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눈부신 날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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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같이 햇빛이 고운 날에는 유럽에 사는 여고 동창이 생각난다. 아주 가끔 서울에 오는 그 친구는 햇빛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서울에 사는 친구들은 양산을 펴거나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도 햇빛을 피해 그늘로 숨는데, 이 친구는 일부러 볕이 드는 곳을 찾아다닌다. 햇빛이 아깝다는 것이다.

젊을 적에는 나도 햇빛이 아까운 줄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10여 년 전의 일이다. 이웃에서 가깝게 지내던 부부가 있었는데, 그 남편이 몸도 건장하고 성격도 활달하여 주위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갑자기 말기 암 선고를 받았다. 병원에 오래 입원했다가 결국 치료를 포기하고 퇴원하던 날, 남편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았다고 했다.

“그때 마침 차창 밖으로 구두닦이 아저씨가 보였어요. 햇볕 아래서 열심히 구두를 닦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환해 보여 부럽던지….”

퇴원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그녀의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그녀 또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렸지만 이상하게 그 말이 잊히지 않고 내 가슴에 남아 있다. 그래서 나도 가끔 차를 타고 가다가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땀을 흘리며 무언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건강한 사람을 보면 그녀의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 지금 노상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저 사람은 누군가 자기를 부러워한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그때 깨달았다. 그 질문은 누구에게나 유효한 것이라는 걸.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부러움의 대상일 수 있다는 것은 모르는 채 항상 남을 부러워하기만 하는 건 아닌가. 그저 건강한 몸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인 줄 모르고 늘 부족하고 아쉬운 마음에 스스로 그늘로 숨었던 건 아닐까. 햇빛이 귀한 줄 모르고 무심하게 살아온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창조주는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은 흔하게 만들었다. 햇빛은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더 빛나지만 흔하기에 값이 없다. 그런데 값을 매길 수 없다(priceless)는 것은 대단히 값이 비싸다는 의미가 아닌가.

오늘, 보석보다 더 값진 햇빛 아래 산들바람 부는 길을 걷다가 “아, 이 가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부러울 게 없구나!”라는 느낌에 가슴이 벅찼다. 그 순간, 괜히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찬란한 가을햇빛이 너무 눈이 부신 탓이었을까.

윤세영 수필가
#동창#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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