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의 명소’ 영실계곡엔 산신령 스님 등 불교이야기 풍성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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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본 한라산〈5〉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기간에 제주지역의 대표적인 사찰 가운데 하나인 존자암이 볼레오름 능선에 복원됐다. 볼레오름, 존자암 뒤로 보이는 영실계곡은 한라산 불교문화의 명소로 꼽힌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기간에 제주지역의 대표적인 사찰 가운데 하나인 존자암이 볼레오름 능선에 복원됐다. 볼레오름, 존자암 뒤로 보이는 영실계곡은 한라산 불교문화의 명소로 꼽힌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보슬비가 내린 18일 한라산 영실(靈室) 탐방로 입구에 들어서자 연둣빛 숲길이 반겼다. 외피가 붉어서 ‘적송’으로 불리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하늘로 뻗으며 군락을 이뤘다. 숲을 벗어나면 오르막이 시작됐다. 오르막 중간쯤 전망대에 서자 영실 장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탐방로 쪽으로는 바위기둥으로 이뤄진 주상절리 ‘병풍바위’, 맞은편에는 짙은 녹음과 함께 기암괴석인 ‘오백나한’이 자리했다. 발아래 서쪽 능선으로는 작은 화산체인 ‘볼레오름’이 유연한 선을 뽐냈다.

영실은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에서 남서쪽 해발 1300∼1650m 일대에 위치한 골짜기다. 둘레는 2km, 깊이는 0.35km가량이다. 날씨가 맑았다가도 순식간에 한치 앞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운무가 뒤덮이는 등 변화가 심한 곳이다. ‘영실기암과 오백나한’은 2011년 명승 제84호로 지정됐다.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영실 일대는 불교문화 명소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나라의 안녕을 위해 제사를 지낸 사찰을 비롯해 근처에 불교의 항일운동 발상지가 포진했다.

● 불교 명소인 한라산 영실

지명인 영실은 부처가 고대 인도에서 설법했던 영산회랑 또는 영취산에서 유래했으며 오백나한 역시 깨달음을 얻은 불제자들을 칭한다. 볼레오름은 ‘부처가 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불래악(佛來岳)’으로 불리기도 했다. 병풍바위의 주상절리 기둥은 부처의 제자인 1250명을 뜻한다는 주장도 있다. 조선시대 일부 관리는 기암괴석을 ‘천불봉(千佛峰)’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실제 영실에는 조선시대 나라의 기운을 흥하게 하기 위해 국성재를 지낼 만큼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존자암’이 있었다. 조선시대 관리와 선비들이 한라산을 탐방할 때는 대부분 존자암을 거쳐 가면서 영실의 장관을 감상했다. 홍유손이 1507년 지은 ‘존자암개구유인문’에는 “존자암은 비보소로 이름이 세상에 난 지 오래다. 세 읍의 수령 중 한 사람을 뽑아 암자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고 이를 국성재라 했는데 지금은 제사가 폐지된 지 8, 9년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상헌이 어사로서 제주에서 수행한 임무와 견문을 적은 남사록(1602년)에서도 ‘존자암은 집이 9칸인데 지붕과 벽은 모두 기와나 흙 대신에 판자를 썼다’는 내용이 있다.

과거 자료를 살펴보면 영실계곡에 처음 있던 존자암은 볼레오름 자락으로 옮겼고, 또다시 대정읍 지경의 저지대로 이전했다가 1703년 이형상 제주목사 시절 강력한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해발 1280m의 볼레오름 존자암은 1993년과 1994년 이뤄진 제주대 박물관의 발굴조사로 재조명됐다. 당시 발굴조사에서 나온 기와, 도자기, 건물터 등을 분석한 결과 존자암은 14∼17세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됐다.

산과 사찰의 깊은 인연은 한라산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최원석 경상대 교수는 “대승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에 토착화하면서 중국에서 그랬듯이 명산을 택해 사찰이 들어서면서 산에 부처와 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며 “산은 깨침의 길을 수행하는 장소이자 신성한 영역이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한라산에서 200년 동안 단절됐던 불교문화는 1908년 안봉려관이 제주시 산천단에 관음사를 창건하면서 다시 이어졌다. 영실계곡에서 4km가량 떨어진 서귀포시 법정악 능선에는 1911년 법정사가 세워졌다. 법정사는 이른바 ‘무오법정사항일운동’의 발상지이다. 1918년 10월 법정사 김연일, 방동화 등 스님들이 중심이 돼 신도와 민간인 등 400여 명이 집단으로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일제에 항거한 무장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다. 법정사는 당시 일본 순사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지금은 축대 등 건물 흔적만 남아 있다.

1948년 발발한 제주도4·3사건으로 산중 사찰, 암자는 모두 철거되거나 불에 타는 수난을 겪었다. 당시 관음사는 토벌대와 무장대의 교전장이기도 했다. 영실계곡에 암자가 다시 세워진 것은 1960년대 초반이다. 원정상 씨(77·서귀포시 중문동)는 “한라산 등산을 하다가 영험한 영실 기운을 경험하고 난 뒤 1961년 육지에서 온 스님과 함께 계곡에 움막을 지어 생식을 하면서 부처님을 모셨다”며 “신도가 많이 몰렸고 근처에 암자 3개가 더 생겼다”고 회고했다. 영실계곡에 들어섰던 이들 암자는 정부의 치산녹화 정책(1973∼78년)으로 국립공원관리사무소 측과 갈등을 빚다가 1977년 철거됐다.

● ‘제주불교 성지순례길’ 구간 코스 인기

현재 한라산국립공원 지역이나 경계에 들어선 사찰은 제주시 관음사를 비롯해 아흔아홉골에 있는 천왕사와 석굴암, 영실탐방로 입구 오백나한사 등이 있다. 볼레오름 존자암 터에는 복원한 존자암이 2002년 들어섰다. 걸어서 이들 사찰을 둘러보는 ‘제주불교 성지순례길’도 만들어졌다. 순례길이 조성됐지만 차량 통행이 잦은 포장도로가 상당 구간 포함되면서 전체 구간을 걷기보다는 석굴암∼천왕사(2km), 영실탐방로주차장∼존자암(1km) 등의 짧은 구간이 주로 이용되고 있다.

한라산과 인연이 깊은 불교 인사 가운데 마용기 스님은 전설적인 인물로 구전되고 있다. ‘한라산 산신령’이라는 소문을 얻을 정도이지만 실제 구체적인 행적은 베일에 가렸다. 스님은 1912년 제주시 회천동 회천사 전신인 만덕사를 창건하고 나서 후임 스님에게 넘겨줬다. 이후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 산간에 수덕사를 세웠으나 제주도4·3사건 당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불탔다. 스님은 1951년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산 자락에 영산암을 창건하고 한라산에서 지속적으로 산신기도를 올렸다. 국립공원 직원으로 40년을 근무한 양송남 씨(69)는 “어리목계곡 인근 궤(작은 동굴)나 암자에서 산신기도를 하는 스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산신기도를 하면 아이를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증언했다.

스님은 아픈 아이를 치료하는 데 영험했다는 말이 있고 당시 한라산에서 방목 도중 실종된 소나 말을 찾는 데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고 전해진다. 스님은 부친을 명당에 모시기 위해 여러 곳을 전전하다 한라산 음택 명당 가운데 제4혈로 알려진 민대가리오름의 ‘해두명’에 안치하기도 했다.

스님의 손자인 마원보 씨(57)는 “한때 할아버지가 ‘한라산 속으로 사라졌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는데 실제로는 제주시 도남동 자택에서 돌아가신 뒤 한라산 가족묘지에 안장됐다”고 밝혔다. 스님의 출생 이력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취재 결과 1892년 태어나 1978년 86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제주#영실계곡#한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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