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大道無門’ 거침없었던 YS의 삶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2일 01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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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오전 서거한 거산(巨山) 김영삼(YS)은 평생을 거침없이 살았다. 그가 즐겨 쓴 대도무문(大道無門·큰 길에는 문이 없다)이란 휘호처럼.

‘김영삼’을 빼고는 한국 현대정치사를 논할 수 없다. 27살이던 1954년 3대 총선에서 국회에 첫 발을 내디딘 그는 9선 의원을 거쳐 1992년 12월 대선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했다.

YS는 평생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함께 40년 동안 한국 정치사를 쥐락펴락한 ‘3김 시대’의 주인공이었다.

그에게는 ‘결단의 정치인’ ‘소신과 용기의 지도자’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어 다녔지만, 비판론자들은 1990년 3당 합당 이후 그의 행적을 놓고 ‘변절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문민시대를 열다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다. 오늘부터 정부가 달라지고 정치가 달라질 것이며… 위로부터의 개혁이 시작될 것이다.… 이 땅에 다시는 ‘정치적 밤’은 없을 것이다.”
1993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한 YS는 문민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면서 중단 없는 변화와 개혁을 강조 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지 31년 만에 대한민국에 문민시대를 연 것이다.

YS는 취임과 함께 개혁을 밀어붙였다. 1993년 고위공직자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1급 이상 공직자의 재산을 공개하도록 했다. 고위 공무원이 재임기간에 재산을 부당하게 증식하지 말라는 취지였다. 그는 자신의 재산도 공개하고 일체의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그리고 스스로 모범을 보인다며 내놓은 청와대 칼국수 메뉴는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역사바로세우기 운동도 전개해 1996년 일제시대의 상징이던 조선총독부 건물이던 중앙청을 철거하기도 했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선 부정부패와 12·12 쿠데타에 대한 역사의 죄를 물었다. 검찰은 1995년 수사에 착수했고 1997년 대법원은 전 전 대통령에 대해 군사반란 및 내란 혐의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 확정했다. 노 전 대통령도 내란 및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기소돼 1997년 대법원에서 징역 17년, 추징금 2628억 원의 형이 확정됐다. 하지만 이들은 그해 12월 YS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군 개혁에도 박차를 가했다. 1979년 12·12 쿠데타를 주도한 이후 군을 장악해온 사조직 ‘하나회’를 해체시켰다. 독재정권 시절 비밀스런 권력의 상징이던 안가를 철거하고 청와대 앞길도 개방했다.

검은 돈의 뿌리를 뽑겠다며 1993년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했다. 금융실명제는 금융거래의 투명성과 형평 과세를 통해 경제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기 위한 열망을 안고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하지만 1993년 말 우루과이라운드 쌀 개방 파동으로 정부가 첫 위기를 맞기도 했다.

임기 말은 괴로웠다. 1997년 차남 현철 씨가 국정에 핵심적으로 개입한 게 문제가 돼 국회 청문회에 불려간 데 이어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되는 아픔을 겪었다. 특히 여러 가지 제도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YS는 퇴임 직전 국가를 파산 직전으로 몰고 간 외환위기를 맞았다. 이는 두고두고 YS의 평가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중학생의 꿈 ‘대통령’

그는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김홍조 옹과 박부연 여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멸치 어장을 운영한 부친 덕분에 경제적으로 넉넉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의 정계 입문 후 멸치 선물을 받아보지 않은 정치인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중학생 시절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을 써 붙여 놓고 대통령의 꿈을 키웠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YS는 서울대 철학과 재학 시절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서 장택상 외무부장관상을 받은 인연으로 6·25전쟁 때 국회부의장인 장 씨의 비서로 들어갔다.

이후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 때 고향인 거제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 27세(본인은 호적 잘못으로 25세라고 주장) 최연소 후보로 금배지를 달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 연장을 위해 4사5입 개선을 강행하자 이에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을 탈당, 1991년 3당 합당 때까지 30여 년을 야당인으로 살았다.
이후 부산 서구로 지역구를 옮긴 그는 민자당 전국구 후보로 당선된 14대까지 한국정치 최다선인 9선을 기록했다. YS의 정치세력인 ‘상도동계’는 오랫동안 한국 정치의 한 축을 형성했다.

●40대 기수론

그가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 반대시위가 한창이던 1965년 당시 야당인 민중당의 원내총무를 맡으면서부터였다.

이후 그는 통합 야당인 신민당의 원내총무를 맡는 등 대변인 2차례, 원내총무 5차례를 맡으며 정치 보폭을 넓혀갔다.

1969년에는 3선 개헌 반대투쟁을 이끌던 중 상도동 자택으로 귀가하다 초산 테러를 당해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야당은 이를 정치 테러로 규정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 맞설 수 있는 야당의 핵심 지도자 위치에 올랐다.

대권의 꿈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것은 1970년 9월 ‘40대 기수론’을 제창하면서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선에서 두 번이나 패했던 신민당은 3선 개헌안마저 압도적으로 통과되자 무기력증에 빠져있었다. 이 때 그는 “우리는 위장된 민주주의에서 살고 있다. 빈사상태에 빠진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당시로선 ‘야당 내 쿠데타 선언’이었다. 야당을 회생시킨 40대 기수론이었다. 마침내 김대중 이철승 씨와 함께 대통령 경선을 치르며 야당의 세대교체를 이뤄냈다.

그러나 대선후보 경선에서 필생의 라이벌인 김대중 씨에게 2차 결선투표에서 역전패했다. 생애 최초의 정치적 좌절이었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개헌운동을 추진하던 그는 1974년 유진산 총재가 타계하자 최연소 제1야당 총재에 올랐다. 47세였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그의 유명한 말은 당시 전국적인 개헌운동을 벌여나가던 때 한 말이다.

그러나 1975년 5월 박정희 대통령과의 단독회담이 끝난 뒤 그는 신민당 비주류로부터 박 대통령과의 묵계설에 시달렸고, 결국 이듬해 전당대회에서 비주류에 당권을 빼앗겼다.

하지만 1979년 5월 전당대회에서 중앙정보부의 공작을 뒤엎고 신민당 총재에 다시 복귀했다. 박정희 정권과 정면대결이 다시 시작됐다. 총재 취임 2개월 만에 터진 신민당사 YH여공 농성 사건은 YS와 유신체제를 극한 대결로 몰고 갔다. 국내 정당사상 처음으로 법원의 결정에 의해 총재 직무가 정지되고 이어 총재직 박탈과 의원직 제명으로 이어졌다.

그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할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고 반(反) 유신투쟁은 계속됐다. 결국 부마사태에 이은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정권은 종언을 고했다.

●단식 23일

민주화의 서광이 비치는 듯했지만 ‘서울의 봄’은 너무나 짧았다. 1979년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소장 중심의 신군부는 1980년 5·17조치로 강압 통치를 이어갔다. YS는 이때부터 상도동 자택에서 외부와 차단된 채 기나긴 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1983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그는 목숨을 건 23일 간의 단식투쟁을 벌였다. 당시 정권의 검열 때문에 ‘재야인사의 식사 문제’라는 표현으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이는 군부 강압통치에 숨죽여왔던 민주화운동의 돌파구 역할을 했다.

이후 그는 김대중 씨와 함께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1985년 신민당 창당과 2·12 총선 돌풍 △1986~1987년 직선제 개헌 운동 및 6월 민주화운동 등을 주도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 것이다.

●3당 합당

6월 항쟁 결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그러나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됐다.

야권은 이듬해 4·26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를 만들면서 재기에 성공했지만, YS의 통일민주당은 DJ의 평민당에 밀려 제2야당으로 내려앉았다. 자연히 정국 주도권은 DJ가 쥐게 됐다.
초조해진 YS는 1991년 1월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 김종필 총재의 공화당과 3당 합당을 결행, 정국 지형을 180도 바꾸었다.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은 대선을 내다본 YS의 전략과 정국 관리를 위한 노태우 대통령의 필요성이 접점을 찾은 것이었다.

YS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는 길을 택한 것이었다. 건곤일척의 승부를 건 것이다.
그러나 호랑이 굴은 만만찮았다. 합당 초부터 내각제 개헌 파동이 터지면서 당내 계파 갈등이 고조됐다. YS는 내각제 합의각서가 공개되자 당무를 거부하고 고향인 마산에 내려가는 ‘정치 사보타지’를 벌이기도 했다.

노 대통령의 내각제 추진 포기 발언으로 파문은 가라앉았지만, 대선 경선 싸움은 순탄치 않았다. YS는 최대 계파인 민정계 일부의 비협조와 경쟁을 뚫고 결국 1992년 5월 집권 여당 최초의 경선에서 대통령 후보직을 따냈다.

이런 그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승부수를 던지며 국면을 극적으로 반전시키는 ‘동물적 감각’의 정치인이라고 평가한다. 반면 감각에 의존하다 보니 논리적인 사고가 부족하다는 평도 함께 따라다닌다.

●조깅과 배드민턴

YS는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말을 즐겨 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물론 청와대에 살면서도 조깅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새벽 조깅에 젊은 참모들이 버거워할 정도였다. 정상외교를 하면서 외국을 방문했을 때에도 조깅은 필수 스케줄이었다.

그는 또 등산을 좋아했다. 재야시절 결성한 민주산악회는 끈끈한 동지적 유대감이 남달랐을 뿐만 아니라 든든한 정치적 자산이었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에는 주로 배드민턴을 취미로 삼았다. 2008년 7월에는 무리하게 스매싱을 하다가 늑막에 혈흔이 섞인 물이 차는 혈액가슴증이 생겨 시술을 받은 후 며칠 간 입원을 하기도 했다.

YS는 고령에도 배드민턴과 산책을 즐기는 등 남다른 건강 체질을 보였다. 부친인 김홍조 옹도 2008년 97세의 나이로 별세할 때까지 남다른 건강을 유지했다.

그러나 YS도 세월은 이기지 못했다. 그는 2013년 4월 가벼운 감기 증세로 입원한 이후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에서 한 달가량 폐렴 집중치료를 받은 뒤 일반 병실에서 머물고 있었다.

YS는 대통령 퇴임 후에도 왕성한 정치적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후임 대통령인 DJ에게는 ‘독재자’라고 비난했다. 1999년 4월 한나라당 의원 등과의 만찬에서 전화도청, 고문 등 인권탄압을 함께 야당파괴 선거부정 등을 저지른 독재자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는 2002년부터 5년 동안은 일본 와세다 대학 특명교수 자격으로 정기적으로 일본을 방문해 한일관계와 북한문제 등에 대해 특강을 하기도 했다. 2003년 8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을 겨냥해 “참으로 무능하고, 무지하고, 대책 없는 정권”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반면 2007년 대선 경선 때는 당시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 YS는 그해 12월 28일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만나 “당선자가 안정적으로 통치를 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돕자”고 의견도 모았다. 2009년 8월에는 병세가 위중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방문해 정치적 구원(舊怨)의 매듭을 풀고 극적으로 화해하기도 했다.

YS는 특히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선 ‘독재자의 딸’ ‘칠푼이’ 같은 독한 말을 자주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으로 역사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소신을 밝히곤 했다. 2011년 2월에는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의 퇴진에 대해 성명을 내면서 “사랑하는 조국에 군사쿠데타라는 죄악의 씨를 뿌린 원흉이 바로 박정희 육군 소장”이라며 “이후 32년 동안 군사정권이 이 나라를 지배했고 독재자 박정희는 18년간 장기 집권하며 국민을 탄압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태원기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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