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남자라서 행복해, 레고가 있으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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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40대가 된 레고 키드의 생애

Mr.Who(레고 마니아 K씨)가 풋풋한 젊은날의 사랑을 레고로 표현했다. 수줍어서 동생을 시켜 연애 편지를 전하는 사춘기 소년의 모습이다. 40대인 K씨는 자신의 레고 작품을 사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는 걸 취미로 삼는다.

Mr.Who(레고 마니아 K씨)가 풋풋한 젊은날의 사랑을 레고로 표현했다. 수줍어서 동생을 시켜 연애 편지를 전하는 사춘기 소년의 모습이다. 40대인 K씨는 자신의 레고 작품을 사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는 걸 취미로 삼는다.
#1. 1982년 5월

공부를 잘하는 친구가 있었다. ‘위대현’이라는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대현이는 이름만큼이나 멋진 외모를 지녔고 성격도 좋아 친구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 다른 학교에서 전학 온 내 처지에서 대현이와 친해진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운 좋게도 난 대현이의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구룡산 야트막한 곳에 자리 잡은 이층집이었다. 서울에서도 변두리였기에 공기는 맑았고 때로는 개구리 울음소리까지 들리는 그런 동네에 있는 집 치고 정말 으리으리했다. 복층 구조, 집 내부에 니스로 칠해진 계단까지 있다니. 탄성을 그치지 못하던 나와 내 친구들은 조심스레 계단을 밝고 대현이의 방으로 들어 갔다. 그때 난 노란 얼굴의 그를 처음 만났다.

참 작았다. 먹는 과자인 줄 알았다. 씹지 못할 만큼 딱딱했고 허리를 중심으로 다리 부분이 접혔다. 다리 뒷면에는 동그란 구멍이 4개 뚫려 있었다. 귀엽다거나 멋지다는 생각은 나지 않았고 그저 신기했다. 환타, 오란씨, 베지밀 같은 병 뚜껑을 망치로 두드려 펴서 놀거나 바닥에 금을 긋고 옷이 찢어져라 몸을 부딪치던 놀이에 익숙했던 나. 장난감이라고는 크리스마스 때 과자종합세트에 들어 있는 산타클로스 인형이 전부인 줄 알았던 나는 노란 얼굴의 작은 사람이 장난감인 줄도 몰랐다. 그렇게 난 레고를 처음 만났다.

레고와의 첫 만남 이후 난 대현이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대현이네 집에 자주 놀러갔다. 갈 때마다 레고를 가지고 놀았다. 벽장 속에서 대현이가 꺼내는 레고는 정말 멋졌다. 서기 2000년이 올지 말지, 달나라로 갈 수 있을지 없을지 고민도 생각도 없던 시절 난 이미 레고 우주인들을 통해 우주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아픔은 그때 시작됐다. 난 레고를 가질 수 없었기에.

나도 레고를 가지고 놀고 싶었다. 생일 잔치에 친구들을 불러 자랑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그럴 형편은 되지 않았던 거 같다. 형편이 됐다면 아마 난 지금 레고를 좋아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느 날 밤 부모님께 레고를 갖고 싶다고 애원했다. 나도 모르는데 1940년대 출생하신 부모님들이 레고를 알 리 없다. “작은 장난감 사람. 그거. 나도 갖고 싶어. 시험 잘 볼게요. 사주세요 네?” 어느 날 밤 퇴근을 한 아버지가 나에게 선물 포장을 들어 보이며 “네가 좋아하는 장난감 여기 있다!” 하셨다. 흥분한 나는 이리저리 뛰며 조심스럽게 포장을 풀어 보았는데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영플레이모빌이었다. 국내 완구업체에서 라이선스를 획득해 판매하던 영플레이모빌은 레고보다 3배 큰 장난감 사람이다. 아버지는 그게 레고인 줄 아셨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레고가 비싸서 영플레이모빌을 택하셨을지 모른다.

#2. 1999년 5월


국제통화기금(IMF)의 여파가 만만치 않았다. 대학 졸업을 다 늦추는 분위기였고, 취직을 통한 사회 진출은 요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그런 시대에 난 딱 걸렸다. 그런데 운 좋게 사회에 나왔다. ‘정부지원 인턴십’. 월급의 반은 나라에서 나머지 반은 회사에서 주는 그런 채용제도였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그 제도의 덕을 입었다. 참 행복했다. 첫 월급을 받던 날. 대한민국의 아주 보편적인 샐러리맨처럼 난 부모님 내의를 샀다. 그러고 완구 매장으로 발을 돌렸다. 입꼬리가 절대 내려가지 않은 채 함박웃음을 띠면서 말이다.

참 많은 시간의 간극이 있었지만 난 레고를 잊지 않았다. 내 손으로 월급을 받으면 내 노동의 대가로 받은 소중한 월급으로 레고를 사리라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켰다. 유년기와 사춘기를 흘려보내고 군대까지 다녀왔는데 잊지 못했다. 헤비메탈에도 빠져 보고 연극 한답시고 다녀도 봤지만 내 잠재의식 속 노란 얼굴은 항상 나를 붙들고 있었다.

▼ 훌륭한 수집품 레고, 너무작아 보관 어렵지만… ▼
#3. 2004년 11월


Mr.Who가 2014년을 맞아 꾸민 레고 작품.
Mr.Who가 2014년을 맞아 꾸민 레고 작품.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다. 아내는 집 안에 들여 놓을 가구를 보러 다닌다며 나에게 이런저런 상의를 해 왔다. “침대? 알아서 해”, “소파? 적절한 걸로”, “식탁? 밥만 먹으면 되지 뭐”. 별 관심없는 내 반응에 못마땅해진 아내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장식장은?”

나는 대답했다. “아, 장식장은 일단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 유리가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무엇보다 선반이 있어야 해. 그래야만 높이에 따라 조절이 가능하잖아? 그리고 앞으로 더 늘어날 것 같으니까 좀 여유있게 사자. 나무 재질이야 크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톤은 맞춰야겠지?” 내겐 그 어느 혼수보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조금씩 사 모은 레고를 어떻게 장식할지가 중요했다.

#4. 2014년 2월


지금 그 장식장에는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몇 권과 동물학자 프란스 더 발 교수의 ‘내 안의 유인원’ 같은 동물 관련 책들 그리고 ‘SNS 시대 기업위기 시스템으로 이겨라’ 같은 업무관련 책들이 촘촘히 꽂혀 있다. 그 많은 레고는 어디로 갔을까? 장식장을 벗어나 더 넓은 거실로 나왔다.

나는 왜 레고를 하는가? 첫째, 레고는 기발하다. 정말 기발하다. 기발해서 재미가 넘치고 표현 영역에 제한이 없다 보니 누구나 자신이 조립하는 행위를 통해 창작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레고를 조립하다 보면 탄성을 지르는 경우가 많다. 내가 수십 년간 레고를 해 본 결과 레고가 표현하지 못하는 건 단 하나인 것 같다. 성(性)과 관련한 것들. 아니 그것도 표현하려면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창작물은 본 적이 없다.

둘째, 레고는 수집품으로 훌륭하다. 모든 레고 제품에는 일련번호가 있는데 일련번호대로 모으는 재미도 있고, 스타워즈, 반지의 제왕, 디즈니 프린세스, 아키텍처 등 수많은 제품 라인별로 수집하는 재미도 있다. 물론 레고 수집의 백미가 ‘만 번대’라 일컫는 고가(高價)의 모듈러 제품이나 스타워즈 UCS(Ultimate Collector's Series) 제품인 것은 레고 마니아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레고를 이용해 재테크를 하는 사람도 많다. 참고로 서울 시내에도 홍익대 앞, 동작구 상도동 등지에 레고 카페(부산에도 있다)가 있는데 그 카페들의 레고 컬렉션은 정말 멋지다.

셋째, 레고도 다른 장난감들처럼 자녀와 함께 가지고 놀면서 소통하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 수 있다는 강력한 힘이 있다. 집중력을 갖기 어려운 5∼7세의 어린이들이 설명서를 보고 몰두해 조립하거나 뭔가를 만들어 가는 모습 그리고 조립 과정의 어려움을 묻고 답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쌓이는 친밀감은 다른 완구가 해내지 못하는 차별화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레고의 단점? 있다. 너무 작아서 부품이나 사람을 잘 잃어 버리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비싼 가격을 단점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레고의 가치는 가격이 아니라 창의, 소통, 재미 같은 보이지 않는 가치와 수집이라는 보이는 가치 모두를 아우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한 레고 마니아가 매우 많고, 그들에 비하면 난 아주 평범한 팬일 뿐이어서 쑥스러움을 금할 길 없다. 하지만 노란 얼굴의 작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5. 2034년 2월을 상상하다


60대 초반. 아직 왕성한 나이지만 일보다는 멋진 은퇴를 택한 나는 자그마한 레고 카페를 열었다. 30년 가까이 직접 모은 레고 제품들을 탁자와 창가에 비치해 놓는다. 카페 의자, 컵, 스푼 등 집기류는 빨강 노랑 파랑 등 레고 브릭의 원초적 색으로 꾸미고 창가와 선반은 희귀 컬렉션으로 장식한다. 카페 후기를 잘 남겨 준 손님에게는 예쁜 미니 피규어를 선물하고, 1주일에 한 번 카페 회원끼리 레고를 교환하는 미니 장터도 연다. 가능하다면 덴마크, 미국 플로리다와 캘리포니아에 있는 레고랜드로 손자 손녀와 함께 떠나 볼 예정이다.

글: Mr. Who(이번 MAN 섹션의 Mr. Who는 평범한 15년차 대기업 회사원 K 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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