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소년,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들…근처서 발견된 ‘총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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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년 9월 26일 16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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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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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개구리 소년 시신 발견 15주기 추모일’을 맞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들이 재조명 받고 있다.

‘개구리 소년 사건’은 1991년 3월 26일 대구성서초등학교에 다니던 우철원(당시 13세), 조호연(당시 12세), 김영규(당시 11세), 박찬인(당시 10세), 김종식(당시 9세) 등 다섯 어린이가 집 뒷 편인 대구시 달서구 와룡산에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섰다가 끝내 돌아오지 않은 사건이다. 사건 초기 언론이 도롱뇽을 개구리로 보도하는 바람에 ‘개구리 소년’으로 불리게 됐다.

아이들이 실종된 날은 지방자치제가 30년 만에 부활해 기초의원을 뽑는 선거 날이었다. 임시공휴일을 맞아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섰던 아이들은 와룡산에 오르기 전 인근마을 주민들에게 목격된 것을 마지막으로 흔적을 감췄다.


아이들이 실종되자 부모들은 생업을 포기한 채 전국을 헤맸고, 각종 사회단체들은 전국에 700여 만 장의 전단을 뿌려 국민들의 관심을 모았다. 기업들도 생필품, 공중전화 카드, 엽서, 담배갑 등에 사진을 담아 아이들 찾기에 동참했다. 현상금 4200만 원이 걸렸고, 단일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인 연인원 35만 명의 수사인력이 투입됐다.

실종 5년째인 1996년 1월에는 다섯 어린이 중 한 명이 자신의 집에 암매장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굴착기와 곡괭이 등으로 집안 화장실과 부엌 바닥을 파는 소동이 벌어졌으나,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이들의 유골은 실종 11년 6개월 만인 2002년 9월 26일 대구시 달서구 용산동 성산고교 신축공사장 뒤쪽으로 500m 떨어진 와룡산 중턱에서 신발 5켤레와 함께 발견됐다. 집에서 불과 2km 떨어진 곳이었다.

사건 당시 ‘단순한 모험성 가출’로 단정하고 보름 동안이나 방치하는 우(愚)를 범했던 경찰은 유골이 나왔을 때는 “아이들이 길을 잃고 헤매다 밤새 ‘저체온’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유족들은 아이들이 평소에 뛰어 놀던 동네 뒷산인데 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얼어 죽었겠냐며 반발했다. 가까운 민가와는 고작 250m 떨어져 있었다.

한 아이의 유골은 체육복 상의 팔 소매가 목 주위를 두 차례 휘감으며 묶인 상태로 발굴됐고 바지도 벗겨진 상태로 서로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추위에 떨다 죽었다는 아이가 어떻게 옷을 벗어 매듭을 짓느냐"며 오열했다.

또 유골이 발견된 자리에 가로 30㎝,세로 10㎝ 크기의 넓적한 돌이 있었는데 감식 결과 이 돌은 다른 곳에서 옮겨진 것임이 밝혀졌다.

유해가 등산객에 의해 발견되기 하루 전인 9월 25일 오후 6시쯤 한 신문사에 4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대구 와룡산에 가면 개구리소년 5명의 유해가 묻혀 있다. 큰 무덤 같은 흔적을 파보면 5명의 유해가 그대로 다 나올 것”이라는 내용의 제보전화가 걸려왔다는 점도 의문점이다.

가장 특이한 점은 개구리 소년의 유골 근처에서 10여 개의 탄두(彈頭)가 발견된 것이다. 인근에는 군부대 사격장이 있었다. 이에 소년들이 도롱뇽을 잡으러 간 게 아니라 탄두를 주우러 갔을 가능성과 함께 총기 오발사고에 대한 의심도 흘러나왔다. 그러자 군부대는 유탄과 피탄이 실종 사건 이전 부터 수십 년간 쌓인 것이며 실종당일 사격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미군이 사격 훈련을 진행했을 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밝혔다.

이밖에 간첩이 사단 영내를 관찰하다 아이 1명에게 발각되자 권총 등으로 사살한 후 다시 보니 뒤따라온 4명이 주위에 더 있어 한꺼번에 살해후 도주했다는 설도 있었다.

경찰은 다시 수사를 시작했지만 진척은 없었고, 결국 2006년 3월 25일, 15년의 공소시효가 만료돼 사건은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게됐다.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pt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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