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남 볼까 부끄러운 역사교과서 소동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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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수석 논설위원
홍찬식 수석 논설위원
진보 진영의 여론 몰이는 일부 매체가 이슈를 제기하고, 야당이 받아 공식적으로 문제를 삼은 뒤, 일부 누리꾼이 확산시키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2008년 봄 MBC ‘PD수첩’이 미국산 쇠고기 문제를 보도한 뒤 야당이 가세하고 인터넷에서 각종 근거 없는 소문들이 난무했던 촛불시위가 대표적이다.

민주당은 2일 ‘뉴라이트가 만든 역사교과서가 교과서 검정을 통과했다’며 입장을 발표했다. 민주당은 ‘이 교과서에서 일부 알려진 내용은 경악할 만한 수준’이라고 밝혔다.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를 테러 활동을 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하고, 4·19혁명을 학생운동으로 폄하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거론한 교과서는 현재 검정 절차가 진행 중인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말한다. 그중에서도 교학사가 출판하는 교과서를 문제 삼고 있다. 하지만 교과서는 최종적으로 합격 판정을 받기 전에는 공개할 수 없다. 지금까지 교학사 교과서 안에 어떤 내용이 실렸는지 확인된 것은 없다.

그럼에도 민주당이 ‘일부 알려진 내용’이라고 밝힌 것은 일부 매체와 인터넷에 나와 있는 것들이다. 이들은 ‘교과서포럼’이라는 보수단체가 2008년 3월 간행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기파랑)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으므로 비슷한 성향의 인사들이 만드는 교과서에도 같은 내용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인터넷에는 대안교과서가 ‘안중근은 테러리스트 김구의 하수인’ ‘유관순은 여자 깡패’ ‘군 위안부는 자발적인 성매매업자’라고 표현했다는 말들이 오르내리고 있다.

이번 사례에서도 일부 매체가 앞장서고 야당이 가세하며 일부 누리꾼이 선동에 나서는 ‘좌파의 운동공식’이 재연되고 있다. 이들의 공세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부 매체의 글에는 수천 개의 댓글이 달렸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최고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출판사인 교학사에는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교학사에 대한 불매운동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말이 맞는지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찾아봤다. 5·16에 대해서는 ‘헌법 절차를 거쳐 수립된 정부를 불법 전복한 쿠데타’라고 나와 있었다. 4·19는 ‘부정에 항거하는 학생들의 의거에 국민이 동참한 민주혁명’이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민주당이 ‘일부 알려진 내용’이라고 내세운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그 내용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

김구에 대해 대안교과서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항일테러 활동을 시작했다’고 썼다. 이명박 정권에서 역사교과서 문제가 불거졌을 때 진보 진영이 옹호했던 금성출판사의 ‘고교 한국 근현대사’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전교조 교사들이 많이 채택했던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김구에 대해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적극적인 테러 투쟁을 벌였다’고 기술했다. 대안교과서는 ‘항일테러 활동’으로,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테러 투쟁’으로 적고 있다. 이 내용으로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표현했다고 보는 것은 부적절하다.

대안교과서에는 ‘유관순은 여자깡패’ ‘군 위안부는 성매매업자’라는 표현이 나와 있지 않다. 교학사 측은 ‘우리가 만드는 교과서는 대안교과서와 무관하며 우리 교과서에는 그런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고 공식 해명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교학사 교과서에 실리는 것처럼 인식되면서 ‘역사 왜곡을 하는 일본과 뭐가 다를 게 있느냐’ ‘이러고도 우리가 일본을 비판할 자격이 있느냐’며 비분강개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또 다른 왜곡은 교과서 필자에 관한 것이다. 민주당은 ‘뉴라이트가 만든 교과서’로 단정했다. 이 교과서는 6명이 집필했으며 그중 2명만 보수 성향인 한국현대사학회에 참여하고 있다. 현대사학회 회장이자 교과서 필자 중 한 명인 권희영 씨는 뉴라이트 활동에 관여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연관이 있다면 현대사학회에 일부 뉴라이트 인사가 포함되어 있는 정도다. ‘뉴라이트 교과서’라는 무리한 주장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뉴라이트 일부의 친일적 이미지를 앞세워 이 교과서에 친일이라는 딱지를 붙이려는 계산이 엿보인다. 친일 꼬리표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효과적인 공격 수단이다. 마침 일본 극우 세력의 역사 왜곡이 부각되면서 함께 같은 세력으로 몰아가기에 안성맞춤인 시점이다.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은 긍정적인 면이 있다. 역사문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교과서가 나온 뒤 내용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순서다. 조직적으로 허위 사실을 동원해 여론 몰이를 하는 것은 ‘양심 세력’ ‘진실 추구 세력’이라고 자부해온 진보 진영이 갈 길이 아니다. 한국은 일본 중국의 역사 왜곡을 강하게 비판해 왔다. 이번 소동을 남들이 어떻게 볼지 부끄럽고 두렵다.

홍찬식 수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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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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