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영식]성신지교 vs 골포스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4일 03시 00분


코멘트
김영식 정치부 차장
김영식 정치부 차장
동북아시아 지역을 담당했던 미국의 한 외교관은 한자 문화권 국가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한국 중국 일본의 차이점이 뚜렷하다고 했다. 3국의 외교 협상 스타일을 개인적인 분석으로 전하기도 했다.

“일본은 자구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따져서 힘들고, 중국 외교관은 당(黨)이 결정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지연시켜 힘들었다.”

한국에 대해서도 거론했다. “한국과는 바로 합의에 도달한다. 그런데 다음 날 다시 찾아와 ‘여론 때문에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쉬운 나라는 없었다.”

그런 세 나라가 한자리에 모여 한중일 3국 정상회의와 양자 정상회담을 했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일부 비쳤을 법한 인상이 그대로 3국의 외교 현장에서 등식처럼 대비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한국 외교에 대한 그의 인상은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한국을 폄훼할 때 쓰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한 것이어서 씁쓸함을 남겼을 뿐이다. 그런 기억이 이번 한일 정상회담을 지켜보면서 다시 떠올랐다.

한일 협상 과정에서 일본이 문안을 까다롭게 다룬다는 악명은 두드러진다.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 일본이 미국 등 다른 나라와 협상 문구로 다툴 때에는 사안을 분명하게 정비하는 우호적인 방식인 반면 한국과는 본질을 흐리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접근일 때가 많다는 것. 한 고위 외교관은 “일본 외교는 두 가지 방식이다. 하나는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외교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을 겨냥한 외교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은 7월 초 메이지(明治) 산업시설 세계문화유산 등재 과정에서도 논란을 만들었다. 강제노역이라는 뜻의 영어 표현인 ‘forced to work’를 성명에 넣기로 하고 한국으로부터 문화유산 등재 동의를 얻었다. 하지만 좀 더 분명한 의미인 ‘강제노동(forced labor)’이라는 문구를 피했던 일본은 자국어로는 ‘억지로 일했다’는 뉘앙스인 ‘하타라카사레타(동かされた)’로 번역했다. 전형적인 ‘뒤통수치기’인 셈이다. 막상 허탈하게 만든 것은 강제징용을 했던 일본 기업 미쓰비시머티리얼의 태도였다. 미국은 물론이고 영국 포로들, 중국인 강제징용 노동자에게 사과했지만 한국 강제징용자는 외면했다. 일본과는 협상보다 그 이후가 더 힘들다는 외교관들의 얘기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2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조기 타결을 위한 협의 가속화’에 합의했다. 하지만 그 시점이 연내인지를 두고 엇갈린 행보를 보였다.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태도를 재강조했다. 1965년 당시엔 위안부 문제의 존재 자체를 몰라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는데도 말이다.

그 어느 때보다 위안부 문제가 중요한 관심사로 떠오른 이번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은 일본 에도(江戶) 시대 외교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언급한 ‘성신지교(誠信之交)’를 거론하며 한일 관계의 기초를 진실과 신뢰에 뒀다. 아베 총리는 일본에 돌아가 “많은 일본인은 한국이 ‘골포스트(골대)’를 움직인다고 실감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번에 합의하면 그 수준이 어떤 것이든지 다음엔 군 위안부 문제를 더 이상 꺼내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는 셈이다. 미국을 겨냥한 용어인 ‘골포스트’ 언급도 달갑지 않다.

그래서 화가 난다. 언제 한번 제대로 충분하게 사과를 했거나, 골포스트를 제대로 세운 적이라도 있는지….

김영식 정치부 차장 spear@donga.com
#외교#협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