검사도 산 권력 수사를 덮고 정권에 빌붙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예 검찰의 권력비리 수사 기능마저 없애버리면 집권세력은 절대왕조 보다 더 마음 놓고 권력을 향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설령 대선에 져도 꽁꽁 숨긴 정권 치부를 파헤칠 만한 수사력을 가진 조직이 없으니 걱정을 덜 수 있다. 어느 통치자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은 욕심이 있게 마련이다. 미국인의 사랑을 받는 대통령 중 한명인 프랭클린 루스벨트(FDR) 마저도 뉴딜 정책 관련 법률들이 잇따라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자 대법원 구조개혁 입법을 시도했다. 당시 루스벨트는 대선에서 상대 후보를 거의 더블스코어로 누르고 재선된 직후였다. 하지만 압도적 다수당이던 여당(민주당)마저 미국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고, 루스벨트는 물러섰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통치자가 욕구를 절제하고 제도의 취지를 존중하느냐 여부다.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한 요소일 뿐이다. 히틀러 무솔리니 등 독재자들도 다수결이란 형식은 거쳤다. 소수의견 배려와 절차의 존중 없인 민주주의가 존립할 수 없다. 국회 상임위 절차도, 검찰인사의 총장 의견 청취도, 인사청문회도 그저 법조문에 활자화된 내용만 겉치레로 거치고 그 조항에 담긴 근본 취지와 전통은 다 무시하는 건 민주주의의 기본을 무너뜨리는 행위다. 인사권을 휘둘러 선수를 쫓아내고 심판 구성을 유리하게 하고, 권력 수사 기능을 완전히 말살시켜도, 헌법에 관련된 명문 조항이 없으니 위헌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헌법은 활자화된 문구 그 이상의 정신이다. 인사농단과 입법폭주는 국민 상식의 법정에서는 모두 위헌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친문세력은 이제 ‘내로남불’ ‘이중잣대’의 차원을 넘어 ‘정신승리’의 경지로 접어든 것 같다. 이임식에서 ‘영원한 개혁’ 운운하며 눈물 흘리는 추미애와 “사랑해요”를 연창하는 지지자들의 모습은, 자기합리화·자기세뇌를 수없이 반복한 결과, 자신들이 날조한 허구의 세계 속에서 감격하고 희로애락을 나누게 된 집단최면의 경지를 연상케 한다. 집단심리학 연구의 대상으로 넘겨야 할 소재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이 아무리 환각 속에서 ‘정의봉(棒)’을 휘둘러도 폐해는 제한적·한시적이라는 점이다. 법원과 지식인들에 의해 실체가 낱낱이 드러나면서 발가벗고 대로에서 몽상활극을 벌인 꼴이 됐다. 그 폐해는 선거 등의 심판을 통해 회복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친문 특유의 정신승리적 접근법이 외교·안보에까지 적용될 경우 폐해는 무한대·영구적이 된다. 바이든 취임 후 한미 정상 첫 통화는 취임 2주가 지난 어제 이뤄졌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시진핑과 40여 분간 통화에서 중국 공산당 100주년을 축하했다. 중국 지도자와 먼저 통화하는 것이 갖는 상징성, 중국이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 몰랐을 리는 없다. 앞으로도 미중 간에 중간자적 입장을 견지해갈 것이라는 메시지를 발신한 것이다. 실제로 대통령 측근 인사들 사이에서는 “제3의 길” 얘기가 계속 나온다. 여권에선 트럼프 퇴장으로 미중 갈등이 한풀 꺾이고 한국의 균형자, 조정자 역할이 가능할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실제 국제정세와 괴리가 큰 희망적 사고다. 미중 대립은 이 시대 국제질서를 규정짓는 핵심 프레임이 됐다. 냉전시대 미소(美蘇) 대립이나 마찬가지다. 정권이 바뀐다고 사라질, 트럼프라는 일개 정권 차원의 갈등이 아닌 것이다. 과거 일본 등에 가했던 무역역조 시정 목적의 보복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역패권국의 출현을 용납하지 않는 미국 외교의 기본 DNA가 시진핑 정권의 팽창주의·패권주의, 경제추월 위협과 결합해, 강한 적대감으로 굳어졌다. 게다가 바이든 행정부에선 인권문제까지 추가돼 갈등과 대립은 더 까다로워질 것이다. 특히 미 민주당은 과거 미중수교(카터 행정부), WTO 가입 지원(클린턴) 등으로 중국의 성장을 도왔다는 자격지심을 갖고 있다. 중국이 GATT 체제의 특혜를 누리면서 온갖 반칙을 저지르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인권과 자유의 가치를 공유하는 민주주의 체제로 편입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더 폭압적인 권위주의로 퇴행한 데 대한 배신감도 복합됐다. 세계는 미국 주도의 반중 동맹 대(對) 중국몽 추종 블록으로 나뉘고 있다. 서방세계와 일본 호주 인도 등은 확실하게 미국에 힘을 싣고 있다. 균형자, 조정자 운운하며 어정쩡하게 양쪽 다 다리를 걸치면 몸값이 올라가기는커녕 양쪽 모두로부터 무시받을 수 있다. 특히 미국과 밀당하려는 태도는 동맹의 신뢰 근간을 무너뜨릴 것이다. 한국이 대중 압박전선의 구멍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반도체를 비롯해 고도로 분화된 글로벌 밸류 체인에서 축출된 중국이 한국의 인재와 기술 유입에 열을 올리지만 정권 핵심부가 중국몽을 칭송하는 분위기 속에서 국정원 등 관련기관들은 적극 나서지 않는 분위기다. 한국이 미국과 멀어질수록 북한의 위협은 차치하고라도 일본의 독도침탈, 중국의 서해침범 같은 국익 침탈 위험에 더 취약해진다. 남북관계에만 집착해 북핵을 사실상 묵인한다면 궁극적으로 일본의 핵무장과 군비증강 빌미를 줄 텐데, 미국 외에는 이를 견제할 균형추가 없다. 중국 압박 동참이 한국경제에 치명적 타격을 줄 것이라는 공포도 객관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공산당 지배체제의 한계 때문에 이미 상당수 일류 기업들은 중국에서 빠져나와 베트남으로, 베트남에서 다시 인도로 향하고 있다. 대만이나 일본의 대중(對中) 경제교류가 여전히 활발히 이뤄지고 있음도 눈여겨봐야 한다. 중국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라도 미국의 에너지를 이용해야 한다. 미국 주도의 반중 전선은 가치 기반 민주주의 동맹이다. 문 정권의 친중 스탠스는 탈각하지 못한 이념적 잔존물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겪은 정체성 상실 트라우마, 유물론적 역사발전법칙에 대한 미련, ‘분단과 친일세력의 우군인 미국’에 대한 정서적 반감 등에 뿌리가 닿아 있다. 집권세력이 국제정세를 자기 원하는 방향으로 재해석해버리면 국가 항로가 왜곡된다. 이미 마차가 말을 끌 수 있다는 환상(소득주도 성장), 태양과 바람만으로도 에너지를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환상(탈원전)으로 나라의 기둥 뿌리들이 뽑혀져 나갔다. 권력 치부를 감추기 위한 검찰장악을 개혁이라 분칠한 채 사랑해요를 외치든, 문재인보유국을 외치며 사미인곡을 부르든, 다 그들의 자유다. 하지만 환각 상태에서 키를 잡고 항로를 입력해선 안 된다. 1866년 흥선대원군은 오랑캐 함선(제너럴셔먼호)을 격침시켰다는 보고를 받고 쇄국정책의 앞날을 자신했다. 그 배가 비록 함포를 장착했지만 승선원 20여 명의 민간 상선이었고, 대동강 모래톱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다 화공(火攻)을 당했다는 팩트는 간과했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사람의 지문처럼 잠수함은 소음과 진동이 만들어내는 저마다의 음문(音紋)이 있다. 음문은 잠수함의 생명 정보며, 안보 핵심 기밀이다. 그래서 잠수함 훈련은 핵심 동맹국들 사이에서만 이뤄진다. 13일부터 1주일간 괌 인근 해상에서 전개된 ‘시드래건(Sea Dragon)’도 그런 훈련이다. 로스앤젤레스급 미국 핵잠함 시카고호가 가상 적국 잠함으로 변신해 바닷속을 돌아다니고, 참가국들은 해상초계기 등을 동원해 추적한다. 미국 호주 일본 인도 캐나다가 참가했다. 한국은 불참했는데, 불참 사유는 코로나 상황이었다. ‘공교롭게’ 김정은은 14일 핵미사일 장착 전략핵추진잠수함 개발을 과시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18일 신년회견에서 한미훈련을 북한과 협의하겠다고 했다. 물론 미국과의 훈련 불참 한두 건이 우리 안보를 좌우할 일은 아니다. 70년 넘게 함께 쌓아온 한미동맹이 벽돌 몇 개 뺀다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문제는 이 정권 들어 대한민국을 이루는 기둥 곳곳에서 이런 벽돌 빼기가 반복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일관된 패턴이 관찰된다. 처음에는 부분 수리만 하는 척한다. 과격한 전면 철거·재건축 의도를 드러내면 수리업체 재입찰 때 탈락은 물론이고, 당장의 작업도 거센 반발에 부딪힐 걸 알기에 슬금슬금 밑돌부터 뺀다. 검찰개혁은 수사권 조정 수준을 넘어 이젠 수사권 전면 폐지까지 밀어붙일 태세다. 원전 정책은 의존도를 줄이고 안전성을 강화하는 차원을 넘어 돌이키기 힘든 탈원전, 원전산업 고사(枯死) 모드로 접어들었다. 부동산 제도도 종국엔 근간을 바꾸려 할 것이다. 이미 추미애 당대표 시절(2017년 9월) “농지개혁에 버금가는 지대개혁”을 거론했고, 총선 직후 민주당에선 토지공개념 개헌론이 제기됐다. 당분간은 보유세·거래세를 극한까지 강화하는 차원에 머물다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면 ‘부동산 민주화·평등화’를 완성하려 들 공산이 크다. 기둥들을 부수는 과정에서 탈법과 절차 위반, 건설현장 하도급 비리를 닮은 구린내 나는 행태들이 잇따른다. 이걸 검찰과 감사원이 문제 삼으니 “집 지키라 했더니 감히 주인을”이라며 눈을 부라린다. 워치독의 주인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기본 상식도 망각했다. 국민이 기둥 철거를 위임한 적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면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는 게 대선 공약 논리다. 그러나 388쪽에 달하는 문재인 후보 공약 어디에도 지금 정권의 행태를 정당화시켜 줄 내용은 없다. 예를 들어 공약집의 ‘권력기관 개혁’ 항목 주제는 ‘권력 눈치 안 보는 성역 없는 수사기관 만들기’다. 공수처 설치의 취지도 ‘검찰의 권력 눈치 보기 수사 차단’이라 되어 있다. 검찰총장 무력화나 수사권 전면 폐지는 어디에도 없다. 더더구나 압도적 다수(super majority)의 지지를 받은 것처럼 밀어붙일 처지는 못 된다. 문 대통령의 대선 득표율은 41%, 전체 유권자로 환산하면 31%였다. 논리가 막히면 촛불정신을 들먹이는데, 촛불집회의 주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등 대한민국의 근간 가치를 지지하는 대다수 시민이었다. 대한민국호(號)의 근본 항로를 바꾸자는 요구는 집회 주최단체들을 제외한 일반 참가자 가운데는 극소수에 불과했다.하버드대 정치학과 스티븐 레비츠키 교수 연구에 따르면 세계 곳곳 ‘선출된 독재자’의 전형적인 수법은 심판 매수와 운동장 기울이기인데, 이 모든 게 살금살금 이루어진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18일 회견에서도 온건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추미애 장관이 야기한 그 숱한 분란과는 격리된 세계에서 살다 온 듯, 지난해 검찰 학살 인사는 추 장관이 대통령 결재 없이 자행한 것인 듯 행동했다. 문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중시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미동맹이 남북관계와 상충할 경우엔 동맹의 밑돌을 빼왔다. 정의용 외교장관 기용을 통해 여전히 정책기조를 바꿀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국민 다수를 향해서는 온건한 말로 안심시키고, 동시에 지지자들을 향해서는 ‘내 입이 아니라 내 행동을 보라’고 메시지를 보내는 셈이다. 집권세력은 새로 짓고 싶은 건물의 조감도를 제시한 적이 없다. 다만 명확히 드러난 공사 지침은 있다. 그것은 철저한 피아 구분이다. 우리 편은 극도의 내재적 관점으로 이해해준다. 김정은 김여정이 어떤 횡포를 부려도, 조국 가족의 어떤 비리가 드러나도 포용되고 이해된다. 반면 4대강 보 해체 결정에서 드러나듯 적의 생산물은 집요하게 초토화시킨다. 그들이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정의와 역사의 진보, 통일’을 향해 어깨 걸고 한마음으로 가는 사회일 것이다. 대의를 위한 대장정에 어떻게 반대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검찰 감사원 언론의 견제와 문제 제기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수구세력의 반(反)개혁 음모 이외로는 해석이 안 되는 것이다. 윤석열·최재형과 전광훈을 같은 냄새로 분류하는 후각 상실증, 21세기판 이념 색맹증도 그런 뇌구조의 결과물이다. 후각도 시각도 단선적이니 멘털과 신념도 쉽게 담금질된다. 그러니 언행 불일치를 밥 먹듯 하고, 집수리 한다고 들어와 기둥을 부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검찰 장악’ 대공세가 참패로 끝난 요즘 집권세력은 핑곗거리 찾기에 골몰한다. 참패 원인을 외부로 전가하지 않으면 내부 붕괴를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집권세력 내에서 ‘사법쿠데타’론이 나온 데 이어 너도나도 넷플릭스 영화 ‘위기의 민주주의’를 강추하고 나선 것도 그런 차원의 이념적 선전선동술로 해석된다. 이 영화는 브라질의 재벌 사법부 언론 등 우파 기득권 카르텔이 ‘사법쿠데타’를 통해 민주화 세력의 상징인 룰라 전 대통령과 그의 후계자를 몰락시키고 극우정권을 세우는 과정을 그린 다큐다. 김어준의 팟캐스트에서 이 영화를 인용해 ‘연성(軟性) 쿠데타’ 개념을 제기하더니 추미애 조국에 이어 이재명 지사도 영화를 거론했다. 좌파 사이트에는 조국 수사와 윤석열 징계 무효 판결을 브라질 상황과 매칭시키며, 한국의 데자뷔라는 글이 넘쳐난다. 필자는 이들이 거론하기 이전에 영화를 봤는데, 몰락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 후 해외 신문 리뷰를 통해 감독이 객관성에 개의치 않고 한쪽만의 시각으로 팩트를 취사선택했다는 한계를 알고 실망했다. 그런데 설령 룰라의 몰락이 극우 카르텔에 의한 것이라는 영화의 설정이 100% 맞다고 가정해도, 민주화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사회를 중남미처럼 민주세력 대(對) 과거로 회귀하려는 극우독재 기득권 카르텔의 대결구도로 바라보는 화석화된 뇌구조가 집권세력의 핵심층에 남아 있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더구나 현재 한국사회에서 영화 속 브라질 우파 카르텔에 비견되는 기득권을 쥐고 있는 세력은 바로 친문 집권세력이다. 룰라는 우파가 장악한 사법부에 무너지지만 한국은 대법원 헌재 중앙선관위까지 코드인사로 도배됐다. 브라질 검찰은 우파만의 보검(寶劍)인지 몰라도 한국의 검찰은 우파를 향해서도 적폐청산의 강공을 몰아쳤던 바로 그 칼이다. 브라질 상하원은 룰라 반대파가 다수지만 한국 의회는 정권이 장악하고 있다. 게다가 민노총 전교조 등 거대노조는 언터처블의 위세이고, 수많은 좌파 단체와 활동가들이 갖가지 권력의 떡고물로 뭉쳐진 좌파산업 네트워크를 형성해 정권을 지키고 있다. 언론도 지상파 통신사 뉴스전문채널 등 전방위로 친여 코드인사들이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다.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중파 방송이 친여 선동가를 위한 스피커 겸 황금밥통으로 전락한 것은 5공 시절에도 없던 일이다. 포털사이트에 대해서는 “들어오라고 하세요”라는 표현이 무심코 나올 정도니 정권의 영향력을 짐작하게 한다. 친문들은 기득권 카르텔의 핵심으로 보수신문을 꼽지만, 거의 100개 언론사가 네이버 뉴스스탠드에 자리잡은 포털 환경에서 메이저 신문의 기사라고 특별히 더 대우받는 게 아니다. 결과적으로 여론이 이들 신문의 보도 및 논평과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였다면 이는 국민들의 생각이 같은 방향이고 더 많이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입법 사법 언론 시민사회 등 전방위에 걸쳐 강력한 기득권 체제를 구축한 집권세력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우파 카르텔’ 때문에 개혁이 좌절된 것처럼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국민에게 거절당한 진짜 이유를 외면하고 싶어서다. 자신들의 탐욕에 개혁의 외피를 씌워 개혁을 변질시킨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만약 조국 살리기 방편으로 검찰개혁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정권 수사를 막기 위한 윤석열 찍어내기로 변질시키지 않았다면 어느 국민이 개혁에 반대했을까. 공수처도 마찬가지다. 문 정권은 공수처가 오래전부터 야당을 포함해 많은 국민이 염원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다. 공수처는 1990년대 중반부터 ‘공비처’(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라는 이름으로 화두가 됐다. 하지만 당시 공수처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정권의 눈치만 살피는 검찰 대신 정권에서 독립돼 권력층의 부정부패를 척결할 기구가 필요하다는 차원이었다. 공수처 논의의 핵심은 권력의 비리를 파헤치는 것이었는데 문재인 정권은 막상 검찰이 그런 역할을 하려 하자 검찰의 칼을 빼앗는 차원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 검찰, 최재형 감사원, 일선 법원 판사들이 그랬듯, 헌법정신에 투철한 원칙론자로 알려진 김진욱 공수처도 정권보위라는 정권의 의도와 달리 본질적 미션에 충실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집권세력은 “역시 사법부 카르텔은 팔이 안으로 굽는다”며 공수처마저 흔드는 추레한 행태를 보일 것이다. 그러면서 실재(實在)하지도 않는 우파 카르텔 탓을 하는 프로파간다를 이어갈 것이다. 콘크리트 지지세력에 자기 무장논리를 공급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법치와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한 잘못을 인정하고 협치의 길로 접어드는 게 회복의 길이지만 콘크리트가 굳어버려 발목이 갇힌 신세다. 턱도 없는 룰라 비유로 분칠하려 하지 말고, 브라질의 사례에서 배우려거든 룰라가 2010년 퇴임 시 87%의 높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급진좌파 정책을 펼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집권 8년간 실용 온건 중도 노선으로 협치와 경제성장을 이뤘기 때문임을 먼저 배워야 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저토록 뻔뻔하고 위선적인 사람들을 직접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단테의 신곡이나 영화 ‘신과함께’ 등에서 지옥여행을 통해 인간 죄악을 종류별로 경험케 하듯, 문재인 대통령이 발탁한 인사들은 인간심성의 뒤편에 숨은 추한 특질들을 차례차례 보여준다. 국민들은 조국 사태에서 위선과 이중잣대의 심연을, 추미애를 통해 독선과 뻔뻔함의 극치를 목도했는데, 이젠 변창흠 이용구가 마치 “위선왕 콘테스트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고 웅변하듯이 인간심성 밑바닥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전국 선발대회를 해도 이렇게 특별한 사람들만 골라 찾아내기는 힘들지 않을까. 문 대통령의 특별한 선구안에 대해 한 정치학자는 ‘곡목구곡목(曲木求曲木)’의 딜레마라고 진단했다. “말(馬) 우리를 만들 때 처음에 굽은 나무를 쓰면 계속 굽은 나무를 써야 해 곧은 나무는 쓸 수가 없게 된다”는 제나라 관중의 말에서 유래한 고사다. 정권 초부터 코드인사에 매몰되니 상식을 지키는 중도진보 인사들은 참여할 생각도 안 하는 악순환이 된다. 찾아가지 않은 가방들만 남은 공항 ‘수화물 찾는 곳(baggage claim)’처럼 문 정권의 인사 컨베이어벨트엔 상식의 세계에서 버림받은 인물들만 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좁은 인재풀에서 골라 투입한 굽은 나무들은 불과 3년 사이에 공직사회를 근본부터 망가뜨렸다. 아차 하면 적폐세력으로 몰리고 휴대전화 압수, 가차 없는 인사보복이 이어지자 공무원들은 납작 고개를 숙였다. 기자 생활 수십 년간 많은 공직자들과 만났다. 사명감과 전문성 성실성 열정이 남다른 이들이 많았다. 기업을 이끌어온 임직원들과 더불어 그런 공직자들의 직업윤리는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한 기둥들이었다, 하지만 낡고 단층적인 흑백론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이념적 지체아들이 장관직을 꿰찬 채, 팩트와 원칙을 얘기하는 과장에게 서슴없이 “너 죽을래”라고 하는 그런 분위기에서 공무원들이 그 어떤 자존감을 가질 수 있을까. 최소한 금융 재정 외교 안보 등 핵심 부처들에선 국가의 미래를 위해 정권의 눈앞의 이익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과감히 토론하는 분위기가 형성돼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권력이 재단해준 꽉 조이는 제복 내에서 운신하며 위에서 원하는 정책만 양산하는 것 아닌가. 공복(公僕) 정신의 실종은 백신사태와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아무리 정권 수뇌부가 외국산 백신에는 별 관심을 안 둔 채 퍼주기에 재정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해도, 공직사회가 살아있었다면 직위를 걸고 거듭거듭 백신 조기확보의 중요성을 직언하고, “더이상 실기해선 안된다”며 설득하고 고집하는 관료들이 잇따랐을 것이다. 물론 마스크 대란 때 그랬듯, 정권이 뒤늦게 건 초비상령에 쫓기는 한국의 공무원들은 특유의 순발력과 집중력 행정력으로 옥쇄하듯 달려들어 머잖아 뭔가 대책을 마련해낼 것이다. 얼마 전 뉴욕타임스에 ‘누가 트럼프로부터 공화국을 구했는가’라는 글이 실렸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들이 대통령의 권력남용을 막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견제장치를 만들었지만, 막상 트럼프의 전횡 앞에 헌법과 제도는 무력하고 빈틈이 많았으며, 결국 트럼프의 재선을 막고 민주주의를 구한 것은 규범과 기준을 지킨 공직자들이었다는 내용이다. 트럼프는 심복을 법무장관에 임명했지만 검사들은 직업윤리를 끝까지 지켰다. 4년간 트럼프의 핵심 측근 6명이 유죄를 받았고 7명이 기소돼 있다. 트럼프는 바이든 공개수사 발표와 기소를 촉구했지만 검사들은 이를 거부했다. 흑인 시위에 군 투입을 거부한 국방장관, 트럼프 기자회견에 배석한 자신의 행동이 군의 정치적 중립 이미지를 훼손한 것이라며 공개 사과한 참모총장, 트럼프의 집요한 부정선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선관위 직원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마지막 방화벽이었다. 우리도 희망은 보인다. 대법원 헌재 중앙선관위 등을 코드인사로 채우고, 대통령이 헌법기관장들을 모두 불러 “각별한 관심을 갖고 힘을 모아달라”고 촉구해도, 전국의 모든 판사 검사 서기관 사무관 주무관 감사관들을 다 장악할 수는 없다. 헌법정신과 공직자로서의 규범을 내면화한 공무원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민감한 정치적 사건을 오직 법리에만 충실해서 판단한 일선 판사들의 잇단 판결, 윤석열 검찰과 최재형 감사원의 공직자들이 그걸 증명해준다. 경제·사회정책 부서들에서도 재정건전성과 정책합리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들이 커질 것이다. 여당이 다수결 정족수를 무기 삼아 폭주를 거듭하는 상황에서 규범과 상식을 지키는 공직자야말로 민주주의의 마지막 방화벽, 헌법정신의 핵심인 견제장치다. 교수에서 공기업 사장으로 직행하더니 자기 사람들에게 대거 고위직을 안겨주고, 비정규직 청년의 죽음으로 자신을 발탁해준 시장님이 궁지에 몰리자 그 죽음에 막말을 퍼붓고, 택시기사의 목을 조르는… 3류 풍자코미디 영화에 등장해도 너무 과장된 인물형이라고 비평받기 딱 좋은 그런 캐릭터의 인물들에게 한상(床) 차려 올리려고 그 힘든 공부를 해서 공직자가 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가을님이 보름달님을 좋아합니다.’ 요즘 구(舊) 서울시청사 현관에 걸려 있는 대형 그림이 눈길을 끈다. 서울시에 물어보니 9월16일 발표한 ‘서울꿈새김판 문안공모전’ 당선작으로 이달 중순까지 게시된다고 한다. 정치적 의도는 없는 그림이지만 워낙 추미애 장관 경질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다 보니 가을님·달님에서 추(秋)미애, 문(moon)재인을 연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추 장관은 친문을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열렬한 구애’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충성을 바쳤다. 하지만 요즘 여권에선 추 장관의 추태가 문 정권 지지율 추락의 일등공신이라는 원망이 나온다. 인민위원회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검찰총장을 쫓아내려 하고, 공수처법의 유일한 정치적 독립 장치마저 서슴없이 파기하는 이 모든 폭주와 혼돈이 다 추미애 탓일까. 현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해 9월 27일로 거슬러 가야 한다. “검찰 개혁 요구가 높아지고 있는 현실을 성찰해야 한다.” 미국 방문에서 돌아온 문대통령이 조국 사태에 대해 내놓은 첫 언급이다. 8월 초 조국을 법무장관 후보에 내정한 이후 거의 두 달 동안 나라를 뒤흔들 만큼 쏟아진 비리 의혹과 위선의 실태에 대해선 일절 언급 없이 검찰의 수사 착수만을 정면 비판한 것이다. 그때까지 조국 사태는 공정, 위선 등의 문제였을 뿐 검찰개혁과 연관시키는 그 어떤 공론도 없었으나 대통령의 발언을 신호탄으로 여당과 친여매체 관변단체들이 총동원돼 프레임 전환에 나섰다. ‘검찰개혁=윤석열 축출’이라는 기발한 프레임은 문 대통령이 직접 선보인 작품인 것이다. 추미애는 성정이 유별난 행동대장에 불과했다. 친문이 윤석열과 검찰개혁을 연결시킨 유일한 논리는 조국에 대한 검찰 수사가 과잉, 먼지털이식 수사이므로 검찰권 남용이며 검찰의 불순한 의도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언론들이 제기한 조국 일가 관련 의혹들은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산더미 같았다. 만약 검찰이 한두 개만 추려 부분 수사에 착수했다면 봐주기 수사, 덮어버리기 작전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을 것이다. 문 대통령이 프레임 전환을 안했다면 검찰개혁은 검경수사권 조정과 수사 관행·제도 개선 논의를 거쳐 별 소란없이 진행됐을 것이다. 이미 검경수사권 조정안이 그해 4월에 국회 패스트트랙에 올려진 상태였다. 여기에 검찰총장이 어떻게 저항할 수 있었겠는가. 며칠 전 TV에서 ‘개는 훌륭하다’라는 프로그램 재방송을 봤다. 대형견이 산책길에 주인이 목줄을 당기자 주인까지 물려고 할 정도로 공격성을 보였다. 강형욱 훈련사도 진땀을 흘렸다. 문 대통령은 검찰이 자신의 아바타격인 조국에게 칼날을 겨누자 주인에게 대드는 맹견의 모습을 봤을 것이다. 적폐수사 때는 가차 없이 물어뜯는 검찰이 이뻐 어쩔 줄 몰랐는데 막상 그 송곳니와 발톱이 자신을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아찔했을 것이다. 문 정권의 큰 착각은 정권이 맹견의 주인이라 여기는 점이다. 맹견의 주인은 국민과 헌법이다. 어떤 정권이든 청와대를 비롯한 정치권력은 맹견이 가장 예리하게 감시해야 할 ‘잠재적 대도(大盜)’로 여겨져야 한다. 물론 맹견에겐 통제가 필요하다. 그 통제는 두 기둥으로 이뤄진다. 하나는 정권이라는 투견꾼이 맹견을 사냥개·애완견으로 악용하지 못하도록 정치적 독립,중립성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다. 또 하나는 맹견이 작은 개나 행인에게 으르렁대지 않게 하는 예절 훈련과 인내심·복종심, 즉 수사관행 및 검찰 구성원들의 의식 개선, 그리고 목줄과 입마개, 즉 수사심의위원회·대배심 같은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다. 더 강한 목줄이 필요해 공수처를 만들 경우 대전제는 그 목줄이 절대 투견꾼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여당이 입법 폭주에 나서기 하루 전인 7일 문 대통령의 발언은 매우 강도가 높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은 하려고 하는 방향의 정반대였다. “권력기관을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고, 그 어떤 기관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견제장치를 만들겠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2개월 전 4·13호헌조치 발표 당시 전두환의 확신에 찬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순전히 집권 영속화를 위한 방편으로 간선제를 고집해 온 장본인이면서도 간선제가 북의 남침과 좌경 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보루라고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권력욕과 정보 편식에 따른 확증편향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최면상태가 된 듯했다. 이 정권도 지난 1년간 ‘윤석열=개혁 저항세력’이라고 국민들에게 최면을 걸려 했으나 결과는 친문 자기들끼리만 집단최면에 걸리게 됐다. 지지율이 급락하면 중도를 바라보며 통합과 협치로 향하는 게 상식이고 정상인데, 정반대로 더 굴을 깊게 파고 지지세력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믿을 건 핵심 지지층 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지층 환심을 사는데 사활을 걸다 보니 노동법 개정안에서도 그나마 최소한의 겉치레 균형이라도 맞추려고 곁들였던 조항들마저 다 없애 버렸다. 유럽 등 선진국에서 노동개혁은 진보정권이 이뤄냈다는 충고들은 모두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진보란 이름이 부끄러운, 그저 권력 유지에 득이 되는 것만 하는 차베스급의 하류 좌파정권 행태다. 이런 식으로 진보의 가치를 훼손하면 훗날 역사가들은 민주화 이후 진보정권의 족보에서 문재인 정권은 제외시킬 가능성이 크다. 자칫하면 권위주의 독재 2기로 분류될 수 있음을 진정 모르는가.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며칠 전 직접 본 일이다. 지인이 지하주차장에 주차해 놓은 차의 운전석 쪽에 누군가 한 뼘 가량의 공간만 남을 정도로 바짝 붙여 승합차를 세워놨다. 바닥의 구획선을 한참 넘었다. 승합차 운전석 쪽은 공간이 꽤 있었다. 잠시 후 30대 남자가 걸어오더니 미안해하는 눈짓조차 전혀 없이 승합차 운전석에 올랐다. 곧 차를 빼겠지 싶었는데 휴대전화 문자를 하는지 한참을 그냥 있었다. 지인이 차를 빼달라고 하니까, 남자는 창문을 내리더니 “반대쪽으로 타면 되잖아”라고 반말로 소리쳤다. 지인이 “차를 너무 바짝 붙여 놔 못 타고 있지 않느냐”고 하자 “너가 차를 못 타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귀찮게 해 XXX야. 죽어볼래”라며 차에서 뛰어나오더니 멱살을 잡을듯이 달려들었다. 경찰이 출동하자 남자는 경찰에 “(지인이) 욕설을 해서 화가 났다”고 주장했다. 지인은 욕설을 한 적이 없었다. 경찰은 “실제 폭행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관여할 사안이 아니다. 좁은 주차장이니 역지사지해 화해하라”며 타일렀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기 어려울 만큼 한쪽이 일방적으로 잘못한 사안이 쌍방 허물로 변질된 것이다. 세상의 분쟁이나 다툼은 경중은 달라도 양측 모두에 허물이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99 대 1로 잘못한 쪽이 명백한 경우마저 일방폭행이 아니라 쌍방피해(쌍피)로 포장된다면 그건 공정한 일이 아닐 것이다. 요즘 여당 의원들과 친정부 언론들이 “추미애-윤석열 갈등에 국민은 지긋지긋해한다. 둘 다 정리해야 한다”는 주장을 자주 제기한다. 추 장관과 윤 총장 모두 해임시켜 분란을 끝내라는 주장이다. 얼핏 중립을 가장한 듯 보이지만 본질을 호도하는 주장이다. 검란(檢亂)으로 번진 이 사태는 추-윤 간의 쌍피가 아니라 99% 추미애가 가해를 가한 일방폭행 사건이다. 정권에 불리한 수사에 참여한 검사들을 죄다 좌천시키고, 수사지휘권을 남발한 추미애의 일방적 공격이 계속됐을 뿐, 윤석열은 조국 의혹을 수사하고 권력형 비리사건 수사를 독려한 것 외엔 먼저 싸움을 건 게 없다. 윤석열 입장에선 상대방이 인간의 질량을 저울에 달아볼 때 싸울 가치조차 없는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일방적 가해를 쌍피로 둔갑시키는 것은 좌파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6·25 남침을 내전설, 미국과 남측의 전쟁유도설로 호도한 것이 대표적이다, 추미애가 읽어 내려간 윤석열의 혐의들은 1953년 김일성이 박헌영을 숙청할 때 ‘미제(美帝)의 스파이’ 죄목을 내세운 것이 연상될 만큼 허접했다. 박헌영이 미국과 접촉이 있었다는 단편적 사실을 엮어 공산주의 운동의 1인자를 미국 간첩이라며 처형했는데, 전혀 존재하지 않는 팩트는 아니지만 실제론 전혀 다른 내용들을 완전히 다른 색깔로 색칠하는 수법이다. 추미애만 보면 그 내공의 얄팍함에 놀라게 되지만 집권세력의 내공까지 가볍게 봐선 안 된다. 윤석열 직무배제를 놓고 월성원전 수사를 막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많이 나오지만 필자는 그렇게만 보지 않는다. 집권세력은 단지 현재 진행중인 정권 겨냥 수사를 막는 것뿐만 아니라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법시스템의 구조와 미션 자체를 바꾸려는 것이다. 1980년대 운동권 내에선 ‘혁명 완수를 위한 정의로운 물리력’에 대한 염원이 컸다. 반(反)혁명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민중의 군대에 대한 염원이었다. 현재는 검찰 경찰 등이 대표적인 물리력인데, 저들에게 그 물리력은 이른바 ‘선한 권력’, ‘정의로운 권력’에까지 사소한 트집을 잡아 칼을 들이대는 그런 법(法)만능의 몰가치적인 존재여선 안 된다. ‘부패한 보수 냉전 친일세력이 민족의 장래를 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진보 장기집권이 역사의 대의’이므로 검찰 등 사법기관들도 역사의 진보에 기여할 수 있도록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수처 검찰 경찰 법원 등을 철저히 코드 인사들로 채우려는 데 거침이 없는 것도 그런 대의를 위한 과정이라고 자기합리화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런 공권력을 ‘권력의 사냥개’, ‘애완견’이라 부르지만, 자기들끼리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데 기여하는 개혁 공권력’이라고 착각한다. 그런 반(反)자유주의적 확신을 바탕으로 그 어떤 무리수도 마다하지 않지만 ‘쌍피 사건화’ 전술은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지 않는 것도 ‘법무장관과 총장간의 갈등이 도를 넘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총장을 경질해야 했다’는 알리바이를 만들 만큼 명분을 쌓기 위함일 것이다. 쌍피 사건화 과정을 안 거치면 검찰 장악을 위해 임기제 총장을 자른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선거 때 진영을 결집할 논리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집권세력은 ‘시간이 지나면 국민의 절반은 세세한 내용은 잊고 추-윤 갈등 정도로 기억할 것’이라고 계산하며 억지 논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퍼뜨린다. 눈 밝은 국민이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사태는 쌍피 사건이 아니라, 과거 어느 정권도 엄두를 내지 못했을 만큼 질 나쁜 일방적 폭행임을 정확히 기록하고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트럼프의 대선 패배를 계기로 트럼프의 행태와 문재인 정권의 유사성을 많이들 얘기한다. 하지만 단순 동일시는 위험하다. 서로 닮지 않아서가 아니다. ‘민주주의 본산이라는 나라 대통령도 저러는데, 우리는 그에 비하면 약과네…’ 식의 착시효과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산사태 때 골조가 튼튼한 집과 낡은 판잣집이 받는 대미지는 다르다. 미국은 아무리 대통령이 전횡을 해도 견제하고 제어하는 의회·사법부 등 시스템이 굳건하다. 트럼프 행정부의 고위관료 상당수는 쫓겨날지언정 헌법 가치와 직업적 양심을 굽히지 않았다. 민주주의가 건재하려면 워치독 기능이 살아 있어야 한다. 한국도 심지어 과거 군사정권 때도 재정건전성을 지키기 위해 권총을 들이대도 버틴 관료, 끝내 부당한 영장 발부를 거부한 판사들이 있었다. 그런 이들이 워치독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관료집단은 권력이 재단해준 꽉 조이는 제복 내에서만 움츠리고 있다. 트럼프와 문 정권의 통치술은 거의 유전자가 일치한다. 국민 편가르기, 지지층을 겨냥한 직접적 선전 선동, 프레임을 짜서 가공의 사실 세계를 구축하는 전술 등등. 여권 핵심들의 행태에선 트럼프적 특질이 다수 발견된다. 고집은 문 대통령, 막말 거짓말은 추미애, 내로남불 후안무치는 조국, 궤변 선전선동은 유시민 김어준 등등. 이들을 다 모아 뭉뚱그려서 한 개인으로 형상화하면 트럼프의 모습이 될 듯하다. 정책 방향으로는 극과 극인 트럼프와 문 정권이 닮은꼴 DNA의 통치술을 지닌 것은 우연이 아니다. 평생 비즈니스 정글에서 먹느냐 먹히느냐 싸움을 해온 트럼프나, 투쟁으로 단련된 운동권 출신 친문들은 벨로시랩터처럼 유능하다. 수단과 목적의 도치(倒置)를 전혀 거리끼지 않으므로 변신에도 뛰어나다. 그처럼 유능한 싸움꾼 트럼프를 패퇴시킨 미 대선은 민주주의의 위대한 복원성을 입증해줬다. 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가 백사장의 유리성처럼 언제든 파도에 휩쓸릴 수 있는 취약한 상태임도 드러내줬다. 트럼프는 어제 기준으로 7230여만 표를 얻었다. 가족 결혼 종교 공동체를 중시하는 전통적 보수표를 바탕으로 깔았다 해도, 그렇게 ‘망나니짓’을 하고도 역대 미 대선 사상 두 번째로 많은 득표를 한 것은 집요한 타깃층 겨냥 정책이 먹혔음을 방증한다. 중국 수출 배제 등 트럼프의 경제 정책은 백인 노동자뿐만 아니라 국제 경쟁력이 약한 기업들에도 ‘그래도 내 이익을 지켜줄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승패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국가의 품격, 민주주의 가치보다는 당장 지지층의 갈증을 식혀주는 포퓰리즘이 얼마나 강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민주주의 가치나 정직, 원칙 보다는 당장의 일자리 증가와 일상의 안정성, 질서 유지를 중시하는 표심이 엄존함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한국의 친문들이 트럼프 패배를 보며 자성하고 선동과 편가르기 정치를 멈출지, 아니면 포퓰리즘 선동정치의 효험이 재확인됐다며 더욱 그 추세를 강화할지에 대한 답은 불문가지다. 어차피 표가 안 나올 계층을 ‘이지메’해 쌤통심리를 충족시켜 주고, 잠재적 지지층의 상대적 박탈감을 동물적 감각으로 읽어내 부추기고 영합할 정책들을 쏟아낼 것이다. 프레임 전술로 허구의 집을 지어 오직 친문의 선글라스로, 친문의 내재적 관점만으로 뉴스를 소화하도록 관영방송 친여신문 맘카페 등에서 총력 홍보전을 펼칠 것이다. 도를 넘은 흑인 시위와 약탈이 미국 보수층의 불안감을 부추긴 것 같은 효과를 노려 태극기 부대, 극우 집단의 세(勢)와 위협을 과장할 것이다. 미국 민주주의 복원을 가능케 한 열쇠는 양식 있는 중도보수 성향의 시민들이다. 보수의 상징인 존 매케인 전 상원의원 미망인의 바이든 공개 지지가 상징하듯이 상당수 지성인들이 돌아섰다. 규범과 질서를 무시하고 예측가능성을 파괴하고 품격을 팽개친, 능력있지만 변칙적인 리더 보다는 당이 달라도 원칙과 합의 예측 가능성이 있는 후보를 택한 것이다. 하지만 트럼피즘이 먹혀들 수 있었던 토양, 즉 양극화, 이민자, 중국 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들 중도보수는 다시 공화당으로 돌아설 것이다. 이번에 미국인들은 의회선거에선 공화당을 택했다. 트럼프는 싫지만 정책은 공화당을 택한 것이다. 바이든은 그런 중도보수층의 살얼음 같은 임시적 지지와 워런, 샌더스 같은 당내 사회주의 성향 강경파들 사이에서 균형 잡기를 해야 한다. 트럼프의 전횡에도 미국의 민주주의는 체크앤드밸런스 시스템이 건재해 버틸 수 있었고 복원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국은 탄핵이라는 호조건 속에서도 41.1%, 그것도 통합을 표방하기 전에는 20~30%대의 박스권에 갇혀 있던 후보가 마치 개국(開國)혁명을 이룬 듯 시스템과 가치를 마음대로 바꾸려 하는데도 입법부도 사법부도 관료사회도 아무런 견제를 못 하고 있다. 친문이 트럼프의 패배를 자성의 계기가 아니라 선동·편가르기를 더 확실하게 해야 뺏기지 않는다는 그릇된 교훈으로 학습한다면 사회 전체에 더 심한 분열과 대립을 불러올 것이다.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감탄고토(甘呑苦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게 인간의 속성이라지만, 그래도 대부분 사람들은 그럴 때 계면쩍어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정권 사람들은 부끄러움이나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 듯하다. 이 정권이 하늘 높이 치켜세웠다가 하루아침에 짓밟는 대표적 사례는 윤석열 검찰총장이다. 2017년 5월 검사장도 아니던 그를 서울중앙지검장에 발탁하고 2019년 검찰총장으로 도약시킨 직후까지, 2년여 동안 집권세력과 그 주변 나팔수들이 윤 총장에게 바쳤던 찬사를, 요즘 그들이 쏟아내는 헐뜯기와 비교해보면, 수오지심 DNA가 제거된 ‘신인류’를 보는 듯하다. 저들이 반짝 애용하다 버리는 대상은 사람만이 아니다. 가치와 도덕률도 한껏 강조하다 불편해지면 내버린다. 대표적인 사례가 ‘숙의민주주의’다. 이제는 낯선 단어처럼 들리지만 숙의민주주의는 이 정권 초기엔 문재인 대통령의 덕성으로 강조됐던 때가 있었다. “80대 어르신부터 20대 청년까지… 자신의 입장을 말하고, 타인의 입장을 경청하는 숙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지혜롭고 현명한 답을 찾아주셨습니다… 숙의민주주의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반대 의견을 배려한 보완대책까지 제시하는 통합과 상생의 정신을 보여주셨습니다….” 2017년 10월 22일 문 대통령이 직접 발표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결과 관련 입장문’이다. 정권 출범 직후 문 대통령은 대선공약인 신고리 5, 6호기 폐쇄가 반대에 부딪히자 공론화 작업에 부쳤다. 471명의 시민참여단이 3개월간 논의한 끝에 건설 재개로 결론이 났다. 문 대통령은 지지자들의 대선공약 철회 비판 가능성을 무릅쓰고 공론화위의 결론을 수용했다. 이날이 이 정부에서 숙의민주주의가 싹튼 첫날이자 마지막 날이 아닐까. 여권은 숙의민주주의를 더 이상 입에 올리지 않았고, 숙의의 정반대 방향인 독주로 치달았다. 소수 의견을 존중하고 토론을 통해 접점을 찾아가는 숙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한 진화한 형태가 아니라, 민주주의 존립에 필수불가결한 핵심 가치다. 여권은 ‘다수결 원칙’ 하나면 다 되는 듯 행동하지만, 민주주의는 소수의견 배려, 삼권분립, 권력견제라는 원칙들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더구나 다수결 제도는 민의 대변에 허점이 많아 가중다수결(qualified majority vote)이 시행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유럽의회의 경우 표준안건 의사결정은 회원국 중 55%(강화심의 안건은 77%)의 찬성과 동시에 그 55%가 27개 회원국 전체 인구의 65% 이상을 차지해야 한다. 찬성 회원국 수와 인구요건을 함께 충족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권은 그저 과반수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선거법과 공수처법을 밀어붙이더니, 이젠 그 공수처법마저 더 사용하기 편하게 바꾸려 한다. 다수결이면 뭐든지 적법하다는 발상은 민주주의의 기본 개념조차 모른 채, 오로지 혁명도구로서의 민주주의만 학습한 결과물이다. 20세기 전반기 나치즘 파시즘은 물론 우리 현대사의 독재정권들도 모두 외형상 다수결의 형식을 밟아 뜻하는 바를 관철시켰다. 더구나 다수결 정치가 민주주의의 더 근본적인 핵심 가치인 삼권분립과 법치주의를 훼손한다면 다수결 원칙의 존립 기반인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자기모순이 된다. 의석수가 많다고 사법부와 헌법기관들의 요직을 자기 사람들로 채우고, 법치주의의 근간인 검찰 독립성을 훼손하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디딤돌 자체를 무너뜨리는 행위인 것이다. 국정감사에서 자신들이 원치 않는 증인은 다 거부해버리는 것 역시 입법부의 존재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대통령은 협치를 외치지만 협치와 숙의의 대원칙이 ‘권력자 우선 양보’, 즉 힘 가진 쪽이 먼저 양보하는 것이라는 점을 진정 모르는지 의문이다. 세계역사는 설령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권이라도 다수결의 힘으로 자신들에게 불편한 것들을 개정하고 또 개정하는 행태를 반복하면 종착역은 전체주의로의 회귀임을 증명해왔다. 숙의·삼권분립·권력견제 같은 핵심 원칙이 결핍된 민주주의는 파시즘으로 흐를 수 있다. 파시즘은 이분법적 편가르기를 통치수단으로 삼는다. 공동체 내 특정 세력을 표적으로 공격해 과반 이상 국민의 ‘쌤통심리’를 충족시켜 준다. 특정 계층을 때리고 빼앗아 나머지 다수에 혜택을 나눠줘 표를 사는 정치는 소수를 배려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칙을 파괴하는 행위다. ‘집착’과 ‘표변’. 어찌 보면 배치되는 두 특질을 이 정권은 모두 갖고 있다. 남북관계 민족 분배 등에 대해선 수십 년째 낡은 세계관을 편집증에 가깝게 밀고 가지만, 인재와 가치는 수시로 편취했다가 버린다. 그렇게 표변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진영 내에서 한두 명만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인 듯하다. ‘집단적 수치심 마비’인 것이다.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어느 정권이든 뻔뻔한 이들이 있었다. 어느 정권이든 포퓰리즘적 정책도 있었다. 물론 조국 추미애 사태처럼 후안무치한 사례는 찾기 어렵고, 이 정부처럼 순식간에 재정과 공공부문을 빚더미와 적자로 급락시킨 전례도 없다. 하지만 그런 모든 실책과 잘못은 과거 정권들과 비교할 때 경중(輕重), 양적 차이의 문제였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이번에 대한민국 건국 이래 어느 정권에도 없던 차원이 다른 신기록을 세웠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호라는 국가의 기본 존재 이유 자체를 외면한 것이다. 무능과 악의는 구분돼야 한다. 물론 세월호 참사 때 박근혜 정부의 대응처럼 무능과 성의 부족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만 고의, 악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북한군의 공무원 사살 당시 정부의 부실 대응도 무능의 산물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집권세력의 대응은 그런 믿음을 자꾸 깨뜨린다. 그저 무능의 산물이었다면, 섣불리 월북으로 단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초의 시신 소각 발표를 희석시키는 셀프 물타기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명탄도 안쏘는 눈치보기 수색과는 달랐을 것이다. 그저 무능의 산물이었다면, 살해 최고책임자를 ‘계몽군주’로 칭송하는 대신 책임자 처벌과 규탄에 진정성을 담았을 것이다. 대통령은 피해자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위로하거나 답장에 최소한 친필 서명이라도 했을 것이다. 이런 모든 사실들은 이 정권의 부실 대응이 고의적인 것이라는 심증으로 기울게 한다. 남북관계 진전이라는 정권 어젠다에 집착하느라 국민 생명 보호를 후순위로 돌린 것이다. 근본적 질문이 안나올 수 없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안보는 왜 하고, 외교는 왜 하고, 남북관계 개선은 왜 하려는 건가. 다 국민이 안전하게 살게 해주기 위한 것 아닌가. 외교도 정치도 그 궁극적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이 정권은 수단과 목적을 바꿔 버렸다. 집권세력은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아주 오랜 기간 한 생각에 매몰되다 보면 차츰 집착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만나는 사람도, 접하는 정보와 의견도 같은 편끼리만 소통하니 편향된 생각은 차츰 돌덩이처럼 변형되어버리는데, 변화한 시대의 상식으로 보면 ‘광기’ 수준이 되어 있기 십상이다. “토착왜구라고 부르는 일본 유학파,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 민족반역자가 된다”고 한 작가 조정래 발언 파문을 보면서 대학시절 태백산맥에 매료돼 독파하다 들었던 아쉬움이 떠올랐다. 작품속 등장인물들이 도식적으로 정형화되어 있는 것 같다는 아쉬움이었다. 당시 윤흥길 황석영 현기영 등 많은 작가들이 6·25, 빨치산, 분단 이념비극을 다룬 역작들을 내놓았는데 그들의 작품 속 인물들이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인간 심성을 담아낸 것과 달리 태백산맥의 등장인물들은 어떤 틀에 따라 도식적으로 만들어냈다는 느낌이 강했다. 작가가 세상과 역사를 다층적 복합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나름의 비평도 해가면서 읽었는데, 이번에 발언 파문을 보면서 수십 년간 한 방향으로만 생각하면 결과가 이렇게 처참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역시 오랜 집착의 산물인 현 집권세력의 안보관은 이제 북한이 ICBM을 들고 나와도 우리를 겨냥하는 게 아니라고 치부하며, 김정은의 달콤한 수사(修辭)에만 반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 본토를 겨냥한 북한의 ICBM 핵전력은 실제 미국을 공격하는 게 목적이라기 보다는, 한반도 유사시 미국의 전면 개입을 막기 위한 도구다. 물론 북한이 실제 남한을 상대로 쉽게 전면 무력도발에 나설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하지만 미국이 북한의 ICBM 핵공격 가능성을 경계해 전면 개입에 제약을 받는 안보환경이 조성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즉 안보 균형추가 살짝이라도 흔들리는 자체만으로도 외국인투자자와 외환시장이 동요하고, 증시는 흔들릴 수 있다. 북한의 ICBM과 핵은 결국 우리 국민의 생존과 살림살이를 흔들려는 무기인 것이다. 그런 기본적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정부는 김정은 발언에만 반색하고, 한미동맹이 흔들리면 바로 경제에 악영향이 온다는 걸 알면서도 주미대사를 비롯해 여당 정치인들은 한미동맹 때리기 경쟁을 벌인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살림살이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을 일부러 조성하는 형국이다. 이런 행태가 이상과 이념에 집착해온 결과라고만 해도 용서받기 어려운데, 실제론 타락한 세속주의까지 결합됐다. 정권 재창출 욕심, 좌파권력의 떡고물을 더 누리려는 탐욕 등이 몽상으로 변한 이상주의와 화학적 결합을 한 것이다. 검찰, 경찰, 군, 관료 등 모든 물리력 행사 기관을 사냥개와 애완견으로 만드는 것도 그런 탐욕의 산물이다. 가차 없는 인사 조치를 가해 공직자들에게 대통령과 같은 색의 선글라스를 끼고 사물을 봐야만 생존할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일단 같은 색 선글라스를 끼고 나면 양심의 갈등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보와 의견을 진영 내에서만 자급자족한다. 코드언론사와 진영 내 ‘괴벨스’들이 만들어내는 뉴스와 논평만 소비하고, 문빠들이 생산해내는 댓글을 민심으로 간주하며 힘을 얻는다. 한때의 이상주의는 몽상으로 변질된 지 오래건만 스스로는 깨어있는 진보 지식인으로 착각하며 세상을 질타한다. 비극은 최순실 박근혜 코로나 같은 돌출적 사건들이 그런 편집증적 몽상가들에게 국가권력이라는 칼을 쥐여줬다는 점이다.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진영의 수장(首長)’이 되어선 안 된다고 당부해 왔다. 좌우 어느 한쪽 진영만의 리더가 아닌 ‘국민 전체의 지도자’가 되어 달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제 필자는 문 대통령에게 “제발 진보 진영의 수장이라도 되어 달라”고 촉구하고 싶다. 통합은 차치하고, 진보의 가치를 위한 선택이라도 해달라는 뜻이다. 문 대통령이 진정 진보의 미래와 가치를 염두에 뒀다면 조국 윤미향 추미애 사태에서 드러난 사이비 진보 행태, 기득권 좌파의 행태를 과감히 척결했어야 했다. 조직의 리더는 아무리 친하거나 아끼는 인물이어도 조직에 심각한 폐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쳐낸다. 꼬리를 잘라 위기를 벗어나는 도마뱀처럼 조직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정반대 길을 택해왔다. 그의 침묵은 ‘결사항전’ 메시지로 해석돼 문빠를 필두로 여당, 친여좌파언론들이 총궐기해 옹성전을 편다. 그러다 보니 ‘안중근’ 운운 같은 집단적 이성마비 상태까지 펼쳐지는 것이다. 윤미향 사태, 추미애 사태는 사실 ‘사태’가 아니라 사건으로 끝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올봄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후 윤미향을 비례대표 국회의원 당선자직에서 사퇴시켰다면 수사 속보 정도만 나오다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추 장관 아들 사건도 대통령이 초기에 ‘제기된 의혹 중 일부라도 사실이라면 이 정부 가치에 맞지 않는 것’이라는 입장을 정리했다면, 그래서 검찰이 신속히 수사해서 결론을 냈다면 이렇게 국가기관들이 망가지고, 여당 의원들이 발가벗고 춤추는 듯한 ‘집단 망언 페스티벌’로 발전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추미애, 윤미향을 자르지 않는다. 조국 때도 그랬다. 작은 조직의 팀장만 되어도 선명히 눈에 보일 해법을 왜 외면하는 걸까. 그것은 대통령이 진보 진영 전체의 관점이 아니라, 좌파 내에서도 변종으로 진화한 소수 집단의 논리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수십 년간 정치권, 시민단체, 재야단체 등에 흩어져 생존하며 공생 네트워크를 형성해 왔다. 개인적 친분은 물론이고 권력에서 파생되는 온갖 먹거리를 중심으로 비즈니스 관계로도 끈끈하게 얽혀 있다. 패거리즘에 철저한 그들은 소속 멤버 중 누군가의 추문이 터지면, 내재적 관점으로 재해석해 그들만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자신들이 야당일 때는 판단의 잣대가 정의 명분 국민정서 도덕이고, 자신들이 권력을 잡으면 판단의 잣대가 실정법으로 바뀐다. 그 결과 매번 대통령에겐 ‘실정법 위반 여부는 최종 확인되지 않았다’ ‘개혁 저항세력의 음모’식으로 입력됐을 것이다. 특히 추미애 사태에서 밀릴 경우 추 장관이 훗날 직권남용으로 처벌될 위험성을 무릅쓰고 온갖 무리수를 동원해 구축해놓은 ‘애완검(檢) 시스템’이 무너져 검찰의 권력비리 수사가 다시 봇물 터질 수 있다는 우려도 한몫했을 것이다. 대통령의 특권 세력 감싸기는 국가 시스템을 도미노처럼 망가뜨린다. 민주화 이래 군과 검찰의 독립성·중립성이 지금처럼 훼손된 적이 있었을까. 군의 정치적 독립은 군부쿠데타 위험이 사라졌다고 해서 완결된 게 아니다. 우리 사회가 어렵게 쌓아온 군의 정치적 중립은 정경두 같은 졸장들로 인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다. 저런 장관과 지휘부를 장교와 병사들이 어떻게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겠는가. 검찰 국방부에 이어 국민권익위까지 휘청대고 의원들의 궤변 릴레이까지 겹치니 쥐 한 마리 때문에 법석을 떨다 온 집안이 다 부서지는 3류 코미디 영화 장면이 연상된다. 그럼에도 궤변 경쟁은 이어질 것이다. 편가르기 정책의 결과 정치와 선거가 ‘부족전쟁’처럼 변질됐기 때문이다. 아무리 망언을 해도 자기 부족이면 무조건 찍어주고, 아무리 올바른 말을 해도 자기 부족에 해가 된다고 여겨지면 좌표를 찍는다. 상식을 가진 이들의 평판이 아니라 부족전투 때 누가 앞장섰느냐에 따라 당내 위치와 공천이 결정되니 돌격대장들이 속출하며 궤변 신기록을 경신하는 것이다. 개혁의 가치도 훼손되고 있다. 사적 목적으로 ‘개혁’을 하도 우려먹은 탓이다. 검찰의 비대한 권력은 반드시 견제가 필요한 과제인데도 조국 추미애 등이 악용하는 바람에 퇴색돼 버렸다. 공공의료개혁도 시민단체 특혜라는 사욕을 끼워넣으려다 명분과 가치를 훼손시켰다. 민주주의는 3권이 분립되고, 공공부문의 모든 종사자가 자기 직분과 양심에 따라 행동한 결과로 인해 불이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할 소지가 전혀 없는 그런 사회다. 지금 현실은 어떤가. 87년 민주화 이후 하나하나 쌓아온 민주주의 시스템이 패거리즘으로 뭉친 소수 집권세력에 의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민주주의 가치를 먹칠한 저들이야말로 진보의 적(敵)이다.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추미애 법무장관의 검찰 인사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그런데 필자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추 장관의 인사는 공정-불공정을 따져 결론 낼 1회적 문제가 아니다. 반드시 사법 심판대에 올려 위법, 위헌 여부에 대한 판단을 받아봐야 할 사안이다. 법조인들 의견을 들어봤다. 인사권을 활용해 권력견제기관을 장악하는 노하우를 가르치는 교과서가 있다면 전범(典範)으로 수록될 만한, 민주화 이후 어떤 정권도 엄두내지 못했던 수준의 ‘대담한 인사’였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처벌 가능 여부에 대해서는 합법적 인사권 행사라는 방어논리를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과, 외형상 인사권의 외피를 입었다 해도 불순한 목적, 즉 자신과 정권을 향한 수사를 방해하기 위한 의도성만 입증되면 유죄 판결이 가능하다는 의견으로 갈렸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사건의 경우 지원 대상 선정이 정부 권한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명단과 파일 등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유죄의 스모킹건이 됐다. 추 장관의 인사도 쫓아내야 할 검사 명단, 검사 성향 분석 보고서, 카톡 문자 같은 게 훗날 발견된다면 직권남용 혐의를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헌법이 보장한 표현·사상의 자유를 침해한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작태였지만 기획자들 나름대로는 문화계 좌편향을 고치겠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정권 의혹 수사팀들을 공중분해시킨 행위는 정권 핵심부의 보신이라는 철저히 사적인 이득을 목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훨씬 질이 나쁘다. 물론 추 장관의 행위를 사법 심판장에 올리는 것은 정권이 바뀌어야만 가능하다. 정권교체의 가장 큰 변수는 야권이다. 그제 의사-간호사 갈라치기에서도 드러났듯 기득권 타도 투쟁의 선봉대장, 진영(陣營)의 수장을 자임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인식과 정책수준은 앞으로도 쉽사리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차기 대선의 향배는 야당이 얼마나 업그레이드되느냐에 달렸다. 관건은 중도층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체질 변화이고, 그 핵심은 집권세력이 아무리 형편없는 짓을 해도 도저히 통합당(국민의힘)은 찍고 싶지 않다는 정서를 생성시킨 근원, 즉 낡은 우파·극우세력과의 단절에 있다. 단 전광훈목사나 옛 통합당 출신 막말 정치인들 유(類)의 인물들과 다수 시민은 구분해야 한다. 지난해 조국사태 때 광화문을 메웠던 수십만 시민 대다수는 특정 종교세력이나 극우성향 정치인과 무관했다.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하고, 과거 6월민주항쟁 대열에도 참여해 독재타도를 외치거나 박수를 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승만 박정희 시대의 성취마저 부정하는 것은 반대하며, 역사의 공과(功過)· 명암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상식을 가진,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시민들이다. 전체주의·국가주의 같은 극우적 주장을 펴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런 성향은 오히려 좌파 팬덤정치 집단 쪽에서 더 짙게 발견된다. 하지만 보수는 조직이 없다. 좌파엔 노조, 시민단체 등 무수한 활동가와 네트워크, 대중동원 물적 토대가 있지만 보수는 그저 모래알 같은 시민들이다. 그 틈을 극단적 종교세력이 파고들었고 황교안처럼 옛 관념에 젖어있는 야당 지도부는 그 손을 잡았다. 야당이 머릿속으로는 극우와 결별해야지 하면서도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문 대통령이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 문 대통령은 코로나 2차 대유행이 시작되자 책임을 전목사와 광화문집회 탓으로 몰아갔다. 그제 만난 한 자영업자는 영업중지 피해를 호소하면서 “전광훈 때문에 망하게 생겼다. 그 자한테 손해배상을 청구해야겠다”며 분개했다. 실제로 코로나 대유행이 전목사 세력과 광화문집회 때문이라고 여기는 국민이 적지 않다. 2일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 발표를 보자. 사랑제일교회 첫 확진자가 발생한 8월 12일부터 2일 현재까지 이 교회 관련 누적확진자는 총 1117명(교인 및 방문자 585명, 추가 전파 430명, 조사 중 102명)이다. 광화문집회 관련 누적확진자는 총 441명(집회 참석 179명, 추가 전파 189명, 경찰 8명, 조사 중 65명)이다. 지난달 12일부터 2일까지 전국 누적확진자는 5789명이다. 따라서 사랑제일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19%이며, 광화문집회를 합쳐도 26%다. 즉 2차 대유행 확진자 중 4분의 3 가량은 이 교회나 집회와 무관하게 발생했다. 정 본부장은 8월에 코로나 유행이 커진 이유에 대해 “5월부터 무증상 경증 환자들이 누적되는 지역감염이 계속 있었으며, 방학과 여름휴가를 통해 인구이동이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여러 모임이나 여행을 통해서 감염자들이 많이 섞이게 돼서 그것으로 인한 유행이 있었고, 또 사랑제일교회와 서울도심집회라는 증폭되는 위험요인이 가중됐다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전 목사와 추종자들의 무책임하고 비이성적인 행태는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책임의 상당 몫이 자신들에게 있으면서도 모든 책임을 한쪽으로 다 덮어씌우려는 집권세력의 책임몰이 역시 정당하지 못하다. 그런데 정권의 그 같은 행태가 결과적으로 야당에 극단적 세력과의 절연을 강요하는 선물을 안긴 셈이 됐다. 이런 일 없이 세월이 흘러 대선을 맞았다면 야당은 언제 터져 나올지 모를 극우세력발 망동에 발목이 잡혔을 것이다. 당장은 좌파와 ‘낡고 상스런 막말보수’ 양측에서 공격받는 신세가 됐지만, 길게 보고 명확히 선을 긋고 절연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통진당 해산은 결과적으로 민주당이 스스로는 걸러내지 못했던 래디컬한 근본주의 세력과 거리를 두고, 종북 과격 이미지를 벗는 데 도움이 됐다. 정권의 극단세력 집중 공격은 단기적으로는 이념 스펙트럼상 그 옆자리에 있는 제도권 정당을 움츠리게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극단세력과 절연하고 중도층에게서 신뢰를 얻는 토양을 만들어준다. 문 정권의 코로나 책임 전가는 역설적으로 야당의 경쟁력을 키워주는 결과가 될 것이다. 영구집권을 외치며 오만의 극단을 달리고 있는 이 정권 인사들이 그 오만의 부메랑을 맞게 될 날을 재촉한 제 무덤 파기였다고 훗날 역사가 기록할 것이다.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김원웅’이라는 이름을 칼럼에서 언급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논평의 소재를 선택하는 나름의 기준이 있는데, 이념적으로 양극단에 있는 이들의 주장은 논평 대상으로 삼을 가치도 없다고 본다. 피겨스케이팅에서 채점위원들의 점수를 종합할 때 최고점과 최하점은 제외하듯이, 양극단은 가급적 공론의 장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는 게 나름의 기준이었다. 게다가 김원웅 광복회장이 최근 쏟아낸 발언의 논리적 깊이도 1980년대 대학 이념동아리에 갓 발을 디뎌 좌파서적 몇 권과 팸플릿 몇 장 읽은 신입생의 3월말 인식 같은 표피적인 수준이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그런 수준의 발언이 여전히 여론의 장에서 횡행할 수 있는 우리사회의 역사·지식 풍토, 그런 인식을 지닌 인사가 광복회장을 차지한 현실이 의미하는 문제점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김원웅 파문은 권력 주변 좌파들의 3대 DNA가 결코 변하지 않는 것임을 상기시켜줬다. 그 DNA는 바로 ①편협한 역사관 ②위선 ③재집권욕이다. 우리 사회에서 역사통합이 어려운 이유는 일제 침략자들이 쫓겨 간 뒤 바로 이념대립과 분단이 이어진 탓이 크다. 반민특위가 사실상 와해돼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못한 결과 반세기도 더 지난 뒤에 특정 이념세력이 자기들 잣대로 단죄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다 보니 일제강점기 당시는 물론 광복 직후에도 동시대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던 민족지도자들이 정작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않은 후대인들에 의해 친일파로 몰리는 왜곡이 빚어진다. 1948년 출범한 반민특위가 조사대상으로 삼은 친일 혐의자는 682명이었고 그중 221명이 기소됐는데 노덕술처럼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는 물론 최남선 이광수 등도 다 포함됐다. 하지만 그 후 방해공작으로 처벌이 흐지부지됐는데 만약 방해공작 없이 682건이 모두 엄중히 처리됐다면 수십 년 후 좌파가 ‘친일파 프레임’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른바 좌파 연구자들은 수십년이 지난 뒤 우파 진영 민족지도자들을 친일파로 몰아 부관참시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은 정작 반민특위에선 조사대상으로 오르지도 않았던 인물들이다. 좌파사학자들은 프랑스 드골이 나치 부역자들을 처단한 것을 교본으로 비교한다. 하지만 나치의 프랑스 점령은 2~4년이었다. 35년의 일제강점기와 단순 비교하는 건 무리다. 분단과 6·25전쟁이 없었다면 우리도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가 했듯 진실을 밝히고 국민통합이라는 큰 가치 안에서 화해하고 용서하는 그런 청산과정을 밟았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이 없다보니 편향된 몇몇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색깔로 역사를 재단하고, 독립운동가를 대표하는 단체의 수장이 이념단체 팸플릿 수준의 주장을 광복75주년 기념사로 내놓아도 여당 고위급 인사들이 한마디도 문제제기를 못하는, ‘억지와 무식이 성역화된 진실’처럼 군림하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물론 김원웅류의 역사관은 낯설지 않다. 조국을 비롯해 친문들이 수없이 주창해온 바다. 우리 현대사가 친일파와 독립투사로 양분되며, 대한민국은 미제의 사주를 받은 친일 분단세력이 주축이고 북한은 민족해방투쟁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그런 단선적이고 선명한 세계관은 오랫동안 집권세력 저변에 흐른 DNA다. 그런 외눈박이 사고(思考)는 특히 리영희의 사상 세례를 받은 세대에서 두드러지는데, 문제는 통일장관 국회외통위원장 등 외교안보를 다루는 인사들의 발언 속에도 그런 세계관이 묻어난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김원웅이나 조국은 냉전시대가 빚은 정신세계의 화석(化石)이며, 여전히 머릿속이 그 시절로 유예돼 있는 ‘이념의 갈라파고스’가 지금 이 나라의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좋은 사례다. 김원웅이 확인시켜 준 또하나의 DNA는 위선과 뻔뻔함이다. 1944년생인 김원웅은 1972년 공화당 당료가 됐고 1980년 민정당 창당부터 1990년 3당 합당 때까지 민정당 간부를 지냈다. 5공 참여 등이 생계형이었다는 그의 주장은 조국 일가의 입시 부정 의혹이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시스템에서 비롯됐다는 최근 ‘조국백서’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그런 주장을 펴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후안무치는 그들의 고질적 특질이다. 또 하나 여실히 확인되는 DNA는 편집증 수준의 재집권 욕구다. 집권세력이 재집권을 목표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언제든 권력을 내놓을 수 있다는, 언제든 야당을 해도 된다는, 상대 당이 집권해도 민주주의는 정상 작동된다는 생각을 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집권 초 꺼냈던 20년 집권론, 영구집권론이 어느새 재정 조세 복지 등 모든 정책분야에서 유일무이의 정책목표가 되어버린 듯하다. 국부(國富)를 늘리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안보를 튼튼히 하고 그렇게 잘한 결과물로 재집권할 생각을 해야 하는데, 나라 곳간을 거덜 내고, 가진 자와 덜 가진 자로 편 가르기 하고 그 갈등에서 나오는 이익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정치 행태가 노골화된다. 검찰의 독립성을 서슴없이 무너뜨리는 것도 권력을 잃으면 끝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재집권에 매달리는 것은 공화제와 민주주의 참여 세력으로서의 자격상실이다. 자신의 것만이 진실이고 나머지는 뒤집어버리는, 역사를 편의적 정치도구로 동원하고, 자신들의 위선에는 부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그런 DNA가 친문세력에게서 사라지기를 기대하기는 난망인 것 같다.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2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85년~95년 판사로 재직했다. 70년대 후반 한양대에 입학해 81년 졸업했다. 80년대 초반은 대학에 사복경찰(백골단)이 상주하며 곤봉으로 학생들을 구타하고 여학생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을 숱하게 목격하던 시절이다. 그런 엄혹한 현실을 외면한 채 법전에 파묻혀 대학 시절을 보냈다 해도, 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가 공기만큼이나 소중하고 절실한 것임을 체화했을 것이다. 집시법, 보안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해 구속하고, 자동판매기처럼 유죄를 때리는 검·판사들을 보며 사법권 독립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추 장관이 1995년 김대중 총재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해 1996년 초선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법무장관의 수사지휘권을 폐지하는 법안에 참여한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2002년 검사인사권을 검찰총장에게 주는 법안에 공동발의자로 참여한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2020년의 추미애는 정반대에 서 있다. 정반대 정도가 아니라 과거 자신이 ‘검찰개혁 입법’을 통해 없애려 했던 장관의 수사지휘권과 검사인사권을 역대 최고치로 휘두르고 있다. 그런 모순된 행태를 따지는 야당 의원에겐 “(1996년) 그때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검사 출신 법무장관이 관례적으로 지휘를 했고 검찰총장이 말없이 따랐던 때”라고 반박한다. 1996년은 김영삼 정부 4년 차다. 당시 정치부, 사회부에 근무했던 필자의 기억에 검찰은 정치적 처신으로 인해 줄곧 비판의 도마에 올랐지만, 적어도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관계는 추 장관 주장처럼 그런 일방적 상하관계가 아니었다. 전직 검찰총장들은 언론인터뷰에서 장관과 총장은 서로 말 한마디도 절제할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를 이어왔다고 전한다. “장관이 총장을 겨냥해 ‘말 안 듣는다’며 부하처럼 여기는 모습은 상상도 못 한 일”이라는게 법조계 원로들의 주장이다. 검찰개혁은 비대한 권한의 축소와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 확보라는 두 기둥으로 이뤄진다. 추 장관의 행태는 정권의 대리인인 장관과 검찰의 관계를 독재 시절로 되돌리는 ‘반(反)개혁’이다. 추 장관이 국회에서 보인 태도에 대해 국회를 무시해서 그런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지만 필자는 성품과 사고(思考)구조의 문제라고 본다. 추 장관은 김대중 정부 시절 술자리에서 한 기자를 향해 “사주(社主)의 지시로 글을 썼느냐. 사주 같은 놈”이라 폭언했다. 그 기자는 사주의 지시는커녕 얼굴을 본 적도 없었을 사람이다.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비판적인 이야기는 견해의 차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떤 불순한 의도나 공작에 의한 것이라고 낙인찍는 것은 좌파 정치인들의 고질적 습성이다. 불순한 동기가 개입된 비판이라고 치부해버리면 혹시라도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까하고 깊이 돌아볼 필요가 없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될 때의 불편한 심리상태를 본능적으로 회피하는 것이다. 휴가에 직원들이 자신을 수행케 한 게 문제가 되자 “언론의 여성 장관에 대한 관음증 중독이 심각하다”고 반박하고, 최강욱에의 문자 유출 의혹과 관련해 야당 의원이 ‘수명자’라는 단어를 문제 삼자 “여자인 장관은 ‘수명자’라는 용어를 쓰면 안 되느냐”며 난데없이 성별을 끌어들인다. 자신을 향한 문제 제기에 논리적으로 대응하는 대신 사주의 지시, 음란한 관음증, 여성 차별의식의 발로쯤으로 낙인찍어야 스스로 마음이 편한 것이다. 대개 핏대 정치인은 정치적 욕심이나 계산은 별로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추 장관은 이런 점에서도 다른 것 같다. 그는 21일 국회에서 휴대전화로 윤석열 총장의 부인과 장모 의혹 관련 문건을 보고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노출됐다. 부주의로 들켰든, 일부러 노출했든 철저히 진실을 규명해야 할 사안이다. 설령 그 문건이 추 장관 주장대로 언론보도 종합 문건에 불과하다 해도 검찰총장의 가족에 대한 내용을, 그것도 이미 수 개월전에 논란이 된 일을 누가 일부러 종합해 장관에게 전달했는지, 법무부가 만든 게 아니라면 장관이 누구와 그런 자료를 돌려보는지 규명되어야 한다. 만약 비공개 내용을 담은 보고서라면 이는 사찰 문건이다. 검찰총장을 공격하기 위해 누군가 그런 보고서를 만들었다면 정권이 흔들릴 사안이다. 중인환시리에 국회에서 그런 자료를 들여다보면서 그 민감성을 몰랐을까.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객관화시켜 보는 능력이 보통 사람들과는 현저히 다른 이들이 간혹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국 전 장관이다. 특히 장관에서 경질된지 22분 만에 서울대에 보낸 복직 신청 팩스가 보여주듯 이런 이들의 행동은 조금은 다른 분석틀을 동원해야 설명이 된다. 추 장관은 언론에 노출될 때 얻게 될 정치적 효과만 염두에 뒀을 수 있다. 즉, ‘문빠’들을 향해 그들의 ‘철전지원수’의 가족비리 자료를 보는 자신을 부각시켜 ‘윤석열의 대척점’으로서 입지를 강화하려 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여권의 친문 후보 자리는 아직 무주공산이다. 독재 시절 장관들은 최고 권력자의 점수를 따기 위해 그 어떤 무리수라도 뒀다.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지금은 권력자가 대통령 한 사람 만이 아니라 친문이라는 팬덤 집단으로 확장돼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또 하나 차이가 있다면 독재 시절 장관들은 그래도 국민들에게 부끄러워도 하고 면목 없어도 했다는 점이다.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