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이정은 부국장

동아일보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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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안보 현장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영향을 미치는 글로벌 정책의 흐름을 정확하고 빠르게 따라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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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5-11-06~2025-12-06
칼럼94%
선거3%
미국/북미3%
  • [오늘과 내일/이정은]당신도 받게 될지 모를 ‘위법한 지시’

    ‘불법적 명령은 거부해야 한다(You must refuse illegal orders).’ 당연한 말처럼 들리는 이 한 문장 때문에 요즘 미국 정치권은 시끄럽다. 마크 켈리 상원의원을 비롯한 민주당 의원 6명이 이 메시지를 담아 내놓은 1분 30초짜리 동영상이 발단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사형시켜 마땅한 반역자들”이라며 격노하고, 미 국방부와 연방수사국(FBI)이 의원들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면서 정쟁으로 비화했다.美에서도 불거진 ‘불법 명령’ 복종 논란 동영상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이 ‘위법한 명령’인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치안을 이유로 야당 강세 지역에 주방위군을 투입하고, 베네수엘라 마약 카르텔을 척결한다며 카리브해로 해군을 투입한 것을 겨냥했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군대를 정치적 압박 및 타국 정치에 개입하는 수단으로 쓰는 게 위법하니 군이 이를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 야당 의원들의 메시지는 1년 전 계엄의 밤을 지나던 한국에 더없이 공명했을 메시지다. 당시 군인들은 거리를 배회하거나 편의점에 머물며 사실상 작전 이행을 거부했다. 자칫 항명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건만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의 수도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뜬금없는 계엄 상황에서 상식적 판단이 작동한 사실상의 불복종이었다. 다만 국회 문을 부수고 정치인을 잡아들이라는 것처럼, 누구라도 잘못됐다고 느낄 명백한 불법, 혹은 위법성이 늘 곧바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법의 경계선을 오가며 해석 논란을 빚는 회색지대의 지시들은 판단이 쉽지 않다. 부당하다고 느끼지만 당장 이를 증명할 근거도 법적 지식도 부족한데 시간까지 다투는 상황이라면 현장 실무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워싱턴 내 갑론을박 속에서도 미군은 서슬 시퍼런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다. FBI와 펜타곤이 야당 정치인 박해로 볼 수 있는 민주당 의원 조사를 진행 중인 것도 이런 현실적 한계를 보여주는 방증일 것이다. ‘위법한 지시’의 문제는 군뿐만 아니라 공직사회, 더 나아가 민간 영역까지 상하 위계가 있는 어느 조직에서나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문제다. 불법으로 보이는 경우조차 이를 뒷받침하는 상황적 논리, 정책적 배경,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 경우가 부지기수다. 공무원들만 해도 성과로 평가받던 주요 정책이 정권이 바뀌면서 순식간에 처벌 대상이 되는 사례들을 수차례 목격했다. 4대강 사업, 문화계 블랙리스트, 탈북자 강제 북송, 탈원전 정책 등 주요 국가 프로젝트에 관여했던 각 부처 공무원들이 줄줄이 수사받거나 인사 불이익을 당했다. 정부가 국가공무원법에서 ‘복종의 의무’를 삭제키로 한 것은 그 취지가 옳을지라도 결과적으로 실무자들에게 판단 책임을 맡겨버리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남는다. 앞으로는 “윗선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하소연조차 할 수 없게 된다. 공무원들의 계엄 가담 여부를 조사하는 ‘헌법존중 정부혁신 TF’ 활동이 공직사회에 미칠 후폭풍도 간단치 않을 것이다. 공무원들은 벌써부터 ‘모든 지시를 메모하고 문서로 남기고 녹음하라’고 서로를 상기시키며 납작 엎드려 있다고 한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 복지부동(伏地不動)으로 이어지는 분위기가 퍼지게 되면 어떤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겠나.윗선 책임 회피로 억울한 징계 없어야 실무자가 과도한 징계를 받지 않도록 하려면 결정권자가 불법 지시를 내리는 일부터 없어야 한다. 이런 이상적인 상황을 기대할 수 없다면 최소한 문제가 드러났을 때 제대로 책임이라도 져야 한다. 비상계엄 1년이 지나도록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전직 대통령의 재판 장면은 그래서 더 민망하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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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정은]美 ‘비확산 문지기’들과의 싸움은 길다

    문재인 정부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원잠) 연료 요청을 미국이 거절했다는 것을 2020년 처음으로 동아일보에 확인해 준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 인사는 말투도 표정도 싸늘했다. “미국은 그 어떤 나라에도 핵잠수함 연료를 판매하거나 넘기지 않는다”는 훈계조의 설명에는 재고의 여지가 없다는 단호함이 깔려 있었다. 그랬던 미국이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호주에 원잠을 지원한다는 발표를 했을 때 한국 기자로서 느꼈던 배신감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같은 동맹인데 다른 결정이 나온 이유가 뭔가. 당시 워싱턴의 몇 인사가 내놨던 설명은 “같은 인종으로 서구 문화와 가치를 수백 년간 공유해 온 호주와는 상호 신뢰의 강도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예외는 앞으로 없을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원잠 확보, 일사천리 진행 기대는 성급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서 한국의 원잠 승인을 받아낸 것은 놀라운 변화다. 역내 안보 구도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미국도 기존 원칙을 마냥 고수하긴 어려웠겠지만, 행정 관료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겨온 핵 비확산의 원칙을 다시 깬 것은 트럼프라는 지도자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다만 그의 말 한마디로 한국의 오랜 숙원이 일사천리로 풀릴 것이라는 기대는 성급하다. 공동 설명자료(joint factsheet) 발표가 차일피일 미뤄지는 것부터가 심상찮다. “원잠 관련한 협의 과정에 이견이 있다”는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에 비춰 볼 때 내부 비확산론자들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핵 문제만큼은 국무부 비확산국과 에너지부 산하 핵안보국 등 여러 부처가 겹겹이 통제의 장벽을 쌓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비확산 마피아’ 혹은 ‘핵 문지기’로 불리는 행정부 인사들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하고 질기다. 이들은 동북아에서 한국, 일본, 대만 등으로의 핵 도미노 현상을 막아야 한다는 인식이 확고하다. 팩트시트보다 구속력이 높은 정상들의 공동성명으로 미국의 원잠 지원을 못 박았던 호주조차 쉽지 않았다. 오커스(AUKUS) 정상들의 호기로운 발표 후 미국이 관련 내용을 담은 국방수권법을 통과시키기까지 걸린 시간은 2년 3개월. 핵물질이나 기술을 군사적 목적으로 제3국에 이전할 수 없도록 한 미국 원자력법의 예외 조항을 만드는 것부터 난항이었고, 그 과정에서 수차례의 보안 검토가 반복적으로 이뤄졌다. 호주 내에서는 “동맹을 못 믿는 것이냐”는 불만과 우려의 목소리도 커졌다. 동맹을 강화시켜야 할 잠수함 협력이 동맹을 흔드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난항 지속됐던 호주 전례 재연될 수도 이런 과정을 앞서 겪은 호주가 간신히 핵 비확산의 금기를 풀었다고 해서 다음 차례인 우리가 더 쉬워진다는 보장은 없다. 비슷한 과정을 밟아 나가는 과정에 어떤 국내외적 변수가 돌출할지 알 수 없다. 트럼프 행정부는 전임 바이든 행정부에서 이뤄진 결정이라는 이유로 오커스 동맹에 대한 재검토를 진행하기도 했다. 정권 교체에 따라 국가급 프로젝트가 뒤집힐 가능성이 있음을 환기케 한 조치였다. 정부는 이런 전례를 살펴가며 워싱턴 여론전부터 미국 의회 설득까지 단계별 길목을 잘 뚫어야 한다. 상·하원 외교, 군사위원회를 상대로 집중 로비에 나선 호주의 고위 당국자들이 막판에 워싱턴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밀어붙였던 시도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원잠은 최종적으로 손에 넣기까지 10년을 각오해야 하는 장기 프로젝트이지만, 천천히 갈 여유는 없다. 팩트시트 발표는 시작이다. 원잠 프로젝트가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밀어 올리는 게 더 큰 숙제다. 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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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정은]낯선 해외에서 대사관만 믿었다간

    마약과 납치, 강도 사건이 빈발한다는 남미의 한 저개발국으로 출장을 간 적이 있다.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고 40시간 가까이 가야 하는 이국땅에서 갱단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갈 수 있다는 불안함이 올라왔다. 출발 전, 알고 지내던 외교관에게 “혹시라도 내가 실종되면 찾아서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농담 섞인 인사였지만 비빌 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든든했다.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20대 한국 청년의 사망 사건과 이후 쏟아진 현지 증언들은 당시의 믿음에 새삼 의문을 갖게 만든다. 범죄 단지에서 간신히 탈출해 찾아간 한국대사관 앞에서 “업무시간이 종료됐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사례들이 잇달아 나왔다. 대한민국 주권이 미치는 영역으로의 진입을 코앞에서 거부당한 이들은 언제 다시 범죄조직에 붙잡혀 보복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막막함에 떨었을 것이다. 가족의 납치 피해 호소에 “본인 신고가 원칙”이라고 안내했다거나 자력 탈출을 권고했다는 부분에 이르면 말문이 막힌다.실패한 보호, 뒤늦은 조치 정부는 부랴부랴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국가안보실장이 직접 브리핑에 나서고, 외교부 2차관이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과 함께 현지에 급파됐다. 외교부 장관은 동남아 국가의 공관장들을 모아 화상회의를 열었고, 대응 방안 브리핑도 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고문의 극심한 통증’이 유발한 심장마비로 한국인이 사망한 지 석 달이 지나서야 나왔다. 한국인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는 지적이 지난해부터 나왔지만 적극적으로 대처했다고 할 만한 조치는 없었다. 해외에서 범죄에 연루되거나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어리석은 선택을 피하며 스스로를 지킬 1차적 책임은 물론 본인에게 있다. 그러나 관광지나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는 여권과 돈을 뺏기면 그대로 무방비 상태로 위험에 노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억울한 누명을 썼는데 신뢰할 사법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곳들도 있다. 막다른 곳에서 기댈 곳은 나를 지켜줄 나라뿐이다. 헌법에도 규정돼 있는 ‘재외국민 보호’ 의무를 지키지 못하는 국가는 존재의 뿌리부터 흔들린다. 동남아나 남미 국가의 공관 중에는 상주 인력이 5인 안팎에 그치는 곳이 상당수인 게 현실이긴 하다. 소수 외교관들이 영사와 정무, 경제 등을 모두 맡아 북 치고 장구 치는 식으로 일한다. 그렇다고 업무를 소홀히 다룬 안일함에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대사관 기강을 다잡으며 대응을 진두지휘할 캄보디아 대사는 막상 몇 달째 공석이다. 전임 정부에서 임명됐다는 이유로 30여 명의 해외 공관장이 일괄 귀임 조치된 뒤 후임 인선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탓이다.험지 특성 반영해 공관 인력 채워야 대사관에 투입되는 직군별 인력이 현지 특성에 맞게 효율적으로 배분돼 있는지도 의문이다. 살인, 납치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중범죄가 빈발하는 나라에서는 구금시설 정기면회 같은 영사 담당자의 사후 조력만으로는 자국민 보호에 한계가 있다. 현지 수사당국과 수시로 교류하며 급박한 상황 발생 시 실시간으로 대응할 경찰 인력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쿼터에 묶인 인력과 예산 문제를 마냥 외면할 때가 아니다. 5월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나 7월 미국 의회 보고서가 지적했듯이 동남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취업사기, 인신매매 등 범죄는 처벌이 약한 국가로 이동하며 기승을 부리고 있다. 자발적인 범죄 가담자도 있겠지만, 이들에게 속아 넘어간 피해자들도 그만큼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금도 이국땅 어디선가 탈출을 시도하는 한국 청년들이 있을지 모른다. 이번 사태의 진화에 부심하는 정부의 총력전이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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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정은]‘페이스메이커’ 이재명 정부의 속도 위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과거 3차례의 회담을 전후해 주고받았던 27통의 친서들은 다시 봐도 손발이 오글거린다. 화려한 아첨의 수사(修辭)로 가득한 김 위원장의 편지 중에는 간혹 정색하고 속내를 드러낸 부분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노골적 통미봉남 의도를 드러낸 2018년 9월 21일자 편지다. “문재인 대통령이 우리 문제에 대해 표출하고 있는 과도한 관심은 불필요하다”며 트럼프 대통령과 둘이서만 핵 문제를 논의하고 싶다고 쓴 대목이다. 남북 관계가 급진전되던 시기에조차 한국을 따돌리고 미국과 직거래하려는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트럼프 2기에서 김정은을 상대하게 된 이재명 대통령이라고 상황은 다르지 않다. ‘적대적 두 국가’를 부르짖으며 남한은 이제 쳐다보지도 않겠다는 김정은의 무시와 냉대는 앞으로 갈수록 더할 것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이재명 정부의 외교안보팀은 한국 대통령의 역할을 ‘페이스메이커’로 규정했다. 대북 영향력이 큰 트럼프가 주도권을 쥐게 하되 함께 호흡을 맞추며 이를 백업하겠다는 것이다. 북-미 관계 레이스의 출발선에 선 트럼프 대통령은 아직 본격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김정은과 대화할 의향은 밝혔지만 지금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세 협상 등에 정신이 더 쏠린 상태다.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트럼프와 김정은이 깜짝 만남을 가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양쪽 모두에서 구체적인 신호는 포착되지 않고 있다.대북정책 성과부터 내자는 조급함 막상 이재명 정부의 대북정책에서는 벌써부터 조급함이 감지된다. 보수 정부가 막고 있던 대북 유화책을 시작부터 줄줄이 풀어낼 태세다. 대북 전단 금지와 대북 확성기 중단은 접경지역에 거주하는 우리 주민들의 피해도 있으니 그렇다 치자. 여권 인사들은 9·19 남북 군사합의를 연내 복원하겠다고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DMZ 일대 우리 군의 정찰, 감시 활동과 실사격 훈련을 막아 대북 대비 태세를 약화시킨다는 우려를 낳았던 문제의 합의를 아무 조건 없이 되살리겠다고 한다. 군사 분야 권한도 없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사격 훈련과 실기동 훈련 중단 필요성을 공개 석상에서 대놓고 언급했다. 이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발표한 ‘END 이니셔티브’는 비핵화 로드맵에서 단계별 협상카드로 써 온 북한과의 교류(Exchange)와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를 비빔밥처럼 한데 섞어 버렸다. 뉴욕의 투자자들을 만나서는 대북 제재 일부를 먼저 완화할 수 있다는 뜻도 밝혔다. 물 건너간 듯 보이는 비핵화(Denuclearization)는 모르겠고, 눈에 보이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 성과부터 내고 보자는 식이다.벌써부터 외교안보 라인 흔들어서야 자주파 원로들은 심지어 이런 움직임조차 너무 느리다고 채근하는 중이다. 이종석 국가정보원장 등과 함께 ‘자주파 6인회’ 멤버라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이 대통령 주변에 동맹파가 너무 많다”며 외교안보 라인의 ‘측근 개혁’을 요구했다. 이제 갓 100일이 넘은 정부의 국가안보실 핵심 당국자들이 본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흔들어대는 저의가 뭔가.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야말로 이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끝장낼지 모를 일이다. 마라톤에서 페이스메이커의 핵심은 속도 조절이다. 목표 기록에 맞는 일정한 흐름을 유지해 주는 것이 그의 일이다. 초반부터 너무 빨리 달리는 것은 선수의 체력 소모를 부추기고 경기 흐름을 망칠 수 있어 위험하다. 북한 비핵화 같은 장기 레이스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가뜩이나 예측 불가능한 트럼프 대통령이 어느 순간 급발진을 할지 모를 상황에서 한국이 그보다 먼저 튀어 나가 내달려서는 안 될 일이다. 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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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정은]케이블 타이에 묶인 韓美 관계

    미국 조지아주에서 벌어진 이민 당국의 한국인 300여 명 체포 장면은 태평양 건너 이를 지켜본 이들을 경악하게 했다. 현지에 공장을 짓겠다며 땀 흘리던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공장 근로자들이 케이블 타이나 쇠사슬에 묶인 채 끌려가고 있었다. 미 국토안보수사국은 이 동영상을 보란 듯이 공개했는데, 집단 중범죄자나 된 것 같은 왜곡된 이미지를 덧씌워 한국에 대한 신뢰 하락을 부를 수 있는 장면들이다. 양국 경제협력이 본격화된 이후 미 당국이 한국을 이렇게까지 거칠고 무도하게 다룬 적은 없었다. 조지아를 비롯해 불법 이민자 단속의 타깃이 된 주(州)에서는 이미 수차례 논란이 된 사례들이 속출했다. 시민권자로 미군 복무 경력도 있는 한 히스패닉계 남성은 운전하던 차량이 신호등에 걸린 틈에 유리창을 깨고 들어온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들에게 붙잡혔다. 막무가내로 끌려가 구금됐다가 사흘 만에 풀려날 때까지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SNS를 통해 공유되는 영상들에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특수작전하듯 달려드는 무장요원들의 검거 현장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제2의 美조지아주 사태’ 벌어질 수도 미국판 ‘충격과 공포’ 작전의 강도가 이 정도이니 아무리 동맹국이라지만 외국인들의 항의는 씨알도 안 먹히는 분위기일 수밖에 없다. 관광비자로 들어온 독일인, 배낭여행을 끝내고 출국하려던 영국인도 예외 없었다. 150명 가까이 붙잡힌 캐나다인 중에는 4세 미만 유아 2명도 포함됐는데, 이 중 한 아이는 7주 넘게 구금됐다. “파시즘” “인종주의” 같은 비판이 불붙는데도 트럼프 행정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다. ICE의 작전을 지원하라며 주요 도시에 주방위군까지 투입했다. 마가(MAGA)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늘어난 단속 할당량을 채우려는 조급함도 엿보인다. 조지아주 한국 공장 검거는 굳이 보여주기식 성과를 낼 필요가 없었다면 비자 문제에 대해 행정지도를 먼저 하거나 경고 절차를 거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미국은 그러는 대신 일망타진 식으로 공장을 급습하곤 단일 사업장에서 진행된 가장 큰 검거 사례라고 홍보했다. 하원의원에 출마했다는 공화당 정치 지망생 제보자는 “내가 신고했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이런 정치적 계산이 자국 내의 혼란 유발을 넘어 동맹과의 외교관계까지 흔드는 대외 리스크로 번지는 것은 우려스럽다. 구호와 선동이 앞서는 국내 정책이 대외적으로 미칠 파장에 대해 세련된 외교적 대응도 매끄러운 조율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이는 것도 문제다. 트럼프 행정부를 견제할 민주당은 지난해 대선 패배 이후 잔뜩 움츠러든 채 힘을 못 쓰는 형국이다.美 국내 정치 파장까지 보는 외교 필요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마가 정책’들은 대외적으로 한국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상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 경제 협력과 인적 교류, 과학기술 협력 등 전방위적으로 언제든 ‘제2의 조지아주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한국 측의 항의에 미국이 뒤늦게 협의에 나선다 해도 피해는 되돌리기 어렵다. 한국의 민감국가 지정 문제만 봐도 그렇다. 국무부와의 조율 없이 에너지부가 내린 조치로, 곧 풀릴 것이라던 올해 초 설명과 달리 아직도 아무런 진전이 없다. 미국 내부 상황과 이에 따라가는 국내 정책들을 살피는 것까지 외교의 영역이 되어가고 있다. 지지자 결집이라는 정치적 수요가 커질 내년 11월 중간선거까지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를 면밀히 들여다보며 유사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뒤통수를 세게 맞았다는 국민적 분노가 과격한 반미 여론으로 치닫지 않도록 관리하는 동시에 필요시 정부가 미국에 단호하게 맞대응하는 결기도 보여야 할 것이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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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정은]병력 확충, 젠더 갈등 지뢰 피하려면

    2030세대의 젠더 갈등이 불거질 때 빠지지 않는 것이 군대다. 각종 성평등 문제가 제기될 때면 남성 커뮤니티에는 여성의 군 복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동시에 커진다. 저출산이 심화하는 요즘엔 “여자들은 애도 안 낳으면서…” 같은 힐난이 여혐(女嫌)의 논거로 추가되고 있다. 힘들지만 피할 수 없는 책임으로 여겨졌던 ‘여자=출산, 남자=군 복무’의 이분법적 공식이 무너졌다고 느끼는 젊은 남성들의 불만이 팽배해진 탓이다. 출산율 감소로 한국 국군의 병력은 45만 명 수준까지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6년 동안 20%가 줄면서 사단급 이상 부대 17곳이 해체 혹은 통합됐다고 한다. 군 병력 50만 명 선이 무너진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다. 당초 예측된 시기는 인구절벽 문제가 심화하는 2035년쯤이었다. 군대 갈 젊은 남성들이 계속 줄면 최전방의 철책선을 지킬 군인이 부족해 안보 공백이 생기는 상황을 피할 수 없다. 이를 막기 위해 5060 시니어 남성들의 재입대를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을 국회 국방위원장이 내놨을 정도다.예상보다 빠른 ‘軍 병력 50만 명’ 붕괴 막상 동맹인 미국은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의 역할과 규모를 축소하려는 시도를 본격화할 태세다. 주한미군은 중국 견제에 집중할 테니 북한의 위협엔 한국이 독자적으로 대응하라는 것이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한미 정상회담에서 관련 의제가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에 따라 한국이 독자적인 국방력 강화 방안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더 커지게 될 것이다. ‘우리 땅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명제 앞에 적정한 군 병력을 유지하고 그 역량을 키워가는 일은 중요한 숙제일 수밖에 없다. 부족한 병력을 보충할 대안으로 거론되는 여성의 군 복무가 새삼스러운 논쟁거리는 아니다. 선거 때면 대놓고 여성 징병제를 거론하지는 않아도 ‘여성도 특정 기간 군대 훈련을 받도록 하자’는 식의 제한적 공약을 내놓은 정치인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병력 구조 개편과 관련됐다고는 하지만 남성 표를 의식한 ‘젠더 갈라치기’ 선거 전략이 아니냐는 비판도 거셌다. 앞으로 총선이 3년, 대선은 5년 가까이 남은 지금은 잠잠하지만 이 문제는 또 언제 불거질지 모르는 젠더 갈등의 뇌관이기도 하다. 여성의 군 복무 관련 논의를 마냥 금기시할 건 아니라고 본다. 유럽에선 덴마크가 지난달부터 여성 징병제 실시에 들어갔다. 만 18세 이상의 여성들은 모두 남성과 마찬가지로 징집 대상자로 등록한 뒤 필요한 병력만큼 추첨으로 징병돼 11개월간 복무하는 방식이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그보다도 앞서 여성 징병제를 도입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후 전쟁의 장기화로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결과다.국방 개혁 속 女 기여 높일 단계적 접근 다만 우리와는 병력 규모나 운용 환경이 다른 일부 국가의 움직임이 한국에서 ‘여자도 군대 가야 한다’는 결론으로 직결되는 건 아니다. 여성들의 반발은 둘째 치고 실제 이행 과정에서 전례 없는 혼란과 문제들이 쏟아질 것이다. 남성 중심인 군대에서 여군이 대폭 늘어날 경우 이를 감당할 인프라도 문화도 갖춰지지 않았다. 남녀에게 같은 조건을 적용하기에는 신체적 차이 등 여러 제약조건이 존재한다. 2021년 공군 여중사 성추행 사망 사건은 상부의 은폐 논란 속에 특검까지 가야 했다. 우선은 드론이나 로봇 군단 같은 미래의 첨단 무기로 병력 감소를 대체할 방안에 속도를 내는 게 순서다. 전자전과 사이버전으로 전쟁의 양상은 계속 변하고 있다. 안보 분야에서 여성의 역할을 확대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춰 나가면서 부사관의 확대나 희망복무제 등 단계적으로 여군을 늘려가는 방법을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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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정은]뼈를 취하려 살을 내어준 관세 협상국들

    막무가내식 미국의 관세협상 압박에 대응하는 주요국들의 행보 중 외교가에서 주목해온 나라가 호주다. 호주 정부는 미국이 철강 관세를 50%까지 올린 것에 대해 “부적절한 조치이자 경제적 자해”라고 공개 비판했고, 소고기 규제를 풀라는 요구에는 “생물 주권(biosecurity)을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가 이달 중순 호주의 독립적 결정을 강조하며 진행한 연설을 놓고는 ‘반미(反美)적’이라는 해석까지 나왔다. 이런 과정을 지켜본 한국 외교관들은 “동맹국치고 진짜 세다”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반발 감수하고 민감 품목 시장 열어 호주는 서구 5개국 정보연합체인 ‘파이브 아이즈’ 멤버이자 오커스(AUKUS) 회원국으로 미국과는 안보 분야에서도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핵심 동맹이다. 경제적으로는 미국이 이미 무역흑자를 보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호주의 주요 수출품인 소고기를 콕 찍어 압박하니 배신감과 서운함도 배가됐을 터이다. 앨버니지 정부는 “우리 소고기에 고율 관세를 매기면 맥도널드 햄버거 패티가 비싸져서 결국 당신들 손해”라며 이른바 ‘햄버거 외교(burger diplomacy)’를 비롯한 각종 대응 전략을 구사해왔다. 그랬던 호주 정부가 최근 미국산 소고기 수입 규제를 해제한 것은 현재 진행 중인 협상에서 의약품과 철강, 알루미늄에 부과될 관세를 낮춰보려는 전략적 선택이다. 미국이 부과한 상호관세는 10%로 지금도 최저 수준이지만, 핵심 품목에 50%에서 최대 200%까지 예고된 관세율은 수출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일본 등 앞서 협상을 타결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합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쌀과 콩 같은 농산물 수입 확대를 포함해 미국이 강하게 요구하는 안을 받고 관세율을 낮췄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품목을 건드리는 건 이들 나라에도 사회적 반발을 부르는 민감한 현안이었다. 한국 또한 조선업 협력과 대규모 투자 외에 협상 품목에 농산물을 포함시키기로 하고 막판 협상을 진행 중이다. 30개월령 이상 소고기의 경우 광우병 발병 가능성 같은 안전 문제는 사실상 없어졌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현재의 우려는 과학적 근거보다는 이명박(MB) 정부에서 겪었던 광우병 관련 사태의 트라우마가 작용하는 부분이 더 크다. 축산업계에 미칠 영향은 피할 수 없겠지만, 상품에 30개월 이상 된 미국산 소고기임을 명기해 소비자의 선택에 맡기는 방법 등 피해를 최소화할 방안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냉혹한 국제질서 속 진행되는 협상에서 하나도 뺏기지 않고 움켜쥐고 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국부(國富)에 더 핵심적인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다른 것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이번 관세 협상이 끝은 아닐 것임도 확실하다. 이번 고비를 넘더라도 안보 정책에서 더 까다롭고 때로 당혹스러운 제2, 제3의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아야 할 것이다. 통상과 함께 패키지로 테이블에 올린 군사안보 이슈들도 민감도에서는 뒤지지 않는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나 한반도 전구(戰區) 통합 논의는 단순한 숫자 조정을 넘어 동맹의 구도 자체를 바꿀 수도 있는 사안들이다.큰 것을 얻기 위한 전략적 선택해야 그때의 원칙도 결국은 같을 수밖에 없다. 전쟁을 함께 치른 유일한 동맹국을 상대로 ‘내 살을 베어 내주고 당신의 뼈를 끊겠다’는 육참골단(肉斬骨斷) 같은 결기를 부릴 것은 아니나, 어차피 ‘윈윈’할 수 있는 협상판이 아니라면 더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내어줄 수도 있다는 전략의 기본은 가져가야 할 것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임기는 아직 3년 반이 남았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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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어의 신’이 왜 교단에 남았냐고? “공부 외 삶도 가르쳐야죠”[데스크가 만난 사람]

    《무르팍과 무릎팍 중 어떤 것이 맞는 철자법인가. 수캉아지나 수사슴 같은 단어를 쓸 때 사이시옷(ㅅ)은 언제 넣고 빼야 할까. 희떠운(버릇없는), 재겨운(몹시 지겹다), 사위스러운(불길하고 꺼림직한) 같은 형용사의 뜻은 얼마나 알고 있는가. 강일고 교사 윤혜정 씨가 최근 채널에이 예능 프로그램 ‘성적을 부탁해: 티처스2’에 출연해 이런 문제들을 냈을 때 전현무를 비롯한 출연자들은 정답을 찾느라 끙끙댔다. 원어민인 한국인들도 막상 우리 말을 제대로 모르거나 잊고 있는 사례들이 적지 않다는 의미다. 빨간색을 표현하는 순우리말 형용사를 ‘발그레하다’에서 ‘뻘그죽죽하다’까지 20개 가까이 줄줄 읊어대는 ‘혜정 쌤’을 보고 스튜디오에서는 탄성이 터졌다.‘국어의 신’으로 불리는 윤 교사는 19년째 EBS에서 방송 강의를 하며 얼굴을 알린 일타 강사다. 사교육 업체들로부터 거액의 연봉 조건으로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교육계 셀럽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제안을 모두 마다하고 꿋꿋하게 교단을 지키고 있다.》윤 교사는 9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엄마주도 학습이 아니라 자기주도 학습으로 기본기부터 다지도록 학교에서 돕고 싶다”고 했다. 22년째 가르치고 있는 국어에 대해 “개념만 제대로 잡으면 혼자서도 독해력과 작품 분석력을 키울 수 있다”는 공부 방법을 강조했다. 쏟아지는 신조어와 외래어의 홍수 속에서 우리말을 지켜야 한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수십억 원대 연봉을 거절한 ‘공교육 지킴이’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럽지는 않나.“왜 사교육 시장으로 옮겨가지 않느냐는 질문을 지금까지 정말로 많이 받았다. 심지어 반 아이들도 왜 사교육 쪽으로 안 가느냐고 묻는다. 거기엔 꼭 수십억 원대 연봉 같은 이야기가 덧붙는다. 교사의 다음 단계가 사교육 강사라고 보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씁쓸했다. 나는 이미 19년째 EBS 강의를 하고 있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이 상태로도 행복하고, 지금도 이미 너무 힘들고 바쁘다. 아이들이 내 강의를 돈을 내고 듣는다는 것은 어색하고 불편하다.” ―연봉과는 별개로 공교육 붕괴 등의 이유로 교단을 떠나는 교사들도 많은데….“주변에서 ‘학교에 남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진짜 많이 듣는다. 선생님들은 물론이고 학생들도 그런 말을 해준다. 나한테서 국어를 배우고 대학을 가서 교사가 되어 돌아온 제자들도 생겼는데, 얘들한테서 ‘롤모델’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나라도 지금의 이 자리를 잘 지켜야 되지 않나 하는 마음의 부담감이 생겼다.”―학원이 아닌 학교에서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일까.“사교육이 필요한 아이들도 분명히 있다. 사교육 쪽으로 옮겨 간 교사들 또한 아이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챙긴다. 사교육을 악마화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학교의 교사는 아이들의 학습 태도뿐 아니라 삶의 태도 같은 것들을 가르쳐줘야 한다. 요즘 아이들은 그게 정말로 부족하다. 교무실에 들어와서 자기 볼일이 끝나면 인사도 안 하고 나가버리는 학생, 팔짱 끼고 선생님한테 따지며 말을 함부로 하는 학생도 있었다. 그게 문제인지 인식조차 못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던 거다.” ―공교육의 붕괴 원인으로 일선 교사들의 실력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동의하지 않는다. 학교 교사들은 정말로 치열한 임용 과정을 거쳐서 온다. EBS 강의를 함께 하는 다른 선생님들도 보면 정말 훌륭하다. 학생들의 학습 편차는 매우 크고, 공부 의욕에 있어서도 차이가 나는 아이들이 섞여 있다. 지난해 2학년 담임을 하면서 이런 아이들을 그룹별로 나눠 공부 계획을 같이 세우고 매일 체크했다. 아이들이 조금씩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게 학교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이 있은 지 2년이 지났다. 거리로 나섰던 교사들이 토로한 문제들을 어떻게 보나.“교사들이 정말 힘든 상황인 건 맞다. 아이들이 선생님한테 폭언이나 폭행을 하기도 한다. 학습 지도뿐만이 아니라 생활지도하는 게 조심스럽고 어려운 시대다. 제 주변에도 학생 문제로 밤에 집에 가는 길이 무서워지고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는 분들이 있었다. 현장 교사들은 프로그램 기획부터 행사 진행, 물품 구입에 정산 보고서 작성 같은 행정 업무도 같이 해야 한다. 어떤 때는 10원 단위가 안 맞아서 머리를 싸매기도 한다. 제대로 하려면 시간이 모자라서 남은 업무를 집에서 밤늦게까지 해야 한다. 수업만 하라고 하면 정말로 더 많은 것들을 준비할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없어서 안타깝다.”―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학생들도 힘들어 보이긴 마찬가지다.“많은 학생들이 자기주도 학습이 아니라 엄마주도 학습을 하고 있다. 엄마표라는 건 참 좋은 거지만 방향이 잘못되면 아이들이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를 모르게 된다. 설명회를 해보면 예전에는 학생 본인이 직접 왔는데 이제는 엄마들이 학원 간 자녀를 대신해서 온다. 엄마들이 들은 이야기를 집에 가서 전달하면 그게 애들한테는 잔소리가 되고 스트레스가 된다. 공부는 올바른 방법으로, 내가 해야 될 시간의 분량을 채워서 하면 점수가 나오게 돼 있다.” 윤 씨 본인은 제대로 된 입시 공부를 시작한 게 고2 때였다고 했다. 그 전까지는 입시 준비보다는 동아리 등 다양한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쓰는 학생이었지만, 보고 싶은 책만큼은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 같은 만화를 포함해서 한껏 많이 읽었다. 국어교사로 교단에 선 뒤에는 수업을 위해 “교과서를 빨래 짜듯이 남김없이 비틀어짜서 개념부터 다 털어냈다”고 했다. 품사에서 시작해 여러 국어의 개념들을 재배열하며 공부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저서 ‘개념의 나비효과’ 교재는 133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다. 국어에 개념이 있다니 생소하다.“수학이나 영어, 사회 같은 과목들과 달리 국어는 시험 범위가 특정되지 않는다. 당장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그러니 무작정 문제집을 사서 풀거나 시나 고대 가요부터 외우는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공부하는 아이들이 많다. 소설에는 주제, 구성, 문제가 있고 인물, 사건, 배경이 중요하다. 이런 개념을 알고 공부하면 처음 보는 지문이나 장면을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선생님이 밑줄 그으면서 해석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개념을 잘 잡으면 나비효과가 일어날 수 있다. 고전 작품을 하나씩 정리하면 수십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런 개념 강의는 딱 2시간짜리다.” ―그래도 국어 문법은 품사니 어미니 용어만으로 어렵게 느끼는 사람이 많다. ‘킬러 문항’ 논란으로 학생들이 혼란을 겪기도 했다.“기본기가 중요하다. 내신이랑 수능도 사실 개념은 다르지 않다. 교사들에게 가장 큰 사고는 등급을 못 맞추는 것이다. 현재는 4%만 1등급을 줘야 하는데 동점자나 만점자 수가 이 비율을 넘어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변별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생기니 고난도 문제 출제를 위해 교과서 외부의 어려운 지문을 내거나 지엽적인 정보를 비틀어 기괴한 문제를 출제하기도 한다. 사실 평가만 제대로 이뤄지면 수업 방식도 상당히 바뀔 수 있다.” ―영어 사용이 늘면서 우리 말이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학교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 보면 외래어를 정말 많이 쓴다. 아예 영어 단어를 그대로 쓰는 경우도 많이 봤다. 학생들의 경우 외래어를 섞어서 쓴다기보다 신조어들을 많이 만들어서 쓴다. 그냥 다 줄여버리는데, 나도 그게 무슨 말인지조차 알 수 없는, 출처도 모르는 신조어들이 많다. ‘그런 거 너무 많이 만들면 너희들의 자식이 힘들어진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이런 외계어 같은 말들이 한글을 해칠 수 있다. 영어는 하루에 200개씩 외우면서 학생들이 국어의 표현들은 그만큼의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막상 외국에서는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K팝이나 드라마 인기 덕분에 한국어 전공자도 늘었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필요하다. 요즘 애들은 인스타그램 같은 SNS 사용이 많고 문화적으로 교류가 활발하다. 영어를 편하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영어는 영어대로 쓰되 우리 국어는 국어대로 지켜야 한다.”강일고 윤혜정 교사(45)△ 1980년 서울 출생△ 2003년 성균관대 교육학·국어국문과 졸업△ 2004년∼고등학교 교사△ 2007년∼EBSi 국어 영역 강사△ 2009년, 2024년 교육과학기술부장관상 수상△ 2010∼2012년 EBS 언어영역 최우수강사 연속선정△ 2011년 EBS ‘개념의 나비효과’ 강의 진행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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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정은]우리가 알던 펜타곤이 아니다

    펜타곤으로 불리는 미국 국방부 청사 벽에는 미군이 참전했던 주요한 5개 전쟁의 대형 그래픽이 붙어 있다. 1·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 걸프전, 그리고 한국전쟁이다. 군 당국자들은 한국전쟁의 치열했던 장면과 ‘코리안 워(Korean War)’라는 전쟁명을 매일 보면서 이 복도를 지나다닌다. 함께 피 흘리며 싸운 동맹임을 인식하고 있어서일까. 한국말은 못 해도 “같이 갑시다”는 외쳐대는 미군 당국자들을 접할 때면 한국인을 대하는 태도가 뭔가 좀 다르다고 느꼈다.펜타곤 자주파 vs 국무부 동맹파그랬던 펜타곤의 요즘 움직임은 심상치 않다. 주한미군 4500명 감축설과 방위비 증액 압박, 4성인 주한미군사령관의 계급 격하 검토 등이 현지 언론을 통해 잇따라 보도되고 있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한반도 전구(戰區) 통합 등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듯한 움직임도 감지된다. “이대로면 제2의 애치슨 라인이 그어질 것”이라는 경고가 워싱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한국을 향한 메시지도 건조해졌다. 4월 서울에서 진행된 한미일 안보실무회의와 도상 훈련 후 미 국방부가 낸 공동성명은 이례적으로 짧았다. ‘3국은 안보협력의 모멘텀을 유지해 나가기로 약속했다’는 한 줄이 전부다. 고위급 회담은 아니었지만 5년 만에 재개된 훈련을 놓고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내놓은 첫 공동성명이었는데 말이다.불과 두 달 전 미국 국무부가 한미일 3국 외교장관 회동 후 낸 공동성명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흔들릴 수 없는 파트너십’ ‘강력한 안보협력’ ‘동맹의 힘 강화’ ‘한국 방어에 대한 미국의 철통같은 약속’ 같은 표현들이 국방부 성명의 10배가 넘는 분량 곳곳에 담겨 있다. 이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국방부 성명을 보면서 워싱턴의 지한파들은 한미동맹 변화의 불길한 전조를 느꼈다고 했다.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초기의 갑작스러운 인사 교체와 인력 감축으로 급속히 약화된 상태로 알려져 있다. NSC가 지휘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책을 끌고 가는 건 펜타곤의 소수 강경파 인사들이다. 그 핵심에는 엘브리지 콜비 정책차관이 있다. 오커스(AUKUS) 회원국인 호주와 맺은 핵잠수함 협정의 재검토,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의 전격 중단 결정도 콜비 차관이 주도했다고 한다. 이런 민감한 결정을 미 의회와도 사전 협의하거나 심지어 통보도 하지 않고 밀어붙였다는 외신들의 보도는 실세 차관인 그의 영향력을 짐작하게 한다.대중 매파인 콜비 차관은 미국의 군사력을 중국 견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소신이 확고하다. 이를 위해 한반도 유사시 북한의 공격 대응은 한국이 알아서 책임지고 전시작전권도 가져가라는 식이다. 달성이 불가능한 북한 비핵화 대신 군축 협상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도 밝혀왔다. 확장억제 강화에는 회의적이고, 한국의 자체 핵무장에는 열려 있지만 그렇다고 이를 밀어줄 것 같지는 않다. 그가 틀어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국방정책이 하나씩 현실화하면 한국의 안보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다.콜비 차관 강경책에 동맹 약화 우려시한이 임박한 한미 간 통상 문제가 당장은 시급하지만, 방위비 증액을 비롯한 안보 이슈도 장기적으로는 이와 맞물려 있다. 펜타곤이 새 국방전략(NDS) 구상을 발표할 시점이 9월로 눈앞에 다가와 있기도 하다. NDS의 세부 내용이 확정되기 전에 한국의 입장이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방책을 찾아야 한다. 외교적 파장을 우려하는 국무부가 국방부의 독주를 막기 위해 물밑에서 애를 쓰고 있다는 말이 들린다. 소위 ‘펜타곤 자주파’에 맞서는 ‘국무부 동맹파’를 통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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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요 초대석]“어릴 적 키운 ‘신라의 꿈’… APEC 통해 우리 문화의 힘 보여줄 것”

    《고구려 벽화와 석굴암, 거북선, 혼천의 같은 한국 문화유산들을 빛으로 그려낸 홀로그램에서부터 첨단 정보통신기술(ICT)로 구현한 빙판 위 빛의 무대, 이어 하늘에서 펼쳐진 화려한 오륜기 드론쇼까지. 7년 전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은 우리 전통문화와 첨단 기술을 세련되게 결합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총연출을 맡은 양정웅이 송승환 총감독과 함께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양정웅이 다시 국가적 행사 무대로 돌아왔다. 이번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예술총괄감독이다. APEC은 미국과 캐나다, 중국, 인도네시아, 멕시코 등 21개 회원국 정상들이 모이는 주요한 외교 행사로, 각국 대표단과 비즈니스 관계자 등을 합치면 참가 규모는 2만 명에 이른다. 10월 말부터 열리는 이 행사에서 양 감독은 정상 갈라 만찬을 비롯한 주요 문화, 예술행사를 총괄하게 된다.》양 감독은 “경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키웠던 ‘신라의 꿈’을 디지털 기술과 접목해 한국의 아름다움을 각국 정상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19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진행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K팝과 K푸드, K드라마 등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연출의 소재들이 정말 많아졌다”며 “무엇을 골라서 보여줘야 할지 모를 정도여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비상계엄과 탄핵 등으로 APEC 준비가 지연됐는데, 맡은 분야 상황은 어떤가.“외국 정상들과 대표단에 우리의 문화와 예술을 알리겠다는 방향과 목표가 확실하다. 행사 콘셉트를 잡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것을 실질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다. 메시지, 콘셉트와 공연의 디테일을 잘 조합시키는 게 중요하다. 여러 가지 상상을 해보면서 플랜 B에서 C, D, 그 이상으로 최대한의 것을 만들어가는 시뮬레이션 작업을 하고 있다.” ―정치적 부담을 이유로 책임자 자리를 고사한 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부담은 없었는가.“문화와 예술은 정치와 모든 걸 넘어서 자유롭게 대중을 만난다.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일이다. K콘텐츠가 역대급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때에 한국의 문화 저력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제안을 받았을 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번 APEC 주제가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가능한 내일’이고 중점 과제는 연결· 혁신·번영이다. APEC이 함께하는 미래에 우리가 모두 연결돼 있다는 발전적인 메시지를 문화를 통해 전달하고 싶다.” ―한국, 특히 경주의 특징과 매력을 잡아내는 게 중요할 것 같다.“제 본적이 경주다. 경주시 황오동 16번지. 방학 때면 할머니 집으로 내려와 신라 왕릉에서 미끄럼 타고 개구리 잡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경주를 소재로 한 ‘미실’이라는 연극을 만들어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때 배우들을 데리고 경주로 내려가 한 달 살기를 하면서 작품을 만들고 워크숍을 하면서 ‘신라의 꿈’을 펼쳤다. 그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우리 문화의 매력을 보여줄 것이다.” 배우 출신으로 연극 무대 연출을 해 온 양 감독은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에 이어 지난해 강원 겨울청소년올림픽 개·폐회식 등 국가급 대형 행사, 성남페스티벌과 명량대첩축제 같은 지자체 이벤트 무대를 진두지휘한 경험을 갖고 있다. 특히 남북, 북-미 간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점에 김여정을 비롯한 북한 대표단 참석으로 주목받았던 평창 올림픽은 “미사일을 쏘네 마네 하면서 전쟁 나기 직전까지 갔던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마음 졸이고 간절히 기도하며 준비했던 행사”라고 회고했다. ―당시 현대적 정보기술(IT)을 융합한 독창적인 무대를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미디어 아트, 뉴폼 아트라고 부르는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접목은 내가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강의를 한 분야이기도 하다. 인간은 예술과 인간성을 찾는 아날로그적 본성이 있는데, 동시에 디지털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장르적인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엮어내느냐는 미래 숙제다.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하는 젊은 세대들이 있고, AI나 기술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빠르게 변한다. 미디어 아트가 전통과 현대의 예술과 만났을 때 어떻게 폭발력을 가질 수 있는지 고민한다. APEC에서도 이를 콘셉트에 맞게 잘 보여줄 방법을 찾고 있다.” ―APEC은 21개국 정상들이 참석하는 난도가 높은 행사다. 기존의 다른 행사들과 차이가 있다면….“각 나라를 이끄는 정상들 앞에서 우리 문화를 보여줄 수 있으니까 더 즐겁게, 재미있게 잘하고 싶다. 한국인의 흥 같은 것들을 우리만의 스타일로 보여주자는, 그런 기대와 흥분 속에서 준비하고 있다. 공연이 펼쳐지는 갈라 만찬 준비가 제일 중요하다. ‘동궁과 월지’, 그러니까 예전에 안압지라고 불렸던 곳이 만찬 행사를 열기에 정말 좋은 곳인데 10월 말은 추위나 가을비 리스크가 있다. 안전하게 실내에서 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경주박물관 마당에 만찬장을 짓고 있는 중이다.” ―예스러운 아름다움과 현대 문화를 엮어내는 작업에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무엇인가.“‘오징어 게임’, ‘기생충’, ‘미나리’, 한강의 작품들….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한국 작품이 이제는 정말 많다. 영화는 물론 K팝과 뷰티, 패션, 음식 등까지 인기다. 이제는 공연 부문만 남았다고 했었는데 ‘어쩌면 해피엔딩’이 최근 그 서막을 열었다. 옛날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세계적인 인기다. 사실 평창 올림픽 준비를 할 때까지만 해도 싸이의 ‘강남스타일’ 정도를 빼고는 이렇게 유명한 게 없었다. BTS도 막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지금은 참 보여 줄 게 많아졌다. 무엇을 골라서 보여 줘야 할지 모를 정도여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 ―20년 전 부산 APEC과는 어떻게, 얼마나 다르게 준비하고 있나.“부산 APEC은 해외 정상들이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찍었던 사진이 기억나는, 당시 한국에서 정말로 큰 행사였다. 그래도 2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기에는 갭이 좀 크다. 이제는 세계 정상들이 어떤 식으로든 한국 문화와 예술과 음식 같은 것을 직간접으로 겪어보셨기 때문에 그때와는 달라야 한다. 무엇보다 IT가 크게 발전했다. 부산 APEC이 좀 더 전통적이면서 아날로그적인, 클래식한 문화 예술을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훨씬 더 다채롭고 아기자기한 것들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 APEC 연출 사례들도 참고하나.“물론이다. 인도네시아 것도 좋았고 중국, 페루 등 거의 모든 나라의 전례들을 참고용으로 훑었다. 결국은 각국의 전통을 기반으로 표현을 해낸 것들이다. 예술과 문화는 그 나라의 아이덴티티니까. 전통을 베이스로 우리만의 분위기와 느낌을 찾아 표현할 것이다. 문화는 디테일이기도 하다.” 양 감독은 연극계에서 ‘셰익스피어 스페셜리스트’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셰익스피어 연극 공연을 많이 해왔다. 해외 투어 공연에 나섰던 ‘한여름 밤의 꿈’, 배우 황정민과 함께 했던 ‘맥베스’ 등은 모두 셰익스피어 작품이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고전에 관심이 많은 이유가 있나.“셰익스피어를 좋아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가 막장 드라마 작가라는 점이다(웃음). 주인공이 친척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고…. 인간의 어두운 본성, 갈등과 질투와 배신과 유머, 심지어 요정이 등장하는 판타지까지 모든 게 다 있다. 사람이 겪는 모든 드라마틱한 상황들을 문학적인 수사로, 아름다운 대사의 향연과 함께 깊이 있는 철학적 메시지로 전달한다. 공연 연습을 하다 그의 영혼을 만난 듯한 황홀감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셰익스피어의 37개 작품을 모두 공연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현재까지 10개 정도밖에 못 했지만.” ―연출의 무대를 고전 작품에서 올림픽 개회식이나 APEC 같은 행사로 넓히는 이유가 있나. 이벤트 무대의 매력은 뭐라고 느끼나.“공연하는 자와 즐기는 자가 함께 있는 곳이 무대다. 큰 무대, 작은 무대가 따로 없다. 어렸을 때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으면서 알래스카와 남미 안데스 문명의 사원, 아프리카 초원 같은 곳을 꿈꿨다. 연극을 할 땐 전 세계를 돌면서 다른 문화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함께하는 예술을 꿈꿨다. 처음 만들었던 극단 이름이 ‘여행자’였다. 10년 동안 집시처럼 돌아다니면서 해외 공연 투어를 했다. 그렇게 해외에 한국 문화와 예술을 알리고 싶었다. 평창 올림픽이나 APEC 행사는 그런 꿈의 연장선상에 있다.”양정웅 APEC 예술총괄감독△1968년 서울 출생△1992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1997년 극단 ‘여행자’ 창단△2012년 베세토연극제 한국 대표(위원장)△2015∼2020년 서울예대 공연학부 교수△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 총연출△2024년 강원 겨울청소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제15회 카이로 국제실험연극제 대상(2003년), 폴란드 그단스크 셰익스피어 페스티벌 대상·관객상(2006년), 대한민국연극대상 대상·연출상(2009년), 대한민국 한류 대상(2013년), 체육훈장 맹호장(2018년)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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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정은]‘찐미’ 이재명 외교안보팀의 달라진 과제

    김민석 총리 후보자가 지난주 기자간담회에서 ‘반미(反美)주의자’ 질문을 받았을 때 내놓은 답변은 핵심을 비껴 간 부분이 있다고 본다. 하버드대를 다녔고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딴 것이 곧바로 반박 논거가 되지는 않는다. 한미동맹을 폄훼하거나 미국을 자극하는 발언을 반복했던 인사 중에 미국에서 공부했거나 자식을 미국으로 유학 보낸 사례도 적잖다. 김 후보자가 과거 경력을 설명하는 대신 ‘우리 안보의 근간인 한미동맹은 중요하다’고 힘을 싣는 발언을 했으면 어땠을까.동맹파에 힘 실은 국가안보실 인선 반미와 친미를 나누는 과거의 단순한 이분법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더 이상 미국대사관을 점거하거나 관저를 향해 짱돌을 던지지 않는다. 강대국을 향해 치기 어린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서로 주고받을 것을 가진 중견 동맹국으로서 한국의 외교적 역량이 그만큼 올라왔다. 이재명 대통령의 외교안보 참모들도 “반미 여론을 갖고 장사할 때는 지났다”고 말한다. 이 대통령은 한미, 한미일 협력의 필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외교안보 사령탑에 동맹파인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을 임명한 데 이어 주미대사관 정무공사를 지낸 ‘워싱턴 스쿨’ 외교관을 국가안보실 2차장에 앉힌 것에서도 일관된 방향성이 확인된다. 후속 인선이 지연되면서 20여 년 전 이른바 ‘자주파 대 동맹파’ 충돌의 기억이 소환되던 타이밍에 스멀스멀 올라오던 우려를 일단락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위 실장을 ‘찐미(진짜 미국)’로 평가하며 “한미 관계를 잘할 것”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에 대해 “DJ(김대중 전 대통령)보다도 찐미”라고도 했다. 다만 박 의원이 이 자리에서 언급한 자주파 6인회의 영향력 또한 아직도 건재하다. 6인회 멤버인 이종석 국가정보원장 후보자가 20대 대선 당시 이재명 캠프에서 실용외교위원장을 맡고 있던 위 실장과 충돌했던 게 불과 3년 전이다.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기고문을 작성하면서 이 후보자가 위 실장을 패싱했다는 논란이 벌어지는 등 강한 견제가 지속됐다. 캠프에서 공약을 놓고 벌어졌던 양측 갈등이 실제 국가 정책을 두고 표면화한다면 재앙이다.달라진 美 상대하는 외교 집중할 때‘찐미’ 외교안보팀이라도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를 상대하는 일은 점점 험난해질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5개월 만에 전국적 비판 시위에 직면했다. 지지율이 계속 떨어진다면 내년 중간선거에서 의회 과반을 놓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의 중재가 난항인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중동에서는 이스라엘-이란 전쟁까지 터졌다. 시한이 임박한 주요국들과의 관세 협상 또한 기대했던 속도와 성과를 내지 못하는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이 초조해질수록 대외정책은 더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튈 가능성이 높다. 한국을 상대로 한 방위비 분담금 증액이나 주한미군 재배치, 북-미 대화 재개 등을 놓고 무리수를 두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 관리도 숙제이지만 시급성과 난이도에 있어선 달라진 미국을 상대하는 게 상위에 놓여 있다. 더구나 대중, 대러 외교는 모두 미국과 교차방정식으로 엮여 있는 게 한반도 외교 판의 현실이다. 이 대통령은 캐나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통해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이 돌아왔다”는 메시지를 발신했다. 지금부터는 첩첩이 쌓인 외교안보 과제들을 풀어내는 일에 정신없이 속도를 내야 한다. 불안하게 흔들릴 조짐을 보이는 한미동맹을 다잡고 이를 바탕으로 이재명표 실용외교가 뭔지 보여줘야 할 것이다. ‘제2의 자주파 대 동맹파’ 갈등으로 초기 동력을 놓칠 여유는 없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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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보복 인상 주는 과거청산 백해무익… 권력 겸손하게 써야”

    《3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뤄내며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만만찮은 대내외적 환경 속에서 국가적 난제들을 풀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어떤 원칙과 방향성을 갖고 국정 운영을 해 나가야 할까.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4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치 보복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수준의 과거 청산은 백해무익”이라며 통합을 바탕으로 국가 미래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4일 업무를 시작한 이재명 대통령 앞에는 국가적 과제가 산적해 있다. 0%대까지 추락한 경제성장률 전망과 민생, 미국발 관세 압박, 급변하는 대외정세와 안보 위협 등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은 현안들이다. 극단으로 치달은 정치적 양극화와 사회 분열 또한 해결이 시급하다.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서라면 정치 이념조차 포기할 용의가 있다는 태도로 인선과 정책 추진에 나서야 성공한다”고 강조했다. 신학, 철학자이자 시민운동가 출신의 원로 지성인으로 꾸준히 목소리를 내 온 손 교수는 4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치보복이란 인상을 줄 수 있는 과거 청산에 매달리는 것은 백해무익”이라며 “그 일은 수사와 재판 담당 기관들에 맡기고 이재명 정부는 앞으로 해 나가야 할 일들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재명 정부의 첫 인선이 발표됐다. 어떤 인선 원칙과 방향성을 갖고 사람을 써야 한다고 보나.“정당이나 이념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서 선택했다고 국민이 믿을 만한 사람을 써야 한다. 그런 인상만 줘도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질 거다. 사람을 선택할 때 혼자 하지 말고, 해당 분야 단체나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많이 구해야 한다. 당선에 공헌한 사람 몇 사람의 의견만 들어서 하는 인사는 실패다. 소위 폴리페서라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찾아다닐 텐데, 그런 사람은 모조리 끊어야 한다. 뭘 하고 싶다고 덤벼드는 ‘하고재비’들은 순수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나한텐 어려운 임무라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진짜다.” ―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통합정부’를 공언했다. 어떻게 실현해 나가야 하나.“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갈등은 지역이나 빈부 갈등이 아닌 정치적 이념 갈등이다. 정치인들이 만들어 놓은 분열이다. 새 대통령은 이런 문제를 인식해서 정당 정치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이 대통령이 정당을 아예 떠나겠다고 선언하는 것도 방법이다. 정당이 아닌 국민을 위해 일하려면 정치 이념조차도 포기할 용의가 있다는 태도로 임하는 거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내란 규명’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보복 논란 없이 이를 진행할 수 있다고 보나. 그 선은 어떻게 그을 수 있을까.“담당 기관들의 객관적 조사를 따르고, 사법부의 판단을 믿으면 된다. 새 정부는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매진해야지, 적폐니 과거 청산이니 하면 국민들에게 정치보복이라는 인상만 줄 것이다. 정치가 앞서서 미리 결론을 왜 내리나.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에 새 정부가 쓸 에너지와 시간이 어디 있나. 백해무익하다.” ―그러나 선관위나 사법부 자체의 신뢰도부터 흔들리고 있는 상황 아닌가.“사법부의 신뢰도를 흔드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장난이다. 권력 집중과 부패를 막는 삼권분립은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그동안 사법부에 대해 너무 간섭을 많이 했다. 그게 결과적으로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이제 당선이 됐으니 대통령은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린다고 해버려야 한다. 대통령이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과거 문제로 시간을 보내다가는 앞으로 아무것도 못 한다.” ―입법부와 행정부를 장악해 거대 권력을 갖게 된 이 대통령이 야당과 반대파의 목소리를 제대로 정책에 반영하도록 할 방안이 있을까.“이 대통령이 여당 야당 프레임을 초월해야 한다. 대통령의 권한이 너무 세기 때문에 정파적 이해관계를 초월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일단 논공행상부터 반드시 없애야 한다. 정당의 사사로운 이익에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자존심을 좀 가져야 한다.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수고했다는 이유로 챙겨주려면 대통령 자격이 없는 졸자가 된다.” ―견제 세력이 사실상 없어지는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게 될 경우의 정책 독주 등 위험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큰데….“주어진 그 막강한 권한을 잘못 사용하면 아주 추하게 돼 버린다. 권력이라는 게 무서운 거다. 잘못 사용하면 남도 망치고 자기와 자기 후손에게 고통을 주는, 망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전임 대통령이 과거 잘못한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심각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부족하고 모르는 분야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겸손하게 주변에 자문을 구해야 한다. 잘못한 게 있으면 말도 안 되는 구실 붙이지 말고 즉각 잘못했다고 인정해야 국민의 신임을 얻는다. ‘내가 다 알고, 권력 쥐었으니 내가 모든 걸 다 하겠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이 대통령이 내놓은 공약 중에는 찬반이 극렬하게 나뉘거나 우려를 낳는 정책들이 적잖다. 시행 과정에서 예상되는 부작용과 충돌은 어떻게 풀어야 하나.“한 번 내놓은 정책이라고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할 불변 정책은 아니라고 본다. 솔직하게 ‘당선을 위해서 필요했는데 이제는 새롭게, 나라에 정말 이익이 되는 걸 논의하자’고 해주면 좋겠다. 매우 극단적인 반대가 있는데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건 어리석다고 본다. 어느 정도의 반대야 늘 있겠지만, 심하게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다면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정도로 갈리는 사안이라면 좀 보류할 수도 있다고 본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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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정은]입으로만 외쳐온 초당적 협력의 허상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주 의회에서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과 벌인 한판 공방은 격렬했다. 15년 지기 의회 동료라는 크리스 밴홀런 상원의원은 목까지 시뻘게질 정도로 고성을 질러가며 루비오 장관을 맹공했는데, 속사포로 받아치는 루비오 장관도 날이 잔뜩 서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대응, 국제개발처(USAID) 예산 삭감 등 현안을 놓고 양측은 3시간 동안 건건이 충돌했다.6·3 대선 후 몰려올 외교안보 현안들 국내 이슈는 몰라도 외교안보 정책만큼은 초당적으로 협력해온 게 미국 의회였다. 그러나 전례 없이 벌어진 정치 양극화의 간극 속에 미국마저 ‘초당적’이라는 단어는 신화 속 키워드가 되어가고 있다. “(당파적) 정치는 국경선에서 멈춰야 한다(politics stops at the water’s edge)”고 외치며 외교안보 분야의 초당적 협력을 끌어냈던 ‘반덴버그 결의안’이 무색하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큰 한국이야말로 초당적 외교가 절실한 나라다. 그러나 전문가와 정치인, 언론이 모두 한목소리로 그 필요성을 외쳐 왔음에도 지금까지의 시도들은 낙제점에 가깝다. 4강에 둘러싸인 것도 모자라 핵 개발에 골몰하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에서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차이부터 현격해 중간 지점을 찾기 어려운 탓이다. 국익을 앞세운다지만 각자가 보는 국익의 성격과 확보 방안, 달성 시점 또한 일치하지 않는다. 대선을 앞두고 각 당 후보들이 내놓은 외교안보 분야 공약은 사안마다 차이가 상당하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진 주한미군 역할 재조정, 미국의 대중 견제 정책 동참 여부를 놓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다른 대응안을 제시하고 있다. 민감도가 높은 대(對)중국, 일본 정책에 있어서도 양당의 접근법 차이는 적잖다. 이 후보가 ‘실용외교’를 앞세우며 일부 우클릭을 시도하고 있지만, 캠프에 포진한 인사들의 면면으로 볼 때 실제 이행에 들어가면 다시 강경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국의 새 정부가 들어선 뒤 미국은 관세 협상 강도를 높이고 주한미군 감축 혹은 재배치, 최대 10배까지 거론됐던 방위비 증액 요구, 대만해협을 아우르는 전쟁구역(전구·戰區) 통합 논의 등을 줄줄이 본격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 틈을 타고 한미 관계를 이격시키려는 중국의 시도 또한 본격화할 가능성이 높다. 국내 여론은 민감해지고, 양당의 갈등은 그만큼 더 첨예해질 것이다.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분열의 과정은 애써 끌어모아도 부족할 대외적 협상력을 갉아먹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시점에 국회 미래연구원이 초당적 외교안보 분야 합의점을 찾아보겠다며 최근 보수, 진보 양쪽의 전문가와 국회의원 등을 모아 ‘코리아 컨센서스’ 포럼을 발족시킨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축사에 나선 우원식 국회의장이 “전환기 복합적 위협 속에서 어느 때보다 초당적 외교가 중요해졌다”고 역설하는 그 시간에 민주당에서는 김문수 후보를 향해 ‘국익을 위협하는 외교 리스크’, ‘위험하고 해로운 졸속 후보’라고 비난하는 내용의 논평을 냈다. 방위비 분담금을 올릴 수 있다는 김 후보의 한마디를 이렇게 문제 삼았다.이념 절제 속 보수-진보 접점 찾아야 외교안보 분야에서의 초당적 협력은 아직까지는 달성이 불가능해 보이는 허상이다. 다만 그 허상이라도 좇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대외적 환경이 엄중하다. 결국 의견 차이를 좁혀가며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접점을 조금씩이나마 찾아 나가는 수밖에 없다. 현안을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강경파에 휘둘리지 않고 이념을 앞세운 과격한 주장을 자제하는 절제력부터 발휘해야 한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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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정은]‘33일 간의 국정 공백’이 그렇게 가벼운가

    ‘이런 상황에선 북한이 진짜 쳐들어올 수도 있겠다.’ 더불어민주당의 탄핵안 강행에 직면한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의 1일 밤 사퇴 속보를 접한 순간 한 고위 외교당국자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고 한다. 30년 가까이 한반도 정세를 지켜보며 남북관계를 다뤄온 전문가를 긴장시킬 만큼 정치권의 혼란 속 리더십 구멍이 그만큼 크게 보였다는 의미다. 북한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물자와 인력을 쏟아부은 탓에 남침 여력도 의지도 현재로서는 없다는 게 정보당국의 분석이지만, 평양의 오판 가능성은 상존한다.국정 빈틈 우려되는 ‘대대대행’ 체제대통령 권한대행의 대행의 대행이 된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하는 모습은 낯설었다. “북한이 어떠한 도발 책동도 획책할 수 없도록 빈틈없는 대비 자세를 유지하기 바란다”는 메시지에는 원고를 읽는 수준을 넘어서는 힘이 없었다. 1년 넘게 의대생 증원 문제의 대응에 급급했던 그다. 그런 이 부총리 개인의 결기나 의욕만으로는 메우기가 쉽지 않은 사상 초유의 국정 공백이자 안보 사령탑 부재 상황이다.글로벌 통상 분야는 미국의 관세 압박 속에 이미 소리 없는 전쟁이 한창이다. 미국의 5개 우선 협상국으로 지목된 한국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공세를 힘겹게 막아내는 중이다. 그런 협상팀에 힘을 보태지는 못할망정 ‘매국’ 딱지를 붙여 공격하던 민주당은 아예 협상 선봉에 서 있던 최 전 부총리마저 끌어내렸다.관세 협상은 어차피 6·3 대선 이후 차기 정부가 마무리할 일이니 미국 측에 국내 정치적 변수들을 핑계 삼아 버티면 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미국 측이 정신없는 한국의 국내 정치 상황을 감안해줄 것이란 전제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90일간의 관세 유예 기간 내에 어떻게든 성과를 내려는 트럼프 행정부가 우리 상황을 되레 이용하려 할 수도 있다. 미국의 속도에 말려들어서는 안 되지만, 대선 후 새 정부가 제대로 협상할 수 있도록 탄탄한 사전 준비 작업을 해놓을 필요가 있다. 이는 정확한 방향성과 지침 없이 실무자들끼리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안보·경제 후과에 민주당도 책임져야일본의 경우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협상 과정을 일일이 보고받고 취재진에게 직접 설명도 한다.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J D 밴스 미국 부통령에게 “상대하기 힘든 협상가(tough negotiator)”라는 평가를 들어가며 대미 관세 협상을 밀어붙이고 있다. 비슷한 시기 협상을 시작한 이들 나라는 관세를 대폭 면제받는데 우리만 시한을 넘긴 채 25%가 유지되는 최악의 결과가 도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면 2, 3주 안에 그냥 가격을 정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국내 정치 갈등이 아무리 극심하더라도 그것은 안에서 치고받고 싸울 일이다. 대외적으로 국가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경제와 안보라는 국가의 두 핵심축을 흔드는 수준까지 치닫는 것은 선을 넘는 자해다. 민주당의 이번 탄핵은 경제 수장인 최 전 부총리를 통해 그나마 간신히 붙잡고 있던 주요 현안 대응의 끈을 사실상 끊어버렸다는 점에서 질이 나쁘다. 국익보다 당의 이익을 앞세워 폭주한 무책임함은 말할 것도 없다.조기 대선 승리를 점치는 민주당은 남은 한 달여 동안 서열 4위의 대대대행 체제로 적당히 버티고 뭉개면 된다는 심산일지 모르겠다. 33일이라는 국가의 시간이 그렇게 가벼운가. 이 기간의 정부 결정과 대응은 향후 3년,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후과를 남길지 모른다. 이로 인한 피해가 발생한다면 그 책임은 민주당도 함께 져야 할 것이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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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정은]‘적보다 나쁜 친구’와의 관세 협상 방정식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최근 관세 관련 의회 청문회에서 “왜 적과 친구를 똑같이 대하냐”는 질문에 시달렸다. 동맹과 우방국들에는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면서 ‘적’으로 분류돼온 러시아와 벨라루스, 북한, 쿠바에 대해서는 상호관세를 부과하지 않은 이유를 추궁하는 질의가 이어졌다. 미국 상원의원들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정책 결정이라는 반응이었는데, 이에 똑 부러진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그리어 대표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를 상대로 한 핵폭탄급 관세 정책을 발표하면서 “친구가 적보다 더 나쁘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 대미 무역흑자를 보는 국가들은 미국을 ‘약탈하고 후려치고 등쳐먹고 뜯어먹고 호구 삼는’ 나라다. 연간 1조2000억 달러에 이르는 미국의 무역적자를 악화시킨 주범 국가들이다. 이런 인식은 트럼프 대통령의 뼛속까지 각인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협상용 수사라고 하기엔 지독하게 일관돼 있고, 반복해서 튀어나온다. 좋은 물건들을 그저 열심히 잘 만들어서 팔았을 뿐인 수출국들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다.‘원스톱 쇼핑’ 맞춘 최적 조합 찾아야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콕 찍어 말한 게 여러 차례였지만,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니다. 호주는 미국이 무역흑자를 보고 있는 나라이자 인도태평양 지역의 주요 안보 파트너임에도 관세를 피해가지 못했다. 일본은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특별 제작한 황금 투구까지 들고 갔지만 우리보다 단 1%포인트 적은 24% 관세를 맞았다. 대만, 인도 등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협상을 요청하는 나라들을 향해 트럼프 대통령은 “내게 아부를 떨고(kissing my ass) 있다”고 조롱하듯 말했다. 미국이야말로 ‘적보다 나쁜 친구’로 돌변할 판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상대가 불신과 편견까지 안고 협상장에 나오니 타협점을 찾는 과정은 전례 없이 험난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원스톱 쇼핑’은 미국이 그리는 협상의 그림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나마 도움이 될 방향점이다. 한국의 경우 조선업 협력, 액화천연가스(LNG) 구매, 알래스카 가스관 프로젝트 참여 등에 더해 군사안보 분야까지 패키지로 엮어 총괄적으로 주고받자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1기 행정부 때 집요하게 요구했던 게 방위비 분담금 증액이었다. 글로벌 관세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인 2019년 방위비 분담금을 5배 늘리라고 압박했다. 지난해 대선 유세 기간에는 10배로 높여 불러놓은 상태다. 이번에는 반드시 받아내겠다고 벼르고 있는 눈치이니 어차피 피해갈 방법도 없다. 1기 때에는 연계된 카드가 주한미군 감축 같은 안보 분야에 국한됐지만 이번에는 경제, 산업 분야까지 넓혀져 있다.방위비까지 패키지로 묶는 대응 필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압박하던 초기 “피로 맺어진 동맹국의 전우를 용병으로 만들려는 것이냐”는 비판이 미국 내 지한파 학자와 의원들 사이에서 나왔다. 미군의 한반도 주둔은 북한의 핵 위협 사정권에 놓인 미국에도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우리 또한 증액 압박에 맞서왔다. 다만 더 부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한국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나라가 돼 있다. 그 성장의 바탕에 미국이 제공해준 안보가 있었음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정부는 협상 과정에서 방위비 같은 안보 이슈를 먼저 꺼내지 않겠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한시적인 유예기간이 끝나자마자 되살아날 25%의 관세 폭탄 앞에서는 안일한 접근이다. 분야별로 가치가 다른 협상 카드들의 효용을 극대화하고, 담판 과정에서 상대를 설득할 최적의 조합을 찾으려면 우리가 선제적으로 묶어낼 필요가 있다. 큰 틀에서 통 크게 거래의 고차방정식을 만들어내야 한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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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정은]포장에 그쳐선 안 될 민주당의 외교안보 ‘우클릭’

    얼마 전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관계자에게서 “한국의 민주당이 정말 중도 보수냐”는 질문을 받았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우리는 진보가 아니다”며 중도 보수를 자처하는 발언을 내놓으면서 논란이 이어지던 시점이었다.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한국 야당의 이념 성향 변화까지 이런 속도로 업데이트하고 있었던가. 이 관계자는 이 대표의 발언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기보다 민주당 노선이 실제로 바뀔 가능성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듯했다.美에 도표 그려가며 ‘중도 보수’ 역설민주당 의원들은 요즘 자신들이 접촉하는 미국 측 인사들에게 자신들이 중도 보수라고 설명한다고 한다. 미국 정부 관계자들을 접촉한 지난달 한 면담 자리에서는 한국 진보 정당의 뿌리가 원래는 보수였다는 점을 강변하며 아예 도표를 그려 보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들은 모두 워싱턴의 상부로 보고됐을 것이다.미국 외교안보를 담당하는 당국자들이 주 52시간이나 상법 개정안 같은 한국의 경제, 민생까지 관심을 가져서 그랬을 리 없다. 조기 대선이 치러지고 정권이 교체됐을 경우 한국의 대미, 대중 정책 같은 외교안보 방향이 어디를 향할지 가늠하려 했을 것이다. 탄핵 정국 이후의 여러 시나리오를 미국 또한 들여다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민주당이 미국 측에 ‘중도 보수’ 노선을 역설한 것은 자신들의 대외정책 노선을 미국이 껄끄럽게 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 아니었을까.중국,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중시했던 문재인 정부는 트럼프 1기 행정부와 툭하면 삐거덕거렸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하노이 정상회담이 틀어진 이후 비핵화 문제는 물론이고 종전선언,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중국 견제 등 주요 현안마다 충돌했다. 고위 당국자가 대놓고 ‘죽창가’를 외치는 문 정부의 대일 기조 또한 한미일 협력을 외쳐온 미국과 어긋났다. 미국 당국자들이 한국을 향해 “보조를 맞춰야 한다(in lockstep)”는 표현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던 게 이때다. 보조가 안 맞는다는 미국의 불편함이 역설적으로 더 드러났다.백악관과 국무부 당국자들은 겉으로는 “어떤 정권이냐는 상관없다. 이념은 달라도 각자의 국익에 따라 외교를 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국과 다른 외교노선을 타는 동맹국 정부를 향해 보이지 않게, 때로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강대국의 실력행사를 주저하지 않는 게 미국이다.민주당이 지난해 4월 총선 이후 물갈이가 된 만큼 노선 변화가 적잖다는 분석도 있다. “반미나 반일 감정을 건드리는 발언은 이제 안 나오지 않느냐”는 내부 항변도 들었다. 그러나 중도 보수를 외치면서 주요 정책마다 좌클릭하며 돌아가는 이 대표의 오락가락 행보를 보면 외교안보 분야라고 다를지 의문이다. 586 운동권 인사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크고,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으로 알려진 원로 전문가들도 건재하다.외교안보만큼은 오락가락 행보 안 돼국내 현안을 놓고 정치적 계산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행보는 피곤할지언정 안에서 감내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상대국이 있는 외교안보는 다르다. 말이 바뀌고 불신이 쌓이는 만큼 국가적 손해가 커진다.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전했던 문재인 정부에 대해 “속았다”고 생각했고, 그 인식이 향후 한국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당 노선을 물었던 미국 당국자가 대화를 끝내면서 했던 말은 “트럼프 대통령은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란 한마디였다. 민주당이 집권하든 야당으로 남든 피해 갈 수 없는 경고로 들렸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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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가 만난 사람]“가족 희생하는 치매 돌봄은 미담 아닌 괴담… 통합지원 이뤄져야”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 길을 잃어버려 집으로 못 돌아오는 할아버지, 폭언과 분노 표출이 부쩍 잦아진 배우자…. ‘나’를 잃고 변해가는 치매라는 질병은 당사자만큼이나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에게 고통이다. 돌봄의 정신적,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느라 가족들 또한 또 다른 의미에서 ‘나’를 잃어가는 경우가 많다. 의료비보다 돌봄 비용의 비중이 크고, 심적인 스트레스로 간병살인 같은 극단적 선택을 부르기도 하는 게 치매다. 김용익 돌봄과미래 이사장은 17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치매 환자는 여러 종류의 노인 돌봄 중에서도 가장 난도가 높은 대상”이라며 “가족에게만 이 부담을 떠넘기는 정책적 방치”라고 지적했다. “치매 대응은 정부와 지역사회가 함께 나서야 하는 문제”라며 “가족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치매 환자들이 집에서 함께 생활할 수 있는 맞춤형 돌봄체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의사 출신인 그는 공직 활동을 끝내고 돌봄 연구와 제도화 지원에 집중하고 있는 보건정책 전문가다.》―고령화 추세 속에 치매 환자가 내년 100만 명, 2044년엔 200만 명대에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7년 전에도 같은 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전망치와 비교하면 치매 환자의 규모나 증가 속도가 다소 완화됐다. 당시 전망으로는 올해 이미 100만 명이 넘고 2050년에는 300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했었다. 조기진단 시스템 등 그동안의 여러 치매 관리가 조금은 성과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한국의 인구집단에서 규모가 가장 큰 베이비붐 세대가 노인 단계에 진입하고 있는데, 이분들의 소득이나 교육수준이 과거보다 높아진 것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치매 예방이나 치료가 가능한 약재가 발견된다면 더 좋아질 것으로 본다.” ―치매 돌봄의 경우 형태나 성격이 다른 질병과 어떻게 다른가.“치매는 노인 돌봄의 여러 종류 중에서 난도가 가장 높다. 노인들이 겪는 질환은 중풍, 고관절 골절 같은 신체적 문제와 노인성 우울, 치매 같은 정신적 문제가 있다. 치매는 그 자체가 어려운 병인데 여러 질병이 같이 온다는 점에서 더 어렵다. 고혈압과 당뇨, 치과 질환, 청력 손실 같은 것들이 같이 오고 이것이 다시 치매를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노인들이 얻게 되는 만성질환 개수가 보통 2.2개인데 치매 노인의 경우 4개나 5개가 한꺼번에 온다. 그래서 돌봄은 더 어렵고 비용도 더 많이 든다. 병의 덩어리 자체가 크다.” ―드라마에 치매의 중증 사례들이 극화돼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보는 것만으로 부담이 되는 상황들인데….“치매를 빙산으로, 삼각형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다. 가벼운 인지장애가 있는 초기 상태의 경우가 대부분이고 중기, 후기로 갈수록 수는 적어진다. 단어를 잊어버리고 때로 기억이 소실되는 정도의 경증 단계에서는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 중증으로 악화하면서 행동장애와 망상, 의심, 분노장애가 오는 경우는 전체의 15% 정도다. 식사를 한 직후 왜 밥을 안 차려 주냐고 버럭 화를 내는 사례 등 TV에 나오는 게 중증 단계다. 중증 환자가 특히 문제다. 가족 부담은 감당이 안 되는데 시설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진퇴양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특별 대책이 필요하다.” ―그 특별 대책이라는 게 무엇인가. “가정 방문형 돌봄을 강화하고 중증 치매를 받아 주는 시설에 대해 수가와 인력 지원 등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기술 지원도 따라가야 한다. GPS 위치 추적이나 웨어러블 장비를 통한 환자의 상태 관리 등은 외국에서 이미 널리 활용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치매 관리 체계만 따로 만드는 ‘로빈슨 크루소’ 식의 대응은 안 된다. 지역돌봄이라는 큰 틀을 만들고 그 바탕 위에서 치매라는 어려운 문제를 패키지로 다뤄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작년 2월에 통과한 ‘지역돌봄 통합지원법’이 내년 3월 전국적으로 실시된다. 전국 모든 지자체가 지역사회 돌봄에 나설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미래에는 전 국민 의료보장처럼 전 국민 돌봄 서비스 제공이 이뤄지는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지역돌봄 체계가 갖춰지면 돌봄 방식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지나.“현행 수준의 돌봄 시스템에서는 가족의 희생이 너무 크다. 무급 가사노동의 72%는 여성이 한다는 통계가 있다. 결국 아픈 노인이 행복하려면 여성이 희생돼야 하는 구조다. 이 충돌이 모든 가정에 끼어 있는 먹구름의 실체다. 가족의 이 희생이 없으면 노인들은 갈 곳이 결국 시설밖에 없게 된다. 집에 머물면서도 가족들의 정신적, 물질적 부담을 최소화하는 게 관건이다. 지역돌봄 통합지원은 정부가 각 가정으로 복지, 의료, 재활을 비빔밥처럼 통합해 배달해 주는 개념이다. 집을 베이스로 놓고 낮에 어린이들이 유치원 가듯이 노인들이 ‘노치원’을 다니면 여성들도 자기의 일상을 사는 게 가능해진다. 사회복지사와 의료인들이 각 가정을 맞춤형으로 찾아다니게 되니 고독사를 방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치매는 때로 24시간 관리를 필요로 하는 질환이다. 집에서 돌봄이 가능할까.“물론 어려움이 많지만, 다양한 아이디어를 개발해 해외에서는 ‘살던 곳에서 늙어간다(aging in place·AIP)’라는 개념이 실제 이뤄지고 있다. 유럽의 경우 ‘케어팜’이라고 부르는 돌봄농장이 많다. 네덜란드의 노인들이 목축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연치유 효과를 누리는 식이다. 한국은 목축보다는 밭농사인데 이 또한 고되지 않게 맞춤형으로 강도와 활동을 조절하면 된다. 다양한 한국형 아이디어들을 개발해서 시도해야 한다.” ―거액의 예산이 투입돼야 가능한 일 아닌가. 관련 예산 부담은 지금도 이미 급증 추세다.“돌봄이라는 꼬리표를 단 예산이 당장에 따로 책정되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건강보험과 노인장기요양보험에서 혜택을 조금씩 확대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것으로 본다. 돌봄을 쓰고 끝나는 돈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한다. 돌봄이 일으키는 경제가 있다. 우선 돌봄 일자리가 생기고 욕창 방지 매트리스나 보행기, 가정용 의료기기 같은 수요가 늘면서 관련 산업도 커질 것이다. 보행기가 갈 수 있도록 문턱을 없애는 등 집을 개조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인공지능(AI)과 스마트화된 기기가 돌봄에 더 많이 쓰이게 될 것이다. 돌봄체계의 구축 과정에서 제4차 산업혁명도 진척될 것으로 본다. 고령화를 기회로 보고 과감하게 투자할 필요가 있다.” ―50, 60대가 80대 부모를 돌보는 노노(老老)케어 사례가 늘고 있다. 최근엔 간병살인이 사회 문제로 불거지기도 했다.“지역사회 인프라가 없으니 돌봄의 가족화가 지나치게 진행돼서 생긴 문제들이다. 가족돌봄은 자기 삶을 희생하지 않는 선에서, 돌봄 비용은 기존 생활수준을 떨어뜨리지 않는 수준에서 이뤄져야 한다. 가족들의 역할은 환자와의 정서적 유대감, 안정감, 보호, 긴급대처, 치매 같은 정신장애의 경우 대리 결정 등 가족만이 할 수 있는 일로 채워져야 한다. 자기 인생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가족을 돌보라고 강요하는 건 못할 짓이다. 어머니가 장애인 아들을 업고 다니며 대학까지 보냈다는 이야기가 미담이 돼서는 안 된다. 가족의 희생이 당연시되면 미담이 아니고 괴담이 된다. 우리 사회는 과거 유교적 전통과 인식이 강해서 그랬던 측면도 있지만, 이제는 가족의 역할이 변했다. 그냥 놔두는 것은 정책적으로 방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김 이사장은 3세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다. 목발을 짚은 채 돌봄 정책과 관련한 세미나 등 관련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그는 “돌봄 시스템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여러 사람의 참여가 동력”이라고 했다. ―돌봄에 관심을 갖게 되신 계기는 무엇인가.“1970년대에 서울엔 판자촌이 가득했다. 청계천과 모래내, 문래동…. 난지도에는 쓰레기가 정신없이 쌓여가던 때다. 자유로가 생기기 전 난지 샛강에 온갖 곳에서 퍼온 분뇨를 쏟아부었다. 그 먼지와 열기 속에서 쓰레기를 뒤져 살아가던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근처 진료소에 견학을 간 적이 있었는데 기억이 뚜렷하다. 그 이후 의료봉사를 하게 됐다. 4년간 매주 주말마다 거의 빠짐없이 봉사활동을 했다. ‘지역사회 의학’이라는 공부도 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부채의식 같은 게 남아 있다. 나의 의학은 진료실이나 연구실이 아닌 길바닥에서 태어났다.” ―고령에 불편한 몸으로 뒤늦게 시작한 재단 업무가 힘드시진 않나.“정책 업무를 하면서 돌봄에 대한 사명감 같은 게 있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을 그만둔 이후 곧바로 ‘돌봄과미래’ 재단을 만들었다. 그때가 만 70세였는데, 80세가 될 때까지 10년간 돌봄운동을 할 작정으로 시작했다. 이제 3년째가 된다. 취지에 공감한다면서 격려하고 동참해준 사람들 덕분에 후원자가 400명으로 늘어났다. 그 두 배쯤 후원회원이 늘었으면 좋겠다.”김용익 돌봄과미래 이사장△1952년 충남 논산 출생△1971∼1983년 서울대 의대 학사, 석사, 박사(예방의학)△1984∼2013년 서울대 의대 교수△2006∼2008년 대통령사회정책수석비서관△2012∼2016년 제19대 국회의원△2016∼2017년 민주연구원 원장△2017∼2021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2017년∼현재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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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정은]‘협상 카드가 없는 나라’의 굴욕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몰아치고 다그친 정상회담의 마지막 10분은 지켜보기가 민망했다.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회담에서 강대국 지도자가 상대국을 그토록 노골적으로 면박 준 장면은 찾기 어렵다. 부통령과 언론인이 가세한 협공은 ‘매복’ ‘함정’ 등의 평가가 나올 정도로 일방적이었다. 역사에 남을 굴욕의 현장이다. 우크라이나 뒤에는 그간 지지를 표명해준 28개 유럽 국가가 있었다. 자국을 무력 침공한 러시아에 맞서 영토와 주권을 지키겠다는 명분도 확실했다.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희토류를 확보하려는 미국에 내밀 광물 자원도 상당했다. 그 어느 것도 트럼프 대통령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안전보장의 교환 조건으로 쓰려던 광물은 과거 받았던 지원에 대해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가 돼 버렸다. 우크라이나가 침략 피해자가 아니라 “러시아를 자극해 전쟁을 촉발한 나라”로 위치가 뒤바뀌어 버린 것도 순식간이다.트럼프 공세에 맞대응 실패한 우크라 궁지에 몰린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에게는 (협상) 카드가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벌써 3년째 전쟁을 치르며 국력을 소진한 우크라이나가 반박할 근거는 없어 보였다. 땅덩이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크지만 사회 분열과 부패에 시달려온 나라, 국내총생산(GDP) 순위가 57위에 그치는 나라, 러시아로부터의 안보 위협이 상존했음에도 이에 대응할 외교력이 부족했던 나라가 처한 엄연한 현실이다. 국제정치는 냉혹하다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몰고 온 냉기는 초저온이다. 한국도 어느 시점에선 신(新)외교 빙하기의 한가운데서 그를 상대해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앉았던 백악관의 의자에 한국 대통령이 앉게 됐을 때 공개적으로 “한국이 미국을 호구 삼았다”는 협공을 받게 되지 말란 법 없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핵 협상에서 패싱 우려를 제기하는 한국에 “북한이 안보 불안 때문에 핵 개발에 나서도록 촉발하지 않았냐”는 식의 공격이 가해진다면? 미국이 안보 지원의 대가로 한국의 핵심 이익을 양보하도록 압박하는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게 마냥 뜬금없는 상상은 아니다.젤렌스키 자리에 韓 정상이 앉는다면 70년 넘게 동맹을 유지해온 미국과의 경제, 안보 협력이 쉽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알던 미국은 이제 없다’는 전제에서 새로운 전략을 찾아야 할 때다. 유럽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악을 대비하자”며 방위비를 대폭 증액하고 유럽 중심의 안보 연합 구성 추진에 나섰다. 기존의 나토(NATO)에서 미국을 뺀 유럽만의 ‘이토(ETO·European Treaty Organization)’를 만들자는 제안도 나오는 판이다. 주요국들이 앞다퉈 추구하는 ‘자력갱생’의 핵심은 국부(國富)다. 조 단위로 이뤄지는 국방비 증액도, 미국발 관세 폭탄 대응도 모두 국가의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이런 바탕이 탄탄해야 ‘거래적(transactional)’이라는 키워드로 설명되는 트럼프 행정부에 우리만의 협상 카드를 내밀 수 있을 것이다. 방산과 반도체 등 핵심 산업 분야의 초격차 첨단기술을 보유하는 것도 주요한 협상 카드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최대 관심사는 중국 견제, 그 과정에서 강화해온 미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과 기술 협력이다.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갖고 있다면 그게 손에 쥔 카드다. 그 카드가 점점 얇아지고 작아지고 있는데도 정상 외교는 공백 상태에 여야는 극단의 정쟁만 이어가고 있다. 반도체특별법은 공전이고 거야(巨野)는 상법 개정안으로 경제를 흔들어대는 중이다. 우리에게 그럴 여유가 아직도 남아있다고 착각하는 정치권의 행태에 속만 터진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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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정은]부정선거 의혹이 키운 혐중… 외교 부담만 커진다

    다이빙 주한 중국대사는 이달 초 조태열 외교부 장관을 첫 공식 예방한 자리에서 조 장관의 부친인 조지훈 시인의 시 ‘새아침에’를 읊었다. ‘출렁이는 파도 위에 이글이글 태양이 솟듯이/그렇게 열리라 또 그렇게 솟으라’는 마지막 구절을 언급했다고 한다. 이태백 같은 옛 문장가들의 한시를 정상회담 등에서 자주 인용해온 중국이 시를 꺼내든 것이 새롭지는 않다. 그래도 다이 대사가 조지훈 시인의 시 일부를 낭송한 것은 부친에 대해 존경심이 각별한 조 장관을 위한 맞춤형 준비였을 것이다. 한중관계를 새롭게 개선해 태양처럼 ‘이글이글’하게 만들자는 취지의 설명에 접견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고 참석자들은 전한다.껄끄러운 대중 외교 현안 쌓였는데… 이런 외교적 노력이 무색하게도 한국은 거센 계엄의 후폭풍 속 중국의 선거 개입 논란으로 시끄럽다. 윤석열 대통령 측 대리인단은 헌법재판소 변론 과정에서 중국의 선거 개입을 기정사실화한 질의를 계속했다. 현직 대통령이 의혹 제기에 앞장서니 지지자들의 동요가 잦아들 리 없다. ‘캡틴 아메리카’ 복장을 한 유튜버가 주한 중국대사관에 “테러를 하겠다”며 난입하려 한 사건은 어쩌면 예고된 난동이었다. 해외에서 불거진 선거 개입 의혹들을 보면 중국을 의심해 볼 만하긴 하다. 지난해 대만선거에서는 ‘스톰1376’이라고 불리는 친중 그룹이 인공지능(AI)을 이용해 후보들에 대한 가짜 동영상과 밈을 생성, 유포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 대선에서는 러시아와 중국, 이란이 모두 선거 개입을 시도했다는 게 중앙정보국(CIA) 같은 정보 당국의 판단이다. 캐나다는 2019년과 2021년 연방선거에 중국이 연달아 개입했다는 의혹이 확산되면서 이를 조사할 특별보고관이 임명됐다. 다만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목적으로 여론 조작을 했다는 것과 선거 시스템을 해킹해서 결과에 직접 손을 댔다는 건 다른 이야기다. 해외 주요국에서 문제가 된 중국의 시도들은 ‘스패머플라지(spam+camouflage)’라고 불리는 허위정보의 소셜미디어(SNS) 유포나 특정 후보에 대한 간접적 자금 지원 등으로, 개표 시스템 서버에 침투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올해 1월 나온 캐나다 특별보고관의 최종 보고서를 보자. 122쪽짜리 보고서는 “중국 등 해외 국가들의 선거 개입 시도가 실제 있었다”고 했지만 “제한적으로 이뤄졌고, 선거 결과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근거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국내에서도 2년 2개월의 심리 끝에 나온 대법원 판결은 물론 현재까지 윤 대통령 측이 내놓은 자료 중 계엄 선포까지 해야 할 부정선거 증거를 확인한 것이 없다. 한중관계 관리는 올해 우리의 주요 외교과제 중 하나로 꼽힌다. 중국은 여전히 우리의 최대 수출국이고 첨단기술 분야에서 치고 올라오는 나라다. 10월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시진핑 중국 주석의 방한이 예상된다. 한중 정상회담은 물론 시 주석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한국을 무대로 펼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한중 양국이 지속적으로 협의해야 할 의제들이 줄줄이 생겨날 것이란 의미다.국내 정치적 이유로 嫌中 조장 안돼 그 과정에서 중국과 때로 얼굴을 붉히고 정면으로 맞서야 할 이슈들은 많다. 역사와 문화 논쟁부터 사드(THAAD)와 한한령, 탈북자 북송 문제 등 껄끄러운 현안들도 언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지 모른다. 정확한 팩트를 바탕으로 냉철하게 대응해도 모자랄 판이다. 확실한 근거도 없는 부정선거 의혹으로 반중 감정에 휘둘리며 중국에 공격 빌미를 줄 여유가 어디 있나. 국내 정치적 이유로 부풀어 오른 혐중(嫌中) 여론이 이글이글 타오르게 놔두는 것은 정상 공백 속 가뜩이나 힘든 대중외교의 걸림돌만 될 뿐이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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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정은]‘애국시민’ 여러분, 애국하고 계십니까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영장 발부에 반발한 시위대가 서울서부지방법원에 난입한 폭력 사태는 4년 전 미국에서 벌어진 1·6 의회 난입 사태와 닮았다. 보수 대통령이 주장하는 부정선거 의혹 속에 성난 지지자들이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기관으로 몰려가 창문을 깨고 문짝을 부수며 내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음모론을 주장하는 ‘프라우드 보이스’ 같은 단체가 앞장서며 경찰과 거칠게 충돌했다.법치와 국격 훼손한 폭력난입 사태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에게 잊혀지지 않는 또 하나의 장면은 폭력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상황이 종료됐다고 생각하던 시점에 나왔다. 군복 차림의 병사 수백 명이 의회 내 곳곳에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총을 들고 완전군장을 한 채 로툰다홀을 일렬로 가로지르는 군인들도 있었다. 사태 발생 며칠 뒤 조용해진 의회 안으로 발을 디딜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의회와 군대의 무시무시한 부조화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들은 준(準)전시 상황이 되어버린 워싱턴에 투입된 주방위군이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에 또다시 벌어질지도 모르는 폭력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당시 2만 명이 넘는 주방위군이 투입됐는데, 이들 일부가 숙박시설이 아닌 의회 안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의 추가 폭력에 대비하려고 이렇게까지 많은 병력을 투입할 필요가 있나’ 생각했지만 당시 분위기는 그만큼 삼엄했다. 이들의 철수가 완료되기까지는 이후 두 달이 걸렸다. 의회 혹은 사법기관을 겨냥하는 정치적 폭력 사태는 그 자체로도 심각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이 반복되고 확산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틀 속에서 서로가 지켜왔던 법치의 선을 넘어버림으로써 내부 혹은 반대쪽 진영을 자극하게 된다. 가뜩이나 악화하는 정치 양극화를 극단으로 치닫게 만든다. 한번 경험한 폭동은 불안을 키우고, 그렇게 불어난 불신은 점점 더 많은 공권력 투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국가적 낭비다. 윤 대통령의 석방을 요구하며 서부지법 앞에 모여있던 이들은 윤 대통령이 ‘애국시민’이라고 부르는 지지자들이다. “나라 안팎의 주권침탈세력과 반국가세력의 준동으로 위험해진 대한민국”을 지켜달라는 윤 대통령의 편지 속 당부 메시지가 향했던 사람들이다. 방식과 방향은 다르지만, 국가의 부를 쌓고 안보를 지키는 일에 진심인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20대 학생부터 80대 기업인까지, 보수의 가치에 공감하며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나온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폭력 사태로 애국시민은 어느새 극우 유튜브의 음모론에 휘둘리는 막무가내 세력으로 치부될 처지에 놓였다. 한국의 대외적 이미지를 갉아먹고 국격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됐다. 계엄만도 벅찬데 폭력 사태까지 벌어졌으니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주최했던 국가로 국제사회에 명함을 내밀기도 민망하다. 주요 8개국(G8)이니 G10 같은, 선진국 그룹으로의 편입 기대도 당분간은 접을 수밖에. “안정적인 자유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는 국가적 신뢰가 기본 조건인데, 그 전제에서 너무 멀어져 버렸다”는 탄식이 나온다.반복, 확산하며 피해 키울 가능성 우려 둑이 터져버린 폭력적 선동은 또 언제, 어떻게 되풀이될지 모른다. 헌법재판소 앞에서는 벌써 3명이 월담을 시도하거나 경찰과 충돌했다가 체포됐다. 윤 대통령의 구속영장을 발부한 판사는 신변 보호를 요청해야 했다. 긴장감이 팽팽해진 현장에서 또 무슨 우발적 상황이 벌어질지 조마조마하다. 흔들리는 법치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소모되는 국가적 에너지도 상당할 것이다. 이런 일을 벌이고 또 동조하는 것이 진짜 애국시민들이 하겠다는 애국이냐고 묻고 싶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2025-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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