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퇴마록’ 작가 이우혁 “소설 말고는 실패한 인생”…셰익스피어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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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1일 13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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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에 뒷덜미 잡힌 인생… 화약공학자에서 소설가로
●"영화 '퇴마록'은 나와 상관없는 영화", 원작자 무시하는 세상
●어쩔 수 없는 딸바보, '딸에게서 운명을 느꼈다'
●'종결자' 내가 만든 말… 목표는 한국의 셰익스피어

‘딸에게만은 좋은 아빠이고 싶다’라는 게 작가 이우혁의 소박한 소망이다. 그는 ‘다다르진 못해도 꿈은 커야 된다는 의미’라면서 자신의 목표로 셰익스피어(1564∼1616)를 지목했다.
‘딸에게만은 좋은 아빠이고 싶다’라는 게 작가 이우혁의 소박한 소망이다. 그는 ‘다다르진 못해도 꿈은 커야 된다는 의미’라면서 자신의 목표로 셰익스피어(1564∼1616)를 지목했다.
《스타 작가 이우혁(45)은 스스로를 '소설 말고는 다 실패한 인생'이라 평한다.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공돌이'이자 전문가급 클래식애호가, 취미의 수준을 넘어선 조각가이자 '딸 바보'. 그는 '한국의 셰익스피어'를 꿈꾼다. 》

"내 인생이 그렇게 '퇴마록'에 뒷덜미를 잡힐 줄은 몰랐죠."

'퇴마록' 1000만부, '왜란종결자' 100만부, '치우천왕기' 50만부…. 23일, 서울 삼성동 인터컨티넨탈 호텔 로비에서 만난 이우혁은 "책 팔아서 먹고 사는 유일한 장르소설 작가"라고 자부했다.

최근 몇 년간 개인적 사정으로 집필을 쉬었지만 '퇴마록'으로 93년 데뷔한 이래 평균 연봉은 2~3억 가량 된다.

▶소설 쓰는 사람이 무슨 학문을 해?

이우혁은 '퇴마록' 이전에도 취미삼아 떠도는 공포이야기를 PC통신에 썼었다. 하지만 '퇴마록'은 그의 인생을 말 그대로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원래 한국화약에서 K-4 고속유탄발사기 개발에 참여했었어요. 그때 화약을 다뤄본 경험으로 석사 때 에어백을 연구한 성과가 좋았죠. '퇴마록' 쓰면서도 작가로 나설 생각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새로 오신 지도교수님이 '소설 써서 이름 팔린 사람이 무슨 공학을 한다고 그래?' 그러셔서 박사과정 진학 거부당하고, 연구소도 그만두게 됐죠. 창업도 잘 안 되고, 사무실만 남았어요. 그렇게 작가가 됐죠. 거길 작업실로 쓰면서."

이우혁은 연구소를 그만두던 날, 상사가 한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공학으로 세상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은 한계가 있다. 당신의 길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라고 하셨어요. 덕분에 이제는 후회 안 해요. 소설가가 대기업 임원 하는 친구들보다 더 좋아요. 정년도 없고, 글만 잘 쓰면 특별한 위기도 없고. 나는 황석영 선생처럼 평생 글을 쓸 겁니다."

서울대 기계설계학과에서 소성가공(塑性加工·물체의 굽어지는 성질을 이용해서 변형시켜 갖가지 모양을 만드는 가공법)을 전공한 이우혁은 '보수적인 명문가의 천덕꾸러기'다.

할아버지는 대한체육회 회장을 지냈고, 조병옥-신익희 등 훗날의 거물 정치인들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작은 아버지는 성균관 이사장을 지낸 유림의 거두, 열두 살 차이 나는 형은 경원대학교 부총장이다.

"순수문학도 아니고 대중문학이니까 '딴따라'로밖에 안 보는 거죠. '퇴마록'이 그렇게 팔려도 한동안 '지금이라도 유학 가서 교수해라'라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요즘은 나름대로 문체도 잡혔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그런 소리 안 듣지만. 제 소설로 국문과 교수들하고 토론도 하니까, 나름 인정받았다고 생각해요."

▶'퇴마록'은 당신 영화가 아니다

안성기-신현준-추상미 등 관록 있는 배우들이 참여했던 영화 ‘퇴마록’.
안성기-신현준-추상미 등 관록 있는 배우들이 참여했던 영화 ‘퇴마록’.
'퇴마록'이 크게 성공하면서, 이우혁은 정신없이 바빠졌다. 90년대 당시 한국의 화두는 '원소스 멀티유즈'였다. 많은 기획이 쏟아졌지만 성공한 것은 직접 관리한 온라인게임 '퇴마요새' 뿐이었다.

그나마도 스스로 스토리작가 외에 대표이사와 급할 때는 프로그래머까지 겸하는 생활이 너무 힘들어 그만두었다. 나중에 '온라인 퇴마록'이라는 게임도 기획했지만, 쓰디쓴 실패를 맛봤다.

"제가 기획할 때는 대기업 자금도 들어오고 빵빵했는데, 막상 오픈 한 달 전에 총책임자가 모든 걸 파괴하고 사라졌어요. 그 회사는 쫄딱 망하고… 한동안 인간 불신이 생겨서 힘들었죠."

영화 '퇴마록'은 더욱 처참하다. 안성기-신현준-추상미 등 관록 있는 배우들이 참여했고, '퇴마록'의 명성 덕분에 관객도 30만 명가량 들었지만, 이우혁에게는 '악몽 중의 악몽'일 뿐이다.

"악연이죠, 악연. 감독이 '내 영화지 당신 영화가 아니다' 그러더라고요. 분명 계약서에는 내 동의 없이는 촬영 편집 다 못하게 되어있는데, 한 콘티만 오려가더니 어느 날 갑자기 시사회를 해요. 첫 상영 때 날 보고 한 마디 하라기에 '여러분이 상상한 걸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랬죠. 그건 퇴마록이 아니에요."

이우혁은 "한국만큼 원작자가 무시당하는 나라가 없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전문적인 눈도 없는 자칭 전문인들'을 가장 싫어한다고 했다. '치우천왕기'를 재간하면서 출판사를 바꾸고, 소설가로는 드물게 에이전트를 둔 것에도 이 같은 이유가 있었다.

"영화를 못 찍어서가 아니라 나를 무시한다고 느껴지니 그게 화가 난 거죠. 매체에 맞게 고치는 건 당연한 건데, 원작자하고 의논을 해야죠. 그때는 애만 타고 무시당한다는 사실도 잘 모를 때예요. 영화랑 게임에 그렇게 당하고 나니까 조심하게 됐어요. 글이나 쓰라는 건가? 이게 신의 저주인지, 칙명인지. 소설 빼곤 인생이 다 말렸다니까."

▶딸에게서 운명을 느꼈다

어떤 실마리 하나에 빠져들면 며칠이고 작업실에 틀어박혀 그 생각만 한다는 그를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서 집에선 쫓겨나있는 셈'이라며 웃었다.

"생활리듬이 엉망진창이죠. 집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좀 부자연스러워요. 글이 잘 안될 때는 보름이고 한 달이고 작업실에 처박힐 때도 있어요. 앉아있다고 글이 나오는 게 아니니까."

'딸에게만은 좋은 아빠이고 싶다'라는 게 작가 이우혁의 소박한 소망이다. '차라리 공학을 계속 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라는 기자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젠 뒤돌아보고 살지 않아요. 우리 딸한테도 '아빠가 해야 할 일을 못한 건 많은데 하면 안 되는 일을 한 건 없다' 그랬어요. 소설 쓰는 게 내 숙명인데 뭐."

이우혁의 외동딸은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다. 딸 이야기가 나오자 '딸 바보'가 따로 없다. 그는 분만실에서 딸을 처음 만났을 때 '운명'을 느꼈다고 한다. "아빠야 울지 마 울지 마" 하니까 딸이 울음을 딱 그쳤다는 것.

"딸하고는 잘 통하죠. 그날 이후 아이 여럿 갖자는 소리를 안했어요. 유림에 있는 근엄한 집안 어른들도 딸아이만 보면 얼굴이 활짝 펴요. 항상 딸에게 선물 하나 줘야지 생각해왔는데 몇 년 지나는 사이 커버려서…"

이우혁이 말하는 '선물'은 유아용 애니메이션이다. 그가 깊게 참여한 '부루와 숲속 친구들'이라는 26부작 애니메이션이 5월 16일부터 KBS2에서 방영된다.

▶취미가 취미가 아니네

그는 한때 클래식 도사였다. 연구원 시절 그가 연출한 음악극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는 한동안 그의 프로필을 장식했다. 바그너의 오페라를 특히 좋아해서 총 러닝타임이 16시간 40분인 '니벨룽겐의 반지'는 줄줄 왼다.

관심 가는 게 있으면 '너무 파고들어서 연구하는 수준'까지 빠져든다. 각종 모델링도 전문가 수준. 프라모델은 기본이고 직접 모형을 갈고 다듬는 레진 모형에 한동안 미쳐 있다가 지금은 목공예에 빠져있단다. 평생의 꿈은 나무범선 공예다.

"세트를 펼쳐보면 이만한 책이 설계도로 들어있고 나무판자랑 봉 몇 개가 다예요. 내가 설계도 보면서 자르고 다듬고 해야 되는 거죠. 디테일이 엄청나요. 난간 같은 정밀한 부품들은 콩알만 한 것 하나에 몇 만원씩 해요. 칠해야하는 도료도 수십 종류고.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나는 아마 못 만들고 죽지 않을까요? 소설 써야 되니까."

이사할 때마다 가장 눈치 보이는 게 옷장을 가득 채운 모형 총이란다. 권총 장총 합쳐 100정이 넘는다. 그는 아직도 '터미네이터 2'에 나왔던 800만 원짜리 벌컨포 모형이 인터넷 경매에 나왔을 때 구입을 망설인 것을 아쉬워했다.

"총은 구성만 보면 쇠막대기랑 볼트 너트 유압실린더 몇 개가 다예요. 불필요한 군더더기 없이 가장 절약된, 아주 합리적이고 아름다운 메카닉이죠. 칼처럼 단순하지 않아요. 전체 구성을 잡고 독창적인 부분과 클리셰(진부한 표현이나 설정)를 잘 조합해야 좋은 글이 만들어지는 것과 비슷해요. 글도 자동차 굴러가듯 술술 읽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표는 셰익스피어, 전진!

그는 '다다르진 못해도 꿈은 커야 된다는 의미'라면서 자신의 목표로 셰익스피어(1564¤1616)를 지목했다.

"요즘 인터넷에 'xx 종결자'라는 말이 유행한다"라는 기자의 말에 "그거 내가 처음 만든 단어"라며 반색이다.

그에 따르면 원래 '종결자'는 '왜란종결자' 이전에는 쓰이지 않던 표현이라는 것. '퇴마사' 역시 전에는 쓰이지 않던 말이라고 했다. 가톨릭에서는 원래 '구마(驅魔, Exocism)'라고 불렀다.

"이제 가톨릭 신부가 주인공인 영화에서 퇴마사라고 홍보하는 거 보면 뿌듯하죠. 종결자가 일상어가 된 건 참 영광인데 갈 길이 멀어요. 셰익스피어는 자기가 만든 단어가 2천개가 넘어요. 그 사람 작품과 함께 널리 쓰이게 된 거죠. 윗층(upstairs)-아랫층(downstairs), 반 친구(classmate)도 셰익스피어가 만든 단어거든요. 나는 '퇴마사(退魔士)'하고 '종결자' 두 개밖에 없으니까."

이우혁은 지난해 8월 '바이퍼케이션-하이드라'를 발표하면서 4년여의 침묵을 깼다. 오는 28일 8년간 끌어온 '치우천왕기' 완결을 시작으로 올해 여름부터는 '퇴마록 외전', '퇴마록 소장판', '푸가토리움' 등이 줄줄이 나올 예정이다.

"오랜 시간 기다려준 독자들한테 빚 갚는 기분입니다. 묵혀뒀던 거 올해 다 쏟아낼 겁니다."

글·사진 동아닷컴 김영록 기자 bread4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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