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음]미당 서정주 시인 부인 방옥숙여사 별세

  • 입력 2000년 10월 11일 19시 45분


'오랜 가난에 시달려온 늙은 아내가 / 겨울 청명한 날 / 유리창에 어리는 관악산을 보다가 / 소리내어 웃으며 / "허허 오늘은 관악산이 다 웃는군!" / 한다. / 그래 / 나는 / "당신이 시인인 나보다 더 시인이군! / 나는 그저그런 당신의 대서(代書)쟁이이고…" / 하며 / 덩달아 웃어본다.'

10일 노환으로 작고한 미당(未堂)의 '꽃순이' 방옥숙(方玉淑·81) 여사는 서정주(徐廷柱·84) 시인에겐 내조자 이상가는 평생 동반자였다. 지난해 겨울 1년여만에 쓴, 아마 생애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시 '거울 어느날의 늙은 아내와 나'에서 미당은 평생 자신의 공업이 아내의 '대서쟁이' 역할에 불과했음을 선선히 고백했을 정도였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지난 1938년. 빈민굴로, 절간으로 바람처럼 흘러다니는 열혈 자식을 집안에 붙잡아두기 위해 미당의 부친이 서둘러 중매를 든 것이었다. 당시 두 사람의 나이는 22살과 19살. 1983년 3월호 '신동아' 인터뷰에서 미당은 초면의 정읍 처녀와 혼인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에 대해 "화투패로 떼자 '님'이라는 별명이 붙은 공산(空山)은 안 떨어지고, 중매장이로 통하는 홍싸리 넉장이 고스란히 떨어진 때문"이었다고 눙치기도 했다.

미당은 종종 시를 빌어 아내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곁눈질'과 자유분방함에 대한 미안함과 이를 묵묵히 지켜봐준 고마움을 솔직하게 담은 작품이다. 1960년대말 쓴 '내 아내'라는 시는 그중 하나.

'나 바람나지 말라고 / 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놓은 / 삼 천 사발의 냉숫물. // 내 남루한 피리 옆에서 / 삼 천 사발의 냉수 냄새로 / 항시 숨쉬는 그 물결소리.'

미당의 집을 들락거렸던 후학들도 "방여사의 내조가 없었다면 지금의 미당은 없었을지 모른다"고 입을 모은다. 미당의 제자로 집안 일을 거들고 있는 시인 이경씨는 "가장 한국적인 여인상을 가졌던 사모님은 미당에게는 애인이라기보다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면서 "방여사는 '남편을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했다.

김재홍 교수(경희대)는 "평생을 해로했으면서도 부부는 말년까지 소년과 새색시처럼 토닥거리면서 정분을 나눴다"면서 "바깥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도 미당은 몇 년간 자리에 누운 아내 수발에 지극정성을 다했다"고 말했다.

평생의 반쪽을 잃어버린 미당은 지금 빈소를 찾지 않고 집에서 머물고 있다. 덤덤한 표정으로 멀리 관악산을 바라보며 슬픔을 억누르고 있는 모습이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든다. 위무차 집을 찾은 후학들에게는 "우리 할망구는 불쌍한 사람이다.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 뿐이다.

미당은 자신의 마지막 시 호흡을 '꽃순이'에 대한 사부곡(思婦曲)이 될 것임을 오래전에 약조한 바 있다.

"그녀 먼저 숨을 거둬 떠날 때는 / 그 숨결 달래서 내 피리에 담고, // 내 먼저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면 / 내 숨은 그녀 빈 사발에 담을까"('내 아내' 중)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