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일푼 나락… 지역사회가 손을 건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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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고 벼랑서 희망 찾은 신월동 부부

“이러다 정말 뉴스에 나오는 얘기처럼 비참하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서울 양천구 신월5동의 한 여관에서 지낸 지 넉 달째 된 올해 1월이었다. 건설 일용직으로 일하는 오모 씨(26)는 어느 때보다 시린 겨울을 맞고 있었다. 하루 숙박료 3만5000원을 못 내는 날이 많아지면서 여관비 약 100만 원이 밀렸다. 한 달에 일하는 날이 열흘도 채 되지 않았다. 허기는 대부분 컵라면과 삼각김밥으로 달랬다. 함께 사는 아내 정모 씨(30)에게 너무 미안했다. 표현하기 힘들 만큼 더욱 미안했던 사람은 정 씨 배 속에 있는 태아였다. 임신 사실을 안 건 지난해 10월, 여관방 생활을 시작하고 한 달쯤 됐을 때다.

○ 막막했던 여관방 살이

“태어난 아기를 보고 손발이 제대로 있나부터 확인했어요. 너무 걱정했거든요. 배 속에 있는 동안 제대로 먹이지를 못했으니까….”

오 씨와 정 씨의 아기는 지난달 11일 건강하게 태어났다. 성별이 딸인 것도 이날 알았다. 임신 이후 정 씨가 병원을 간 건 아기가 태어나기 5일 전이 처음이었다. 정 씨의 주민등록이 말소돼 건강보험 적용을 받을 수 없었고, 병원비를 생각하니 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종교가 없는 오 씨지만 아내가 임신한 동안 ‘아기가 건강하게만 해 달라’는 기도를 수없이 했다. 오 씨는 “지난해 10월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는 정말 막막했다. 포기할까 생각도 했다”고 토로했다.

아기를 낳기로 결정한 뒤에도 하루하루가 고비였다. 좁고 습한 여관방에서 인스턴트식품으로 버텨야 했다. 오 씨는 손에 몇 만 원이라도 있는 날에 죽을 사오곤 했다. 아내가 먹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음식다운 음식이었다. “아내가 고기가 먹고 싶다는데 사 주지 못했다”며 오 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는 여러 차례 눈물을 보였다.

두 사람은 7년 전 경기도 한 공장에서 만나 서울로 올라왔다. 두 사람 모두 어린 시절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일찍부터 돈벌이에 나섰다. 상경 후 반지하 집에서 6년여를 지냈지만 월세가 밀려 쫓기듯 여관방 생활을 시작했다.

○ 절망의 끝에서 도움을 받다


“불과 얼마 전을 생각하면 지금은 너무 신기해요. 아침에 깨면 집이 있고 옆에는 아내와 딸이 있고…. 놀라운 뿐이죠.”

캄캄했던 그들에게 빛이 보인 건 두 달 전이다. 오 씨는 ‘정말 이대로는 죽겠다’ 싶어서 보건복지상담센터 129에 전화를 걸었다. 상담 후 신월5동주민센터 방문복지팀이 여관을 찾았다. 왜 진작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오 씨는 “복지 혜택은 기초생활수급권자나 장애인만 받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며 “나는 젊고 몸도 멀쩡한데 도움 받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성덕 신월5동장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 스스로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고 주변에서도 관심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신월5동주민센터는 오 씨 부부를 위해 긴급복지지원제도를 비롯한 제도를 알아봐 줬고 백방으로 뛰었다. 이 덕분에 대한적십자사가 주거비 500만 원을 지원했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배분하는 ‘따뜻한 겨울나기 사업비’로 밀린 방값이 해결됐다. 해오름장애인협회는 중고 가구를 구해다 오 씨 부부의 새집에 놔줬다. 부동산에서는 중개수수료를 받지 않았다.

무엇보다 걱정되던 아기 출산비용은 미즈메디병원이 전액 지원해줬다. 동주민센터와 지역민들이 함께 모인 지역사회보장협의체의 황원석 위원장은 오 씨의 일자리를 알아보는 중이다. 그러는 사이 아내 정 씨는 주민등록을 회복했다. 아기가 태어난 날 오 씨와 정 씨는 혼인신고와 딸 출생신고를 동시에 했다. 정식 부부이자 부모가 된 그들의 꿈은 소박하다.

“온 가족이 화목하게 지내며 우리의 힘들었던 경험을 딸은 겪지 않게 할 거예요.”(정 씨)

“딸 건강하게 키우면서 우리보다 더 힘든 사람들 도와주며 살겠습니다.”(오 씨)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지역사회#생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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