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관용에 대하여’…관용은 도덕적 선택?

  • 입력 2004년 9월 3일 17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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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에 대하여/마이클 왈저 지음 송재우 옮김/223쪽 1만원 미토

다원주의 시대가 됐건, ‘문명 충돌’의 시대가 됐건 관용의 강조는 이제 ‘일상의 비타민’이 되다시피 했다. 국내에서도 ‘톨레랑스’라는 이국적 상표로 새롭게 포장된 뒤 관용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만능열쇠처럼 받아들여진다.

미국 고등과학원 석좌교수로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적 연대를 강조하는 공동체주의 정치철학자인 저자는 관용의 지지자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관용에 대한 장밋빛 후광을 인정사정없이 제거한다.

그는 관용의 미덕이 이성에 기초한 도덕적 선택이라는 철학적 접근을 일축한다. 대신 관용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됐는가를 추적한다. 다민족 제국, 국제사회, 연방, 민족-국가, 이민자 사회 등 5가지로 유형화해 관용의 형성과 작동과정을 살핀다. 선험적 이론보다 경험적 관찰을 더 중시하는 이런 시각에서 포착된 관용의 역사는 피비린내 가득하다.

저자의 시각에 따르면 관용은 인류가 서로를 죽고 죽이다 기진맥진한 이후 비로소 생존의 수단으로 선택된 것이다. 그것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서로 생존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선택된 공존의 방식이다.

또 누군가를 관용한다(참고 견딘다)는 것은 곧 권력의 행사다. 그것은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행위다. 따라서 정치적 우열관계가 명확할 때 오히려 관용의 정신이 잘 발휘된다. 다민족 제국에서 소수민족일수록 제국을 충성스럽게 지지하는 것이나 국제사회에선 힘이 엇비슷할 때 분쟁이 발생하는 것은 같은 이유에서다.

이처럼 냉철한 시각은 관용의 한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그는 계급과 성, 종교, 교육 등 지극히 현실적 영역에서 관용의 모순성을 찾아낸다. 기독교국가에서 이슬람 여성의 히잡 착용을 허용해야 하느냐는 문제와 여성 할례를 허용하느냐는 문제는 관용의 한계가 시간과 공간에 따라 가변적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다. 또 관용의 이름으로 다른 종교를 용납하지 않는(관용하지 않는) 종교도 용인하는 모순이 존재한다.

공동체주의자로서 저자의 고민은 근대적 정체성과 통일성의 강조가 탈근대에 들어서 약화되는 상황에서의 관용의 문제다. 문화적 다양성의 존중은 그 답이 될 수 없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는 것만큼 무의미한 법칙도 없기 때문이다. 진보적 잡지 ‘디센트’의 공동편집자인 그가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 데는 관용에도 한계가 있다는 고민이 숨어있다.

“관용은 박해와 지나친 공포를 종식시키지만 사회조화를 위한 공식은 아니다”라는 그의 주장은 ‘관용은 최대공약수의 문제가 아니라 최소공배수의 문제’라고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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