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목이 갑자기 생각 안 나는데…. 파란 커튼 밑으로 빨간 하이힐 신은 여자 다리가 보이는 표지일 거야. 그거 사오면 돼.”
회사원 박모 씨(40)의 아내는 소설광이다. 퇴근길 서점에 들러 아내가 부탁한 책을 사간 박 씨. 고맙다는 말을 기대했던 박 씨는 아내의 실망한 모습에 어리둥절했다.
○ 북 도플갱어?
그의 아내가 원했던 책은 일본 작가 오리하라 이치의 ‘그랜드맨션’(비채)이었다. 박 씨가 사간 책은 김서진 작가의 신작 소설 ‘2월30일생’(나무옆의자). 박 씨는 “나중에 보니 두 책의 표지가 똑같은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황당해했다.
지난해 말 출간된 ‘살아 숨 쉬는 마을 만들기’(알마)와 올해 6월 나온 ‘내 옆에는 왜 이상한 사람이 많을까’(동양북스)의 표지도 노란색 배경과 수십 명의 얼굴을 모아놓은 만화 이미지가 유사하다. 여기에 3월 출간된 ’나는 사회인으로 산다‘(궁리)까지 나란히 놓으면 마치 세 쌍둥이처럼 닮았다.
소설 ‘숨그네’(문학동네)와 ‘한 여름의 살인’(좋은책만들기), ‘토성의 고리’(창비)와 ‘영원히 사라지다’(비채)처럼 서로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지만 책 표지가 비슷한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 출판사들, “이미지 뱅크에서 저렴하게 사다 보니…”
대학생 이수경 씨(27)는 “친구들과 ‘비슷한 책 표지 찾기’ 놀이를 한 적이 있을 정도”라며 “표지가 비슷한 이유가 궁금하다”고 말했다.
닮은꼴 표지가 늘어난 데는 제작 시스템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예전엔 신간의 표지 제작을 주로 외부 디자이너에게 맡겼다. 하지만 출판사가 자체적으로 표지를 제작하는 경우가 늘면서 표지에 쓸 사진과 그림을 해외 ‘이미지 뱅크 업체’에서 구입하다 보니 비슷한 표지가 등장하게 됐다는 것.
게티이미지, 드림스타임, 셔터스톡, 토픽이미지 등 이미지 뱅크 업체는 그림, 사진을 판매하고 수익을 작가와 반반씩 나누는 회사다. 국내 출판사도 이들 업체와 계약을 하고 단행본 표지에 쓸 이미지를 사용 기간 7년에 건당 20만 원가량을 주고 구매한다.
이런 추세는 출판계 불황과도 연관이 있다. ‘궁리’의 김주희 편집자는 “국내 디자이너에게 발주하면 기존 이미지를 구입할 때보다 비용이 10배나 더 든다”고 밝혔다. 이미지 뱅크 업체에서 그림을 구입할 때 다른 출판사가 사용하지 못하도록 ‘국내 독점 사용’을 신청할 수도 있으나 이 경우 3∼4.5배 더 지불해야 한다.
○ 책 종류에 따라 선호 이미지도 달라져
이미지뱅크 업체의 한 관계자는 “출판사들이 선호하는 이미지가 비슷한 것도 같은 장르의 서적에서 표지 디자인이 겹치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국내 출판사들은 문학 표지로 추상적인 이미지를 즐겨 쓴다. 반면 해외 출판사는 표지만 봐도 주제를 알 수 있도록 책의 내용과 직결되는 이미지를 선호한다.
사회과학 서적의 경우 배경색으로 노랑 등 따뜻한 계열을 주로 선택한다. 딱딱한 책 내용을 쉽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완화하려는 것. 소설에는 붉은색 등 강렬한 색이 주로 쓰인다.
‘열린책들’의 강무성 주간은 “출판계에는 책 표지는 화려한데 책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아 독자의 반응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요즘은 디자인 전공자보다는 책 내용을 잘 아는 편집자나 인문학 전공자들이 디자인을 배워 직접 표지 디자인을 맡는 사례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