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문창극 퇴장과 민주주의 시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24일 21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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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문 씨가 대통령 후보였고 친일 프레임에 民心 바뀌었다면
국민의 대선 선택이 왜곡됐을 수도
대다수 국민이 眞實을 공유할 때 판단과 선택의 참민주주의 가능
사마천 “나라가 망하려면 세상 어지럽히는 난신들이 득세“

배인준 주필
배인준 주필
한번 상상해보자. 문창극 씨가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 대선이 임박한 시점, KBS가 문 후보의 70분짜리 교회 강연 중 극히 일부만 떼어내 그가 반민족 친일분자인 듯한 인상을 강하게 전파한다. 문 씨에게 적대적인 박지원 씨가 이 보도를 근거로 “식민사관을 가진 분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다면 앞으로 우리 학생들에게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교육하겠다는 건가”라고 공세를 편다. 문 후보 발언의 전체 내용과 진의(眞意)를 접하지 못한 유권자들은 ‘식민사관을 가진 대통령=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낙인과 등식에 심한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투표소로 간다.

선거가 끝난 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서양사학자)는 TV에 출연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교회 강연 동영상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정말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강연 전체를 보고 반(反)민족주의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이다”라고…. 문 후보의 할아버지가 항일투쟁 중 전사한 사실도 밝혀진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번복되지 않는다.

문 씨에게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그가 총리 후보자였으니 망정이지 진짜 대통령 후보였고 그 맹목적 친일파 프레임에 걸려 낙선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선거 민주주의를 통한 국민의 자발적 선택조차 나중에 돌아보면 잘못된 선택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자. 문창극 총리 후보자는 어제 형식상 자진사퇴를 했다. 그 사퇴의 변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언론의 생명은 진실보도입니다. 발언 몇 구절을 따내서 그것만 보도하면 그것은 문자적인 사실보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체의 의미를 왜곡하고 훼손시킨다면 그것은 진실보도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널리즘의 기본은 사실보도가 아니라 진실보도입니다. 우리 언론이 진실을 외면한다면 이 나라 민주주의에 희망이 없습니다.” 언론이 국민을 오도하면 민주주의가 위험해진다는 경고는 적확하다. 국민의 투표 및 여론 형성은 진실에 입각해 이루어져야만 민주주의의 표출이 된다.

문 씨는 이런 말도 했다. “법을 만들고 법치에 모범을 보여야 할 곳은 국회입니다. 이번 저의 일만 해도 대통령께서 총리 후보를 임명했으면 국회는 법 절차에 따라 청문회를 개최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청문회 법은 국회의원님들이 직접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야당은 물론, 여당 의원 중에서도 많은 분들이 이런 신성한 법적 의무를 지키지 않고 저에게 사퇴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국회가 스스로 만든 법을 깨면 이 나라는 누가 법을 지키겠습니까. 국민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오도된 여론이 국가를 흔들 때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습니다.” 법을 먼저 어겨 국민을 오도하는 정치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음에 나는 공감한다.

문 씨가 사퇴한 뒤 박 대통령은 청와대 대변인을 시켜 이런 말을 국민에게 전했다. “국회 인사 청문회를 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검증을 해서 국민들의 판단을 받기 위해서인데 인사 청문회까지 가지 못해서 참 안타깝게 생각한다. 앞으로는 부디 청문회에서 잘못 알려진 사안들에 대해서는 소명의 기회를 주어 개인과 가족이 불명예와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지 않도록 했으면 한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기록해 둘 일이 있다. 문 후보 인사청문회는 박 대통령이 청문 요청안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문 후보가 사퇴의 변에서 굳이 대통령을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대통령이 법치의 보루가 되지 못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언론과 대통령과 국회를 구성하는 여야 정당·정치인들이 문 씨를 총리직에서는 버렸지만, 그의 말에 담긴 민주주의를 위한 경고는 살려냈으면 한다. 한국의 진정한 민주주의, 높은 단계의 민주주의를 위해 문 씨의 총리 후보자 보름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기원전 90년 사마천(司馬遷)이 완성한 중국 ‘사기(史記)’는 2100년의 긴 세월에도 잊혀지기는커녕 인간과 정치와 국가흥망을 통찰하는 불멸의 지혜로 빛나고 있다. 사기 ‘초원왕(楚元王) 세가’ 등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나라가 흥하려면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는데 군자는 기용되고 소인은 쫓겨난다. 나라가 망하려면 어진 사람은 숨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난신들이 귀하신 몸이 된다.’ 나라가 흥할 조짐인가, 망할 조짐인가. 참 어두운 생각이 든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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