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병합'국제학술회의]"日軍위협 아래 체결…조약성립안돼"

  • 입력 2001년 11월 18일 18시 26분


《세계 학자들이 모여 1910년 한일병합의 국제법적 정당성을 따지는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 이 학술회의는 ‘한국병합의 역사적 국제법적 재검토’를 주제로 16∼17일 미국 보스턴 셰라톤 커맨더 호텔에서 개최됐다. 이번 회의에는 한일 병합의 당사자인 한국 일본이외에 미국 영국 독일 등의 제3국의 학자들까지 참가해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한국 일본 및 제3국 학자들의 주장을 정리한다.》

◆ 한국측 입장

한국 학자들은 한일병합의 국제법적 부당성을 한목소리를 지적했다. 북한학자가 보내온 논문의 주장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이 문제에 관한 한 남북한 학자들의 시각이 일치돼 있음을 보여줬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이 문제를 집중 거론하며 일본학자들과 논쟁을 벌여 온 서울대 이태진 교수가 남북학자들의 입장을 가장 잘 대변했다. 이 교수는 1, 2차 워크샵의 논의를 종합해이번에 ‘1904∼1910년 한국 국권침탈조약들의 절차상 불법성’을 발표했다.이 교수는 한일병합 관련 조약들의 문제점을 드러내기 위해1876년 일본과 최초의 조약을 체결한 후 서양 국제법에 입각한 조약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으며 그것이 국내법에 어떻게 반영됐는가를 집중 논의했다.

이 교수는 “일본이 1876년 한일수호조약(일명 강화도조약)부터 1885년 한성조약에 이르기까지 6개 조약 체결에서는 형식과 절차의 준수를 주장했던 반면, 자체 군사력을 키운 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형식과 절차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러일전쟁 후 군사기지 사용권, 재정 감독권, 외교권, 내정권 등 국권과 관련되는 중요한 조약들을 비준도 없이 주무대신 또는 총리의 날인만으로 모두 약식으로 처리해 대한제국의 조약에 관한 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 영국 등 서구열강에 문제의 조약들을 통고하기 위해 조약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본과 다른 명칭을 사용했다고 이 교수는 지적했다. 양국간의 각서(memorandom)에 불과했던 제1차 한일협약은 영역과정에서 협약(agreement)으로 둔갑했고, 제2차 한일협약은 영역과정에서 ‘convention(국제협정)’이란 명칭이 고의로 추가됐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와함께 조약체결 과정에서 국가 및 국가를 대표하는 국왕에 대한 위협과 강제가 가해졌다는 증거들을 제시해 조약이 자유의지와 합법적 절차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밝혔다.

그 예로 러일전쟁 때 파견됐던 ‘한국임시파견대’가 ‘한국주차군’으로 바뀌어 대한제국에 주둔하며 새로운 조약을 강요할 때마다 동원됐으며, 1907년 고종황제가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사실이 드러나자 일본측이 이를 제2차 한일협약의 위반으로 몰아 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는 사실 등을 들었다.

또한 제2차 한일협약의 조인 과정에서 한규설 참정, 박제순 외무대신 등에게 위협을 가했다는 증거도 제시했다.

백충현, 김기석 교수는 조약 체결 과정에서 문서의 내용 또는 도장이 위조되거나 변조된 증거들을 제시해 이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결론적으로 이 교수는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과 관련된 조약에서는 황제와 대신들에 대한 무력에 의한 강제 속에서 대한제국이 정하는 절차를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결정적 결함을 남겼다”며 “따라서 한국병합은 법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국내법이 정하는 절차를 위반하고 황제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았다면 그 조약들은 무효 이전에 성립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 일본측 입장

한일병합의 법적 무효를 주장하는 한국측 학자들의 목소리와 달리 일본학자들의 주장은 다양한 편차를 보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이태진 교수와 논쟁을 벌여 온 운노 후쿠주 교수처럼 법절차상의 불법성은 인정할 수 없지만 역사적 인도적 차원에서의 잘못은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하라다 다마키 교수는 한일병합에 법절차상 불법성이 없었다고 단정했다. 사사가와 노리가츠 교수는 조약 체결과정의 강제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한국학자들의 논리에 동조했다.

운노 교수는 발표문 ‘한일병합 조약의 부당성에 관한 이태진 교수설의 재평가’에서 18세기와 19세기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법절차상 군주의 역할을 구분했다. “18세기 이전은 전제군주가 자유의지에 의해 조인을 했느냐가 중요하지만, 19세기부터는 군주가 헌법상의 조약체결권을 가질지라도 의회의 비준이 중요하다는 것이 국제법상의 일반적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처럼 조약체결권자의 권한이 강할 경우에는 19세기일지라도 의회가 군주의 의사에 거스르며 비준을 거부하기 어려웠고, 당시 일본에서도 의회의 비준은 아주 형식적이었다는 것.

운노 교수는 또 당시 23개국의 사례를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특정조약에 대해 의회의 비준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나라마다 다르고, 그리고 정식 조약 중에 비준을 필요로 하는 조약은 특별한 일부 외에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한일병합에 의회의 비준이 필요하다는 이태진 교수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하라다 교수는 “당시 황제는 무한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군주독재국가였기 때문에 법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의정부도 중추원도 의회가 아니라 황제의 자문기구에 불과했다”며 “대한제국의 일은 결국 황제에게 맡겨져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라다 교수는 또 제2차 한일협약이 황제의 재가 없이 신하가 마음대로 체결했다는 한국측 주장에 대해 “‘일성록’ ‘승정원일기’ ‘고종실록’ 등을 보면 이완용 등 5인의 대신이 상소를 올리고 황제 측에서 이를 인정한 내용이 있다”며 “이는 황제의 재가 하에 체결된 것임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태진 교수는 당시 공문서는 이미 일본이 장악한 상황이었다며 이 기록에 대한 불신을 표시해 사료를 보는 서로의 입장차를 드러냈다.

한편 운노 교수는 합병 절차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도 “그 절차가 합법적이었다고 해서 가해자가 보상할 의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예컨대 대만의 경우 청일전쟁의 결과 합법적으로 할양받아 지배한 것이지만, 합법적일지라도 역사적으로 역사 청산이 문제로 남는다는 것이다. 합법 또는 불법과 별개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한데 대해서는 보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사사가와 교수는 “19세기의 군주는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전제군주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에서 광무황제가 전권을 행사해 조약을 체결할 수는 없었다”며 조약체결 과정의 실질적 유효성에 대해 대부분의 일본학자들과 다른 견해를 밝혔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 서양 학자들 견해

이번 학술회의에 제3자로 참가한 서양학자들은 회의 초반 말을 아끼며 관망했다. 하지만 한 일 학자들이 입장차를 첨예하게 드러내며 대립하자 이들은 국제법상 합법과 불법의 기준, 역사적 반성의 의미 등 원론적인 문제들을 제기하며 이를 중재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저명한 국제법학자들인 제임스 크로포드 케임브리지대 교수와존 M 반 다이크 하와이대 교수의 발언이 눈길을 끌었다.

반 다이크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병합과 하와이와 미국의 병합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결책을 제안했다. 그는 두 병합을 비교 분석해 두 병합이 모두 강압에 의한 것이었음을 지적하고 “특히 한국의 병합과정에서 자행된 만행은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국제법적으로 무효화할 수 있는지는 결론에 이르기가 어렵지만, “과거의 역사를 반성하며 화해를 모색하는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며 미국이 하와이에 대해 해 온 화해의 노력을 예로 들었다.

그는 “한일간의 진정한 화해와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국제법의 침해가 발생했음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사과함과 동시에 이를 물질적 정신적으로 보상하는 노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논평자로 참석한 크로포드 교수는“당시에 국제법은 유용한 기능을 하고 있었다”며 한일간의 병합이 국제법상으로 성립됐음을 인정했다.

그는 또 “합병이 반드시 조약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하고 제국주의시대에는 강제적 조약이라도 그 유효성이 인정될 뿐 아니라 이미 이뤄진 조약을 무효화시킬 수 없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런 주장에는 미국 더비대 앤서니 카티 교수(역사학) 등 일부 서양학자들도 동조, 제국주의 시대를 보는 한국학자들의 역사인식과 큰 차이를 드러냈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 '한일병합' 학술회의는

이번 회의의 주최측은 미국 하버드대 산하의 아시아센터, 한국학연구소, 라이샤워 일본학연구소, 동아시아법연구소 등 4개 연구소와, 미국 하와이대 산하의 한국학연구소, 일본학연구소 등 6개 연구소.

이번 회의는 6개 연구소 공동주최로 앞서 열렸던 1, 2차 워크샵의 결과를 바탕으로 이 문제에 관한 국제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본 회의였다. 1월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1차 워크샵에서는 한국측이, 4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2차 워크샵에서는 일본측이 자료조사 결과를 발표했으며 이 과정에서 새로운 자료와 쟁점도 적잖이 제기됐었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서는 한일 양국 학자들이 서로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논점을 좀더 선명히 부각시키기는 했으나 원래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합의는 이르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운영위원회는 학술회의가 끝난 직후인 17일(이하 현지 시간) 저녁 긴급 회의를 갖고 일단 제4차 회의를 계속한다는 원칙에 합의하고 구체적 일정과 절차는 추후 논의하기로 했다.

이 회의에는 한국측에서 서울대 이태진(한국사), 백충현(법학), 김기석(교육학), 건국대 이근관(법학), 독일 맨체스터대 송두율 교수(사회학)가 참가했고, 일본측에서 국제기독교대 사사가와 노리가츠(笹川紀勝·법학), 메이지(明治)대 운노 후쿠주(海野福壽·역사학), 히로시마(廣島)여대 하라다 다마키(原田環·한국사학), 스루가다이(駿河台)대 아라이 신이치(荒正信一·일본근현대사), 와세다(早稻田)대 히라노 겐이치로(平野健一郞·국제정치학) 교수 등이 참가했다.

이밖에 영국 케임브리지대 제임스 크로포드(국제법), 미국 MIT대 존 W 다우어(역사학), 하버드대 카터 에커트(역사학), 데이비드 맥캔(문학), 앤드류 고든(역사학), 하와이대 존 M 반 다이크(국제법), 더비대 앤서니 카티 교수(역사학) 등 저명 학자들이 참가했다.

북한에서도 학자들이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최근 미국의 테러전쟁과 관련해 북한이 아직도 테러국가로 규정돼 있는 상황에서 참석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고 발표 논문만 보내왔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