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평창 개막식이 걱정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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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의 장관과 대비되는 한국의 빈약한 소재
역사 보여주는 것이 올림픽 퍼포먼스의 대세
‘한강의 기적’ 다루면 세계인 공감 얻겠지만 역사 갈등으로 실현될지 의문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큰일이다 싶었다. 소치 올림픽 개막식을 보면서 4년 뒤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소치는 훌륭했다. 거대한 스타디움을 무대로 러시아의 역사와 전통, 문화예술을 감동적으로 보여줬다. 행사 도중 올림픽을 상징하는 5개의 동그라미에서 한 개를 제대로 펴지 못한 실수를 잊어도 될 만큼 장관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더 잘할 수 있을까 회의가 들었다. 평창 개막식에 대한 우려는 소치 폐막식을 보면서 더 분명해졌다.

소치 폐막식은 러시아 문화예술의 집합체였다. 샤갈의 그림이 하늘을 수놓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선율이 장내를 가득 메웠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 러시아 문호 12명을 등장시킨 뒤 그들이 쓴 수많은 책 페이지들을 눈처럼 공중에 흩날리게 했다. 화려했고 흥미로웠으며 장엄했다. 차이콥스키의 피아노협주곡에 맞춰 터져 나온 불꽃놀이의 피날레는 탄성을 자아냈다.

반면 이 자리에서 한국 평창이 차기 올림픽 홍보를 위해 선보인 공연은 초라했다. 가야금과 아리랑, 조수미 이승철 나윤선을 내세웠으나 ‘맛보기 퍼포먼스’라는 점을 감안해도 역부족이었다. 이들과 함께 나온 한국식 눈사람은 이별의 아쉬움에 눈물까지 흘린 러시아의 북극곰 마스코트와 아예 비교 대상이 되지 못했다.

올림픽 개막식에서 개최국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 대세가 되고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는 중국이 처음 만들어낸 제지술, 만리장성, 공자를 선보이며 인류 문명을 선도해 왔음을 과시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영국은 산업혁명을 주제로 세계의 근대화를 견인했음을 자랑했다. 소치 개막식은 30억 명의 세계인이 시청했다. 전 세계를 상대로 자신들의 역사를 알리는 것 이상으로 효과적인 홍보 전략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평창 개막식을 어떻게 꾸밀지에 대한 구상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나 소치 폐막식에서 아리랑을 선보인 점으로 미루어 우리 전통과 역사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치 폐막 이후 국내 인터넷 공간에는 비관론이 커지고 있다. 평창 개막식에 싸이 소녀시대 등 한류스타들과 아리랑 사물놀이 강강술래, 한국 음식 정도를 등장시키는 것으로는 역대 최악의 개막식이 되기 십상이라는 주장이다.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제작비를 많이 들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소치 개막식에 투입한 돈은 2년 전 런던 개막식과 비슷한 480억 원이었다. 러시아는 1000억 원을 들인 베이징 개막식의 절반 정도를 썼으면서도 훨씬 세련되고 탄탄한 내용을 선보였다. 영상 조명 무대기술 면에서는 한국도 최고 수준의 정보통신 능력을 보유한 만큼 나으면 나았지 떨어지지는 않는다. 문제는 역시 어떤 것을 개막식에 담느냐이다.

소치 개막식은 앞부분부터 러시아를 빛낸 인물들을 내세우면서 좌중을 압도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예술가 과학자 정치인들이었다. 행사 중간에도 ‘바실리 성당’ ‘전쟁과 평화’ 등 러시아 코드들을 내세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베이징 개막식은 찬란했던 중국 역사의 여기저기에서 소재를 따오면 됐다. 강대국들과 비교해 우리는 상대적 빈약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개막식에 우리 역사를 표현한다면 소재가 있기는 하다. 약소국가로서 오랜 세월 문화적 고유성과 정체성을 이어온 강인한 생명력을 다룰 만하다. 또 하나 세계인이 드라마틱하게 여기는 소재로는 20세기 후반 폐허 위에서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한강의 기적’이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현대사는 갈등의 근원지이다. 일선 고교에서 현대사 교과서를 채택하는 문제를 놓고서도 두 편으로 갈려 협박과 고성이 난무했다. 이 소재를 선택한다면 화합과 평화의 상징인 올림픽을 놓고 내부에 더 큰 대립을 초래할 수 있다.

산업혁명을 다룬 런던 개막식의 동영상을 다시 틀어봤다. 산업혁명은 인류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킨 공로가 있는 반면, 노동 문제를 야기한 양면성을 지닌다. 우리 현대사와 흡사한 측면이 있다. 런던 개막식은 기름때로 얼룩진 근로자와 자본가를 함께 내세운다. 스타디움에 여러 개의 공장 굴뚝이 세워지고 용광로에서 나온 쇳물이 하나씩 동그라미를 이루며 하늘로 올라가 선명한 오륜 마크를 연출한다. 사람들은 함께 자부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다. 평창 개막식도 이런 광경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현대사 소재 채택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평창에 대한 우려가 쓸데없는 걱정으로 끝났으면 한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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