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정기선]‘존엄사 의향서’ 있는지 모르는 이들에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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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선 전 아주대 교수·공인회계사
정기선 전 아주대 교수·공인회계사
우리 부부는 70대다. 2년 전 건강하던 아내가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져서 머리절개수술을 받았고 3주간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후 오랜 입원과 2차 수술을 거쳐 퇴원했다.

아내는 중환자실에서 손발이 묶이고 물도 자유롭게 마실 수 없었다. 고통이 컸다. 중환자실을 떠올리면 다시는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싶다. 아내는 최소한의 품위와 가치를 지키면서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며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는다고 내게 여러 번 강조했다. 보건복지부의 노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만 65세 이상의 91.8%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한다”고 했다.

나는 아내와 국립중앙의료원에 있는 사단법인 사전연명의료의향서실천모임 사무실을 방문해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의료의향서에 등록했다. 이 의향서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에서도 작성할 수 있다. 의향서는 임종을 맞았을 때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의 시행이나 중단을 원한다는 내용을 미리 등록해 놓는 것이다.

건강이 좋아질 가능성이 없는데 목숨만 연장하며 장기간 입원한 사람은 겉으로는 의식이 없어 보이나 실제는 상당한 고통을 겪고 있을 수도 있다. 생명을 연장하는 게 아니라 사실상 고통을 연장하는 것으로 환자와 가족은 고생하고 국가는 많은 돈을 보험에 소진해야 한다.

사실 나이가 많은 사람들 중에서 산소호흡기를 부착하고 목에 구멍을 뚫어 음식을 공급받으며 생명을 유지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예상외로 많다.

인간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으로 품위를 지키며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죽음을 맞도록 해야 한다. 연명치료를 거부해도 호스피스병실에 입원하면 사망할 때까지 진통제를 주사해 고통을 없애준다. 가족에게 둘러싸여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존엄사’가 가능하다. 의향서 등록을 마치니 안심보험에 가입한 것처럼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평소 자주 만나는 사람들에게 의료의향서에 대해 알고 있는지를 물으면 대부분은 알지 못했다.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면 “걱정하고 있었는데 알려줘서 고맙다”고 한다.

2009년 서울 세브란스병원 김 할머니 사건 등으로 의사들은 가망 없는 환자도 연명치료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올 2월 관련 법률이 시행돼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게 됐다. 내가 응급상태로 병원에 실려 갔을 때 의사가 내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면 ‘연명의료를 거부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컴퓨터에 나타난다. 가망이 없을 때 의사는 연명치료를 하지 않아도 된다. 죽을 때 고통 없이 ‘존엄사’하려는 분에게는 의향서 등록을 권한다.
 
정기선 전 아주대 교수·공인회계사
#존엄사#의향서#연명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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