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DB화, 야구처럼 기록경기로 바꾸고 싶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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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프로그램 개발팀장으로 변신한 프로기사 손근기 5단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 팀장, 아프리카TV의 VJ 등 프로의 승부 세계가 아닌 다른 길을 걷고 있는 프로기사 손근기 5단. 최근 미래창조과학부로부터 8억여 원의 지원을 받아 2년여 동안 바둑 관련 소프트웨어를 만들 예정이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 팀장, 아프리카TV의 VJ 등 프로의 승부 세계가 아닌 다른 길을 걷고 있는 프로기사 손근기 5단. 최근 미래창조과학부로부터 8억여 원의 지원을 받아 2년여 동안 바둑 관련 소프트웨어를 만들 예정이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프로기사 손근기 5단(28)은 올 4월부터 영상 관련 프로그램 개발 정보기술(IT) 업체인 ‘코어라인소프트’로 출근하고 있다. 그는 이 회사에서 바둑 관련 소프트웨어 개발의 총책임자인 수담기획팀장으로 일한다.

수담기획팀은 지난달 28일 미래창조과학부가 공모한 시장친화형 디지털콘텐츠 연구개발(R&D) 우선사업자로 선정돼 바둑 관련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조건으로 2년에 걸쳐 8억3000만 원의 지원금을 받게 된다. 직원이 20명인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를 따낸 것. 공모 과정에서 다섯 번의 발표를 모두 그가 직접 나가 진행했다.

“처음엔 업체 프로그래머가 바둑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며 지난해 11월 저한테 조언을 구했어요. 많은 얘기를 나누다가 아예 회사에 들어와 개발 책임을 맡아 달라고 제안해 입사했어요.”

2003년 16세에 입단한 그는 통산 145승 156패를 거뒀다. 승부사로서는 평범한 성적이었다.

“2012년 군대를 제대한 뒤 승부의 세계에선 더이상 힘들다고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어요. 이세돌 9단과 가끔 술자리를 하는데, 같은 프로기사가 보기에도 이 9단은 승부에 있어선 확실히 다른 차원에 있어요. 그렇다면 제 나름의 길을 찾아보자….”

그는 우선 바둑TV와 K바둑의 방송 해설자로 나섰다. 해군 근무 시 장병들을 상대로 바둑 강연을 한 것이 큰 자산이었다. 이어 2013년 10월 포털사이트 다음 ‘팟 플레이어’를 통해 인터넷 방송을 했다. 7월부터는 아프리카TV로 옮겨 ‘프로 손근기의 수담바둑방송’이란 이름으로 매주 화요일 오후 10시마다 방송하고 있다. 최근 대국을 복기 해설하거나 바둑계 뒷얘기, 시청자가 궁금해하는 질문에 대해 답을 해준다. 평균 시청자는 40∼50명 선.

한우물을 파야 하는 프로기사로서는 세상사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성격도 승부의 세계를 떠나는 데 한몫했다. “선배 기사 한 분이 ‘세상에 관심이 많다면 신문을 읽어라’고 조언했어요. 그 말대로 1년간 하루 3시간씩 신문을 필기해 가며 정독했어요. 1년이 지나자 세상 돌아가는 일의 경계가 어렴풋이 보이더라고요.”

그가 수담기획팀을 통해 개발해 공모에 제출한 여러 개의 프로그램 아이디어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중 바둑 두는 과정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면 수순을 자동으로 기록해주는 프로그램이 가장 눈에 들어왔다.

“지금 프로 기전 예선전 대국은 기록을 안 하는데요. 이렇게 버려지는 판이 매년 2000판이 훨씬 넘어요. 아까운 데이터베이스죠. 이걸 스마트폰과 앱만 있으면 저절로 기록할 수 있습니다. 아마추어도 자신의 대국을 쉽게 기보로 남길 수 있게 되죠.”

그는 수많은 기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해서 바둑도 야구처럼 기록의 경기로 바꾸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야구에선 투수가 어떤 공을 어떻게 던질지, 타자가 친 공이 어디로 가는지 확률을 계산해 수비도 바꾸고 타자를 교체하잖아요. 바둑도 이 프로기사가 어떤 수나 포석을 좋아하는지 데이터베이스로 쉽게 찾아내 작전도 세우고 해설도 재미있게 하는 거죠.”

그의 머리에선 아이디어가 샘솟듯 나오는 듯했다.

“사실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보다 그걸 사업모델로 연결하는 것, 즉 돈 버는 방법을 마련하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아요. 앞으로 2년간 차분히 준비해야죠.”

앞으로 승부 외에 다른 길을 찾을 많은 기사의 롤 모델이 되고 싶다는 그는 인터뷰가 끝나고 헤어진 뒤 “편안한 인터뷰였다. 감사하다. 다시 뵙고 싶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프로기사와 인터뷰한 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문자였다.

▼5급 공무원, 개인투자사 설립, 목회자… 다양한 길을 걷는 프로기사들▼
현재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는 309명. 입단자는 매년 15명씩 배출된다. 승부의 세계에 전념해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낮아지는 상황. 이 때문에 승부 대신 다른 길을 찾아 나선 기사가 적지 않다.
윤재웅 4단은 현재 산업통상자원부 경제자유구역기획단에서 사무관으로 일하고 있다. 2000년 입단한 그는 2004년 학업을 선택해 연세대 전기전자공학부에 입학했고 2012년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이창호 9단과 동갑내기인 윤성현 9단은 14세 때 입단해 패왕전과 박카스배 천원전에서 준우승하는 등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그도 30대에 들어서자 주식 투자의 길로 나서 현재는 개인투자사를 설립할 정도로 성공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김효곤 5단은 사모투자회사에서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박승현 7단은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전도사가 됐으며 현재 목사 공부를 하고 있다.

바둑 관련 일을 하는 기사도 있다. 박승현 7단의 형인 박승철 7단은 한국기원, 김강근 7단은 한게임, 김형환 7단은 타이젬 등 바둑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김찬우 6단은 바둑 애플리케이션(앱) 개발 사업에 뛰어들어 안드로이드용 앱인 ‘바둑의 제왕’을 최근 출시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바둑#기록경기#프로그램#개발#손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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