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뒤엔 몇이나 남아있겠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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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세상을 바꿉니다/잊지 못할 말 한마디]
어머니 치료하던 한의사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한두 마디 별 뜻 없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비수가 되어 상대방 내면에 예리하고 깊은 상처와 절망감을 안기는가 하면, 오래 고심했으나 전혀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힘든 난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도 한다. 마치 긴 가뭄 끝에 목마른 대지를 적시는 단비처럼 감로수마냥 물리적 갈증만이 아닌 마음과 정신마저 풋풋하고 싱그럽게도 한다. 자신을 이기는 이가 가장 힘센 사람이고, 돈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이가 정말 부자이며, 제일 지혜로운 사람은 지능지수가 높은 이가 아니라 자신 곁의 인물들을 스승으로 삼아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 듣는 이라는 톨스토이 우화집의 한 대목도 떠오른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삶의 마지막을 준비함을 깨닫게 되었다. 지병인 고혈압으로 10년 고생하던 아버지는 떠나시기 전 마지막 가을엔 자그마한 한옥의 재래식 지붕기와를 바꾸시는 등 집수리를 말끔히 끝내셨다. 앞서 몇 달 전 세밑에는 어머니의 무릎수종 수술까지 서둘러 받게 했다. 1975년 1월 2일 0시 30분, 하나뿐인 아들의 대학 졸업식을 1년 앞둔 채 아버지는 타계하셨다. 위장병을 달고 사시던 어머니는 이듬해 아들 대학 졸업식에 참석하셨고 아들의 직장 합격통지를 받은 뒤 임용날짜만 기다리던 중 말기 위암 판정을 받았다.

워낙 중증이기에 수술의 결과가 긍정적이지 않다는 의사의 말씀은 내겐 하늘이 무너지는 듯 절망적이었다. 이에 물에 빠져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한의학을 전공하는 후배와 함께 전국 도처의 제도권(?) 밖 명의(名醫), 기인(奇人)들을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사상의학(四象醫學)에 용하다는 한의사, 몸 안에 나쁜 묵은 기를 뽑아내는 부항기며, 내 자신 손으로 자극을 주어 질환을 치료하는 카이로 프락틱을 배우기도 했다.

한편 각종 자연요법에도 솔깃해 기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율무 미음, 양배추즙으로 시작하는 식이요법과 대체의학에도 문을 두드렸다. 자연치유력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이와 관련된 적지 않은 분들과의 조우도 이루어졌으니 이들 모두는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분이었다.

이분들 중 특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분이 있다. 그분을 처음 뵈었을 당시 원장실에 놓인 유려한 서체로 쓴 중국 시인이자 문학가인 도잠(도연명·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가리개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눈썹이 짙어서인지 강한 인상에 걸걸한 목소리의 건장한 40대 한의사로 28년이 흘렀으나 얼굴이며 말씀이 지금도 선명히 떠오른다. 그분이 다급하고 초조해하는 내게 던진 첫 말씀은 “지금 명동 한복판을 힘차게 걷고 있는 사람들 중 50년 뒤엔 몇이나 남아 있겠소”였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나, 당시 뇌성벽력인 양 사자후(獅子吼)로 내게 다가온 것이다. 조금 빠르고 차이가 있을 뿐 모두는 떠난다는 평범하나 분명한 사실을,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함은 놀람이며 신비이고, 초라한 주연과 빛나는 조연이 있듯 시간의 의미와 가치는 물리적 수치와는 별개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단명한 유전인자 때문인지 외가 분들은 모두 일찍 타계했다. 마흔을 채우지 못한 혈육들의 죽음을 지켜본 어머니에게서 불안의 그림자를 엿보곤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칠십칠 수를 누리셨다. 그리고 2001년 5월 26일 11시 40분, 외아들 내외와 대학생인 두 손주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암 판정 이후 25년을 더 사신 것이다. 꼭 그 무엇 때문이라 단정하긴 힘드나 아직은 하나뿐인 자식에 대해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강한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의사#어머니#죽음#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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