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은 왜 ‘남성’을 포기했을까…

  • 입력 2009년 9월 24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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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TV, 한중일 3국 궁중생활 차이점 조명

한중일의 궁중 생활은 어땠을까. 모든 것이 왕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궁궐에서 궁녀, 환관, 왕비는 어떻게 지냈고, 한중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아리랑TV는 다큐멘터리 ‘한중일 궁중생활사’(사진)를 통해 한중일 궁녀, 환관, 왕비의 생활을 조명했다. 28일과 29일은 1부 궁녀 편을, 30일과 10월 1일에는 2부 환관 편을, 2일과 3일에는 3부 왕비 편(이상 오후 7시 30분)을 방영한다.

궁녀는 한번 궁에 발을 들여놓으면 죽기 전에는 나갈 수 없다. 가사 노동을 담당한 그녀들은 음식, 바느질, 청소 등 체계적으로 일을 나눠 전문성을 키웠다. 조선의 제조상궁은 정1품 벼슬에 사대부 관료보다 많은 월급을 받았고, 일본의 에도 막부 당시 여관(궁녀)은 현재로 보면 억대 연봉의 고소득자였다. 궁녀가 될 수 있는 조건은 조선은 공노비의 딸, 명나라와 청나라는 일반 백성 딸, 그리고 일본은 무사나 관리의 딸로 각각 달랐다. 궁녀는 성욕이라는 본능을 해결하기 위해 동성애를 하기도 했다.

2부 환관 편에서는 남성을 포기하고 권력을 선택한 환관들의 얘기를 소개한다. 조선 시대 환관은 고환만 없고 성기는 남아있었지만 중국의 명과 청 시대 환관은 고환과 성기를 모두 잘랐다. 중국 환관과 달리 한국의 환관은 결혼도 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에선 환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환관은 양자를 들여 자식도 키웠다. 일정 나이가 되면 양자를 입양해 대를 이었고, 그 자식도 환관이 될 수 있었다. 왕의 눈과 귀 역할을 했던 환관은 엄청난 권력을 가졌다.

조선 시대에 왕비를 뽑기 위해선 사대부 처자들을 관직에 따라 입궐시켜 왕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외모부터 식습관까지 관찰했다. 이런 간택 과정을 세 번 거쳐 왕비를 뽑았다. 중국은 명나라 때 우선 1차로 처녀 5000명을 선발한 뒤, 8단계를 거쳐 최종 3명을 뽑았다. 최종 1인은 황후가 됐고 그 나머지 2명은 비빈이 됐다. 외모와 학식은 물론 손발의 크기까지 심사 대상이었다. 일본은 에도 막부 시대에 왕비의 권한이 쇼균(장군)의 정실부인에게 있었다. 정실부인은 문신 귀족 가문에서 뽑았고, 공개적인 간택은 없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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