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스타일리스트 정윤기“옷을 빛나게 하는 건 자신감”

  • 입력 2009년 6월 26일 02시 58분


《정윤기 인트렌드 대표(39). 15년째 쟁쟁한 스타들의 몸에 자신의 감각을 입히고 있는 국내 최정상급 스타일리스트. 그는 이제 스스로 스타의 반열에 올라 있다. 2000년대 초반 그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막 30대가 됐던 그는 1998년 세운 ‘인트렌드’란 패션 홍보대행사를 이끌면서 동아일보에 패션 관련 글을 기고했다. 국내 패션 시장이 커가는 무서운 속도만큼 그의 이름도 점점 유명세를 탔다.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시샘하는 무리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끝없이 ‘별’들이 뜨고 지는 패션계에서 ‘정윤기 효과’는 여전히 파워풀하다. 10년 우정을 쌓아온 그에게 “이젠 내가 당신에 대한 글을 써야할 때인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기꺼이 승낙했다. 3시간 넘게 허심탄회한 대화가 오갔다. 이처럼 인터뷰가 부담스러웠던 적도 없었다. 온전히 인터뷰어를 믿고 있는 ‘착한’ 그에게 민감한 질문들도 꺼냈으니. 기사 중 ‘※’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부연 설명이다.》

‘동대문표 티셔츠’ 즐겨 입어요

고현정, 정우성, 권상우… ‘워스트 드레서’될 땐 속타
야한 옷 자주 활용하지만 여친 미니스커트는 싫어

―그동안 돈 많이 벌었겠다. ‘돌체앤가바나’ 매장에서 연간 2억 원어치 쇼핑한다는 말도 들리더라.

“빛 좋은 개살구다. 1998년 4명으로 출발한 인트렌드는 지금 직원 38명으로 늘었다. 각종 강의나 스타일링을 해 개인적으로 돈을 벌지 않으면 직원 월급 대기도 빠듯하다. 개인적으로 버는 연간 수입은 대기업 임원 수준이다. 지금 살고 있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유엔빌리지 30평대 집은 전세다. 내가 좋아하는 ‘돌체앤가바나’ 브랜드에선 연간 5000만 원 정도 쇼핑하는 것 같다. 스타들이 내 이름으로 옷을 구입하는 비용을 합치면 2억 원 정도 될까.(※패션 브랜드들은 그가 옷을 구입할 때 10% 정도 할인 혜택을 준다. 그에게 간택 받아 스타들에게 입혀지는 옷들이 얼마나 큰 입소문 효과를 내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타들은 그의 이름을 빌려 할인 혜택을 받아 옷을 산다.) 난 동대문시장에도 매주 두 번은 가서 예쁜 티셔츠들을 산다. 개인 소장용 구두는 150개, 가방은 200개쯤 된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건물 2∼4층을 쓰는 인트렌드는 한 달 택배비용만 400만 원에 이른다. 수많은 패션 브랜드들이 이곳에 샘플을 맡기면 그가 이 샘플들로 스타들을 치장한다. 명품 전당포를 연상케 하는 이 곳엔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폐쇄회로(CC)TV도 있다.

―인트렌드가 국내 패션업계 홍보를 싹쓸이한다는 동종 업계의 불평이 들린다. 게다가 홍보비용을 덤핑 수준으로 낮게 받아 ‘홍보업계의 물’을 흐린다는 얘기도 있다.(※인트렌드는 현재 국내외 40여 개 패션회사의 홍보대행을 맡고 있다. 모두 ‘잘나가는’ 유명 브랜드들이다.)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지 않는가. 겉으론 화려해도 실상은 자금 흐름이 안 좋은 브랜드들 사정을 뻔히 아는데, 도저히 매몰차게 할 수가 없다. 난 마음이 약해 스타들에게도 정을 붙이면 그들이 ‘밥은 잘 먹고 있나’ 걱정이 된다.”

그의 집무실 책상 바로 맞은편에는 그가 스타일링해 온 스타들의 흑백사진이 액자에 담겨 있다. 고현정, 고소영, 김희애, 김혜수, 김정은, 손예진, 수애, 한예슬, 송윤아, 이정재, 차승원, 정우성, 권상우, 박태환…. 그의 책상 위에는 드라마 ‘결혼 못 하는 남자’ 대본이 놓여 있고, 스케줄 표에는 ‘송윤아 결혼식’, ‘서태지 콘서트’ 등이 빼곡히 메모돼 있다. 모두 그의 최근 스타일링 작업들이다.

―스타들과 동고동락하는 게 힘들지는 않은가.

“어느 날 스타가 나를 떠날 때 한없이 외로워진다. 몇 해 전 부산영화제 때 배우 이준기에게 ‘크리스찬 디올 옴므’의 턱시도 재킷을 입혔는데, 그가 ‘워스트 드레서’란 평가를 받았다. 세상의 낙오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런 일들로 마음의 상처를 받고, 때로는 자주 우울해진다. 요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극복하려고 노력 중이다.”(※최근 고현정이 그를 갑자기 떠나 다른 스타일리스트를 찾아갔다.)

그의 사무실에는 유럽풍으로 꾸민 응접실 한가운데에 대형 거울이 놓여 있다. 이 거울 앞에서 수많은 스타들이 그가 고른 옷들을 입어본다.

―여성 스타들과 작업하면서 그들에게 사적인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나.

“1990년대, 그러니까 내가 신인 스타일리스트였던 시절 영화 ‘노팅힐’과 비슷한 상황의 연애를 했다. 영화 속 휴 그랜트처럼 까마득하게 유명한 여배우를 짝사랑하다 잠깐 사귄 적이 있다. 결국 ‘해피 엔딩’은 아니었지만…. 요즘엔 일에 몰두해서인지, 늘 긴장해서인지 그런 상황은 생기지 않는다.”

―정말 미안한 질문인데, “정윤기는 ‘게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가.

“아니다.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했던 여자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누나가 많은 집에서 옷을 너무 좋아하며 자라서 또래들로부터 놀림도 받았다. 그런데 어쩌겠나. 난 정말로 옷이 좋은 걸. 매장에서 옷을 보면 몇 초 만에 ‘감(感)’이 확 온다. 스타일리스트는 노력 90%에 직관 10%로 이뤄지는 것 같다. 매달 외국 패션 관련 서적 30여 권을 주문해 읽고 있다.”

―만약 어느 여성에게 프러포즈한다면 어떤 옷을 입겠는가.

“흰색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그녀와 함께 자전거를 탈 것이다. 자전거 앞에는 바구니를 매달고 그 안에는 수국을 담을 것이다. 한참동안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고 내려 그 꽃을 주면서 프러포즈하고 싶다. 난 수국이 슬퍼 보여 운 적도 있다. 신부는 흰색 튜브톱 드레스에 면사포를 굉장히 크게 해서 성스러운 느낌을 강조하겠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스타들에게는 몸의 실루엣을 강조하거나 야한 옷을 자주 입히면서도 정작 내 여자가 미니스커트를 입는 건 싫다. 나 역시 보수적인 한국 남자인 거다.”

그의 집무실은 온통 ‘키덜트’풍이다. 천장에는 아톰 인형을 달고, 유리창에는 디즈니 만화를 프린트했다. 토끼 인형의 목에는 그의 나비넥타이를 둘러매 주었다. 루이비통과 협업하는 일본 현대작가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의 그림도 있다. 국내 홈쇼핑에서 샀다는, 마치 액정표시장치(LCD) TV를 연상케 하는 네모난 유리 어항엔 세계 지도가 그려 있다. ‘헬무트 랭’과 ‘조르조 아르마니’ 디자이너 인형, 프랑스 ‘딥티크’ 향초와 향수들…. 그는 요즘 ‘입생 로랑’ 재킷과 옥스퍼드 슈즈를 신고 다니며 ‘클래식 스타일’에 푹 빠져 있다.

―요즘 유행하는 클래식도 결국 패드(fad·일시적 유행) 아닐까.

“어렸을 적 우주선을 타고 떠다니는 공상만화는 그 당시엔 실현 불가능한 먼 얘기 같았으나, 디지털기술 발달로 상당 부분 현실화됐다. 하지만 클래식한 정장은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다. 세상이 빠르게 변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클래식을 찾게 될 수밖에 없다.”

―패션에 문외한인 어느 남자 동료가 “스타일리스트가 뭐 대수냐. 그냥 있는 옷 골라 입히는 건데”라고 말하더라.

“1990년대까지 허드렛일로 여겨지던 스타일리스트를 하나의 당당한 직업군으로 만들었다고 자부한다. 예쁜 옷을 걸쳤다고 해서 다 멋있는 건 아니다. 옷 입는 사람을 멋있게 바꿔주는 게 스타일리스트의 존재 이유다. 요즘엔 직접 옷도 디자인하고 있다. 5년 후 엔 내 이름을 걸고 패션, 음식 등을 아우르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내려고 한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정윤기 씨가 말하는 스타

“고소영-손예진 맨얼굴도 예뻐요”

1970년 인천 출생. 1990년대 중반 광고대행사에서 프리랜서 스타일링 일감을 따내 스타들에게 옷을 입히며 ‘국내 남자 스타일리스트 1호’로 이름을 알렸다. 1998년 패션 홍보대행사 ‘인트렌드’를 설립했다. 그간 스타일링했던 스타들에 대해 그는 “이미연은 의리파이며, 차승원과 이혜영은 어떤 스타일링도 믿고 따라주고, 다니엘 헤니와 정우성은 한 끝 오차도 없이 옷을 잘 소화하며, 고소영과 손예진은 맨 얼굴도 변함없이 예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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