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KAL기 피격후 美-소련 핵전쟁 위기 맞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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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P, 기밀 해제된 당시 문서 보도
“미군 훈련을 공격 준비로 오인… 소련 지도자들 ‘전쟁공포’ 느껴”

‘당시 전쟁 공포(war scare)는 실제였다.’

1983년 9월 소련의 대한항공(KAL) 007기 격추 이후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양측이 그해 말 핵전쟁 위기까지 갔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당시 소련 지도자들은 미국이 군사훈련을 빙자해 자국에 핵 기습공격을 가할 것을 심각하게 걱정했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24일 미국 정부 보고서를 인용해 보도했다.

‘소련의 전쟁 공포’라는 제목이 붙은 109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이달 기밀문서에서 해제됐다. 대한항공 여객기가 격추된 1983년 가을은 냉전시대 중에서도 양국 관계가 가장 냉랭했던 시기 중 하나로 평가돼 왔는데, 이번 문서 공개를 통해 당시 소련 지도부가 느낀 위기감이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보고서는 이와 관련해 결론 부분에서 “1983년 우리(미국)는 의도치 않게 소련과의 관계를 일촉즉발인 상황(on a hair trigger)으로 몰아넣었을 수 있다”고 밝혔다.

미소 핵전쟁 위기 고조는 그해 9월 269명이 탑승한 대한항공 여객기가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미사일에 격추되면서 본격화됐다. 탑승자 전원이 모두 숨졌다. 미국은 대응책으로 격추 두 달 뒤 중거리 핵미사일 퍼싱Ⅱ와 지상발사 순항 미사일의 유럽 배치를 준비했다. 또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11월 초 군사훈련 ‘에이블 아처 83’을 대대적으로 실시해 소련을 압박했다. 에이블 아처는 핵전쟁으로 치닫는 과정을 연습하는 훈련으로 매년 실시돼 왔다. 하지만 1983년 훈련 때는 터키에서 영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미군 병력을 실제로 동원했고 새로운 통신기술을 시험하는 등 여느 때와 달랐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이에 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훈련을 가장해 실제로 소련을 기습 공격할 가능성을 크게 우려했다. 이에 따라 동독과 폴란드에 배치된 소련 공군에 최고 경계태세를 유지하라고 명령하고 정찰 비행도 대폭 늘렸다. 창고에 보관된 핵무기를 항공기에 탑재하는 속도를 핵무기 1개당 25분 이내로 단축시키라는 명령이 하달되기도 했다. 또한 국가안보위원회(KGB)와 군 정보기관에는 유럽 내 미군기지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미국의 핵공격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는 신호들이 포착되는지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이 보고서는 “미군의 훈련 중 소련이 미군의 행동을 실제 공격 준비로 오인했다면 상황이 극도로 위험해질 수 있었을 것”이라며 “미국은 당시 소련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이듬해 정보기관의 사후 분석에서도 상황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했다”고 지적했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kal기#미국#소련#핵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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