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서 주인공 제제는 가슴 깊이 품고 살던 노래하는 작은 새를 날려 보내며 어린 시절과 작별한다. 이어폰을 꽂거나 콧소리를 흥얼거리지 않고도 마음속에서 언제든 재구성해 들을 수 있는 음악이 간혹 있다. 그런 음악에 대한 책읽기는 공부가 아닌 연애에 가깝다.
서울 신촌과 강남역 복판에 재즈 음반을 잔뜩 진열한 레코드가게가 존재한 시절이 있었다. 라디오에서 듣고 후다닥 받아 적은 곡 또는 아티스트의 단서 쪽지를 들고 더듬더듬 앨범을 찾았다. 그중 지금껏 귀로든 마음으로든 거듭 돌려 듣는 하나가 영국 중창단 힐리어드 앙상블의 ‘탈리스: 예레미아의 애가’다. 저자가 추린 추천작 33장 리스트에는 없지만 그것이 재즈 레이블 ECM과의 첫 만남이었다.
지은이는 2년 전 서울에서 열린 ‘ECM: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 전시기획 자문역을 맡았던 음반수집가다. 오디오 또는 음악 애호가 저서에서 이따금 보이는 ‘이거 들어봤어?’식 표현은 조금도 없다. 한 음반과의 만남이 해당 아티스트의 다른 음악이나 동료의 앨범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펜대에서 힘을 빼고 자제하며 써내려간 기색이 역력하다. ECM 음악에 적합한 템포의 글이다. 힐리어드 앙상블이 지난해 은퇴했다는 소식을 책에서 접했다.
서울 전시 때 만난 만프레트 아이허 ECM 설립자는 오직 음악과 관련된 질문에만 친절히 답했다. 1969년부터 1500여 장의 앨범을 만든 그는 결코 상냥한 인물이 아니었다. 전혀 상관없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 지구 위 현재진행형 재즈가 이만큼이나마 남아 있을까. 책에 수록된 아무 음반이나 귀에 걸고 흘끔흘끔 훑으며 차 한 잔 마시길 권한다. 저자는 “키스 재릿의 쾰른콘서트 앨범을 두통약 대신 쓴다”고 했다. 동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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