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표현을 끝없이 욕망한 일그러진 얼굴의 ‘스타 예술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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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스터 터너’로 본 英 국민화가 윌리엄 터너

터너가 1799년 그린 자화상(왼쪽 사진)과 영화에서 터너 역을 맡은 티머시 스폴. 진진 제공
터너가 1799년 그린 자화상(왼쪽 사진)과 영화에서 터너 역을 맡은 티머시 스폴. 진진 제공
긍정적인 쪽이든 부정적 비판이든, 누군가의 예술 작업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거나 글을 쓰는 건 괴롭고 부끄러운 일이다. 22일 개봉해 미술 좋아하는 관객의 시선을 끌고 있는 영화 ‘미스터 터너’는 그 괴로움과 부끄러움의 까닭을 알려준다.

“터너…. 갈수록 시력을 잃어가는 모양이군.”

“너저분한 노란색 범벅이네.”

“정신질환의 전조 아닐까?”

자신에 대한 인터넷 기사 댓글을 몰래 확인하는 연예인처럼, 영국 화가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1775∼1851)는 영화 중반 자신의 그림을 보고 혹평하는 구경꾼들의 조롱을 숨어서 엿듣는다.

부친의 전폭적 지원 덕에 타고난 재능을 일찌감치 세상에 알려 20대 때 이미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된 그는 평생 ‘가난한 예술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영화가 2시간 30분 내내 묵묵히 주목하는 것은 ‘젊어서 성공한 예술가가 동시대의 흐름을 전략적으로 거스르며 스스로를 끝없이 발전시킨 이야기’다.

영화 ‘미스터 터너’에서 퇴역 전함 테메레르호가 예인되는 장면(위 사진). 마이크 리 감독은 영화 곳곳에서 터너의 작품을 움직이는 영상으로 재현했다. 아래 사진은 터너가 스스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꼽은 유채화 ‘해체를 위해 최후의 정박지로 예인되는 전함 테메레르호’(1838년). 진진 제공
영화 ‘미스터 터너’에서 퇴역 전함 테메레르호가 예인되는 장면(위 사진). 마이크 리 감독은 영화 곳곳에서 터너의 작품을 움직이는 영상으로 재현했다. 아래 사진은 터너가 스스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꼽은 유채화 ‘해체를 위해 최후의 정박지로 예인되는 전함 테메레르호’(1838년). 진진 제공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 걸린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이라 할 만한 터너의 유채화 제목은 다음과 같다. ‘눈보라―얕은 바다에서 신호를 보내며 유도등에 따라 항구를 떠나는 증기선. 나는 에어리얼호가 하위치 항을 떠나던 밤의 폭풍우 속에 있었다’(1842년). 폭풍우와 파도가 한 덩이로 뒤엉켜 휘몰아치는 복판에 위태롭게 기울어진 돛대를 희미하게 올려놓은 이 그림은 발표 당시 “비누 거품과 회반죽 덩어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60대 중반의 터너는 이 작품을 그리기에 앞서 선원들에게 부탁해 돛대에 몸을 묶고 4시간 동안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를 체험했다. 그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다. 풍경이 어떻게 보이는지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형태를 캔버스 위에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의 움직임을 붓으로 전하려 한 것이다. 그를 옹호했던 비평가 존 러스킨은 “색채를 이성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시력 되찾은 맹인처럼 순수한 감각으로 인식했다”고 평했다.

오래된 서재에서 터너가 여인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모습을 담은 영화 속 장면(위 사진). 터너가 1830년경 청색 종이에 그린 수채화 ‘페트워스: 터너와 찬미자들’(아래 사진). 진진 제공
오래된 서재에서 터너가 여인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모습을 담은 영화 속 장면(위 사진). 터너가 1830년경 청색 종이에 그린 수채화 ‘페트워스: 터너와 찬미자들’(아래 사진). 진진 제공
영화는 터너의 후기 작품에 대한 논란을 윤색 없이 전한다. 24세 때 터너가 그린 자화상에는 또랑또랑한 눈매의 미청년이 서 있다. 하지만 마이크 리 감독은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쥐로 둔갑하는 악당으로 나온 티머시 스폴을 주연으로 내세웠다. 새로운 표현을 드러내고픈 욕망을 숨기고 살아가는, 일그러진 얼굴의 스타 화가. 그의 내면적 갈등을 은근히 끌어내는 인물은 조연으로 등장하는 화가 벤저민 헤이던이다. 가난에 찌들어 사사건건 불평불만을 늘어놓던 그는 “탄탈로스(신의 비밀을 인간에게 알려 지옥에 갇힌 제우스의 아들)”라 조롱받다가 주류 미술계에서 쫓겨난다. 그에게 터너는 약간의 돈을 귀찮은 듯 빌려준다. 영화에 언급되지 않지만 헤이던은 결국 칼로 자신의 목을 베어 자살한다.

영화 속 터너는 “거울을 마주할 때마다 가고일(교회 지붕 귀퉁이에 장식되는 괴물 조각상)을 본다”며 자조한다. 딱 한 번, 그가 감정을 배설하듯 오열하는 장면이 있다. 먹고 살며 예술 하는 긴 싸움의 고단함이, 고장 난 기계 소음 같은 그 울음에 배어난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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