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즈]‘TV OFF’…텔레비전을 끄면 가족 사랑이 보인다

  • 입력 2004년 4월 11일 17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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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호, 전영희 부부가 TV 없는 거실에서 자녀의 책읽기과 놀이를 도와주며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다.박영대기자sannae@donga.com
한정호, 전영희 부부가 TV 없는 거실에서 자녀의 책읽기과 놀이를 도와주며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다.박영대기자sannae@donga.com
《성균관대 의대 병리학과 한정호 교수(43)와 부인 전영희씨(39)의 서울 강동구 성내동 아파트 거실은 모서리의 CD꽂이를 빼고는 텅 비어 있다.

이곳에는 TV가 없고, TV장, 소파 등 TV 시청과 관련한 가구가 없다. 지난해까지 미끄럼틀과 놀이기구가 있었지만 아이가 크면서 치우는 바람에 지금은 널찍한 ‘공간’만 남았다. 처음 온 사람들은 “황량한 벌판에 온 것 같다”며 “곧 이사 가느냐”고 묻곤 한다.

한 교수는 “신혼 때 아내의 제안으로 조용한 보금자리를 위해 TV를 안방으로 치웠고, 아이들에게는 교육을 위해 ‘왕따 예방 차원’에서 꼭 봐야 할 경우가 아니면 TV를 안 보게 한다”고 말했다. 》

한 교수 부부와 승환(초등5), 재원(7) 남매는 저녁식사가 끝나면 거실이나 식탁에서 책을 읽거나 대화를 나눈다.

전씨는 “아이들은 TV를 안 보면 차분해지고 책을 찾게 된다”며 “명절 때 등 어쩔 수 없이 TV를 많이 보면 쉽게 흥분하고 말이 거칠어지는 것을 금세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승환이의 경우 매주 5, 6권의 책을 읽고 있으며 지난 겨울방학 때에는 40여권을 읽었다. 최근에는 수학에 재미를 붙였고 경시대회에 나가 입상했다.

숙명여대 아동복지학과 서영숙 교수는 “많은 사람이 간과하고 있지만 TV를 끄면 가족과 자신을 위해 써야 할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절감한다”며 “특히 육아를 위해 TV 시청을 제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에서는 이런 이유 때문에 매년 ‘가정의 달’을 앞둔 4월 한 주 동안 ‘TV 끄기 네트워크’(www.tvturnoff.org) 주관으로 ‘TV 끄기 주간’(TV-Turn off week) 행사가 열린다. 19∼25일 열리는 제10회 주간에는 1만9000개 단체에서 760만명이 참가한다.

이 행사의 슬로건은 ‘TV를 끄면 삶이 살아난다!(Turn Off TV - Turn On Life!)’

▽TV 시청과 육아=한국에서는 TV 시청이 ‘게으른 부모에 어울리는 육아법’으로 자리를 잡아 많은 부모가 아이를 말썽 없이 내버려두는 방법으로 “TV나 봐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미국소아과학회(AAP)는 “어린이가 하루 2시간 이상 TV나 비디오 등에 매달리면 안 되고 특히 2세 이하의 젖먹이는 TV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TV에 대한 경고에 열심이다.

우선 아이가 TV에 빠지면 독서, 놀이, 대화시간이 줄어들게 된다.

최근 발표된 AAP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어릴 적 TV를 많이 본 어린이는 집중력이 약해지고 산만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TV를 많이 보는 아이는 사고력이 떨어지고 창의성이 줄어든다는 연구결과도 숱하다. 미국에서는 TV 시청이 비만의 주범으로 지탄받고 있다.

특히 2세 미만의 아기가 TV 앞에 있으면 뇌 형성에 장애가 생겨 말이 늦고 지능 발달이 더디며 사회성이 처질 가능성이 크다.

서울대 의대 정신과 류인균 교수는 “TV 시청은 중독성과 연관이 되며 어릴 적 TV에 빠지면 나중에 약물, 담배, 술 등에 빠질 개연성이 높아진다”며 “또 과도한 TV 시청은 아이들의 상상력 발달을 가로 막는다”고 경고했다.

아이들은 방송 프로그램을 보며 스태프의 지휘로 이뤄지는 방청객의 ‘조작된’ 반응에 따라가게 되며 특히 요즘에는 과도한 자막이 화면에 대한 해석까지 강요한다는 것이다.

▽“한 주만 끄세요”=현실적으로 TV를 전혀 안 보고 살기는 힘들지만 가족이 1주 정도 TV 안 보기를 실천하면 이후 TV를 ‘제대로’ 보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1주 안보기’를 실천하려면 우선 TV 시청에 중독성이 강하고 TV 없이는 살기 힘들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TV 안보기’를 선거 개표일, 중요한 축구경기 등이 포함된 주에 시도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으므로 피하도록 한다.

그리고 TV를 안 보는 시간에 읽을 책을 사거나 운동계획을 짜는 등 ‘힘든 과정’을 통과하기 위한 준비에 철저해야 한다.

TV 안보기 첫날에는 검은 천으로 TV를 가리고, 플러그를 뽑으며 시를 읊거나 TV에 작별 헌화를 하는 등 가족 이벤트를 실시하는 것이 좋다. 가급적 TV는 안방으로 옮기는 것이 성공 확률을 높이는 길.

1주 중 셋째 날이 가장 힘든데 이날만 넘기면 집안이 조용해지고 아이들이 순해지는 등 효과를 피부로 느낄 수 있어 나머지 기간을 채울 수 있다.

▽1주 행사에 성공하면=TV를 안 본 기간의 장단점에 대해 가족이 대화하는 시간을 갖고 이후에도 TV 부근에 ‘TV 시청 일기’를 두고 꼭 필요할 때만 보도록 한다.

가족끼리 TV를 절대 안 보는 시간이나 날을 정하는 것도 좋으며 아이들에게는 뉴스, 드라마 등 끔찍한 장면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안 보게 한다.

가급적 가족이 함께 시청할 프로그램을 정하고 가족이 유익한 비디오, DVD 등을 함께 보도록 한다.

TV는 적당한 거리에서 바른 자세로 앉아서 보도록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심신이 함께 흐트러져 TV에 수동적이 되고 TV 시청을 멈추기 힘들게 된다. TV 리모컨을 치우는 것도 필요 없는 프로를 안 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

▼TV만 보면서 큰 아이들…세대갈등-왕따문화 불러▼

“한국의 방송은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폭력적, 단정적이에요. 공영방송에는 왜 시청료를 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숙명여대 아동복지학과 서영숙 교수는 외국에서처럼 국내에서도 TV 안보기 또는 TV 제대로 보기 운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서 교수는 1994년 숙명유아원 원장 재임 때 미국보다 한 해 먼저 ‘TV 안보기 주간’을 시작했다. 이 유아원에서는 지금까지 1000여명 정도가 ‘TV 안보기 행사’에 참가했고 이 운동은 일부 학교, 교회 등으로 번져갔다.

서 교수는 처음 TV 안보기 행사 때 매일 아침 부모 40여명을 면담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젊은 부모들은 ‘부부와 자녀의 대화가 살아났다’, ‘초인종을 누르고 집안에 들어설 때 반갑게 맞는 아이들을 보며 아빠로서의 뿌듯함을 느꼈다’ 등 생각지도 못했던 경험들을 알려왔다.

서 교수는 “TV는 부모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하고 더러 성가신 존재로 느끼게 만든다”면서 “TV가 없으면 자녀는 부모에게서 재미를 찾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이가 TV만 보면서 크면 사회성과 커뮤니케이션 능력 등이 떨어지게 되며 TV는 세대간 갈등과 왕따 문화에 큰 역할을 해왔다”며 “그런데도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들을 TV와 사교육 시장에 맡기고 있다”고 우려했다.

TV를 끄면 사람과 대화하게 되며 공격성을 제어할 줄 알고 매사에 참을성 강한 아이가 된다는 것. 서 교수는 행사를 전개하면서 후원 가게를 구하며 새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서점, 문방구, 미장원 등에서 ‘TV 안보기 스티커’를 단 사람에게 할인을 해줬어요. 한 철물점이 후원사가 된 적도 있는데 주인이 ‘TV를 끄면 남자들이 집안일을 해 매상이 오른다’고 말했죠.”

서 교수는 “TV를 끄면 남성이 집안일을 시작하듯 여성은 안하던 뜨개질, 편지쓰기 등을 하게 된다”면서 “늘 바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TV를 끄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지를 절감하게 되며 가정에 눈길을 돌리게 된다”고 말했다.

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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