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 주인공서 거악으로 안방 돌아온 ‘모래시계 세대’, 왜?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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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모래시계 세대’ 변절 다룬 드라마 잇달아

《 요즘 TV에는 사회성 짙은 드라마가 트렌드다. 정치적 야망과 권력을 추구하는 검찰을 다룬 ‘펀치’와 ‘오만과 편견’, 기자를 주인공으로 한 ‘힐러’와 ‘피노키오’ 등이 그렇다. 현실감 높은 전개가 특징인 이들 드라마의 공통점은 극중 악역을 맡고 있는 인물들이다. 꼭 20년 전 방영된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1980년대 초반의 순수한 청년들이 이제는 ‘거악(巨惡)’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 변절한 ‘모래시계 세대’의 모습을 분석해봤다. 》

1995년 방영된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인공 박태수(최민수) 윤혜린(고현정) 강우석(박상원)은 모두 20대 초반에 광주민주화운동과 삼청교육대 등 1980년대 초 현대사의 굴곡을 겪었다. 이들은 대략 1950년대 말∼60년대 초에 태어나 대학에 입학했다면 1970년대 말∼80년대 초 학번인 세대다.

이들 모래시계 세대를 새로운 악역으로 불러낸 TV 드라마 ‘힐러’ ‘펀치’ ‘오만과 편견’ ‘피노키오’ 등은 10% 안팎의 시청률을 보이며 인기를 끌고 있다.

‘모래시계’를 쓴 송지나 작가의 작품인 ‘힐러’에서 김문식(박상원)은 1980년 언론통폐합 직후 친구들과 함께 정권을 비판하는 해적방송단을 운영했지만 지금은 권력과 야합하는 거대 신문사의 회장이다.

‘오만과 편견’의 문희만 부장검사(최민수)는 1999년 재건그룹 특검 당시 정의감 넘치는 검사로 재벌 비리를 파헤쳤지만 결국 또 다른 권력에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한다.

‘피노키오’의 송차옥 사회부장(진경) 역시 2000년 폐기물 공장 화재 사고의 진실을 밝히려 했지만 결국 승진의 유혹 등을 이기지 못하고 타협한 언론사 간부로 묘사된다.

검찰총장이 되기 위해 비리를 서슴지 않고 저지른 ‘펀치’의 이태준은 어린 시절 칡뿌리를 캐먹으며 가난을 버텼고 스무 살 무렵에는 고향이 댐 건설로 수몰된, 시대의 피해자였다는 과거를 지니고 있다.

이들 드라마에서 모래시계 세대는 젊은 시절의 순수함과 정의감을 잃어버린 뒤 그들이 싸웠던 기성세대 못지않은 악한 세력으로 설정됐다.

서희원 문학평론가는 “모래시계 세대는 민주화를 부르짖기 시작한, 시대의 주인공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세대였지만 이후 경제·정치적으로 환멸을 경험한 세대이기도 하다”며 “대중문화 속에서 이 세대들은 주인공에서 속물로 변화했고, 그중 욕망이 강한 일부는 속물에서 괴물로 변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20, 30대 세대는 모래시계 세대가 저지른 과거의 잘못 때문에 고통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오만과 편견’의 문희만과 정창기(손창민)가 특검 때 일으킨 교통사고는 주인공 한열무(백진희)의 동생이 납치·살해당하는 계기가 된다. 또 ‘피노키오’의 주인공 기하명(이종석)은 연인인 최인하(박신혜)의 어머니 송차옥이 왜곡보도를 한 탓에 아버지를 잃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다.

이영미 문화평론가는 “연애물에서 순수한 첫사랑의 기억이 현재의 인물에게 영향을 미치듯 사회성이 짙은 드라마에서는 과거의 과오가 현재 세대의 발목을 잡는다는 구성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젊은 시절 정의롭던 모래시계 세대는 ‘핏줄’ 앞에서는 불의와 타협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펀치’의 이태준은 형의 비리를 무마하기 위해 권력을 이용하고, 강직하던 법무장관 윤지숙(최명길) 역시 아들의 병역비리를 덮기 위해 이태준과 손잡는다.

모래시계 세대의 재등장은 이들이 기성세대의 주축이 되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김선영 TV 평론가는 “힐러의 송지나 작가와 펀치의 박경수 작가가 바로 모래시계 세대와 동년배이기도 하다”며 “한때 사회변혁을 꿈꿨지만 세월이 흐르며 기득권을 갖게 된 이세대들이 자신들의 변절을 다음 세대가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투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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