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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형님 손마디로 무덤 만들고, 아들 피흘린 흙 삼켜버린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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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형님 손마디로 무덤 만들고, 아들 피흘린 흙 삼켜버린 어머니”

심규선 기자 입력 2017-09-16 03:00수정 2017-09-1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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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양곤서 일제 강제동원 한인 위령탑 제막식
6일 양곤 시내 코리아센터에서 개막된 버마지역 강제동원 희생자 위령탑. 높이 5m로 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좌우의 검은 석벽에는 망향의 시를, 앞의 흰 석벽에는 무궁화를 새겼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 바라보노라면/너울너울 뜬 구름만 고향 길 가네/그 구름 편에 편지 봉해 부치려 하니/빠른 바람에 구름을 잡을 길 없네/내 고향은 하늘 끝 북쪽이고요/내가 있는 남의 땅은 서남쪽이라오/햇볕 따뜻한 이곳엔 기러기도 오지 않으니/그 누가 내 소식을 고국으로 전해주리’(혜초 ‘망향가’).

1300년 전 신라에서 태어나 당나라와 인도까지 가서 불법을 배우다가 결국은 중국에서 생을 마감한 혜초 스님이 고국을 그리워하며 쓴 시다.

유명 인사든, 평범한 인물이든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똑같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그저 수천, 수만, 수백만 명이라는 숫자로만 인식될 뿐이다. 역사책을 펼쳐도, 정작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심하게 고통을 당한 그들의 한숨과 고통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유다.

6일(이하 현지 시간) 옛날 버마로 불렸던 미얀마의 양곤에서 일제강제동원 희생자를 위한 위령탑 제막식과 위령제가 열렸다. 70년 넘게 그저 숫자로만 존재했던 조선인 희생자들이 이름과 육신을 되찾아 아버지, 형님, 오빠로 환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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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행사에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사장 김용봉)이 버마 전선에서 숨진 희생자 유족 29명으로 구성한 국외추도순례단(단장 김화진·행정안전부)이 참가했다(5∼8일). 국외추도순례는 2004년에 발족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2006년부터 필리핀, 사이판, 마셜제도 등에서 19회를, 2014년 말 위원회 업무를 이어받은 재단이 이번 미얀마를 포함해 5회를 실시했다(기자는 재단의 이사로 일하고 있다).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말기인 1942년경부터 전쟁이 끝난 1945년 8월까지 조선에서 3800km나 떨어진 버마 전선에서 조선인 군인, 군속, 위안부들이 희생을 당했다는 사실을 아파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유족들은 아버지, 형님, 오빠가 돌아가신 곳에서 70년을 훌쩍 넘겨 술잔과 국화를 올리며 오열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병희 씨 제공
유족들은 달랐다. 그들에게 ‘비극’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6일 오전 숙소인 세도나 양곤 호텔에서 열린 유족간담회는 종종 울음과 울분, 원망과 한숨이 지배했다.

“아버지는 장승포에서 배의 기관장으로 일하셨는데, 군수품을 싣고 버마로 간 것 같다. 내 ‘게다’ 끈이 끊어졌는데 ‘새로 사다 줄게’라며 나가신 것이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내가 네 살 때다. 너무너무 보고 싶다.”

“오빠가 학도병으로 나갔다가 전사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믿지 않으셨다. 1970년대에 보상금이 나온다는 말을 들으시고 쓰러졌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형님이 광복 한 달 전에 돌아가셨다고, 함께 있던 친구가 돌아와 알려줬다. 그분이 형님의 손마디를 하나 끊어 갖고 와서 그걸로 무덤을 만들었다.”

“아버지가 지원병으로 입대했다는 말을 듣고 많이도 원망했다. 왜 독립군에 대한 역적질을 했느냐고. 나중에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가 군대를 안 가면 작은 삼촌이 잡혀 간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동생보다 세 살 많은 내가 가는 게 낫겠다‘며 자원했다고 한다. 지금은 존경한다.”

이 말은 지금도 가슴을 때린다.

“형님과 함께 군대에 갔던 친구 분이 형님이 죽은 자리의 흙을 갖고 와서 어머니에게 드렸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그 흙을 입에다 털어 넣고 삼켜버리셨다. 그리고 그날부터 담배를 끊으셨다.”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의 희미한 체취마저 온몸으로 품고 싶었던 것이리라.

위령탑 개막식은 6일 오후에 있었다. 위령탑은 양곤 시내 외곽 팅간중에 있는 코리아센터 내에 세워졌다. 코리아센터는 현지 교민(현재 4000여 명)과 기업들이 힘을 모아 2015년 10월에 완공한 건물. 한인회 사무실과 한인학교도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

위령탑의 높이는 5m. 두 손 모아 기도하는 형상에 나비를 붙여 편안한 승천을 기원했다. 너비 10m의 좌우 벽면에는 초가집을 배경으로 앞에 소개한 혜초 스님의 ‘망향가’와 노천명 시인의 ‘망향’을 새겼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서 나오는 오석(烏石) 등 모두 한국 석재를 사용했다.

위령탑 터를 제공한 미얀마 한인회의 이정우 회장(54)은 “교민들과 한글학교 학생들은 위령탑을 보며 아픈 역사에서 가르침을 얻고 미래를 위한 각오를 다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코리아센터에서 위령제도 열렸다.

분위기가 일변했다. 아들과 딸, 동생들은 망자에게 술과 국화를 바치면서 오열했다. 제사상에는 망자들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의 그들은 눈이 시도록 젊었다.

김용봉 이사장은 “아열대의 척박한 환경에서 고된 노동과 굶주림, 전쟁의 희생양으로 노예의 삶을 살다가 끝내 운명을 달리한 선조들의 삶은 참으로 아프고 참담했다”며 “우리 국민과 유족들은 일본의 비인도적인 강제동원의 역사를 결코 잊지 않고, 선조님들의 억울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다짐하고 있다”고 추모했다.

김정한 주미얀마 한국대사 대리는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반복하기 마련’이라는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의 말을 인용하며 “과거를 올바르게 인식해야만 화해와 협력의 미래가 열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주미얀마 일본대사관의 요시히로 도모코 참사관은 “달랠 길 없는 망향의 한을 품고 돌아가신 한반도 출신 구 군인·군속의 심정을 헤아려 볼 때 진실로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추모했다(일본 이외의 지역에서 강제동원 추모 행사가 열릴 경우 일본 정부가 경비의 일부를 지원하고 현지 일본 외교관들이 참석한다고 한다).

유족 대표 안재봉 씨(75)의 추도사 중에서는 “여기까지 오셔서 누구를 위해 총을 쏘고, 무엇을 위해 이 먼 곳까지 끌려오셨습니까?”라는 말에 관심이 갔다. 일본의 NHK방송이 전후 최초로 1993년, 버마 전선을 현지 취재해서 방영하고 그 내용을 묶어 책을 냈는데(‘책임 없는 전쟁, 임팔’) 그 책에 비슷한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 세대인 수만 명의 병사가 왜 이런 곳까지 와서, 격렬하게 싸우다, 진흙탕 속에서 죽지 않으면 안 되었단 말입니까.”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도 이렇게 원통한데, 식민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전장으로 끌려와 목숨을 잃은 조선인 병사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한 유족은 이런 말을 했다.

“어머니는 기독교 신자다. 형님을 잃고 나서 늘, 아들을 돌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49세에 늦둥이 막내아들을 얻었다. 형님보다 열여섯 살이나 아래였다. 막냇동생이 태어나고 나서 어머니는 형님을 돌려달라는 기도를 멈췄다.”

죽은 자는 산 자의 생활에 영향을 준다. 그것도 아주 깊숙이.

◇해외 추모조형물=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따르면 국가가 주관해서 해외에 세운 강제동원 추모조형물은 이번의 미얀마를 포함해 필리핀,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등 4곳에 있다. 민간단체가 세운 일본(오키나와), 북마리아나제도(2곳), 러시아 사할린(3곳), 팔라우 등을 합치면 11곳. 마셜공화국에는 1996년에 건립했으나 관리 부실로 철거했고, 다시 세우려 하고 있다. 앞으로 세우고 싶은 곳은 중국, 미크로네시아, 키리바시공화국, 대만, 솔로몬제도, 태국, 말레이시아, 괌 등이다. 일본 정부는 35곳, 일본 민간단체는 29곳에 추모조형물을 건립했다(일본 통계는 1997년 일본 후생성 자료이므로 이후 더 늘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한인 2700명 희생 추정… ‘임팔’공략 작전은▼

일본군 최악 참패… 후퇴길 시체 쌓여 ‘백골가도’


버마 주둔 일본군들이 73년 전인 1944년 3월 인도의 연합군 기지 ‘임팔’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하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다. 그러나 이 작전은 처절한 패배로 끝났다. 일본 마이니치신문 소장
조선의 젊은이들은 버마 전선에서 몇 명이나 희생됐을까. 버마에 주둔한 일본군은 왜 무모하게 ‘임팔 작전’을 시작했을까.

김도형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의 논문(일제말기 필리핀·버마지역 한인 병사의 강제동원과 귀환,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7집, 2005), 일본 NHK방송이 1993년 6월 13일에 방영한 ‘NHK스페셜·다큐멘트 태평양전쟁 제4편, 책임 없는 전장∼버마·임팔’과 두 달 후 방송 내용을 보강해서 출간한 책(집필 하야시 아라타·신이화), 그리고 올해 8월 15일에 방영한 ‘NHK스페셜, 전율의 기록·임팔’을 참고하면 이 질문의 윤곽은 알 수 있다.

이번 미얀마 추도순례에 참가한 유족들의 아버지, 형님, 오빠 29명 중 20명은 ‘조선 제49사단사령부’ 소속이었다. 조선인만으로 만든 사단이 아니라, 조선에서 만든 사단이란 뜻이다. 김 연구위원은 제49사단 전체 병력을 1만∼1만5000명으로 가정했을 때 2000∼3000명 이상이 조선인 병사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제가 조선에서 강제징용한 군인·군속 명단 26만 명 중 미얀마에 배치한 사람은 4061명으로 나와 있다.

김 연구위원은 제49사단의 전사율은 54%, 귀환율은 46%였으므로, 버마 지역에 강제동원된 조선 병사를 5000명으로 보면 2700명이 희생을 당하고, 2300명이 귀환했을 것으로 추산한다(버마 지역의 조선인 사망·행불자를 강제동원위원회 백서는 133명으로, 일본 후생성은 453명으로 달리 집계하고 있어 이 방면의 연구는 더 필요하다).

일본은 버마에서 시작한 군사 작전을 ‘임팔 작전’으로 부른다. 일본군의 목표가 버마 국경에서 멀지 않은 인도의 연합군 기지 ‘임팔’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임팔에 단 한 명도 도착하지 못했고, 3만 명의 병사가 죽고 4만 명이 부상하는 처절한 패배를 당한다.

가장 큰 이유는 무모한 계획. 1944년 3월에 시작한 임팔 작전은 3주 동안 최장 470km를 도보로 돌파하고자 했다. 그것도 넓은 곳은 폭이 600m나 되는 거친 강을 건너고 2000m급의 험준한 산맥을 넘고 또 넘어서. 세계 최고의 호우지역인 버마의 우기(雨期)를 피하기 위한 단기작전으로 실제로 3주간의 식량밖에 지급하지 않았다. 병참을 완전히 무시한 작전이었다.

작전은 ‘현실’이 아니라 ‘희망’에서 시작됐다. 당시 일본은 태평양의 여러 섬에서 미군에 계속 패하고 있었다. 임팔을 취함으로써 패배 국면을 뒤집고 싶었다. 그래서 최고 수뇌부의 냉철한 검토 없이 작전을 승인한다. 그러나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일본군보다 훨씬 강했고 준비도 철저했다.

실제 작전을 실행했던 제15군사령부 사령관 무타구치 렌야(牟田口廉也) 중장의 독선도 한몫했다. 그는 작전에 반대하는 참모장을 한 달 반 만에 경질하고, 전투가 시작된 이후 작전 변경을 요구하는 사단장 3명을 소극적이라며 모두 바꿔 버린다.

3주를 예상했던 작전은 4개월이 지나서야 중지됐다. 영국군의 공격과 아사, 질병 등으로 일본군의 후퇴로에는 시체가 쌓이고 쌓였다. 그래서 ‘백골가도(白骨街道)’라고 불렸다. 작전 중지 후에 먹지 못하고, 병에 걸려서 죽은 병사도 60%나 됐다. 그래서 이 작전은 태평양전쟁 사상 가장 무모한 작전이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렇지만 책임을 지거나 처벌받은 군 수뇌부는 한 명도 없었다. 무타구치 사령관조차 나중에 녹음과 기록 등을 통해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강변한다.

NHK 보도에는 일본 병사들이 집단 자살을 했다거나, 죽을 때 ‘천황 만세’가 아니라 대부분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고 죽었다는 생생한 증언이 많다. 다음 증언은 진실을 의심케 할 정도로 충격적이다.

“우군끼리 죽이고, 고기를 떼서 물물교환 한다든가, 그만큼 비참했던 것이 일본군이었다. 그것이 임팔전이었다.”

지독한 굶주림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인육을 먹었다는 증언은 얻지 못했으나 먹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임팔 작전은 지옥이었다. 그런데 그 지옥 속에 함께 있던 조선인 병사 얘기는 영상에도, 책에도 한마디가 없다.

미얀마(양곤)=심규선 기자 ksshim@donga.com


#미얀마#일제 강제동원#일제 강제동원 한인 위령탑 제막식#임팔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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