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박영서]슈퍼컴 20년, 선진국 문턱으로

  • 입력 2008년 12월 29일 02시 58분


한국과학기술정보원(KISTI) 슈퍼컴퓨팅센터의 메인 기계실을 가득 채우던 슈퍼컴퓨터 3호기가 10월에 하나둘 밖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슈퍼컴퓨터 4호기와 세대교체를 하기 위해서였다. 3호기는 포스텍, 광주과학기술원 등 7개 대학 및 연구기관에 무상으로 기증됐다. 텅 빈 기계실을 바라보며 새삼 슈퍼컴퓨터의 지난날이 떠올랐다. 슈퍼컴퓨터를 국내에 도입한 지 정확히 20주년이 되는 해라서 감회는 더욱 컸다.

우리나라에 슈퍼컴퓨터가 도입된 해는 1988년. 당시 KAIST 시스템공학센터에 설치한 슈퍼컴퓨터 1호기 ‘CRAY-2S’는 2기가플롭스(초당 20억 번 연산 수행) 속도에 CPU 4MW, 디스크 용량 60GB(기가바이트)로 현재로 치면 가정용 PC보다도 떨어지는 성능이었지만 국내 과학기술계에 준 가능성은 대단했다. 선진국에서만 가능하다고 여겼던 대규모 연구를 국내에서도 할 수 있고 모방형 연구개발(R&D)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어 1993년부터 도입한 슈퍼컴퓨터 2호기 CRAY C90 시스템은 16기가플롭스 성능으로슈퍼컴퓨터 관련 기술 연구에 초점을 맞춰 운용했다. 슈퍼컴퓨터는 겉보기엔 단일 연구장비지만 CPU, 네트워크, 데이터 저장장치, 응용을 위한 소프트웨어 등 수백만 부품과 기술 또한 최고여야 한다. 이 때문에 슈퍼컴퓨팅 기술의 발전은 관련 R&D까지 함께 동반 상승시켜 상당한 산업적 파급효과를 낳는 데 2호기의 성공적인 운용은 우리나라를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이끄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슈퍼컴퓨터 3호기에 이르러 국내에서도 슈퍼컴퓨팅을 통한 실질적인 연구 성과가 쏟아져 나왔다. 2001년 도입한 3호기는 4.3테라플롭스(초당 1조 번 연산 수행) 성능을 보유했다. 2호기보다 270배나 뛰어난 성능으로 KISTI는 넉넉해진 컴퓨팅 자원과 함께 다수의 전문가를 투입해 사용자를 본격적으로 지원했다. 이에 따라 세계 최대 규모의 우주 시뮬레이션, 평면디스플레이와 수소저장합금체 분야 원천기술 확보 등 수백 개에 이르는 첨단 연구성과가 나왔다. 슈퍼컴퓨터를 활용하면 과학기술 R&D 속도와 수준을 빠르게 향상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한 연구자가 늘면서 슈퍼컴퓨터가 첨단 R&D의 필수장비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한국의 슈퍼컴퓨팅 역사 20년은 국가 발전의 흐름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왔다. 선진기술을 따라가기에도 벅차던 과학기술 R&D는 세계적인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고 과학기술 경쟁력은 세계 5위, 경제규모 역시 세계 10위권을 고수하게 됐다. 이제 또 다른 20년을 위해 도약해야 할 때다. 슈퍼컴퓨터 1, 2, 3호기가 국가 선진화의 기틀을 만들었다면, 4호기 도입과 함께 다가올 20년 동안에는 슈퍼컴퓨터를 통해 도출한 성과를 기반으로 당당히 선진국 대열에 오를 수 있어야 한다.

다행히 이러한 미래를 가능케 해줄 청신호도 보인다. 정책결정자 사이에서 슈퍼컴퓨터 육성법 입법화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법제화가 이뤄지면 슈퍼컴퓨팅에 대한 최우선의 지원이 가능해 슈퍼컴퓨팅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고 관련 인프라를 튼튼하게 구축할 수 있다.

지금 텅 비어 있는 슈퍼컴퓨팅센터 메인 기계실은 곧 슈퍼컴퓨터 4호기로 채워질 것이다. 2009년까지 322테라플롭스급의 슈퍼컴퓨터 4호기가 도입되면 세계 10위권의 슈퍼컴퓨팅 강국 반열에 오른다. 국내 연구자는 좀 더 풍족해진 컴퓨팅 자원을 이용해 R&D를 마음껏 수행할 수 있다. 다가올 20년이 슈퍼컴퓨터 역사 그리고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서 놀랄 만한 성장을 가져온 시기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박영서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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